오소서 임마누엘
이사야 7:14
성탄절은 하나님께서 우리 세계 인류에게 주신 가장 큰 명절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신 최대의 은혜를 받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태어나심에 대하여 성경은 오래 전부터 예언을 했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라고 했습니다.
역사 속의 모든 인간은 여자가 낳았지만 처녀가 아기를 낳은 일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처녀가 아기를 낳았다는 말은 전혀 남자와의 생리적인 관계가 없이 낳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케 하셔서 이 세상에 태어난 유일한 하나님의 표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최대의 축복된 은혜를 임마누엘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임마누엘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최대의 축복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임마누엘을 이사야 선지는 일찍이 친히 말씀으로 예언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나시기 전 735년 전 남방 유다 아하스 왕 때 아하스 왕이 북쪽 이스라엘과 수리아의 연합으로 침략의 위협을 당하고 앗수르라는 북쪽 강국과 대항하기 위해서 북방 이스라엘과 수리아들이 연합해서 함께 동맹하자고 할 때 이를 거절했습니다. 그것은 이사야 선지가 “너는 앗수르도 두려워하지 말고 북방 이스라엘과 수리아의 동맹의 위협도 느끼지 말라 분명히 너는 하나님께 표적을 구해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표적을 구하라” 할 때 아하스 왕이 ‘나는 하나님을 시험치 아니하겠다’ 하고는 표적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사야 선지가 직접 하나님께 계시를 받아서 그 표적에 대한 말씀을 합니다. “장차 그 징조로 너희에게 한 표적을 보여줄텐데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북방의 이스라엘이나 수리아나 앗수르의 침략을 막아줄 하나님의 징조는 한 시대의 북방에 대한 문제가 아니고 인류를 구원할 한 징조의 표적입니다. 이것은 전 인류 구원에 대한 선언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 말씀대로 예수님이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나게 됩니다. 요셉이라는 사람이 마리아와 정혼하고 결혼 날짜를 기다리는데 마리아가 임신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두려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떻게 이 여자가 결혼도 하기 전에 임신을 했을까’ 그러나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이렇게 부정한 여자와 결혼할 수 없다.’ 하고는 이 여자에 대한 부정한 사실을 널리 공개할 때는 여자의 생명이 위험하니까 조용히 파혼을 하려고 생각했습니다.
이 일을 곰곰이 생각할 때 하나님의 천사가 현몽합니다. ‘요셉아, 네 아내 데려오는 것을 두려워 말라 네 아내가 잉태한 것은 성령으로 된 것이다.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다’ 이렇게 꿈에 현몽합니다. 그러면서 한 말씀을 합니다.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요셉은 이 꿈의 지시를 받고 자기 아내를 데려다가 결혼을 하고 예수를 낳을 때까지 동침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이름이 ‘죄에서 구원할 자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할 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인격적 표현이 예수요, 그 이름대로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요, 또 직능상 표현한다면 임마누엘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할 수 있는 방법은 철저하게 사람의 몸을 입어야 됩니다. 사람만이 사람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우리와 함께 하러 온 것이 바로 임마누엘이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의 구체적인 표적이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임마누엘의 은혜를 받으려고 믿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사야 선지의 예언된 약속대로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렸습니다. 세월이 가고 또 가도 자기들을 구원하실 자가 오실 것을 기다렸습니다. 드디어 때가 되매 그 아들을 처녀에게서 낳게 하시고 우리를 모든 율법의 죄에서 속량하는 은혜를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임마누엘로, 구원자로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는 은혜를 베풀었던 것입니다.
당시에 예수님이 태어날 때 많은 사람들은 호화로운 궁궐과, 저택과, 편안한 침대 위에서 태어났지만 예수님은 나실 곳이 없어서 여관 집 말구유에 몸을 누이셨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그런 비천한 자리를 택했느냐? 비천한 인간과 함께 하기 위해서, 가난하고, 병들고, 불쌍하고,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 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그런 낮은 자리에 오셨던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시면서 인간고에 허덕이는 불쌍한 사람들과 함께 하십니다. 여러분이 낙심되고, 외롭고, 어려울 때마다 ‘주님이 나를 찾아오셨다, 오소서 임마누엘이여’ 이런 위로를 얻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임마누엘로 오셔서 계속 우리를 찾으십니다. 함께 할 자를 찾으십니다. 하나님이 가장 원하시는 것은 우리와 함께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홀로 있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사람을 창조하신 것은 사람과 함께 살기 위해서입니다.
에덴동산에서 함께 살기를 원했던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반역할 때 하나님께서 인간과 함께 살 수 없었습니다. 죄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친히 하나님이 인간과 함께 살려고 오시는데 먼저 죄값을 치루고 의롭게 만드셔서 우리와 함께 살기 위해서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십니다. 왜 죽느냐? 우리의 죄 값을 치루기 위해서 죽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우리를 의롭게 하시고 성령으로 오셔서 우리 안에 임마누엘로 함께 사시려고 오셨습니다. 최대의 축복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는 축복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는 은혜를 입어야 됩니다. 이 신앙고백을 임마누엘이라 말하고 그 임마누엘의 신앙을 십자가 상에서 우리에게 나타내주셨습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임마누엘의 구체적인 표적입니다. 우리와 함께 하는 표적인데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죽으러 온 것입니다. 혼자 죽는 것 아닙니다. 우리와 함께 죽으러 온 것입니다. 그래서 최대의 사랑은 함께 죽는 것입니다.
함께 죽는 사랑이 최대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함께 죽을 수가 없습니다. 남편이 죽었을 때 ‘당신 없이 어찌 사나’ 하면서 무덤 속에 함께 들어갈 것처럼 합니다. 또 자식이 죽었을 때 ‘어떻게 나 혼자 사나’ 하고는 울면서 금방 무덤 속에 함께 묻힐 것 같아도 매장시키고 집에 와서는 밥을 잘 먹습니다. 함께 안죽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함께 죽으러 왔습니다. 이 사랑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함께 죽을 사람 하나 찾으면 그 사람은 이 세상에서 최대의 사랑을 얻은 사람입니다.
그러면 십자가 상에서 죽는 것이 왜 우리와 함께 죽는 것이냐? 십자가는 내가 달려있어야 할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반역한 인간의 심판이 죽음이니까요. 내가 받을 죽음의 심판을 주님이 대신 받으십니다. 주님이 혼자 받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이미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고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너는 정녕 죽으리라’ 사형선고만 받았지 사형집행을 안했습니다. 마치 감옥에 있는 사람처럼 집행은 안했습니다. 집행이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에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죽습니다. 나 혼자 죽으면 그냥 끝나버리는데 예수님은 또 살 수 있으니까 살 때 같이 삽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내가 죽음의 사형집행을 하는 그 자리에 주님께서 함께 받으시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죽는 자리가 아닙니다. 내가 죽을 자리인데 내 사형집행을 예수님께서 함께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볼 때마다 내가 거기 죽고 있다는 사실을 내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내가 죽는 자리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살기를 원하십니다. 함께 죽어야만 함께 사니까요. 이것이 바로 임마누엘의 은혜입니다.
오래 전에 한 군인이 탈영을 하게 되었습니다. 군대 생활이 너무 힘드니까 탈영을 했다가 체포되었습니다. 그래서 20년형을 받았습니다. 20년형을 받아서 감옥에 들어갔는데 외아들이라 그 어머니가 살림을 다 팔고 교도소 가까운 쪽으로 집을 얻어서 아들 가까이 이사를 갔습니다. 가서 항상 창을 열고 그 아들 쪽을 보고 있습니다. 아들이 냉방에서 자기 때문에 그 어머니도 냉방에서 지냅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죄인이라고 면회도 거절하고, 옛날 애인도 도망가버리고, 형제들도 다 외면하고 거들떠보지 않는데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서 20년동안 옥바라지를 했습니다. 더운 여름에는 시원에 옷을 가져다 주고 추운 겨울에는 따뜻한 옷을 가져다주고 또 어머니가 즐겨 읽던 성경도 넣어주었습니다.
20년의 세월이 흘러서 아들이 석방될 때 그 아들은 중년 남자가 되었고 어머니는 할머니가 되었습니다. 20년의 세월이 흘러 성탄절 날 석방되어 나왔습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셨다’는 것을 그 아들이 고백하면서 어머니 앞에 무릎을 꿇고 이런 시를 써서 헌시를 합니다.
내 감옥에 있을 때
어머니 나를 떠나지 않고 찾아오셨으며
내가 감옥에 누워서 외로이 있을 때
어머니 마음 내 곁에 와 있었으며
내가 추위에 떨 때
어머니의 따뜻한 손길이 나를 덮으셨고
내가 외로워 눈물 흘릴 때
어머니의 손길 내 눈물 닦아주셨네.
내가 외로이 방안에 누워있을 때
어머니 마음은 나를 둘러 감싸주셔서
이 외로움을 너머 극복했네.
그가 이 시를 헌시하면서 무릎을 꿇고 큰절을 했습니다. 어머님이 자기를 버리지 아니하고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면서 어머니도 떠납니다. 같이 계시고 싶어도 같이 있을 수 없습니다. 부부도 떠나고, 친구도 떠납니다. 그런데 끝까지 나를 떠나지 않고 여기에서부터 영원히 함께 하실 분은 우리 주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유명한 책을 썼던 성자 토마스 아켐패스가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토마스 아켐패스야, 네가 너무도 나를 사랑하고 내 뜻을 받들어 살려고 하니 내가 너의 소원을 들어주기 원하노라 네 소원을 말하라” “주님, 주님이 함께 해주시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아니다. 내가 네 소원을 들어주고 싶으니 말하라” “주님 함께 계시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더 소원이 없습니다.” “아니다. 말하라” 세 번이나 물어봐도 여전히 토마스 아켐패스는 “더 이상 소원이 없사옵니다. 주님 한 분만으로 함께 하심에 만족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네 번째 음성이 들려옵니다. “토마스 아켐패스야, 너는 세상에 아무도 부러울 것이 없는 가장 좋은 것을 가졌느니라”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부부간에 살면서도 그런 것을 봅니다. 처음에 만났을 때는 학력을 묻고, 가문을 묻고, 인물을 묻고, 건강을 묻고, 돈을 묻고 여러 가지를 물으면서 결혼을 합니다. 살아가면서는 돈 잘버는 남편이 좋고 승진하는 남편이 좋은데 나이가 들면 딱 한마디 있습니다. “여보, 당신이 오래 살아주는 것이 너무 고마워”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서로 함께 하면서도 함께 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임마누엘의 은혜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함께 사는데서 임마누엘의 은혜가 나타납니다.
제가 큰 감동을 받은 책이 있습니다.「우리는 다시 만나기 위해 태어났다」라는 책인데 눈물 없이는 못읽는 책입니다. 제가 제 아내와 함께 인도 선교현장을 답사하기 위해서 홍콩을 경유해서 갔는데 홍콩 공항에서 ‘타이타닉 호’ 얘기가 실려있는 부분을 읽다가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릅니다. 1912년 스트라우스 부인은 남편과 함께 타이타닉 호에 타고 있었습니다. 마침 배는 빙산에 부딪혀 서서히 침몰해 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배와 함께 바다 한가운데로 사장되어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가운데 어린 아이와 여자들은 구명 보트에 의해 구조를 받고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이때 남편과 헤어질 수 없어 구명 보트를 버리고 남편이 타고 있던 타이타닉 호에 올라 함께 죽음을 맞이한 부인이 있었습니다. 바로 스트라우스 부인이었습니다. 스트라우스 부인은 자신과 평생을 보냈으며, 자신의 가까운 친구였고, 자신의 진정한 동반자였으며 언제나 자신의 영혼을 위로해 준 그 남편의 손을 잡고 단호한 어조로 말했습니다. “저는 구명 보트를 타지 않을거에요. 당신과 나, 우리는 함께 행복한 시간을 많이 보냈어요. 이제 우리는 늙었고 난 당신을 떠나고 싶지 않아요. 당신이 가는 곳에 나도 가겠어요. 그 곳이 죽음의 길이라도 말이예요. 그것이 그들의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그 두 부부는 두 손을 꼭 잡고, 그렇게 갑판 위에 서 있었습니다. 충실한 아내는 남편에게 용기를 북돋워 주고, 사랑하는 남편은 아내를 보호하면서 침몰하는 타이타닉 호에 서 있었습니다.
내가 만약에 이런 상황에 처했을 때 내 아내가 침몰선에 탄다면 어떻게 할까 생각해봤습니다. “여보, 미안해 나는 한신교회 목사라 설교해야 되니까 살아야 돼 그러니까 당신 먼저 가 있어 내가 곧 뒤따라 갈께” 그럴 것인가 아니면 침몰선에 들어가서 “여보, 당신과 내가 수십년 험악한 인생길을 걸어 살아왔는데 내가 혼자 살아 뭐하겠나 같이 가야지” 할 것인가 갈등 속에서 왔다갔다 했습니다. 그런데 결론은 나도 침몰선에 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성령께서 제 마음에 큰 감동을 하셨습니다. “종아, 네가 별세의 은혜를 받았구나! 나의 죽음과 부활을 네가 이제사 알 것이다. 이것이 임마누엘의 은혜다. 예수와 함께 죽은 자만이 예수와 함께 살 수 있느니라”
인생은 냉정히 생각하면 내가 죽은 만큼 살 수 있습니다. 자기를 죽이지 않고는 가족도 함께 못삽니다. 내가 죽지 않고는 회사에서 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죽어야 삽니다. 예수와 함께 살아서 그 영광 그 행복 그 은혜가 넘치는 것이 임마누엘의 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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