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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은 알겠는데, 그 적용이 헷갈린다 왕하15:13~26

by 【고동엽】 2021. 12. 11.

말씀은 알겠는데, 그 적용이 헷갈린다 왕하15:13~26 09.12.06.설교녹취

 

박영선 목사님의 다소 철학적인 설교를, 제가 이해되는 만큼만, 정리해 보았습니다.

 

 

◑문제 제기 : 진리는 알겠는데, 적용에서 헷갈린다.

 

▲하나님의 인과법칙

열왕기하13~15장은 약 1백년간 11명의 왕과 그 사적을 간략히 설명하고 있다.

그 왕들에 대한 대표적인 평가는 다음과 같다.

 

(그 왕들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로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에서 평생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왕하15:18

 

본문의 이스라엘의 여러 왕들은, 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고

그 계명에 불순종했기 때문에.. 그래서 그들의 날이 형통하지 못했다는 것이.. 성경의 평가다.

이것은 하나님의 인과법칙에 의한 평가이다.

 

▲하나님의 은혜법칙

그러나 열왕기서는 특별한 것이, (또한 다른 성경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 늘 인과법칙만 사용하지 않으신다.. 는데 문제가 있다.

 

여호아하스 왕의 시대에 아람 왕 하사엘이 항상 이스라엘을 학대하였으나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더불어 세우신 언약 때문에

이스라엘에게 은혜를 베풀며,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돌보사 멸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시고

이 때까지 자기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셨더라. 왕하13:22~23

 

하나님은 인과법칙으로만 다스리지 않으시고, 은혜법칙도 함께 사용하신다.↖

이 은혜법칙은 (아담, 노아는 물론이고) 족장시대부터 두드러지게 나타나 내려온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주신

‘너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는 것이.. 은혜의 법칙이다.

하나님은 이 은혜의 약속(법칙)에 신실하셨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범죄해서 곤경에 처하게 되었을 때

인과법칙에 의해서, 그들을 완전히 멸절시키지 않으시고,

은혜법칙에 의해서,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들을 구해 주셨다.

 

▲이런 가운데 나에게 어려움이 생기는데,

위에서 읽은 열왕기하의 두 구절도, 두 법칙이 둘 다 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

전자의 왕하15:18절이 인과법칙이라면

후자의 왕하13:22~23절이 은혜법칙이다.

 

하나님이 어느 때 인과법칙을 적용하시며, 어느 때 은혜법칙을 적용하시는가?

내가 그것을 정확히 모르니까.. 당황하게 된다.

 

우리가 사는 신앙생활의 현실 속에서

내 생각에는.. 하나님이 은혜로 봐 주시고 넘어가실 것 같은데.. 인과법칙(율법)이 적용될 수 있고

내 생각에는.. 인과법칙으로 엄하게 다루셔야 할 사안에 대해.. 은혜법칙이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①예를 들면, 왕하13:1~5절에 보면,

하나님은 악한 왕 여호아하스에게.. 인과법칙만 사용하지 않으셨다.

그는 처음에는 인과법칙을 적용하셔서, 아람의 침입을 받아서 고생하게 했으나 13:3

돌연 하나님이 은혜법칙을 적용하시는 바람에, 아람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3:4~5

 

②반대로, 처음에 은혜법칙을 적용받다가, 인과법칙으로 돌아서게 된 경우도 있다.

유다왕 아사랴(웃시야)는, 아주 훌륭한 왕으로 평가된다. 왕하15:1~3

그러나 그는 말년에 여호와께서 치셔서 문둥병자가 되었다.(인과법칙 적용) 왕하15:5 註1)

 

정리하면.. 악한 왕에게 꼭 인과법칙의 적용이 아니라,

그 범죄함 가운데도 은혜법칙이 적용되는가 하면 (위① 여호아하스)

 

괜찮은 왕에게 꼭 은혜법칙이 아니라, 인과법칙도 적용되니까 (위② 웃시야)

 

이런 표현을 쓰면 안 되지만, 어느 장단에 내가 맞추어야 하는지.. 난감한 것이다.

 

▲<성경>은 알겠는데 <현실>의 적용이 어렵다.

인과법칙(율법)과 은혜법칙(은혜)의 양면성 말고도,

성경에서 말하는 여러 진리들은, 대부분 양면성을 갖고 있다.

 

일례로, 지금 내가 열심히 일하고 노력해야 할 때인지,

아니면 지금 내가 쉬면서 주께서 친히 일하심을 기대해야 할 때인지.. 헷갈린다.

 

위에서 말했듯이, 인과법칙(율법)과 은혜법칙이란 진리가 있다는 것은 알겠는데,

그것이 현실의 삶에서 내가 구체적으로 적용하는 과정에서

상반되는 두 구절 가운데,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지.. 갈등하게 된다.

 

그래서 많은 신자들이

성경 말씀을 진리로 믿으면서도

현실에서 말씀을 적용하는 과정에서,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당황해 한다.

‘이 상황에서는 도대체 어떤 말씀을 적용해야 되는 건지...’ 모호해 한다.

 

보통은 아전인수 격으로, 자기에게 유리한 말씀만 뽑아서 무조건 적용하는 바람에,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를 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일반적인 대답

 

▲1. 가장 일반적인 대답은 이것이다.

- 결국의 해답을 보면, 중간 과정(현실)이 다 이해될 터이니,

지금 중간 과정(현실)에서 이해가 안 되더라도.. 좀 참고 기다리면.. 결국에는 다 이해 된다!

 

‘하나님은 결국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니까

현실에서 네 머리로 이해가 되지 않아 모호한 상황을.. 좀 참으라.

현실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내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끝까지 인내하라’는 것이다.

 

오늘 성경 본문에도 보면, 하나님은 일일이 심판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여로보암의 길로 가는 자들은 하나님이 반드시/결국에 심판하셨다’는 것이다.

여러 왕들의 행적을 설명하면서, 그 공과를 일일이 세밀하게 다 기록하지는 않았지만,

결국에 하나님은 선악간에 심판하셨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의 질문은 여전히 남는다.

내가 보기에 선한 사람 같은데, 하나님께 악하게 판단 받을 수도 있고,

내가 보기에 악한 사람 같은데, 하나님께 선하게 판단 받을 수도 있으니까,

하나님은 어떤 ‘일관성’이 결여된 것처럼 여겨진다. case by case로 이랬다/저랬다 하시는 것처럼 보인다.

 

결국에 내가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을 종잡을 수 없는 것이다.

한 없이 엄정하시기도 하면서, 동시에 인자와 자비가 한이 없으시다.

 

그래서 내가 삶을 사는 동안에,

어느 기준에다 표준을 맞추어 살아야 할지.. 종잡을 수 없다.

 

▲2. 가장 손쉬운 대답이면서 정답은.. ‘성령의 인도를 받으라’ 이다.

성령의 인도는, 어제와 오늘이 다를 수도 있다.

그러니까 매 순간, 매 시간,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누가 이걸 몰라서, 지금 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아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으려고 하는 과정에서,

현 상황에서 ‘은혜’를 적용해야 할지, ‘율법적 공의’를 적용해야 할지 헷갈린다.

현 상황에서 ‘진군’해야 할지, ‘멈추어 기다려야 할지’ .. 그게 명확하지 않은 것이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고 해서,

성령님이 명확하게 꿈이나 실제음성으로 딱 지시해 주시는 경우는 아주 희박하다.

성령인도를 받으려 하는데도.. 내 삶은 대단히 모호하다는 것이다.

 

▲3. 하나님은 인간의 질문에 일일이 다 대답하지 않으신다... 이런 대답도 있다.

하나님이 인간의 세세한 결정의 과정에서

어떻게 일일이 응답하실 수 있느냐는 것이다.

사안에 따라서.. 하나님이 침묵하시고, 일일이 대답하지 않으실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신자들의 삶을 방관하시는가?

방치하시고, ‘나 몰라라’ 하시는 분이신가?

 

위에서 말한 3가지 대답이.. 모두 일면 대답이 되면서도

또 일면 대답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설교자의 대답..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살아라!

 

(설교 맥을 잡기 위해서 ‘서두에 제기한 질문’을 재차 설명하면)

진리는 내가 알겠는데, 문제는 하나님의 일관성의 문제이다.

일례로, 은혜로우시며 동시에 추상적으로 심판하시는 하나님!

이 두 가지 상반된 진리를, 내 삶에 어떻게 적용시킬 것인가? ... 하는 문제이다.

 

 

▲문제 해결이 아니라.. 문제를 안고 가시라

A말씀을 적용할 것인가/ B말씀을 적용할 것인가? ... 갈등하는 것은

내가 (마치 전능자처럼) 그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전제에서 생기는 갈등이다.

 

그런데 설교자는, 그 문제의 해결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그 문제를 안고 가는 것이 뜻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니까 A냐/B냐 하는 선택적 갈등이, 근원적으로 필요 없게 되는 것이다.

 

그 문제를 안고 가야 하는 이유는.. 그래야 내가 신앙적으로 성숙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성숙하라고.. 하나님은 나에게 문제를 주신 것인데.. 문제를 산뜻하게 해결하려고만 하지 마시라..

 

▲인간의 한계 속에서 사신 인간 예수님

예수님이 성육신 하신 목적 중 하나는..

우리에게 ‘인간의 모델’을 몸소 보여주셨는데,

그 중 한 가지는, 철저히 자기 한계를 인정하며 사는 인간이었다. * 루카도/ 나를 그냥 ‘예수’라고 불러 다오

 

예수님의 공생애를 가만히 보면,

얼마든지 기적으로 모든 문제를 손쉽게 해결하실 수 있으심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인간으로서, ‘인간의 한계 속에서’ 일하셨다.

이것이 우리 인간에게 보이신 본이었다. ‘너희도 인간의 한계를 감수하며 살아라!’

 

그러니까 축지법을 써서 다니지 않으시고, 그냥 터벅터벅 걸어 다니셨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1년 365일 계속 일으키지 않으셨고, 보통은 빵을 구워(밥 해서) 잡수셨다.

얼마든지 십자가에 못 안 박힐 수 있었지만, 한 인간으로서, 무기력하게 못 박히셨다.

 

▲그런데 신자들은 자꾸 ‘인간의 한계’를 무시하려 든다. 그래서 ‘기적적 해결’을 바란다.

오늘 우리가 당면한 여러 문제들은, 십인십색처럼 10사람의 문제가 제각각 다르다.

그러나 그 10사람이 공통적으로 원하는 것이 있는데,

‘하나님이 내 기도에 응답하셔서, 기적적으로 좀 속 시원하게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것이다.

 

내 입맛과 구미에 맞게,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내가 원하는 때에..

내 뜻대로 되도록.. 주님이 한 번 깨끗하게 내 뒤를 밀어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차적 관심은, <나의 신앙인격적 성장>에 있다.

종종 하나님이 내게 문제들을 주시고,

이래야 하나/저래야 하나.. 이런 선택적 갈등 앞에 두시게 하시는 것은..,

 

내가 진리와 말씀은 알겠는데,

‘이 상황에서 이 말씀을 적용해야 하나/ 저 말씀을 적용해야 하나?’ 갈등하게 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그런 선택적 갈등을 겪으면서, 고민하면서, 기도하면서, 갈등하면서..

때로는 말씀대로 한 것 같은데, 결과가 엉망이라서 좌절하기도 하면서..

그런 모든 과정들을 통해서

내 신앙인격적 성장을 원하신다.

 

나의 인간의 한계를 인정해 가면서,

‘삶이 내 뜻대로 안 되는구나’, ‘하나님이 나를 안 밀어주실 때도 있구나!’ 하면서

결국은 내 신앙인격이 더욱 성숙해 지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것을 원하신다.

그래서 나는 ‘인간의 한계를 무시하고 기적적(초월적)인 응답’을 바라지만,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내 삶에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 가운데 나는..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겸손/인내/그래도 믿음으로 신뢰하며,

내 신앙인격적 성숙을 이루어가야 하는 것이다. 그게 하나님의 원래 목적이라고 본다.

 

▲하나님은, 우리가 ‘고통을 없애고, 슬픔을 해결하고, 억울함을 풀라’고 말씀하지 않으신다.

대신에 ‘너희가 울라’고 하신다.

 

그러니까 고통/슬픔/억울함의 상황에 내가 직면했을 때,

‘내가 공의를 선택할 것인가/사랑을 선택할 것인가..’ 를 갈등하기 이전에

근원적으로 ‘네가 인간(피조물)임을 인정하라. 그래서 울라’고 요구하신다.

 

그래서 내가 한계를 가진 인간(피조물)임을 인정할 때

내 신앙인격적 성숙이 일어나는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답’이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문제를 만났을 때,

기도해서 그 문제가 초월적으로 ‘해결’ 되든지,

아니면 그 상황에 적합한 성경적 용례를 통해서 내가 완벽하게 ‘해석/이해’하려고 한다.

 

그래서 그 상황에 어떤 말씀이 적합한지.. 내가 찾아내려고 한다.

‘A구절을 적용해야 하나, B구절을 적용해야 하나?’

 

그러나 저(설교자)의 대답은

A구절이든지, B구절이든지 따지기 이전에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라’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 ‘내 신앙적 성숙을 이루어가자’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종종 원하는 해결방식은

‘내가 (절대자처럼) 원하는 방식으로 다 처리’되든지..

그것이 해결이 안 되더라도 ‘내가 (하나님처럼) 상황을 다 명확하게 이해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우리 실제 현실적 삶은 그렇게 산뜻하지 않다.

 

▲신자도 억울할 수 있고, 절망할 수 있고, 답답할 수 있다.

시편에 그런 하소연들이 잘 나타나 있다.

그 시편에 무슨 딱딱 맞아 떨어지는 해답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해결이 안 되는 문제를 놓고,

시편 저자는, 그 원통함과 비탄을.. 그저 기도로 아뢸 뿐이다.

 

한 사람이 당하는 좌절과 곤경을 통해서.. 하나님은 기적적인 해결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의 신앙인격의 성숙을 바라신다.

더 인내하고/더 겸손하고/더 이해의 폭이 넓은, 눈물의 빵을 먹어본 사람이 되도록..

 

▲자꾸 ‘문제 해결’ 쪽으로만 방향을 정해서 나가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A말씀/B말씀 중에 어느 것을 택할 것인가.. 고민하기 전에

(아예 차원이 다른 해답을 제시하자면)

그 당면한 문제를 통해서 ‘인간의 한계’를 철저히 인정하고

더 겸손해지며, 더 주님을 의지하지면서.. ‘내 신앙인격적 성숙’을 이루어가자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은,

인간의 한계를 내가 짊어지게 하심으로써, 나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신다. (후략)

 

 

註1)

역대하26:1~15에 웃시야 왕의 화려한 치적이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이사야는 웃시야 왕이 죽던 때에 나라가 염려되어 성전에 들어가 기도할 만큼(사6:1)

웃시야는 대단한 왕이었다.

 

그가 문둥병에 걸린 이유는, 제사장 직무를 월권하여, 성전에서 스스로 분향한 것이다.

그의 치적과 평생 충성한 것을 고려하면, 대하26:1~15

성전에서 분향한 잘못 정도는, ‘은혜법칙’을 적용하셔서 한 번 봐 주실 것 같은데,

우리 예상과는 달리 하나님은 이때 ‘인과법칙’을 적용하셔서.. 문둥병으로 치셨다. ▣ 말 씀

 

 

출처 : 냉수 한 그릇
글쓴이 : 김지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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