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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대에 응답하는 길(마 11:16-19) / 이수영 목사

by 【고동엽】 2021. 12. 10.

이 세대에 응답하는 길

마11:16-19

 

새문안교회 주일예배

 

설교 이수영 목사

 

오늘 본문은 한 편에는 16절에서 말하는 "이 세대"와 다른 한 편에는 예수님과 세례요한, 이 두 편 사이의 갈등관계 혹은 긴장관계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세대"는 세례요한과 예수님 당시의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이나 바리새인 같은 사람들, 즉 그 시대의 유대교를 대표하는 종교지도자층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세례요한과 예수님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마3:5-6에 따르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세례요한에게 나아오던 사람들을 포함해서 더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랐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당시의 사람들을 모두 예수님과 세례요한과의 갈등관계 혹은 긴장관계 속에 있었던 "이 세대"에 포함시키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물론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 가운데서도 세례요한과 예수님께로 나아온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이나 예수님이나 모두 그들에 대해서는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호된 질타를 가하곤 했습니다. 세례요한은 바리새인들을 보고 말하기를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마3:7-9)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비판과 질책은 세례요한이 한 것보다 훨씬 더 신랄했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화 있을진저 눈 먼 인도자여 ..."(마23:13-16)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23: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눈 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마23:25-28)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마23:29),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23:33) 그러므로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 같은 종교지도자들만을 세례요한이나 예수님과의 갈등관계 혹은 긴장관계 속에 있었던 "이 세대"에 포함시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신앙의 모습을 장터에서 노는 어린아이들을 비유로 들어 설명하셨습니다. 이 비유를 통해서 주님께서 묘사하고자 하신 것은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세례요한과 예수님 자신 그리고 이들이 선포하며 가르치며 행하는 바에 대한 그들의 인식과 태도였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한 17절의 말씀에서 "우리"가 누구냐 하는 것이 해석상 하나의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그것을 세례요한과 예수님으로 봅니다. 그럴 경우에 피리를 불거나 슬피 우는 아이들로 비유된 이는 세례요한과 예수님이고, 피리소리에 맞춰 춤도 추지 않고 따라 울지도 않은 아이들로 비유된 이들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입니다. 즉 17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자기들처럼 먹고 마시며 지내지 않고 광야에서 홀로 지내며 회개하고 죄사함의 세례를 받으라 외치는 세례요한을 외면하고 그를 미친 사람 취급하여 "귀신이 들렸다"고 말하는가 하면, 그와 반대로 보통사람들처럼 먹고 마시며 누구하고나 어울리시면서 하나님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시는 예수님께는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비난하며 그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음을 지적하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이러한 해석에 문제점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18절과 19절의 말씀들은 17절에서 언급된 두 가지 비유, 즉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는다"는 비유와 "슬피 울어도 가슴을 치지 않는다"는 비유가 각각 실제로 어떤 사실을 가리키는 것인지를 설명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먼저 언급된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는다"는 비유에서 "피리를 부는 사람"에 상응하는 사람은 18절의 세례요한이라고 하기 보다는 19절의 예수님이라고 해야 더 적절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피리를 부는 것은 혼인예식잔치에서 춤추며 포도주를 마시며 즐기기를 청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슬피 울어도 가슴을 치지 않는다"는 비유에서 "슬피 우는 자"에 상응하는 사람은 19절의 예수님이 아니라 18절의 세례요한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슬피 운다"는 것은 예수님의 행동보다는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3:4) 광야에서 회개하라고 외치는 세례요한의 행동에 더 잘 들어맞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여쭈어보았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9:14-15) 답하셨습니다. 이렇게 볼 때 앞서 말한 일반적인 해석을 받아들인다면 18절과 19절의 말씀들은 그 순서가 바뀌었어야 논리적으로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18절과 19절의 순서를 본문에 기록된 그대로 받아들이려면 앞서는 17절 말씀의 해석을 달리 해야 합니다. 어떻게 달리 할 수 있겠습니까? 먼저 말한 17절에서의 "우리"가 누구인가를 다시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앞에서 말한 일반적 해석은 "우리"를 세례요한과 예수님으로 보았고 따라서 거기서의 "너희"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로 보았지만 그것을 반대로 적용시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에 예수님께서 피리를 불거나 슬피 우는 아이들로 비유하신 것은 세례요한과 예수님 자신이 아니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고, 피리소리에 맞춰 춤도 추지 않고 따라 울지도 않은 아이들로 비유된 이들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아니라 세례요한과 예수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즉 세례요한과 예수님이 각각 그 방법이나 겉모양은 다르지만 두 사람 모두 그 당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갖고 있고 가르치고 있던 전통적 신앙과 삶의 방식을 따르기를 거부하며 이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정죄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장터의 어린아이들로 비유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렇게 17절의 말씀을 해석할 때 뒤따르는 18절과 19절의 말씀들이 자연스러워질 수 있습니다. 즉 17절에서 먼저 언급된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았다"는 비유는 18절의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였음"을 가리키는 것이고, 그 다음에 언급된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는 비유는 19절의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라고 비난했음을 빗대어 하신 말씀인 것입니다.

 

 

 

이 두 해석은 그 차이에도 불구하고 둘 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말하는 중요한 사실을 손상시키지 않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그 세대의 신앙과 관행을 거부하셨든, 그 세대가 예수님의 복음과 가르침을 배척했든, 어쨌든 예수님과 그 세대 사이에는 갈등과 긴장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은 또한 하나님의 사람들의 신앙과 이 세상사람들의 사고나 지혜 사이에도 갈등과 긴장이 있을 수밖에 없음을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갈등과 긴장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겠습니까? 즉 교회와 그리스도인에 대하여 적대적이며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부하는 이 세대에 어떻게 응답하는 길이 무엇이겠느냐는 것입니다.

 

 

 

마지막 절인 19절 끝의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하신 말씀도 해석이 분분하긴 하지만 궁극적인 이해는 대체로 일치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의인화된 지혜는 결국 참된 지혜,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자녀들의 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는 말씀의 뜻은 스스로 지혜 있다고 여긴 그 세대의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과 그들이 귀신들렸다고 하고 먹고 마시기를 탐하는 것밖에 모른다고 한 세례요한과 예수님 사이에서 누가 옳으며 하나님의 지혜가 누구 편에 있는가 하는 것은 그들이 각각 행한 일에 의해서 판단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아들과 그의 선구자를 거부하고 정죄하며 죽게 하는 것이 지혜에 속한 것인지 복음을 선포하고 죽음으로 인류를 하나님께로 이끄는 것이 지혜에 속한 것인지는 자명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아야 합니까? 우리는 세례요한과 예수님의 삶과 그 삶의 자세를 통하여 불신앙적이고 패역한 이 세대에 응답하는 지혜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온 세상이 들떠 즐기며 우리를 향하여 함께 춤추자 하여도 우리는 춤추지 않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온 세상이 슬피 울며 가슴을 칠 때에 희망과 위로와 기쁨을 잃지 않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 세상과 짝하기를 버리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길을 가야 합니다. 이 세상의 지혜에 귀기울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해야 합니다. 세상의 거부와 비난과 조롱 앞에서 약해지거나 타협하려 해서는 안됩니다.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않으며 십자가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 속에서 중심적인 인물이었으며 요한은 그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한 사람이었으나 모두 백성에 의해서 거부 당하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진정한 승리자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요한을 가리켜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마11:9)라고 하셨으며,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네 앞에 준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마11:10-11) 말씀하셨습니다. 형식적 신앙과 위선을 벗어던져야 합니다. 불의와 거짓 앞에서 눈감고 지내지 말아야 합니다. 세례요한은 헤롯이 그의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자기의 아내로 취하자 그것이 옳지 않다고 공개적으로 꾸짖었습니다. 헤롯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례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 때문에 크게 번민을 하면서도 그 말을 달갑게 들었습니다. 세례요한은 그 정도로 의롭고 거룩하며 용기있는 사람이었습니다(막6:17-20). 우리 또한 외롭더라도 의로운 길을 걸어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사랑과 용서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헐벗고 굶주리고 소외된 이웃들, 그리고 지체가 불편하거나 자유롭지 못한 모든 이들에게 특별한 관심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해야 합니다. 이것이 냉소적이고 반항적인 이 세대를 이기는 그리스도인의 힘입니다. 이것이 오늘 이 세대에 응답하는 우리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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