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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때가 차매... 행7:17~22 2006.12.17. 이재철 목사 설교녹취
◑1.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성취된다
▲아브라함이 ‘약속’을 철저히 믿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하란에서 불러내서 가나안으로 인도하셨다.
하지만 가나안에서 그에게 발붙일만한 단 한 평의 땅도 주시지 않았다.
그 대신 아브라함에게 ‘미래의 약속’을 주셨다.
아브라함아, 너는 큰 민족을 이루게 될 것이고
그 민족이 이집트에서 4백 년 동안 종살이하게 될 것이다
그 후에야 가나안을 유업으로 이어받는 민족이 될 것이다. 창15:13~16, 행7:6~7
당시에 아브라함이 처해 있던 자기 현실을 볼 때, 그 약속은 믿을 수 없었다.
나이 75세였던 그에게는, 큰 민족의 토대가 될 만한 후손이 단 1명도 없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굳게 믿었다.
지금은 비록 자식이 한 명도 없다 할지라도
자신의 몸을 통해서 반드시 자식이 태어날 것이요,
그 자식이 큰 민족을 이루고, 이집트에서 노예살이를 거쳐서
가나안 땅의 주인이 될 것임을 그는 철저하게 믿었다.
▲아브라함 가문이 ‘그 약속’을 철저히 믿은 증거
①아브라함은 막벨라 굴을 소유 매장지로 구입했다
그래서 아내 사라가 죽자, 그녀의 무덤으로 쓰기 위해서
헷 족속 소유의 막벨라 굴을 구입했다.
아브라함은 그 땅을 거저 가지라는 주인의 호의에도 불구하고
고집을 세워서 값을 지불하고, 그 땅을 합법적으로 소유했다.
그 이유는, 4백년의 긴 세월 후에 이집트에서 살아갈 자기 후손들에게
그들이 삶의 궁극적 목적지로 삼아야 할 땅은 이집트가 아니라,
가나안이라는 사실을, 그 곳이 약속의 땅임을 일깨워주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자기 아내 사라를 먼저 그 곳에 장사지내고,
자신도 바로 그 굴에 장사되었다.
②2대 이삭 부부도 막벨라 굴에 장사되다.
아버지의 그 뜻(하나님의 약속)을 잘 알고 있던 아들 이삭 부부도
죽은 뒤에 바로 그 막벨라 굴에 장사되었다.
이삭이 나이 많고 늙어 기운이 진하매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니... 창35:29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갔다’는 뜻은 ‘조상의 뼈무덤에 같이 묻혔다’는 뜻이다.
즉 조상의 뼈가 있는 그 동굴무덤에 자기도 거기 합쳐졌다는 뜻이다.
이삭도 막벨라 굴에 장사됨으로써
아버지가 세운 이정표의 의미를 후손들에게 재확인시켜 주었다.
③3대 야곱
야곱은 애굽 총리 요셉의 초청을 받아서 애굽으로 내려가서 거기서 죽는다.
그러나 야곱도 그 막벨라 굴속에 장사된다. 창50:13
야곱 역시 자기 자신의 장례를 통해,
지금 비록 히브리 족속들이 이집트에 살고 있지만
결국은 가나안으로 가서 살아야 할 것이라는 이정표를 세워주게 된다.
그래서 자신의 유해를 가나안 막벨라 굴에 장례 치러 줄 것을 유언한다. 49:29
④4대 요셉
요셉은 죽은 후에 일단 이집트에 묻혔다.
그러나 후손들이 언젠가 출애굽 할 때
반드시 자기 유골을 매고 가라는 유언을 남겼다. 창50:26
실제로 모세는 출애굽 할 때 요셉의 유골을 가지고 나왔다. 출13:19
이렇게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이, 몸은 비록 애굽에 살았으나
자기 매장지를 가나안 헷족속의 땅 막벨라 굴을 고집한 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은 약속’ 곧 가나안을 아브라함 족속에게 주시겠다는
그 약속을 절대 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실제로 ‘그 약속’은 망각되지 않고 대대손손 이어졌다.
▲하나님의 약속은 정말 성취되었다.
야곱이 자신의 가족을 이끌고 이집트로 이민 갈 때는 고작 70명 정도였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그들이 수 백 만이 넘는 큰 민족을 이루게 되었다.
자식 한 명 없는 아브라함에게 ‘네 후손이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는 말씀이
세월이 지나서... 어김없이 이루어진 것이다.
◑2. 하나님의 약속은 ‘때가 차매’ 성취된다.
▲1. 4백년이 차매 출애굽 성취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가까우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번성하여 많아졌더니 행7:17
여기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때’란 구체적으로 언제인가?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4백년간 종살이 할 것을 정하신 때다.
그 노예생활 4백년이 끝나가는 시점을 뜻한다.
이스라엘 백성을 노예살이에서 구원하신 분도 하나님이시지만,
그들이 4백 년 동안 노예살이를 하도록 허락하신분도 하나님이셨다.
둘 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교훈을 접하게 된다.
이 세상에서 정상적인 사람치고 자발적으로 노예생활을 선택하지 않는다.
노예생활이란 눈물과 고통, 그리고 괴롬의 총체적 집합이다.
그저 노예에게 꿈이 있다면, 단 1초라도 빨리 노예생활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더욱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처음부터 노예였던 민족이 아니었다.
이집트에서 그들의 삶은 총리의 집안으로서 풍요롭게 출발했었다.
하지만 세월이 경과하면서 그들의 숫자가 창대해지자
이에 위협을 느낀 이집트 파라오는 그들을 노예로 삼아버렸다.
이렇게 하루아침에 노예로 전락되었으니,
이스라엘 백성들의 절망과 고통이 얼마나 컸겠는가!
그들의 고통과 절망이 큰 만큼, 그 밑바닥에서 얼마나 처절하게 하나님께
부르짖었을까? 쉽게 짐작할 수 있다.
△4백년 기간은 변경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런 절규에도 아랑곳없이
그들이 원하던 출애굽이 당장 실현되지는 않았다.
그들이 매일 철야기도한다고 해서, 당장 노예살이에서 해방되지 않았다.
그들이 모두 재를 뒤집어쓰고 금식기도를 한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았다.
그들이 아무리 몸부림쳐서 부르짖는다 하더라도
4백년이 차기까지 그들은 이집트의 노예의 삶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 기간을 작정하신 분은 하나님이셨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결정하신 기한은,
어떤 경우에도 인간에 의해 변경되거나 조정되지 않는다.
인간이 갈망한다고 해서 그 기한이 앞당겨지는 것도 아니요
인간이 온 힘을 다해 막아 나선다고 해서 닥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때가 가까워졌을 때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그들을 노예생활에서 구해 내시고 가나안으로 인도하셨다.
▲2. 40년이 차매 지도자로
모세는, 동족이 노예생활로 고통당할 때, 왕궁에서 왕자로서 편하게 살았다.
그런데 그의 나이 40세에, 한 이집트 병사를 살인한 사건과 관련해서
그는 이집트를 떠나 미디안 광야에서 지내게 된다.
그 황량한 광야에서 보잘것없는 양치기로 사는 ‘제2의 인생’이 시작되었다.
당시 세계 최고의 이집트 왕자의 신분에서 하루아침에 미디안 광야의
양치기로 추락했으니, 그의 삶이 얼마나 고달팠겠는가!
모세 역시 그 고달픈 삶으로부터 빨리 벗어나고 싶지 않았겠는가!
▲시간이 차야 된다
하나님께서 미디안 광야의 비천한 양치기에 불과한 모세를
위대한 신앙지도자로 부르신다. 행7:30~34
모세는 당시 80세였다. 왜 하필 80세 되던 그 해였을까?
스데반은 그 까닭을 ‘40년이 차매...’로 답해 주고 있다. 행7:30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가까우매... 행7:17과 병행)
그 기간을 정하신 분도 하나님이셨던 것이다.
모세로 하여금 미디안에서 양치기로 40년을 살도록 결정하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작정하신 40년이 차매 모세를 불러 주셨다.
우리는 여기서 위의 4백년이 찬 것과 똑같은 메시지를 본다.
아무리 모세가 외치며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한들
하나님이 작정하신 때가 차기 전까지는
모세는 광야의 양치기의 삶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만약 모세가 광야에서 도망갔다면...
모세는 얼마든지 자기 힘으로 광야생활을 벗어날 수 있었다.
만약 모세가 자기 임의대로 그 광야를 벗어났다고(포기) 가정한다면,
모세는 출애굽의 대 지도자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3천5백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가 그를 기억할 이유가 없다.
그는 3천5백 년 전에 광야의 먼지로 사라졌을 것이다.
▲40년을 못 박으신 하나님의 섭리
80세에 부르심을 받았던 모세는
그 후에 이집트, 홍해, 광야에서 수많은 기적을 행하며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는 위대한 ‘제3의 인생’을 살게 된다.
이렇게 모세가 화려한 ‘제3의 인생’을 살 수 있었던 것은
40년간의 광야 양치기로서의 ‘제2의 인생’에서 훈련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왜 ‘제2의 인생’의 길이가 40년일까?
20년, 30년, 혹은 60년이 아니고 왜 40년이었는가?
모세보다 모세를 더 잘 아시는 하나님은
모세의 영적 수준에서 출발해서, 출애굽의 대지도자로 준비되는 데는
40년이란 훈련기간이 필요함을 알고 계셨다.
▲이스라엘 백성도 4백년이 차매 출애굽 시켜서 가나안으로 인도해 주셨다.
이스라엘보다 이스라엘을 잘 아시는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받는 선민이 되는데
4백년의 훈련(준비)기간이 필요하셨음을 알고 계셨다.
이스라엘은 오랜 기간 노예생활의 밑바닥 생활을 체험함으로써
강인한 민족으로 연단되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은 그 후 3천5백년이 지난 지금까지
세계에서 가장 강한 민족성과 애국심을 지닌 민족으로 평가받는다.
우리나라 경상남북도 정도의 면적만 가진 이스라엘이
그것도 아랍 나라들에 겹겹이 둘러싸인 이스라엘이
중동의 최강국으로 부상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셈이다.
▲3. 때가 차매 구세주가 탄생하시다
왜 예수님은 2천년 전이라는 시점에 이 땅에 오셨을까?
예수께서 이 땅에 강림하신 것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사건이 아니었다.
그것은 수 천 년 전부터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해 오신 하나님의 약속이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의 그 약속이 이루어진 때가 꼭 2천년 전일까?
왜 1천 년 전이 아니었을까? 왜 3천년 전이 아니었을까?
이 질문에 대해 바울은 이렇게 대답해 준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갈 4:4
그 때를 정하신 분도 하나님이셨다.
인간을 인간보다 더 잘 아시고,
인간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죄 많은 인간들에게 구세주를 계시해 보이실 가장 적합한 때가
지금부터 2천년 전 그 때임을 하나님께서는 잘 알고 계셨던 것이다.
◑3. 하나님의 약속은 ‘영원 속에서’ 성취된다.
우리는 여기서 참으로 귀중한 교훈을 얻는다.
우리가 정녕 하나님의 약속이 반드시 성취될 것이라고 믿는다면
그 약속이 성취되는 때도 역시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1. 하나님의 약속은 성취되는 때가 있다. 때가 차야 한다.
내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철저히 믿는다고 해서
그 약속이 내가 정한 시간에,
내 생전에 모두 이루어지는 것을 볼 것이라는 자기 집착에 빠져서는 안 된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믿는 부질없는 짓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기에,
그 약속이 성취되는 때마저도 하나님께 맡긴다.
▲2. 하나님의 약속은 영원 속에서 성취된다.
하나님의 약속은 결코 한시적인 약속이 아니다.
모두 영원한 약속이다.
따라서 우리 가 하나님의 영원한 약속을 믿을 때
우리가 이 땅에 살아있는 동안 그 영원한 약속이 성취될 수도 있지만
그러나 더 많은 약속들은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 천국에 갔을 때
즉 영원 속에서 성취된다는 것을... 우리는 확실히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영원한데 반해,
우리의 일생은 영원의 한 부분 밖에 되지 않는다.
이 사실을 바로 깨닫고 믿을 때 우리는 진정한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다.
△대를 이어가며 성취된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되,
그 약속이 영원한 약속인 것을 믿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죽음과 무덤마저도
그 영원한 약속을 위한 이정표로 세웠고,
그 결과로 그들이 믿었던 그 약속은
영원 속에서 그들의 후손들의 삶 속에서 대를 이어가며 성취되었다.
하나님의 영원한 약속을 믿을 때만
오늘날 우리가 심어야할 씨가 무엇인지 분별하고 실행할 수 있다.
영원 속에서 우리의 후손들이
오늘 우리가 믿은 그 약속의 열매를 거두게 될 것이다.
▲3. 하나님이 가장 좋은 때를 아신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약속은 영원한 약속이다.
그 약속이 성취되는 때를 결정하는 분은 하나님 한 분 이시다.
만사가 이루어질 때가 오직 그 분에게 속해 있다.
하나님이 작정하신 때가 우리에게 가장 좋은 때이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절대 조급하지 말자.
▲마치는 말, 적용
그렇다면 여기서 믿음이란 무엇인가?
믿음이란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영원한 것임을 믿는 것이다.
지혜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때를 결정하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심을
아는 것이다.
성숙은 무엇인가?
내가 맞는 매일 하루하루가 영원의 한 부분임을 깨닫는 것이다.
신실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영원한 약속을 믿는 자답게
내가 오늘 뿌려야할 씨앗을 최선을 다해서 뿌리는 것이다.
무엇이 믿는 자의 분별력이겠는가?
내가 나를 아는 것 보다 하나님이 나를 더 잘 알고 계신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누가 행복한 그리스도인인가?
하나님의 약속이 내가 정한 때에 이루어지리라는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가 믿음의 조상이 되는 것은, 그가 믿은 모든 하나님의 약속이
그의 후손들의 삶 속에서 대를 이어가며 결국 결실되어 갈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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