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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덴으로 배타고 가는 바울의 들뜬 심정
베뢰아의 형제들은, 바울을 베뢰아에서 아덴으로 떠나보내기로 했습니다.
베뢰아에서 아덴까지는, 뱃길로 320Km, 당시 선박으로는 대략 나흘 길이었습니다.
그 아덴으로 향하는 나흘 동안, 바울은 배 안에서 무슨 생각들을 했을까요?
추측컨대 아마 이런 것일 수 있습니다.
바울은, 태어나서부터 헬라어로 고등교육을 받았기에, 헬라문화에 익숙한 사람이었습니다.
또 헬라 문학과 철학에도 밝은 사람이었습니다.
아덴에 도착한 바울은, 그곳에 있는 철학자들과 논쟁을 벌일 정도로,
철학에도 지식이 깊었습니다.
바울은 헬라어로 신약성경 1/4 이상을 홀로 기록했습니다.
그 모든 내용의 문장들은, 바울이 얼마나 문학적으로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었던 사람인지를
여실히 입증해주고 있습니다.
바로 그런 바울이 배를 타고, 아덴으로 향해 가고 있습니다.
바울의 가슴이 설레었을 것임이 분명합니다.
헬라어 원문에, ‘아데나이’ 라고 기록된 본문의 아덴은, 오늘날의 아테네입니다.
'아테네'라는 도시 이름은, 헬라 신화 속 전쟁의 여신인 ‘아테나’ 여신에서 유래된 이름입니다.
‘전쟁의 여신, 아테나를 수호신으로 삼은 도시’라는 의미입니다.
2천년 전 바울이, 아덴을 방문했을 때, 아덴 역시 로마 제국의 지배하에 있었습니다.
아덴이 스파르타와 함께, 그리스의 맹주 역할을 하던 시절의 영광은 이미 지나간 뒤였습니다.
그러나 아덴은, 위대한 철학자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본거지였습니다.
그리고 위대한 역사의 아버지로 알려져 있는 ‘페르시아 전쟁사’의 저자 헤로도투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기록한 투퀴디데스의 배출지이기도 합니다.
또 아테네는, 연극의 발생지답게, 3대 비극시인,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그리고 희극시인 아리스토파네스의 활동무대이기도 했습니다.
또 그 유명한 파르테논 신전을 건축한, 익티노스,
그리고 파르테논 신전과 제우스 신전을 조각했던 페이디아스의 고향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의 예술과 작품과 사상은, 수 세기가 지난 바울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지대한 영향력을 미쳤습니다.
아덴이 로마제국에 정복당해서, 정치적인 영향력은 상실했지만,
그러나 철학, 문화, 역사, 예술적 명성은,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2천년 전, 로마제국에서 지성인들 사이에서, 아덴은,
평생 한 번쯤 가보기를 동경하던 도시였습니다.
실제로 2천년 전, 로마 제국 내에서, 내로라는 사람들치고
아덴을 방문한 뒤에, 길든 짧든 아덴에 대한 글을 남기지 않은 사람이 드물 정도였습니다.
그 아덴을 향해서, 태어나면서부터 헬라어로 고등교육을 받은 바울이
지금 배를 타고 가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실라와 디모데를 기다리는 중에, 아덴을 둘러보다가 격분하다.
바울이 마침내 아덴에 도착했습니다.
아덴에 도착한 바울의 눈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높은 아크로폴리스에 우뚝 세워져 있는 아테나 여신을 위한 파르테논 신전이었을 것입니다.
1458년에, 아테네를 정복했던 오스만투르크(터키)는,
파르테논 신전 내부 일부를 화약저장고로 사용했습니다.
1687년 오스만투르크와 베네치아 사이의 전투 중에
베네치아 군의 폭격으로, 파르테논 신전 내부의 화약고가 폭발하면서
신전 내부가 파괴되고, 지붕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 이후, 지진으로 심하게 훼손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파르테논 신전은, 기둥과 그 위의 들보만 남아있습니다.
하지만 직경 1.9 미터, 높이 10.4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46개의 돌기둥과
그 위에 남아 있는 들보의 일부만으로도, 보는 사람들은 압도당하고 맙니다.
(지금 무너진 건물의 모습도 웅장한데)
2천년 전에, 파르테논 신전이 완전한 모습을 갖추고 있었을 때,
그 위용이 얼마나 웅대했을런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 아덴에 도착한 바울은,
자신을 아덴까지 데려다주고, 베뢰아로 되돌아가는 베뢰아의 믿음의 형제들에게,
베뢰아로 돌아가면, 아직 베뢰아에 머물고 있는 실라와 디모데를
아덴으로 속히 돌아오게 해 달라고 부탁한 뒤에, 그들과 작별했습니다.
행17:16 “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실라와 디모데)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
베뢰아에서 아테네까지는 선박으로 나흘 길입니다.
바울을 아덴에 데려다 준 베뢰아로 되돌아가기 위해서는 또 나흘,
그리고 그들로부터 아덴으로 속히 오라는 전갈을 전해 받은 실라와 디모데가,
아덴의 바울에게 이르기까지는 또다시 나흘을 필요로 했습니다.
아덴에 먼저 도착한 바울이, 아덴에서 실라와 디모데를 다시 만나기 위해서는
최소한 8일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아덴에서 실라와 디모데를 기다리면서
소문으로만 들었던 아덴을 직접 둘러보았을 것입니다.
아크로폴리스, 아덴에서 가장 높은 언덕 광장인 아크로폴리스 위에는
아테나 여신을 위한 파르테논 신전만 있지 않고요,
프로필라이아 신전, 아테나 니케 신전, 아테나 여신의 야외 조각상,
아테나 제단, 에렉테이온 신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크로폴리스 남쪽 기슭에는, 아테네가 연극의 발상지임을 증명하듯이
수용인원 1만7천명의 디오니소스 극장이 위용을 뽐내고 있었습니다.
아크로폴리스 아래쪽으로는, 동남쪽에 제우스 신전이 있었습니다.
제우스 신전은, 기둥만 무려 104개로 이루어진, 그리스에서 가장 큰 신전이었습니다.
그 신전은, 기원전 6세기 경에, 아테네의 독재자 헤이시스라토스에 의해 기공되었다가,
약 6백년이 지난, 2세기 초 로마제국 하드리아누스 황제에 의해 완공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 속에서 바울이 아테네를 방문했을 때는,
104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져있는 제우스 신전의 완전한 골격 형태는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 이외에도 아테네는 크고 작은 신전들이 여러 개 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아고라’는 말할 것도 없고, 가는 곳마다 신상들과 제단들이 즐비했습니다.
신전들, 신상들, 제단들, 그 웅대하고 아름다운 건축물들이 가득 차 있는 아덴속에서
고작 빈민 목수 출신 나사렛 예수를, 자기 구주로 삼고 있는 바울이
스스로 위축될 수도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그 반대였습니다.
철학, 문학, 예술, 문화, 역사의 도시인줄 알았던 아덴(아테네)가
그 어느 도시보다 더 심한 우상의 도시임을 확인하고, 바울은 마음에 격분했습니다.
▶‘격분하다’
우리 말 ‘격분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파록시노’는 신약성경에 본문과, 고전13:5절에
이렇게 단 두 곳에서만 사용된 단어입니다.
고전13:5에서 ‘사랑은 성내지 않는다’고 말씀하면서
파록시노 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그때의 파록시노는 ‘발작적인 분노’입니다.
본문 속에서 바울이 아덴이 그 어떤 도시보다
더 심한 우상의도시임을 확인하고, 파록시노 했다는 것은,
본문의 표현대로 격분, 즉 격렬하게 분노한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성경에는, ‘바울이 마음에 격분했다’고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헬라어에는, ‘바울의 속에서, 바울의 영이 격분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his spirit was stirred in him.
즉 분노의 주체가, 바울의 영이었습니다.
바울의 격분은, 인간적이거나 육체적인 격분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격분은, 영적인 격분이었습니다.
바울의 영은, 그저 타락한 인간의 영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의 영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거듭난 영이었습니다.
바꾸어 말씀드리면, 자신과 함께 하고 계시는 성령님 안에서
성령님과 소통하는 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영이 격분했다’는 것은,
바울과 함께 하고 계시는, 성령님으로 인한 격분이었음을 의미합니다.
▶70인역 속에 나타난 ‘파록시노’
70인역 안에, 파록시노 라는 단어가 수차례 등장합니다.
·
시106:28. 그들이 또 브올의 바알과 연합하여 죽은 자에게 제사한 음식을 먹어서
29. 그 행위로 주를 격노하게 함으로써 재앙이 그들 중에 크게 유행하였도다
여기서 ‘격노’라는 단어가, 70인역에서 ‘파록시노’로 쓰였습니다.
신9:17~18 내가 그 두 돌판을 내 두 손으로 들어 던져 너희의 목전에서 깨뜨렸노라.
18. 그리고 내가 전과 같이 40주야를 여호와 앞에 엎드려서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너희가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그를 격노하게 하여 크게 죄를 지었음이라
여기서 ‘격노’라는 단어도, 70인역에서 ‘파록시노’로 쓰였습니다.
호8:5 사마리아여 네 송아지는 버려졌느니라. 내 진노가 무리를 향하여 타오르나니
이스라엘이 우상숭배 했을 때, 그 불타오르는 하나님의 진노를 ‘파록시노’로 번역했습니다.
위 세 구절의 공통점은, 우상을 숭배했을 때, 하나님의 진노,
그것을 ‘파록시노’로 70인역은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본문의 행17:16절의 ‘격분하다’의 헬라어가 ‘파록시노’인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바울이, 그 어느 도시보다 더 우상이 가득한 도시 아덴을 둘러보고서
‘그의 영이 격분했다’는 것은,
바로 바울 속에 임재해 계시는 성령님의 격분을, 바울이 느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아덴의 신전들, 신상들, 제단들로 즐비한 아덴을, 차례대로 둘러보는 가운데,
분노가 계속 일어나다가, 마침내 불타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본문의 메시지
▶이 시간에 우리가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은,
그 웅대하고 아름다운 우상의 도시 아덴 속에서
만약 바울이 영적 격분을 느끼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고대 그리스 도시는, 도시마다 아크로폴리스가 있었습니다.
그 도시의 가장 높은 언덕 광장입니다.
그 아크로폴리스 가운데, 아덴의 아크로폴리스가 가장 유명한 것은,
바로 파르테논 신전 때문입니다.
아테나 여신을 위한 파르테논 신전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오늘날 기둥과 들보의 일부만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 제1호인 동시에, 유네스코의 상징 마크가 될 정도로,
2천년 전 파르테논 신전은, 역사상 가장 뛰어나고 완벽한 건축물이었습니다.
또 제우스 신전은, 기둥만 104개에 달하는, 그리스에서 가장 큰 신전이요,
디오니소스 극장은 수용인원이 1만7천명이었습니다.
더욱이 아덴은, 예술의 도시입니다.
그곳에 있는 모든 신전들, 온갖 신상들, 제단들은
예외 없이 모두 아름다운 예술품들이었습니다.
만약 그 웅대하고 아름다운 예술적인 건축물들 속에서
바울이 영적인 격분을 느끼지 않았더라면,
바울은, 한편으로는 감탄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주눅 들지 않았을까요?
파르테논 신전 안에, 세워져있던 아테나 여신상은
금과 상아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그 높이가 무려 12미터였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거대한 신상들, 신전들을 보면서,
고작 빈민 목수 출신인 나사렛 예수가, 초라하게 여겨지지 않았겠습니까.
만약에 자신이 믿는 나사렛 예수가, 화려한 도시 아덴에서 조금이라도 초라하게 여겨졌다면,
그 예수를 믿는 자기 자신은, 또 얼마나 초라하게 여겨졌겠습니까.
그 빈민 목수 출신 나사렛 예수 때문에,
빌립보에서는 심한 태형과 투옥을 당하고
데살로니가에서는 조폭까지 동원한 유대인들을 피해서, 급히 베뢰아로 피신했다가
또 아덴까지 피신하지 않을 수 없었던 자기 자신에 대해서
회의가 들지 않았을까요?
그러므로 바울이 그 웅대하고, 예술적인 아덴 속에서
감탄하거나 주눅들지 않고서, 오히려 어느 도시보다 우상화되어 있음으로 인하여
영적 격분을 느꼈다고 하는 것은,
빈민 목수 출신인 나사렛 예수에 대한 바울의 믿음이
그만큼 확고했음을 의미합니다.
아덴에서 보이는 것들이 아무리 웅대하고 예술적으로 아름다워 보인다 할지라도
그런 것들이 결코 바울의 생의 목적이 될 수는 없었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믿음은
세상의 모든 불신행위, 악, 불의에 대하여
의로운 영적 격분을 느낄 줄 아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의 특성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으로 들어가셨을 때,
거룩한 예루살렘 성전은
돈을 우상으로 섬기는 종교 장삿꾼들에 의해서, 강도의 소굴로 전락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돈을 우상으로 섬기면서
하나님의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전락시킨 그 종교 장삿꾼들의 악행을
예수님께서 사랑으로 용서해 주시고, 그들을 다 품어주셨습니까?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격노하셨습니다.
그들을 예루살렘 성전에서, 쫓아내셨을 뿐만 아니라,
그것도 모자라서 심지어는 그들의 좌판과 의자를 뒤집어엎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자기 자신이 의인이라고 철썩 같이 확신하고 있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이를 테면 ‘자기’라는 우상숭배자들은, 또 어떻게 대하셨습니까?
사랑으로 그들을 다 품어주셨습니까?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23장에서만 6번이나 ‘너희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라고 그들을 저주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중인격자들인 그들을,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라는 우상 숭배자인 그들에 대해서, 격노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이 세상에서 어떤 우상이든
우상을 섬길 때, 격노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어떤 우상이든, 우상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단 한 번밖에 없는 기회인 자기 생명,
천하보다 더 귀한 생명을, 어이 없이 갉아먹는 가장 어리석은 짓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 세상을 한 번 둘러보십시다.
이 세상에는, 돈이라는 우상이 온통 판을 치고 있습니다.
돈이라는 우상 앞에서, 윤리도, 인간관계도, 핏줄도, 정의도
완전히 해체되고 있습니다.
그런 세상에 대해, 하나님을 믿는다는 우리가
‘영적 격분’을 느끼지 못한다면,
결국 우리 역시, 돈 많은 사람들 앞에서는 주눅이 들고
돈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물신주의자들일 것입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오늘 이 세상은, 권력이라는 우상, 성공이라는 우상, 정욕이라는 우상,
자아라는 우상 등.. 우상 천지입니다.
그 세상에 대해서, 크리스천인 우리가
저마다 하나씩 혹은 여러 개씩 우상을 섬기고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
영적 격분을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 역시, 여러 개의 우상을 동시에 부둥켜안고 살아가는
우상 숭배자일 것입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는,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세상의 온갖 부정부패, 악, 불의에 대해서
영적 격분을 느끼지 못한다면,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공의를, 이 시대 역사 속에 세우는, 의로운 크리스천으로서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온갖 우상과 부정부패가 만연해 있는 이 세상에 대해
영적 격분을 느끼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본문 속의 바울처럼, 그의 영혼이 하나님 앞에서 싱싱하게 살아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2천년 전에 바울이 방문했던, 본문 속의 아덴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아무리 세상이 웅대하고, 아름다워 보여도,
그것은 우상의 도시 아덴일 뿐, 어떤 경우에도 우리 생의 목적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이 세상에 대해서, 영적 격분을 느낄 줄 아는
이 시대의 바울이 되십시다.
세상에 대해 영적 격분을 느낄 줄 아는 사람만, 이 현란한 아덴 속에서,
빈민 목수 출신 나사렛 예수의 제자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대해서, 영적인 격분을 느낄 수 있는 사람만,
눈에 보이는 아덴을 너머, 보이지 않는 영원을 좇아갈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대해, 영적 격분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을 통해서,
언제나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돈이라는 우상, 권력이라는 우상, 성공이라는 우상,
정욕이라는 우상, 자기 자아라는 우상 등, 온갖 우상들이 판을 치고 있는
21세기의 아덴 임을 깨닫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우상의 도시 아덴 속에서, 영적 격분을 느낄 줄 아는,
이 시대의 바울이 되게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비록 우리의 주머니가 비어있다 할지라도,
주눅들거나 비굴함이 없이, 빈민 목수 출신 나사렛 예수님의 제자로
당당하게 살아가게 해 주십시오.
우상의 도시 아덴 속에서, 영적 격분을 느낄 줄 앎으로써,
우리의 영혼이 주님 앞에서 늘 싱싱하게 살아 있게 해 주십시오.
우상의 도시 아덴 속에서, 영적 격분을 느낄 줄 앎으로써,
이 세상에 하나님의 공의를 바르게 세우는, 의로운 크리스천으로 살아가게 해 주십시오.
우상의 도시 아덴 속에서, 영적 격분을 느낄 줄 앎으로,
세상의 보이는 것 너머, 보이지 않는 영원을 날마다 좇아 살게 해 주십시오.
우상의 도시 아덴 속에서 영적 격분을 느낄 줄 앎으로써,
우리의 삶이 이 세상에 주님의 뜻을 이루는, 주님의 통로가 되게 해 주십시오.
우상의 도시 아덴 속에서 영적 격분을 느낄 줄 아는 우리로 인해,
이 세상이 날로 새로워지게 해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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