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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은혜를 예비하는 길 마4:12~17

by 【고동엽】 2021. 12. 5.

www.youtube.com/watch?v=hOHRg0bHVS8

◈큰 은혜를 예비하는 길 마4:12~17 출처

 

구약시대에 이스라엘은 오랫동안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말라기 선지자 이후에는 선지자도 끊어졌습니다.

그러다가 400년 만에 희미한 빛이 세례 요한을 통해 비춰졌고

곧 이어 예수님의 찬란한 빛이 비춰졌습니다.

 

기다림은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그처럼 우리의 기다림도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조만간 고난의 터널을 벗어나 큰 은혜가 임하게 될 것입니다.

그처럼 하나님의 큰 은혜를 예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본문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이스라엘의 흑암기 4백 년 만에 나타난 위대한 선지자가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

당시 세례 요한은 강력하게 회개의 말씀을 선포해서 사람들은 그를 메시아로 착각할 정도였습니다.

 

로마 당국도 바짝 긴장했습니다. 결국 헤롯왕이 세례 요한을 왕실을 비판한 명목으로 체포했습니다.

하나님의 진영에 위기의 순간이 찾아온 것입니다.

 

 

그 소식을 들으시고 잠시 남쪽의 유대 지역에서 사역하시던 예수님은

데모하러 전면에 등장하지 않고 오히려 북쪽의 갈릴리로 물러가셨습니다.

 

언뜻 보면 용기 없는 비겁한 모습 같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아직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시도 때도 없이 무조건 전진을 외치는 삶이 용기인 줄 압니다.

그러나 지혜가 뒷받침되지 않는 용기와 때를 분별하고 기다릴 줄 모르는 용기는 만용입니다.

 

 

▲다윗은 세 번 왕의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첫째, 사무엘로부터 왕의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삼상 16:13).

둘째, 사울이 죽은 후 블레셋에서 헤브론 지역으로 돌아와 자신이 속한 유다 지파 사람들로부터

왕의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삼하 2:4).

셋째, 사울의 아들인 이스보셋이 암살되자 이스라엘의 각 지파 장로들이 헤브론에 와서

다윗에게 왕의 기름을 부었습니다. 그때 비로소 전체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삼하 5:3).

 

 

다윗은 처음에 사무엘로부터 왕의 기름부음을 받았지만 결코 왕이 되려고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사울의 질투로 끊임없이 쫓겨 다녔지만 그래도 기다렸습니다.

나중에는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결정적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지만 죽이지 않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줄 알아야 마침내 최적의 은혜의 때가 찾아옵니다.

성도는 ‘떼를 잘 부리는 사람’이 되지 말고 ‘때를 잘 기다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2.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거기서 고향인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셨습니다(13절). 왜 그랬을까요?

 

누가복음에는 고향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했기 때문이라고 나옵니다(눅 4:29-31).

그 외에 갈릴리 지역의 중심도시인 가버나움이 사역상 중요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가버나움은 베드로와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의 고향이었고(막 1:29),

세리 마태도 그곳 출신으로 추정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초기 사역지로 예루살렘 대신

갈릴리를 선택한 것을 어리석게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갈릴리로 가셨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셨기 때문입니다(14절).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절대 권세를 가졌지만

그래도 마음대로 살지 않고 말씀대로 사셨습니다.

 

 

말씀대로 산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성경에 수많은 말씀들을 구절구절 다 지키며 살라는 말일까요?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악인을 죽이라!”는 명령도 많이 나오는데

악인을 맘대로 죽여 놓고 성경 말씀대로 했다고 하면 될까요? 안 됩니다.

그래서 말씀의 원리를 따라 준거 틀을 세운 바른 신학을 아는 것도 중요하고

또한 바른 신학을 아는 사람 밑에서 배우는 것도 중요합니다.

 

신학을 멸시하는 사람은 자기 맘대로 성경을 해석하려고 하는 이단성향이 매우 높은 사람입니다.

 

건전한 신학은 매우 중요합니다.

신앙과 신학은 영혼을 천국 목적지를 향해 잘 날아가게 하는 양 날개와 같습니다.

 

그처럼 바른 신학을 통해 말씀을 잘 분별해서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삶은

은혜를 예비하는 핵심요소입니다.

 

그처럼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삶도 은혜를 가져다주지만 말씀대로 살려고 하면서

점점 몸에 배는 순종적이고 충성스럽고 헌신적이고 꾸준한 성향도

은혜를 예비하는 핵심요소입니다.

 

 

◑3. 큰 빛을 받아야 합니다

 

 

본문 15절 말씀을 보십시오.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가나안 정복전쟁 후 갈릴리 지방은 잇사갈, 스불론, 아셀, 납달리 지파에 분배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은 북쪽 접경지였기에 이방 제국들의 외침과 지배가 잦아서

혼혈과 혼합문화와 혼합종교가 성행했습니다. 그래서 남쪽 유대인들로부터

‘이방의 갈릴리’로 불리며 갈릴리에서는 결코 선지자가 나지 못한다고 여겼습니다(요 7:41).

 

 

그처럼 갈릴리 지역은 상처가 많고 멸시받고 소외된 어둠의 지역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역사는 신기합니다. 하나님은 역전과 반전의 역사를 좋아하십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가장 외면하는 곳을 찾아 그곳에 큰 빛을 비춰주시고

그 빛을 따라 은혜를 내려주시는 방법을 대단히 선호하십니다.

 

그처럼 아무리 흑암이 짙은 환경과 지역이라도

하나님의 큰 빛이 비추면 바로 거기서부터 은혜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본문 16절 말씀을 보십시오.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이 구절에서 ‘흑암에 앉은 백성’이란 말은 멸시받고 소외된 갈릴리 사람들을 지칭하는데

그들에게 큰 빛이 비춰진 것입니다.

 

'큰 빛'이 무엇입니까? 바로 복음입니다.

그처럼 복음이 들어가면 흑암이 물러가고 생명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특히 어둠과 고통에 싸인 심령들에게 그 빛은 더욱 강하게 비칩니다.

 

 

보잘 것 없는 제자들에게 복음의 빛이 비치자 그들이 얼마나 큰 인물이 되었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은 학력도 별로였고 외모도 별로였습니다.

삶의 자세나 태도가 탁월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12제자 중에도 핵심 이너써클 3명이 있었습니다.

바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입니다.

예수님은 특별한 장소에서 그들 3명만 데리고 가실 때가 많았습니다.

 

그것을 제일 질투했던 사람이 바로 가룟 유다였습니다.

자기가 보기에는 하찮은 것들이 자기보다 더 예수님과 가까워지는 것 같으니까

자신은 예수님으로부터도 더 마음이 멀어졌습니다.

 

 

그런 질투심을 감추려고 예수님을 공격할 명분을 찾다가 찾지 못하니까

예수님이 특별한 장소에 3명의 제자만 자주 데리고 가시는 문제로 은근히 험담도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람을 차별하시는 것 같아!” 그 말에 제자들이 아무도 동조하지 않자

결국 예수님을 죽이려고 혈안이 된 대제사장을 찾아가 밀고한 것입니다.

 

 

이너써클이 있는 것은 차별이 아니라 충성심과 책임감에 따른 자연스런 현상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이너써클을 보면 차별의식을 가지기보다

오히려 “나도 더 사랑받는 태도와 자세로 이너써클이 되자!”는 도전으로 승화시켜야 합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특별히 자주 데리고 다닌 것은

그들이 가장 예수님과 마음과 비전을 함께 했던 순종적인 제자들이었기 때문이지

다른 제자나 가룟 유다를 멸시했기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에게는 그의 재능을 따라 돈 궤를 맡겼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예수님의 공동체의 재정집사 역할을 맡긴 것입니다.

재정집사의 위치를 생각할 때 가룟 유다가 소외감을 가질 일은 전혀 없었습니다.

결국 능력이 아닌 자세 때문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이너써클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의 이너써클들조차 약점이 많았습니다. 베드로가 얼마나 성급합니까?

야고보와 요한도 원래는 대단한 성격파들이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중요한 때 졸기도 잘했습니다.

변화산에서도 졸았고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중요한 기도 시간에도 졸았습니다.

 

베드로는 자기 이름처럼 베드(bed)로 가는 것을 좋아하는 잠도 많고 잘 졸았던 제자였습니다.

그런 부족한 제자들이 예수님 안에서 얼마나 멋진 대 역사의 주인공이 됩니까?

 

 

어떻게 그런 극적인 존재의 변화가 있게 되었습니까?

가장 큰 이유는 예수님을 만나 복음의 큰 빛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연약한 존재도 복음 안에서는 멋진 역전 인생이 가능합니다.

 

역사상 복음을 받아들여 인생의 대 반전을 이룬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닙니다.

그 복음의 빛은 흑암의 고통에 싸인 사람들에게는 더욱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낙심하지 말고 그럴 때일수록 더욱 믿음을 굳건히 하십시오.

 

 

◑4. 회개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본문 17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천국의 역사는 가까이 왔습니다. 그 천국을 얻어 누리려면 무엇이 가장 필요합니까?

바로 회개입니다. 은혜와 축복의 때도 가까이 왔습니다.

그 은혜와 축복을 얻어 누리려면 무엇이 가장 필요합니까? 역시 회개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는 가진 것이 없다고 합니다. 왜 가진 것이 없습니까?

무엇이든지 자기가 잘하는 것은 반드시 있습니다.

그것을 잘 활용하면 성공적인 길을 가지 못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남의 것을 부러워하며 따르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특징 이상의 특장(특별한 장점)을 앞세워

비전을 따라 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기 것을 지나치게 내세우는 것은 교만이지만

자기 것을 소중히 여기고 앞세우는 것은 교만이 아닙니다.

자기가 잘하는 것을 앞세우지 않으면 어떻게 비전을 이루겠습니까?

 

 

공동체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공동체에 주신 특장을 감사하고

중시해야 하나님의 일을 비범하게 감당하고 결국은 승리합니다.

 

그처럼 우리에게 있는 특장을 생각하고 감사하고 중시하십시오.

우리에게 없는 것을 자꾸 생각하면 자신감을 잃지만 우리에게 있는 것을 자꾸 생각하면

자신감을 얻습니다.

 

교만은 없어야 하지만 자신감은 가져야 하기에

우리의 특장을 통해 자신감을 얻고 비전의 땅으로 나가야 합니다.

 

 

결국 이 세상에 성공적인 삶의 기반이 없는 성도는 한 명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에게 주어진 것을 잘 개발하는 것입니다.

 

자기 것을 어떻게 개발합니까? 땀과 노력으로도 어느 정도는 개발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이 잘 개발되도록 하나님이 최적의 기회를 주셔야 합니다.

 

▲그런 기회가 주어지는 은혜가 임하려면 무엇이 필요합니까?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회개는 은혜의 문을 여는 가장 효과적인 통로입니다.

회개는 자본보다 중요하고 노력이나 재능보다 중요합니다.

진심으로 회개하면 어디선가 신비한 변화의 역사가 시작될 것입니다.

 

지금 세상이 어둡다고 느낀다면 더욱 사명감을 가지고

선한 영향력를 미치는 존재가 되는 꿈을 꾸십시오.

그 꿈과 비전을 이루게 하는 첫 시발점도 바로 회개입니다.

회개하면 천국이 가까워지고 큰 은혜가 가까워지고 비전 성취도 가까워집니다.

 

 

< 내일의 은혜를 예비하십시오 >

 

지금 자신의 모습이 부족해 보여도 결코 낙심하지 마십시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이 구원의 은혜도 주셨는데 다른 은혜를 주시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대신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우리는 예수님처럼 소중한 인생이 되었습니다.

그 소중한 인생으로 멋진 작품인생을 만들어 갈 기회도 반드시 주실 것입니다.

 

참된 믿음은 결코 배반이 없습니다. 기도와 땀도 결코 배반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으로부터 창조성과 지혜를 구하십시오.

 

영안을 신기한 환상을 보는 것으로만 알면 그 인생은 무력하고 무책임한 인생이 됩니다.

영안이 열린 사람이란 하나님의 뜻을 자신의 뜻으로 삼고

많은 영혼을 구원하고 많은 영혼의 눈물의 닦아주겠다는 찬란한 비전을 가지고 나가는

사람입니다. 그처럼 영안은 찬란하고 좋은 비전을 선도해야 합니다.

 

 

 

 

여러분들도 자신이 잘하는 분야를 찾고 앞세워서 하나님의 지혜와 창조성을 구하며

열심히 큰 은혜의 때를 준비하십시오. 그러면 조만간 반드시 좋은 날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 날에 음지의 헌신자로서 자신이 이룬 성공을 나누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활용한다면 얼마나 그 인생이 복된 인생이 되겠습니까?

 

그런 복된 인생을 꿈꾸며 이번 한 주간도 열심히 살아서

내일의 큰 은혜를 예비하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

 

<광명한 새벽은 찾아옵니다 >

 

루마니아의 독재자 챠우세스크 부부가 왜 1989년에 총살당했습니까?

24년을 철권통치를 한 챠우세스크의 독재가 어디서 깨졌습니까?

개신교 교회 하나 때문에 깨졌습니다.

 

교회가 강자 편에 서서 떡을 취하면 욕먹다가 결국 몰락하지만

정의 편에 서서 떡을 나누면 역사의 전진에 큰 보탬이 됩니다.

그런 교회라면 누가 교회 크기로 욕하겠습니까?

 

 

1987년, 전임 목사가 정권에 동조하면서 교인 수가 50명까지 줄은 루마니아의 한 개신교회에

라슬로 퇴케시(László Tőkés) 목사가 부임했습니다.

그는 정권에 동조하지 않고 하나님께 동조하면서 참된 교회를 만들어

교인이 2년 만에 5000명으로 늘었습니다.

 

공산정권은 위협을 느꼈지만 그를 죽이면 위대한 순교자로 만들까봐

1989년 12월 15일까지 그에게 교회를 떠나라고 추방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퇴케시 목사는 떠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비밀경찰이 강제로 퇴케시 목사를 연행하려고 하자

교인들이 인간방패를 형성해 막다가 점차 그 인간방패가 “자유를 달라!”는 시위대로 변했습니다.

 

12월 17일 새벽, 마침내 비밀경찰은 인간방패를 뚫고

퇴케시 부부를 피투성이로 만들어 연행해 갔습니다.

자신들 눈앞에서 담임목사가 비참하게 끌려가자 교인들은 광장으로 몰려갔고

그날 밤 군은 시위대를 향해 발포해 수백 명이 총에 쓰러졌습니다.

그러자 교인들과 시민들은 눈이 뒤집혀 더 데모를 했습니다.

 

 

그 데모대를 막으려고 챠우세스크는 12월 21일 10만 명의 관제데모 군중대회를 열었습니다.

거기서 자신을 지지하라고 연설할 때 교인들이 뒤에서 야유하자

그 야유가 번지면서 10만 명의 관제 데모대가 10만 명의 반정부 시위대로 돌변했습니다.

 

그 시위대에 군도 가담하면서 이틀 후 챠우세스크는 체포되었고

다시 이틀 후 성탄절 군사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선고 직후 전 세계에 생중계되는 상황에서 두 부부는 160여발의 총탄을 맞고 총살당했습니다.

대중들의 마음이 돌변해 절대독재자가 총살당하는 데는 채 10일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요새 북한에도 휴대폰이 보급되면서 옛날에는 북중 접경지역에서 중국 핸드폰으로만

북한 내 일부 지역과 통화가 가능했지만 지금은 남쪽에서 한국 핸드폰을 몰래 가지고 들어간

북한 통신원과의 직접통화도 가능해진 상태입니다.

 

또한 탈북자들이 북으로 보내는 돈이 북한주민의 사고전환을 이루는 씨앗이 되고 있습니다.

이제 때가 되어 2014년에 북한에 획기적인 변화의 역사가 나타날 것 같습니다.

지금의 어둠은 새벽 여명의 빛이 나오기 직전의 깊은 어둠입니다.

아무리 어둠이 깊어도 광명한 새벽은 반드시 찾아옵니다.

 

이한규 목사 설교 스크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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