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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 안에서의 교회 / 박영선 / 구원의완성 제20강

by 【고동엽】 2021. 12. 5.

구원의완성20강 (35분)

박영선 목사

 

 

참석해 주신 여러분 모두와 또 이 프로를 시청해 주신 시청자 여러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조금 어려울 수 있다고 저도 이해하고 있습니다.

두고두고 이 강의한 내용들을 음미하시면 큰 신앙의 유익이 있으리라 믿고 하나님께서 우리 한국교회에 주신 그동안의 은혜와 복들이 더 크게 더 오래 유익을 끼치고

또 교계에서 뿐만 아니라 이 사회와 우리나라에 더 크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에 이 강의가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혹 강의내용 속에 부정적이거나 비평적으로 들리는 게 있었으면 잘하자고 한 일인줄 알고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앞 시간에 우리가 복음주의에 대하여 생각을 했고, 한국교회가 이 복음주의를 미국으로부터 사실은 그대로 받아온 셈이며, 영향을 받았으며,

현실적으로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큰 그 은혜로 급성장했기 때문에 자체내에서도 복음주의적 성향을 띄게 되었고,

그것이 복이면서도 어떤 부작용을 낳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조심스럽게 다루었습니다

이 문제를 조금 더 폭넓고 더 깊이 마지막 시간에 다루어서,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대라는 다원화된 그리고 상대주의적이고 모든 것이 실종되고 방황하는

현대정신 속에서 기독교 신앙이 저들의 정체성을 제대로 이해하고 우리의 신앙이 가지는 답을 잘 지켜야되는 그런 문제로 연결할려고 합니다.

우리는 이제 미국의 영향을 많이 받고, 미국에서 일어난 일이 한국에 다시 일어나곤 하는 걸 보는데, 미국이 우리보다 말하자면 교회의 부흥을 먼저 맛보았고

그래서 그 부흥의 결과에 따른 은혜와 유익과 동시에 부작용도 먼저 경험했기 때문데, 우리가 미국에서 일어났던 복음주의와 그 뒷얘기들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틀림없이 그 영향을 받고 또 그 길을 갈 것인데, 그 피해를 이제 가능한 한 전처를 밟지 않는,, 그런 필요에 의해서 이 내용을 오늘 마지막 강의로 택했습니다.

현대 미국복음주의자들은 부흥운동의 산물들입니다.

부흥운동이라고 여기서 얘기하는 것은 18세기, 즉 1740년대에 제 1차 대각성운동과 19세기 초반에 제 2차 대각성운동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미국교회의 부흥운동이 미국사회에 끼친 영향과 미국교회에 끼친 영향은 대단한 것입니다.

뭐,, 영적인 각성, 회심, 경건한 시민생활,, 이렇게 까지 교회에서 만이 아니고, 미국이라는 나라 전체를 뒤흔든 두 번에 걸친 큰 부흥운동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부흥운동과 20세기에 자유주의신학을 대항하여 기독교의 복음의 본질을 지키려는 그 보수주의 운동의 대표인 근본주의운동 이 미국 복음주의에 제일 많은 영향을 끼칩니다.

그러니까 부흥운동과 근본주의입니다.

앞시간에도 잠시 얘기했지만, 이런 근본주의나 오순절 성령주의 이런 세대주의 이런 신앙상의 어떤 그 보수적 진영들은 다 자유주의 신학의 공격에 대해서 복음의 또는 기독교진리의 본질들을 지키는 일에 한부분씩을 담당했습니다마는

우리의 지성을 포함한 전 인격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일은 놓치고 말았습니다.

앞시간에서도 얘기한 겁니다.

여기서 조금더 이 문제를 자세히 살펴보려고 하는데,

첫번째로 부흥운동은 새로운 리더쉽의 형태를 만들었습니다.

새로운 리더쉽이라는 것은, 기존의 성직 계층 속에서의 위치보다, 신학적 위치보다 청중을 끌 수 있는 직접적이고 인격적이고 대중적인 설교자의 능력에 더 많이 의존하는 그런 리더쉽을 낳았습니다.

이해하시겠죠?

그러니까 사실은 그 목사를 하고, 목회를 하고, 설교를 한다 그러면 목사들 사이에서 야, 저사람은 실력있다 를 인정받아야 되는데, 지금은 한국교회에 그런 건 없습니다. 목사들끼리 야, 저건 저 병신이 어떻게 저렇게 하나?

다 그런 그런 수준에서 떼거리만 많이 모아갖고 큰 소리만 치는데 할 말이 없는 그런 형편이 되었습니다.

이거는 여러분 다른 걸로 얘기해 볼까요?

 

 

여러분 만일 무슨 음악을 하신다 그러면, 음악을 하면 음악인들끼리 야, 저사람 음악은 아, 대단해 바이올린이 장난이 아니야 이래야지,

매일 길거리에 나와 거리는데, 사람들만 떼거지로 모인다 그러면 그걸 여러분 뭐 그렇게 점수를 주겠습니까

클리식한 그 성악을 한 사람들이 이 팝가수라면 그렇게 아주 사람 취급을 안합니다. 그렇게 난 좋던데

그러면 내가 만일 난 좋던데, 난 뭐 좋아요 나훈아도 좋고, 다 좋은데 그렇게 얘기하면 경멸하죠.

무식한 목사님,,' 그렇게 말은 안하지만, 표정이 다 보이죠.

사실 신학계도 그래야 되거든요.

어떤 목사가 오만명이나 성도가 모인데

누구?

아, 걔? 이러고 말아야 되는데,,

아니 어떻게 오만명이나 모였데? 다그치게 된단 말예요

이 함께 서로 공범이 된 거예요. 목사와 성도들이 함께 공범이 된거라고요.

많이 모으면 그 사람 실력이 있는 목사라고 생각을 하는 그 성도들이 그렇게 만들고 있고, 목사는 그걸로 뭐 신학계에서 같은 목사들이 알아주든 말든 까불지 마라 가 된 거예요.

그렇게 된 시작이 어디라고요?

부흥운동에서 시작됐다는 것 놀랍지 않아요?

부흥운동이라는 건 원래 영원무궁토록 좋아야 되는 것 아녜요?

동화는 다 둘이 결혼해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더래요 이렇게 해야되는데 현실은 안그렇죠

 

두번째는 부흥운동이 교회에 전통적 권리를 잘라냅니다.

교회생활 자체보다 주님과의 동행이라는 개인의 결단이 더 중요시 됩니다.

그래서 교회공동체로써 교회공동체 안에서의 자기 자리를 지키는 일,

교회 공동체에서 성도들 간의 결속, 거기서의 어떤 예의, 성의 이런 것들은 다 없어지고,

그냥 은혜받고 큰소리치는 놈이 서열을 무시하고 그냥 아무 때나 큰소리치는 이런 양아치 집단이 되고 말았다는 그런 뜻입니다.

이건 아주 어지간한 집단에도 없는 무례요 무질서 합니다.

근데 교회 안에서는 이게 잘 난 일인 줄로 알고 있습니다.

은혜만 받으면 아무 때나 튀어나와서 큰소리를 칠 수가 있다고 생각을 하는 건, 죄입니다. 죄! 무식한 죄입니다.

교회에는 신앙의 어른들이 있습니다.

더 많은 경험과 죄에 대하여 더 많은 이해를 하는 인생에 대해서 더많은 굴곡을 겪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일들에 대한 존경과 또는 그 신뢰와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사실 요즘 같아서는 교회 일 필요가 없습니다.

일하기 위해서는 모여있지만, 다른 아무 차원에서도 교회가 그런 미션캠프와 다를 일이 없습니다.

이거는 우리 모두가 사실은 이대로 놔둬서는 안되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들이 전부 뭐라,, 교회가 세워져서 주어진 권위 하나님이 교회를 세워 일하시는 하나님의 방법보다,

성도 하나하나의 항복과 도의를 받아내는 일에 더많이 아첨을 떨고 있다! 그렇게 생각이 됩니다.

그러니까 이걸 종합하면 부흥운동의 형태는 행동적이며, 즉각적이며, 개인적입니다.

이게 다 공통된 내용은 아시겠죠?

잘못하고 있다 이겁니다.

그 결과 전통에 대한 경시, 개인적인 능력에 대한 강조, 간접적인 지식에 대한 불신 등으로 지성의 생명력을 크게 좌절시켰습니다!

간접적인 지식이 뭔지 아시겠습니까? 가르치는 말은 안듣습니다. 지가 확인한 것만 붙들고 다 인 줄 압니다.

미국의 부흥주의와 그 부흥주의에 의해서 자라나게 된 개인주의 정신 때문에,, 이게 문제입니다.

이 개인주의라는 것이 미국사회 전반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기독교 안에도 있는데, 기독교 안에 있는 개인주의는 세상의 개인주의와 조금은 다르습니다.

이기적인 개인주의만은 아닙니다.

그런데 무슨 개인주의냐하면, 내가 확인하지 않는 한 믿을 수 없다! 라는 개인주의를 낳았거든요.

아시다시피 신앙의 내용이라는 건 다 경험할 수가 없습니다.

배우셔야 됩니다. 그러니까 책 없이 학교다니지 않고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라고 우기는 건 언제나 무식한 놈들의 주장이지,

앞선 선조들과 지나온 역사를 하나도 배우지않고, 자기로부터 시작해서 최고의 경지에 갈 수 있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와 창조질서와 일하시는 통치에 전면으로 대항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것들을 소위 은혜를 사모하면 믿음이 좋다 라고 치부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 교회는 이런 일들이 사실은 등한시해서, 이제 근본주의적이고 부흥운동에 입각한 이 복음주의 때문에 지성적인 종합, 보완에는 굉장이 약했습니다. 준비를 소홀히 하는 바람에 약해졌습니다.

약해진 교회입니다.

약해진 교회는 그래서 근대성에 영합하든지 아니면 근대성으로부터 급진적인 분리를 통하여 도피하든지 하는 갈림길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근대성이라는 것은 세상이, 즉 현대사회가 치달리고 있는 인본주의로 말미암는,, 그 갈 때까지 간 세상을 말합니다.

과학의 발전과 개인주의의 극단과 상대주의 무슨 물질주의 이런 끊임없이,, 세상은 잘못된 근거 속에 서지만, 생각하고 싸우고, 무슨 철학이든 경제든 정치든 계속 그 잘못된 일로 인한 싸움이지만, 생각하고 싸우고 지지고 볶고 나가고 있는데,

교회는 반공호 속에 숨어서 아무것도 안하고 숨어서 태풍이 지나가기만 기다렸단 말예요

그래서 교회는 세상에 나와서 보니까 어디서부터 어떻게 저들과 말을 하고 만나야될 지를 알 수가 없게 됐단 말이예요.

이게 약해진 교회입니다.

우리는 이 세대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저들이 왜 이러고 있는지,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하는지, 그건 생각을 아무것도 안했다고요.

우리는 오직 아무데서나 피켓들고 <예수천당 불신지옥> 아직도 이것 밖에는 할 줄 모르거든요.

이거를 통해서 하나님이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는 줄 저도 믿습니다

지금도 이렇게 하나님이 구원하십니다.

그러나 이건 아까도 얘기한 것처럼, 구원얻은 자가 창조세계 안에서 하나님이 통치를 회복하는 일은 포기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불타는 세상에서 오직 몇 명이라도 더 꺼집어 내는 일 밖에 할 줄을 모르는 거거든요.

그리고 교회는 자신의 최고의 책임을 놓치고 있고, 그 영광과 권세를 외면하고 있는 꼴이된 것입니다.

교회는 기껏 뭐 구제나 하고 봉사나 하고 전도하면 자기일을 하는 게 아닙니다.

교회는 회복된 하나님의 자녀들의 다름이 가지는 사회공동체를 구현해 내야되는 것이고, 거기서부터 연장하여 각자 성도의 삶의 현장에 그 신자가 있음으로 인해서 펼쳐지는 하나님의 영광이 증언되고 결실되어져야하는 것이거든요.

그것이 교회에 하나도 없는 거죠.

그래서 교회는 어떻게 할 수 밖에 없다?

 

 

근본주의적으로 갈 수 밖에 없어요.

나와서 얘기를 해봤자, 저 쪽이 말이 안되는 것이 아니라, 그 쪽에서 우리가 말이 안되는 거예요

이게 어디에 있다가 이제 갑자기 나타난 석기시대 인물이 등장한 것 같애요.

우리가 "인생이 괴롭죠,,?""아니 안 괴로운 인생이 어딨어요? 여태껏 20세기 내내 다루었던 문제인데, 세상이

우리 잘 아는 알뵈르 까뮈부터 시작해서, 우린 다 이방인이다, 우린 다 고독하다, 죽음에 이르는 병,,다 골로 어디갔다가 이제 나타나 느닷없이,

인생이 괴로우시죠?

뭐야? 이 맹구는,,?" 이렇게 된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저들이 말이 안되는 게 아니고, 세상이 우리가 말이 안되는 거예요.

아니 이 사람이어디 있다가 지금 나타난거야, 도대체가 같이 이 세상을 살아온 사람이 맞아? 싶은 거예요.

아시겠어요?

아니면 어떻게 한다고요?

근본주의적이 된다든지 아니면 외면하고 일방적인 말만 하는 수 밖에 없어요.

그래서 교회를 어떻게 하기 시작을 했느냐 하면요,, 교회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준다가 됐어요

세상에서 외롭고 슬픈 자들을 불러서 교회 안에서는 편을 들어주고, 밥해 주고 무조건 좋다고 하고 아주 마약을 놓는거죠.

죽으면 천국간다 그러고,,살아 생전에 우리끼리 늘 이렇게 웃으면서 살자고

그렇게 교회에는 좋은 얘기로 전부 맞추었어요.

그러니까 성경에서 하는 얘기 다 안하고, 성도들이 원하는 얘기를 하죠.

축복을 빌죠, 축복을 빌어서 무슨 일이든지 상담을 하면, 잘 될거라고 그러고, 기도하면 된다 그러고, 거

거슬리는 얘기, 논쟁하고 고민하고 갈등하는 얘기들을 다 못 건드리죠.

권위있는 지적을 못하죠.

그러니까 한국교회는 치료를 안하지 않습니까! 벌써 오랫동안

그리고 세상에 나가서는 그러니까, 세상 사람보다 나은 윤리와 도덕을 지키는 정도로 교인된 확인을 시켜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밥 퍼주고,, 잘못한다는 것 아닙니다. 잘 하는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러니까 사회복지에서도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물론 더 큰 사랑과 긍휼을 베풀어야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사회일반이 아닌 윤리 도덕 봉사라는 정도로 밖에는 신앙을 설명할 방법이 없고, 세상과 부딪히지도 못합니다.

다른 걸로는 못 싸우는 겁니다.

그래서 복음주의는 복음주의가 이리로 흐를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는 걸 얘기하고 미국교회는 그랬고, 한국교회도 그러고 그러기 시작했기 때문에 얘기를 하는 겁니다.

복음주의는 개인적인 평안과 풍요의 원리가 됩니다.

평안과 풍요 그러니까 잘 살게 빈다고요

잘 사는 건 신앙적이어야 됩니다.

건강과 재정적인 것은 신앙에 속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건 하나님이 주시면 받는 거고, 안 주시면 안 받는 거로 우리는 살아야되는 인생입니다.

복음주의가 이렇게 그 신앙의 근거를 놓치고 인간의 가능성과 요구에 타협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꼭 기억을 하십시요!

무엇 때문에 그렇게 됐죠?

 

 

대중성 때문에 그렇게 된 겁니다.

대중에 영합하다가 이제 주도권을 빼앗기는 겁니다.

그러자, 모든 인간들이 자기 욕심을 부리기 시작을 합니다.

그리고 성직자들이 그거를 말하자면 권유를 해주고 있는 꼴이 된 겁니다.

복음주의가 신학적이며, 철학적인 신념들 대신에 도덕적인 이슈들을 이제 궁극적인 것으로 보기 시작을 하게 됩니다.

왜요?

 

 

전체 싸움을 할 수 없으니까, 근본적인 싸움을 할 수가 없게 되니까, 무엇을 명목으로 유지를 하느냐하면,

가장 종교적인 형태와 명분들 만을 남깁니다. 그게 이제 구원입니다. 천국입니다. 심판입니다.

그리고 세상 앞에다가는 기껏 이런 것들,, 낙태반대, 인권,, 이런 식으로 밖에는 싸움을 걸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보다 보편적이고 전 영역적인 창조세계에 대하여 발언권을 놓치고 나니까, 명맥을 유지하는 것은 이런 분명한 명문들로 밖에는 싸움을 걸 수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머리끈은 멋있어 보이지만 낙태반대운동 하느라고 서고, 인권운동 하느라고 나가 싸우고 ,, 그게 뭐 신앙의 굉장히 큰 일같지만,

따지고보면 그 밑에 인생과 세상 전반에 걸친 이해와 자기몫이 밑에 근거되어 있고, 가르쳐져 있지않은 상태에서 느닷없이 풍선을 띄우듯이, 이런 명분을 가진 이슈들로 우리가 아직 죽지않고 살아있다는 자기증명을 하는데 불과하다면,

그러면 사실은 기독교의 생명은 얼마 남지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싸움은 결국 우리가 이 교회가 가지는 교회 권위들, 교회가 가르치는 신아의 근거들을 놓치는 데서부터 시작이 되죠.

왜 놓쳤다고요?

원래는 복음과 진리가 가지는 생명력과 역동성을 실천하는 것으로 시작 했는데, 이건 맞는 것입니다.

이 건강한 복음주의라면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결실을 하자, 대중에게 영향을 미치자, 곧바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았다는 걸 놓치고 대중을 포용하여 그들의 인정을 받는 것으로 그만 타락해 버리죠.

그러니까 언제나 조심을 해야 됩니다. 언제나!

죄란, 참 무섭습니다.

죄란, 앞에만 봐서 싸움을 거는 게 아니라, 뒤에도 와서 싸움을 걸고, 잘 때도 와서 싸움을 걸고, 겸손과 신앙을 지킨 다음에도 와서 싸움을 걸어서, 우린 늘 조심을 해야 됩니다.

그러고 우리 교회와 성도들의 이러한 싸움의 실패는 그 미치는 영향이 큽니다.

우리는 우리 하나만을 책임지고 있지 않고, 하나님이 지금 통치하시는 구원과 창조역사의 회복이라는 우리가 몸담고 사는 시대와 사회에 대한 책임으로까지 연결되어 있다는 걸 놓치지 않아야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교회가 가져야하는 가장 큰 책임들로 늘 우리자신을 점검하고 돌아봐야 합니다.

우리가 대중을 찾아갈 때, 저들을 설득하고 저들을 항복시키는 것은, 우리의 말재주나 우리의 열심이나 우리의 헌신이 아니라는 걸 늘 잊지않아야 됩니다.

우리가 복음의 생명력, 우리가 믿는 믿음의 역동성을 믿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이 목적하시고 허락하신 그의 약속이요 은혜 때문에 가능하다는 걸 놓치지 않아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일을 하신다는 사실을 놓치면, 우리는 내가 그 일을 만드는 자가 됐다고 생각을 하고, 나는 너와 다르다가 되고, 우리 교회는 너희 교회와 다르다가 됩니다.

여기에 소위 말하는 성공한 교회, 실패한 교회라는 말이 생깁니다.

이런 말을 하면 안됩니다.

성공한 교회도 없고 실패한 교회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기이한 뜻으로 어느 교회는 많은 사람을 보내어 큰 교회라는 이름의 직분을 주시고, 어느 교회는 적은 수가 모여 작은 교회라는 직분을 주시되, 어느 곳에서나 동일한 하나님의 은혜와 복과 소망과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자의 고급한 신앙생활을 하도록 허락받고 있습니다.

이 문제는 어느 교회나 오해하거나 실패하거나 잘못 생각해서는 안되는 문제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다시 신학의 필요성에 대하여 깊이 깊이 그 필요성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신학교가 제대로 자기의 역할을 해야되며, 신학을 하러들어가는 이들이 모두 진지하게 신학을 배워야하며, 가르치는 이들이 열심히 가르쳐야합니다.

그리하여 신앙의 종합적인 이해를 가지고, 자기가 그 중에 어느 부분에 더 열심을 갖고 있는가를 알아야됩니다.

자가가 관심을 갖고 자기가 전공으로 하는 분야가 전부가 아닌 것을 알고, 자기 분야를 해야됩니다.

누구는 봉사에 더 은사가 있고, 누구는 이론에 더 은사가 있고, 누구는 가르치는 일에 은사가 있고 하는 일들에 인하여 우라가 한 편이요,

하나님께서 이 시대와 이 나라를 위하여 세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와 구원에 수중드는 사람으로 서있는 갖은 편인 것을 잊지 않아야됩니다.

사람들에 인한 이런 인정, 인기가 척도가 된 풍조에 밀리면, 우리는 서로 간에 동역자들 사이에 긴장관계가 생깁니다.

우린 부러워하고 시기하며 자랑하며 경멸하게 됩니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못난 짓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종으로써 객관적이며 보편적인 진리선포를 늘 열심히 책임있게 해야합니다.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진리라는 건, 성경말씀을 말하고 하나님이 의도하시고 또 요구하시는 것들을 말합니다.

대중성을 염두에 두면, 우리는 이것보다 관객이 선호하는 일에 타협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들이 좋아하는 말을 하게되고, 모두에게 경건의 훈련과 하나님을 모시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에 구별도 없이,, 축복을 남발하게 됩니다.

우리가 얼마나 대중성에 깊이 사로잡힐 수 있는가하면, 그동안 오랬동안 아직도 그런 일들이 자행되고 있습니다만 설교보다 간증들이 더 은혜롭다라고 실제로 생각들을 하고 해왔습니다.

개인적인 체험을 나누는 일이 함께 모여하는 공동기도와 함께 하는 공동성경연구나 예배와 증거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공동으로 기도하고 공동으로 성경연구한다는 것은 같이 모여서 한 성경의 말씀을 배우는 것을 말합니다. 전체가 배우는 것입니다.

그것과 달리 개인개인이 자신이 한 체험, 공동의 것이 아닌, 개인의 체험을 나누는 일이 교회가 해야되는 보편적인 진리선포를 대신한다는 것은 개인의 영적인 자서전이 예수의 생애를 대신하고 있는 꼴이된다 이겁니다

그리고 그걸 은혜를 받았다 그러고, 그것을 언제나 최선의 그 믿음의 공동체에서 믿음을 격려하며 확인하며 감격해하는 일에 동원한다는 것은 아주 잘못하는 것입니다.

수준에 따라서 초신자들을 위하여 불신자들을 초대하는 전도집회라든가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요, 한국교회는 결국 예배형태가 변하고 있습니다.

구역을 관리하는 일들도 변하고 있습니다. 지금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목사가 목사의 직무를 지키십시요!

평신도가 할 수 있는 일에는 제한이 있습니다.

평신도를 동원해서 해야하는 일은 각자의 삶이 전영역에서 신자노릇을 하라 그러시고, 보조교역자를 만들지 마십시요!

그건 목사들의 책임입니다.

전문적으로 배우셔야 됩니다.

왜 이런 그러니까 말하자면, 이건 하기나름입니다마는 가정교회,. 이런 일에 대해서는 저는 우려를 표명합니다.

평신도들이 열심히 일하는 건 당연히 환영할 일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다룬 것같이 개인들의 체험들이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진리를 대신하여 감동을 자아먹고 공감을 쉽게 상출한다는 것으로 교회를 지키는 가장 근본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성과를 이루는 실용성이기 때문에 이런 방법론이 등장한다면, 교회는 망합니다.

 

방법이라는 것은 그것 자체로 잘못이 없습니다.

어떤 이해와 어떤 근거와 어떤 신학적 이해를 가지고 그걸 쓰느냐가 문제입니다.

그런 면에서 한국교회는 보다 깊은 신학적인 보완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한국교회를 맡고 계시는 모든 진실한 하나님의 동역자들이 제 이 표현을 통해서 이해하시고 인정해 주신다면 너무나 고맙겠습니다.

그동안 20회에 걸쳐서 어렵고 힘들고,, 그러나 중요한 강의를 들어셨습니다.

알아듣지 못하는 이는 여러번 반복해서 보시기를 권하고 알아들으신 분들은, 나가서 이 강의 들었다고 재지 마시고 변화된 삶을 사시고 훌륭해 지시고 여러분 자녀를 하나님의 종으로 만드시기 바랍니다.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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