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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로 가는 길(요 14:1-11) / 임영수 목사

by 【고동엽】 2021. 12. 5.

하나님께로 가는 길 (요14:1-11)

임 영 수 목사

 

어떤 분이 나에게 '당신은 지금까지 예수를 믿어 오면서 얻은 이득이 무엇이요?' 라고 묻는다면 나는

 

세가지를 답변으로 제시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예수를 믿어오면서 그 분을 통해 길, 진리, 생명을 찾았습니다.'

 

나에게 질문 했던 분이 다시 '당신이 예수를 통해 발견한 길, 진리, 생명이란 도대체 무엇을 의미 합니까?라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답변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예수를 통해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찾았습니다.

 

예수의 삶, 죽음, 그리고 부활은 나에게는 하나님께로 가는 방향 지시표였습니다.

 

그 길이 인간으로서 내가 가야할 길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고 그 만남에서 구원, 사랑, 자유를 경험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진리이신 그 분 안에서 참 자유인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 다음 나는 매일 하나님과 교제의 삶 가운데서 생의 의미, 행복, 기쁨이란 영적 양식을 공급 받고 있습니다. 나의 일용할 양식은 그 분으로부터 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는 나의 생명이십니다.

 

 

 

사람은 누구나 무엇을 하든지 그 하는 일을 통해 어떤 의미나 가치를 발견해야 그러한 일을 지속적으로 해 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을 때는 쉽게 포기하게 됩니다. 신앙생활에서도 마찬 가지입니다.

 

세상적 차원에서 얻을 수 없는 그 어떤 의미나 가치를 발견해 갈 때 신앙을 포기 하지 않고 거기에 머물게 됩니다.

 

예수를 믿는 일에서 누구나 경제적 이윤이나 세상적인 성공을 바란다면 결국 실족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람이 빵만으로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 이상의 것을 예수에게서 추구한다면 예수를 이 세상에서 유일한 친구, 스승, 구주로 받아 드릴 수 있습니다.

 

요즈음 봄바람과 함께 귓전에 속삭이듯이 들려오는 마음 아픈 소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저 북녘 땅에서는 지하에 숨어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무참하게 처형되어 가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그들은 비참하게 처형되어 가면서도 찬송을 부른다고 합니다.

 

북한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처참하게 죽어가면서도 예수를 포기하지 않는 것은 그들은 분명히 사회주의 체제, 주체사상에서는 발견하지 못한 값진 것을 찾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를 통해 발견하는 새 삶은 현실 세계를 넘어서 저 영원한 세상, 즉 하나님의 품안으로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삶을 그 어떤 피조물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심지어 죽음까지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이 세상에서 핍박, 환난, 고통, 배고픔, 죽음은 하나님과 더 깊은 연대감을 갖게 합니다.

 

예수를 믿는 일은 어느 시대 어떤 정치체제에서나 적대적이며 반문화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 일에는 많은 도전과 장애물이 있습니다.

 

자유 세계에는 사회적 분위기 자체에 예수를 믿는 일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많은 유혹과 시험이 있습니다. 독제체제에서는 아예 예수 자체가 부인됩니다. 인간이 신앙을 갖는 일 자체가 허용되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인해 세상에서 누릴수 있는 특혜는 없습니다. 세상적 가치에서는 오히려 손해가 많습니다. 예수를 믿는 일은 생명보험, 노후보험, 교육보험과 같은 생의 안전보장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삶은 단지 먹고, 마시고, 일하고, 성관계를 맺고, 재화를 축적해가고, 명예나 권력의 자리를 확보해 가는 것만은 아닙니다. 삶 자체가 그러한 것들이 생의 전부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빵만으로 만족하며 살 수 없는 또 다른 차원이 있습니다. 삶에는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왜'라는 종교적인 질문이 있습니다.

 

'나는 왜 살아야 하는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진정 인간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가?'

 

'나는 나의 길을 찾았는가?'

 

그러한 질문들이 볼륨이 높은 스피커를 통해 고막이 찢어지듯이 들려오지는 않습니다.

 

아주 세미한 음성으로 그것도 우리가 생의 깊은 허탈감, 좌절 가운데 있을 때 세상적으로 굉장한 성공을 이루었다는 허구의식에 사로잡혀 있을 때 균열된 생의 틈바구니 사이로 들려옵니다.

 

그러한 음성을 계속 무시하거나, 그 세미한 말소리를 깨닫지 못하고 자기의 길이 아닌 길로 계속 걸어갈 때, 많은 상징적인 증상들이 간접적으로 말을 걸어옵니다.

 

즉 질병, 실패, 우울증, 갈등, 불면, 적대감, 미움, 두려움, 공포와 같은 상징의 언어들이 우리의 무감각을 송곳으로 찌르듯이 아픔으로 우리를 일깨웁니다.

 

그 때에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깊은 잠에서 깨어나 "내가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라고 도마가 예수께 한 것과 같은 질문을 하게 됩니다.

 

 

 

삶이 그렇게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은 삶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은 우리의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의 삶은 마귀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 외곡되고, 손상을 입어가고, 의미없이 소멸되어 갈 때 그 곳에 있는 영혼은 울부짓고, 고통스러워합니다. 삶의 부정적인 증상들은 영혼의 고통을 반영하는 것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삶의 신비를 깨닫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 나의 간절한 기대와 희망은, 내가 아무 일에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온전히 담대하여져서, 살든지 죽든지, 전과 같이 지금도 내 몸에서 그리스도께서 존귀함을 받으시리라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며,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 (빌 1:21-22)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자기가 가야할 길을 찾아 나서게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 길을 육신적인 차원에서 발견해 가려고 합니다. 종교의 본질은 그 길을 육신적인 차원을 넘어서 영적 차원에서 안내해가는 것입니다. 종교가 그러한 임무를 수행하지 못할 때 생명력을 잃게 됩니다. 맛 잃은 소금 덩어리가 됩니다.

 

예수는 사람이 찾고 있는 그 길입니다. 예수 안에서 자신의 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는 그 길을 열어놓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고, 그 길의 궁극적인 목적지를 마련하기 위해 아버지께로 가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그 길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가 제시하는 길의 궁극적인 종착지점은 하나님 아버지의 품입니다.

 

 

 

본문에 그 아버지의 품안이 '집'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내 아버지의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고 하셨습니다.

 

있을 곳이 많다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무한한 넓은 마음을 의미합니다.

 

 

 

아버지께서 용서 못하실 죄가 없고, 그 분이 받아드릴 수 없는 죄인이 없습니다. 그 분에게는 종족, 신분의 제한도 없습니다. 성차별도 없습니다. 아버지의 집 안에는 우리의 생명을 지속적으로 새롭게 할 수 있는 생명이 있습니다.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은 예수를 통해 바로 그 하나님을 알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에게서 바로 그 하나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곧 그 아버지를 믿는 것과 동일한 의미였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영원한 스승이며, 구주이신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언제나 새로운 이해와 의미로 그들에게 경험되었습니다. 그들의 스승 예수가 그들을 떠난다고 했을 때 제자들의 마음에는 두려움과 근심과 걱정이 생겼습니다. 예수는 제자들의 신앙의 대상과 기반이었습니다. 예수의 부재는 제자들에게 지금까지 구성해온 신앙의 내용을 어떻게 구성해 갈 수 있을까 하는 걱정과 불안감을 안겨주었습니다.

 

한 편 그들이 처해있던 사회적 환경은 그들의 신앙에 끊임없는 도전을 해오고, 마음과 깊은 자아까지도 강타할 수 있는 불안과 유혹을 낳게 할 수 있는 분위기였습니다. 만약 마음이 약해져서 불안정한 공격을 용납한다면 신앙을 포기해버릴 위험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실을 알고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믿고 나를 믿으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떠나시는 것은 그들의 믿음을 흔들리지 않는 영원한 곳에 정초시키기 위함임입니다. 신앙의 정초는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닌 보이지 않는 영원한 곳에 정초시켜야 합니다. 그 영원한 곳이 아버지의 품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계시면서 그들을 그 곳으로 인도해 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도마는 예수께 "주님, 우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모르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 라고 질문했습니다. 도마는 예수께서 가시는 길이 그들이 스승과 함께 목적지로 삼고 걸어가고 있는 그 길, 도마 자신이 가야할 길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바로 그 길입니다.

 

그 때 예수님의 제자 빌립은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주님,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은 빌립에게 따로 보여줄 아버지는 없고 예수님 자신을 통해서 나타내 보여진 그 분이 빌립이 보기를 원하는 그 아버지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정초지는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그 아버지께 우리의 실존의 뿌리를 깊이 내릴 때 생의 의미, 목적을 붙잡게 되고 죽음의 문제까지도 문제 되지 않게 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은 우리의 삶의 근거를 하나님께 뿌리를 내리도록 허용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회의, 무의미, 갈등만을 더욱 증폭시킵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은 그 의미와 이해를 지속적으로 새롭게 해가야 합니다. 그러한 일을 포기할 때 우리의 신앙은 뿌리채 뽑히게 됩니다.

 

하나님은 결코 과거의 존재가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현존하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만나시기 위해 우리에게 계속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삶의 뿌리를 하나님 아버지께 깊이 내릴 수 있는 길은 오직 한 길밖에 없습니다. 영혼의 창을 통해 말씀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예수님을 만나는 일입니다.

 

예수님 안에서만 우리의 신앙에 쇄신이 있고, 세상이 주는 무의미성, 회의를 극복해갈 수 있습니다. 예수 안에서만 우리의 삶은 가치있는 생으로 변하게 됩니다. 우리의 삶의 방식도 역시 바뀜니다. 예수를 통해서 바뀌는 삶의 방식 가운데 중요한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에게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를 볼 수 있는 지혜의 안목입니다.

 

"이러한 안목은 세상을 보는 방식으로 모든 대상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시작됩니다. 존중하는 마음은 다시 보는 눈을 통해 전해집니다. 눈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사건의 이면을 보는 것입니다."

 

- 켄 가이어 -

 

예수님은 그렇게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의 베일 너머로 실패한 다섯 번의 결혼을 보셨고, 다시 그 너머로 이혼 때마다 점점 깊어간 삶의 공허를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거지 나사로의 상처 너머로 영원히 가치 있는 한 영혼을 보셨고, 부자의 옷 너머로 누더기를 걸친 한 영혼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길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며, 고독 가운데 울고 있는 우리의 가면 뒤에 숨어있는 우리의 실체를 보십니다.

 

 

 

"그 길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라는 질문과 "우리에게 하나님을 보여주십시오"라는 요청은 인간이 자신의 무의식 세계 깊은 곳에 간직해 갖고 태어나는 물음입니다. 이 물음은 두 개이지만 의미는 하나입니다.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그에게서 그 길을 발견하고, 그 길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가 가야할 길이며, 우리가 만나야할 진리요, 우리가 그렇게 갈급해 하는 생의 의미, 기쁨, 목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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