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할 때,
이 '믿음'이라는 이해는
성경적인 이해와, 한국 교회의 이해는 거리가 있어보입니다.
예를 들면, 로마서 3:21절 이하의 말씀을 제가 읽겠습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예수를 믿는 것, 그래서 얻는 구원 이것을 복음이라 하고
우리 기독교 신앙에 제일 중요한 초석으로 다 이해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믿음, 그래서 얻어지는 구원을
시작할 때 등장한 바와 같이 21절에 "율법이 아닌" 이라고 단서를 붙입니다.
"율법 이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24절로 가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라고 표현해서, '은혜요, 값없는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설명하느냐 하면, 앞에 있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을 풀어 설명한 것입니다.
"믿는다" 라는 말은 "값없이 얻는 것"이요, "은혜"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뒤에 가서 롬3:27절에, 즉 구원에 관한 설명의 끝에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은혜라는 것을 제대로 이해했느냐/ 못했느냐 하는 것을
자랑이 있느냐/ 없느냐로 분별하는 데까지 갑니다.
이제까지 한 얘기는, 제가 여러가지 말로서 구원에 대한 힌트들을 제가 나열한 것입니다.
이것을 다시 종합해보겠습니다.
▲에베소서 2:8~9절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은혜로, 믿음으로 얻은 구원이요, 뭐가 아니라구요?
행위가 아니라.
그래서 자랑하지 못한다. 하고 계속 대조되고 비교되면서
'구원의 믿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믿음을 설명할 때, 성경이 조금 전에 본 로마서 3장에서나
지금 본 에베소서 2장 8절 9절과 같이
"믿음은 행위가 아니다." 이렇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믿음.. 행위가 아니다.
믿음의 반대 개념은.. 행위고, 율법입니다.
행위와 율법은 동의어고, 믿음의 반대 개념입니다.
믿음은 은혜라 그럽니다. 또는 선물이라 그러죠.
믿음을 설명하는 동의어는 은혜, 선물,
믿음의 반대 개념은 행위, 율법.. 이렇게 나왔죠.
'행위'라는 것은, 행동이라는 것을 말하기 보다는
율법, 법. 인과율을 말하는 것입니다. *인과율: 원인과 결과의 법칙.
◑'믿음'이란? - 인과율, 자기 공로가 아닙니다.
▲성경이 "믿음은 행위가 아니라"는 말은
원인과 결과의 법칙(인과율)이 아닌, 은혜의 법칙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하면
자꾸 "믿으면" 이라는 말을 조건으로 쓰지 않습니까?
믿어서 구원을 대가로 얻고,
안 믿어서 대가로 구원을 얻지 못했다고 생각하면
그 사람은 아직도 '믿음'을 모르는 것입니다.
선물이라는 게 무슨 뜻입니까?
선물이란, 대가를 치루지 않고 받는 것을, 선물이라고 합니다.
'은혜'와 동일한 것이죠. 이유 없이 어떤 결과를 얻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은혜라고 하죠.
믿음은, 이와 같이 선물이고, 은혜에 속하고, 행위가 아닙니다.
'행동하지 않았다'가 아니라,
'율법'이 아니고, '원인과 결과의 법칙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뜻은
예수로 인하여 원인과 결과의 법칙이 아닌,
이유와 조건이 없는, 은혜와 선물의 법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었다는 뜻입니다.
▲믿음을 행위로 만들지 마십시다.
이래야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복음이란 말 그대로 복된 소식이요, 자격이 없는 자에게 허락된 은혜인데
믿음을, 자꾸 조건으로 제시해서 결단을 요구하고
이유와 원인을 우리에게 다그치는 것으로.. 그래서 행위의 법칙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문제가 생깁니다. 믿음이 자기 자랑이 됩니다.
나는 믿었다 그래서 구원받았다. 너는 믿지 않았다. 지옥가도 싸다. 이런 생각(믿음이 자기 공로)이 든다구요.
구원 얻은 신자들이 가지는 우월감 중에는
'나는 믿었고, 너희들은 안 믿었고, 너희들은 거역했기에 벌 받아도 싸다'는 영적 우월감이 생깁니다.
그래서 믿음이, 자기 자랑이요, 자기 공로가 됩니다.
구원 얻은 자가, 하나님이 이 완악한 나의 영혼을 하나님이 녹이셨다라는 감사가 있고
저 영혼도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면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기다림이 있어야 하는데
'나는 너와 다르다, 다른 뭔가가 있다' 할 때, 예수를 믿는다는 말 자체에 대한 오해가 생깁니다.
▲이건 어느 시대, 어느 때나 기독교 신앙이 가지는 가장 큰 걸림돌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자기 자랑을 죄 본성으로 갖고 있는 자들이고
나는 무엇을 해서 이 결과를 얻었다라는 자랑을, 가장 좋아하는 죄성을 가진 존재들입니다.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을, 자존심 상해하고
그렇게 은혜를 입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라는 고백을, 우리는 본성적으로 싫어합니다.
참다운 은혜를 입은 자는, 이런 식의 구별이나 자랑이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우리가 초청하거나 부르거나 구원을 얻어낼만한 조건을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성경에서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3장에서 구원을 설명하고,
롬4장에서 믿음이 뭐냐하는 얘기를 로마서 4장 1절 보겠습니다.
롬4:1,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여러분, 요즘은 성경은 풋노트가 빠져있는데요. 예전 성경을 보시면
1절에 풋노트(각주) 1번이 붙어 있습니다.
이런 역본도 있다구요. 각주1 풋노트가 붙었습니다.
'그런즉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육신으로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이렇게도 번역할 수 있는데,
그것이 사실은 4장의 전체 내용에 더 맞습니다.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이 아니고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육신으로'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이 '육신으로'라는 말은, 행위가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실패했다는 뜻이지요.
2절,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여기서 행위가 뭐에요. 원인과 결과의 법칙이란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원인을 가져서 하나님 앞에 의롭다는 합격을 받아냈느냐 이거에요.
그렇지 않다는 거죠.
3절,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며,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우리가 혼동을 잘 하는데요, 이 3절을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으니까, 믿음이 조건이 되어 하나님이 그를 의롭다 했다 이겁니다.
(이렇게 인과율로, 믿음을 자기 공로로 해석하면 안 됩니다.)
지금 설명하려는 것은, 1, 2절에서도 본 바와 같이
아브라함에게 의롭다 함을 받을 조건이 없었다는 얘기를 지금 하는 중입니다.
4절,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4, 5절이 하는 얘기가 뭐죠? 삯은 뭐예요, 일한 보수 아닙니까. 일한 대가죠.
5절에, 일을 아니할지라도.. 결과를 받았는데 그게 뭐냐, 그게 믿음의 법칙이라는 거죠.
그래서 6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그래서 이게 등장합니다.
이 롬4장의 가치를 아셔야 됩니다.
일한 것이 없이라는 건 무슨 뜻이에요?
원인 없이, 조건 없이, 이유 없이 결과를 만들어낼 이유와 원인 없이
결과를 얻은 자들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도 이렇게 증언했다 말이죠.
7절,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은혜로 사함을 받고 은헤로 의롭다 함을 얻는 자들의 복을 다윗도 고백했습니다.
그래서 13절,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폐하여졌느니라.
이 얘기는 전부, 아브라함에게 허락된 의가, 그에게 조건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약속에 의해서 허락된 것임을 강조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원인 없이, 이유 없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다 하는 것 자체가
믿음이 조건으로 되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조건과 이유가 되시고
즉 하나님의 은혜의 방법, 은혜의 법칙입니다.
이것은 행위와 되조되는.
원인과 결과의 법칙이 아닌, 은혜의 법칙으로
아브라함이 의롭다 함을 받았다.. 를 설명하는 거예요.
▲그걸 우리 많이 오해하기 때문에, 다시 설명합니다.
18절.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라 하심을 인함이라.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랐다.. 그게 믿음입니다.
그런데 오해는,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랬다'를, 그의 (믿음의) 공로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랐다는 건 뭐죠? 본인에게 원인이 없고 자격이 없는 것을 바랬다니까요.
이건 자기에게 일어난 결과가, 아브라함 자신에게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아브라함이 알고 있었다는 얘기에요.
그래서 19절에 이어서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외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다.
무슨 뜻이에요? 그가 이삭을 낳을 수 없다는 거예요.
아브라함이나 사라가 애를 낳을 수 없는데, 그 후손이 하늘의 별 같고 바다의 모래 같으리라는 것을 믿었다구요.
믿음이 모든 것을 대신하는 조건이었다는 건데,
그 믿음이, 아브라함에서 나온 조건이 아니라/인과율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합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을 가진 것은.. 은혜입니다. 자기 공로가 아니라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조건에 있었거든. 애를 낳을 수 없었으니까.
자기에게 조건이 없는데 믿음이 조건이 됐다는 건, 하나님이 조건이 되셨다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의롭다 함을 받은 건, 그가 믿었다는 것이
자신의 조건(공로)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의로움을 이루어내셨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나중에는 신약에 들어와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조건을 삼아,
우리 모두를 구원하시는 십자가 사건과 구원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문제가 성경이 확인하고자 하는 건 이겁니다.
◑구원을 "자기 공로"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4장 1절 2절을 다시 읽어보죠
롬4:1,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자랑을 왜 끌고 들어오죠? 본인에게 이 결과에 대한 이유가 없음을 확인시키는 겁니다.
여러분이 복음을 전하시고 복음을 이해할 때, 자랑이 있는가 /없는가는
구원에 있어서도 그렇고,
그 다음에 신자의 신앙을 점검할 때, 가장 중요한 판법법입니다.
이 부분에 대하여 뜻밖의 한국 교회는 대단히 자랑하고 있습니다.
대단히 자랑하고 있는데, 그것이 현실적으로 많은 유익이 있기도 합니다.
더 많은 열심과 헌신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이해를 갖고 있으면, 깊고 높은 신앙을 쌓아가는데 틀림없이 문제가 생깁니다.
그래서 이 부분은 분명히 정리하고 넘어가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통 얘기하는 식으로 구원의 확신을 물을 때, 복음을 전하고 예수를 믿는다. 그러면
한국 교회에서 자주 쓰는 표현으로 '구원의 확신이 있으십니까?'라고 묻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느 날 어떻게 구원을 받으셨고, 본인의 확신이 있으니까?'라고 묻습니다.
어느날 어떤식으로.. 이런 체험을 제시합니다.
이런 것들은 (다음 시간에 하겠습니다만) 조금 잘못된 구원 확인입니다.
구원의 확인은, 요한복음 9장에 가장 성경적인 설명이 나옵니다.
요한복음 9장은 여러분 잘 아시다시피 실로암 사건입니다.
날 때부터 소경되었던 자를 예수님께서 고치시는 사건인데
예수를 믿는다는 것을 감격으로 확인하는 것은 좋은 확인 방법이 아닙니다.
구원을 얻으면 뭐가 달라지냐면요. 구원 얻지 않은 사람과 영적인 감각이 달라집니다.
한쪽은 죽어있고, 한쪽은 살아있는 것입니다.
이 영적 감각이 환희와 감격으로 충만할 수도 있고 회의와 불안으로 되어있을 수도 있습니다.
확신이라는 것이 충만과 환희로 요구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확인법입니다.
왜냐하면 구원을 받았는데 그것이 충만치 않고
여러가지 요소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필요로 해서 머뭇거리고 불안해하고
자신의 상태가 뭔가 의아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고민하고 쩔쩔매는 것도 감각입니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과 나를 위하여 그 아들을 보내신 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에 대하여
감각이 살아 있으면 그는 구원받은 자입니다. 이렇게 생각해보십시오.
어떤 공동묘지에 천사가 나타나서 공동묘지 시체들에게 내가 이제 나팔을 불텐데
저 앞에 보이는 소나무까지 뛰어갔다오기 선착순 백명까지 구원을 준다.
천사가 나팔을 불고 시체들이 뛰어 왔어요. 백명까지 잘랐어요.
이 백명은 언제 구원을 얻은 것입니까.
내가 뛰어야겠다. 그 복음을 듣고 나는 꼭 백등안에 들거야 라고 결심했을 때입니까?
실제로 뛰어서 돌아왔을 때입니까? 언제입니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시체는 나팔소리고 나발이고 들을 수가 없어요. 우리는 이 문제를 늘 혼동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했을 때, 그 사람에게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에 간섭을 하여 깨우심으로 반응하는 겁니다.
회개라던가 영접이라던가 결단은 이미 구원을 얻은 자의 결과입니다. 반응입니다.
그것이 조건이 아닙니다.
이게 조건화되서 내가 어떻게 예수를 영접했고 어떻게 회개했고
어떻게 각오를 했느냐가 자신의 구원의 근거로 남아서 그것이 이유가 되어서
구원을 결과시킨 것 같이 자꾸 묻고 다닙니다.
그러한 분명한 체험이나 원인으로 삼을만한 감동적인 사건이 없는 사람들은 굉장히 당황해합니다.
내가 이 구원을 얻은 게 맞나. 내가 지금 하나님의 사람인가 아닌가.
이 고민을 하는 것은 그 영혼이 깨어난 사람만이 이러한 고민을 합니다.
그런데 고민을 하는 사람은 심지어 라우디게아 교회 교인들 취급을 하고 빨리 결단을 하라 그러고
몰아서 너무 성급한 결정을 내리게 만들어서 사실은 반발을 사기도 하고
어떤 때는 속과 다른 답을 앞서서 할수밖에 없는 부작용을 낳기도 합니다.
▲성경에도 구원의 확신은 이런 분명한 자기 이유 분명한 자기 증거를 가지는 것으로
구원확신이라 그러는 것이 아니고
로마서 8:29절,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염화롭게 하셨느니라.
여기 등장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을 보면
하나님께서 예정하셨고 부르셨고, 그들을 구원하셨고, 그들을 완성하셨다.. 라고 묘사합니다.
여기 예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는 일들은, 신자들에게 다 일어난 일이고
겪은 경험으로 완료형으로 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염화롭게 하셨느니라는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실 구원의 결국인데 염화의 구원인데
그 완성을 완료형으로 쓰고 있습니다.
우리 신학적 표현대로 하자면 예언적 완료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작정을 완료하셨기에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일이라. 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구원과 신학 문제에 관해서 교파 간의 강조의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고, 은혜를 강조하는 장로교 교리가 있고
인간의 책임과 성실을 강조하는 감리교 교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를 강조하는 것과
인간의 책임을 강조하는 것을 적당하게 조합할 실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느 쪽을 강조하느냐를 가지고, 서로를 틀렸다고 하지는 않기로 (암묵적) 합의를 했습니다.
서로 자기네 교리가 더 잘하는 것이다라는 주장을 할 수 있지만
그것으로 인하여 상대방 교파를 틀렸다고 하지는 않는 법입니다.
이 문제는 신적 지혜와 신적 신비에 관한 것으로
어느것이 더 나은가는, 개인적인 성격과 취향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장로교 목사로, 제가 보기엔 분명히 우리 교리가 훨씬 나아보입니다.
다음에 여기 감리교 목회자 분이 나오시면 감리교의 장점을 얼마든지 자랑하실 수 있습니다.
근데 이제 그렇게 얘기할 수 있는 이유 중에 하나는
신God이 있다면, 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피조물인 인간에 의해서 방해받는 다는 것이
저로서는 납득이 가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시고 신실하시고 은혜로우신 하나님이라고 해놓고서
그런데도 하나님이 인간이 고집부려서 당신의 계획을 실패하는 일이 있다 그러면
우리는 그런 하나님을 안 믿을 판입니다. 그게 우리가 강조하는 하나님의 주권이죠.
여기서 말하는 것도, 우리가 가지는 구원의 확신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아신다
이렇게 무책임하게 책임을 전가하는 식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가지시는 약속과 작정의 신적 능력과 열심과 신실하심과
우리를 항복시키는 역사가
말하자면 우리의 잘/잘못이나 유능/무능 같은 것을 뛰어넘는 결과로 결과된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 일을 그래서 31절 이하에 성경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롬8:31.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이 표현을 여러분 음미해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편든다면
하나님이 이것을 작정하시고 의지를 가지신다면, 누가 신의 의지를 꺾을 수 있다는 말인가. 이 얘기입니다.
그리고 그 의지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를,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보여주지 않았느냐.. 이겁니다.
감히 거기다 대고 무엇이 하나님의 작정을 변경시킬 수 있단 말입니까.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아들보다 더 귀한게. 남아 있는 게 뭐가 있겠느냐.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았는데.
우리가 아무리 못났던. 완악하든.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펼치시는 구원의 힘과 집념이 이러하다면
무엇으로 그 뜻을 막을 수 있단 말인가..
이게 말하자면 우리가 말하는 <구원의 확신>입니다.
구원의 확신이라면, 우리 경험과 확인의 크기가 아니고, 구원의 성격인 것입니다.
한번 구원을 받으면 그 구원은 취소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장로교 교리의 이유가
하나님의 신실하심, 이 구원에 개입된 하나님의 열심을 근거로 하여
이런 교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계속 봅시다.
※그런데 만약 자기의 '결단주의, 값싼 은혜'로 구원 받은 것은, 이 교리에 적용되지 않습니다.
롬8:33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이게 다 뭐냐면, 하나님이 편을 드는데
우리를 그럼 구원을 취소시키려면, 하나님을 거슬려야 된다.
하나님을 패배시켜야만 우리의 구원을 실패시킬 수 있다. 이거죠.
이어서 우리 좋아하는 감격어린 간증이 나오는 것입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람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내게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그래서 (한 번 구원, 영원 구원 교리가) 나오는 겁니다.
◑구원의 확신을 "체험"에 의존하면.. 위험합니다.
▲현실적으로 우리가 예수 믿는 성도들을 대해보면
모태 신앙으로 크신 분들과 중간에 믿으신 분들 사이에 경험상의 차이 때문에
적잖은 구원 문제의 갈등이 있습니다.
중간에 믿으신 분들은 회심하고 예수를 믿은 믿지 않았을 때와 믿은 날의 구별이
분명한 사건과 기억으로 남아있지만,
모태 신앙이신 분들은 그 구별이 뚜렷치 않습니다.
그래서 언제부터 신자였는지. 그게 애매해서 왜냐하면 아니었다가 신자가 된 경계선이
분명한 어느 획으로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구별이 모호합니다.
한국 교회 분위기 속에서는 굉장히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보게 됩니다.
심지어는 교회를 잠시 떠나고 타락했다가 다시 재진입하는
그래서 분명하게 아니었다가 신자인 구별을 확인하려는 그런 시도를 하는 이들까지 있습니다.
여기엔 아까도 말씀드린 것과 같이, 우리가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는다는 문제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뜻밖에 믿는다는 말을 자기도 모르게 조건으로 삼는 식으로 그렇게 가르치진 않았습니다.
은혜라고 가르치고, 믿는다는 말도 성경적인 표현을 쓰면서도
현실적으로는 그게 원인이 되어 버린, 한국교회 지금 신앙의 풍토입니다.
▲믿음이 근거가 되는 바람에, 아시다시피 인간의 책임이 상대적으로 강조되어 있습니다.
이런 것은 사실 한국적 정서가 아니고 미국적 정서입니다.
결단, 영접, 이런 것은 구원 초청, 이런 것은 미국 침례교회가 잘 쓰는 구원초청이었습니다.
우리가 미국의 여러 영향을 받는 중에 기독교도 미국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아서
미국에서 가장 활발히 목회 활동을 하는 교단이 침례 교단이고
신학적으로나 교리적으로나 많이 인간의 책임을 강조하는 그런 정서를 가지고 있습니다.
신학적이고 교리적으로 이기보다 미국식 정서입니다.
미국 정서는 개인의 책임을 매우 강조하고,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강조하는 나라입니다.
개인주의이고 책임을 강조합니다.
헐리우드에서 만든 영화들을 보시면 이런 표현이 아주 자주 등장합니다.
약속을 해라. 이 말을 많이 하죠. 내가 돌아와서 너를 구해줄께. 내가 약속할께.
그걸 지키는 것을 영화의 아주 중요한 절정으로 다뤄서
바빠서 부상당한 전우를 놓고 갔다가 천신만고 끝에 돌아와서
죽음을 무릎쓰고 구해간다든가,
애를 기르는 데 어려움이 있지만, 내가 꼭 아버지 노릇을 하마.
이런 것을 드라마의 아주 중요한 주제로 삼아서 헐리우드 영화를 만드는 것을 보실 겁니다.
구원초청을 보시면 이렇게 되어 있죠. 복음을 전하고 오늘 예수를 믿기로 결정한 사람. 손을 드시오.
일어나시오. 나오시오. 미국 사람들은 전혀 정서적으로 거부감이 없습니다.
초창기에 이 구원초청이 한국 교회에 왔을 때는 웃지 못할 헤프닝이 많습니다.
외국 선교사가 와서 복음을 전하니까 우린 손님 대접을 해야 하는 겁니다.
조그만 시골 교회에서 교인들에게 다 부탁해서 일가 친척 다 모아와라
손님이 왔는데 썰렁하게 대접할 수 있겠느냐고 가득 모였단 말이죠.
이 미국 목사가 구원초청을 하고 통역하고 자, 예수 믿기로 결정한 사람 손 드시오 일어나시오
이러면 다 둘러보죠. 손님대접을 해야 하는데 덜 일어났다 싶으면
권사님도 일어나고, 장로님도 일어나고, 이 선교사는 눈물 범벅이 되죠.
하루에 백명도 구원 얻겠다고 나오고, 이백명도 나오고..
나중에 선교부에 보고된 구원초청에 응한 결신자 수가 남한 인구를 넘어버리고 말지 않았습니까.
그게 어물쩍어물쩍 하다가 어느날부터 정말이 됐어요.
결단을 요구하고 결정을 요구하는 것이 중요한 신앙의 한 증거요,
책임으로 지시되기 시작해서 한국 교회가 가진 큰 에너지 중 하나가 뭐냐면
"나가자, 싸우자, 이기자" 이런게 됐어요.
결단을 하고. 동지가 되고. 한 목표와 사명을 위해서
한 마음으로 뭉친 단체같이 되고 말았다구요.
감사와 찬송이 있는데 애매해요.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 부정하자고 하는 건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이 무엇을 무너뜨리고 있느냐.
기독교의 복음의 은혜성을 무너뜨리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자 이거죠.
거기 등장하는 은혜니 믿음이니 감격이니 하는 것들이
어떻게 성경적으로 이해되고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로써 이해되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우리가 이런 현상들, 우리의 체험과 현실적인 책임이랄까,
현실의 필요로 인한 이해 때문에 본질들이 오해되기 시작하면
머지않아 건물 전체가 붕괴합니다.
꼭 짚고 넘어가야 하고, 모든 이들이 본인이 겪은 체험과 이해가
성경으로 다시 이해되고 정립되어서
과연 성경의 주장과 설명하는 데로 내 체험이 재정리되고 재이해되서
과연 하나님이 베푸신 구원이 복음이.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되도록. 스스로도 말씀앞에 자기를 낮추시고 묶어야 옳습니다.
..
출처 : 냉수 한 그릇
글쓴이 : 김지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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