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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민족을 살리는 지도자 빌2:5~11

by 【고동엽】 2021. 12. 2.

목사가 살면, 교회가 살고, 민족이 삽니다.

 

우리는 오늘 이 자리에 모여서,

‘교회가 살아야 민족이 산다’는 주제로, 함께 은혜 받고자 합니다.

 

물론 우리들의 교회는, 주님께서 살리십니다.

그러나 주의 종들을 통해서, 교회를 살리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목사가 살아야 교회가 살고,

또 교회가 산다는 말은, 곧 나라의 역사가 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목사가 민족의 운명을 결정하는

그런 위대한 존재’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책임은 또한 막중한 것입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애국자는,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 나라의 애국자이시면서, 또한 자기 이스라엘 민족의 애국자였습니다.

 

자기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을 애국자라고 말한다면,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애국자요, 세상 나라의 애국자의 표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민족을 살리는 비전을 우리에게 제시하셨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민족이 로마의 압제 하에 있을 때

제자들은 거의 다 애국심을 가진, 민족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뒤를 따르면서, 어떻게 하면 이스라엘 민족을 로마로부터 해방과 함께

민족을 회복시킬까 하는.. 처음엔 그런 일념으로 예수님의 뒤를 따랐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그 많은 사람들은 실망했고, 좌절했습니다.

왜냐면 예수님의 권능을 의지해서, 민족의 통일을 꿈꾸었던 수많은 당시의 이스라엘 민족,

그 사람들은 모든 것이 다 수포로 돌아가는 것에 대하여, 저들은 한없는 비애감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흘 만에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셨을 때

저들은 큰 기대를 걸고, 이렇게 질문합니다.

‘예수님,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하심이 이 때입니까?’

 

이때 예수님은, ‘때와 기한은 너희의 알 바 아니요,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 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당시에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로마는 ‘힘이 정의다. 힘이 곧 진리다’ 이런 철학을 갖고 있었습니다.

힘을 가지면 평화가 있고, 힘이 있을 때 정의를 이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새로운 진리를 선포했습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너희는 내 증인으로서, 이 세계를 살려놓을 위대한 사람들이 될 것이다’라고 선포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한 민족이 사는 것을, 곧 증인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증인’이란 말은, ‘목숨을 건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목숨을 건 사람들을, 우리는 ‘순교자’라고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복음을 살리는 데 목숨을 건 사람이, 역사를 살려낸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복음을 들고, 거기에 목숨을 거는 목사야말로

이 민족과 사회를 살려내는 위대한 지도자 라는 사실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일찍이 선언해 주셨습니다.

 

복음이 살면, 민족이 살고

복음이 쇠하면, 민족이 쇠합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말하면, 복음이 산다는 것은, 교회가 산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복음만이 민족을 살리는데,

이 복음은, 목사의 심령이 살아있을 때만, 이 역사가 살 수 있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일찍이 우리에게 선언해 주셨습니다.

 

 

▲한국 역사를 볼 때에도, 이 “종교”라는 역사적 소명이

민족의 운명을 좌우한 것을 봅니다.

신라, 고려가 망한 것은, 불교가 쇠퇴할 때였습니다.

 

불교의 진리 추구가 사라지고, 기복적인 샤머니즘으로 집단이 전락될 때

결국은 신라, 고려가 망했습니다.

이것은 유교가 조상숭배와 지리도참설과 결합하면서, 유교의 몰락이 조선의 타락을 가져온 것입니다.

 

지금 기독교가 순수한 복음을 살리지 못하면,

결국 이 영향은, 민족 전체의 생존에 미친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한반도이지만, 북한 땅은 저주 받은 땅이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복음을 거절하고 교회를 폐쇄하고

주의 종들을 핍박하고, 저들을 학살한 그 죄값이

결국 하나님의 진노가 그 땅을 버렸기 때문에, 황무한 땅이 되어버렸습니다.

 

▲서구의 역사를 보면, 러시아나 프랑스에서 유혈혁명이 일어났을 때

영국이나 미국에서는, 영적 부흥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러시아는 교회가 있었으나, 살아있는 복음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러시아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어났고,

공산당이 기독교를 핍박하고 교회를 폐쇄할 때

러시아는 악이 지배하는 그러한 철의 장막의 세계로 전락했던 것입니다.

 

제가 몇 년 전에 러시아에 가서, 모스크바 박물관을 관광하면서

저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당시에 러시아 정교회 사제들이 입었던 그 가운 하나가

상상할 수 없는 보석으로 가득 달려 있었습니다.

 

저들이 앉았던 의자는, 금으로 다 장식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저는 ‘아, 당시의 교회가 얼마나 타락했는지..’를 눈으로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1917년 10월에 러시아에서 공산혁명이 일어났을 때

그 전날 밤에, 정교회 성직자들이 모여서,

가운의 색깔은 무슨 색으로 해야할 것이며

성직자들이 입는 가운에 장식은 어떻게 할 것이며

 

그리고 축도할 때, 손가락을 펼 것인가, 오므릴 것인가..

이런 것을 가지고 밤새도록 다투고 토론하면서 밤을 지새운 그 밤에

바로 공산혁명이 일어나서, 다음 날 온통 붉은 물결이 전 러시아를 지배하면서

 

결국 저들은, 시베리아로 피난을 가면서,

추운 눈보라치는 바람을 맞으면서, 그 사제들이 살겠다고 도망을 치는데

하나님은 저들의 눈물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으셨고

자비하신 하나님의 은총을 부르짖었으나, 하나님은 그들을 외면하셨고,

 

그들이 지나간 자리마다, 그들이 울면 눈물이 얼어붙어서 눈이 감겼고,

저들의 입김은, 입김이 나오자마자 얼어서 그들은 다 죽으면서,

결국은 만리장성처럼 그들의 시신이 쌓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의 타락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러시아의 멸망을 가져왔던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이 교회가 살면, 민족이 살고

교회가 타락하고 망하면, 하나님은 곧 교회를 버리면서

역사도 함께 버리신다는 사실입니다.

 

영국에서는 존 웨슬리의 부흥운동이, 영국을 피의 혁명에서 구해낼 수 있었습니다.

독일은,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독일을 발전시켰습니다.

미국에서는, 1, 2차 대각성 운동이 결국 미국을 선진국으로 발전시켰던 것입니다.

 

▲한국 민족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누가 뭐라던 간에, 복음과 함께 운명을 같이했던 것입니다.

 

이 한국 땅에 120년 전에 복음이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우매한 민중을 미신에서 구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민족독립운동을 교회가 주도해서, 이 민족을 자유화하는데

교회가 앞장섰습니다.

 

해방후의 사회혼란 속에서, 교회는 끝까지 사회주의 사상에서 역사를 지켜왔습니다.

625민족전쟁에서, 이 나라를 기도로 살려내었습니다.

1970~80년대 군사독재시절에, 일부 교회는 민주화를 이루는 지주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통일의 시대를 바라보면서, 교회는 이 민족을 살려낼 정의와

그리고 역사의 구심점을 이룰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지금 도전 받고 있습니다.

 

유명한 아인슈타인은, 교회에 대해 이런 찬사를 보냈습니다.

‘히틀러가 나치화를 단행해서, 독재화 할 때, 나는 대학의 지성인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대학교수들은 즉시 무릎을 꿇었다.

나는 신문과 언론인들에게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며칠이 못 되어, 신문은 필봉을 놓고 말았다.

나는 평소에 관심이 없었던 교회만이, 독재에 항거하여 즐거이 감옥으로 달려가는 것을 보았다.

나는 교회에 한없는 찬사를 보낸다.’

 

교회가 살면, 역사가 살고, 교회가 살면, 민족을 살리고

교회가 살면, 가정을 살리고, 그래서 전체 역사를 살려놓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교회가 누구냐?

물론 우리는 많은 지역교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 마디로 말하면, 목사가 교회입니다.

 

목사가 가는 곳에 교회가 있고,

목사의 설교와 그 사상과 그 신앙과 그 이제 영성과 그 인격이 바로

교회를 만들어놓기 때문에,

한 마디로 말하면, 목사가 그 민족의 역사의 운명을 좌우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목회자 수련회에 모인 여러분과 저는

이 민족의 운명을 우리에게 맡겨놓은, 엄청난 사명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는, 이 민족을 살려놓을 지도자를 애타게 찾고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잘못 생각하면, 지도자는 어떤 정치가나 어떤 사회적인 명사가

지도자 라고 생각합니다. 그건 착각입니다.

 

지도자는 바로 여러분입니다.

우리 민족의 영혼을 살려놓고, 정신을 살려놓을 그런 사명을 감당할 사람인

목사가 바로 이 민족의 지도자라는 사실입니다.

그 사실을 저와 여러분은 깊이 자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민족을 살리신 위대한 민족의 지도자의 표상이십니다.

*유대민족국수주의가 아니라, 유대민족을 살려서, 세계를 살리는 징검다리.

 

당시에 예수님은 유대 땅을 거니실 때, 아무도 그를 지도자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당시에 예루살렘에 유력한 권력층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민족을 살려낼 지도자로, 예수님을 그 땅에 보내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참으로 위대한 지도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스승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지도자 한 사람이 그 시대의 역사의 운명을 바꿉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이 역사 속에서 어떤 건물을 짓느냐, 어떤 제도를 세우느냐

어떤 운동을 여기서 일으키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언제나 사람을 찾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은 일하시고,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 역사를 이루어 가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오늘도 이 가운데 있는 여러분과 저를 통해서

일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을 다스리는 자, 통솔하는 자를 리더 혹은 지도자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지도자를 정치, 사업, 또는 학교 등 각 기관에서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지도자는, 한 마디로 말하면

예수님 같은 사람,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마음을 품은 사람을

하나님은 이 역사를 살릴 지도자로 생각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큰 일을 두 가지 하셨습니다.

하나는, 자기 자신이 이 역사를 살리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는 일이었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떨어져, 그는 썩고 싹을 내기 위해서 내가 죽어야 된다는 생각을 하시고,

그대로 사셨습니다.

 

또 하나는, 주님은 그러한 숭고한 정신뿐 아니라

이 땅의 이 역사를 바꾸어놓을 지도자를 양성하는 일에

그는 그의 전력을 다 쏟아 부으셨습니다.

 

공생애 3년 동안, 예수님이 일관되게 하셨던 사역은

지도자의 양성, 다시 말해서 제자훈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택하시고, 장차 세계를 살려 낼 교회의 지도자가 될 것을 기대하셨습니다.

12제자는 그 신분이나 인물됨이 당시의 사회적 계층에서 볼 때

보통 사람이거나, 그 이하의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학력도 없었고, 능력도 없었고, 사회적으로 인정받지도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교회 지도자의 삶을 이루었고

역사를 살려놓은 위대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유대로, 사마리아로, 로마로 가기만 하면

그 역사를 바꿀 것을 아셨습니다.

왜요? 그들이 들고 있는 복음이, 그 역사를 살릴 것을 아셨던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그들이 이제 예수님을 통해서 배운 한 가지는

예수님 마음을 배우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위대한 지도자의 능력이었습니다.

 

교회를 부흥시키는 것과, 예수님의 마음을 닮는 것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닮지 않고도, 교회를 부흥시킬 수 있습니다.

프로그램 개발할 수 있습니다.

 

어떤 조직을 해서, 조직체 속에서 그는 대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통해서, 역사를 살려놓는 인물로는 쓰시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들이 나더러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니,

이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왜 그렇습니까?

‘내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내 이름으로 권능을 행하고

내 이름으로 너희가 많은 사업을 한다마는,

너희들 마음은, 내 마음을 닮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사업에 관심이 있지, 예수님의 마음을 닮으려 하지 않을 것을

주님이 미리 아셨습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많은 교인들을 상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인들에게서 무엇을 원합니까?

결국 교인들의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을 닮는 것을 원합니다.

 

그러기 전에, 우리 주님은, 우리 목회자 자신에게서

주의 종들에게서 먼저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너희는 내 마음을 닮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빌2:5

 

▲이 세상에는 역사를 움직이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는데

지도자와 지배자입니다.

지도자와 지배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지도자는 정신적 인물이고, 지배자는 정치적 인물입니다.

지도자는 겸손하고 섬기는 정신으로 살고 자기를 희생해서 역사를 살려냅니다.

그러나 지배자는 교만하고, 남을 억누르고 빼앗고 죽이면서

자기가 살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지배자는 스스로 되기도 하고, 사람들이 세우기도 합니다.

남을 넘어뜨리고, 남을 죽이고, 승리하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을 지배하는 이런 사람들을, 많은 사람들은 성공한 사람이라고 부러워하고

그들의 뒤를 따르려고 피나는 경쟁을 합니다.

 

지배자는 자기를 따르는 자가 있으나,

자리에서 내려오거나, 죽은 후에는 아무도 그를 따르지 않습니다.

지배자는 살아서 지배하고, 죽으면 그것으로 끝납니다.

 

그러나 지도자는, 하나님이 세우시고, 하나님이 제물로 삼으십니다.

자기를 비우고 자기를 죽여서, 역사를 살릴 뿐 아니라

지도자는 사람들이 존경하고 흠모하면서 우러러 봅니다.

 

지도자는, 그 정신이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킵니다.

살아있어도 존경 받고, 죽어도 그 정신은 역사를 흔들고, 수많은 사람들의 혼을 살려놓습니다.

영원한 인류의 스승이 되는, 그런 지도자의 표상을

예수님은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한 번 겸손하게 생각해 보십시다.

‘교인들이 나를 존경하고 있는가? 과연 눈을 감았을 때, 우리 목사님을 흠모하고 있는가?’

그런다고 한다면, 그는 지도자가 맞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못한다면, 그는 당회장의 권세를 가진 지배자일 뿐입니다.

 

역사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배자는 살아서 지배하고, 지도자는 죽어서 지배한다.

독재자는 살아서 지배하고, 순교자/성자는 죽어서 역사를 지배한다.’

 

오늘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원하시는 사람은, 즉 지도자를 찾고 계십니다.

로마의 권력, 시저의 권력에 의해서 예수님은 빌라도 총독에 의해 십자가 처형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연대가, 즉 AD의 연대(달력)가

결국 시저의 연대(달력)를 대체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로마 설립 이후 몇 년, 또는 시저 옹립 이후 몇 년.. 식의 달력을 썼음

 

 

◑목회자의 소명은, 자기 비움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지도자의 아름다운 인격을

사도바울은 친히 우리에게 이렇게 표현해 주었습니다.

 

이것은 사도바울이 정리한 신학적 예수님의 기독론에 대한 정확한 그의 정립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하지 않으시고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니,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2:5~8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이면서,

예수님에 대한 인격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한 말씀입니다.

 

사도바울의 기독론은, 사도바울이 정립했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재해석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을 위하여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 막10:45

빌2:5절은, 위 말씀을 재해석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왜 하셨느냐 하면,

예루살렘 성을 향해서 예수님이 나아가시는데,

제자들이 ‘누가 높으냐?’고 서로 다투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저들을 불러다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대인들이 은인이라 칭함 받기를 좋아하지만,

너희는 그렇지 않으니,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저희에게 종이 되어야 하리라’

 

지도자가 되는 원리를, 예수님은 친히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어요.

그 예수님의 생애를 압축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 내가 성육신해서 이 땅에 몸을 입고 온 것은, 곧 겸손이요.

내가 살아가는 것은, 나의 살아가는 생애는 곧 섬김이요,

나의 마지막 희생은 십자가의 죽음으로

그래서 예수님은, 그의 겸손으로 나시고, 섬김으로 사시다가

희생으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그의 생애의 전부를 표현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사랑하는 우리 모든 주의 종들에게 기대하고 계신 그것은

바로 주님의 마음을 품으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을 품는 이 성경의 표현을, 딱 한 마디로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비우라!’ '자기를 비워'

 

오늘 자기 자신을 비우는, 주님의 제자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회중들 : 아멘!

 

소명은 곧 뭐냐?

자기를 비움이 소명입니다.

목사가 되는 게 소명이 아닙니다.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졸업하는 것이 소명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형식적인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소명은 뭐냐?

나 자신을 비우는 것입니다.

이게 주님의 부르심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본체이셨습니다.

하나님과 동등됨을 가지신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자신을 비워서, 하나님 아버지의 소명을 따라 성육신 하셔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이게 예수님의 소명이었습니다. 이 땅에 오신 소명입니다.

 

우리의 소명은 무엇입니까?

나 자신을 비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의 종의 길이요, 지도자의 길이요, 하나님이 우리 각자를 부르시는 소명입니다.

 

자기를 비운다고 하는 것은, 자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포기한다는 말은, 곧 자기를 부정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준 지도자의 표상이요,

이것이 지도자의 영광이며, 이게 지도자의 본질입니다.

 

▲베네딕트 수도회가 있습니다.

거기 수도사들이 들어가면, 일정 교육기간을 마친 후에

수도사로서 종신서원하는 서약식을 하는데요,

이것은 자기를 포기하는, 자기를 비우는 서약식입니다.

종신서원하는 날에, 관이 앞에 딱 놓입니다.

그러면 수도사가 그 관 속에 들어갑니다.

 

그러면 관포(베)를 덮습니다.

그리고 종소리가 온 수도원을 울리면서

침묵이 흐른 다음에, 이렇게 말씀이 선포됩니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라’

 

그는 관 속에 누워서, 죽음을 인정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난 존재로 그는 은은히 감동을 받는 순간

부활절 찬양이 울려 퍼집니다.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추시리라’

 

딱 이 말씀이 선포되면서, 종을 칠 때

그의 관포는 벗겨지면서, 수도사는 엎드린 자리에서 일어서서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의 행사를 선포하리로다!’

딱 일어서면서, 그는 하나님께 다시 산 존재로서 일어섭니다.

 

그때 둘러선 모든 수도사 선배들에게, 평화의 입맞춤을 하면서

종신서원식은 막을 내립니다.

 

이 종신서원은, 한 마디로 말하면

세상을 포기하라. 네 자신을 포기하라. 이제 주를 위해서 너는 죽었고

이제 네 안에 예수만 살았다.. 하는 선서식입니다.

 

 

◑목회자의 소명

 

저는 33세에 목사로 안수를 받았습니다.

 

그때 신학교를 졸업하고 5년이 지난 후에 임직을 받았습니다.

그때 당시에 너무 너무 기뻤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꽃다발을 제게 주었고,

또 축하를 해 주셨습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 느끼는 것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과연 목사 임직식이 이렇게 꽃다발 받고, 축하 받을 일인가?’ *위 베네딕트 종신서원과 비교해 볼 때

 

‘장로임직식 한다고 광고하고, 축하해 주는 것이 과연 진정한 임직식인가?’

이런 생각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에 제 마음속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목사임직식은, 마치 종신서원하는 수도사의 서원식과 같이

여기에다 관을 딱 놓고, 그 안에서 엎드려서

나는 죽는다는 선언식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겠는가..’

이것은 축하받을 일이 아닙니다.

 

교회가 언제부터 타락했습니까? 물어볼 것 없습니다.

성직자 되는 것을 축하하는 의식으로부터 타락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임직식을, 세상의 영광으로 알고 생각하는 그것 자체가

이미 타락의 시작입니다.

우리 자신이 목사 임직을 받은 사람으로서

곰곰이 한 번, 자신을 성찰해 보십시다.

 

장로 임직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꽃다발을 주며 축하해 주면서

그의 마음속에 ‘나는 주님을 위해 죽는다’ 이런 생각을 갖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겠습니까?

‘그 날로 나는 이 교회의 교권을 잡았다. 나는 오늘부터 목사를 견재하는 사람이다.’

이런 생각을 딱 가집니다.

 

목사로 임직하면서 무슨 생각을 하겠어요?

‘내가 오늘부터 목사가 되었으니, 나는 이제 당당히 교인들을 거느릴 교회의 머리가 된다’

이런 생각을 가지는 것 같습니다.

 

목사가 되는 것은 쉽습니다.

설교하기도 쉽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비워서, 종으로서의 소명의 길을 가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오늘 사랑하는 주의 종들과 함께

이 민족의 역사적 소명을 우리에게 주실 때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하시겠습니까?

‘내가 자기를 비워 하늘을 버리고 이 땅에 온 것처럼, 그대들이여, 자기를 비워다오.’

 

자기를 비운다는 것은 뭡니까?

자기를 비움으로 말미암아 겸손해지기 시작합니다.

목사가 되면, 자기도 모르게 교만해지기 시작합니다. 스스로 군림하기 시작합니다.

교인들에게 명령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으로 우리 자신이 타성이 생기면서 타락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장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장로가 임직하면 그때부터 손을 딱 놓습니다. 일을 안 해요.

회의하면서 교인들을 다스릴 생각만 합니다.

 

새벽기도회에 안 나오는 사람이, 새벽기도를 잘 하니, 못 하니 합니다.

헌금도 하지 않는 사람이, 헌금을 어떻게 쓸 것인가에 열을 냅니다.

이런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많습니까.

 

 

◑목회자의 겸손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자신들이 자기 마음을 비우지 않으면,

내가 일생동안 사역해도, 하나님 앞에 설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겸손’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언제나 내 존재에 대한 은혜의 인식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지만,

내가 태어나기 전에는 ‘무’였으며,

내가 살아있는 동안은, 나는 모두 다 빚진자요,

나는 죄인이요, 감히 하나님 앞에서 설 수 없는 내 존재.

이것을 아는 것이 바로 겸손입니다.

 

그래서 겸손하면, 은혜를 아는 자입니다.

겸손과 은혜를 안 다는 것은 일치하는데요,

우리가 은혜를 알면, 집에서도 효자가 됩니다.

부모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은, 부모님 앞에 겸손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나는 가끔 우리 전도사들에게 그럽니다

'부모님을 만나러 인사를 갈 때 반드시 어디에 계시든

그 자리에 엎드려 절을 하라, 그러면 은혜를 받을 것이다'

 

한 번은 우리 전도사가 꼭 월말만 되면 시골에 간데요

사례비를 받으면 아버지께 1/10을 드리려고 간다는 겁니다

‘아 참 효자다’

 

갔다와서

‘인사드렸어?’

‘네 인사드렸습니다’

 

‘어떻게 인사 드렸어?’

‘서서 인사를 드렸습니다’

‘아 동네 아저씨 만났구만’

 

또 갔다왔습니다

‘인사드렸어?’

‘네 인사드렸습니다’

 

‘어떻게 인사 드렸어?’

‘목사님이 큰 절을 하라 해서 절을 했습니다’

 

‘눈물 나던가?’

‘안 나던데요?’

‘의붓아버지 만났구만’

 

또 갔다왔습니다

‘절 했어?’

‘예, 절했습니다’

 

‘눈물 나던가?’

‘네 두 방울 나오데요’

 

‘어떻게 나와?’

‘목사님 말씀대로 어버이 날 나아서 길러내 주셔서...

어버이 아니었으면 내가 어떻게 살았을까’

이 생각을 하니까 눈물이 쫙 나데요

 

‘그럼 지금 무릎을 꿇게’

‘이 사랑하는 종이, 부모의 은혜를 알았사오니

하나님의 효자가 되게 하옵소서!’

축복기도를 해 줬습니다.

 

▲생각해 보면

목사님들에게서 자기도 모르게 교만이 나오는데, 그 교만이란게 뭐냐면

교회도 얼마 사람도 모이지 않는데, 학위를 얻으려고 열심히 공부를 합니다.

학위 얻는 공부가 다 나쁜 게 아니지만, 공부를 해야 되지만

그런데 다른 공부는 하지 않고, 학위만 얻는 공부를 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학위를 얻어야 자기의 어떤 위치가 높아지리라는 생각.. 사실은 교만이죠.

 

다른 공부도 열심히 하면서, 학위를 얻는 사람은.. 겸손이지만

학위만 따 놓고 공부를 안 하는 사람.. 그에게 학위는 교만입니다.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면서, 목사에게 자기 생명을 유지하는 길이, 끊임없이 공부하고 배우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겸손입니다. 겸손한 사람만이 계속 공부합니다.

 

조금만 안정되면, 안 배우려고 합니다.

자기가 최고 어른인줄 압니다.

그러면 막 신랄하게 비판하고, 남의 허물만 봅니다.

 

여러분, 저도 지금 작은 나이는 아니지만, 아주 배우고 공부하는데 신경을 씁니다.

배워야 되니까요.

 

오늘 여기 은혜를 받고, 배우려고 <양수리 목회자 수련회>에 참석하신 여러분께는

겸손이 있으신 줄 믿습니다.

그런데 목회자에게 중요한게 뭐냐면, 겸손 말고도 섬김입니다.

 

 

◑목회자의 섬김

 

예수님께서 친히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신을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죠.

 

예수님은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여기서 ‘종의 형체’라는 표현에 주목하십시다.

우리는 나 자신이 겸손하게 이제 ‘섬기는 종’ 의식을 가져야 됩니다.

 

교인들을 보면서도, ‘나는 섬기는 종이다.’ 이 생각을 늘 가져야 합니다.

교인들을 보면서 언제나 목회자 마음속에는 ‘나는 저들을 섬긴다’

설교도 섬기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섬기는 것이죠.

 

여러분 목회자들이 장로님을 교회에서 세울 때,

절대로 장로님들한테 대접받을 생각은 이제부터 포기하십시오.

 

장로가 되어서 목사를 섬긴다면, 그 사람은 천사입니다.

아마 그 분이 천국에 가실 때는, 예수님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영접하실 것입니다.

(희귀하다는 뜻)

대부분의 장로들은, 장로가 되는 날부터 섬김을 버립니다.

예외도 있습니다만.

 

저희 교회에 너무 착실하고 선한 집사님이 계셔서, 제가 그분께 말했습니다.

‘남들은 당신을 장로감이라고 말하는데, 나는 당신이 장로를 안 하는게 좋겠소’

‘목사님 마음이 그러면, 제가 장로를 안 하겠습니다.’

 

그가 장로가 되어서, 섬김을 잃어버리고, 자기를 비우지 못할까봐 염려되어서

차라리 장로가 안 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사는 것이 천국에 가는 것이지,

장로나 권사 되는 것이 중요한게 아니지요.

 

그래서 그 집사님은, 스스로 장로가 되지 않으려 했지만,

교인들이 결국 세웠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그 사람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집사 때 마음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집사 때의 마음을, 장로가 되었어도 변하지 않으면, 그 분은 천사입니다.

기적입니다. 간혹 기적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목회자 자신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라고 대접받고, 그게 일상화 되면서, 자기도 모르게 섬김을 받으려는 생각이

자기 마음을 지배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자신을 끊임없이 깨트려 나가야 합니다.

 

▲중세기에 성자로 추앙받았던 수도사 로렌스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연습>이라는 유명한 고전적 책을 남겼습니다.

 

그는 서민의 아들로 태어나서, 마음속에 소원이 수도사가 되는 것이었는데

그는 신분이 서민이요, 학벌이 없어서, 또한 몸에 장애를 가졌기 때문에

수도사가 되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의 소원대로 수도사는 못 되어도, 수도원의 주방에 들어가서

요리하는 일로 봉사하도록 허락되었습니다.

 

그는 주방에 들어가서 요리를 만들면서 기도했습니다.

음식에 소금을 뿌릴 때마다 ‘소금처럼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맛을 낼 때마다 ‘맛을 내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청소할 때마다 ‘내 마음을 정결케 하옵소서’

생선이 죽어갈 때마다 ‘나도 죽어 다른 생명을 살리게 하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면서 음식을 만들어, 거기 수도사들에게 대접했습니다.

대접할 때, 천사를 대접하는 심정으로,

‘종들아 상전에게 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그 음성을 들으면서, 주님을 섬기듯 했습니다.

 

세월이 흘러서 수도사들은, 고행과 금식과 기도로 오히려 인상이 찌그러졌으나

주방에서 일하던 로렌스는, 얼굴이 천사처럼 빛나기 시작했습니다.

 

왜요? 그에겐 섬김의 기쁨이 매일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도사들은 날마다 식당에 와서 로렌스의 얼굴을 보면서

예수님의 얼굴을 보는 듯 했습니다.

 

수도함으로 은혜를 받는 것이 아니라, 로렌스의 얼굴을 보면서

예수님의 마음을 닮기 시작했습니다.

후에 전 수도사들이, 로렌스를 수도원장으로 추대했습니다.

그 수도원의 최고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섬김으로써,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주님께 대해, 사도바울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빌2: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섬기는 축복, 이것이 바로 최고의 영광입니다.

 

▲우리 목회자는, 교회만 섬기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지역사회를 보면서 ‘나는 지역사회를 섬기는 자다’라는 심정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세우신 것은,

숭고한 사명입니다.

천사가 흠모할만한 사명을 받은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섬긴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요.

 

여러분, 모든 사람의 종이 있습니까?

종은 원래 한 사람의 종입니다.

로마에 가면, 로마 권력층이나 부자나 주인은, 그 집 한 사람입니다.

모든 사람의 종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느니라.’ 막10:44

 

무슨 뜻입니까? 모든 사람이 섬기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 사람이 주인(으뜸)입니다.

주인은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너는 장차 섬기는 자로서, 주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이신 우리 사랑하는 목사님들이, 역사의 주인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 예수님의 생애가 섬김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목사 임직식과 장로 임직식에 가보니까

전부다 머리에 안수를 하는데요.

안수 받으니까 그런지 머리만 커져가지고, 헤딩만 한단 말이에요.

‘이것(머리에 안수)이 문제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아, 이게 성경적으로 어떤 근거가 있는지’ 살펴보니,

예수님은, 사도들을 파송하면서, 머리에 안수하신 적이 없었어요.

이것은 구약의 전통이었습니다.

구약 때, 제사장들과 왕과 선지자에게 기름을 머리에 부어서 지도자로 세웠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예수님이 오신다는 모형이었습니다.

제사장 중의 제사장

왕 중의 왕, 선지자 중의 선지자로 오실 예수님에 대한 모형이

기름을 붓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기름부음을 받으셔서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그 사명을 감당하셨습니다.

 

그리고 보니까, 예수님은 ‘머리에 안수’를 하신 게 아니라

‘발에 안수’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제자들의 발을 다 씻기신 것입니다.

 

베드로가 ‘주여, 제 발을 어찌 씻기십니까?’

‘내가 씻기지 않으면, 너와 나는 상관이 없느니라’

무슨 뜻인가 하면, ‘내가 네 발을 씻김을 통해, 상관이 있는데

내가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너를 씻긴다’는 것을 모형적으로 보여주시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섬김은 자기가 죽음으로써 하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발을 씻겼습니까?

발은, 우리의 몸을 받들어주는 무거운 짐을 홀로 지고 있는게 발입니다.

육중한 육체를 발이 받쳐주고 있습니다.

무거운 짐입니다.

 

-발은 가장 낮은 지체입니다.

모든 지체는 발 위에 있습니다.

‘모든 지체여, 높아져라. 나는 낮아지겠다.’

 

-발은, 더러운 땅을 디딥니다.

시궁창에도 발이 제일 먼저 들어갑니다.

모든 봉사의 자리에, 발이 제일 먼저 들어갑니다.

 

이것은, 십자가의 정신입니다.

‘무거운 짐을 나홀로 지고 죽노니, 그대들은 안식하라’

 

‘나는 하늘을 버리고, 낮아져서 죄인으로 십자가에 죽노니

그대들은 모두 다 하나님의 자녀로 높아져라’

내가 모든 죄와 허물을 다 홀로 지고, 그대들을 의롭게 만드노니

그대들은 의로워져라.’

 

예수님이 발을 씻기신 것은, 신비한 비밀입니다.

 

그래서 저는, 장로를 임직하면서

미리 장로님들의 발을 씻어드리는 세족식을 했습니다.

그분들의 발을 제 손으로 붙들고 기도합니다.

 

‘오 주님, 이 장로님이 발 사도가 되게 하여 주소서. 발 장로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발처럼 무거운 짐을 지게 하시고, 낮아지게 하시고

섬기게 하시고, 모든 죄인들을 높이고, 허물을 대신 담당케 하여 주소서’

 

 

◑마치는 말

 

오늘 이 양수리 목회자 수련회에 참석하신 목회자 여러분,

이 민족을 살리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을 부르셨습니다.

어디로요?

십자가로 부르셨습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지신 형틀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이 십자가의 길이 바로

나도 살고, 교회도 살고, 민족도 살려놓는 길입니다.

이 귀한 역사가, 여러분들을 통해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주님의 소명이 뭡니까?

‘너도 십자가를 지라’

 

▲얼마 전에 서울 거리에, 많은 사람들이 길거리에 운집해서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뭘 쳐다보는지 살펴보니까, 교회 종탑 십자가에

어떤 사람이 뭘 수리하느라고, 거기 높은 데 올라가서, 산소용접을 하고 있었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한 수리공을 보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우러러 보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머릿속으로 즉각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렇다. 산소 용접을 하는 저 수리공이

십자가에 매달려 있어도, 수많은 사람들이 우러러 보는데,

십자가에 달려 죽는다는 것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현재와 과거와 미래 역사를 향해서, 우러러 보면서 존경할 것인가!’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빌2: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하늘에 있는 자들.. 천국에 간 성도들과 천사들입니다.

땅에 있는 자들.. 현재 생존해 있는 사람들입니다.

땅 아래에 있는 자들.. 지옥에 간, 심판 받은 사람입니다.

 

어쨌거나 모든 사람들이, 다 우러러 본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11

여기서 주는 퀴리오스,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퀴리오스는 다른 말로 ‘주인’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섬길 때, 십자가를 질 때,

우리가 사는 시대에 ‘역사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자리에 모이신 여러분들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달려 죽는 자가, 주인입니다.

권력 가진 자가 주인이 아닙니다.

부유한 자가 주인이 아닙니다.

부동산 땅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주인이 아닙니다.

 

‘내가 이 민족을 위해서, 나는 죽는다.’

그 과정에 손해가 되는 길을 걸어가는 사람은, 그가 바로 주인입니다.

 

▲저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대학을 졸업할 때, ‘이 대학의 주인이 누구입니까?’

이사장이 재정적으로 많이 부담했으니까, 그가 주인입니까?

행정적 주인은 총장입니다.

 

그럼 진정한 주인은 누구입니까?

그 학교에서 인물이 나오면, 그 사람이 그 학교의 주인이 됩니다.

남들이 뭐라고 말합니까? ‘아무개는 어디 학교 출신이야’ 그럽니다.

 

대학을 다니면서 '이 대학은 장차 나 때문에 유명한 대학이 될 것이다.'

이 생각을 하면서, 그 대학을 다니면, 나중에 그 대학의 주인이 될 것입니다.

 

오늘 사랑하는 주의 종들이, 이제 이 역사에 나는 이 민족의 주인이다는 의식을 가지고 땅을 밟으세요.

여러분의 교회에서 그 생각을 하십시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나와 같이 십자가에 죽는다면, 너는 역사의 주인이 될 것이다.'

 

오늘 사랑하는 주의 종들의 눈이 열려지시길 축원합니다.

하늘로부터 신령한 음성이 들려지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이 역사를 살려놓는 위대한 주님의 세우신 지도자,

섬기며 겸손하며

자기를 희생시키며 자기를 비워 주님의 마음을 품는 사람이

바로 이 역사의 주인공이 될 줄 믿습니다.

 

두 손 들고 기도하겠습니다.

이 시간, 주여 나를 죽여주시옵소서.

저를 제물로 써 주소서.

그래서 교회를 살려주시고, 이 민족을 살려주시옵소서.

합심해서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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