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및 설교의 주제
▶사무엘상 17장으로 가봅시다. 각자 성경을 찾아서 읽어보세요.
그 유명한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고
다윗이 믿음으로 큰 용사 골리앗을 물리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모든 성도들이 가지는 신앙의 모델입니다.
‘나도 골리앗을 물리친, 저런 승리의 용사 다윗처럼 영웅으로 살자!’
우리는, 하나님을 모욕하며, 우리를 반대하는
이 세상과 악의 세력들에 대하여
이런 승리자 다윗으로 서서,
우리의 삶에 전반에 걸쳐서 이런 극적인 승리가 있기를 기대합니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가 않아서, 우리가 실패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진심과 열심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이 승리가 경험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만이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친 사건에 대한 갈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 자체가
다윗을 논할 때, 골리앗을 물리친 영웅으로 다윗을 높이거나 평가하거나
재론하지 않는 데에, 사실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성경은 어디에도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친 삼상17장의 다윗을 강조하지 않고
신앙인의 모델로 선정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참회의 고백을 했던 시51편의 다윗을, 성경은 부각시킵니다. ←주제
▶우리는 신약을 시작할 때,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마1:1절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예수가 소개되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이 족보에 소개되는 다윗은
골리앗을 물리친 사람으로서 다윗이 아니고
다른 것(깨어지고 회개한 모습)으로 다윗을 논하고 모델을 삼고,
신앙의 중요한 핵심 되는 내용을 거기서부터 보여줍니다.
골리앗을 물리친 사건에서는 다윗에게 있는 어떤 면도,
믿음의 어떤 성질도 추출해내지 않고 있습니다.
◑이제 사무엘하를 쭉 연결해보면 간략하게 설명을 드리죠.
사무엘하 5장에서, 다윗이 비로소 이스라엘의 공식적인 왕으로 취임합니다.
그 전에는 그가 골리앗을 물리치고, 영웅이 되었지만
사울이 왕으로 아직 건재하고 있고,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해서
피난을 다니고 도망 다니는 행적이 쭉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여러 번 그 위기를 만나고, 나중에는 블레셋에서까지 피난처를 구하는
그런 도피 행각을 벌이고 미친 척을 해서 사지를 벗어나기도 하는
그런 참담한 유랑생활을 오랫동안 지냅니다.
그러고 나서 사무엘하 5장에 와서야, 사울이 죽고,
온 12지파 이스라엘이 비로소 다윗을 왕으로 인정하여 왕위에 앉습니다.
그리고 사무엘하 6장에 가서야 언약궤를 다윗 성으로 모셔오게 되고
사무엘하 7장에 가서 다윗이 성전을 짓겠다는 소원을 하나님 앞에 드립니다.
▶사무엘하 7:6~12절입니다.
이 대목은 아주 중요합니다.
사무엘하 7장 6절은 다윗이 하나님을 위해서 성전을 짓겠다고 하자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보내어 그에 대하여 답하신 내용입니다.
삼하7:6~12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부터 오늘까지
집에 살지 아니하고 장막과 성막 안에서 다녔나니
이스라엘 자손과 더불어 다니는 모든 곳에서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먹이라고 명령한
이스라엘 어느 지파들 가운데 하나에게 내가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위하여 백향목 집을 건축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하였느냐..
그러므로 이제 내 종 다윗에게 이와 같이 말하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 데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고 네가 가는 모든 곳에서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원수를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세상에서 위대한 자들의 이름 같이 네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어 주리라.
내가 또 내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한 곳을 정하여 그를 심고 그를 거주하게 하고
다시 옮기지 못하게 하며 악한 종류로 전과 같이 그들을 해하지 못하게 하여
전에 내가 사사에게 명령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와 같지 아니하게 하고
너를 모든 원수에게서 벗어나 편히 쉬게 하리라.
여호와가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다윗이 하나님을 위하여 전을 짓겠다고 하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뭐라고 그랬다고요?
‘내가 언제 너희들보고, 왜 내 집 짓지 않느냐고 말 한 적이 있느냐?’ :6~:7
그리고 대신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로 주권자를 삼고 네 나라를 견고케 하고 영원케 하리라’ :8~
본문의 흐름을 꼭 이해하셔야 됩니다.
잘못 읽으면, 하나님이 다윗 왕에게 하신 말씀을 오해하는 데요.
‘내가 누구보고 내 성전을 지으라고 했느냐. 내가 말도 안 했는데
너는 나를 위해 집을 짓겠다고 했구나. 참 기특하도다.
그러니 내가 너를 왕으로 삼고 네 집안이 왕권을 잃는 일이 없는 축복을 주리라.’
이렇게 오해하게 됩니다. 이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문맥을 잘 파악해 보세요.
‘내가 언제 너희보고 나를 위하라고 하더냐.
내가 너희를 위하지. 내가 하나님이고 너희가 내 백성이지
왜 너희가 나를 위해서 너희가 해줄 것이 무엇이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베풀 수 있는 유일한 하나님이지.
그러므로 내가 너를 주권자를 삼고 이 나라를 이제 한 곳에 정착케 하여
해함과 상함이 없이 내가 보호하고 너희 집에 왕권을 허락하고
그 왕권이 영원하게 하겠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전을 짓게 하겠다.’
정리하면,
‘내(하나님)가 너희에게 은혜와 구원을 주는 것이지,
네(다윗) 헌신과 정성에 내가 감동하여 이 복을 주겠다는 것이 아니다.’ 이 말입니다.
▶이게 계속 나오는 이야기거든요. 8절부터 다시 봐요.
‘그러므로 이제 내 종 다윗에게 이처럼 말하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데서 취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고’
9절 ‘네가 어디를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세상에서 존귀한 자의 이름 같이 너의 이름을 내가 존귀케 만들어 주겠다.’
전부 하나님이 하시는 거예요.
다윗이라는 존재의 가치, 영광, 승리, 역할,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근거가 되시고,
하나님이 그의 힘과 은혜와 신실하심으로 작정하시고 이루어주시는 것이
다윗 왕권의 영원함이고
다윗 왕의 우리가 아는 아름다운 이름들, 영광스러운 이름들의 근거인 것입니다.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은혜/선택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삼상17장에서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치고 고국의 영웅이 되고
우리 모든 신자들의 말하자면 신앙의 최고의 모델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 후에도, 블레셋으로부터 나라를 구한 다윗은
그 이후에 사울에게 쫓겨 다니지만
사울을 향하여 적대 행위를 하지 않고
사울이 죽은 후에 사울이 죽은 것을 보고한 자를 오히려 죽이고
사울 집에 남은 자들을 선대하고 이웃나라를 쳐서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그리고 또 여호와를 위하여 전을 짓겠다고 하고.
여기까지 뭐 우리 모두가 보는 너무나 멋진 신앙의 행보를 해온 다음에
그리고 사무엘하 11장에 가서 밧세바 사건이 터지는 것입니다.
다윗의 생애는 어떤 면에서 보자면
사무엘상 17장(골리앗 승리)에서 사무엘하 11장(밧세바 패배)에 오도록
신앙상의 아름다움들, 온전함들, 승리들이
무엇을 근거해야만 가능한 것인가를 보이기 위한 인생으로 인도함을 받았다.
이렇게 생각해도 무방합니다.
왜냐하면 이 삼하11장을 위하여, 그 앞장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다윗의 그 잘난 신앙의 승리와 실력들이
하루아침에 한 사건으로 완벽하게 무너집니다.
그리하여 다윗이 무엇을 알게 되는가 하면
자기가 가진 모든 신앙과 하나님에 대한 헌신이나 마음의 소원들이
다 자신의 종교성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을 찾아와 항복시키고 선물로 주신 은혜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것이 시편 51편입니다.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와서 이런 비유를 듭니다.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를 자식처럼 기르고 있는데
옆집에 사는 부자 가 그 많은 양떼를 놓아두고, 자기에게 온 손님을 대접하기 위하여
옆집에 있는 이 한 마리 양 가진 이 집의 양을 빼앗아서, 손님에게 대접했습니다.
다윗이 뭐라고 판결을 내렸죠? ‘잡아서 죽여라.’ ‘당신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렇게 되어 다윗이 자신이 한 짓을 그때 깨우치고 회개하여 지은 시입니다.
이 내용 중에 중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다윗이 옆집의 양 하나 빼앗아간 자의 죄를 판정하면서도
자기가 지은 죄를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굉장히 놀라운 일입니다.
골리앗을 물리치고 사울 왕의 적대 행위를 믿음으로 감수하고
하나님 앞에 성전을 짓겠다고 작정한 자가
자기가 한 짓이 무엇인지를, 그때까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꼭 기억하십시오.
누군가가 죄 짓거든 눈을 치켜뜨고 그러시는 것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본성입니다. 죄는 우리의 힘입니다. 몹쓸 힘입니다.
▶51:1~3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주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이 시작부분을 보시면 ‘내가 회개하오니 용서해주시옵소서’ 이게 아닙니다.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 공로가 없다는 고백입니다.
내 잘못을 내가 갚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시입니다.
그러니까 주의 인자를 쫓아 긍휼히 여기소서입니다.
주의 많은 자비를 쫓아 이 죄를 씻어주소서.. 입니다.
▶3절을 다시 보시죠.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그 말은 비유를 하자면 이런 뜻입니다.
내 안에 있는 어떤 생각이 나갈 때, 오염된 내 몸을 통하여 나가기 때문에
늘 죄의 오염되어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뜻이며
내 안에서 나오는 것이, 언제나 더러운 물일 수밖에 없습니다. 맑은 물이 나오지 않습니다..
▶:4~:5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나는 전부가 죄로 만들어졌습니다.
나라는 존재의 모든 세포와 요소가, 성격의 모든 것이 죄로 만들어 졌다는 말입니다.
내 본질이 죄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6~:13. 보소서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 내게 지혜를 은밀히 가르치시리이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내게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들려 주시사 주께서 꺾으신 뼈들도 즐거워하게 하소서.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지워 주소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그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나중에 사도 바울의 딤전1:12절의 ‘내가 죄인 중에 괴수이니라.’
라는 말씀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것 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에 일관된 내용이죠.
우리 죄인들이, 자신의 죄인됨과 무능함을 철저히 고백하고,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함을 얻는 것이죠.
▶:14~:16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제사를 좋아하시지 않는다’는 말은, 구약 성경에서는 있을 수 없는 말입니다.
이것은 완전히 구약의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졌던 신앙의 개념을, 이해를
송두리째 뒤엎는 말입니다.
저들은, 제사를 드리는 것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길이며
자신들의 특별한 지위이며, 뭐 이렇게 다 긍정적인 것으로만 이해하고 있는데
갑자기 다윗이 뒤엎어버렸죠.
그러면 어떤 의미로
하나님을 경배하며 하나님을 만나러 가는 것을 뒤엎자는 것이 아니라
자기 공로로서 바친다는 의미의 제사는 없습니다. 이런 뜻이죠.
하나님은, 우리가 만든 것을 받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로부터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것을 만들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우리에게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사실 번제가 무엇입니까. 제사란 전부 속죄 제물이죠.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를 하기 위하여, 우리의 지금 상태로는 불가능하다,
하나님에게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확인 시키고
그 일을 위하여
누군가 우리 죄를 대신 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킬 중계자가 필요하다.
이것을 이해시키는 것이 제사인데,
아차 잘못 하면, 우리의 정성과 진심을 하나님이 받으신다고 생각하고
기독교 신앙은 갑자기 ‘공로주의’가 됩니다.
누가 더 열심히 해서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것의 싸움이 되는데
그렇지 않다.. 라는 이야기입니다.
▶:17절. 그래서 결론이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이것이 되는 것입니다.
상한 심령이라는 것은 뭐죠?
마태복음 5장 식으로 이야기 하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입니다.
그 뜻이 무엇입니까?
내가 가난하고/ 겸손한 마음/ 간절한 마음을 가지면
복을 받는다.. 라는 조건 구절이 아니고
심령이 가난한 것은, 복을 받은 증거이고/ 증상이고/ 확인이라는 뜻입니다.
감기에 걸렸다는 것을 무엇으로 알죠?
열이 나고 기침이 나고 콧물이 나면, 감기에 걸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것은, 복을 받은 증상입니다.
복을 받으면 보상을 받고, 형통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았다는 것으로 복을 받고,
그래서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신자의 현실은,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이고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안 되는가를 확인하는 것이,
거룩한 삶의 진전과 병행되기 때문에
신앙상의 승리보다 (삼상17장 보다)
더 많이 자신에 대한 좌절과 절망이 경험이 됩니다. (시51편)
이것 때문에 오늘 서두에 시작한바와 같이
신자의 신앙 현실은, 승리와 형통으로 나타나지 않고
절망과 실패로 더 많이 경험 됩니다.
▶정리하면,
우리는 다윗으로 대표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상 17장 다윗이 아니고, 시편 51편의 다윗으로 서게 됩니다.
성경은 이 사실을 여러 번 강조할 것입니다. (아래에서 계속 살펴봅니다.)
◑예를 들어 히브리서 10장입니다.
히10:1~9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하게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제사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그러나 이 제사들에는 해마다 죄를 기억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그러므로 주께서 세상에 임하실 때에 이르시되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번제와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느니라.
위에 말씀하시기를 주께서는 제사와 예물과 번제와 속죄제는 원하지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째 것을 폐하심을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
▶위 히브리서 10장 말씀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율법으로 해결할 수 없었던 죄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는 그 속죄제와 구원을 위한 대제사장으로 메시아로 오시게 되었고
내용상 어떻게 우리의 구원이 되셨는가를 설명하는 부분입니다.
그때 무엇을 인용하느냐 하면 다윗이 고백한 이 사실,
‘하나님께서는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신다.’
이것을 근거로 하여, 그 말이 갖는 의미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우리의 진심이던 열심이던 아무리 아름다운 것이든
하나님 앞에 우리의 것을 바쳐서 우리의 구원을 살 수 없다.
우리가 만드는 것으로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이 없다. 라는 것으로
대속자의 필요성을 확인시키고 그 대속자로 메시아가 오셨느니라.
이것으로 이 말씀을 인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을 논할 때는 언제나 이 문제,
그가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라는 것을 위하여
다윗이 서 있는 것입니다.
골리앗을 물리친 영웅으로 다윗이 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제사를 원치 않는다. 라는 그 확인을 위해서
그의 생애가 있다는 것입니다.
다윗을 통하여, (우리 모두가 다윗이 그랬던 것처럼)
소원은 있으나 늘 거룩한 것을 만들 수 없고
진심이 있으나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없는 우리 자신,
죄인 된 우리 자신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아까 우리가 본 시편 51편은
또 다른 많은 다윗의 회개의 시를 낳는데
시편 40편으로 가보시면, 조금 더 구체적인 다윗이 경험한
자신의 본질적인 죄성과 죄인 됨에 대한 절망을 설명한 내용을 만납니다.
◑시편 40편입니다.
40:1~8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게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여호와를 의지하고 교만한 자와 거짓에 치우치는 자를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아
누구도 주와 견줄 수가 없나이다. 내가 널리 알려 말하고자 하나
너무 많아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
주께서 내 귀를 통하여 내게 들려 주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제죄를 요구하지 아니하신다 하신지라.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
▶이제 아까 시편 51편에서는
1차적으로 말하자면 순서상 그것이 먼저 쓴 회개의 시 같습니다.
거기서는 다윗이 자기가 어떻게 본질적으로, 총체적으로 죄인인가를 고백하여
하나님 앞에 구원과 자비와 용서를 구하며
거기서 인간은 자기의 죄를 해결할 능력이 없고
하나님을 만족시킬 아무런 것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라는 것을 고백했다면
이제 이 시편 40편은 보시면, 1절 자체가 그렇듯이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라고 해서
조금 더 깊은 하나님의 답을 받아낸 그 다음의 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는데, 나를 기가 막힌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셨다는 것입니다.
그가 해결할 수 없었던 것. 시편 51편에서 고백한 것.
우리는 우리의 죄인된 것을 해결할 방법이 없다. 라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답을 여기에 쓰고 있습니다.
나를 기가 막힌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이제 구원을 확보하는 것입니다.
그 구원은 어떻게 되어 있느냐 하면
5절에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도소이다.
내가 들어 말하고자 하나 주 앞에 베풀 수도 없고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
기적이 많습니다. 많다는 것은 수적으로 많다는 의미가 아니고
질적인 의미로서 많다는 의미를 동시에 포함합니다.
그것이 2절에 있는, 나를 기가 막힌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신 기적인 것을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이 뭐냐. 6절.
‘주께서 내 귀를 통하여 네게 들려 주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제죄를 요구하지 아니하신다 하신지라’
그러니까 우리보고 이 문제를 해결하라고 하지 않는다.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이죠.
‘우리는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나도 너희에게 그것을 하라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러면 어떻게 하실 것이냐.
‘그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했고
이 문제를 해결하는 제 3자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7~:8 ‘그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르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
이것은 지금 다윗, 하나님 외의 제 3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아까 본 히브리서 10장이 바로 이것을 인용하고 있거든요.
히브리서 10:5절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이르시되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번제와 속제죄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느니라’
전부 시편 41편 아까 읽었던 그 구절을, 약간 의역해서 인용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5절 다시 보죠.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그래서 시편 40편에 다윗이 경험한 바
하나님이 행하신 기적의 가장 최고의 기적으로
그가 경험한 것이 뭐냐.
‘우리를 위하여 구원자가 있다.’ 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실제로 히브리서 10장에 보는 것과 같이
이 예수 그리스도인 것을
히브리서에서 인용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장 되신, 우리의 구원자 되심을 설명하면서 무엇을 인용한다고요?
다윗의 이 경험. 다윗의 이 경험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
그 주인공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를 인용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예를 들면 시편 32편에
이렇게 다시 또 다윗의 놀라운 고백으로 등장하고
신약이 계속 그 말씀을 인용하는 것과 만납니다.
◑시편 32편입니다.
:1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은 아마 셋으로 따져 보았을 때 가장 나중에 쓴 것 같아요.
:2~:5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물론 회개했죠. 그러나 그 회개해서 하나님이 용서하시고 구원한 것이 아니고
회개마저도 이유가 아니고
우리가 순서 따라서 본 것과 같이 먼저 확인한 것이 뭐죠?
우리는 죄밖에 지을 수가 없다.. 라는 우리의 처지를 확인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하여 구원을, 기적을 베푸시지 않는 한 우리는 방법이 없다.
라는 것이 나오고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구원자를 준비했다는 확인이 나오고,
그리고 이제 여기에 32편 같이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라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받는 은혜에 대한 감사가 터지는 것입니다.
◑이 시32편을 로마서 4장에 가면, 이렇게 인용합니다.
로마서 4장은 무슨 이야기를 하는 중이냐 하면
로마서 3장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이
어떻게 믿음으로 되는 것이며,
믿음으로 된다는 것은
믿음이 조건으로서의 믿음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방법이라는 차원에서 믿음으로 된다고 이야기 한다..
라는 것을 설명하고
그래서 이제 로마서 4장에서 아브라함을 예로 들죠.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자랑할 것이 없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 구원이 다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은
우리에게 근거와 원인이 없다.. 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4:6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바로 조금 전에 본 시편 32편의 인용이죠. 이게 무슨 이야기에요?
하나님이 그냥 용서하시는 사람은 복이 있다는 말이에요.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는 사람이 복이 있다. 이해하시겠죠?
훌륭하면 복이 있다던가 성실하면, 능력이 있으면 복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는 자가 복이 있는 것입니다. 이게 기독교입니다.
▶정리하면,
우리가 우리의 신앙에서 확인하는 것이 뭐라고요?
구원을 얻은 이후에 확인 하는 것이
우리가 어떻게 은혜로 구원을 받았느냐. 라는 것이
물론 우리에게 믿음의 의역과 헌신을 만들어 내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얼마나 값 없는 사람인가,
우리 안에 어떻게 아무 종교적 열심과 공헌, 효율, 가치에 대하여
우리 안에 가진 것이 얼마나 없는가를 확인하는 것이 함께 간다는 거예요.
신앙상의 여러분이 절망과 가난함을 느끼는 것은
아까 예를 든 바와 같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도다. 라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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