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의 전쟁(The War of Bread)> - 프롤로그 마흔 다섯의 헌신
(1)
여기 한 폭의 그림이 있다.
전쟁터에서 사랑하는 조카 롯을 구출한 후 승리감에 도취된 채 돌아오는 아브라함......
자신이 빼앗긴 부하와 재물을 되찾기 위한 계략을 품고 아브라함을 기다리는 사악한 소돔왕 베라...... 그들 사이를 가르고 떡과 포도주를 들고 갑자기 나타난 대제사장 멜기세댁......
이것이 바로 우리 크리스천들이 처해 있는 상황이다.
성경 전체의 내용을 압축적으로 담은 표지 그림이라고 할까?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는 우리는 분명 하나님의 힘으로 전쟁에서 승리한 사람들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임무는 죽음 가운데 놓인 우리들의 조카 롯을 구출하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는 전쟁의 전리품을 가득안고 기쁨에 가득 차서 승전가를 부르며 행진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현실은 결코 만만치 않다. 우리보다 훨씬 지혜롭고 계략이 뛰어난 사악한 소돔왕이 우리와 한판 승부를 걸고자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의 전쟁은 창과 칼의 전쟁은 아니다. 21세기는 경제 전쟁의 시대다. 오히려 떡을 사이에 둔 비즈니스의 전쟁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전쟁터 안에서 살아간다. 국제 사회에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분쟁과 전쟁 상황도 그 이면에는 냉혹한 떡의 논리가 숨어 있다. 이라크 전쟁이 대표적인 예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일상 속에서도 순간순간 선택해야할 수많은 떡들이 협상 테이블에 놓여있다. 소돔왕 베라는 음흉스런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맞이한다. 그리고 겉으로 멋들어지게 보이는 협상안을 제시한다. 내가 너에게 내 떡을 주마. 그리고 우리 사이좋게 지내자. 그리고 나에게 절만 하면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해결해 주마. 우리는 결코 그 유혹을 물리칠 만큼 강하지 않다. 항상 그 유혹에 넘어가고 먹어서는 안 될 떡을 취하고 소돔왕과 더불어 화친하고 마침내 그의 노예로 전락하고 만다.
떡의 문제는 불신자뿐 아니라 크리스천에게도 대단히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사람은 떡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떡의 문제를 도외시하고 초연하게 살아가려면 산 속으로 들어가서 수도승이 되어야한다. 그러나 가꾸고 변화시켜야할 부패한 이 세상 안에서 살아가는 한, 내 가정과 직장과 사회 속에서 떡의 문제는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히기 마련이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는커녕 세상으로부터 거꾸로 영향받아 도무지 구별되지 않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크리스천들이 얼마나 많은가? 대형 부정부패 사건마다 연루된 크리스천의 부끄러운 모습이 연일 보도되는 우리의 현실을 보라. 떡의 문제에는 목사든 선교사든 평신도든 어느 누구도 예외가 있을 수 없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떡이란 돈, 명예, 권력 등을 아우르는 포괄적 의미의 물질을 지칭한다.)
우리의 안팎에서 일어나고 있는 끝없는 전쟁...... 떡의 전쟁...... 그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떡의 본질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또한 전쟁의 발생 원인과 진행 상황을 바로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대처 전략을 세워야 한다. 그것을 위해 이제 포탄이 빗발치고 화염이 넘실거리는 그 전쟁터 안으로 직접 들어가고자 하는 것이다. (계속)
(2)
2003년 8월 9일, 나는 그토록 밟고 싶었던 북녘 땅 평양을 방문했다. 평양과기대 건립을 위한 협의를 위해 김진경 연변과기대 총장, 김동호 높은뜻 숭의 교회 목사를 앞세운 방문단이 평양 순안 공항에 발을 내딛었다. 개인적으로는 지난 수년 간 네 차례의 방북 시도 끝에 얻은 소중한 순간이었기에 더욱 감회가 넘쳤다. 많은 외국인들이 북경발 고려항공에 우리와 함께 동승하고 있었다. 이념과 대립으로 막혀있던 그 땅도 마침내 경제 전쟁의 소용돌이에 서서히 휩싸이며 문을 열고 있음을 느끼게 했다. 그들에게도 결국 떡의 문제가 가장 중요한 핵심 과제로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북한의 젊은이들에게 생명의 떡을 주기 위해 시작하는 평양과기대 프로젝트...... 그러나 그것을 철저히 경제적 떡의 문제로 받아들이고 우리를 맞이하는 북측의 당국자들...... 그것은 실로 생명의 떡과 육신의 떡이 맞부딪치는 첨예한 전쟁이 아닐 수 없다.
이번 평양 방문은 나에게 앞으로 남은 인생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에 대해 진지한 생각을 하도록 만든 특별한 계기가 되었다. 방북 전날, 갑상선에 종양이 발견되었다는 종합검진 결과를 전해 듣고 급히 조직검사를 받았다. 혹시 악성종양일수도 있으니 받고 떠나라는 의사의 충고 때문이었다. 비록 갑상선 암은 손쉬운 축에 속한다고는 하지만 병원 침상에 들어 누워 검사를 받는 순간부터 야릇한 감정에 휩싸이게 되었다. 생명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는 기회가 되었고, 지나온 시간들과 남기고 온 가족을 깊이 생각하며 평양에서의 첫날밤을 보냈다. 평양에 들어가기 직전에 이런 일을 통해 인생에 대하여 반성토록 만드시는 하나님의 감추어진 의도가 강하게 느껴지면서도 여섯 살 짜리 어린 데이빗을 생각하니 갑자기 가슴이 저려오기 시작했다. 공연한 상상이 발동되기 시작했다. 만일 정말 암이라면......? 그리고 내가 죽게 된다면? 지금 당장 죽는다 하여도 전혀 무섭지는 않았다. 그리고 아깝거나 후회되는 일도 없는 것 같았다. 지난 10여 년을 열심히, 그리고 치열하게 살았다는 그 추억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이 되었다. 그러나 두고 갈 가족에게 상처를 안길 것을 상상하니 그것이 가장 아팠다. 그것도 어린 아들 데이빗에게 어떻게......?
귀국 길에 인천 공항에 다시 도착하자마자 친구 의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양성으로 판정났으니 크게 걱정할 것 없다고......
홍성사 발행인인 이재철 목사께서 앞서 출간한 나의 책 <예수는 평신도였다>와 곧 출간케 될 <루카스 이야기>의 원고를 읽고 난 후, 칭찬과 격려의 메일을 보내주셨다. 평양 방문 후 잠시 서울에 머무는 동안 점심 식사 초청을 해 주셨다. 자장면 한 그릇씩 하자고...... 아마 내게 무슨 해주실 말씀이 있으셨던 것 같았다. 동네 중국집에서 자장면을 배달하여 집 마당에서 소박한 오찬을 나눈 후 목사님은 내게 근처의 양화진과 절두산 묘역을 산책하자고 제의했다. 개화기 서양 선교사들이 머나먼 동방의 작은 나라 조선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찾아왔다가 죽어 이국 땅에 묻혀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조선인을 조선인보다 더 사랑하여 조선인과 더불어 살다가 이 땅에 묻힌 사람들...... 한국 기독교와 카톨릭의 성지가 바로 한 동네에 100m 남짓 거리를 두고 이웃하고 있는 것이다.
양화진 묘역에는 교회에서 단체로 방문한 관람객들이 여기저기 눈에 띠였다. 10년 전 중국에 들어가기 직전에 처음 이곳을 찾았을 무렵 휑하니 쓸쓸한 빈 무덤 사이를 홀로 거닐던 때와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이 목사님은 언더우드, 베델, 홀 선교사 등 한 분 한 분의 묘소에 이를 때마다 그분들의 삶의 뒷이야기와 역사적 의미를 실감나게 설명해 주었다. 아무도 돌보지 않던 양화진 묘소가 최근 들어 한국 기독교의 성지로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갑자기 관심을 갖게 된 한국 교회들이 그곳에 불필요한 자기 이름을 남기려고 노력하는 헛된 흔적의 모습들도 지적해 주었다. 그리고 보니 그곳에 있을 필요가 없는 이름들이 여기저기 눈에 띠었다. 우리 신앙인들조차 빠지기 쉬운 허위적 모습들...... 어떻게든 자신의 이름을 남기고자 하는 그 욕심들...... 절두산 묘역 안에 있던 수백 년 된 느티나무가 인위적인 강대상과 단상을 만들기 위해 설치해 놓은 콘크리트에 갇혀 까맣게 타죽은 모습을 보았다. 인간들의 명예욕의 굴레에 휘감겨 훼손되는 역사 유적지의 안타까운 현실이었다.
그러나 그 날, 내 마음을 가장 흔들어놓은 것은 아펜셀러 목사 묘역 앞에서 그가 내게 던진 말이었다. 한창 무르익어 일하던 나이에 목포 앞 바다에서 배가 충돌하여 물에 빠진 한 소녀를 구하기 위해 몸을 던져 익사함으로 일생을 마친 아펜셀러의 인생을 이야기하면서 그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이 자리에 서면 그가 자신의 목숨을 버린 나이가 마흔 다섯이었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이해할 수 없는 감동을 느낍니다. 20-30대의 젊은 혈기라면 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혹은 인생을 정리할 수 있는 노년의 나이를 지닌 분이었다면 또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사십대는 한창 자신의 사역과 일에 바쁘고 욕심이 생길 나이입니다. 가정과 사회에서 책임과 역할이 가장 두드러지는 그 나이에 어떻게 한 생명을 위해 자신을 버릴 수 있었는지 그것이 놀랍지 않습니까?”
마흔 다섯의 헌신...... 그것은 나에게 새로운 도전으로 다가온 하나님의 음성이었다. 그해가 마침 내가 마흔 다섯의 나이를 통과하는 시점이었던 것은 우연이었을까? 한창 일에 대한 욕심이 불타오르고 가정적으로는 자녀들을 교육하고 뒷바라지하느라 걱정과 염려가 절정에 이른 시절, 가장 경제적으로 쫓기고 흔들리기 쉬운 이 시기에 나를 다시 불러 재헌신케 하시려는 하나님의 강한 의도와 음성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 음성의 내용은 이것이었다.
“네 생명을 내놓아라.”
(3)
김동호와 이재철......
나는 이 두 분을 함께 존경한다.
두 분과 개인적으로 나누었던 따뜻한 교제 때문일 수도 있다.
<깨끗한 부자>라는 책을 펴내어 크리스천 물질관에 대한 뜨거운 감자에 손을 댄 김동호 목사...... 그의 유명한 <고지론>과 함께 이 책 역시 자칫 나약해지기 쉬운 많은 기독 청년들에게 세상 속에서 적극적으로 살아가며 승리할 수 있는 영감과 동기를 제공하였다. 그러나 지나치게 부유한 교회와 교인들에게 면죄부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과 함께, 타락한 인간에게는 깨끗한 부자가 되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보며, 새로운 기복론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냐는 부정적 견해도 만만치 않게 제기되고 있다.
정신여고 강당에서 깨끗하고 성공적인 목회의 표본을 보이며 <주님의 교회>를 크게 부흥시켰던 이재철 목사...... 교회가 목회자의 소유물이 아니라는 것을 표방하며 10년 목회 후 사임하겠다는 처음의 약속을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지켜 교회 안팎의 놀라움을 자아냈던 분이다. 그러나 그의 행동 역시 혹자에게는 자기 의의 표출로서 비추어질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
내가 이 두 분을 존경하는 이유는 이들의 이론이나 행동이 완전하다고 생각하거나 내 생각과 모두 일치하기 때문이 아니다. 떡의 유혹 앞에 노출된 부족한 인간들, 죄악에 깊이 물든 세상 속에서 그 어두움의 권세, 떡의 권세를 꺾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며 행동으로 결단하는 그 모습 속에서 배워야할 점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를 물들이고 있는 총체적 부패와 부정직 속에서 교회를 개혁하고 크리스천의 바른 물질관을 세우기 위해 선전포고를 하며 과감히 앞서나가는 용기가 너무 귀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사람들이 아니라 부족함을 인정하기에 몸부림치며 한 걸음씩 나아가는 도상에 있는 사람들이다. 비판하는 분들의 말도 더러 일리가 있지만,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이 두 분 같은 크리스천만 되었어도 우리 사회가 얼마나 달라졌을까?” 우리에게는 이들처럼 떡의 문제 앞에서 심각하게 고민하는 크리스천 리더들의 영성과 지성이 절실히 필요하다.
소돔 왕은 결국에는 심판받아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그런 왕이다. 하지만 소돔 왕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아브라함은 그의 책략에 쉽사리 넘어갈 수밖에 없다. 그 때 아브라함 앞에 나타난 신비스런 인물...... 의의 왕이요 평강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대제사장이신 그분이 홀연히 나타난 것이다. 그가 들고 있는 떡과 포도주는 전장의 탈취물이 아니다. 모든 전쟁 상황을 끝내기 위해 거저 주어지는 은혜의 떡과 긍휼의 포도주인 것이다. 그것을 받아먹은 아브라함은 비로소 이 전쟁의 주재가 하나님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자신의 얻은 것의 십분의 일을 멜기세댁에게 드린다. 그리고 담대하게 소돔왕 앞에 나아가 담판을 벌이는 것이다.
크리스천 물질관에 대해 어떤 이론을 제시하고자 할 생각은 없다. 나는 그런 자격이 없다. 왜냐하면 나는 떡의 유혹에 초연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처럼 언제나 실수할 가능성이 있음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내 앞에 당면한 이 본질적인 문제를 끌어안고 독자와 함께 고민하며 해결점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것이다. 전쟁터로 떠나는 비장한 마음으로...... 그러나 전쟁의 승리를 확신하는 믿음으로......
성경은 한 마디로 떡 이야기이다. 떡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치열한 전쟁 이야기가 성경 안에는 가득 차 있다. 이제 그 피흘림의 현장으로 들어가고자 한다. 우리를 유혹하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떡을 찾아서...... 말씀 안에서 열 두 덩이의 떡을 골라낼 생각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내 자신의 모습을 반추하고 우리를 살리는 생명의 떡, 평화의 떡을 또한 새롭게 발견할 것이다.
평양 북경 서울 그리고 연길, 그 아픈 전쟁터를 오가며....
(계속)
출처 : 청년아 부흥을 꿈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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