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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 대한 묵상(고전 1:18-25) / 임영수 목사

by 【고동엽】 2021. 12. 1.

십자가에 대한 묵상 (고전 1:18-25)

임 영 수 목사

 

오늘은 사순절 첫 번째 주일입니다. "십자가의 구속의 사건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교회들은 이 사순절을 교회력 가운데서 부활절 다음으로 중요하게 관심을 두는 교회의 절기입니다.이 절기는 참회의 수요일에서 시작하여 성 금요일에 끝납니다. 주일을 계산하지 않은 40일이 사순절의 기간입니다. 이 절기의 기간에는 종려주일과 수난주일이 동시에 있고 성 주간인 고난주간이 절정을 이루고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이 절기는 지금까지 가장 엄숙한 예배와 그리스도인들의 경건한 생활 분위기를 강조해 오고 있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그리스도인들의 결혼도 이 기간에는 금지하면서 오직 스스로의 모든 육신적인 욕구를 부정하고 금식을 하면서 참회하는 기간으로 설정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이러한 경건의 훈련은 수난의 메시지가 사라져 가고 있는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하다고 봅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십자가는 매우 소중한 상징입니다. 십자가는 고난과 순종을 상징하는 것으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대 사회에서 십자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존귀한 것이 아니였습니다. 그 시대에서 십자가는 그 사회에서 버림받은 자들에게 지워지는 형벌의 틀로서 멸시와 천대의 상징이였습니다.

 

로마시대에 십자가는 도망친 노예나 로마제국을 반대하는 반란자에 대한 벌로서 십자가 형이 가해졌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힌 자와 그에 대한 숭배는 매우 불명예스러운 것임은 물론, 십자가라는 말 자체도 로마 시민의 생각들과 귀로부터 멀리 떠나 있어야 하는 부정한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특히 그 시대 점잖은 사람들 앞에서 십자가 형에 처형된 노예의 죽음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은 아름다운 풍습을 훼손하는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고대 로마인들처럼 좋은 것, 참된 것, 아름다운 것을 찾는 사람에 대하여 십자가에 달린 사람은 그 어떤 장려할만한 심미적인 모습도 제시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한 로마 사람들에게 흠모와 숭배의 대상으로서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 아들의 표상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였습니다.

 

한편 유대 사회에서도 십자가에 교수형을 받은 사람은 그의 백성으로부터 추방 되었거나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서 하나님에 의하여 저주를 받은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십자가에 달린 자를 예배하는 일은 생각할 수 없는 사회에서 십자가에 달린자는 하나님을 모독한 자, 율법의 저주를 받은 자, 살아있는 자들과 하나님의 관계로부터 저주받은 자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에게 십자가에 달린 자가 하나님 아들이라는 사실은 도저히 받아들여질 수 없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그 분을 믿는다는 것은 유대인에게는 하나님을 계속 모독하는 의미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러나 이미 말씀드린 대로 기독교 신앙에서 십자가는 매우 소중한 표상입니다. 십자가는 교회의 중심적인 상징입니다. 교회의 중심적인 상징인 십자가는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에서 볼 때 기독교의 종말론적 사건입니다. 통속적인 종말론은 핵이나 공해로 인한 지구 파멸, 기아와 질병으로 인한 인류멸망, 지진이나 화산 폭발과 같은 천재지변에 의한 지구의 파멸을 예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서에서 말씀하는 기독교 종말론은 인간들의 죄와 불의로 지구가 파멸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전 피조 세계가 하나님에 의해 완전히 새롭게 되는 창조의 완성 시간입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십자가는 저주와 수치의 표상이 아니라 그것은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종말론적 사건입니다. 십자가를 종말론적 사건으로 받아들일 때 그것은 우리 개인에게는 물론 모든 피조 세계에 대해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게 됩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는 바로 그러한 의미의 십자가를 묵상하고자 합니다.

 

먼저 십자가는 모든 것의 마지막인 동시에 하나님이 약속하신 새 세계로 들어가는 길을 가리키고 있는 표상입니다.

 

십자가가 모든 것의 마지막이란, 십자가가 심판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데서 마지막이며 한편 그 심판의 때가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고 구속하는 시간이라는 데서 새 세계로 들어가는 표상이 됩니다. 십자가는 부정과 긍정 양면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의미를 내포한다는 데서 부정이며, 하나님의 용서와 구속이라는 데서 긍정입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새 삶, 새 세상은 인간의 지혜와 노력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이룰 수 없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인 은혜로만 가능합니다교회에서 새 사람, 새 피조물을 많이 강조합니다.

 

이들 두가지 모두 십자가라는 하나님의 심판 없이는 불가능 합니다. 그 어떤 피조물도 그 자신 스스로 새 것이 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낡은 것을 새것으로 가능케 하십니다. 한 개인이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에 포함된 새 삶을 시작하려고 할 때 그 시작은 십자가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옛 사람이 죽고 새 창조의 영이신 성령으로 다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포함한 전 피조 세계를 새롭게하시는 희망의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그 계획은 바로 저 갈보리 언덕 위에 두 강도 사이에 버림받은 자로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하나님의 아들의 십자가에서부터 시작하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그것을 깊이 묵상하는 사람들에게 무한한 희망과 위로, 감사, 용기를 불러 일으킵니다. 그 누구든지 슬픔, 눈물, 한숨, 고통이 있는 이 세상에서 좌절과 피곤에 지쳐있을 때 십자가를 바라보면 하나님께서 이미 새로운 일을 시작하셨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듣고 그 좌절의 자리에서 일어나게 됩니다.

 

두 번째로 십자가는 개인적이며 공동체적인 의미를 지닌 사건인 동시에 우주적인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죽음이 인간의 죄 때문이라는 데서 그것은 개인적이며 공동체적인 사건이며 한편 그것은 만물을 새롭게 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창조의 완성의 필연적인 사건이라는 점에서 우주적 사건입니다.

 

제가 젊은시절 교회에서 받은 교육에서 십자가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으로 이 세상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것이였습니다. 죄악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믿으면 세상 마지막 날 하늘로 들려 간다는 것이 십자가에 대한 젊은시절의 이해였습니다. 거기서 언제나 석연찮은 문제로 대두된 것은 그러면 '이 세상의 의미는 무엇인가?' 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포기해 버린 세상이라면 우리가 이 세상을 위해 그 어떤 일을 해야할 이유가 있는가라는 의문이였습니다.

 

그러나 성서에서 분명히 말씀하는 것은 만물을 새롭게 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획에는 전 피조물이 그 대상으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계획과 약속에서 세상을 위해 봉사하며 일하지 않으면 안될 삶의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세 번째로 십자가는 신음하는 모든 피조물의 해방사건입니다.

 

바울은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롬 8:22) 했습니다. 만약 십자가의 사건이 없었다면 모든 피조물은 탄식, 고통, 체념으로 끝을 맺게 됩니다. 결국 모든 것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므로 이 세상에는 아무런 희망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살 이유가 무엇입니까? 죽음 이외에는 목적도 없고 의미도 없습니다. 결국 죽기 위해 사는 것입니다. 살기위해 사는 것이 아닌 죽기위해 사는 삶처럼 비참한 것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죽음이 전제된 탄식, 고통, 체념에서 모든 것의 마지막이 될 수 없음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선포되었습니다.

 

네 번째로 십자가는 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며 하나님의 승리입니다.

 

십자가는 그 시대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을 뿐 아니라 하나님으로 부터도 버림 받았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안 예수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절규했습니다. 그러나 그 버림받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불의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합리화가 아니라는 점에서 버림받은 사건입니다.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에 하나님 없이 인간들이 만들어놓은 문명, 문화는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것이 하나님의 선포입니다. 철저히 그것의 허구와 불의가 드러나야하고 심판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십자가는 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며 하나님의 승리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며 체념, 안일, 무기력, 타락에 우리 자신을 내어 던지지 않고 지속적으로 깨어서 사탄의 세력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은 바로 십자가로부터입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체념, 두려움, 안일, 무기력으로부터 일깨워 줍니다. 그뿐만 아니라 언제나 현재의 죄된 삶을 포기하고 새로운 시작을 하게 합니다.

 

비유로 말씀드리면 어떤 사람이 한적한 산길을 가다가 사자를 만났습니다. 사자는 으르렁 거리며 그에게로 달려오고 있습니다. 달려오는 사자 앞에서 행인은 모든 것을 체념할려는 순간에 사자에게서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입을 크게 벌린 사자는 이빨이 하나도 없고 앞발을 들고 으르렁거리는 사자의 발에는 발톱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 사실을 발견한 행인은 용기를 내어 그 사자에게 달려들어 사자를 때려 눕혔습니다. 십자가의 사건은 모든 악의 세력의 힘의 근원을 완전히 무력화시킨 사건입니다. 악의 형태는 있지만 실제로 우리를 죽일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마지막으로 십자가는 화해의 사건입니다.

 

화해란 인간과 하나님의 화해를 말합니다.

 

이 화해의 문제에 대해 에배소서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엡2:13,14,16) 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과 새로운 화해의 삶을 살도록 하는 길을 열어놓았습니다. 하나님과의 화해의 삶은 이 세상에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새로운 삶의 방식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것입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십자가 형틀에 매어 달려 죽은 하나님의 아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고운 모양도 없고, 훌륭한 풍채도 없으니.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모습이 없다.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버림을 받고, 고통을 많이 겪었다.

 

그는 언제나 병을 앓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돌렸고, 그가 멸시를 받으니,

 

우리도 덩달아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실로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았고,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매맞으며,

 

고난을 받는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상처를 받은 것은 우리의 악함 때문이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를 맞음으로써, 우리의 병이 나았다.

 

우리는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각기 제 갈 길로 흩어졌으나

 

주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도다.

 

(표준 새 번역 사 53:1-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 십자가가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입니다." 그러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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