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 납세문제에 관한 하나님의 법(성경)적 고찰
김회권 교수(숭실대 기독교학과)
들어가는 말
요즘 목회자 혹은 종교인 납세 문제로 찬반 여론이 비등하고 있다. 교회의 사회적 공기능의 불만족스러운 모습에 실망한 일반 국민들과 네티즌들은 종교인 특히 개신교 목회자들도 세금을 내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형편에서 순복음교회나 온누리교회 등 대교회 목회자들은 이미 수 십년 동안 납세해 오고 있음이 밝혀졌다(뉴스앤조이 기사). 또한 한기총 대표는 기꺼이 한기총 산하 목회자들의 납세 의무 이행의지를 공개적으로 피력하기도 하였다. 이제 목회자들의 납세 문제는 대세가 되어가는 듯한 형국이다. 그동안 현대의 세속국가들이 인정하는 바 목회자들의 면세 정책 혹은 면세 묵인에는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을 수 있다. 목회자들의 삶 자체를 일종의 국가가 수행해야 할 국민계도 사업, 문화관광부 산하의 시민 윤리교육, 가정복지부 산하의 건전 가정 육성 사업 등에 투신한 삶이라고 보고 면세를 묵인 혹은 승인해 주는 면도 있다. 독일 개신교 신학자 카를 하임은 <개신교의 본질>(The Nature of Protestantism>)에서 독일 정부가 술주정뱅이 한 명을 갱생시켜 정상인으로 사회에 복귀시키는 데 드는 비용이 엄청나다는 사실(145만 마르크 정도)을 언급함으로써 교회와 목회자의 사역이 갖는 공공성을 강조하고 있다. 목회의 성직적 차원에 대한 현대 국가의 부분적인 공인인 셈이다. 우리 나라의 국세법에는 명확한 목회자 혹은 종교인 면세규정이 없고 다만 관습상 면세를 허용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법 연구소가 목회자의 납세 혹은 면세 문제에 대한 성경 자체의 입장이 무엇인지를 탐구하고자 한다. 이 글은 이런 문제의식을 염두에 두고 쓰여진 글이다.
신구약 성경에 나타난 납세 맥락과 성직자 납세문제
신구약 성경은 세계사에 출현한 5대 제국(앗수르, 바벨론, 페르샤, 그리이스, 로마)의 틈바구니에 간신히 살아남은 이스라엘과 유대인의 생존과 몰락의 여정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이야기다. 성경은 국가 공동체로서의 오래 존립했던 나라 이야기가 아니라 오히려 반대의 경험, 이산과 유랑, 징벌과 해체의 경험에 익숙한 나라 이야기다. 따라서 이 성경 안에는 현대국가가 집행하는 현대적 징세 체제에 관한 율법이 체계적으로 진술되어 있지 않다. 다만 고대 문명의 기준을 감안해 볼 때 오늘날 납세와 거의 동등한 개인의 공공부조 혹은 공공지출제도가 있었다. 이스라엘과 유다가 왕을 정점으로 하는 국가체제를 유지했을 때는 국가의 보호에 대한 국민으로서의 납세의무가 처음으로 언급된 이래(삼상 8:14-15) 이스라엘과 유다 자유농민들은 납세의무를 부담했으며, 이스라엘과 유다 백성이 제국들의 속주민으로 존재했을 때에는 제국에게 납세의무를 지고 있었다(느 5:4; 막 12:13-17). 제국의 속주민으로 있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은 성전체제에 대한 준국민적(회중의 이름) 의무 수행의 일환으로성전세를 바쳐야 했다. 예수님은 로마제국에게도 납세의무를 지고 있었고(막 12장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또한 동시에 성전세 반 세겔 납세의무도 지고 있었다(마 17장). 이처럼 납세 문제는 성경에서 주변적인 주제로 다뤄지고 있으므로 납세 문제에 대한 성경의 체계적 입장을 확정하는 일은 쉬운 과제가 아님이 분명하다. 심지어 목회자의 납세문제에 대한 입장을 규정하는 것은 더욱 더 어려운 주제다. 왜냐하면 신구약 성경이 펼쳐지고 있는 역사적 정치적 무대가 특종 종교가 국교로 대우받는 상황이므로 종교인(제사장이나 선지자)에게 일련의 납세의무를 짐지울 “국가”체제나 “정부”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구약 성경에서 현대적 교역자와 동등한 위치에 있었던 사람들은 선지자, 제사장과 레위인, 사도들, 교사들이었다. 선지자들은 일종의 프리랜서형 개인 및 국가 경영 컨설턴트와 유사한 일을 하였는데 수입이 일정하지 않았기에 어떤 납세 혹은 공공부조 의무가 지워지지 않았다. 또한 그들은 자신의 농토를 보유했거나 제사장직을 겸한 경우도 많아서 다른 방식으로 공공부조나 십일조의 부담을 감당했을 것이다. 사도들과 교사들의 경우도 안정된 직장이라기보다는 일종의 한시적 소명직분이었기에 납세나 공공부조 혹은 지출의 부담을 감당할 것이 기대되지 않았다. 결국은 제사장과 레위인만이 십일조나 공공부조의 염출의무를 지고 있었던 셈이었다.
따라서 이 글의 목적은 성경에 규정된 세금, 혹은 공공지출, 사회부조금 지출 의무 등에 관련된 성경구절들을 찾아 해설하는 데 있었다. 특히 제사장과 레위인들의 조세 의무 혹은 공공지출이나 공공 부조 의무 규정을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여기서 분명히 밝힐 것은 이 글이 성직자가 세금을 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한 직접적인 답을 제시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다만 이 쟁점에 대한 성경적인 입장이 무엇일까를 우회적으로나마 추정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약간의 참조자료를 제공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편의상 성경을 장르별로 나눠 납세 혹은 공공지출 문제에 대한 성경적 언급들이나 관련구절을 찾아보고자 한다.
I. 모세오경
1. 아브라함이 살렘 왕이자 제사장인 멜기세덱(의의 왕, King of Righteousness)에게 바친 “십일조”(창 14장)
창세기 13장에 이어 14장에서도 아브람은 신앙 인격의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여 준다. 얄미운 조카 롯에게 좋은 땅을 다 양보당하고(?) 척박한 산지에서 아직도 안정되지 못한 유목 생활을 하던 아브람에게 다급한 소식이 찾아든다. 바벨론 지역의 그돌라오멜 주도의 4개국 연합군이 조카 롯이 살고 있던 소돔 성을 점령하고 부녀와 인민을 포로로 잡아갔다는 소식이다(1-13절). 아브람은 자신이 길러온 사병 318명과 그의 동맹 부족(마므레와 에스골, 아넬)을 설득하여 롯 탈환 작전에 뛰어든다(14-16절). 아브람은 헤브론 산지에 거하면서 마므레, 에스골, 아넬이라는 토착민을 동맹 세력으로 얻었다. 아브람은 동맹군과 자신이 길러낸 사병들을 거느리고 롯과 롯의 인민과 물품을 되찾아오는 대승리를 거두었다. 아브람은 소돔 왕과 살렘의 왕이자 제사장인 멜기세덱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멜기세덱은 아브람의 승리가 하나님의 역사하심 때문이라고 선언하며 아브람을 위해 축복기도를 드린다(19, 20절). 왜 아브람이 전리품 중 10분의 1을 멜기세덱에게 바쳤을까? 두 가지 가능성을 추정해 볼 수 있다. 그와 그의 동맹세력이 살고 있던 곳이 멜기세덱의 관할지역이었을 가능성이다. 이런 경우 아브람의 행동은 고대사회에서 전쟁영웅들이 전리품을 다 독식하지 않고 사회를 위하여 일부를 바치는 제도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둘째, 아브람이 멜기세덱의 영적 지도와 가르침을 받았을 가능성이다. 아브람은 또한 그의 조가 롯이 속한 소돔 왕으로부터 전리품을 모두 다 취하라는 제의를 받았을 때에는 거절한다. 자신이 약탈 전쟁을 일삼는 소돔 왕의 용병이라고 오해를 받을까 봐 단호하게 거절한다. 그리고 그는 멜기세덱에게서 배운 기도문의 일부를 인용하면서 맹세를 한다. 자신의 명예를 재산보다 더 소중하게 여겼던 것이다. 소돔 왕의 원래 재산은 실오라기 하나라도 취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대신 동맹세력들의 분깃을 챙겨주는 세심함을 보인다(14:23-24). 십일조에 대한 최초의 언급을 보이는 창세기 14장은 십일조가 원래 종교제도가 아니라 공공부조 였음을 보여준다.
2. 야곱의 망명길에 드려진 “십일조” 약속(창 28:18-22).
형 에서(Esau)의 살기어린 분노를 피하여 고독한 망명길에 나선 야곱의 여정에 나타나 주신 하나님의 복 선언에 대한 야곱의 응답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나타나 주신 루스, 곧 벧엘에 돌기둥을 세우고 성스럽게 구별하는 데서 시작된다. 그는 하나님과 상관없이 불리던 그곳 루스라는 도시에 “벧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미래를 이 벧엘에 나타난 하나님께 결박해 버린다. 인생 전체를 하나님의 약속에 묶어 서원을 드린 것이다. 그는 고독한 그 밤에 자신의 머리 위를 오르락내리락하는 천사들을 보며 하나님의 특별한 가호를 감지했다. 그래서 하나님의 보호와 임재, 복 주심과 돌보심을 덧입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드린다. 이 기도가 성취될 때는 그는 소득의 10분의 1조를 비롯하여(21절) 일생 동안 하나님을 향한 헌신의 삶을 살겠다고 다짐한다(18-22절[특히 21절]).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20년만에 다시 벧엘로 돌아갔을 때에도 십일조 서원을 지키지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창 35:6-7, 14-15). 여기서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린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두 가지 중 하나를 의미했을 것이다. 이미 있던 벧엘 성소(하나님을 섬기는 성소)에 하나님을 드리겠다는 의미다. 둘째,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의미하는 바와 똑같은 의미를 가진 사회적 기부행위 혹은 공공부조를 하는 경우다. 십일조를 하나님께 바치는 행위는 십일조를 공중에 흩뿌려 하늘로 올라가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일시되는 지상의 비참하고 주변화된 자들에게 사회적 기부행위를 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 문맥에서 “십일조”는 종교적이면서도 사회적인 기부였다.
3. 이스라엘 평민들이 바친 “맏물” 헌물과 “성전 유지세”(출 13장)
유월절(逾越節) 구원은 애굽의 장자들을 멸절시키는 심판을, 이스라엘의 백성들을 애굽을 대신할 하나님의 장자로 입양하는 구원을 의미하였다. 이스라엘 장자도 하나님이 애굽에 보내신 죽음의 천사에게 공격당하여 죽을 위기에 놓인 상황에서 건짐을 받았던 것이다. 여기서 이스라엘의 모든 초태생을 하나님께 성별시켜 바치는 규례를 낳았다. 원래 죽음에 처해졌어야 할 이스라엘 장자는 하나님의 유월절 피를 보고 구원해주셨기에 구원받은 장자는 이제 다 하나님의 것으로 성별되었다는 것이다. 가나안 정착 이후 이 유월절 구원 경험은 무교절이라는 보다 더 확장된 축제 절기의 일부로 편입되어 야웨 하나님의 구원을 영속적으로 기억하는 절기로 자리잡는다. 무교절은 야웨의 능하신 손에 의하여 애굽의 종 되었던 집에서 구출된 해방 경험을 자자손손 전승하는 절기로서(13:3-9), 특히 초태생을 성별시키는 절기이기도 하다. 따라서 번잡해 보이는 유월절 규례에 대하여 시큰둥한 자세로 묻는 후손에게 왜 이스라엘의 사람과 동물의 초태생이 공히 하나님의 것으로 성별되어야 하는지를 자세히 가르쳐 주어야 한다(13:14-16). 이 초태생 헌물 규정이 이스라엘의 모든 종교적 의무의 시발점이기도 하다. 하나님이 살려주신 은혜를 기억하면서 맏아들을 하나님께 바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에 응답하여야 한다. 그것이 바로 성별이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모든 이스라엘 평민들의 맏아들이 성전에 나가 봉사할 수 없으므로 성전 인두세와 유사한 성전 유지세가 생겨났다.
출애굽기 30장 11-16절은 “잠재적인 역병”(출 12장의 애굽 장자들을 공격하던 그 역병의 후속판 공격)의 공격을 미리 피하기 위하여 납부해야 하는 2분의 1세겔의 성전유지세를 다룬다. 20세 이상 되는 이스라엘의 남자는 이 반 세겔 성전세를 납부하여야 한다. 이것은 출애굽기 13장의 이스라엘 초태생 성별 전통과 잇닿아 있는 규정일 것이다. 이스라엘의 장자들은 유월절 재앙 때에 심판을 면제받고 살았다. 그래서 이 구원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스라엘의 장자들은 모종의 제물을 대가로 속량되어야 했다(마 17:24-27 예수님과 베드로가 내는 성전 인두세). 이 성전 인두세는 이스라엘 총회(성전 중심의 제의공동체) 구성원에게 부과된 일종의 인두세였다.
4. 성소 유지를 위한 모금과 성전 관련 세금 조항(레 27장)
레위기 27장은 성전 유지를 위한 각종 기부와 준조세적 성격의 공공부조 규정을 다룬다. 성막(성소)이 레위기 1-26장의 가르침이 이뤄지는 물리적 인프라(infrastructure)이기 때문에 성소를 유지하는 일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레위기가 성소 유지를 위한 재정확충 주제를 추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성소의 물리적 유지에 드는 경상비용을 지출하는 일과 제사장 급여를 지급하는 것은 성소 유지에 결정적으로 필요한 일이다. 이 때의 성전(성소)은 정부기능까지 겸한 복합적인 정치, 행정, 그리고 종교업무를 관장하는 기구였음을 기억해야 한다. 일반 백성들이 이런 복합적인 성전체제에 바치던 부조금, 기부물 등의 목록은 다양하다.
성소의 주요 수입원은 자원(自願) 서약금(은전, 1-8절), 자원 동물제물(9-13절), 토지재산으로서의 가옥, 재산, 땅, 획득된 농토의 성별(바침, 14-25절), 첫 새끼들(26-27절), 생산물과 가축의 십일조(30-33절) 등이다.
1-8절은 성전 세겔로 바치는 자원제를 다룬다. 이것은 자원적인 성전 인두세와 같은 제물로서 원래 자신의 생명이나 자녀의 생명을 대속하는, 즉 성전봉사를 대신하는 제물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사람 목숨에 상응하는 동등물을 명시적으로 자원하여 야웨께 바치기를 원한다면…(2절).” 20-60세 안에 드는 사람은 자신의 몸을 바치는 것 대신에 한꺼번에 은 50세겔, 여자는 30세겔을 바쳤다. 연령별로 속하는 세겔의 액수가 줄어든다는 점이 시사적이다. 1 개월에서 5세 이하면 남자아이인 경우 5세겔, 여자아이면 3세겔이다. 이 세겔은 두 가지 일에 봉사하는 셈이다. 첫째,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을 직접 섬겨야 한다는 전통의 상기이다. 출애굽 전쟁 시 살아남은 초태생을 속량하는 전통이 이스라엘 초태생을 속량하여야 할 최초의 구속사적인 근거이다(출 13장). 둘째, 성소를 유지하는 데 소용되는 재정 확보를 목적으로 하였다.(참조. 왕하 12: 5-6, 요아스의 성전 수리)
9-13절은 동물로 바치는 경우를 다룬다. 이 경우에 일단 바쳐진 것은 다시 거래되거나 살 수 없다. 만일 자원으로 바치겠다고 한 것을 자신의 개인 목적으로 다시 쓰고자 한다면(속량한다면), 정가의 20%를 더 주어야 한다. 14-15절은 집을 바치는 경우이다. 집을 무르려면 20%를 더 주고 속량할 수 있다. 16-25절은 밭을 바쳤다가 다시 무르려고 한다면 희년을 기준으로 값을 계산하여 그렇게 계산된 액수를 기준으로 하여 5분의 1을 가산하여 제사장에게 물어주어야 한다. 성소는 그 밭을 가지고 있다가 원래의 주인에게로 돌려준다. 26-27절은 생축의 첫 새끼의 경우를 다루고, 28-29절은 아주 야웨께 바친 물건, 헤렘(herem)(하나님께 바칠 요량으로 확보한 인적 혹은 물적 전리품, 노획품)으로 바쳐진 것을 바치는 문제를 다룬다. 전쟁 포로를 헤렘(herem)으로 바쳐진 경우, 속량하지 못하고 반드시 죽여야 한다. 30-33절은 땅의 소출의 십일조와 가축들의 십일조를 다룬다.
5. “재확증되고 갱신된” 레위 지파의 의무와 특권(민 18장)
이 단락은 레위인들 내부의 위계질서에 대한 갱신된 규례를 담고 있는 보다 더 넓은 단락(민 18:1-19:22)의 일부다. 18:1-19:22에서 11지파에 대해서는 레위지파의 성직보유 독점권이 보장되고 레위지파 중에서는 아론 자손의 제사장직 독점권이 공증된다. 전후 문맥을 자세히 살펴보면 민수기 17장의 고라 반역 사건 이전에는 회막 봉사 자격이 다소 느슨했던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지휘관 250명이 향로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볼 때 이전까지는 일반지파들도 성막 제사일에 제한적으로 참여하였던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 않으면 족장들이 제마다 자신의 향로를 가지고 있었다는 보도가 다소간 납득하기 어려울 정도로 돌연스럽다. 그들은 족장 내에서건 어디에서건 제한적인 제사장적인 사역을 감당하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것이 나을 것이다. 아무튼 회막에서 그들의 지휘관 250명의 전멸장면을 목격하고 역병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는 심판을 현장을 지켜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회막 자체를 두려워하기 시작하였을 것이다(민 16:35-17:5). 곧 회막에 접근하자마자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막연한 공포감이 지배한 것이다. 이 두려움을 진정시키고 완화시키기 위하여 이제 제사장과 레위인만이 성막(회막) 접근 및 회막 봉사의 책무를 떠맡게 된다. 결국 민수기 17장에 나오는 고라 다단과 아비람, 온 반역 사건은 성막 봉사일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과 관련하여 더 명시적이고 갱신된 규례를 제정하는 촉매작용을 한 셈이다. 제사장들과 고핫 자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책임적인 존재(대표들)다(성소와 관한 죄와 제사장직분에 관한 죄를 감당할 것이다)(18:1a). 성소의 직무와 제단의 직무를 완수하는 것이 야웨의 진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미치는 것을 막아줄 것이다(Jacob Milgrom, Numbers[JPS Torah Commentary], 145).
무엇보다도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하여 일어난 회막 일꾼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백성들이 범한 죄악들의 죄책들과 결과들의 파급효과를 친히 감당하여야 하지만 또한 그들은 백성들이 가져온 예물들을 통하여 그들의 생계를 보장받아야 된다. 특히 레위인들은 자신들이 받은 십일조의 십일조를 다시금 제사장들에게 바쳐야 한다. 이 의무를 잘 수행함으로써 레위인은 레위인과 제사장 사이에 있는 위계질서를 범하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제사장들은 시체와 접촉하여 불결해진 백성들을 부정으로부터 정결하게 하기 위하여 물과 재를 그들에게 뿌리고 그리고 동시에 진 바깥에서 도살된 붉은 암소를 희생제물로 바치는 속죄제물을 드려야 한다. 그래야만 시체를 만진 백성들이 회막을 더럽혔다는 혐의 때문에 백성들로부터 멸절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민수기 18:1-31은 레위 지파의 의무들과 특권들을 다룬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제사장 지파인 레위지파의 중간 지도자들인 고라와 다단, 아비람이 일으킨 모세와 아론의 배타적 영도권에 대한 반역 사건(민 17장)의 후폭풍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막 자체에 대한 부정적인 잔상(殘像)을 강력하게 남겼다. 회막은 이 반역자들에 대한 엄혹한 심판에서 발원하는 무서운 처소로 백성들 마음 속에 각인되었다. 이제 회막은 이제 일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죽음과 심판의 부정적 기념물로 각인될 위기에 놓여있다. 생명의 장소가 죽음과 멸망의 장소로 변질된 것처럼 보였다. 회막에 대한 백성들의 이런 두려움과 공포는 신학적으로 신앙적으로 다루어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백성들이 회막에 대하여 품고 있는 두려움과 공포를 치료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서 야웨 하나님은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앞으로 성막(성소)과 관련된 죄책을 전적으로 책임지도록 명령하신다. 즉 성막 안 경내 봉사는 제사장들에게 독점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제사장들에 대한 징계임과 동시에 레위인의 도전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하는 하나님의 현실적인 방편이었다. 비록 레위인들이 성막봉사에 필요한 여러 일들에서 그들의 도우미가 되겠지만 오로지 제사장들만이 성막 안 봉사를 감당할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 따라서 제단과 성소의 기구에 대해 레위인들은 접근할 수 없다. 레위인들과 백성들이 부주의하게 제단과 성소의 기구를 만지거나 접근하여 죽지 않도록 제사장들이 거룩구역(holy zone)을 사수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제사장이 거룩 구역을 사수하지 않으면 일반백성들의 잘못 접근하여 죽게 될 것이다. 성막으로 부주의하게 접근하는 외인도 죽게 될 것이다(18:1-7).
대신 하나님은 제사장들의 봉사직분과 레위인들의 봉사직분에 대하여 부응하는 생계유지를 확보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제사장들은 백성들이 흔들어 바친 거제물, 즉 모든 헌물을 주관하도록 위임받는다. 그들은 바쳐진 예물 중에서 다음과 같은 것을 영구한 몫의 음식으로 취할 수 있다. 곧 지성물 중 불사르지 아니한 것, 즉 모든 소제, 속죄제, 속건제물은 지성물로서 아론제사장들의 몫이다. 11-20절은 제사장이 받을 몫을 나열한다. 여기서 독자는 하나 하나 정확하게 따져 읽을 필요가 있다. 곡식제사(소제), 속죄제, 속건제물, 요제물(wave), 기름(oil), 포도주(wine), 맏물예물(first fruits), 초태생 예물(first of the womb), 사람들(난 지 한달 이후에 은 5세겔[=20게라] 속전지불)과 부정한 짐승을 대속한 속전(the redemption price), 그리고 처음 태어난 소, 양, 염소의 흔들어 바친 고기 부분(가슴과 오른 쪽 넓적다리) 등이 제사장의 몫이다. 이상은 제사장들의 급료규정인데 영원한 소금(covenant of salary)언약이다(18:8-19). 이 제사장 급료규정을 소금언약(대하 13:5)이라고 부르는 이유에 대하여 유대인 성서학자 제이콥 밀그롬(Milgrom)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소금은 예로부터 음식부패를 방지하는 최고의 방부제였다. 모든 희생제물들에 소금 사용은 요청되었다(레 2:13; 겔 43:24). 그것은 누룩과 다른 발효제와 대조되는 상징물로서 누룩과 발효제들은 제단 사용이 금지되었다(레 2:11). 그래서 소금은 영속성의 상징이요 소금언약은 깨어질 수 없는 언약을 의미한다”(Numbers, 154). 제사장 지파들은 가나안 땅에서 어떤 경작지 기업도 받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나머지 11 세속지파는 제사장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 이 규정은 “야웨 하나님이 생존세계에서 제사장들의 분깃이 될 것이다”라는 시편 기자의 고백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시 16:5-6).
레위인들이 바친 십일조가 제사장의 주수입원이 되듯이 이스라엘 자손들이 바친 십일조가 레위인들의 급료가 될 것이다. 레위인들은 이스라엘 초태생들을 대신하여 회막에서 봉사하는 지파로서 초태생들을 대표하는 장자지파다(출 13장, 33장; 신 32장 레위지파 규정-우림과 둠밈 보유)(18:20-24). 그런데 레위인들이 받은 십일조의 십일조는 다시 하나님께로 거제(擧祭)로 바쳐져야 한다. 곧 제사장에게로 바쳐진다(28절). 레위인들은 백성들의 십일조 예물 중 최선의 것을 하나님께 바치도록 규정된다. 나머지는 그들의 급료로서 어디서든지 사용 가능하다(18:25-31). 다만 레위인들은 이스라엘 자손의 성물을 잘못 사용함으로써 하나님께 죽임을 당할 죄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헌금유용과 헌금착복은 목회자에게 사형을 초래하는 죄다. 여기서 인상적인 것은 하급성직자들인 레위인은 하나님께 십일조를 바쳐야 하는 규정에 매여있으나 아론계열의 제사장은 이 규정에 자유롭다는 점이다. 현대 목회자는 제사장 반열인가? 레위인 반열인가? 레위인들이 이스라엘 세속지파인 11 지파의 기부금에 의존해서 살았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생활을 보장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사사기 17장 미가 가문의 제사장 사유화 시도에서 엿볼 수 있듯이, 많은 경우 레위인들은 생계유지를 위해 유랑하고 방랑하는 불우한 처지에 처한 자들이었다(삿 17:7-13; 18:3-6). 따라서 레위인의 십일조 봉헌규정도 면세점 이하의 수입을 받거나 아예 그보다 더 빈궁하게 지원받는 경우 실현불가능한 의무였다. 오늘날도 면세점 이하의 사례비를 받고 일하는 목회자들은 납세 논쟁이 한가하고 사치스러운 논쟁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들은 이스라엘 사회보장기금으로 살아가야 할 극빈자 명단에 자주 첨가된다(“객과 고아, 과부, 레위인들”: 신 14:22-29).
6. 신명기의 십일조 규정(신 14:22-29)
신명기 법에 따르면 하나님의 성민 이스라엘은 모든 소출(맏아들과 맏물)의 십일조를 매년 합법적인 하나님의 성소제단에 드림으로써 자신의 거룩성을 드러내어야 한다(14:22-29). 야웨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을 두시려고 선택한 곳에서 축제의 절기를 행할 때 십일조를 바쳐서 자신들의 삶이 하나님의 선물에 의존하는 삶임을 늘 기억하여야 한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두시려고 선택한 성소로부터 멀리 떨어져 사는 사람들이 화폐를 가지고 그 성소에 와서 제물을 사서 드리는 방법도 제시되고 있다. 이스라엘의 율법들은 인간의 곤경이나 현실적인 상황을 이해하고 스스로 약간씩의 변용을 감수한다. 구약의 율법은 인간의 처지와 형편에 대한 민감한 이해를 잘 반영하고 있다.
14:28-29은 매 3년마다 바쳐지는 십일조의 특수용도에 대하여 말한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착초기에는 매 3년에 한 번씩 긴급구제를 위한 십일조 저축이 있었던 것같다. 레위인, 객, 고아 등 사회복지기금의 확보는 이스라엘 공동체가 배타적 야웨 예배를 드릴 때 가능하다. 그래서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사회안전망의 확충으로 생계형 범죄가 발생할 여지를 급격하게 줄였던 것이다. 레위인, 고아, 객과 과부 등 사회 최빈곤층을 배부르게 하면 하나님께서 친히 이스라엘의 범사를 축복하실 것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번영의 길은 미시경제학이나 거시경제학을 초월한다. 자비와 사회적 애휼이 가져오는 신적 축복, 이것은 경제적 번영확보의 신기원을 열 것이다(존 러스킨의 애휼 경제학).
7. 레위인과 제사장의 사역 (신 18:1-8; 참조. 신 10:6-9)
신명기가 그리는 신정통치적 이스라엘 사회에서 가장 중심적인 지도자집단은 레위 제사장이다. 그들은 중앙성소(17:19)에 설치된 “최고 법정”의 재판관들이다. 널리 인정되듯이 구약성경에는 레위인과 제사장의 관계성에 대한 어떤 단일한 그리고 체계적인 규정이 없다. 소위 “제사장 문서”(출 28-31장, 35-40장; 민수기와 레위기)들은 아론계열의 제사장만이 제사장직을 차지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나머지 레위인들은 성전의 보조요원들이라고 규정한다. 반면에 신명기와 소위 신명기 역사서(여호수아-열왕기하)에서는 레위지파 일반이 제사장직을 차지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한다. 다시 말해 아론 계열의 레위족들에게만 제사장직을 배타적으로 귀속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제사장 문서”에 비하여 신명기는 제자장과 레위인, 혹은 아론계열의 제사장과 일반 레위계열의 제사장 사이에 있었던 서열상의 구분이나 직능상의 구분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런 구별이나 차별이 있었더라도 영속적인 구별이었음을 증거하는 실마리는 적어도 신명기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레위계열 제사장들 사이에도 책임영역상의 구별은 있었던 것 같다. 어떤 레위인들은 전국적으로 흩어져 있는 성읍들에서 봉사하고(신 18:6) 다른 레위인들은 중앙 성소(7절 하반절)에서 봉사하는 정도상의 차이였을 것이다. 이 차이마저도 어떤 레위인도 중앙성소에서 일할 수 있었다는 규정에 의하여 상대화된다. 결국 이 두 문서(제사장 문서와 신명기)는 완전하게 대립한다기보다는 부분적으로 다른 측면을 강조한다고 보는 것이 나을 것이다. 이런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레위인 혹은 레위제사장은 이스라엘 역사 전체에 걸쳐서 지도자적 역능(力能)을 행사해 왔음은 분명하다.
민수기 35장에서 자세히 규정되듯이, 레위 지파는 특정한 경작지 영토를 갖는 대신에 전국적으로 흩어진 48개의 성읍을 할당받는다. 그들은 전국적으로 흩어진 성읍과 촌락들에 체류자의 신분으로 붙여 사는 자들이다. 그들은 다양한 축제 절기들에 초청받을 때(예. 신 14: 29; 16: 11, 14) 백성들에 의해 드려진 예물들뿐만 아니라 드려진 희생제물들에(3-5절과 8절) 의해 생계를 꾸려간다. 신명기가 제시하는 레위 제사장의 지도자적 면모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이스라엘의 종교적 지도력은 레위지파에게 할당되었다(10:8; 27:9, 14; 31:9-13; 33:8-11 참조). 레위지파는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는 일에 있어서 이스라엘 공동체를 지도하는(10:8; 18:5; 참조. 21:5) 제사장들이 된다. 국민교육 (33:10; 31:9-13 참조)과 사법행정(17:9; 21:5)과 군사적 기능들 (20:2-4) 또한 레위 제사장들에게 할당되었다. 특히 거룩한 전쟁시 레위인들이 수행한 역할은 주목되어야 한다.
둘째, 레위인들은 이스라엘 동포들의 형제들로 소개되며 그들이 비록 세속지파들의 몫인 기업을 소유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주신 좋은 땅에서 나는 모든 양식들과 혜택들을 누릴 수 있다. 땅 대신에 야웨 하나님이 “레위지파의 기업”(18:1-2)이다. 그들은 백성들에 의해 드려진 예물들과 의무적 납부금들 혹은 헌물들을 먹고 산다. 성소에서 야웨께 드려진 의무적이고 자원적인 제물들은 레위족의 기업으로서 레위인 및 레위계열 제사장을 부양하기에 충분하다.
셋째, 왕과 재판관의 경우에서처럼(16:18-20을 보라), 레위 제사장 역시 이상적인 이스라엘 사람의 본보기로 제시된다. 신명기에서 레위인은 번성하도록 의도되어 있다. 그러나 레위인의 번성은 의존적으로 실현된다. 야웨에 대한 레위인의 의존은 다른 형제 지파들이 소유하는 어떤 사유재산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야웨에 대한 그의 형제 지파들의 의존보다 훨씬 더 현저하다. 그의 번영은 하나님께 제의적 예물들을 매일 바치는 그의 동포들의 계속적 순종이라는 요인에 의존하고 있다.
8. 성직자 집단 레위인의 한 유래(신 33장)
신명기 33:8-11은 레위지파를 위한 긴 축복기도문이다. 창세기 49:7에서 야곱은 레위에 대하여 부정적인 예언을 발설한다. 레위지파는 이스라엘 형제들 중에서 흩어지는 지파가 될 것, 즉 독립적인 영토를 갖지 못하는 지파가 될 것을 예언한다. 그런데 여기 신명기 33장에서는 그 흩어짐이 긍정적으로 적극적으로 해석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구약의 유언적 기도를 너무 결정론적으로나 운명주의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암시받는다. 창세기 49:6-7에서는 부정적으로 말해진 그 레위지파, 즉 영락없는 세속지파 중 하나로 분류되던 레위지파가 여기서는 거룩한 중보자 지파, 영적 제사장 지파로 격상되어 있지 않은가? 신명기 33:8-11은 이스라엘의 교사들과 제사장들로서 레위인들을 위한 일종의 성무헌장(聖務憲章)이다. 출애굽기 32:25-29에 따르면 레위지파의 제사장직은 야웨의 계약에 대한 그들의 신실성 때문에 주어진 축복의 결과였다. 그래서 그들은 야웨의 법도로 백성들을 가르치고 야웨 앞에서 희생제사를 드릴 때 전체 백성들을 대신하고 대표하는 권리와 역할을 위임받도록 운명되어졌다. 8-11절은 이 시내산 금송아지 사건처리과정에서 보여준 열심이 제사장직분을 얻게 된 레위지파의 역사적인 배경임을 암시한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훈계하고 야웨의 말씀을 전달하고 야웨 앞에서 서서 온 백성을 대신하여 야웨의 은총과 죄사함과 계속적인 돌보심을 간청하며 섬기는 중보자 전문가 집단이 형성되는 초기 역사를 발견한다. 앞서 말했듯이, 출애굽기 32장 25-29절과 민수기 25장에서 레위인들은 야웨를 향한 그들의 열정적인 투신과 오직 야웨만을 사랑하라는 기본계명에 대한 복종 때문에 제사장 직분을 할당받았다. 이 사건들에서 보여진 그들의 열심은 극단적인 행동들을 통하여 발휘되었다. 레위지파들은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을 과시하기 위하여 혈연적인 유대를 초월하는 거룩한 냉혹함을 과시한 사람들이다. 제사장직의 권리와 책임이 다른 사람들은 계약적 의무들을 버렸을 때에도 그 계약적 요구들을 끝까지 지켰던 사람들에게 허락되어 졌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18:1-8; 27:9-26; 31:24-25).
9. 예전으로 끝나는 신명기 법전에서 두드러진 공공 부조 부금 규정(신 26:1-15)
백성들의 일상적인 삶을 위한 구체적인 규례들과 법령들인 신명기 법전(12-26장)은 신명기 26장에서 종료된다. 신명기 율법단락은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서 얻은 수확물들 중에서 하나님께 드릴 예물들과 관련된 두 단계의 가르침들과 함께 마무리된다. 십계명을 비롯한 으뜸 계명들 안에 선포된 근본적 지침들을 삶 속에 적용하기 위한 구체적인 법규정들과 규례들을 상세히 전개하는 신명기 법전은 신명기 12장의 예배지침으로 시작해서 26장의 예배지침으로 끝난다. 신명기 율법의 마지막은 경건하고 진지한 예배와 사회적인 자비실천을 아름답게 조화시키고 있다. 이처럼 신명기 법전의 서두도 참 하나님에 대한 바른 예배로 시작되고 마지막도 바른 예배로 종결된다. 하나님에 대한 바른 예배 없이는 신명기 율법에서 선포되는 어떤 계명도 준행할 수 없다는 것이다.
26:1-11의 토지 소산의 맏물을 헌물로 드리라는 율법은 이미 18:4에서 언급되었고, 26:12-15에서 규정된 3년마다 시행하는 십일조 헌물 규정도 14:28-29에서 이미 다뤄졌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 살게 되었을 때 어떤 예전적 맥락에서 어떻게 예물을 드릴 것인가하는 규정들을 중점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즉 그것들은 야웨에 의해 속량되어 의식주를 공급받았고 마침내는 구원의 선물을 받았던 사람들의 특징적인 삶인 감사와 순종의 태도를 드러내는 구체적인 사례들로 기능한다. 26:1-11의 토지 소산의 맏물 봉헌 규정은 예배의 본질이 감사와 바침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예배는 요구하는 시간이 아니라 바치는 시간이라는 것이다. 토지소산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복주셨음을 기억하는 시간이다. 이 맏물 봉헌 규정은 가나안 땅 정착 후 가나안 땅의 풍요와 소산을 누리는 사실을 전제한다. 가나안 땅의 풍요를 누리자마자, 이스라엘 지파의 각 구성원 혹은 가족의 대표들은 그 땅이 생산한 모든 생산물 중의 일부를 취하여 제사장의 중보를 통해 성소에 있는 야웨의 존전에 갖다 바쳐야 한다. 그것은 삶에 필요한 모든 필요를 풍성하게 공급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깊은 감사를 표현한다. “내가 야웨께서 주신 땅에 이르렀나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내가 이 땅을 선물로 받았나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한 때는 정착할 땅이 없었던 유랑민이었던 과거를 기억하고 현재 가나안 땅에서 누리는 삶의 안정감과 풍요를 하나님의 복주심으로 돌리라는 것이다. 이 짧은 신앙고백 안에 창세기부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가 압축적으로 요약되고 있다. 이 파노라마같은 구원사의 절정이 바로 토지 맏물을 들고 야웨의 성소에 가 감격적인 신앙고백과 맏물을 봉헌하는 예배행위라는 것이다.
26:12-15은 예배 행위의 본질은 감사와 봉헌임을 다시금 천명한다. 이 단락은 감사와 봉헌의 구체적인 표현 중 하나가 십일조임을 밝힌다. 이 십일조 봉헌 규정은 “땅에서 계속적인 축복”을 누리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알려준다. 3년 마다 드려진 십일조는 여러 가지 이유로 가나안 땅의 혜택들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 구체적으로 레위인, 체류자, 과부, 그리고 고아를 부양하는 데 사용된다. 십일조의 근본 메시지는 하나님의 모든 선한 축복들의 열매를 모든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나눠 가지는 삶이야말로 예배의 중심 요소 중 하나라는 것이다. 이스라엘 계약공동체 구성원들은 그들의 수입 중 일부를 떼어 생계의 위협 속에 사는 동포들을 먹여 살리도록 기대되었다. 신명기 14장이 잘 보여주듯이 십일조 규정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의 풍요를 쉼없이 누리는 정도(正道)다. 14:29은 레위인과 고아와 과부를 위해 십일조를 드리는 사람들에게 자동적으로 축복이 임한다고 가르치지 않는가? 그래서 26:15에서 십일조 의식이 이스라엘과 생산물을 내는 토지를 축복해 달라고 요청하는 기도문으로 끝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II. 역사서
1. 남유다의 요아스 왕 시대의 성전 수리를 위한 헌물(왕하 12:4-16)
당시에는 예루살렘 성전을 위하여 백성들이 드리는 은이나 사람들의 몸값으로 드리는 은이나 자원예물로서의 은이 드려졌다. 요아스는 이 드려진 은으로 퇴락한 성전 부분을 수리하라고 명하였으나 제사장들이 23년 간이나 성전 수리 명령을 수행하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백성들의 자원 헌금을 거두어 성전을 수리하였다. 이 때 백성들이 바친 속건제의 은과 속죄제의 은은 성전수리비로 충당되지 않고 제사장의 수입으로 귀속되었다(16절).
2. 북이스라엘 왕 므나셈의 국방세 징수(왕하 15:17-20)
앗수르 왕(Pul, 디글랏빌레셀 3세)의 포위 공격을 달래기 위하여 북이스라엘 왕 므나헴은 이스라엘 자유 농민들을 토색하여 은 50세겔을 징수하였다(20절).
3. 히스기야의 종교개혁으로 인한 개선된 레위인 처우(대하 31:1-19)
히스기야의 종교개혁의 여파로 예루살렘 성전에는 갱신된 유다 백성들의 진심어린 예물, 십일조, 헌물로 가득 차게 되었다. 유다 성읍에 거한 이스라엘과 유다 자손도 소와 양, 성물의 십일조를 바쳐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풍성한 공궤와 물질적인 공급을 받았다. 제사장들과 20세 이상된 레위인들에게 풍성한 급여가 지급되었다. 아마도 구약 성경 전체에서 레위인들이 풍성한 급료를 받았음을 명시적으로 언급하는 유일한 예일 것이다.
4. 요시야 종교개혁(예루살렘 제의 중앙화)으로 실직당한 유다의 지방 제사장들(왕하 23:5-20절)
유다의 가장 강력한 개혁군주 요시야가 지방 산당이 바알과 아세라라는 이방 종교제의의 본거지 구실을 한다는 핑계로 지방 산당의 제사장들을 불법화하고 일시에 대량 해고해 버렸다. 심지어 가나안 종교에 심각하게 동화되고 오염된 산당의 제사장들의 경우 죽여버렸다. 요시야 종교개혁으로 지방 산당의 제사장들은 “나중에 레위인들로 불리는 하급 제사장”으로 전락되고 연금생활자로 전락하고 만다(9절, “최소한 생계지원”).
5. 페르샤 속주(屬州) “예후다”(Yehuda) 거주민들의 고통(느 5:1-5)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지역의 예후다(유다) 총독으로 부임해 왔을 때 귀환포로 공동체는 사회적 양극화와 페르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관리들의 가렴주구로 혹독한 고생을 하고 있었다. 총독 느헤미야는 “우리는 밭과 포도원으로 돈을 빚내어 세금을 바쳤도다”(4절)라는 공공연한 불평을 듣고 여론 호소형 군중대회를 열어 유력자들을 책망하고 이 사회적 양극화와 빈곤층 문제를 해결하려고 분투한다(4절).
6. 다시 느헤미야의 개혁으로 생계를 보장받는 레위인(느 12:44-47)
느헤미야의 성전 체제정비로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의 처우가 크게 개선되었다. 그들은 백성들이 즐거이 바친 거제물과 맏물 소산 십일조로 급여지급을 받았다. 느헤미야는 노래하는 자와 문지지 역할을 하는 레위인들에게도 날마다 쓸 것을 주고 제사장 몫의 헌물을 나눠주었다. 오랜 전통에 따라 레위인들은 자신들이 받은 것의 일부를 구별하여 아론 자손에게 주었다(느 12:47).
III. 예언서
1. 병든 제물을 바치는 백성들의 뒤틀린 양심을 공격하는 예언자(말 1:6-16)
주전 5-4세기 경의 예언자 말라기는 병든 제물을 가져오는 백성들의 죄악을 규탄하는 예언자였다. 말라기를 통해 야웨께서는 야웨의 성전에 제물 드리는 일이 번폐스럽다고 불평한 백성들의 숨은 동기를 간파하시고 진노하신다. 성전에 바치는 준 조세성격의 예물 봉헌 규정이 당시의 백성들에게 번폐스럽게 느껴졌다는 점이 중요하다. 일종의 조세저항인 셈이다.
2. 제사장 언약 말소를 위협하시는 하나님(말 2:1-9)
말라기 2:1-9은 제사장직을 더럽힌 자들에게 제사장 직분을 박탈하시겠다고 말하는 하나님을 보여준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오경 여러 군데서 확증된 레위와 세운 제사장 직분 수행 및 지원 언약을 파기하시려는 것이다.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의 영적 탈선과 타락이 극심하여 더 이상 레위 언약 평강의 언약을 지킬 수 없음을 선언하신다(8-9절). 제사장직을 더럽힌 자들은 백성들로부터 급료를 지급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레위인과 제사장의 생계지원규정은 절대적인 법이 아니라 상대적인 법률임을 알 수 있다.
3. 십일조 의무를 거부한 백성들을 규탄하시는 하나님(말 3:7-12)
말라기 3:7-12은 십일조 규정을 어긴 이스라엘 백성들을 규탄하신다. 하나님의 것, 십일조와 헌물을 도둑질 한 죄를 규탄하신다. 온 나라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했기에 하나님의 저주가 임한다(9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온전한 십일조가 하나님의 창고에 쌓여 있기를 기대하신다(10절). 이 조건이 충족될 때 하나님의 복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들판을 윤택케 하신다. 사회공공 부조나 공세적인 성격의 공공부담은 하나님의 복을 받게 만드는 필요조건이 된다. 사회공공 부조나 십일조 규정이 배척되면 제사장과 레위인의 생계는 위협당하고 하나님의 복을 매개하는 영적 중개작용이 심각하게 약화된다는 것이다.
IV. 신약성서
1. 성전 인두세를 친히 납부하시는 예수님(마 17:24-27)
예수님은 20세 이상 된 이스라엘 성인에게 부과된 성전세를 친히 내신다. 아버지의 왕국에 사는 아들들은 아버지에게 세금을 납부할 책임에서 면세되지만 외인들(성전 관리들)의 실족을 방지하기 위하여 당신 자신과 베드로를 위하여 성전 인두세를 내신다고 해설하신다. 12사도를 비롯한 초기 기독교인들이 주후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기 전까지는 성전 인두세를 납부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이 본문이 목회자의 납세의무를 정당화하는 신약성서의 구절로 인용되는 것이 정당한지는 다소 논란의 여지가 있다.
2.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마 22:15-22; 막 12:13-17; 눅 20:20-26)
이 본문 또한 성직자의 납세의무를 강조하거나 정당화할 때 인용되거나 인증되는 본문이다. 바리새인들이 헤롯당원들과 함께 예수를 올무에 빠뜨리려고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정당한지 부당한지 물었다. 예수는 로마황제의 초상(“신적 아우구스투스의 아들 황제 가이사”)이 새겨진 은전 데나리온을 들고1) 하나님의 것과 가이사의 것을 구분하여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라고 말씀하셨다. 주화의 초상과 글자는 가이사의 것이다(막 12:15). 이 말의 뜻은 세금을 바치라는 말도 아니요 바치지 말란 말도 아닌 아주 지혜로운 말씀이다. 굳이 해석하자면 가이사의 통치를 즐겨받고 그것의 혜택을 누리는 자들은 세금을 바치라는 정도의 의미다. 여기서 평소에 상호 적대적이었던 바리새인과 헤롯당원이 함께 시험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헤롯당원은 철저히 친로마적 토착세력으로서 가이사에게 데나리온으로 세금을 바쳤다. 그러나 바리새인은 그것을 만지는 것을 거부할 정도로 세금문제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다. 아마 세금을 냈더라도 그들이 쓰는 세겔이나 아니면 마카베오 독립 전쟁 이후 하스모니안 왕조시에 주조되어 유통된(포도나무 가지 형상) 그 주화를 이용하여 바쳤을 것이다. 따라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라”는 권고는 이미 데나리온을 사용하고 로마제국의 정치적 해택을 누리는 자들은 세금을 바치라는 정도의 것이다. 따라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리라(마 22:21)는 말은 정교분리를 의미하지도 않고, 그리스도인의 시민적 질서에 대한 복종의무를 규정하는 법조문으로 간주되기보다는 위기모면용 촌철살인적 응답으로 이해되는 편이 낫다.
3. 로마 시민권자 바울의 스토아 철학적 국가관 아래서 본 세금 문제(롬 13:1-7)
로마서 13:1-7은 공세를 바치는 것이 옳다는 바울의 말을 기록한다. 바울은 지방세와 국세를 바치라고 말한다(6-7절). 그리스도인들은 과도한 종말론에 빠져서 일상적 시민사회의 질서를 거부하는 무정부주의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다. 바울은 스토아 철학의 국가관, 즉 국가는 객관적 세계 이성 로고스의 대행기관이라는 관점을 가졌던 로마시민이었다. 로마제국이 지방 속주민들에게는 가혹한 압제자였으나 로마시민에게는 나름대로 정교하고 불편부당한 법치주의를 실현하고 있었다. 이런 국가관은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기 위하여 그의 보낸 방백에게 하라”(벧전 2:13-14)라는 베드로 전서 2:13-16 단락에 의해 또한 지지되고 있다. 하지만 이런 국가관은 요한계시록 13장의 국가관, 적그리스도요 성도의 박해자요 하나님 권력찬탈세력으로서의 국가권력에 관한 견해와 긴장 관계를 이룬다. 이 단락은 과격한 종말론에 추동된 그리스도인들의 무정부주의자화를 경계하는 말일뿐 목회자가 세금을 낼 것을 권고하거나 명하는 “새 언약”적 사고는 별 상관이 없어 보인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이 단락은 성직자의 납세문제를 다루는 본문이 아니라고 판단된다.
4. 바울의 국제적 기아 대책 프로젝트(고후 9:1-5)
고후 9:1-15는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한 마게도냐인들과 아가야 지방 그리스도들인의 국제적 연보에 대하여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단지 국세와 지방세의 납부 의무를 초월하는 거룩한 공공부조 부담에 노출되어 있다.
나가는 말
앞서 언급했듯이, 요즈음 세인들 사이에서 뿐 아니라, 교계내에서도 목회자에 대한 세금 부과 문제로 많은 논란이 일고 있다. 그리스도인들 중 많은 사람들은 목회자가 세금을 내는 것이 하나님 뜻에 합당한가 아닌가에 대해서는 성경이 말해주고 있을 것이라고 믿고 성경적인 증거와 반증거를 찾으려고 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그들은 성경적인 근거에 호소해서 목회자 납세 문제를 타결지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세상적인 논거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경의 말씀에 따라 교역자의 납세문제를 풀어가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상의 우리의 간략한 연구가 기대에 미치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오늘날의 목회자를 제사장직으로서 레위인으로 생각하여 레위인이 세금을 내지 않는 것과 같이 목회자도 세금을 내지 말아야 한다는 논리가 있지만 성경은 레위인들의 면세규정에 대하여 일언반구의 지지나 정당화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물론 이들이 일반백성들과는 다른 성직자 혹은 준성직자 신분을 가졌기에 일반백성들처럼 광범위한 십일조 규정이나 봉헌의무 규정에 매이지는 않았다. 그들은 아론 제사장에게 그들의 수입의 십일조를 바쳐야 했다. 그러나 이런 규정이 바로 목회자들이 오늘날 국세청에 세금을 반드시 내어야 한다는 납세의무를 보편적으로 정당화거나 강제하는 본문이라고 보기에는 어렵다. 대부분의 경우 레위인은 면세점 이하의 수입으로 살았고 제사장들은 그들 자체가 국세청과 정부의 책임자였다. 목회자의 납세의무는 자연법 혹은 그것을 부분적으로 반영하는 국가의 헌법 혹은 관습법으로 면세 혹은 납세로 규정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현행법은 잘 알려져 있듯이 종교 단체와 같은 공익 법인은 세금 부과를 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면세의 명분규정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이런 상황에서 목회자들이나 일부 교회의 탈선에 대한 공공시민 사회의 비판이 비등해지면서 목회자들의 납세 문제가 사회 쟁점으로 떠올랐다. 일부 도시중대형 교회와 목회자들이 교회의 외형적 성장에 치중하고 사례비와 각종 수혜적 비용을 과도하게 받는 등 교회 재정을 보편적 정의감에 맞게 사용하지 않는 데에 대한 시민사회의 반발인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성직자가 세금을 내는 문제에 대하여 여론 조사를 한 결과 71.5%가 성직자의 세금 부과를 찬성하고 있다는 말이 여기 저기서 들려온다. 개신교 목회자들 중 면세점 이상의 수입을 보장받는 사람들은 기꺼이 모든 것이 가하나 덕을 세우기 위하여, 외인들이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세금을 자진 신고하고 납부하는 것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성경적 기준에 입각한 옳고 그름의 판단에서 내려진 결정이 아니라 선교적 상황에 대한 능동적 대체 차원에서 고려된 판단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단서가 붙어 있다. 목사들이 세금을 낸다고 해서 무제한적인 복음적인 이웃사랑과 선교적 자기비움의 삶을 살아야하는 보다 더 거룩한 부담에서 해방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실제로 목회자들이 지상 왕국의 시민으로서의 한 의무인 납세의무를 잘 수행한다고 해서 기독교에 대한 세상 불신자들의 호감도나 인지도가 올라가지 않을 수도 있다. 다만 우리는 스스로를 위하여 하나의 경보음을 울릴 필요가 있다. 목회자들이 시민의무의 일환인 세금 내는 의무 수행이상의 복음적 이웃 사랑실천의 단계로 전진하지 않고 시민사회의 공적 비판을 약간 비껴가는 방편으로 납세의무를 지키지는 말자는 것이다. 목회자들은 복음적 진리를 실천하기 위하여 유랑하는 레위인의 처지로 전락할 각오로 복음의 급진적 메시지를 시민사회, 불신 세상을 향하여 외치는 영적 공세성을 회복하는 데 더욱 치중하여야 한다는 점이다.
참고도서
김회권, 『하나님 나라 신학의 관점으로 읽는 모세오경 1』(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6)
김회권, 『하나님 나라 신학의 관점으로 읽는 모세오경 2』(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7)
유지미, 『성전과 경제-마가공동체의 사회경제전략』(서울: 한들출판사, 2004)
J. Milgorm, Numbers: The traditional Hebrew text with the new JPS translation
(Philadelphia: The Jewish publication society, 1990)
N. M. Sarna, Leviticus: The JPS Torah Commentary (Philadelphia: Fortress, 1989)
1) 이런 주화들은 로마제국의 시민들과 속주민들에게 로마제국이 제공하는 번영과 평화에 대한 감사로 세금을 바쳐야 한다는 일깨우는 일종의 정치적 각성제였다(유지민, 『성전과 경제-마가공동체의 사회경제전략』[서울: 한들출판사, 2004], 194-201).
김회권 교수(숭실대 기독교학과)
들어가는 말
요즘 목회자 혹은 종교인 납세 문제로 찬반 여론이 비등하고 있다. 교회의 사회적 공기능의 불만족스러운 모습에 실망한 일반 국민들과 네티즌들은 종교인 특히 개신교 목회자들도 세금을 내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형편에서 순복음교회나 온누리교회 등 대교회 목회자들은 이미 수 십년 동안 납세해 오고 있음이 밝혀졌다(뉴스앤조이 기사). 또한 한기총 대표는 기꺼이 한기총 산하 목회자들의 납세 의무 이행의지를 공개적으로 피력하기도 하였다. 이제 목회자들의 납세 문제는 대세가 되어가는 듯한 형국이다. 그동안 현대의 세속국가들이 인정하는 바 목회자들의 면세 정책 혹은 면세 묵인에는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을 수 있다. 목회자들의 삶 자체를 일종의 국가가 수행해야 할 국민계도 사업, 문화관광부 산하의 시민 윤리교육, 가정복지부 산하의 건전 가정 육성 사업 등에 투신한 삶이라고 보고 면세를 묵인 혹은 승인해 주는 면도 있다. 독일 개신교 신학자 카를 하임은 <개신교의 본질>(The Nature of Protestantism>)에서 독일 정부가 술주정뱅이 한 명을 갱생시켜 정상인으로 사회에 복귀시키는 데 드는 비용이 엄청나다는 사실(145만 마르크 정도)을 언급함으로써 교회와 목회자의 사역이 갖는 공공성을 강조하고 있다. 목회의 성직적 차원에 대한 현대 국가의 부분적인 공인인 셈이다. 우리 나라의 국세법에는 명확한 목회자 혹은 종교인 면세규정이 없고 다만 관습상 면세를 허용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법 연구소가 목회자의 납세 혹은 면세 문제에 대한 성경 자체의 입장이 무엇인지를 탐구하고자 한다. 이 글은 이런 문제의식을 염두에 두고 쓰여진 글이다.
신구약 성경에 나타난 납세 맥락과 성직자 납세문제
신구약 성경은 세계사에 출현한 5대 제국(앗수르, 바벨론, 페르샤, 그리이스, 로마)의 틈바구니에 간신히 살아남은 이스라엘과 유대인의 생존과 몰락의 여정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이야기다. 성경은 국가 공동체로서의 오래 존립했던 나라 이야기가 아니라 오히려 반대의 경험, 이산과 유랑, 징벌과 해체의 경험에 익숙한 나라 이야기다. 따라서 이 성경 안에는 현대국가가 집행하는 현대적 징세 체제에 관한 율법이 체계적으로 진술되어 있지 않다. 다만 고대 문명의 기준을 감안해 볼 때 오늘날 납세와 거의 동등한 개인의 공공부조 혹은 공공지출제도가 있었다. 이스라엘과 유다가 왕을 정점으로 하는 국가체제를 유지했을 때는 국가의 보호에 대한 국민으로서의 납세의무가 처음으로 언급된 이래(삼상 8:14-15) 이스라엘과 유다 자유농민들은 납세의무를 부담했으며, 이스라엘과 유다 백성이 제국들의 속주민으로 존재했을 때에는 제국에게 납세의무를 지고 있었다(느 5:4; 막 12:13-17). 제국의 속주민으로 있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은 성전체제에 대한 준국민적(회중의 이름) 의무 수행의 일환으로성전세를 바쳐야 했다. 예수님은 로마제국에게도 납세의무를 지고 있었고(막 12장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또한 동시에 성전세 반 세겔 납세의무도 지고 있었다(마 17장). 이처럼 납세 문제는 성경에서 주변적인 주제로 다뤄지고 있으므로 납세 문제에 대한 성경의 체계적 입장을 확정하는 일은 쉬운 과제가 아님이 분명하다. 심지어 목회자의 납세문제에 대한 입장을 규정하는 것은 더욱 더 어려운 주제다. 왜냐하면 신구약 성경이 펼쳐지고 있는 역사적 정치적 무대가 특종 종교가 국교로 대우받는 상황이므로 종교인(제사장이나 선지자)에게 일련의 납세의무를 짐지울 “국가”체제나 “정부”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구약 성경에서 현대적 교역자와 동등한 위치에 있었던 사람들은 선지자, 제사장과 레위인, 사도들, 교사들이었다. 선지자들은 일종의 프리랜서형 개인 및 국가 경영 컨설턴트와 유사한 일을 하였는데 수입이 일정하지 않았기에 어떤 납세 혹은 공공부조 의무가 지워지지 않았다. 또한 그들은 자신의 농토를 보유했거나 제사장직을 겸한 경우도 많아서 다른 방식으로 공공부조나 십일조의 부담을 감당했을 것이다. 사도들과 교사들의 경우도 안정된 직장이라기보다는 일종의 한시적 소명직분이었기에 납세나 공공부조 혹은 지출의 부담을 감당할 것이 기대되지 않았다. 결국은 제사장과 레위인만이 십일조나 공공부조의 염출의무를 지고 있었던 셈이었다.
따라서 이 글의 목적은 성경에 규정된 세금, 혹은 공공지출, 사회부조금 지출 의무 등에 관련된 성경구절들을 찾아 해설하는 데 있었다. 특히 제사장과 레위인들의 조세 의무 혹은 공공지출이나 공공 부조 의무 규정을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여기서 분명히 밝힐 것은 이 글이 성직자가 세금을 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한 직접적인 답을 제시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다만 이 쟁점에 대한 성경적인 입장이 무엇일까를 우회적으로나마 추정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약간의 참조자료를 제공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편의상 성경을 장르별로 나눠 납세 혹은 공공지출 문제에 대한 성경적 언급들이나 관련구절을 찾아보고자 한다.
I. 모세오경
1. 아브라함이 살렘 왕이자 제사장인 멜기세덱(의의 왕, King of Righteousness)에게 바친 “십일조”(창 14장)
창세기 13장에 이어 14장에서도 아브람은 신앙 인격의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여 준다. 얄미운 조카 롯에게 좋은 땅을 다 양보당하고(?) 척박한 산지에서 아직도 안정되지 못한 유목 생활을 하던 아브람에게 다급한 소식이 찾아든다. 바벨론 지역의 그돌라오멜 주도의 4개국 연합군이 조카 롯이 살고 있던 소돔 성을 점령하고 부녀와 인민을 포로로 잡아갔다는 소식이다(1-13절). 아브람은 자신이 길러온 사병 318명과 그의 동맹 부족(마므레와 에스골, 아넬)을 설득하여 롯 탈환 작전에 뛰어든다(14-16절). 아브람은 헤브론 산지에 거하면서 마므레, 에스골, 아넬이라는 토착민을 동맹 세력으로 얻었다. 아브람은 동맹군과 자신이 길러낸 사병들을 거느리고 롯과 롯의 인민과 물품을 되찾아오는 대승리를 거두었다. 아브람은 소돔 왕과 살렘의 왕이자 제사장인 멜기세덱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멜기세덱은 아브람의 승리가 하나님의 역사하심 때문이라고 선언하며 아브람을 위해 축복기도를 드린다(19, 20절). 왜 아브람이 전리품 중 10분의 1을 멜기세덱에게 바쳤을까? 두 가지 가능성을 추정해 볼 수 있다. 그와 그의 동맹세력이 살고 있던 곳이 멜기세덱의 관할지역이었을 가능성이다. 이런 경우 아브람의 행동은 고대사회에서 전쟁영웅들이 전리품을 다 독식하지 않고 사회를 위하여 일부를 바치는 제도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둘째, 아브람이 멜기세덱의 영적 지도와 가르침을 받았을 가능성이다. 아브람은 또한 그의 조가 롯이 속한 소돔 왕으로부터 전리품을 모두 다 취하라는 제의를 받았을 때에는 거절한다. 자신이 약탈 전쟁을 일삼는 소돔 왕의 용병이라고 오해를 받을까 봐 단호하게 거절한다. 그리고 그는 멜기세덱에게서 배운 기도문의 일부를 인용하면서 맹세를 한다. 자신의 명예를 재산보다 더 소중하게 여겼던 것이다. 소돔 왕의 원래 재산은 실오라기 하나라도 취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대신 동맹세력들의 분깃을 챙겨주는 세심함을 보인다(14:23-24). 십일조에 대한 최초의 언급을 보이는 창세기 14장은 십일조가 원래 종교제도가 아니라 공공부조 였음을 보여준다.
2. 야곱의 망명길에 드려진 “십일조” 약속(창 28:18-22).
형 에서(Esau)의 살기어린 분노를 피하여 고독한 망명길에 나선 야곱의 여정에 나타나 주신 하나님의 복 선언에 대한 야곱의 응답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나타나 주신 루스, 곧 벧엘에 돌기둥을 세우고 성스럽게 구별하는 데서 시작된다. 그는 하나님과 상관없이 불리던 그곳 루스라는 도시에 “벧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미래를 이 벧엘에 나타난 하나님께 결박해 버린다. 인생 전체를 하나님의 약속에 묶어 서원을 드린 것이다. 그는 고독한 그 밤에 자신의 머리 위를 오르락내리락하는 천사들을 보며 하나님의 특별한 가호를 감지했다. 그래서 하나님의 보호와 임재, 복 주심과 돌보심을 덧입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드린다. 이 기도가 성취될 때는 그는 소득의 10분의 1조를 비롯하여(21절) 일생 동안 하나님을 향한 헌신의 삶을 살겠다고 다짐한다(18-22절[특히 21절]).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20년만에 다시 벧엘로 돌아갔을 때에도 십일조 서원을 지키지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창 35:6-7, 14-15). 여기서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린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두 가지 중 하나를 의미했을 것이다. 이미 있던 벧엘 성소(하나님을 섬기는 성소)에 하나님을 드리겠다는 의미다. 둘째,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의미하는 바와 똑같은 의미를 가진 사회적 기부행위 혹은 공공부조를 하는 경우다. 십일조를 하나님께 바치는 행위는 십일조를 공중에 흩뿌려 하늘로 올라가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일시되는 지상의 비참하고 주변화된 자들에게 사회적 기부행위를 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 문맥에서 “십일조”는 종교적이면서도 사회적인 기부였다.
3. 이스라엘 평민들이 바친 “맏물” 헌물과 “성전 유지세”(출 13장)
유월절(逾越節) 구원은 애굽의 장자들을 멸절시키는 심판을, 이스라엘의 백성들을 애굽을 대신할 하나님의 장자로 입양하는 구원을 의미하였다. 이스라엘 장자도 하나님이 애굽에 보내신 죽음의 천사에게 공격당하여 죽을 위기에 놓인 상황에서 건짐을 받았던 것이다. 여기서 이스라엘의 모든 초태생을 하나님께 성별시켜 바치는 규례를 낳았다. 원래 죽음에 처해졌어야 할 이스라엘 장자는 하나님의 유월절 피를 보고 구원해주셨기에 구원받은 장자는 이제 다 하나님의 것으로 성별되었다는 것이다. 가나안 정착 이후 이 유월절 구원 경험은 무교절이라는 보다 더 확장된 축제 절기의 일부로 편입되어 야웨 하나님의 구원을 영속적으로 기억하는 절기로 자리잡는다. 무교절은 야웨의 능하신 손에 의하여 애굽의 종 되었던 집에서 구출된 해방 경험을 자자손손 전승하는 절기로서(13:3-9), 특히 초태생을 성별시키는 절기이기도 하다. 따라서 번잡해 보이는 유월절 규례에 대하여 시큰둥한 자세로 묻는 후손에게 왜 이스라엘의 사람과 동물의 초태생이 공히 하나님의 것으로 성별되어야 하는지를 자세히 가르쳐 주어야 한다(13:14-16). 이 초태생 헌물 규정이 이스라엘의 모든 종교적 의무의 시발점이기도 하다. 하나님이 살려주신 은혜를 기억하면서 맏아들을 하나님께 바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에 응답하여야 한다. 그것이 바로 성별이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모든 이스라엘 평민들의 맏아들이 성전에 나가 봉사할 수 없으므로 성전 인두세와 유사한 성전 유지세가 생겨났다.
출애굽기 30장 11-16절은 “잠재적인 역병”(출 12장의 애굽 장자들을 공격하던 그 역병의 후속판 공격)의 공격을 미리 피하기 위하여 납부해야 하는 2분의 1세겔의 성전유지세를 다룬다. 20세 이상 되는 이스라엘의 남자는 이 반 세겔 성전세를 납부하여야 한다. 이것은 출애굽기 13장의 이스라엘 초태생 성별 전통과 잇닿아 있는 규정일 것이다. 이스라엘의 장자들은 유월절 재앙 때에 심판을 면제받고 살았다. 그래서 이 구원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스라엘의 장자들은 모종의 제물을 대가로 속량되어야 했다(마 17:24-27 예수님과 베드로가 내는 성전 인두세). 이 성전 인두세는 이스라엘 총회(성전 중심의 제의공동체) 구성원에게 부과된 일종의 인두세였다.
4. 성소 유지를 위한 모금과 성전 관련 세금 조항(레 27장)
레위기 27장은 성전 유지를 위한 각종 기부와 준조세적 성격의 공공부조 규정을 다룬다. 성막(성소)이 레위기 1-26장의 가르침이 이뤄지는 물리적 인프라(infrastructure)이기 때문에 성소를 유지하는 일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레위기가 성소 유지를 위한 재정확충 주제를 추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성소의 물리적 유지에 드는 경상비용을 지출하는 일과 제사장 급여를 지급하는 것은 성소 유지에 결정적으로 필요한 일이다. 이 때의 성전(성소)은 정부기능까지 겸한 복합적인 정치, 행정, 그리고 종교업무를 관장하는 기구였음을 기억해야 한다. 일반 백성들이 이런 복합적인 성전체제에 바치던 부조금, 기부물 등의 목록은 다양하다.
성소의 주요 수입원은 자원(自願) 서약금(은전, 1-8절), 자원 동물제물(9-13절), 토지재산으로서의 가옥, 재산, 땅, 획득된 농토의 성별(바침, 14-25절), 첫 새끼들(26-27절), 생산물과 가축의 십일조(30-33절) 등이다.
1-8절은 성전 세겔로 바치는 자원제를 다룬다. 이것은 자원적인 성전 인두세와 같은 제물로서 원래 자신의 생명이나 자녀의 생명을 대속하는, 즉 성전봉사를 대신하는 제물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사람 목숨에 상응하는 동등물을 명시적으로 자원하여 야웨께 바치기를 원한다면…(2절).” 20-60세 안에 드는 사람은 자신의 몸을 바치는 것 대신에 한꺼번에 은 50세겔, 여자는 30세겔을 바쳤다. 연령별로 속하는 세겔의 액수가 줄어든다는 점이 시사적이다. 1 개월에서 5세 이하면 남자아이인 경우 5세겔, 여자아이면 3세겔이다. 이 세겔은 두 가지 일에 봉사하는 셈이다. 첫째,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을 직접 섬겨야 한다는 전통의 상기이다. 출애굽 전쟁 시 살아남은 초태생을 속량하는 전통이 이스라엘 초태생을 속량하여야 할 최초의 구속사적인 근거이다(출 13장). 둘째, 성소를 유지하는 데 소용되는 재정 확보를 목적으로 하였다.(참조. 왕하 12: 5-6, 요아스의 성전 수리)
9-13절은 동물로 바치는 경우를 다룬다. 이 경우에 일단 바쳐진 것은 다시 거래되거나 살 수 없다. 만일 자원으로 바치겠다고 한 것을 자신의 개인 목적으로 다시 쓰고자 한다면(속량한다면), 정가의 20%를 더 주어야 한다. 14-15절은 집을 바치는 경우이다. 집을 무르려면 20%를 더 주고 속량할 수 있다. 16-25절은 밭을 바쳤다가 다시 무르려고 한다면 희년을 기준으로 값을 계산하여 그렇게 계산된 액수를 기준으로 하여 5분의 1을 가산하여 제사장에게 물어주어야 한다. 성소는 그 밭을 가지고 있다가 원래의 주인에게로 돌려준다. 26-27절은 생축의 첫 새끼의 경우를 다루고, 28-29절은 아주 야웨께 바친 물건, 헤렘(herem)(하나님께 바칠 요량으로 확보한 인적 혹은 물적 전리품, 노획품)으로 바쳐진 것을 바치는 문제를 다룬다. 전쟁 포로를 헤렘(herem)으로 바쳐진 경우, 속량하지 못하고 반드시 죽여야 한다. 30-33절은 땅의 소출의 십일조와 가축들의 십일조를 다룬다.
5. “재확증되고 갱신된” 레위 지파의 의무와 특권(민 18장)
이 단락은 레위인들 내부의 위계질서에 대한 갱신된 규례를 담고 있는 보다 더 넓은 단락(민 18:1-19:22)의 일부다. 18:1-19:22에서 11지파에 대해서는 레위지파의 성직보유 독점권이 보장되고 레위지파 중에서는 아론 자손의 제사장직 독점권이 공증된다. 전후 문맥을 자세히 살펴보면 민수기 17장의 고라 반역 사건 이전에는 회막 봉사 자격이 다소 느슨했던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지휘관 250명이 향로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볼 때 이전까지는 일반지파들도 성막 제사일에 제한적으로 참여하였던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 않으면 족장들이 제마다 자신의 향로를 가지고 있었다는 보도가 다소간 납득하기 어려울 정도로 돌연스럽다. 그들은 족장 내에서건 어디에서건 제한적인 제사장적인 사역을 감당하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것이 나을 것이다. 아무튼 회막에서 그들의 지휘관 250명의 전멸장면을 목격하고 역병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는 심판을 현장을 지켜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회막 자체를 두려워하기 시작하였을 것이다(민 16:35-17:5). 곧 회막에 접근하자마자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막연한 공포감이 지배한 것이다. 이 두려움을 진정시키고 완화시키기 위하여 이제 제사장과 레위인만이 성막(회막) 접근 및 회막 봉사의 책무를 떠맡게 된다. 결국 민수기 17장에 나오는 고라 다단과 아비람, 온 반역 사건은 성막 봉사일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과 관련하여 더 명시적이고 갱신된 규례를 제정하는 촉매작용을 한 셈이다. 제사장들과 고핫 자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책임적인 존재(대표들)다(성소와 관한 죄와 제사장직분에 관한 죄를 감당할 것이다)(18:1a). 성소의 직무와 제단의 직무를 완수하는 것이 야웨의 진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미치는 것을 막아줄 것이다(Jacob Milgrom, Numbers[JPS Torah Commentary], 145).
무엇보다도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하여 일어난 회막 일꾼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백성들이 범한 죄악들의 죄책들과 결과들의 파급효과를 친히 감당하여야 하지만 또한 그들은 백성들이 가져온 예물들을 통하여 그들의 생계를 보장받아야 된다. 특히 레위인들은 자신들이 받은 십일조의 십일조를 다시금 제사장들에게 바쳐야 한다. 이 의무를 잘 수행함으로써 레위인은 레위인과 제사장 사이에 있는 위계질서를 범하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제사장들은 시체와 접촉하여 불결해진 백성들을 부정으로부터 정결하게 하기 위하여 물과 재를 그들에게 뿌리고 그리고 동시에 진 바깥에서 도살된 붉은 암소를 희생제물로 바치는 속죄제물을 드려야 한다. 그래야만 시체를 만진 백성들이 회막을 더럽혔다는 혐의 때문에 백성들로부터 멸절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민수기 18:1-31은 레위 지파의 의무들과 특권들을 다룬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제사장 지파인 레위지파의 중간 지도자들인 고라와 다단, 아비람이 일으킨 모세와 아론의 배타적 영도권에 대한 반역 사건(민 17장)의 후폭풍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막 자체에 대한 부정적인 잔상(殘像)을 강력하게 남겼다. 회막은 이 반역자들에 대한 엄혹한 심판에서 발원하는 무서운 처소로 백성들 마음 속에 각인되었다. 이제 회막은 이제 일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죽음과 심판의 부정적 기념물로 각인될 위기에 놓여있다. 생명의 장소가 죽음과 멸망의 장소로 변질된 것처럼 보였다. 회막에 대한 백성들의 이런 두려움과 공포는 신학적으로 신앙적으로 다루어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백성들이 회막에 대하여 품고 있는 두려움과 공포를 치료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서 야웨 하나님은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앞으로 성막(성소)과 관련된 죄책을 전적으로 책임지도록 명령하신다. 즉 성막 안 경내 봉사는 제사장들에게 독점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제사장들에 대한 징계임과 동시에 레위인의 도전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하는 하나님의 현실적인 방편이었다. 비록 레위인들이 성막봉사에 필요한 여러 일들에서 그들의 도우미가 되겠지만 오로지 제사장들만이 성막 안 봉사를 감당할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 따라서 제단과 성소의 기구에 대해 레위인들은 접근할 수 없다. 레위인들과 백성들이 부주의하게 제단과 성소의 기구를 만지거나 접근하여 죽지 않도록 제사장들이 거룩구역(holy zone)을 사수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제사장이 거룩 구역을 사수하지 않으면 일반백성들의 잘못 접근하여 죽게 될 것이다. 성막으로 부주의하게 접근하는 외인도 죽게 될 것이다(18:1-7).
대신 하나님은 제사장들의 봉사직분과 레위인들의 봉사직분에 대하여 부응하는 생계유지를 확보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제사장들은 백성들이 흔들어 바친 거제물, 즉 모든 헌물을 주관하도록 위임받는다. 그들은 바쳐진 예물 중에서 다음과 같은 것을 영구한 몫의 음식으로 취할 수 있다. 곧 지성물 중 불사르지 아니한 것, 즉 모든 소제, 속죄제, 속건제물은 지성물로서 아론제사장들의 몫이다. 11-20절은 제사장이 받을 몫을 나열한다. 여기서 독자는 하나 하나 정확하게 따져 읽을 필요가 있다. 곡식제사(소제), 속죄제, 속건제물, 요제물(wave), 기름(oil), 포도주(wine), 맏물예물(first fruits), 초태생 예물(first of the womb), 사람들(난 지 한달 이후에 은 5세겔[=20게라] 속전지불)과 부정한 짐승을 대속한 속전(the redemption price), 그리고 처음 태어난 소, 양, 염소의 흔들어 바친 고기 부분(가슴과 오른 쪽 넓적다리) 등이 제사장의 몫이다. 이상은 제사장들의 급료규정인데 영원한 소금(covenant of salary)언약이다(18:8-19). 이 제사장 급료규정을 소금언약(대하 13:5)이라고 부르는 이유에 대하여 유대인 성서학자 제이콥 밀그롬(Milgrom)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소금은 예로부터 음식부패를 방지하는 최고의 방부제였다. 모든 희생제물들에 소금 사용은 요청되었다(레 2:13; 겔 43:24). 그것은 누룩과 다른 발효제와 대조되는 상징물로서 누룩과 발효제들은 제단 사용이 금지되었다(레 2:11). 그래서 소금은 영속성의 상징이요 소금언약은 깨어질 수 없는 언약을 의미한다”(Numbers, 154). 제사장 지파들은 가나안 땅에서 어떤 경작지 기업도 받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나머지 11 세속지파는 제사장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 이 규정은 “야웨 하나님이 생존세계에서 제사장들의 분깃이 될 것이다”라는 시편 기자의 고백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시 16:5-6).
레위인들이 바친 십일조가 제사장의 주수입원이 되듯이 이스라엘 자손들이 바친 십일조가 레위인들의 급료가 될 것이다. 레위인들은 이스라엘 초태생들을 대신하여 회막에서 봉사하는 지파로서 초태생들을 대표하는 장자지파다(출 13장, 33장; 신 32장 레위지파 규정-우림과 둠밈 보유)(18:20-24). 그런데 레위인들이 받은 십일조의 십일조는 다시 하나님께로 거제(擧祭)로 바쳐져야 한다. 곧 제사장에게로 바쳐진다(28절). 레위인들은 백성들의 십일조 예물 중 최선의 것을 하나님께 바치도록 규정된다. 나머지는 그들의 급료로서 어디서든지 사용 가능하다(18:25-31). 다만 레위인들은 이스라엘 자손의 성물을 잘못 사용함으로써 하나님께 죽임을 당할 죄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헌금유용과 헌금착복은 목회자에게 사형을 초래하는 죄다. 여기서 인상적인 것은 하급성직자들인 레위인은 하나님께 십일조를 바쳐야 하는 규정에 매여있으나 아론계열의 제사장은 이 규정에 자유롭다는 점이다. 현대 목회자는 제사장 반열인가? 레위인 반열인가? 레위인들이 이스라엘 세속지파인 11 지파의 기부금에 의존해서 살았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생활을 보장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사사기 17장 미가 가문의 제사장 사유화 시도에서 엿볼 수 있듯이, 많은 경우 레위인들은 생계유지를 위해 유랑하고 방랑하는 불우한 처지에 처한 자들이었다(삿 17:7-13; 18:3-6). 따라서 레위인의 십일조 봉헌규정도 면세점 이하의 수입을 받거나 아예 그보다 더 빈궁하게 지원받는 경우 실현불가능한 의무였다. 오늘날도 면세점 이하의 사례비를 받고 일하는 목회자들은 납세 논쟁이 한가하고 사치스러운 논쟁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들은 이스라엘 사회보장기금으로 살아가야 할 극빈자 명단에 자주 첨가된다(“객과 고아, 과부, 레위인들”: 신 14:22-29).
6. 신명기의 십일조 규정(신 14:22-29)
신명기 법에 따르면 하나님의 성민 이스라엘은 모든 소출(맏아들과 맏물)의 십일조를 매년 합법적인 하나님의 성소제단에 드림으로써 자신의 거룩성을 드러내어야 한다(14:22-29). 야웨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을 두시려고 선택한 곳에서 축제의 절기를 행할 때 십일조를 바쳐서 자신들의 삶이 하나님의 선물에 의존하는 삶임을 늘 기억하여야 한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두시려고 선택한 성소로부터 멀리 떨어져 사는 사람들이 화폐를 가지고 그 성소에 와서 제물을 사서 드리는 방법도 제시되고 있다. 이스라엘의 율법들은 인간의 곤경이나 현실적인 상황을 이해하고 스스로 약간씩의 변용을 감수한다. 구약의 율법은 인간의 처지와 형편에 대한 민감한 이해를 잘 반영하고 있다.
14:28-29은 매 3년마다 바쳐지는 십일조의 특수용도에 대하여 말한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착초기에는 매 3년에 한 번씩 긴급구제를 위한 십일조 저축이 있었던 것같다. 레위인, 객, 고아 등 사회복지기금의 확보는 이스라엘 공동체가 배타적 야웨 예배를 드릴 때 가능하다. 그래서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사회안전망의 확충으로 생계형 범죄가 발생할 여지를 급격하게 줄였던 것이다. 레위인, 고아, 객과 과부 등 사회 최빈곤층을 배부르게 하면 하나님께서 친히 이스라엘의 범사를 축복하실 것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번영의 길은 미시경제학이나 거시경제학을 초월한다. 자비와 사회적 애휼이 가져오는 신적 축복, 이것은 경제적 번영확보의 신기원을 열 것이다(존 러스킨의 애휼 경제학).
7. 레위인과 제사장의 사역 (신 18:1-8; 참조. 신 10:6-9)
신명기가 그리는 신정통치적 이스라엘 사회에서 가장 중심적인 지도자집단은 레위 제사장이다. 그들은 중앙성소(17:19)에 설치된 “최고 법정”의 재판관들이다. 널리 인정되듯이 구약성경에는 레위인과 제사장의 관계성에 대한 어떤 단일한 그리고 체계적인 규정이 없다. 소위 “제사장 문서”(출 28-31장, 35-40장; 민수기와 레위기)들은 아론계열의 제사장만이 제사장직을 차지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나머지 레위인들은 성전의 보조요원들이라고 규정한다. 반면에 신명기와 소위 신명기 역사서(여호수아-열왕기하)에서는 레위지파 일반이 제사장직을 차지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한다. 다시 말해 아론 계열의 레위족들에게만 제사장직을 배타적으로 귀속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제사장 문서”에 비하여 신명기는 제자장과 레위인, 혹은 아론계열의 제사장과 일반 레위계열의 제사장 사이에 있었던 서열상의 구분이나 직능상의 구분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런 구별이나 차별이 있었더라도 영속적인 구별이었음을 증거하는 실마리는 적어도 신명기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레위계열 제사장들 사이에도 책임영역상의 구별은 있었던 것 같다. 어떤 레위인들은 전국적으로 흩어져 있는 성읍들에서 봉사하고(신 18:6) 다른 레위인들은 중앙 성소(7절 하반절)에서 봉사하는 정도상의 차이였을 것이다. 이 차이마저도 어떤 레위인도 중앙성소에서 일할 수 있었다는 규정에 의하여 상대화된다. 결국 이 두 문서(제사장 문서와 신명기)는 완전하게 대립한다기보다는 부분적으로 다른 측면을 강조한다고 보는 것이 나을 것이다. 이런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레위인 혹은 레위제사장은 이스라엘 역사 전체에 걸쳐서 지도자적 역능(力能)을 행사해 왔음은 분명하다.
민수기 35장에서 자세히 규정되듯이, 레위 지파는 특정한 경작지 영토를 갖는 대신에 전국적으로 흩어진 48개의 성읍을 할당받는다. 그들은 전국적으로 흩어진 성읍과 촌락들에 체류자의 신분으로 붙여 사는 자들이다. 그들은 다양한 축제 절기들에 초청받을 때(예. 신 14: 29; 16: 11, 14) 백성들에 의해 드려진 예물들뿐만 아니라 드려진 희생제물들에(3-5절과 8절) 의해 생계를 꾸려간다. 신명기가 제시하는 레위 제사장의 지도자적 면모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이스라엘의 종교적 지도력은 레위지파에게 할당되었다(10:8; 27:9, 14; 31:9-13; 33:8-11 참조). 레위지파는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는 일에 있어서 이스라엘 공동체를 지도하는(10:8; 18:5; 참조. 21:5) 제사장들이 된다. 국민교육 (33:10; 31:9-13 참조)과 사법행정(17:9; 21:5)과 군사적 기능들 (20:2-4) 또한 레위 제사장들에게 할당되었다. 특히 거룩한 전쟁시 레위인들이 수행한 역할은 주목되어야 한다.
둘째, 레위인들은 이스라엘 동포들의 형제들로 소개되며 그들이 비록 세속지파들의 몫인 기업을 소유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주신 좋은 땅에서 나는 모든 양식들과 혜택들을 누릴 수 있다. 땅 대신에 야웨 하나님이 “레위지파의 기업”(18:1-2)이다. 그들은 백성들에 의해 드려진 예물들과 의무적 납부금들 혹은 헌물들을 먹고 산다. 성소에서 야웨께 드려진 의무적이고 자원적인 제물들은 레위족의 기업으로서 레위인 및 레위계열 제사장을 부양하기에 충분하다.
셋째, 왕과 재판관의 경우에서처럼(16:18-20을 보라), 레위 제사장 역시 이상적인 이스라엘 사람의 본보기로 제시된다. 신명기에서 레위인은 번성하도록 의도되어 있다. 그러나 레위인의 번성은 의존적으로 실현된다. 야웨에 대한 레위인의 의존은 다른 형제 지파들이 소유하는 어떤 사유재산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야웨에 대한 그의 형제 지파들의 의존보다 훨씬 더 현저하다. 그의 번영은 하나님께 제의적 예물들을 매일 바치는 그의 동포들의 계속적 순종이라는 요인에 의존하고 있다.
8. 성직자 집단 레위인의 한 유래(신 33장)
신명기 33:8-11은 레위지파를 위한 긴 축복기도문이다. 창세기 49:7에서 야곱은 레위에 대하여 부정적인 예언을 발설한다. 레위지파는 이스라엘 형제들 중에서 흩어지는 지파가 될 것, 즉 독립적인 영토를 갖지 못하는 지파가 될 것을 예언한다. 그런데 여기 신명기 33장에서는 그 흩어짐이 긍정적으로 적극적으로 해석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구약의 유언적 기도를 너무 결정론적으로나 운명주의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암시받는다. 창세기 49:6-7에서는 부정적으로 말해진 그 레위지파, 즉 영락없는 세속지파 중 하나로 분류되던 레위지파가 여기서는 거룩한 중보자 지파, 영적 제사장 지파로 격상되어 있지 않은가? 신명기 33:8-11은 이스라엘의 교사들과 제사장들로서 레위인들을 위한 일종의 성무헌장(聖務憲章)이다. 출애굽기 32:25-29에 따르면 레위지파의 제사장직은 야웨의 계약에 대한 그들의 신실성 때문에 주어진 축복의 결과였다. 그래서 그들은 야웨의 법도로 백성들을 가르치고 야웨 앞에서 희생제사를 드릴 때 전체 백성들을 대신하고 대표하는 권리와 역할을 위임받도록 운명되어졌다. 8-11절은 이 시내산 금송아지 사건처리과정에서 보여준 열심이 제사장직분을 얻게 된 레위지파의 역사적인 배경임을 암시한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훈계하고 야웨의 말씀을 전달하고 야웨 앞에서 서서 온 백성을 대신하여 야웨의 은총과 죄사함과 계속적인 돌보심을 간청하며 섬기는 중보자 전문가 집단이 형성되는 초기 역사를 발견한다. 앞서 말했듯이, 출애굽기 32장 25-29절과 민수기 25장에서 레위인들은 야웨를 향한 그들의 열정적인 투신과 오직 야웨만을 사랑하라는 기본계명에 대한 복종 때문에 제사장 직분을 할당받았다. 이 사건들에서 보여진 그들의 열심은 극단적인 행동들을 통하여 발휘되었다. 레위지파들은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을 과시하기 위하여 혈연적인 유대를 초월하는 거룩한 냉혹함을 과시한 사람들이다. 제사장직의 권리와 책임이 다른 사람들은 계약적 의무들을 버렸을 때에도 그 계약적 요구들을 끝까지 지켰던 사람들에게 허락되어 졌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18:1-8; 27:9-26; 31:24-25).
9. 예전으로 끝나는 신명기 법전에서 두드러진 공공 부조 부금 규정(신 26:1-15)
백성들의 일상적인 삶을 위한 구체적인 규례들과 법령들인 신명기 법전(12-26장)은 신명기 26장에서 종료된다. 신명기 율법단락은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서 얻은 수확물들 중에서 하나님께 드릴 예물들과 관련된 두 단계의 가르침들과 함께 마무리된다. 십계명을 비롯한 으뜸 계명들 안에 선포된 근본적 지침들을 삶 속에 적용하기 위한 구체적인 법규정들과 규례들을 상세히 전개하는 신명기 법전은 신명기 12장의 예배지침으로 시작해서 26장의 예배지침으로 끝난다. 신명기 율법의 마지막은 경건하고 진지한 예배와 사회적인 자비실천을 아름답게 조화시키고 있다. 이처럼 신명기 법전의 서두도 참 하나님에 대한 바른 예배로 시작되고 마지막도 바른 예배로 종결된다. 하나님에 대한 바른 예배 없이는 신명기 율법에서 선포되는 어떤 계명도 준행할 수 없다는 것이다.
26:1-11의 토지 소산의 맏물을 헌물로 드리라는 율법은 이미 18:4에서 언급되었고, 26:12-15에서 규정된 3년마다 시행하는 십일조 헌물 규정도 14:28-29에서 이미 다뤄졌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 살게 되었을 때 어떤 예전적 맥락에서 어떻게 예물을 드릴 것인가하는 규정들을 중점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즉 그것들은 야웨에 의해 속량되어 의식주를 공급받았고 마침내는 구원의 선물을 받았던 사람들의 특징적인 삶인 감사와 순종의 태도를 드러내는 구체적인 사례들로 기능한다. 26:1-11의 토지 소산의 맏물 봉헌 규정은 예배의 본질이 감사와 바침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예배는 요구하는 시간이 아니라 바치는 시간이라는 것이다. 토지소산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복주셨음을 기억하는 시간이다. 이 맏물 봉헌 규정은 가나안 땅 정착 후 가나안 땅의 풍요와 소산을 누리는 사실을 전제한다. 가나안 땅의 풍요를 누리자마자, 이스라엘 지파의 각 구성원 혹은 가족의 대표들은 그 땅이 생산한 모든 생산물 중의 일부를 취하여 제사장의 중보를 통해 성소에 있는 야웨의 존전에 갖다 바쳐야 한다. 그것은 삶에 필요한 모든 필요를 풍성하게 공급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깊은 감사를 표현한다. “내가 야웨께서 주신 땅에 이르렀나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내가 이 땅을 선물로 받았나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한 때는 정착할 땅이 없었던 유랑민이었던 과거를 기억하고 현재 가나안 땅에서 누리는 삶의 안정감과 풍요를 하나님의 복주심으로 돌리라는 것이다. 이 짧은 신앙고백 안에 창세기부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가 압축적으로 요약되고 있다. 이 파노라마같은 구원사의 절정이 바로 토지 맏물을 들고 야웨의 성소에 가 감격적인 신앙고백과 맏물을 봉헌하는 예배행위라는 것이다.
26:12-15은 예배 행위의 본질은 감사와 봉헌임을 다시금 천명한다. 이 단락은 감사와 봉헌의 구체적인 표현 중 하나가 십일조임을 밝힌다. 이 십일조 봉헌 규정은 “땅에서 계속적인 축복”을 누리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알려준다. 3년 마다 드려진 십일조는 여러 가지 이유로 가나안 땅의 혜택들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 구체적으로 레위인, 체류자, 과부, 그리고 고아를 부양하는 데 사용된다. 십일조의 근본 메시지는 하나님의 모든 선한 축복들의 열매를 모든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나눠 가지는 삶이야말로 예배의 중심 요소 중 하나라는 것이다. 이스라엘 계약공동체 구성원들은 그들의 수입 중 일부를 떼어 생계의 위협 속에 사는 동포들을 먹여 살리도록 기대되었다. 신명기 14장이 잘 보여주듯이 십일조 규정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의 풍요를 쉼없이 누리는 정도(正道)다. 14:29은 레위인과 고아와 과부를 위해 십일조를 드리는 사람들에게 자동적으로 축복이 임한다고 가르치지 않는가? 그래서 26:15에서 십일조 의식이 이스라엘과 생산물을 내는 토지를 축복해 달라고 요청하는 기도문으로 끝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II. 역사서
1. 남유다의 요아스 왕 시대의 성전 수리를 위한 헌물(왕하 12:4-16)
당시에는 예루살렘 성전을 위하여 백성들이 드리는 은이나 사람들의 몸값으로 드리는 은이나 자원예물로서의 은이 드려졌다. 요아스는 이 드려진 은으로 퇴락한 성전 부분을 수리하라고 명하였으나 제사장들이 23년 간이나 성전 수리 명령을 수행하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백성들의 자원 헌금을 거두어 성전을 수리하였다. 이 때 백성들이 바친 속건제의 은과 속죄제의 은은 성전수리비로 충당되지 않고 제사장의 수입으로 귀속되었다(16절).
2. 북이스라엘 왕 므나셈의 국방세 징수(왕하 15:17-20)
앗수르 왕(Pul, 디글랏빌레셀 3세)의 포위 공격을 달래기 위하여 북이스라엘 왕 므나헴은 이스라엘 자유 농민들을 토색하여 은 50세겔을 징수하였다(20절).
3. 히스기야의 종교개혁으로 인한 개선된 레위인 처우(대하 31:1-19)
히스기야의 종교개혁의 여파로 예루살렘 성전에는 갱신된 유다 백성들의 진심어린 예물, 십일조, 헌물로 가득 차게 되었다. 유다 성읍에 거한 이스라엘과 유다 자손도 소와 양, 성물의 십일조를 바쳐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풍성한 공궤와 물질적인 공급을 받았다. 제사장들과 20세 이상된 레위인들에게 풍성한 급여가 지급되었다. 아마도 구약 성경 전체에서 레위인들이 풍성한 급료를 받았음을 명시적으로 언급하는 유일한 예일 것이다.
4. 요시야 종교개혁(예루살렘 제의 중앙화)으로 실직당한 유다의 지방 제사장들(왕하 23:5-20절)
유다의 가장 강력한 개혁군주 요시야가 지방 산당이 바알과 아세라라는 이방 종교제의의 본거지 구실을 한다는 핑계로 지방 산당의 제사장들을 불법화하고 일시에 대량 해고해 버렸다. 심지어 가나안 종교에 심각하게 동화되고 오염된 산당의 제사장들의 경우 죽여버렸다. 요시야 종교개혁으로 지방 산당의 제사장들은 “나중에 레위인들로 불리는 하급 제사장”으로 전락되고 연금생활자로 전락하고 만다(9절, “최소한 생계지원”).
5. 페르샤 속주(屬州) “예후다”(Yehuda) 거주민들의 고통(느 5:1-5)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지역의 예후다(유다) 총독으로 부임해 왔을 때 귀환포로 공동체는 사회적 양극화와 페르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관리들의 가렴주구로 혹독한 고생을 하고 있었다. 총독 느헤미야는 “우리는 밭과 포도원으로 돈을 빚내어 세금을 바쳤도다”(4절)라는 공공연한 불평을 듣고 여론 호소형 군중대회를 열어 유력자들을 책망하고 이 사회적 양극화와 빈곤층 문제를 해결하려고 분투한다(4절).
6. 다시 느헤미야의 개혁으로 생계를 보장받는 레위인(느 12:44-47)
느헤미야의 성전 체제정비로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의 처우가 크게 개선되었다. 그들은 백성들이 즐거이 바친 거제물과 맏물 소산 십일조로 급여지급을 받았다. 느헤미야는 노래하는 자와 문지지 역할을 하는 레위인들에게도 날마다 쓸 것을 주고 제사장 몫의 헌물을 나눠주었다. 오랜 전통에 따라 레위인들은 자신들이 받은 것의 일부를 구별하여 아론 자손에게 주었다(느 12:47).
III. 예언서
1. 병든 제물을 바치는 백성들의 뒤틀린 양심을 공격하는 예언자(말 1:6-16)
주전 5-4세기 경의 예언자 말라기는 병든 제물을 가져오는 백성들의 죄악을 규탄하는 예언자였다. 말라기를 통해 야웨께서는 야웨의 성전에 제물 드리는 일이 번폐스럽다고 불평한 백성들의 숨은 동기를 간파하시고 진노하신다. 성전에 바치는 준 조세성격의 예물 봉헌 규정이 당시의 백성들에게 번폐스럽게 느껴졌다는 점이 중요하다. 일종의 조세저항인 셈이다.
2. 제사장 언약 말소를 위협하시는 하나님(말 2:1-9)
말라기 2:1-9은 제사장직을 더럽힌 자들에게 제사장 직분을 박탈하시겠다고 말하는 하나님을 보여준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오경 여러 군데서 확증된 레위와 세운 제사장 직분 수행 및 지원 언약을 파기하시려는 것이다.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의 영적 탈선과 타락이 극심하여 더 이상 레위 언약 평강의 언약을 지킬 수 없음을 선언하신다(8-9절). 제사장직을 더럽힌 자들은 백성들로부터 급료를 지급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레위인과 제사장의 생계지원규정은 절대적인 법이 아니라 상대적인 법률임을 알 수 있다.
3. 십일조 의무를 거부한 백성들을 규탄하시는 하나님(말 3:7-12)
말라기 3:7-12은 십일조 규정을 어긴 이스라엘 백성들을 규탄하신다. 하나님의 것, 십일조와 헌물을 도둑질 한 죄를 규탄하신다. 온 나라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했기에 하나님의 저주가 임한다(9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온전한 십일조가 하나님의 창고에 쌓여 있기를 기대하신다(10절). 이 조건이 충족될 때 하나님의 복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들판을 윤택케 하신다. 사회공공 부조나 공세적인 성격의 공공부담은 하나님의 복을 받게 만드는 필요조건이 된다. 사회공공 부조나 십일조 규정이 배척되면 제사장과 레위인의 생계는 위협당하고 하나님의 복을 매개하는 영적 중개작용이 심각하게 약화된다는 것이다.
IV. 신약성서
1. 성전 인두세를 친히 납부하시는 예수님(마 17:24-27)
예수님은 20세 이상 된 이스라엘 성인에게 부과된 성전세를 친히 내신다. 아버지의 왕국에 사는 아들들은 아버지에게 세금을 납부할 책임에서 면세되지만 외인들(성전 관리들)의 실족을 방지하기 위하여 당신 자신과 베드로를 위하여 성전 인두세를 내신다고 해설하신다. 12사도를 비롯한 초기 기독교인들이 주후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기 전까지는 성전 인두세를 납부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이 본문이 목회자의 납세의무를 정당화하는 신약성서의 구절로 인용되는 것이 정당한지는 다소 논란의 여지가 있다.
2.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마 22:15-22; 막 12:13-17; 눅 20:20-26)
이 본문 또한 성직자의 납세의무를 강조하거나 정당화할 때 인용되거나 인증되는 본문이다. 바리새인들이 헤롯당원들과 함께 예수를 올무에 빠뜨리려고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정당한지 부당한지 물었다. 예수는 로마황제의 초상(“신적 아우구스투스의 아들 황제 가이사”)이 새겨진 은전 데나리온을 들고1) 하나님의 것과 가이사의 것을 구분하여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라고 말씀하셨다. 주화의 초상과 글자는 가이사의 것이다(막 12:15). 이 말의 뜻은 세금을 바치라는 말도 아니요 바치지 말란 말도 아닌 아주 지혜로운 말씀이다. 굳이 해석하자면 가이사의 통치를 즐겨받고 그것의 혜택을 누리는 자들은 세금을 바치라는 정도의 의미다. 여기서 평소에 상호 적대적이었던 바리새인과 헤롯당원이 함께 시험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헤롯당원은 철저히 친로마적 토착세력으로서 가이사에게 데나리온으로 세금을 바쳤다. 그러나 바리새인은 그것을 만지는 것을 거부할 정도로 세금문제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다. 아마 세금을 냈더라도 그들이 쓰는 세겔이나 아니면 마카베오 독립 전쟁 이후 하스모니안 왕조시에 주조되어 유통된(포도나무 가지 형상) 그 주화를 이용하여 바쳤을 것이다. 따라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라”는 권고는 이미 데나리온을 사용하고 로마제국의 정치적 해택을 누리는 자들은 세금을 바치라는 정도의 것이다. 따라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리라(마 22:21)는 말은 정교분리를 의미하지도 않고, 그리스도인의 시민적 질서에 대한 복종의무를 규정하는 법조문으로 간주되기보다는 위기모면용 촌철살인적 응답으로 이해되는 편이 낫다.
3. 로마 시민권자 바울의 스토아 철학적 국가관 아래서 본 세금 문제(롬 13:1-7)
로마서 13:1-7은 공세를 바치는 것이 옳다는 바울의 말을 기록한다. 바울은 지방세와 국세를 바치라고 말한다(6-7절). 그리스도인들은 과도한 종말론에 빠져서 일상적 시민사회의 질서를 거부하는 무정부주의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다. 바울은 스토아 철학의 국가관, 즉 국가는 객관적 세계 이성 로고스의 대행기관이라는 관점을 가졌던 로마시민이었다. 로마제국이 지방 속주민들에게는 가혹한 압제자였으나 로마시민에게는 나름대로 정교하고 불편부당한 법치주의를 실현하고 있었다. 이런 국가관은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기 위하여 그의 보낸 방백에게 하라”(벧전 2:13-14)라는 베드로 전서 2:13-16 단락에 의해 또한 지지되고 있다. 하지만 이런 국가관은 요한계시록 13장의 국가관, 적그리스도요 성도의 박해자요 하나님 권력찬탈세력으로서의 국가권력에 관한 견해와 긴장 관계를 이룬다. 이 단락은 과격한 종말론에 추동된 그리스도인들의 무정부주의자화를 경계하는 말일뿐 목회자가 세금을 낼 것을 권고하거나 명하는 “새 언약”적 사고는 별 상관이 없어 보인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이 단락은 성직자의 납세문제를 다루는 본문이 아니라고 판단된다.
4. 바울의 국제적 기아 대책 프로젝트(고후 9:1-5)
고후 9:1-15는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한 마게도냐인들과 아가야 지방 그리스도들인의 국제적 연보에 대하여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단지 국세와 지방세의 납부 의무를 초월하는 거룩한 공공부조 부담에 노출되어 있다.
나가는 말
앞서 언급했듯이, 요즈음 세인들 사이에서 뿐 아니라, 교계내에서도 목회자에 대한 세금 부과 문제로 많은 논란이 일고 있다. 그리스도인들 중 많은 사람들은 목회자가 세금을 내는 것이 하나님 뜻에 합당한가 아닌가에 대해서는 성경이 말해주고 있을 것이라고 믿고 성경적인 증거와 반증거를 찾으려고 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그들은 성경적인 근거에 호소해서 목회자 납세 문제를 타결지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세상적인 논거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경의 말씀에 따라 교역자의 납세문제를 풀어가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상의 우리의 간략한 연구가 기대에 미치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오늘날의 목회자를 제사장직으로서 레위인으로 생각하여 레위인이 세금을 내지 않는 것과 같이 목회자도 세금을 내지 말아야 한다는 논리가 있지만 성경은 레위인들의 면세규정에 대하여 일언반구의 지지나 정당화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물론 이들이 일반백성들과는 다른 성직자 혹은 준성직자 신분을 가졌기에 일반백성들처럼 광범위한 십일조 규정이나 봉헌의무 규정에 매이지는 않았다. 그들은 아론 제사장에게 그들의 수입의 십일조를 바쳐야 했다. 그러나 이런 규정이 바로 목회자들이 오늘날 국세청에 세금을 반드시 내어야 한다는 납세의무를 보편적으로 정당화거나 강제하는 본문이라고 보기에는 어렵다. 대부분의 경우 레위인은 면세점 이하의 수입으로 살았고 제사장들은 그들 자체가 국세청과 정부의 책임자였다. 목회자의 납세의무는 자연법 혹은 그것을 부분적으로 반영하는 국가의 헌법 혹은 관습법으로 면세 혹은 납세로 규정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현행법은 잘 알려져 있듯이 종교 단체와 같은 공익 법인은 세금 부과를 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면세의 명분규정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이런 상황에서 목회자들이나 일부 교회의 탈선에 대한 공공시민 사회의 비판이 비등해지면서 목회자들의 납세 문제가 사회 쟁점으로 떠올랐다. 일부 도시중대형 교회와 목회자들이 교회의 외형적 성장에 치중하고 사례비와 각종 수혜적 비용을 과도하게 받는 등 교회 재정을 보편적 정의감에 맞게 사용하지 않는 데에 대한 시민사회의 반발인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성직자가 세금을 내는 문제에 대하여 여론 조사를 한 결과 71.5%가 성직자의 세금 부과를 찬성하고 있다는 말이 여기 저기서 들려온다. 개신교 목회자들 중 면세점 이상의 수입을 보장받는 사람들은 기꺼이 모든 것이 가하나 덕을 세우기 위하여, 외인들이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세금을 자진 신고하고 납부하는 것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성경적 기준에 입각한 옳고 그름의 판단에서 내려진 결정이 아니라 선교적 상황에 대한 능동적 대체 차원에서 고려된 판단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단서가 붙어 있다. 목사들이 세금을 낸다고 해서 무제한적인 복음적인 이웃사랑과 선교적 자기비움의 삶을 살아야하는 보다 더 거룩한 부담에서 해방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실제로 목회자들이 지상 왕국의 시민으로서의 한 의무인 납세의무를 잘 수행한다고 해서 기독교에 대한 세상 불신자들의 호감도나 인지도가 올라가지 않을 수도 있다. 다만 우리는 스스로를 위하여 하나의 경보음을 울릴 필요가 있다. 목회자들이 시민의무의 일환인 세금 내는 의무 수행이상의 복음적 이웃 사랑실천의 단계로 전진하지 않고 시민사회의 공적 비판을 약간 비껴가는 방편으로 납세의무를 지키지는 말자는 것이다. 목회자들은 복음적 진리를 실천하기 위하여 유랑하는 레위인의 처지로 전락할 각오로 복음의 급진적 메시지를 시민사회, 불신 세상을 향하여 외치는 영적 공세성을 회복하는 데 더욱 치중하여야 한다는 점이다.
참고도서
김회권, 『하나님 나라 신학의 관점으로 읽는 모세오경 1』(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6)
김회권, 『하나님 나라 신학의 관점으로 읽는 모세오경 2』(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7)
유지미, 『성전과 경제-마가공동체의 사회경제전략』(서울: 한들출판사, 2004)
J. Milgorm, Numbers: The traditional Hebrew text with the new JPS translation
(Philadelphia: The Jewish publication society, 1990)
N. M. Sarna, Leviticus: The JPS Torah Commentary (Philadelphia: Fortress, 1989)
1) 이런 주화들은 로마제국의 시민들과 속주민들에게 로마제국이 제공하는 번영과 평화에 대한 감사로 세금을 바쳐야 한다는 일깨우는 일종의 정치적 각성제였다(유지민, 『성전과 경제-마가공동체의 사회경제전략』[서울: 한들출판사, 2004], 194-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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