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삶 (요13:1-11)
임 영 수 목사
예수께서 지신 십자가는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완전하게 나타내 보이신 사건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예수님의 생애에서 상징적 행동으로 나타내 보이신 또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타나 있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일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이 아름다운 이야기가 담겨진 본문은 모두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절; 도입부분, 2-5; 상징적 행동에 대한 서술, 6-11; 그러한 행동에 대한 해설입니다.
먼저 본문에 이 이야기의 전개를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일을 제한된 시간적 상황에서 하셨습니다. 즉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실 그 시간을 내다보시며 제자들을 극진히 사랑해 주셨습니다. 그러한 사랑을 가장 완전하게 나타내 보이신 곳이 십자가입니다. 그 시간은 아버지께로 가시는 시간인 동시에 형벌, 심판, 수치, 곤욕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저녁을 잡수실 때에 그와 자리를 함께한 제자들 모두가 예수님의 구원과 사랑을 다 받아 드릴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구원과 사랑의 대상에서 어떤 사람도 제외 될 수는 없지만, 누구에게나 자신을 그러한 대상에서 제외시킬 수 있는 비운의 가능성은 언제나 남아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바로 그러한 대상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비운의 제자가 시몬의 아들 가롯 유다였습니다. 본문에 그 사실이 이렇게 서술되어 있습니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롯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신 일과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행동은 운명적으로 할 수 없이, 또는 어떤 강력한 타율적인 힘에 굴복해서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완전한 권위와 자유, 주권을 가지신 선택된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본문에 그러한 사실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그러나 그러한 일이 사람들에게는 이해 될 수 없고 무의미하고 어리석은 일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한 사실이 예수님을 가장 열정적으로 따르던 제자 베드로에게서 그대로 반영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저녁 식사를 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서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루셨습니다. 그리고 대야에 물을 담아다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른 수건으로 닦아 주셨습니다. 드디어 시몬 베드로 차례가 되었을 때에 베드로는 단호한 태도로 스승이신 예수께 발 씻기우는 것을 거부 했습니다. "베드로는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십니다."고 했습니다.
베드로의 의식 속에는 다른 사람의 발을 씻겨 주는 행동은 그 시대에서 가장 천한 신분의 종들 만이 하는 일로, 그렇지 않으면 권력을 가진 자들이 상대방에게 굴욕감을 주고, 강압적으로 복종시키기 위해 자신의 발을 씻기우게 하는 것으로 기억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십니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발을 씻으려고 하시는 예수님의 행동을 거부한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행동이 인간들에게는 숨겨진 신비스러운 차원에 속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행동을 통해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지금 모든 곳에 그리고 항상 인간 곁에 계시며, 인간의 삶의 바탕이 되어 존재하시고, 인간과 사랑의 교재 가운데서 새 창조의 일을 해가시는 그 사랑의 하나님의 현존을 가장 현실적으로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스스로 자원해서 자유 가운데서 종의 모습으로 실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발을 씻기운다는 것은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어 장차 그러한 삶을 살아간다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한 깊은 신비 가운데 가리워져 있는 행동을 베드로가 알리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내가 하는 일을 지금은 네가 알지 못하나, 나중에는 알게 될 것이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인격과 삶은 이 세상에서 가장 자유롭고 진실된 사랑의 표현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 인간에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어렴풋이나마 가르쳐 줍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서 그 하나님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그렇게 볼 때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은 희망이 없는 어두움의 길, 허무의 길이 아닌 성부 하나님께로 가는 길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본문에서 예수께서 아버지께로 가셔야할 '때'의 과정에서 그러한 일을 하셨다는 것을 서두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성부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 자신만을 위해 쌓아두고 자신만을 아름답게 가꾸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길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십자가를 지시고 지옥으로까지 내려가시는 철저한 자기 개방과 포기였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나중에 가서야 예수님의 행동을 완전히 이해 하고 받아 드리게 되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결국 베드로 자신도 십자가 형틀에서 그의 최후를 마쳤습니다.
"예수님과 자신을 나누며 일치를 이루고 예수님에게 속하려고 하는 사람은 예수님이 바치는 종의 섬김을 받아 들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과 상관이 없습니다.
다혈질인 베드로는 예수님의 대답을 득고 즉시 "주여 내 발 뿐만 아니라, 손과 머리 까지도 씻겨 주십시오"라고 반응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의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으시고 베드로의 발만 씻겨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세례를 의미하기보다 발을 씻기신 상징적 행동에 내포된 구원의 의미를 강조한 것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발 씻기움을 받는 것은 예수님의 구원과 사랑을 받아 드렸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께 발 씻기움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과 연합 가운데 있을 뿐만 아니라 '예수 공동체'와 깊은 연관을 맺게 됩니다.
그런데 그러한 예수님의 사랑과 구원의 대상에서 제외된 제자가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가롯 유다 입니다. "그는 예수를 배반 하는 행위를 함으로써 구원이 걸려있는 예수 공동체와의 인연을 끊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에서 스스로 자신을 배제시켰습니다. 그러한 비운의 가능성은 어느 때나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어디서 어떻게 그러한 일이 발생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시몬의 아들 가롯 유다의 경우에 어떻게 해서 그러한 비운의 사람이 되었는지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 결과가 매우 비참했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태어나지 않았드라면 좋을뻔 한 생이 되었습니다.
지난주 설교 본문 가운데 이러한 말씀이 있었습니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요12:26)
"예수 공동?quot;와 인연을 맺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 구원과 무관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께로부터 발 씻기움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에 대해서 자기 자신을 스스로 배제시키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어떻게 거기서 배제되어 비운의 사람으로 전락할 수 도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에서 배제되지 않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섬기며, 그를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을 섬기며 그를 따른 다는 것은 예수께서 계시는 그 섬김의 자리에 함께 머무는 것을 의미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타율에 의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원해서 자유와 사랑 가운데서 선택하는 삶의 방식 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의 삶은 "자신을 낮추고 굽히며 다른 사람을 위해 살고 행동하는 종의 삶입니다." 그러한 "사랑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고유한 삶을 살며 자유롭고 독립적으로 삶의 능력을 지니고 살도록 하는 것이며, 필요한 인간적 삶의 공간을 누리며 살도록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들과 자신을 동일시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권력과 지배권을 포기하시며, 그리고 가장 천한 봉사까지도 기꺼이 실천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에게 속하고자 하는 사람은 그러한 삶으로 바뀌어져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사고와 의식, 좀더 나아가서는 존재 자체의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힘은 오직 사랑으로만 가능합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모든 형태의 권력과 지배권을 포기하고 이웃들에게 자신을 개방할 때 하나님을 만나 뵙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발을 씻겨주신 행동은 인간의 모든 위선, 거짓, 하물며 지배권에 대한 도전이 되기도 합니다.
신학자 몰트만은 교회사적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형태와 십자가가 시대적 상황과 함께 다르게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먼저 잡신들, 귀신들, 우상과 미신으로 가득한 세계에서는 신앙의 순종을 나타내는 사도들의 십자가였습니다. 그 시대에서는 사도직을 수행해가는 것 자체가 십자가였습니다.
그 다음 교회에 대한 박해가 극심할 때 그리스도를 따르는 형태는 순교였습니다. 세상의 권력을 쥐고 있는 세계의 지배자들 앞에서 순교자들의 십자가는 십자가에 달린 그분의 다스림을 분명히 나타내는 증거였습니다. 박해 시대에 순교는 특별한 은사로 여겨졌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르는 최고의 영광의 절정이었습니다.
순교자의 시대가 지나고 나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형태는 수도사의 삶으로 나타났습니다. 수도사의 특별한 길을 통하여 형성되었습니다. 이 시대에 와서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의미는 모방의 개념으로 바뀌어지면서 사도들과 순교자들이 경험한 굴욕은 사라지고 기독교적인 겸손의 덕이 형성되었습니다. 이 때에는 영적인 고행의 훈련이 형성되었습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 시대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십자가의 삶은 어떠하여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그 해답을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행동에서 발견하게됩니다.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십자가의 삶은 종의 모습으로 발을 씻겨주는 행동으로 나타나야합니다. 발을 씻겨준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이것은 우리 가운데 현존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 보이는 다양한 행동을 의미 합니다.
"삶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의 저자 파커 J. 파머는 퀘이커 교도입니다. 그는 한때 헤어나오기 어려운 깊은 우울증에 빠진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그의 친구들은 그를 찾아와 욥의 친구들처럼 여러 말로 그를 위로하고 가곤 했습니다. 파커는 그러한 친구들의 위로의 말이 아무 도움이 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모두 거짓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의 친구 가운데 감사하게도 치유의 능력을 발휘하도록 자기 곁에 함께 있어 줄 용기를 가진 가족과 친구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 중 한명이 빌이라는 친구였다고 했습니다. 그 친구는 자기의 허락을 받고 매일 오후 그의 집에 들러서 자기를 의자에 앉히고는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신발과 양발을 벗긴 다음 30분동안 발을 맛사지 해주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거의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어쩌다 말을 할 때도 충고 따위는 하지 않고 그저 자기가 느끼는 상태를 말해 주었다고 했습니다. "오늘 네가 얼마나 힘든지 느껴진다." "네가 더 강해지는 것 같은데."라고 말하곤 했다는데 그러한 그의 말은 그에게 진정으로 도움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파머는 "그 친구의 행동이 내게 어떤 의미였는지 말로 표현하기란 불가능하나,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다는 성경의 이야기를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는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특징지워 질 수 있습니다.
1. 모든 인간적 상황이 경직되어 버린 시대입니다.
2. 보편적인 무감각이 대중의 병으로 만연되어 있습니다.
3. 상품 숭배주의와 모든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믿는 잘못된 신 앙이 팽배해 있는 시대입니다.
이러한 시대에서 사랑과 다른 사람들의 삶에 대한 관심이 인간을 인간답게 할 수 있습니다.
사랑만이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고 세상을 변화 시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이 무의미한 삶을 의미있게 만듭니다.
'◑ 자료 18,185편 ◑ > 자료 16,731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역사(History)와 신학(Theology)의 긴장 (0) | 2021.12.01 |
---|---|
목회자 납세문제에 관한 하나님의 법(성경)적 고찰 (0) | 2021.12.01 |
십자가에 대한 묵상(고전 1:18-25) / 임영수 목사 (0) | 2021.12.01 |
실패의 원인(막 9: 25-29 ) / 임영수 목사 (0) | 2021.12.01 |
겸손의 길(마 20:20-28) / 이종윤 목사 (0) | 2021.12.0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