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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의 신앙 세계: 토라, 시편, 그리고 예언서 신앙

by 【고동엽】 2021. 11. 28.

구약성경의 신앙 세계: 토라, 시편, 그리고 예언서 신앙

-하나님-원인론적(신학적) 반성과 분석, 그리고 전망의 힘-

 

이번 GSF 여름 수양회 성경 강해는 구약성경의 세계관적인 특징인 하나님-원인론적(신학적) 세계인식(자아관, 인생관, 그리고 역사의식)을 다룹니다. 구체적으로 우리는 구약 성경의 세 부분들인 토라, 시편, 그리고 예언서의 신앙세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성서본문들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를 통하여 구약성경의 신앙세계 속으로 잠수해 보려고 합니다. 구약성경은 예수님과 사도들과 바울이 성경으로 읽던 책들입니다. 구약성경을 완전히 읽고 소화하면 예수님과 바울과 사도들의 세계인식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엠마오 도상에서 도망치는 두 제자들을 만나서 모세의 글과 시편, 그리고 예언서가 그리스도의 고난(필연적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말한다고 선언하시며 성경을 자세히 가르쳐 제자들의 마음을 뜨겁게 달구십니다(눅 24:27-45). 예수님은 길가면서 구약성경을 가르쳐서 제자들을 눈을 열고 마음을 뜨겁게 하십니다. 구약성경의 신앙세계에 대한 섬광과 같은 깨달음으로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의 필연성을 깨닫는 순간 부활 그리스도를 순간적으로 발견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뜨겁게 감동받은 후 다시 고난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부활신앙은 공동체로부터 이탈하려던 제자들을 하나로 다시 묶어 줍니다. 그들은 약속하신 성령의 도래를 대망하며 성전에서 매일 모여서 기도합니다. 우리는 창세기 11:25-12:9(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시편 1:1-6(복 있는 사람은), 그리고 에스겔 37:1-14(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에 대한 심층적인연구를 통하여 구약성경의 신앙세계의 심해까지 잠수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과연 어떤 점에서 구약성경, 토라, 시편, 그리고 예언서들이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을 증거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 또한 이 번 수련회의 성경 강해를 통하여 마음이 뜨거워지는 계시를 맛보기 위하여서 사모하며 기도합니다.

 

1강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불임(不姙)의 족보에서 세계 열방의 조상 족보로 변화되는 이야기-

 

창세기 11:25-12:9

 

아브라함의 순종과 믿음의 생애는 인류역사가 하나님의 구원의지가 작용하는 장(場)으로 전환되는 데 결정적인 지렛대 역할을 합니다. 아브라함의 생애는 우리 인생과 자아를 하나님의 구원의지의 빛 하에서 재조명하도록 도와줍니다. 불임의 세월을 보내는 중늙이의 인생에도 하나님의 장엄한 목적이 숨겨져 있었으며, 한 세계에서 당대의 대물림도 못하는 사람은 다른 세계에서는 열방의 조상이 될 사림임을 알게 됩니다. 토라는 우리의 눈을 열어 하나님의 목적 바깥에 살던 자연인을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시키는 도구로 바

 

라보도록 이끕니다.

 

아브라함 이전의 역사와 아브라함 이후의 역사

창세기 12:1-3(성서지도 및 구약연대표를 참조)에는 이스라엘 민족의 형성을 세계사적 지평 속에서 반추(反芻)하는 깊은 신학적 성찰이 들어있습니다. 12:1-3은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자의식 속에 세계만민을 향한 하나님의 구속계획(redemption plan)을 예리하게 의식하였음을 보여줍니다. 창세기 12:1-3은 이스라엘 민족의 기원을 말하며 이스라엘이 왜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신학적 성찰을 담고 있습니다. 10장(11장)에 나오는 열국 도표(the Table of Nations) 중에-즉 자연적인 지리적-인종적 확장의 한 갈래로 생성된 민족들의 도표-에는 이스라엘이 누락되어 있습니다. 여기에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자연적-인종적-언어학적 차이 때문에 생성된 여러 민족 중 하나가 아니라는 주장이 깔려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등장과 그것의 구속역사적(redemptive-historical) 의미-즉 이스라엘이라는 선민의 등장-는 그것에 앞서 배치된 3-11장이라는 길고 긴 서론을 전제하지 않고는 충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3-11장은 인류의 원역사(原歷史, primeval‎ history)를 다룹니다. 그것을 원역사라함은 인류 문명의 모든 시기에 경험된 신적 간섭의 역사를 가리킵니다. 이런 점에서 원역사는 일종의 범례적 역사(paradigmatic history)입니다. 범례적 역사라 함은 모든 인종 및 문명의 시초 역사 속에 반복적으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이 범례적 역사에 의하면 인간역사가 한 선한 창조(상류)로부터 시작되어 점점 더 나빠지는 방향으로 전개됩니다. 인류역사는 창세기에서 시작하여 옛 창조의 붕괴와 해체를 예고하는 묵시록으로 치닫습니다. 창세기에 묵시록으로 전진하는 인류역사는 원형적 역사입니다. 창세기에서 시작된 영적 세계의 반역과 이 천사적 존재의 반역에 동조하는 인간의 반역(구데타)은 초동진압되지 않고 종말진압됩니다(카를 하임). 창세기 3장에서 출현된 그 뱀이 요한계시록, 즉 묵시록 19-20자에서 마침내 옛 뱀의 이름으로 체포되면 무저갱으로 집어던져 집니다. 인류역사의 1막은종료됩니다. 이런 인류역사의 시점과 종점을 관통하는 주제가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라는 관점으로 구약성경과 구속사를 정의합니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의 말씀이 발설되자마다 실현되는 세계, 즉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는 세계를 보여줍니다(시편 103:19-22). 창조 직후에 시작된 인류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임과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역사였습니다. 따라서 창세기 1-2장은 인류 역사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역사로 예정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인류는 하나님의 땅과 역사 속에서의 현존을 의심하지 않았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상식으로 받아들였음을 증거합니다(아담-가인-라멕-노아시대의 거인족-바벨탑 세대;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인류의 철학사는 영원히 미완성되는 바벨탑의 역사> ).

창세기 1-11장에 의하면 인류의 역사는 시원(始原)에는 일신교신앙이 있었으며 그 일신교 신앙이 변질되었을 때 인류는 저항적인 유신론 시대로 접어들었음을 보여줍니다. 이 저항적 유신론 시대 다음에 이교도 시대(우상숭

 

배 및 다신교 시대)가 도래합니다. 창세기 1-11장은 유일하신 한 하나님에 대한 저항적 유신론이 문명사와 역사를 거쳐가며 다신교, 우상숭배, 범신론, 이신론(deism), 그리고 무신론(저항적 무신론과 실존주의) 등으로 분기되었음을 보여줍니다(Y. Kaufmann, <이스라엘의 종교>: 카우프만은 헤겔(Hegel)-바트게(Vatke)-벨하우젠류(Wellhausen)의 종교진화론적인 도식에 반대). 3-11장은 죄와 심판의 악순환이 인류가 아주 초창기(문명사의 초기)에 경험한 하나님의 역사였음을 보여줍니다. 이런 점에서 3-11장은 순환적인 역사, 즉 아무런 목적(telos, eschaton)이 없이 순환하기만 하는 역사를 기록합니다(cyclical history versus teleological history[목적론적 史觀 혹은 종말론적 史觀]). 3-11장까지 인류와 교섭하는 신은 오로지 한 분 하나님으로 기술된다. 아브라함의 등장은 바로 유일신교 신앙의 회복임을 보여줍니다.

아브라함형 인류의 출현은 아담형 인류, 가인형 인류, 라멕형 인류(4:23-25), 노아시대의 네피림 자손(아낙 자손)(반인반신적 거인 족속), 바벨탑 축조형 인류와 전혀 다른 한 유형의 인류의 출현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셈족(창 9:24-27, 특히 9:26)을 택하시고, 그 중에서도 데라를 택하시고 그 중에서도 아브라함을 택하십니다. 여기서 바로 만민의 역사와 선민의 역사가 갈라집니다. 하나님은 이제 만민을 상대로 교섭하지 않고 선민을 상대로 교섭하시며 영적인 우생학적 실험을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좋은 씨앗을 발아시키기 위하여 인내하시고 그 좋은 씨앗을 온 세상에 퍼뜨리기를 원하는 육종학자입니다. 하나님은 3-11장의 악순환-죄와 벌-을 벗어나 새로운 단계의 신인교섭을 열어갈 새 유형의 인류를 찾으십니다. 부르심이 있기 전에 우리는 3-11장의 어디엔가 속해 있는 셈입니다(롬 1:18-32, 특히 1:24, 26, 28의 삼중적 내어버려 두심 상태: 하나님의 신적 유기[遺棄]). 즉 하나님의 택하심과 부르심이 있기 전에는 유기 상태에 놓여있는 셈입니다.

다시 요약하면, 아브라함의 등장의 구속-역사적 의미(redemptive-historical significance)를 충분히 숙고하려면 우리는 1-11장이 12장의 긴 서론임을 알아야 합니다. 선민의 역사가 등장하기 전에 만민의 역사, 원역사 혹은 죄-벌의 순환론적인 역사, 모든 문명의 시원(始原)에 경험된 범례적 역사는 만민의 역사의 대안으로 이제 선민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보편사는 선민의 역사에 의하여 견인되고 향도될 것입니다. 인류역사는 불가피하게 선택과 비선택(배제)의 논리에 의하여 나눠집니다. 그러나 선민과 비선민의 구분은 잠정적입니다(엡 1, 3장). 선민은 만민을 위하여 존재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인류역사는 실상 그 분의 이야기입니다(His story). 이상의 논의를 다음과 같이 개괄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1-2장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는 세계, 즉 하나님 나라. 인간이 하나 님 나라의 질서유지의 견인차.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관한 계명이 하나님 나라의 질서 유지의 관건.

창세기 3-11장 계명 준수에 실패하는 아담과 하와-붕괴되는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선한 의도에 대한 의심이 바로 하나님의 인격적인 다스 림에 대한 반역. 3-11장은 다섯 가지 유형의 "죄인"이 맹활약한다.

3장 아담형 죄인(악인의 꾀를 좇는 단계)

 

4장 1-14절 가인형 죄인 (죄의 길에 들어선 죄인)

4장 23절 이하 라멕형 죄인(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은 죄인)

6장 1-12절 노아시대의 반인반신적 거인족(음란, 폭력, 동물세계의 폭력)

네피림(히브리어 나팔 napal[하늘에서 떨어지다]의 복수분사)

6-9장 창조 이전의 혼돈의 바다/원시 바다가 창조세계(마른 땅/경작지)를

다시 침수시키는 사건 *노아의 세 아들 중 하나님은 셈족의 장막을 선택.

10-11장 바벨탑 축조형 죄인들(시날 땅에 근거지를 둔 함족의 영웅호걸인 니므롯 주도한 프로젝트-저항적 유신론자들). 세계로 퍼지는 바벨탑 세대들. 바벨탑 의 무너진 잔해 근처에서 하나님은 셈족의 한 중늙은이를 주목하여 부르신 다(바벨탑의 본거지인 시날 땅은 바벨론, 갈대아 우르 근처).

11:11-32 (특히 11:25부터) 아브라함의 본토 친척 아비집의 계보

창세기 12:1-3 아브라함을 본토친척 아비집(일차집단, 게마인샤프트)으로부 터 불러내신 하나님. 만민의 역사는 선민의 역사 바깥으로 배제되는 것처럼 보이나 실상 선민의 역사는 만민의 역사를 내포하고 견인한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아브라함의 운명을 바꾼 하나님의 명령처럼 다가온 이 말씀(창 12:1-2)은 창세기 3-11장의 인류 원역사가 경험한 저주와 심판의 악순환 구조를 전제하지 않고는 충분히 이해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축복의 가장 절정은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라"였습니다(창 1:26-28). 하나님의 창조축복-생육, 번성, 충만-은 모든 생물세계를 지탱시키는 근본 동력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사라와 아브람의 불임은 가장 명시적인 하나님의 저주경험입니다. 아브람은 3-11장의 원시역사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저주를 온 몸으로 온 가정적으로 겪는 외로운 단독자였습니다.

먼저 셈족 데라와 아브람의 족보를 살펴보십시오(11:10-26, 27-29). 데라의 자연적 족본느 아브람(동생 나홀과 하란[-롯])-사래(11:10-25, 30)에 와서 끊어집니다. 9장 26절에서 하나님은 노아의 세 아들들 중에서 셈을 선택하십니다. 그래서 11:10이하에서 다시 자세한 셈의 족보가 나옵니다. 여기서 족보가 부각되는 이유는 인류의 구세주가 여자의 후손에서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창 3:15).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 중에서 뱀의 머리를 칠 구세주를 보낼 것이기 때문에 창세기 3-11장에서 족보는 구속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선민 셈족의 족장 데라의 맏아들 아브람의 대에 와서 더 이상 족보는 전진하지 못하는 위기 상황이 발생합니다. 그의 아내 사래가 잉태치 못하므로 남자후계자를 낳지 못합니다. 본문은 종손의 대가 끊어질지도 모르는 위기가 조성되었음을 넌지시 알려줍니다(30절). 수없는 낳고 낳음의 반복 속에서 사래의 낳지 못함은 돌연스러운 불협화음이며 자연적 종족계승 운동의 좌절입니다. 11:10-30은 아브람 가정의 본토친척 아비집의 족보를 보여줍니다. 여기서 제시된 이 길고 상세한 족보는 낳고 죽으면서도 세대를 넘어 대를 이어가는 데라-아브람의 가정의 세대계승 과정을 집중적으로 부각시킴으로써 아브람대에 와서 대가 끊기게 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저자의 의도를 반영합니다. 아브람은 이런 자연적인 방식으로 계승되는 본토친척아비집의 족보를 잇는 데는 실패합니다. 길게 소개된 족보를 살펴볼 때 한 씨족 공동체의 종손 즉, 데라의 장남인 아브람(아브람=씨족장이라는 뜻임)-사래 부부가

 

많은 고통을 겪었을 것입니다. 고대 중근동의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남자후계자를 낳지 못한 부부는 자신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신께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게다가 그의 고향 갈대아 우르는 달의 신을 섬기는 이방 종교의 중심지였습니다. 부르심을 받기 전에 그는 달의 신(풍요와 다산의 신)의 저주를 받아 불임의 세월을 보내고 있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며 그의 삶은 무기력하고 초점이 없었을 것입니다. 부르심이 임하기 전에 그는 분명히 하나님의 목적 바깥에 방치된 삶을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운명주의에 눌러 앉아 있기 쉬운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본토친척 아비집은 가부장적인 이데올로기로 건축된 견고한 아성입니다. 씨족사회를 유지시키기 위하여 남자아이의 출생이 아주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본토친척아비집이라고 하는 견고한 아성으로부터 아브라함을 불러내십니다. 남자아이를 낳아 종족유지와 보호, 종족의 확장에 궁극적 목적을 둔 본토친척아비집의 세계관을 벗어나서 하나님의 꿈에 동참하도록 불러내십니다. 본토친척아비집의 이데올로기에 매여 살 때 아브라함은 운명의 그늘에서 탄식하던 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혀 다른 아브라함의 미래를 준비합니다. 본토 친척 아비집에서는 불임의 세월을 보낸 자, 즉 당대의 대물림을 못하는 자이지만 하나님의 미래에서는 열국의 아비가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인생의 중대한 전환점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젊은 지성인 시절에 인생의 수레바퀴를 움직이는 하나님의 말씀과 조우하여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이 팔자와 운명보다 더 강합니다. 하나님은 팔자와 운명너머에 있는 약속의 땅으로 운명과 팔자의 사슬에 매인 사람들을 불러냅니다.

그런데 본토 친척 아비집이 뜻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본토 친척 아비집은 고조(증조)할아버지를 우두머리로 모시는 씨족공동체의 위계질서를 가리킵니다. 그것은 씨족장의 가부장적인 권위 하에 지탱되는 위계질서가 엄격한 사회체계를 의미하였습니다. 고대 셈족사회에서는 한 개인이 씨족공동체와 분리되어 살아가는 것은 쉽지 않았음을 고려하면 본토친척아비집로부터의 분리는 아주 과격한 요구였습니다. 아브람은 본토 친척 아비집에서는 불임의 굴레를 둘러쓰고 살았지만 본토친척아비집과의 혈연적-문화적-종교적 유대를 끊고 창조적 분리(탈출)을 감행하고 나서야 자신의 불임세월로 멍든 인생 속에 담겨있던 하나님의 히든 카드를 이해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약속의 땅에서는 열국의 조상이 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의 핵심은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하는 새 땅으로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람은 본토 친척 아비집으로부터 창조적인 탈출을 함으로써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을 증명합니다. 하나님께서 무슨 약속들을 근거로 아브람을 본토친척 아비집으로부터 불러내십니까(12:1-3)? 아브람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는 것을 어떻게 입증합니까? 하나님께서 네 가지 약속들(땅, 큰 민족, 이름, 임재와 보호의 약속)을 제시합니다. 가장 놀람을 불러일으키는 약속은 하나님께서는 당대의 대물림도 못하는 아브람을 큰 민족의 조상으로 만들어 주시겠다고 약속입니다.

그렇다면 왜 아브람은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하는 미지의 땅으로 가야합니까? 세계 만민의 복의 근원이 된다는 말뜻이 무엇입니까(3절)? 아브람을 복과 저주의 기준점으로 삼는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아브람은 세계 만민들을 복주시려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기 위하여 자신의 본토친척아비집의 결속에서 분리되어야 했습니다. 본토친척아비집은 고대 사회에서 개인의 삶의 궁극적 충성의 대상이었습니다. 국가가 형성되기 이전에 씨족공동체는 개인적 삶의 의미부여자였습니다. 개인이 세상과 접촉하는 통로는 그가 속한 1차 공동체-씨족 공동체-입니다. 정상적인 경우에는 가족적 혈연적-지연적(地緣的) 유대에 충실한 것이 죄악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혈과 육의 유대로 건설될 수 없고 오로지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건설될 것이기 때문에 가족적 유대로부터 창조적인 단절(탈출/분리)을 감행하여야 했습니다 (고전 15장 50-58; 지연주의의 맹목성). 하나님이 건설하려고 하는 세계는 혈과 육, 지연과 인종 색깔 이념 등에 의하여 구획되어지는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임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의 혈과 육으로 표현되는 고체와 같은 결사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매순간 믿고 결단의 삶을 살아가는 백성들의 공동체입니다. 아브람은 만민의 복의 근원이 되기 위하여 혈연적-지연적-문화적 모태로부터 단절되어야 했습니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라는 구절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복"은 아브람의 후손들이 세계의 모든 가족들이(원래 성경에는 "all the families") 하나님의 복을 받는 통로가 되는 큰 민족(위대한 공동체)이 됨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큰 민족의 구성요소에는 후손의 번성, 많은 땅의 확보(영향력의 확보), 그리고 이름이 만방에 널리 퍼지는 명예와 하나님의 밀접한 임재와 동행(보호)의 향유를 의미합니다. "복의 근원"으로서의 삶은 기복신앙을 넘어서서 세계만민이 참여하는 복의 시발지점을 가리킵니다. 3절의 원문 목적절을 정확하게(문자적으로) 해석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수 있도록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 내가 저주할 것이다."

 

NRSV: I will bless those who bless you, the one who curses you I will curse; and in you all the families of the earth shall be blessed(or by you all the families shall bless themselves).

 

NIV: I will bless those who bless you and whoever curses you I will curse; all peoples on earth will be blessed through you.

 

이 절을 해석할 때는 위와 같이 목적절이 부각되어야 아브람을 축복과 저주의 기준점으로 삼는 하나님의 의도가 분명해 집니다. 아브람을 복과 저주의 기준점으로 삼는 하나님의 의도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아담형 인류의 대안-을 복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일반원칙을 극적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아브람은 아담의 불순종과 불신앙을 극복하여 아담이 열어놓은 저주의 판도라상자를 닫는 복의 회복자로 묘사됩니다. 아브람을 축복한다는 말은 아브람과 같은 믿음의 길을 지지하고 따르는 행위를 말하며 아브람을 저주한다는 것은 아브람이 걸어간 믿음과 순종의 길을 적대시한다는 말임입니다. 결국 여기서 아브람은 믿음의 원칙을 구현하는 사람의 원형입니다.

 

창세기 12:1-3은 명령의 형식으로 된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때때로 명령의 형태로 다가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아브라함의 반응은 즉각적인 순종(본토친척아비집의 세계에서 희망을 찾지 못한 아브람은 새로운 돌파구가 열리기를 기다린 듯함.) 이었습니다(4-9절). 75세로 늙어가는 자신의 능력과 가능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능성에다 모든 것을 걸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데라가 아브람을 낳을 때 70세였고 그가 205세까지 살았으므로 아브람이 75세의 나이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본토친척아비집을 떠났다는 것은 아버지 데라가 살아있을 때 떠났음을 의미(데라가 145세, 즉 데라는 아브라함이 떠난 후 60년간을 더 살았다) 합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아브람의 아비집으로부터의 창조적 탈출은 가족이 분리되는 고통을 동반하였을 것입니다(11:26, 31). 즉각적인 순종에도 불구하고 아브람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순종하였습니다(히 11:8-9). 마침내 가나안 땅에 도착하여(5-9절) 가는 곳곳마다 단을 쌓으며 하나님의 임재와 동행을 믿고 경험합니다(6-9절). 아브람은 거대한 탑 축조를 주도하였던 함(Ham)족의 영웅 니므롯과 정반대로 소박한 단을 쌓고 하나님과 밀접한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아브람의 후손을 통하여 하나님은 이 세상 만민을 구원하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인생의 전환점을 가져온 말씀, 명령법처럼 들리는 약속의 말씀

하나님 없이 사는 인생의 비참함은 자기가 자신의 구원을 창조하여야 하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에 아브람은 자신의 한계 안에서 갇혀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무기력한 75세의 중늙은이와 그의 열 살 아래의 아내 사래에게 저항할 수 없는 인생의 전환점, 즉 하나님의 부르심의 말씀이 찾아왔습니다.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당대의 대물림도 못하고 있는 아브람을 복의 근원으로 불러내십니다. 75세가 되기까지 자식도 낳지 못하고 불임의 세월을 살아온 이 늙은 부부에게 하나님은 전혀 예상치 못한 미래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미래의 땅으로 모험스러운 여행을 떠나게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하나님이 설계해 주신 미래의 땅으로 달려가는 사람입니다. 당대의 대물림도 못하는 중늙은이 아브람-사래 부부를 세계 만민을 복되게 하는 복의 근원으로 불러내시는 하나님의 기막힌 계획은 우리로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힘입어 우리의 옛 삶을 탈피할 수 있습니다. 말씀은 항상 인생의 전환점이 될만한 결단을 불러일으킵니다. 이 믿음의 결단은 하나님의 말씀에 감동받아 순종할 때 이뤄집니다. 이 결단의 목표는 다른 많은 사람들을 복되게 하는 복의 근원으로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저주받은 인생마저도 복의 근원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1800년 6월 27일에 미국 앨라배마주 터스컴비아에서는 한 여자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생후 19개월에 몹쓸 병에 걸려 3중적인 장애(듣지 못함, 보지 못함, 말하지 못함)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설리반이라고 하는 아주 헌신적인 선생을 만나 19세에 하바드 대학에 속한 래드클리프 대학

 

에 입학하였습니다. 그 후 그년 저주받았다고 생각되어진 자신의 인생의 샘에서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을 깨우치고 살려내는 복의 근원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87세로 일기를 마칠 때까지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인류의 농아자, 벙어리, 소경들에게 희망을 빛을 던졌습니다. 그녀는 고후 4:16-18절 특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라는 말씀에서 큰 위안을 삼았다고 고백합니다. 헬렌 켈러와 같은 장애를 가진 많은 사람들은 운명주의에 빠집니다. 하나님 왜 나를 창조하셨나요? 어머니 왜 나를 낳으셨나요? 우리가 안고 사는 장애는 아직도 하나님의 창조의 손길이 한 번 더 스쳐야 할 영역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운명주의를 팔자주의를 극복하게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견고한 믿음은 도덕적 허무주의를 극복케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말씀은 운명주의와 허무주의에 눌려사는 사람을 불러내어 하나님의 약속의 땅으로 불러들입니다. 운명주의 인생은 체념, 의욕상실, 원망, 저주, 탄식의 연속이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순종, 기도, 결단, 모험, 재도전, 창조적인 분리와 결단으로 가득찬 삶을 삽니다. 하나님의 고상한 목적을 위하여 창조적 분리를 경험하고 감수하는 사람들은 토라 신앙의 진수를 터득한 사람들입니다.

 

 

 

2강 복있는 사람은

 

시편1:1-6

 

구약신앙에서 시편 1편의 자리-거룩한 흑백논리를 구사하는 시편

시편 1편은 시편 150편 전체의 서론입니다. 그것은 시편 전체를 요약하는 주제 선포입니다. 시편은 대부분이 신앙적인 고민을 가진 사람들의 노래이기 때문에 신앙적 난제를 안고 있는 사람들이 읽으면 대단한 위로를 받는 그런 책입니다. 오늘 시편 1편은 나머지 150편이 대부분 그렇듯이 단순한 흑백 논리를 주장합니다. 이 세상에는 의인의 길 아니면 악인의 길밖에 없다는 주장입니다. 의인과 악인밖에 없다면 나는 충분한 의인도 되지 못하고 충분한 악인도 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정체성 혼란에 빠집니다.

 

악인-죄인-오만한 자의 위계조직 악의 왕국 안에서 사는 단독자

오늘 본문에 보면은 충분한 의인이 제대로 되지 못하는 사람은 잠재적 악인 혹은 잠재적 악의 동맹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악인에는 세 등급이 있기 때문입니다. "악인의 꾀를 좇다", "죄인의 길에 서다",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다"가 있습니다. 여기서 동사들의 진전과정을 잘 주목해 주십시오. 좇다, 서다, 앉다. 어느 동작이 가장 안정감이 있습니까? 앉다라는 동사입니다. 즉, 오만한 자는 악인과 죄인에 비해서 상당히 확신에 차 있는, 자기가 가는 그 길에 대해서 확신이 있는 안정감이 있는 악인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악한 삶의 체계를 전도(傳道)할 만큼 사명감 있는 악인입니다.

그에 비해서 악인은 나쁜 꾀를 늘 들으면서 유혹을 받는 단계의 순진한 죄인입니다. 쉽게 말해서 나쁜 충고에 귀를 개방해 놓고 나쁜 꾀를 수용할 준비가 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악인입니다. 이 세상에는 명백한 악인이 아닌데, 대부분이 얼굴이 착해 보여도 대부분이 알고 보면 이런 종류의 악인입니다. 신문보고 욕하는 사람도 이런 악인입니다. 신문에 등장하는 사악한 사람들의 악행을 비난하고 나쁘다고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도 기회가 주어진다면 한번 그렇게 살아보고 싶은 사람들이 악인입니다. 하지만 악인의 꾀를 쫓는 수준은 순진무구한 죄인의 단계입니다. 스크루 테이프의 편지(C. S. 루이스의 책, The Screwtape Letters)라는 책은 "지하에 계신 아버지 사탄"의 앞잡이인 고참급 삼촌 악마(Uncle)가 신참 졸개 악마(Wormwood)에게 보내는 기독교인 유혹교본을 담은 서간문들입니다. 오랫동안 그리스도인들을 유혹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파멸로 이끌었던 고참 영업사원 출신의 악마 '엉클'이 '웜우드'('인진'이라고 번역)라고 일컬어지는 신참 영업사원 악마에게 그리스도인들을 어떻게 유혹하고 파멸시킬 것인가에 대한 자상한 지침과 충고로 가득찬 편지를 보냅니다. '엉클' 악마의 여러 가지 충고 반대로 행하면 그리스도인들이 아주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 글 중 엉클이 웜우드에게 다음과 같은 충고를 줍니다. "세상사람들을 전형적으로 악인인 사람들로 만들지 마라. 그러면 의인이 분기탱천해서 일어난다." 엉클은 충고합니다. "어떤 악인을 많이 만드는 게 제일 유리하냐, 선인처럼 보이는 악인을 많이 생산해서 사회 요소 요소에 배치하라"고 강력하게 주문합니다. 그랬더니 웜우드가 말합니다. "아저씨 어제 크게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제가 한 사람을 완전히 녹다운을 만들어서 누가 보더라도 악인이라고 볼만큼 완벽한 악인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놈 때문에 제가 지금 아주 우쭐대고 있습니다"라고 하니까 엉클 사탄이 "이놈아 그것이 바로 우리 사탄이 빠져서는 절대로 안 될 악한 시험이란다"라고 합니다. 그것은 다시 말해서 제일 숫자가 많은, 의인인 것처럼 말하고, 의인의 고민은 가지고 있는데 실제로 귀는 악인의 꾀에다 열어 놓는 악인, 이런 악인이 참으로 많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한겨레신문 봐도 적극적으로 의인의 삶을 즐거워하지 않으면 우리 모두는 악인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의 죄인 중 두 번째 단계의 죄인은 죄인의 길에 서 있는 죄인입니다. 이 죄인은 꾀를 좇는 악인보다는 한 단계 진전한 죄인입니다. 길에 섰다는 말은 이 길로 갈 것인가 저 길로 갈 것인가 더 이상 방황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죄인인 자신이 선택한 "길"로 방향을 정한 사람입니다. 이런 죄인은 '나는 이 길로 갈래. 나는 길이 좁고 협착하여 찾는 사람이 적은 생명의 길보다는 사람이 붐비는 넓고 광활한 이 길로 갈래. 지옥으로 가는 이 길이 아무리 무섭다하더라도 여러 사람이 간다면 가 볼 만한 거지'라고 생각합니다. '유독 나만 가는 건 아니잖아, 고통도 나눠지는 법'이라고 생각하면서 사람이 많은 곳으로 가려고 하는 것이 죄인의 마음입니다. 따라서 죄인의 길에 선다는 것은 좀 더 마음이 확정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일단 자신의 길을 확정하고 걸어가는 죄인을 그 길로부터 돌이켜 의인의 길로 인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죄인의 길에 들어선 사람을 전도하기가

 

매우 힘들어 집니다. 죄인의 길에 들어서려고 결단하기까지는 그 사람은 수없이 불면의 밤을 보내면서도 지하에 계신 어둠의 아버지께 많이 기도를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죄인보다 더 무섭고 가장 위험한 것은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아있는 죄인입니다. 조폭 두목 같은 사람들이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은 자들이고 No.3같은 사람이 죄인의 길에 들어선 사람이고 앵벌이 수준의 사람이 악인의 꾀를 좇는 사람입니다. 서울역 같은 곳에서 시커먼 손으로 날치기하는 사람들은 악인의 꾀를 좇는 수준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조폭의 두목은 절대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지하에 계신 아버지급 죄인이기 때문에 절대로 나타나면 안됩니다. 그는 정사와 권세의 우두머리이기 때문에, 공중 권세 잡은 자이기 때문에 나타나지 않으면서 "보좌"에 앉아 고도로 분화된 악의 봉건적 제국을 다스립니다. 앉아서 일하는 사람은 왕적인 통치자입니다. 오만한 자 는 악의 왕국의 두목입니다. 사회의 표면에 출현하여 소동을 일으키는 자들은 대개 No.3, No.2 서열의 악인들입니다.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은 자는 앉아서 하얀 백지에 사인을 하면서 많은 서류에 결재서명을 하면서 수많은 사람을 죽입니다.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은 자는 숫자는 매우 적지만 어마어마한 사람에게 영향을 끼칩니다. 우리 나라에서 이런 의미의 오만한 사람은 만 명도 안 될 것입니다. 만 명도 안 되는 오만한 자가 악의 제국의 보좌에 앉아 그 죄악 된 삶을 확신 있게 살면서 죄악을 전도하면서 부하를 길러 거대한 악의 왕국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왕국을 유지하기 위하여, 그들은 실력(지적, 문화적 창조력)과 물적 토대를 확보하고, 이념적 토대를 구축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만한 자의 한 사람은 일당백의 어마어마한 파괴력을 가집니다.

이처럼 악은 철두철미한 위계조직으로 되어 있습니다. 고독한 악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악한 사람 한 사람을 우리가 선한 사람으로 만들려면은 그 위대한 악의 모든 위계질서와 전면적인 충돌을 맛보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런 충돌을 영적인 전쟁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 살면서 선한 싸움을 피할 수 없습니다. 누가 더 의롭고 정당한 삶을, 빛의 삶을 사는가를 다투는 싸움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6:12에서 말합니다. "너희들이 싸우는 싸움은 혈과 육에 관한 것이 아니라 정사와 권세와 보좌와 주관과 공중의 권세 잡은 자"(참조 고후 4:2; 골 2:15). 사도 바울은 악을 뿌리 채 뽑는 것, 악과의 영적 전쟁이 얼마나 힘들며 그것이 고도의 영적 에너지를 소모시키는 일 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악은 철두철미한 피라미드 조직, 즉 위계질서로 되어있기 때문에 악한 사람 한 사람을 구출하려고 할 때는 그 악한 사람을 보호했던 위계 질서가 전부다 요동하며 선한 세력에게 반격을 가해옵니다. 우리가 악한 세계와 정면으로 충돌하지 않고는 악한 사람을 한 사람도 건져낼 수 가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전도 할 때 낙심을 불러일으키는 말임과 동시에 영적인 긴장을 촉구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대학생들은 대부분이 1단계 죄인입니다. 꾀를 쫓는 수준이기 때문에 쉬운 것입니다. 이것은 일반 사회인들과 그들을 비교해 보면 압니다. 대학생들에 비하면 일반인들은 이익과 삶의 기득권과 관련된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 쉽

 

게 돌아오지 못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 매 맞고 돌아옵니다. 암 말기, 폐병 말기까지 가야만 간신히 한 사람 돌아옵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하도 귀하기 때문에 암 말기에 돌아오는 사람은 희귀한 간증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깜부기 재앙과 메뚜기 재앙과 황충 재앙을 주어도 안 돌아옵니다. 매 맞는다고 다 돌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럴 확률이 매우 적기 때문에 매 맞고 스스로 돌아온 사람은 자기가 은혜로 돌아왔다고 말합니다. 십자가에 달린 강도가 다 돌아옵니까? 확률 50%입니다. 50%만 돌아옵니다. 우리가 당한 재난과 재앙이 우리를 자동적으로 우리를 예수께로 이끌지도 않고, 하나님께로도 이끌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악한 길로 들어선 사람들의 화려하고 극적인 간증이 주는 안도감에 속아서는 안됩니다. 악한 길로 들어선 사람은 길을 돌이키기가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어렵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죄를 짓기 전에 그 길을 가지 말아야 합니다. 그에 비해서 대학생들은 아예 악에 물이 덜 들었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악의 제국의 위계질서에 이해관계에 얽혀 편입되지 않았기 때문에 전도하기가 쉬운 것입니다. 이 말은 이익 때문에 예수 안 믿는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그것은 아닌데 그 동안에 바르지 못한 기독교인들과 교회들의 모습에 대한 실망과 반감 때문에, 다소간 심리적(psychological) 이유 때문에 대학생들은 예수 안 믿습니다. 그러나 어른들은 자신이 악의 위계질서의 일부분에 소속되었기 때문에 못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말 무서운 것입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전도하기가 힘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단순히 개인의 결단에 달린 것이라면 대부분의 대학생들이 결단만 하면 됩니다. 개인의 결단으로 예수님 믿을 수 있는 때는 오로지 20대 밖에는 없고 30대부터는 믿고 싶어도 못 믿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세상의 악의 조직과 위계질서 속에 철저히 배치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선하게 살기로 작정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 조직원의 일원으로 인정되기 때문에 그 조직의 명령을 자동적으로 우리에게 강요하는 분위기에 따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우리가 악한 꾀, 사악한 직장상사의 명령을 하달 받을 때 우리가 No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 때문에 한 번이라도 No를 해 본 사람은 자신이 악한 정사와 보좌와 권세, 주관에 속하지 않았으며 속할 수도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아주 작은 양심의 목소리를 가지고도 악의 왕국의 위계조직을 허물어뜨릴 수가 있습니다. 악의 위계질서는 작은 진실의 음성 앞에 허약할 정도로 쉽게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왜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주야로 묵상해야 하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됨을 확신하는 사람은 진리의 음성이 악의 제국을 향하여 얼마나 큰 영향을 주며 힘을 발휘하는지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고 소화시킨 사람의 경우 악한 꾀가 의인의 신경전달에 의해 중지되어 멈추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 때 악인의 꾀는 우리 앞에 와서 빛을 발하지 못합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들, 의인들은 여호와의 율법과 명령을 주야로 즐거워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현실이 돌아가지 않을 때는 왜 그런지 고민하고 고투하면서 하나님 율법의 진리되심을 묵상해야 하는 것입니다. 묵상하는 것과

 

즐거워한다는 것은 시적 대구를 이룹니다. 즐거워한다라는 것은 말씀대로 되어지는 현실 앞에서 "아멘"하는 것이고 묵상하다라는 말은 명상한다는 뜻이 아니라 끙끙거리고 신음하면서 하나님을 기억하려고 애쓰는 행위입니다. "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할 뿐만 아니라 주야로 묵상해야 하는가?"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임을 의심하는 순간 우리는 악의 잠재적 동맹세력으로 전락하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시편 1편 말씀은 우리 기독학사들이 말씀대로 돌아가지 세상 한 복판에서 살면서, 즉 단기적으로 볼 때는 말씀이 주도적인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세상에 살면서, 그런 때를 대비하면서 내면화시켜야 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악한 위계질서에 일부가 되지 않기 위해선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는 사회생활을 해 본 사람은 압니다. 대학생들은 이 말의 뜻을 잘 모를지도 모릅니다. 어떤 직업도 이 가감 없는 흑백논리에서 면제되지 않습니다. 내가 어떤 직업을 가진다고 해서 자명하게 착해지는 그런 직업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의사도 군인도 교수도,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의인은 이 세 가지 종류의 사람처럼 살지 않는 사람입니다. 시편 1편은 이런 의인은 복되도다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자세히 살펴본 위의 세 종류의 죄인들은 각종 매스컴을 장식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이러한 사람들의 소식을 듣는 사람은 들었다는 그 이유 때문에 그 사람 역시 도덕적으로 하향평준화 된다는 것입니다. 참 놀라운 파급효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문지상에 등장하는 악인들-죄인들-오만한 자들의 타락한 이야기를 자세히 읽지 말고, 대신 선한 사람들의 좋은 이야기를 많이 듣고 봐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과연 살아있는 진리임을 온 몸으로 입증하는 사람들이 의인들입니다. 의인들의 삶을 사모하고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의로운 삶을 살 수 있는 내적 동기를 부여받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삶은 그 자체가 엄청난 도덕적 저항력을 키우는 삶이며 악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가장 효과적인 길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감미로운 관계를 갖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즐거워함이라는 고도의 자발성이 빠져버리면 신앙생활은 율법적인 멍에 아래 다시 끌려가는 삶으로 전락합니다(아가서: 영적 친밀성의 추구=Oneness에 대한 욕구가 길거리 응원에서 분출). 다시 말해서 우리가 지리적으로는 출애굽 했지만 정신적으로는 여전히 내가 파라오의 채찍아래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은 악인-죄인-오만한 자를 아무런 내적-인과적 고려없이 나열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세 부류의 죄인들의 삶을 거부하려면,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성경의 특정한 한 부분이 아니라 성경 전체를 가리킵니다. 성경을 '토라'라고 하는데 데 토라는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한 가지는 하나님의 일방적이고 주도적인 감미로운 사랑과 구원의 이야기인데 그것이 토라의 90%를 차지합니다. 우리가 이 강력한 구원의 역사를 읽어야 하는 이유는 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계산해 넣지 않으면 내가 하나님처럼 내 구원을 스스로 쟁취해야하고 생각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내 스스로 구원을 창조하려는 사람은 이기적으로 사는 것을 정당화하기 쉬운 사람입니다. 그래서 토라를 읽는다는 것은, 즉 하나님의

 

객관적인 다스림의 원리를 읽고 그것을 내면화시킨다는 말은 우리 스스로가 스스로를 위한 하나님이 되지 않기로 작정한다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토라를 읽으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안도감을 느끼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확신하게 되는데 하나님의 율법을 오랫동안 잊고 지내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잊어버리고 맙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진리는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들에게만 당연하고 절대적인 진리이지, 하나님의 율법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생소하고 낯선 이설(異說)로 들릴 것입니다.

야곱은 십대를 사기꾼으로 시작합니다. 십대를 사기로 시작한 야곱에게 하나님은 그의 인생 전체에 대한 반성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라반이라는 더 큰 사기꾼을 붙여 주십니다. 그를 볼 때마다 야곱은 자신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야곱에게 수많은 환난과 연단, 징계를 주시고 훈련 시키면서 동시에 그를 철두철미 하게 돌보시고 후견하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돌보심을 맛보고 사는 사람의 이야기를 읽으면 우리에게 상처와 아픔을 주는 상대방에게 사적 보복을 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온유해 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돌보심을 믿는 사람은 이기적인 욕망에서 자유롭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돌보심을 믿지 않는 자, 즉 세리나 이방인은 자신이 신처럼 자신의 구원을 창조하려는 사람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저마다 자기가 자기의 하나님이 되어서 스스로 구원을 쟁취하려는, 하나님의 돌보심을 믿는 것은 강물을 거슬려 헤엄치는 사람들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자유를 누리며 사는 삶은 세상에서 도무지 인정을 못받고 사는 삶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도 동생들에게조차 인정받지 못하는 고독한 삶을 사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의 돌보심의 넉넉함을 믿는 사람 주변에는 엄청난 구원의 에너지가 방출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율법을 읽어야 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안 읽겠다는 것은 내가 나의 하나님이 되겠다는 뜻입니다. 내가 나의 하나님이 되겠다는 것은 모든 이기적인 것을 정당화시킵니다. 내가 제단에 깃들이는 한 마리의 연약한 작은 참새 같이 아주 작은 존재가 되어질 때 넉넉한 하나님의 돌보심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독수리나 늑대가 된다면 하나님의 돌보심은 도무지 느낄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사회적으로 우리가 얼마나 성취했느냐와는 상관없습니다. 자기를 과감하게 부정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경쟁의 악한 에너지를 과감한 자기 부정으로 선함으로 바꿀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경쟁에서 내가 유일하게 이겼다면 그 이김이 이 세상에서의 생존경쟁에서 패배한 사람들까지도 복되게 하는 그런 이김(출세)을 성취해야 합니다. 그런 출세만이 하나님 앞에서 정당성이 확보되는 이김입니다(나르니아 연대기의 아슬란같은 사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사야 11:1-9의 사자, 소처럼 풀을 먹는 사자). 하나님이 나를 이기셨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의 은혜아래 포로로 잡힌 자가 됩니다. 예수님이 나를 이기시는 것이 훨씬 나에게 복이 됩니다. 이것이 선한 싸움입니다. 예수님에게 항복하고 패배한 것이 나의 구원이요 세상에게는 큰 행운입니다. 나의 이기적인 욕망이 주님 앞에 무장해제당하는 것이 안팎으로 큰 구원입니다. 위에서 살펴본 악인-죄인-오만한 자들의 삶의 유형들이 얼마나 큰 유혹이 되는지 우리는 압니다. 명예와 권력 등 모든 직업세계에는 이런 유혹이 있습니다. 이 길

 

로 들어서면 내가 나의 하나님이 되기 때문에 더 이상 하나님의 돌보심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구원의 감격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도덕적인 장치입니다. 시편 19편에 보면 여호와의 구원 이야기는 우리 삶의 모든 상황에 통할 수 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영혼을 소성케 합니다. 또한 여호와께서 하신 일은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증거하는 확실한 증거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읽으면 내가 유순해지며 다른 사람에게 유익이 되는 출세를 꿈꾸게 됩니다. 내가 하나님이 아니며 내가 의지할 하나님이 따로 계시다는 것을 믿는 것, 이것이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이 감미로움이 없으면 우리는 어디에 넘어가게 됩니까? 악인의 꾀가 더 감미롭고, 죄인의 길이 더 장밋빛처럼 보이고, 오만한 자의 자리가 더 안정되어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다 안정감 있는 삶을 원합니다. 이런 와중에서 우리는 오만한 자의 안정을 부러워하게 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시편 19편은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다고 했습니다. 거기에 닻을 내리면 확실한 것입니다. 묵상한다라는 말은 현실이 하나님 말씀대로 진행되지 않으며, 하나님의 율법이 별 것 아니며,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조차도 의심하게 만드는 상황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살아 계시다는 것을 믿겠다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묵상은 영적인 고투를 하면서 말씀과 현실이 일치되지 않는 상황을 극복하려는 태도입니다. 그래서 묵상이라는 단어와 가장 비슷한 뜻이 '신음하다'라는 뜻입니다. 즉 묵상하는 행위는 가만히 관조하는 명상과는 전혀 다른 뜻입니다. 복 있는 사람이 묵상을 깊이하지 않게 되면 세 종류의 악인과 같이 되기 때문입니다. 의인은 하루 종일 하나님의 객관적인 원칙을 묵상해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시험에 듭니다. 하나님 말씀에 의심을 품게 되고, 하나님께 속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예레미야나 에스겔 선지자들도 그랬었습니다(렘 20:7-13). 그들은 현실의 한 복판에서 믿음을 지키기 위해 애쓰던 사람들입니다(시 73:1-3).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현실에서는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쉬운 상황 앞에서 묵상하고 고투합니다. 악한자의 길이 형통하는 것을 선한 사람이 자꾸 보게되면 선한 사람들이 오염되기 시작합니다. 더욱이 악인이 행복하고 의인의 행세를 하고 대접받으며 의인이 현실에 부대끼고 고난 당하기까지 하면 이런 의구심은 더욱 우리를 짓누르게 됩니다. 세상이 악인이 더욱 형통해 지고, 어려운 형편에 있는 사람들은 살기가 더욱 힘들어집니다(렘 12:1-4). 엘리야가 로뎀나무 아래서 죽고싶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가 850명의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를 죽였지만 이세벨-바알체제는, 즉 악의 위계질서는 완강하고 견고했습니다(왕상 19:1-3). 그는 죽음의 공포에서 살아남기 위해 도망친 곳에서 죽고싶다고 해놓고는 잠시 안도의 숨을 돌릴 때에 오히려 하나님께 죽여달라고 불평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12장을 보면 예레미야도 30년 동안 절대적인 배척과 외면을 당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시편 1편은 예레미야의 고통에 대한 반증입니다. 예레미야 12장이 바로 묵상입니다. 그는 거기서 시냇가에 심겨진 것이 의인이 아니라 악인이라고 불평합니다. 악인이 훨씬 더 번성하고 형통한 그 현실에 대해 예언자는 고통스러워하며 하나님께 반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박국1장 1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용어들인 겁탈과 강포는 사회의

 

유력층이 약자를 괴롭히는 전문용어입니다. "율법이 해이하다"라는 말이 바로 묵상의 배경을 이룹니다. 하나님의 율법이 해이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역사의 주관자로 믿어야 하는 것이 묵상입니다. 현실은 율법대로 되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박국은 화가 난 것입니다. 아모스 2장에는 하나님의 제단도 약자의 것을 탈취하여 철야기도 하러 온 부자가 점령해 버리는 장면이 소개됩니다. 이런 경우 의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되심을 고투하면서 믿어야 합니다. 의심을 넘어 믿어야 합니다.

 

방법론적 의심을 거쳐서 도달한 진리의 확실성-과연 복있는 사람은.....!

우리는 의심을 거쳐서 온 확실성, 즉 방법론적인 회의를 거치는 이 묵상단계까지 가야합니다. 이 혼탁한 현실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공의를 붙들어야 합니다. 시편73편 17-20절에 보면 묵상의 마지막 단계가 나옵니다. 비록 시냇가에 악인이 심겨져 창창한 것 같아 보일지라도, 의인이 심겨졌다고 믿으며 의인들이 상록수의 숲을 이룰 것을 믿는 것이 묵상의 마지막 단계인 것입니다. 그렇게 믿지 않으면 우리가 과연 의인이 되고자 하는 소망을 가질 수 있을까요? 의인이 맺은 열매는 자신만이 누리는 열매가 아닙니다. 의인의 상록수 숲에서 열린 그 열매는 사회와 이웃이 먹어야 합니다. 우리가 복 있는 사람이 되어 열매를 맺으면, 우리의 삶이 바로 설교가 열매가 됩니다. 우리의 삶은 걸어다니는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반드시 열매를 맺어 다른 사람이 여러분의 삶에서 맺혀진 열매를 먹을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그러나 악인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리고 다수의 악인에 비해 단 한 사람으로 표현되었던 의인의 숫자가 결국에는 의인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아집니다. 악인의 수가 많다고 악인이 옳은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기 바랍니다. 마침내 악인은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감미로워 하고 묵상할 때 하나님이 우리를 감찰하시고 후견하십니다. 6절 말씀에서 '대저'는 '왜냐하면'으로 번역하는 것이 좋습니다. 6절의 말씀은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지만(후견하시지만, 돌보시지만) 악인의 길은 결국 망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6절은 5절에 대한 이유절인 셈입니다.

시편1편 6절 말씀을 우리가 마음으로 믿어야 합니다. 믿지 못하면 우리의 신앙은 가짜가 되어 버립니다. 교회에서도 보면 생각 있는 사람들은 자주 신음하고 있고, 생각없는 사람들은 항상 즐거운 듯이 보입니다. 이런 현실에 아직까지 고통받고 있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가 아니라 오히려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현실을 뛰어넘어 계시는 하나님을 확고 부동하게 믿으면 여러분은 의인의 진영에 들어오게 되며 악인-죄인-오만한 자들이 이루는 악의 제국의 위계조직을 붕괴시키는데 일조(一助)하는 공세적인 의인이 되고 공세적인 복 있는 사람이 됩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들은 반드시 열매를 맺게 되고 결국에는 형통케 되어 악인의 꾀를 피하는 단계를 넘어서서 악의 강력한 진을 파하는 공세적인 의의 군대가 됩니다. 악은 위계질서로 되어있지만 선은 게릴라입니다. 의인들은 단독자처럼 고독하게 세상을 살아가지만 결국 의인은 회중을 이루게 되고 우리의 신문지상을 가득채우는 악인은 홀연히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들 이런 공세적인 의인들 복 있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처럼 모든 선한 자가 동등하게 그 자체가 걸어다니는 하나님 나라가 됩니다.

 

3강 인자야, 너는 생기(生氣)를 향하여 대언(代言)하라

 

에스겔 37:1-14

 

에스겔 선지자는 주전 597년에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간 제사장 가문의 젊은이였습니다. 그 때 그의 나이 25세였습니다. 포로로 잡혀간 지 5년 차 되던 해, 즉 그의 나이 서른 살(30세)(80년대 한 때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한 노래 중에 '나이 서른에 우리 무엇이 되어 만나랴?'라는 가요가 유행)에, 자기 동족들이 운하(수로) 건설공사에 동원되어 강제노동하던 현장인 그발강(the Kebar River)가에서 그는 '하늘이 열리는' 묵시(默示, 幻像=vision)의 세계 속으로 부양(浮揚)되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나이 서른 날은 제사장 가문에 태어난 젊은이가 성전 제사장의 직분을 맡아 제사장직을 시작하는 나이였습니다. 그는 다른 어떤 선지자들보다 날자의 경과에 대하여 예민하였습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성전은 시간과 날자의 경과를 알려주는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에스겔은 제사장의 가문에 태어난 청년답게 날자와 년수가 경과하는 것에 민감합니다. 그는 그만큼 하루 하루를 손꼽아 가며 포로생활이 끝나 고국으로 돌아가기를 열망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포로로 잡혀온 지 제 오년 째 닷새 째 되는 날에 하늘이 열리는 경험을 합니다. "제 삼십년 사월 오일에 내가 그발강 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더니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이상을 내게 보이시니, 여호야긴왕의 사로잡힌지 오년 그 달 오일이라"(1:1-2).

그 외에도 에스겔은 여러 군데서 그의 예언을 마치 영적인 일기(spiritual journal)를 쓰는 것처럼 그가 예언한 일자를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에스겔은 다음 구절들에서 자신의 예언활동을 연대기적인 틀 안에 배치합니다.

8:1 "제 육년 유월 오일에 나는 집에 앉았고 유다 장로들은 내 앞에 앉았는데 주 여호와의 권능이 거기서 내게 임하기로..."(1-7장은 같은 해에 받은 예언임을 암시).

 

20:1-2 "제 칠년 오월 십일에 이스라엘 장로 두어 사람이 여호와께 물으려고 와서 내 앞에 앉으니,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24:1-2 제 구년 시월 십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인자야 너는 날짜 곧 오늘날을 기록하라. 바벨론 왕이 오늘날 예루살렘에 핍근하였느니라.

 

26:1 제 십 일년 어느 달 초 일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29:1 제 십년 시월 십 이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29:17 제 이십 칠년 정월 초 일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31:1 제 십 일년 삼월 초 일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32:1 제 십 이년 십 이월 초 일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40:1-2 우리가 사로잡힌지 이십 오년이요 성이 함락된 후 십 사년 정월 십일, 곧 그 날에 여호와의 권능이 내게 임하여 나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시되, 하나님의 이상 중에 나를 데리고 그 땅에 이르러 나를 극히 높은 산 위에 내려 놓으시는데 거기서 남으로 향하여 성읍 형상 같은 것이 있더라.

 

그는 바벨론 포로로 잡혀온 지 5년 째 되는 해부터 시작하여 사로잡힌 지 25년 째 되던 해까지 예언활동을 합니다. 그는 이 모든 영적 일지(日誌, spiritual journal)를 기록할 때마다 언제나 포로생활이 끝나서 고국으로 돌아갈까를 생각하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런 포로생활 가운데 젊은 포로 에스겔이 보내는 하루 하루는 천근의 무게로 그를 내려 눌렀을 것입니다. 이 답답하고 절망적인 상황이 그가 서른 날에 맞이한 현실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되었고 예루살렘은 불타 버렸습니다. 민족의 몰락은 그 민족의 지도감으로 자라던 한 젊은이의 인생도 송두리째 부숴 버렸습니다. 민족 공동체는 멸망하였고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져 버렸습니다. 그가 하늘이 열리는 경험을 한 그발강가(the Chebar river) 는 바로 유다의 바벨론 포로들이 민족멸망의 아픔과 상처를 시온을 기억하는 노래(고라 및 아삽 자손의 시온순례 장려용 시편들)를 부르며 망국의 한을 삭이던 장소였습니다. 시편 137편 1-5절은 그런 그발강의 암울하고 비장한 상황을 잠깐 보여줍니다.

 

1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2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3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케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4 우리가 이방에 있어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꼬? 5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찐대 내 오른손이 그 재주를 잊을찌로다.

 

그러나 이런 절망적이고 답답한 상황에서, 그는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장은 못되었지만 하늘의 성소를 출입하는 예언자가 되었습니다. 지상의 제사장직을 잃었지만 더 귀한 직분을 주셨습니다. 그 때부터 에스겔은 바벨론에 사로잡혀온 유다 포로들을 상대로 위기목회를 시작하였습니다. 바벨론 포로들은 마음이 상해버린 상태에서 거의 단말마적인 필사적인 태도를 가지고 그들의 답답한 포로생활을 끝내게 해 줄 하나님의 말씀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한편으로 그들은 우상을 가슴에 품고 우상에게도 그들의 미래에 대하여 물었습니다. 한마디로 예언자 에스겔의 회중은 아주 완악하고 반역적이었습니다. 전갈과 가시와 찔레(2:6)와 같은 회중을 상대로 그는 포로목회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 그들은 자포자기적인 절망에 빠져있었습니다. 그의 청중들은 절망적인 자포자기와 회개치 않은 완고함을 묘하게 결합시켜 놓은 무리들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제 십 이년 십 이월 초일일"에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는 표제가 붙어 있는 단락의 일부입니다. 아마도 그런 시기에 임한 하나님의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에스겔에게 임하였습니다. 이 첫 소절을 직역하면 "여호와의 손이 내게 닿았다"입니다(37:1).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전인격적으로 지배되고 사로잡히는 경험을 "하나님의 손이 나 위에 덮쳤다"(이사야 8장)라는 관용어법으로 표현합니다. 여기서 인상적인 사실은 에스겔이 권능'으로 임한 하나님과 맞부딪혔다는 것입니다(1:3; 8:1; 40:1-2). 이사야와 바울도 이런 표현을 사용합니다. 특히 바울은 빌립보서 3:12에서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계시경험을 말합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여기서 우리는 신적 수동태가 인간적 능동태를 늘 앞선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바울은 자신의 다메섹 도상의 경험-부활하신 예수님께 사로잡힌 경험-을 "세차게 붙잡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강세접두사 )를 사용합니다. 빌립보서 3:12에서는 이 동사의 부정과거 수동태(aorist [과거에 딱 한 번 일어난 사건을 묘사]passive)인 가 먼저 나오고 그 뒤에 바울 자신의 능동적 붙듦을 묘사하는 가 나옵니다.

따라서 문맥상 이 소절은 "하나님의 손이 나를 강력하게 들어올려(번쩍 들어올려)"라고 번역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경우 하나님의 신이 그를 강권적으로 들어올려 마른 뼈들이 나뒹구는 계곡으로 던져 넣으셨다는 말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을 강력하게 경험하는 사람일수록 강력한 소명감에 사로잡힙니다. 또는 하나님의 어루만지심의 작용을 가리키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아무도 하나님의 손의 만지심이 없이는 영적인 개안(開眼)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손은 우리 마음속에 남겨져 있는 아동심리적 기저(基底)를 움직입니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손의 "끌어올리는 작용"을 민감하게 느끼는 사람입니다. 에스겔의 소명 경험은 자원병적인 봉사가 아니라 징병당한 병사의 봉사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번역되든 에스겔의 예언활동은 철두철미하게 하나님의 주도적인 이끄심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권능의 손이 에스겔을 강력하게 포획하여 마른 뼈들이 널브러져 있는 골짜기로 데리고 갔을 뿐만 아니라, 그로 하여금 마른 뼈들 한 가운데를 지나가게 하십니다. 마른 뼈들의 한 가운데로 지나가 본 사람은 목회의 우수(憂愁)와 비장미를 압니다. 마른 뼈들 사이에 서려있는 절망과 죽음의 세력을 한 가운데서 느껴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산다" 혹은 "생기" 등의 개념은 아주 생소하게 들릴 것입니다. 거기서 에스겔은 자신이 섬기는 회중들의 영적 형편을 봅니다. 그는 본 것은 "심히 많은 그리고 아주 마른 뼈들"입니다. 심히 많은 뼈들이 아주 말라버려 이리 저리 뒹굴고 있었습니다.

이 기이한 장면을 앞에 놓고 하나님께서는 예언자에게 물으십니다.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Can these bone live?"(3절) 이 질문에 대한 에스겔의 대답은 "주께서 아시나이다"입니다. 이 말은 약간 부정적인 답변입니다. "저로서는 확신할 수 없지만, 하나님 당신께서는 아십니다"(3절). 사실 "이 마른 뼈들이 능히 살 수 있을까?"하는 질문은 하나님의 질문 이전에 선지자 자신의 마음속에 자리잡은 질문이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에스겔은 어쩌면 자신이 이토록 심히 말라버린 뼈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고 있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마른 뼈들의 부활에 대하여 확신을 갖지 못하고 주춤거리던 예언자에게 하나님은 명령하십니다. "만일 네가 나의 권능을 믿는다면 너는 이 마른 뼈들에게 설교하라." 이런 정도의 명령이 에스겔에게 떨어졌습니다.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 지어다'"(4절). 하나님의 말씀은 '인자'의 대언행위를 통하여 전달된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예언자는 대언자입니다. 대언행위를 하기 위해서는 예언자 자신이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언자가 마른 뼈들에게 가장 먼저 선포해야 할 말은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입니다. 예언자는 자신의 청중이 마른 뼈임을 알아야 하고 그가 전달하는 메시지가 자신의 사상이나 인생철학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임을 항상 명심해야 합니다. 예언자(목회자)는 자신의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사람입니다. 마른 뼈들을 살리는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뿐입니다. 말씀 사역의 항구적인 중요성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란 아무 믿음과 감동의 화답도 못하는 대언자의 무미건조한 대언이 아니라 예언자 자신의 인격과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접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권위를 행사하는 그런 말씀을 가리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다고 주장하는 많은 예언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예언자(목회자)들은 자신들 스스로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신하지 못한 채 기계적으로 성경 말씀을 선포합니다. 여기에는 어떤 마른 뼈들의 소생역사도 기대될 수 없습니다. 죽은 자들의 부활은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창조주의 말씀입니다.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창조의 권능을 발휘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무생물에게도 역사합니다. 마른 뼈들을 호령할 수 있는 유일한 말씀은 오로지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언자들은 심히 말라버린 뼈들이 뒹굴고 있는 계곡에 하나님의 말씀을 쩌렁쩌렁하게 선포해야 합니다.

5절은 마른 뼈들이 들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의 내용입니다.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의지를 표명합니다. 이사야 55:11은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의지를 집행하는 대리자임을 밝히 증거합니다.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 즉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의도한 바를 실현시키는 하나님의 대리자입니다. 여기서 작용하는 하나님의 의지는 마른 뼈들을 살려내려는 의지입니다. 누군가가 마른 뼈들을 살려내려는 하나님의 의지에 깊이 공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생기가 마른 뼈들에게 들어가 마른 뼈들을 살려내려는 열망이 하나님의 말씀의 정수(精髓)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예언자는 이러한 하나님의 의지와 열망을 내면화시켜야 합니다. 하나님의 열망과 의지를 대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할 수 없습니다. "대언하는" 행위는 전인격적인 활동입니다. 하나님의 의지와 의향, 하나님의 계획과 열망을 온전히 대표하는 사람이 하나님 말씀의 대언자입니다. 대언자가 단순히 죽은 문장이나 말의 전달자가 아닌 것이 바로 이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행위가 이토록 전인격적인 행위이기 때문에 예언자가 대언자가 되기 위하여 하나님의 가슴 속에 있는 열망에 깊이 공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참으로 우리는 이런 대언자를 간절히 열망합니다. 천지에 충만해 있는 하나님의 생기를 향하여 외칠 수 있는 사람이 몹시도 그립습니다.

6절에는 하나님의 말씀사역이 마른 뼈들에게 미칠 궁극적인 효과를 말합니다.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두리니, 너희가 살리라. 또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 하나님의 말씀은 마른 뼈들에게 생기를 고취시킬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그들이 그

 

들 자신의 부활과 소생이 하나님 자신의 사역임을 고백하게 만듭니다. 에스겔은 5-6절에 선포된 하나님의 명령(말씀)을 좇아 대언합니다. 그는 자신의 사상이나 이념을 말하지 않고 하나님의 감정과 열망, 하나님의 의지와 계획을 내면화시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합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처음으로 대언하자마자, "소리가 나고 움직이더니 이 뼈, 저 뼈가 들어 맞아서 뼈들이 서로 연락하더라"(7절). 곧 이어 마른 뼈들에게 힘줄이 생기고, 살이 입혀지고, 그리고 가죽(피부)이 덮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마른 뼈들은 단계적으로 부활합니다. 마른 뼈들은 무생물입니다. 생기와 가장 거리가 먼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것을 듣는 피조물이 무생물이든 생물이든 상관하지 않고 역사(役事)합니다. 하나님이 이 세계를 다스린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의 권세 아래 순종하지 않는 피조물이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마른 뼈들 사이에서 소생의 몸짓을 창조하고 말씀에 반응하는 움직임을 불러일으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아주 마른 뼈들도 반응하며 움직입니다. 아무리 신세대 대학생(젊은이들)이라 할지라도, 아무리 완강한 무신론자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못들은 체 할 수 없습니다. 소리를 내면서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뿔뿔이 흩어져 널브러져 있던 마른 뼈들이 서로 연결되고 접촉하는 소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마른 뼈들처럼 분해되고 파편화되어 있는 개인들을 서로 연락(聯絡)되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왕성한 곳에서는 뿔뿔이 흩어져 있던 무기력한 개개인들을 연락시키며 하나의 생명체(유기체)로 결속시킵니다. 에스겔의 첫 대언이 이런 놀라운 변화를 가져옵니다. 그러나 그의 첫 대언(그의 대언은 그의 믿음과 순종의 결과)에도 불구하고, 서로 들어맞고, 연락된 뼈들, 살과 가죽으로 덧입혀진 몸 속에도 아직은 생기가 없습니다. 오늘날은 참으로 피상적인 외모치중 문화에 지배당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살, 가죽을 화장하는 수준에서 자신들의 외모를 가꿉니다. 많은 여성잡지들이 외모를 어떻게 가꿀 것인가에 많은 지면을 할애합니다. 아무리, 가죽과 살이 아름답고 곱게 관리되었다 하더라도 그 속에 생기가 없다면 그것은 그 가죽과 살 수준의 아름다움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많은 취업 인터뷰에서 사람들은 외모를 중시한다는 소문 때문에 성형수술, 박피제거 수술 등의 얄팍한 상술이 많은 선남선녀들을 현혹시키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오히려 그 속 사람 안에서 발산되는 생기로 충만한 사람이, 살과 가죽의 아름다움을 가꾸는 사람들에 비해 훨씬 더 주목을 받게 마련입니다. 취업 인터뷰에서도 이것은 진실입니다. 애굽 왕 바라오와 그의 신하들은 요셉의 지혜와 명철 앞에서 다음과 같은 감탄을 터뜨립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신이 감동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얻을 수 있으리요?"(창 41:38). 속 사람이 하나님의 생기로 가득차 있지 않는 사람은 아직은 마른 뼈 상태에 머물러 있습니다.

에스겔의 두 번째 대언에 의하여 생기가 사방에서부터 불어옵니다. 생기를 향한 대언이 살과 가죽을 덧입었으나 아직 생기를 받지 못한 마른 뼈들에게 역사합니다.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 하라' 하셨다 하라"(9절). 여기서 우리는 예언자의 본질적인 사명을 봅니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생기를 고취시키는 사람입니다. 창

 

세기 2:7에 보면 하나님은 흙덩이로 누워있는 아담에게 하나님은 생기를 불어넣으십니다. 하나님은 창세기 2장의 창조사역을 대언자를 통하여 여기서 계속하십니다. 에스겔은 사방으로부터 생기를 불러냅니다. 사망을 당한 사람들, 그의 회중들을 향하여 생기를 불러냅니다. 교회강단에서 선포되는 설교말씀은 사방으로부터 하나님의 생기를 불러내는 작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기를, 즉 신바람을, 희망의 바람을 불러오는 수레입니다. 하나님의 생기-살리는 기운, 에너지-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살리는 에너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면 하나님의 에너지가 전달됩니다. 에스겔은 이런 대언의 깊은 차원을 친히 경험합니다. "이에 내가 그 명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12절). 그렇게 심히 많은 마른 뼈들이 하나님의 생기에 노출되자마자 지극히 큰 군대로 부활합니다. 이런 기적의 창조자는 하나님이며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런 부활기적의 매개자는 말씀의 대언자입니다. 대언자의 순종과 믿음에 의하여 마른 뼈들의 부활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지극히 큰 군대로 부활하는 마른 뼈들은 누구입니까?

11절은 마른 뼈들의 정체가 드러납니다.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11절). 결국 에스겔이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여 살려낸 마른 뼈들은 너무나 오랫 동안 계속되는 포로생활에 지치고 낙심한 유다의 포로들입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마른 뼈라고 말했으며 소망이 없어졌다고 했습니다. 소망이 없어졌기 때문에 그들은 다 멸절되었다고 말합니다. 소망이 끊어진 사람들은 멸절된 사람들입니다. 에스겔은 포로로 잡혀온 이래로 약 10년 동안 소망이 끊어진 사람들에게 목회를 하고 있었습니다.그는 가시와 찔레와 전갈처럼 자신의 메시지를 대항하는 유다 포로들을 상대로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믿음과 하나님이 열어주시는 미래를 바라보도록 설득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뼈 속 깊은 절망의 언어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습니다. "고국으로 돌아갈 우리의 소망이 끊어졌다. 우리는 바벨론이라는 무덤 속에서 백골이 되어 죽어갈 것이다." 골짜기 심연에는 이런 자학적이고 자조적인 속삭임이 왕노릇하고 있었습니다. 에스겔은 이런 자학적이고 자조적인 회중들에게 하나님의 길을 제시합니다. 이런 절망의 군상들에게 하나님은 고토로 돌아갈 희망을 불어넣으십니다.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12절). 너희들은 무덤에서 나와 고국으로 돌아갈 것이다. 이 말은 말하는 사람의 의지를 강조하는 의지미래입니다. "내가 너희들로 하여금 무덤에서 나와 고국으로 돌아가게 해 주겠다"라는 뜻입니다. "내가 너희들 속에 성신으로 충만하게 하겠다."

 

그러므로 너는 대언하여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 13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한즉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14 내가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살게 하고 내가 또 너희를 너희 고토에 거하게 하리니, 나 여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이룬 줄을 너희가 알리라(12-14절).'

 

하나님 자신의 하나님되심을 입증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먼저 약속을 주시고 그 약속을 성취시키는 분입니다. 대언자는 하나님의 약속을 대언하여 그의 청중들로 하여금 그 대언을 믿게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에스겔은 조국의 멸망과 더불어 자신이 인생이 송두리째 망가지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왕도 포로로 잡혀가고 예루살렘 성전도 파괴되었습니다. 그가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서 제사장으로 봉사할 희망은 아득히 멀어져 간 신기루같은 꿈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런 우울하고 답답한 포로생활이 5년 째 접어든 시점, 그가 고국에 있으면 성전에 나가 제사장직무를 감당해야 할 그 나이 서른의 시점에 하늘의 불전차 보좌위에 앉아계신 하나님을 목도합니다. 그 후 그는 보좌 위에 앉으신 하나님의 대언자가 되어 하나님 말씀의 능력을 친히 맛봅니다. 그는 유다 왕실은 망하고 유다 왕의 보좌는 텅비어 있었지만, 하나님 나라의 보좌 전선에는 이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 것이 바로 하늘이 열리는 경험입니다. 전후 좌우 평면적인 차원의 모든 전망이 흑암처럼 답답하고 닫힐 때 하늘이 열리는 묵시의 경험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은 보좌 위에 앉아 계십니다. 여전히 우주와 역사, 인생과 온 삼라만상의 왕이십니다. 그분은 절망과 자포자기의 골짜기에서 들려오는 자조적인 자학적인 속삭임을 들으시고 당신의 대언자를 보내십니다. 당신의 말씀을 보냅니다. 당신의 생기를 보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사람, 대언자를 통하여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지금도 당신의 말씀을 대신할 대언자를 찾으십니다. 하나님의 열망, 의지, 계획, 감정을 익숙하게 알고 체질화시키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기만 하면, 변화와 부활의 역사 나타납니다. 우리들의 작은 모임에 필요한 것은 천지에 미만(彌滿)해 있는 하나님의 생기를 사방에서부터 불어 오게하는 대언자의 순종과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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