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사면초가에 쌓여 있는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를 절대적인 평안의 반석 위에 세우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성이 있습니다. 그 성은 이방인들의 침략과 이방인들의 진격 속에 흔들리는 요동하는 성입니다. 그런데 그 성안에는 저녁부터 새벽까지 12시간 동안 간절하게 구원해달라고 기도하는 백성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방인이 와서 훤화한다 이 말은 훤화라는 말은 상대방의 기를 죽이기 위해서 내어지르는 적군의 소리입니다. 이것은 북소리일 수도 있고 나팔 소리일 수도 있고 말발굽 소리일 수도 있습니다. 성 안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기죽이기 위해서 내어지르는 소리입니다. 여러분이 이방인의 훤화하는 소리 이방인의 떠드는 소리 우리를 기죽이는 소리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보금자리를 의기소침으로 인도하는 큰 훤화소리에 우리가 지금 둘러싸여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가운데 저녁부터 계속 구원을 간구했습니다. 그런데 저녁부터 구원을 간구하고 하나님 구출하심, 하나님 간섭하심을 그렇게 빌었건만 새벽이 올 때까지 전혀 하나님의 구원은 나타날 조짐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새벽에 우리 하나님께서 구원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시편이 이사야 37장과 열왕기하 20장에 보면 앗수르 산헤립의 군대 18만 5천명이 예루살렘 성을 에워싸고 그 성안에 히스기야와 이사야는 하나님 성전과 이사야 집안을 왔다갔다 하면서 산헤립이 보낸 편지를 놓고 기도하는 장면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백성이 하나님의 사랑을 덧입는 백성이 될지라도 사면초가에 몰려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당황스러운 일을 만난다는 겁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는 각자 하나님이 그의 신앙 성장의 프로그램에 따라 신비에 속해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공동체이건 개인이건 아무리 사랑하는 백성이라 할지라도 환난과 역경 속에 노출시키지 않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환난과 큰 동요 가운데 우리를 집어던지십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환난에 집어던지는 이유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는 인격적 관계가 순결해지는 것을 원하기 때문에 하나님만 선택하는 일을 정말로 종합적인 추론 끝에 이때는 하나님을 의지할 때인 것인 것을 또 다시 끊임없이 훈련하도록 끊임없이 하나님 선택하는 쪽으로 손이 가도록 끊임없이 하나님을 대입해서 이 난국을 극복하는 훈련을 할 때까지 우리를 환난 속에 집어 던집니다. 만일에 이 교육 프로그램이 끝나면 하나님께서 다른 훈련을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라고 할지라도 환난과 동요 가운데 집어 던져진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킵니다.
우리가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나서 전체적으로 더 순탄해지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전체적으로 순탄해지지 않고 기독교 신앙 갖기 전이나 이후나 비슷한 정도의 환난이 있고 비슷한 정도의 울퉁불퉁한 여정이 있습니다. 그런데 1절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오 힘이시니. 이 때 이 피난처라는 말은 소극적인 피난처가 아닙니다. 이 때 피난처는 소극적인 피난처가 아니라 이 격하고 거친 현실을 돌파할 수 있는 힘을 보존하는 곳 피난처는 힘을 보존하는 곳입니다. 거친 세상의 물결 속으로 다시 뛰어들 수 있는 내적인 강인함을 연단하는 곳이 피난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오 힘이시니 환난 중에 나의 큰 도움이시라 여기서 환난은 뭡니까? 힘을 빼앗아 가는 것 삶의 원기를 앗아가는 모든 종류가 환난입니다. 환난은 살 힘이 없는 것 그런데 문제는 왜 우리가 환난을 당하냐면 살아가는 힘을 더 얻기 위해서 발버둥 치다가 힘을 빼앗기게 됩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우리가 게으르게 살다가 가난해지는 것은 참을 수 있겠는데 그 게으름 그 가난을 이겨보려고 뼈 빠지게 일하다가 가난하게 되는 것은 진짜 환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라는 말은 이 인생의 방정식을 풀기 위해서 방정식은 근, 답입니다. 흔히 보통 하나 밖에 없습니다 좋은 방정식은. 이 방정식의 그 근을 대입시키면 전부다 왼쪽 항과 오른쪽 항이 같아집니다. 우리가 하나님 원인론적인 자기 상황 분석을 할 수 있는 안목을 기를 때까지는 환난이 심심치 않게 비슷한 종류의 환난이 오게 됩니다. 하나님을 대입시켜 보면 내가 일어난 이 일의 배후에 하나님 원인이 이 안에 있다 , 이것을 하나님 원인론적인 분석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원인이 되어서 발생한 분석, 요나가 환난을 당할 때 그것을 하나님 원인론적으로 분석했죠? 나의 불순종이 저 폭풍을 잉태했다고 믿었습니다. 사도행전 27장에 있는 사도 바울이 276명이 탄 그 죄수 호송선이 산산조각 나는 그것을 밤의 환상 가운데서 해설 받고 그것을 하나님 원인론적인 분석으로 돌파를 합니다. 하나님 원인론적인 분석의 능력이 바로 신앙이라고 그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진짜 신앙은 이럴 때 힘을 발하는 겁니다. 환난 중에 큰 도움으로서.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환난은 이런 겁니다.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여러분 땅은 견고성과 안정성을 상징합니다. 산은 태산 같은 평안을 상징합니다. 내가 믿었던 산, 내가 믿고 딛었던 땅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는 일 이것이 바로 환난입니다. 환난은 내가 익숙하게 의지하던 것들이 전혀 익숙하게 의지할 만한 것이 되지 못함 그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 환란이죠. 우리 남편이 출퇴근을 잘하고 30년 내내 꼬박꼬박 출퇴근 잘하고 월급 갖다 주고 가정 경제를 했는데 요즘은 사오정, 40대 초반에 퇴직을 강요당하는 시기입니다. 우리 어머니들은 자식 교육 때문에 모든 비난을 자녀 교육 잘못되면 전부다 어머니가 뒤집어쓰기 때문에 어머니는 그냥 잠재적인 원죄를 뒤집어 쓴 사람처럼 되어 있고 아버지는 이 격한 퇴직의 바람 가운데 살아남기 위해서 너무나 애달프게 분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학교가 지금 만원입니다. 목회는 조금 쉬운 게 아닌가 싶어서. 그런데 신학교 들어가는 데 보통 4-5년 걸립니다. 시험이 바로 되지 않습니다. 전부다 그런 사람이 다 몰려 있는 곳이 신학교이기 때문에 그런데 또 신학을 한다고 해서 목회가 또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일이라는 것이 그렇게 정말로 눈을 감아보면 희망이 없는 희망의 출구를 찾을 수 없는 그래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땅은 내가 그동안 충성했던 직장이고 산도 내 직장 상사입니다. 이런 사람이 갑자기 바다 가운데 빠지고 바닷물이 흉용하고 공장 폐쇄의 홍수가 뛰놀던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라 여기서 이제 믿어야 합니다. 퇴직의 바람 이것 전부다 환난이죠? 그래서 장기 신용은행에 다니던 36살의 한 직원이 그 똑똑한 서울대 상대를 나왔더라고요. 장기 신용은행은 우리나라 은행 중에서 월급을 제일 많이 주는 은행이죠? 이 은행에 있던 사람이 그 똑똑한 사람이 퇴직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그냥 마음 굽히고 이것 저것 취직을 다 해보았는데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고시 공부를 시작했는데 이것도 우리가 잘 들어야 합니다. 고시를 두 개 동시에 패스를 했습니다. 워낙 머리가 좋으니까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서울대 경제학과를 나왔으니까 공부 제일 잘하는 사람인데 한 마디로 굴욕을 당했습니다. 서울대 경제학과 나온 사람이 취직 2년 했을 때 대개 정신과 치료를 받는데 그 이유는 서울대 경제학과를 나와도 가면 뭐하냐면 커피 타야 되고 복사기 날라야 되고 복사하고 완전히 굴욕적인 일을 다하고 다닙니다. 그래서 이런 학생들은 취직해서 대개 2년 내로 전업하고 싶은 마음을 많이 느낍니다. 그런 학생이 바로 당했습니다. 이 학생은 너무 절망적이어서 꿈에도 꾸지 않은 고시 공부를 하다가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되었습니다. 그래서 방송이고 신문이고 인터뷰를 많이 했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의 땅, 산 이런 것들은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 견고성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땅과 산도 보면 거대한 대륙, 땅과 산도 알고 보면 지질학적으로 바다 위에 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땅과 바다도 서서히 움직이는 지구 중심부에서 끓어오르는 물 위에 있는 겁니다. 그것이 요동할지라도 다시 말해서 천지개벽이 일어날지라도 이런 뜻입니다.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셀라. 여러분 진짜 여러분이 좀 괴로워하는 것은 남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이 너무 많이 남을 의식합니다. 내가 퇴직해서 돌아가면 남들이 보면 얼마나 딱하게 볼까 그렇게 생각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남이 내 인생을 살아주는 것이 아닌데 정말로 대학 나와도 구멍가게부터 할 수 있고 세상일이라는 것은 너무나 다양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회가 너무나 남을 의식하기 때문에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을 합니다. 그런데 제가 옛날에 미국에서 설교했던 한 교회 그 교회는 서울 공대 나온 사람 두 사람이 세탁소 주인입니다. 여러분 그런데 왜 미국에서는 델리 가게를 하고 도너츠 장사를 하면서 한국에서는 왜 못합니까? 기꺼이 할 수 있는 겁니다. 이 세상은 몸이 건강하기만 하면 절대로 살아날 길이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오히려 이렇게 엉뚱한 일에 퇴직을 당하고 환난을 당하면 어떤 신앙적 오기가 있어야 하냐면 이제부터 본격적인 신앙공부다 이제까지는 이론이고 지금부터 실제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가야 합니다.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절대로 남을 의식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남은 우리의 인생을 살아주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과 우리와 그 분과 우리 둘입니다. 하나님과 내 인생에 있는 특정한 시간표 때문에 지금 내가 환난을 당한다 이렇게 생각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이 환난 가운데 우리를 어디로 인도합니까? 하나님의 장막 성소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한 시냇물이 있어 땅으로 흘러 하나님의 성 지극히 높으신 자의 장막의 성소를 기쁘게 합니다. 하나님이 그 성 중에 거하여 성이 요동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여기서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환난 가운데 그래서 제가 신앙이 중요하다는 것이 이겁니다. 인생의 가장 중요한 순간에 신앙을 갖지 못한 사람들은 파산하지만 신앙이 성 중에 그 마음의 성 중에 하나님 계시면 그 성 안에 하나님이 계시면 환난을 돌파할 수 있는데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면 무너지고 파산하는 겁니다. 저는 이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래서 제가 주일학교가 학교 공부보다 더 중요하다고 하는 이유는 학교 공부가 인생의 난관을 돌파하는 것을 도와주는 것보다 일주일에 한 번씩 공부하는 주일학교가 훨씬 더 중요합니다. 이것을 여러분께서 신앙인들의 전기를 읽어보면 압니다. 어린 시절에 성경 열심히 외우고 그 단순하게 주일학교에서 열심히 외우고 배웠던 그 귀한 말씀들이 그들의 인생의 굽이굽이 그 골짜기 마다 그를 지탱하는 말씀이 됩니다. 신앙 전기들을 읽어보면 확실하고 하나님 말씀이 기억나는 사람 요동하는 세상의 한복판에 살면서 하나님의 현존과 임재를 꼭 믿을 수 있는 성경 말씀이 용솟음치는 사람이 이긴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승리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 승리자라고 마크를 찍어줍니다. 지금 우리가 좀 더 빨리 집 사고 좀 더 빨리 출세하고 좀 더 빨리 승진하고 이런 것들로부터 현혹당하지 마시고 여러분이 환난 당했을 때 여러분을 지탱할만한 말씀이 툭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그 성 중에 하나님의 장막 성소가 있는가 여러분이 그 성중에 있는 하나님의 장막 성소에 피난 갈 만한 믿음이 있는가 이것이 더 중요합니다. 진짜 중요합니다. 그래서 부부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환난을 당할 때 부부사이가 원래 더 강해집니다. 환난당하지 않았을 때는 냉랭하더라도 환난 당할 때 정말로 신앙적인 사람들은 부부의 재발견을 합니다. 남편의 재발견, 부인의 재발견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그 때는 하나님이 그 성 중에 거하시기 때문에 여러분이 새벽에, 새벽은 유대인들의 노동에서 저녁부터 시작하는 노동이 12시가 끝이죠? 저녁에 노동을 시작하면 6시에 노동을 시작하면 새벽 6시에 노동이 끝나니까 베드로가 저녁에 시작했다가 새벽에 끝냈죠? 그런데 언제 도움이 왔습니까? 요한복음 21장에 제자들이 한 마리 물고기도 잡지 못하고 새벽에 그물 씻고 돌아갈 때 하나님이 새벽 미명에 나타나셔서 도움을 주셨죠? 인내와 기다림의 끝에서 지쳐버린 그 자리에 나타나셔서 도와주십니다. 모나미 볼펜을 만든 사람이 기독교인 아닙니까? 153마리의 물고기를 잡은 것을 기념해서 모나미 153이란 볼펜을 만들어서 엄청나게 많이 팔았죠? 그 153이 바로 요한복음 21장 새벽에 잡은 물고기 숫자가 153입니다. 그 다음에 미국에서 JC 펜이라는 유명한 백화점, 중저가 백화점이죠? 지저스 크라이스트 원페니 이런 뜻입니다. 한 푼도 주님의 것이다 이런 뜻입니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하나님이 도우시는 새벽에 도우신다는 말은 내 인내가 다한 시점에 내가 이제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그 시점에 예기치 않은 그 시점에 임박하게 하나님 도움이 온다 이런 말입니다. 그래서 환난 당할 때는 여러분 환난 당하고 나면 좋은 일밖에 안 남았죠? 왜요? 새벽에 우리를 도와주신 하나님을 만나는 거죠. 그래서 환난을 당하면 무게중심이 처져 있기 때문에 세상에 눈에 보이는 게 없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좋은 일을 당할 때 더 영적으로 겸손하시길 바랍니다. 만군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8절입니다. 와서 여호와의 행적을 볼지어다 그가 땅을 황무지로 만드셨도다. 적군의 땅입니다. 그가 땅 끝까지 전쟁을 쉬게 하심이여 활을 꺾고 창을 끊으며 수레를 불사르시는도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오늘 10절에서 여러분 가만히 있으시길 바랍니다. 가만히 있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깨달으시길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은 내가 환난당할 때 이 환난을 통해서도 영광 받으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정말로 실감 안 나도 하나님 제게 나쁜 일처럼 보이는 이 일을 통해서도 주님 영광 받아 주시옵소서 이를 악 물고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지금은 그 뜻을 충분히 깨닫지 못할지라도 성경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하나님이 우리에게 환난을 통해서도 그 영광을 드러내시는 그 기막힌 대역전을 연출하시리라 믿으시길 바랍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오늘 여러분께서 하루 종일 가만히 하나님의 하나님 됨을 깨닫는 하루가 되시길 바라고 환난과 요동하는 성을 극복하고 피난처 되시는 예수님께 피하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아버지 하나님 성 중에서 요동하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인내가 끝나갈 그 시점까지 아버지 하나님 불러도 대답 없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 우리가 이제 그물을 씻고 집으로 돌아갈 때 이 낙심하는 인생을 접고 아버지 냉각된 마음으로 인생을 접고자 할 때 바로 그 새벽의 미명에 우리 낙담과 피곤이 자욱이 끼어 있는 새벽에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주님 우리는 세상 사람들의 안목을 두려워하고 이방인들의 훤화 우리들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 말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두려워하고 활과 칼을 가지고 우리를 찌르는 사람을 두려워합니다. 주님 아버지 우리가 그토록 믿었던 사람들이 흔들리고 우리가 믿었던 견고한 직장이 요동하는 바다 물결처럼 변합니다. 하나님 이 환난 중에 영원히 믿으실 분은 영원히 안주하고 피난갈 분은 하나님 한분 밖에 없음을 확실하게 깨닫게 도와주시옵소서. 우리가 의지했던 산을 우리가 의지했던 땅을 믿지 말고 아버지 하나님 하나님을 믿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δεδομένα 18,185편 ◑ >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새벽기도.설교 (시편 49편) (0) | 2021.11.28 |
---|---|
새벽기도. (시편 48편) (0) | 2021.11.28 |
개혁신학의 광맥 제 3장 청교도 신학 (0) | 2021.11.28 |
개혁신앙의 광맥 2부 제1장 개혁파 스콜라주의 정통신학의 흐름 (0) | 2021.11.28 |
개혁신학의 광맥 제8장 남부 독일의 개혁신학과 하이델베르크 요리 문답 (0) | 2021.11.2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