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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회 한국신약학회 콜로키움

by 【고동엽】 2021. 11. 28.

능력으로 상속하는 하나님 나라 (고린도전서 4장 20절)
권연경 박사 (안양대학교)
논지 요약


고린도전서 4장 20절은 로마서 14장 17절과 더불어 바울서신의 하나님 나라 개념이 미래적일 뿐 아니라 현재적이기도 하다는 판단의 근거로 제시된다. 본 발제는 이러한 통상적 판단이 주석적으로 현명하지 못한 판단에 근거하고 있음을 밝히는 것이다.

I. 통상적 견해 (성경번역들을 중심으로)


바울의 사상에서 하나님 나라 개념이 차지하는 비중에 대해서는 다양한 평가가 가능하겠지만,1) 학자들은 바울이 언급하는 하나님 나라가 대부분 미래종말론적 개념이라는 사실에 동의한다.2) 그 속에 미래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상속하다”라는 동사를 미래 시제로 사용하고 있는 바울의 진술은 이 점에서 이견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이런 일을 행하는 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상속하지 못할 것입니다”(갈 5:21b). “불의한 자는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까?”(klhronomh,sousin, 고전 6:9-10; cf. 15:50). 하지만 위에 언급한 두 구절은 이러한 전반적 흐름의 예외가 되는 것으로 간주된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들 구절에서는 하나님 나라가 현재적 실재로 묘사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3)
이러한 현재적 해석은 바울의 진술에서 자연스럽게 도출되는 입장이 아니라 해석의 관건이 되는 두 가지 핵심 문제들에 관해 나름의 주석적 결정을 내린 결과다. 정확한 해석의 관건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동사가 생략된 바울의 진술에 어떤 동사를 첨가할 것인가 하는 물음이며, 둘째는 말/능력의 반제를 이끌고 있는 전치사 evn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물음이다. 영미권의 주요 번역들 및 한글 번역을 개관해 보면, 통상적인 “현재적” 해석이 어떻게 가능해지는지를 잘 보여준다.
한글 개역은 본 구절을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로 옮기고 있다. 이는 동사의 자리에 술어 “있다”를 삽입하고, evn을 공간적 의미로 해석한 결과다. 그러니까 서로 대조되는 “말”과 “능력”은 하나님의 나라의 본질에 관한 상반된 설명으로 이해된다. 이후에 출판된 모든 한글 번역들은 예외 없이 개역의 번역을 그대로 반복하는데(공동번역, 새번역, 표준신약성서, 표준새번역, 현대인의 성경 등), 이는 개역에 반영된 관점이 이론(異論)을 허용치 않는 정설로 수용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물론 한글 번역의 이런 사정은 서구 신학계의 흐름과 일치한다. 영미권의 개역성경에 해당하는 KJV의 경우 Vulgate의 전통에 따라 생략된 동사 자리에 be동사의 현재형 "is"를 삽입하고(Vulgate는 "est") 전치사를 "in"으로 번역함으로써 개역이 취한 입장의 전형을 보여준다. “For the kingdom of God is not in word, but in power.” NASB, NJB 및 RSV 등은 KJV의 "is" 대신 "consist"를 삽입함으로써 바울의 진술이 현존하는 하나님 나라의 본질에 대한 설명임을 더 분명히 부각시키고 있다. 개정된 루터역 역시 이와 유사하다("steht in").4) NEB, NIV 및 NLT는 동사 "is"를 삽입하고 전치사 evn을 “a matter of”로 풀어 번역 했지만 “말”과 “능력”이 하나님 나라의 본질을 기술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점에 있어서는 변화가 없다. “For the kingdom of God is not a matter of talk but of power.”5) 독어역 Einheitzübersetzung은 아예 h` basilei,a tou/ qeou/를 “die Herrschaft Gottes”(하나님의 통치)로 옮기고, “erweist sich”(드러나다, 증명되다)를 첨가함으로써 통상적 의미를 더욱 강한 것으로 만들고 있다. 하지만 NRSV는 기존 RSV의 “consist in”을 “depends on”으로 수정함으로써 하나님 나라와 말/능력의 관계를 보다 모호한 상태로 만듦으로써 다른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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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미래적 해석을 위한 근거들


본 발제에서 하나님 나라 개념에 관한 복잡한 논의를 시도할 수는 없다. 논의의 초점을 맞추는 의미에서, 본 발제에서는 고린도전서 4장 20절에 언급된 하나님 나라가 미래적 개념임을 시사하는 근거들을 몇 가지 살펴보는 방식으로 논의를 진행하도록 하겠다.




1. 현재와 미래의 중첩? - 상식적인 물음


주석과는 무관하지만, 한 가지 상식적인 물음을 던져보자. 학자들이 고린도전서 4장 20절(과 로마서 14장 17절)을 현재적 개념으로 읽는 이면에는 바울의 하나님 나라 개념 역시 공관복음의 하나님 나라 개념과 동일한 종말론적 긴장을 함축하고 있다는 신념이 놓여 있다. 역사적 예수의 선포 속에서 하나님 나라가 미래이기도 하고 현재이기도 하듯,6) 바울의 하나님 나라 개념 역시 “이미”와 “아직”의 양면을 동시에 드러낸다는 것이다.7) 신약학자들 사이에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기는 하지만, 우리는 이런 식의 역설적 묘사에 대해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해 볼 수 있다. 하나님 나라라는 단일한 실체가 이미 도래한 것이기도 하고 아직 도래하지 않은 것이기도 하다는 진술은 바울의 텍스트를 “해명”(解明)하는 것인가, 아니면 바울의 단순한 진술들을 오히려 역설적이고 “난해한” 개념으로 만드는 것인가? 분명 “이미”와 “아직”은 시간을 전제한 표현들이고, 일반인들의 통념 속에서 시간의 흐름이란 본질적으로 중첩을 허용하지 않는다. 내가 이미 집에 도착했을 수도 있고, 아직 집에 도착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사실일 수는 없다. 그러니까 아직 집에 도착하지 않았으면서 동시에 집에 도착해 있는 상태일 수는 없는 것이다. 상식적 언어의 용법에서 이런 식의 주장은 설명이 아니라 비현실적이고 비논리적인 억설로 간주된다. 그런데 우리는 바울, 아니 신약의 하나님 나라 개념을 이런 식으로 설명한다. 하나님 나라가 이미 도래한 것이기도 하고 아직 도래하지 않은 것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물론 개념의 유희에 익숙한 학자들이야 이런 식의 역설에서 모종의 심오함으로 느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일상적 삶의 문맥에서 살고 사고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식의 설명은 사실 아무 것도 설명해 주지 못하는 수수께끼에 지나지 않는다.8) 만약 텍스트 자체의 자료가 그러한 “중첩” 개념 없이는 설명되지 않는 상황이라면, 학자들의 임무는 이런 중첩의 본질 혹은 속내를 가능한 한 상세하게 풀어 설명하는 일이다. 하지만 학자들의 글에서 이런 설명을 만나기는 어렵다. 신약의 종말론에 관한 학자들의 설명은 대부분 현재와 미래를 한 자리에 모으고 이 둘이 “종말론적 긴장”을 이루고 있다고 말하는 수준에서 멈춘다. 물론 상식의 세계를 사는 사람들은 그런 식의 설명이 당혹스럽다. 어떤 방식으로 “이미”와 “아직”이 공존할 수 있는지, 실제로 그렇다면 그 공존의 모양이 어떤 것인지 알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두 가지 진술이 공존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은 설명이라기보다는 설명을 회피하는 것일 수 있다. 모순되어 보이는 두 진술이 등장할 때 그 둘 사이를 해명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주석가들의 임무일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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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런 역설적 정황을 보다 상세하게 설명하려는 시도가 없는 것은 아니다. 가령, Fee는 4장 20절을 주석하면서 “현재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하고, 바로 그 동일한 나라를 그들의 유업으로 약속하는” 구원에 관해 말한다.9) 이런 설명은 훨씬 이해가 쉽다.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가 “이미” 도래했다는 것은 우리가 그 속에 “들어가 있다”는 말이고, 그 나라가 “아직” 오지 않았다는 것은 우리가 그 나라를 아직 “상속하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하지만 설명이 분명해지면서 문제가 생긴다. 이런 명쾌한 설명이 실제 바울의 진술과는 맞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Fee의 해법은 “들어가 있는 것”과 “상속함” 사이를 구분하는 것인데, 불행하게도 이런 식의 구분은 바울의 글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공관복음과는 달리, 바울은 하나님 나라를 “들어가는” 곳이 아니라 “상속할” 것으로 묘사한다. 또한 복음서에서는 들어감과 상속함이 의미상 차이가 없는 동의어로 사용된다. 그러니까 Fee가 그려낸 현재적 들어감과 미래적 상속이란 구분은 본문 자체의 어법과 충돌된다.
현재와 미래의 중첩을 말하는 학자적 관습은 상식적 통념의 틀을 깬다. 성서의 진술들은 과연 이런 상식 밖의 개념을 요구하는 것일까? 하나님 나라가 현재적이라는 말도 나름의 근거가 있고, 미래적이라는 말 역시 튼튼한 주석적 기초 위에 선 판단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서가 동시에 현재이기도 하고 미래이기도 한 개념을 제시하는 것일까? 아니면, 보다 현실적인, 그리고 보다 상식적인 수준에서 설명 가능한 해법을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10)




2. 바울서신과 고린도전서의 문맥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인정하는 대로, 바울서신의 하나님 나라 개념은 대부분 미래종말론적이다. 이는 고린도전서 이전의 구절들뿐 아니라(살전 2:12; 갈 5:21b), 고린도전서 내에서 이루어진 두 번의 추가적인 언급에서도 역시 마찬가지다(6:9-10; 15:50). 15장에서 바울은 현재의 썩어질 몸과 썩지 않을 부활의 몸에 관해 말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언급하고 있다.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50절). 여기서 혈육과 썩음은 각각 하나님 나라와 썩지 아니함과 대비된다. 물론 부활이라는 문맥 자체가 분명히 말해주듯, “썩지 아니함”을 옷 입는 것은 최종적인 부활의 시점, 곧 그리스도의 재림의 시점이다. 바로 이 때가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상속하는 시점인 것이다. 여기서는 현재적 하나님 나라 개념을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4장 20절의 해석을 위해 보다 중요한 것은 보다 가까운 6장에서의 언급이다. 문맥에서 분명해지듯, 6장 9-10절의 하나님 나라는 교회 내에서 자행되고 있는 불의에 대해 경고하는 내용 속에서 나타난다. 바울의 선교 이전 고린도의 성도들 중 다수는 불의로 규정되는 삶을 살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역을 통해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6:11). 그런데도 현재 성도들은 이러한 변화의 의미를 망각하고 다시금 이전의 삶을 답습하여 “불의를 행하고” 있다(6:8). 이런 상황에서 바울은 성도들 자신이 익히 잘 알고 있는 분명한 사실을 다시금 일깨운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 나라를 상속하지 못할 것임을 알지 못합니까?”(ouvk oi;date o[ti a;dikoi qeou/ basilei,an ouv klhronomh,sousinÈ, 9절) 이어서 바울은 이러한 “불의”의 구체적인 모습을 상술하고, 그 뒤 다시금 동일한 경고를 덧붙이고 있다. “하나님 나라를 상속하지 못할 것이다”(basilei,an qeou/ klhronomh,sousin, 10절).11) 물론 이는 갈라디아서 5장 20절의 경고를 그대로 반복한 것이다. 그리고 이 부정적 경고를 보다 긍정적인 권면으로 바꾸면 데살로니가전서 2장 12절처럼 될 것이다. “여러분들을 그의 나라와 영광으로 불러주시는 아버지께 합당하게 행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eivj to. peripatei/n u`ma/j avxi,wj tou/ qeou/ tou/ kalou/ntoj u`ma/j eivj th.n e`autou/ basilei,an kai. do,xan, cf. 살후 1:5; 2:14).
바울서신 대부분에서 하나님 나라가 미래적 개념이라면, 그리고 더욱 중요하게 동일한 고린도전서 내에서 하나님 나라가 분명한 미래종말론적 개념으로 제시되고 있다면, 4장에 언급된 하나님 나라 역시 미래종말론적 개념이 가능성이 높다. 물론 바울의 진술 자체가 현재적 하나님 나라 개념을 분명히 요구하는 상황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질 것이다. 하지만 동사조차 생략된 바울의 진술은 모호하고, 따라서 그 자체로는 어떤 특정한 해석도 강요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가 문맥의 흐름을 무시하면서까지 이 구절을 현재적 의미로 읽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4장의 문맥 또한 미래적 하나님 나라 개념을 더욱 자연스러운 것으로 만든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고린도전서 초반에서 바울은 일부 고린도 열광주의자들의 종말론적 성급함, 곧 “과도하게 실현된 종말론”을 경계하고 있다는데 동의한다. 일부 고린도의 성도들은 “이미” 배가 불렀고, “이미” 부유하게 되었으며, 바울이 없이도 “왕으로 다스리기 시작했다”(evbasileu,sate). 여기다 바울은 자신도 함께 왕노릇할 수 있게끔(sumbasileu,swmen) 그들이 정말로 왕노릇하는 것이었으면 좋겠다는 조롱을 늘어 놓는다(4:8). 물론 바울은 이런 열광주의자들의 거창한 언어와 자신의 십자가적 행보를 대조하며 그들의 공허한 영성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물론 이미 “왕노릇하고 있다”는 이들의 자신감은 착각이다. 8절에서 반복적으로 사용된 “이미”(h;dh)는 바울의 비판이 말만 무성하고 실속은 없는 열광주의자들의 공허함 뿐 아니라 그들이 드러내는 종말론적 조급함을 또한 겨냥하고 있음을 강하게 시사한다.12) 바로 이런 비판의 문맥에서 바울은 하나님 나라를 언급한다. 고린도 성도들의 종말론적 조급함을 교정하려는 문맥에서 바울이 현재적 하나님 나라를 들고나올 가능성은 많지 않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에 관한 다른 언급들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가 미래적 상속의 대상임이 성도들에게도 분명한 상식이라면(“알지 못하느냐?” 6:9-10), 여기서 바울이 하나님 나라를 상기시키는 움직임은 쉽게 이해된다. 현재 왕노릇하는 듯이 설쳐대는 열광주의자들에게 하나님 나라는 가리킴으로써, 그리고 그 하나님 나라가 공허한 말이 아니라 참된 삶의 능력을 요구하는 것임을 분명히 함으로써 그들을 경고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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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영역”인가 “통치”인가?


복음서나 바울서신을 막론하고 하나님 나라 개념의 현재적 이해는 basilei,a tou/ qeou/라는 표현을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이 표현이 현재적인 실재를 가리킨다면 여기서의 basilei,a는 “나라”나 “왕국”(kingdom, Reich)같은 공간적 개념보다는 “통치”(reign, Herrschaft)라는 추상적 개념이 더욱 적합할 것이다. 전반적인 학계의 경향은 후자 쪽으로 기우는 것으로 보인다.13) 이러한 흐름은 바울서신의 하나님 나라 개념 해석에도 동일한 영향을 미친다.14)
예수의 윤리와 하나님 나라에 관한 연구에서 Hans Kvalbein은 예수의 설교 속에서 “하나님 나라”는 왕이신 하나님의 위치 혹은 통치 개념보다는 구원의 장소 혹은 구원의 시간 개념으로 이해되는 것이 옳다는 사실을 설득력 있게 논증하였다.15) 그의 연구는 구문론적으로 신약의 하나님 나라 개념이 히브리어 “말쿠트”나 아람어 “말쿠타”보다는 랍비적 개념인 “오는 세대”(olam haba) 혹은 “오는 세대의 생명”(haje olam haba) 등의 개념과 상응한다는 Gustav Dalman의 관찰에서 출발한다.16) 이는 또한 전승사적으로 하나님 나라 개념이 시편 등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통치” 개념과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 전승에 처음으로 나타나는 가나안 땅에 대한 약속과 연결된다는 사실과 잘 맞아 떨어진다.17) “하나님 나라를 상속한다”는 표현이 복음서보다는 오히려 바울서신에 자주 등장한다는 사실을 보면(갈 5:21; 고전 6:9-10; 15:50; cf. 엡 5:5), 하나님 나라 개념에 있어서는 바울과 복음서 사이에 큰 차이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Kvalbein이 복음서를 두고 내린 결론은 바울의 진술들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바울서신의 “하나님 나라”를 하나님의 통치로 번역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통치가 아니라 영역이라고 해서 현재적 개념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 가능성이 훨씬 적어진다.




4. 바울 논증 속의 말과 능력 - 구문론적 고찰


필자가 보기에 4장 20절의 하나님 나라 개념을 미래적인 것으로 해석해야 할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구문론적인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 나라가 evn lo,gw|가 아니라 evn duna,mei라고 말한다. 동사가 생략된 상황에서, 바울이 생각하는 하나님 나라와 말/능력 간의 관계는 분명하지 않다. 문법적으로 우리의 물음은 전치사 의 용법과 관련된다. 여기서 바울의 반제적 표현을 공간적 의미로 해석하면 이 표현들은 하나님 나라가 존재하는(to be) 방식을 설명하는 것이 되고, 수단적 의미로 해석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to enter) 혹은 6장 9-10절과 15장 50절의 표현처럼 “상속하는”(to inherit) 수단/방법을 설명하는 진술이 된다. 물론 이 구절의 하나님 나라를 현재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전자의 입장을 취한다.
20절에서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기 위해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말”과 “능력”은 여기서 처음 등장한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잘 관찰하는 대로,18) 말/능력의 대조는 고린도전서 초반의 논증을 지탱하는 가장 결정적인 반제에 해당한다. 바울이 이 반제를 이전 논증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바꾸고 있다는 증거가 없다면, 우리는 앞에서 이 반제가 기능하는 방식과 본 구절에서 이 반제가 기능하는 방식이 근본적으로 동일하리라고 예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는 본 구절의 정확한 해석을 위한 결정적인 열쇠가 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학자들은 이 부분에 대해 별다른 설명을 제시하지 않는다. 말/능력의 반제에 대한 사상적 연결은 종종 이루어지지만, 이 구절을 주해하면서 서신의 시작부터 현 지점까지 이 반제가 어떻게 활용되어 왔는지를 묻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해 보려는 시도다.


a. 바울의 반제적 논증은 1장 17절에서 본격적으로 나타난다. 세례가 사역자와 성도들 간의 잘못된 관계의 원인으로 작용하는 상황을 생각하며 바울은 그리스도로부터 파송된 자신의 역할이 “세례를 주는 것이 아니라 복음전하는 것”이라고 밝힌다(17절 상). 이어지는 진술은 자신이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했던 방식을 묘사한다.


ouvk evn sofi,a| lo,gou( i[na mh. kenwqh/| o` stauro.j tou/ Cristou/


바울이 복음을 전했던 방식을 설명하는 표현으로서 evn sofi,a| lo,gou는 공간적으로 “말의 지혜에 있다”가 아니라 수단적으로 “말의 지혜를 통해”로 번역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엄밀한 반제 형식을 취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 선포 수단으로서의 “말의 지혜” 곧 “지혜롭게 들리는 말”은19)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대조된다. 곧 바울은 말의 지혜에 의존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선포했다. 이 두 개념이 대조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사람들에게 “어리석음”(mwri,a)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그러니까 “말의 지혜”는 “복음 메시지의 어리석음”과 상반되는 개념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대조가 성립되는 것은 “멸망하는 자들”에게 뿐이다. “구원을 얻는 우리들”에게 이 십자가의 말씀은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가온다(18절).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세상의 지혜가 오히려 “어리석음”으로 판명난다(2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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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지혜의 수단적 기능은 전치사 dia,를 활용하는 21절에서 매우 분명하게 드러난다.


ouvk e;gnw o` ko,smoj dia. th/j sofi,aj to.n qeo,n(
euvdo,khsen o` qeo.j dia. th/j mwri,aj tou/ khru,gmatoj sw/sai tou.j pisteu,ontaj


여기서는 “지혜”와 “복음 메시지의 어리석음”이 하나님 인식 혹은 구원의 수단 혹은 방식으로 제시된다. 이 세상이 “지혜를 통해서는”(dia. th/j sofi,aj) 하나님을 알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복음 메시지의 어리석음을 통하여”(dia. th/j mwri,aj tou/ khru,gmatoj) 사람들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셨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17절), 곧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선포한다(23절).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가 있기 때문이다(24절).


c. 1장 17절부터 시작된 논증이 일반적 논조를 유지했다면, 2장 1-5절의 논증은 자신의 “방문” 곧 자신이 고린도에서 “하나님의 비밀을 선포했던” 때를 구체적으로 회고하는 형식을 취한다. 1절의 진술은 사실상 1장 17절 하반절을 반복한다.


ouv kaqV u`peroch.n lo,gou h' sofi,aj katagge,llwn u`mi/n to. musth,rion tou/ qeou/


바울은 “말의 지혜”로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 따라서 고린도에서 그가 하나님의 비밀을 선포한 것도 “말이나 지혜의 탁월함을 따라서”가 아니었다. 여기서 “탁월함”의 정확한 의미를 두고 시간을 끌 필요는 없을 것이다. 우리로서는 여기서도 “말 혹은 지혜”가 복음 선포의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을 관찰하는 것이 중요하다. 1장 21절의 dia,가 여기서는 kata,로 달라지긴 했지만, 실질적인 차이는 없다. 2-3절은 1절의 진술을 보다 상세히 설명한다. 특별히 3절은 말과 지혜의 탁월함에 의존하지 않았다는 진술에 대한 직접적인 설명이라 할 수 있다. 바울이 고린도인들에게 접근했던 방식은 “약함과 두려움과 많은 떨림 중에서”(evn avsqenei,a| kai. evn fo,bw| kai. evn tro,mw| pollw/|)였다. 물론 여기서의 전치사 구문들 역시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상대했던 방식 혹은 자태를 가리킨다. 바울의 이런 인상적이지 못한 면모는 그가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달리신 것”만을 선포했다는 사실과 대조된다. 물론 이 십자가는 1장 18절과 24절에서 분명히 밝혀진 것처럼,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의 유일한 원천이다. 4절은 바로 이 점을 매우 분명하게 부각시킨다.


kai. o` lo,goj mou kai. to. kh,rugma, mou ouvk evn peiqoi/j sofi,aj lo,goij20)
avllV evn avpodei,xei pneu,matoj kai. duna,mew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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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가 생략되고 주어에 바로 전치사 이 이끄는 수식어가 결합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 구절은 우리의 주제인 4장 20절과 구문론적으로 매우 유사하다. 물론 여기서는 전혀 의미상의 논란이 없다. 두 반제적 표현인 evn peiqoi/j sofi,aj lo,goij와 evn avpodei,xei pneu,matoj kai. duna,mewj가 바울의 메시지가 선포되었던(o` lo,goj mou kai. to. kh,rugma, mou) 방식을 묘사한다는 사실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바울의 말은, 자신의 선포가 “지혜롭고 설득력있는 말에 있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지혜롭고 설득력있는 말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는 것이다. 실제 바울의 선교는 “성령과 능력의 나타남을 통해” 혹은 “성령과 능력을 드러냄으로서” 이루어졌다.
바울이 이런 방식의 선포를 고집한 목적 혹은 결과는 분명하다.


i[na h` pi,stij u`mw/n mh. h=| evn sofi,a| avnqrw,pwn avllV evn duna,mei qeou/ (5절).


동사를 제외하면 이 구절 역시 4절이나 4장 20절과 같은 형태이지만, 재미있게도 여기서는 eivmi동사가 가정법 형태로 나타난다. 이 동사를 “있다”는 의미로 읽으면, “여러분의 믿음이 인간의 지혜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에 있다”로 번역할 수 있다. 물론 이 지혜나 능력을 일종의 영역으로 생각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물론 eivmi는 다양한 의미를 가질 수 있는 동사이며, 따라서 우리가 굳이 “존재한다”는 의미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 여기서도 가장 좋은 지침은 문맥을 살피는 일이다. 위에서 우리가 살핀 것처럼, 바울의 논증에서 인간의 지혜나 하나님의 능력은 신자들의 믿음 자체를 묘사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방식 혹은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는 방식으로 제시되었다. 만일 바울이 믿음을 구원의 유일한 방식 혹은 근거로 제시한다는 판단이 옳다면(15:2; cf. 갈 2:16; 롬 1:16; 10:9-10; 11:20),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이 “인간의 지혜를 통해서”가 아니라 (십자가의 메시지에 의해 매개되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생겨난다는 사실일 것이다.21) 그러니까 요는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성령과 능력을 동반했던 바울의 선포가 이를 듣는 성도들 편에서 또한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이끌어 내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바는 데살로니가전서 1장 5-6절에서의 회고와 유사하다. 여기서도 바울은 자신의 데살로니가 사역이 “말로만”(evn lo,gw| mo,non)이 아니라 “성령과 능력과 강한 자신감으로”(avlla. kai. evn duna,mei kai. evn pneu,mati a`gi,w| kai. ÎevnÐ plhrofori,a| pollh/|) 이루어진 것이라도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역은 성도들 편에서도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들이고”(dexa,menoi to.n lo,gon evn qli,yei pollh/| meta. cara/j pneu,matoj a`gi,ou) 이로써 바울과 주를 본받는 자들이 되는 결과를 낳았다. 바울이 말하는 성령이 결국 하나님의 영임을 생각하면, “성령의 기쁨”은 사실상 “하나님의 능력”과 그리 멀지 않은 개념이라 할 수 있다.




d. 2장 13절




제 1회 한국신약학회 콜로키움
a] kai. lalou/men ouvk evn didaktoi/j avnqrwpi,nhj sofi,aj lo,goij
avllV evn didaktoi/j pneu,matoj(
pneumatikoi/j pneumatika. sugkri,nontej


여기서 동사 lalou/men을 수식하는 반제적 전치사구는 이론의 여지없이 바울의 선포가 이루어지는 방식 혹은 수단을 나타낸다. 앞에서 바울이 말/지혜와 십자가/하나님의 능력을 수사적으로 대조했지만, 사실 바울이 부정하는 것은 말이나 지혜 자체가 아니다. 십자가 역시 “말”(o` lo,goj o` tou/ staurou/)로 선포되고 사람들이 “들어야” 할 메시지이다(cf. 갈 3:2, 5; 롬 10:14). 그리고 인간의 지혜와는 다른 하나님의 지혜(qeou/ sofi,an) 역시 존재하기 때문이다(1:18, 24). 그래서 바울은 이 십자가의 말씀을 선포하고, 성숙한 사람들에게 세상이 깨닫지 못하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한다. 물론 이것이 인간의 말과 지혜와 동일할 수는 없다. 바울이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지만, 바울의 이 선포는 “사람에 의해 가르쳐진 지혜의 말로써”가 아니라 “성령에 의해 가르쳐진 말로써”22) 이루어진다.


5. 말, 능력, 그리고 하나님 나라 - 결론
지금까지 우리는 바울의 복음 선포의 문맥에서 사용된 “말/지혜”와 “능력”의 반제 및 그와 유사한 표현들의 용례를 개관해 보았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구절들을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다.


1:17 ouvk evn sofi,a| lo,gou( i[na mh. kenwqh/| o` stauro.j tou/ Cristou/
1:21 ouvk e;gnw o` ko,smoj dia. th/j sofi,aj to.n qeo,n( euvdo,khsen o` qeo.j dia. th/j mwri,aj tou/ khru,gmatoj sw/sai tou.j pisteu,ontaj
2:1 ouv kaqV u`peroch.n lo,gou h' sofi,aj katagge,llwn u`mi/n to. musth,rion tou/ qeou/
2:4 kai. o` lo,goj mou kai. to. kh,rugma, mou ouvk evn peiqoi/j sofi,aj lo,goij avllV evn avpodei,xei pneu,matoj kai. duna,mewj
2:5 i[na h` pi,stij u`mw/n mh. h=| evn sofi,a| avnqrw,pwn avllV evn duna,mei qeou/


2:13 a] kai. lalou/men ouvk evn didaktoi/j avnqrwpi,nhj sofi,aj lo,goij avllV evn didaktoi/j pneu,matoj(


이들 중 다수는 바울 자신의 사역에 관한 것들이고(1:17; 2:1, 4; 13), 그 외는 사람들의 하나님 인식(1:21), 하나님의 구원(1:21), 혹은 믿음의 산출(2:5) 등과 관련된 진술들이다. 위에서 우리가 관찰해 낸 사실은 위의 진술들에 사용된 말/지혜 및 능력, 그리고 그와 관련된 유사한 표현들이 한결 같이 수단 혹은 방식의 의미로 활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는 바울이 이를 위해 evn(1:17; 2:4, 5, 13), dia,(1:21) 및 kata,(2:1)처럼 수단/방식의 의미를 전달할 수 있는 전치사들을 적절하게 활용하고 있음을 보았다.
하나님 나라에 관한 4장 20절의 진술에서 바울은 이전의 논증에서 핵심적으로 활용된 말/지혜와 능력 간의 반제를 다시금 제시한다. 여기서 제시된 반제와 이전 논증의 반제가 연결되는 것이 분명하다면, 우리는 여기서도 이 반제가 지금까지의 용례와 마찬가지로 수단 혹은 방식의 의미로 활용되었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 물론 하나님 나라 개념이 4장에서 처음 등장한다. 하지만 1-4장 논증 또한 시종일관 구원론적 관점을 바닥에 깔고 있고(가령 3:10-15, 17!; 4:4-5), 하나님 나라는 바울이 종종 활용하는 구원론적 개념의 하나다. 그러니까 이전의 문맥에서 논증 방식의 변화를 상정할 만한 흔적이 없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말과 능력의 반제 역시 지금까지의 용법을 그대로 반영할 것이다. 그렇다면 4장 20절의 진술은 하나님 나라가 “말/능력에 있다”는 것이 아니라 “말/능력을 통해서가”라는 말이 된다.23)


제 1회 한국신약학회 콜로키움
여기서 우리는 의미를 분명히 하기 위해 무슨 동사를 삽입해야 할지 묻게 된다. 복음서의 문맥이라면 아마 “들어간다”는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가령, 마 7:21; 19:24 등). 하지만 바울서신에서 하나님 나라가 “들어가다”와 결합되는 경우는 없다. 위에서 언급된 하나님 나라 구절들은 한결같이 하나님 나라를 우리가 미래에 “상속하는” 것으로 묘사한다(갈 5:21; 고전 6:9-10; 15:50; 엡 5:5; cf. 롬 4:13). 이런 결합은 복음서에서도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면, 아마 바울 특유의 표현인 것처럼 보인다(cf. 마 25:34; 5:5). 그렇다면 여기서도 가장 자연스런 선택은 “상속하다”가 될 것이다. 하나님 나라와 관련된 종말론적 경고가 바울 선교의 한 핵심적 요소였고(갈 5:21), 그래서 성도들에게는 하나의 상식과도 같았다면(6:9; 엡 5:5), 성도들은 이 생략된 동사를 거의 자동적으로 채워 넣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말을 통해서가 아니라 능력을 통해 상속하게 될 것이다.”




오네시모는 노예해방 되었는가?
- 빌레몬서의 주석적 토론과 문화해석학적 통찰 -


김덕기 박사 (대전신대)




I. 빌레몬서의 주석적 쟁점과 빌레몬서의 최근 연구 방향
빌레몬서는 바울이 빌레몬에게 오네시모의 노예 해방에 관해서 무엇을 요청하는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바울이 노예제에 대해서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는지 다양한 주석적 토론이 있어 왔다. 바울이 오네시모를 형제로서 대하라는 권면이 노예로부터 석방(manumission)시킬 것을 의미하였는지, 단지 오네시모와 갈등을 빚은 빌레몬에게 화해를 청탁하게 되었는지, 아니면 노예의 사회적 지위 보다 그리스도인 형제의 지위를 더 중요시 하려는 의도였는가? 구체적으로는, 오네시모가 진정으로 절도죄를 지고 빌레몬에게 손해를 입히고 도망간 노예였는지, 아니면 단순히 주인의 친구인 바울에게 호소하였던 여행 중의 노예였는지, 또는 빌레몬의 골로새 교회가 바울에게 보냈던 노예였는지, 아니면 사실은 오네시모가 빌레몬의 친형제였는지의 문제 등에 관해서 최근 고대 로마의 노예제의 역사적 배경 지식과 주석학적 연구가 다양하게 전개됨에도 불구하고 명료한 해답을 주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한국에서는 전경연, 박익수 박사의 전통적인 주석 형식으로 발표된 것 이외에 가장 최근에 논의된 중요한 논문으로는 김영봉 박사의 “다시 읽는 빌레몬서”(1997)가 있다. 김 박사는 빌레몬의 주석과 관련된 4 가지 정설(빌레몬서가 사적 편지라는 , 오네시모의 주인이 빌레몬이라는 정설, 빌레몬이 도망친 노예라는 정설, 바울이 방면을 요청하지 않았다는 정설)이 설득력이 없다는 칼라한(A. D. Callahan)의 입장을 소개한 적이 있다.하지만 이러한 정설을 아직도 유지하고 있는 입장과 이에 대한 다양한 최근 논의와 그리고 이러한 역사적 재구성과 관련된 바울의 신학적 관점과의 관계가 깊이 있게 토론되지 못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이 글은 고대 노예제의 모호하고 복잡한 성격에 비추어 보면 빌레몬서과 갈 3:28, 고전 7:21-24에 나타나는 바울의 신학이 주석학적(역사비평학적) 문제에 관해서 어떤 답을 주고 있는지 탐구하고자 한다. 바울의 신학은 노예제의 삶의 형식을 극복하는 어떤 궁극적인 문화적 패턴과 삶의 양식의 존재론적 기초를 제공하고 있는가? 바로 빌레몬서는 독자가 어떤 핵심 주제를 텍스트의 역사적 쟁점에서 끌어내어 신학과 연결시킬 것인지에 대한 문화해석학적 논점을 예리하게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특히 최근 신약학에서는 패터슨(O. Patterson)의 고대 노예제에 대한 사회학적 연구와 이에 근거한 기독교의 자유 신학의 재해석과 이러한 연구 결과에 대한 비판적 논평과 성서학에서의 수용에 관한 최근 토론이 홀슬리(R. Horsley)와 칼라한(A. D. Callahan)의 주도 아래 Semeia 83/84(1998)에서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이러한 최근 연구의 결과들과 이러한 토론 이후에 나온 그랜시(J. A. Glancy)와 크로산(J. D. Crossan) 의 정치적 해석과 위의 논의를 비판적으로 평가하고 보다 전통적인 견해를 옹호하는 노르들링(J. G. Nordling)과 중도적 입장을 가진 바클레이(J. M. B. Barclay) 등의 연구들을 서로 비교하면서 토론함으로써 어떻게 빌레몬서의 노예 해방 문제를 새롭게 주석하고, 이에 대한 신학적 근거를 마련할 수 있는지 탐색하고자 한다. 특히 법적·사회적 의미의 노예제 철폐를 주장했다는 해석과 노예와 형제의 신분이 동시에 가능했다는 해석 둘 다의 딜렘마를 해결할 수 있는 바울의 신학적 관점을 제시하고, 이 둘 사이의 간극을 극복할 수 있는 또 다른 문화해석학적 통찰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검토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II. 빌레몬서의 최근 연구 경향에 비추어 본 주석학적 쟁점과 그 해결책
빌레몬서는 노예제도 철폐의 현대적 관심에 어느 정도 부응하고 있는가?바울은 노예제도의 현실을 정면으로 부정한 급진적 혁명론자인가, 노예제도의 체제 옹호론자인가? 우리는 전통적인 견해에 따라 오네시모가 도시 가정의 도망간 가사 노예였기 때문에 바울이 오네시모를 다시 주인에게 돌려보내려 했던 것은 바울이 당시 로마 제국의 근간인 노예제를 비판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변명하기가 쉽다. 당시 로마의 대규모 농경 산업이 노예들의 노동력에 의해서 운영되었던 특이한 고대 노예제 사회였기 때문에, 에센네(the Essenes)와 테라퓨테(Therapeutae) 집단과 같이 고립된 집단 이외에는 다른 어떤 계급이나 종교집단이 섣불리 노예제 사회의 구조를 근본적으로 비판하기 어려웠을 것이다.하지만 우리는 바울이 노예 소유를 정당화하는 유대법(레 25:46)에 따라 노예 오네시모를 다시 그 주인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려 하는 것(12절)은, 오네시모의 도망의 이유가 언급되지 않은 빌레몬의 편지 내용으로 볼 때, 적어도 바울은 주인의 편에 선 것은 아닌지 비판적인 질문을 할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당시에 도망간 노예들이 자신의 운명을 타개하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도망가는 것이라는 점과 주인이 너무 학대하거나 석방(manumission) 조건을 변경하는 부당한 처우로 인해 석방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되었을 때 불가피하게 도망하려 했다는 점을 고려해 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노예 석방은 대부분의 경우 재정적인 보상과 석방 이후의 다양한 경제적 채무관계와 노동의 의무가 수반되었기 때문에 노예제가 유지될 수 있는 역설적 장치였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결국 이렇게 바울이, 노예를 다시 주인에게 되돌려 보낼 수 없도록 한 신 23:16-17과 달리, 주인에게 오네시모를 돌려보내려는 바울의 행위는 노예 석방조차도 로마 제국의 노예제도 유지 자체를 강화하는 역설적 상황에서 주인에게 유리하도록 노예 제도 자체의 효용성을 오히려 강화하는 행위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적어도 빌레몬의 오네시모에 대한 법적 소유권을 침해하는 듯한 오네시모의 도주를 용인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노예제를 인정한 것이 된다.
그러나 바로 위의 노예제에 대한 기독교의 반응의 딜레마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 위의 관점보다 더욱 진전된 새로운 역사적 재구성 방식으로서 오네시모가 도망간 노예가 아니었다는 과격한 관점이 최근에 제기되었다.이러한 역사적 관점은 녹스(J. Knox)의 견해를 다시 재구성한 람페(P. Lampe), 윈터(S. Winter), 칼라한(Callahan)에 의해서 제시되었고, 홀슬리에 의해서 그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윈터는 4-7절의 감사 부분을 철저하게 분석하면서 오네시모가 도망간 노예여서 감옥에 있던 바울을 찾아온 것이 아니라 골로새에 있는 교회가 오네시모를 감옥에 있는 바울에게 보내어 그를 돕도록 배려했다고 추론하게 된다. 윈터의 본문 부분(8-14)의 법정 진술적인 부분에 대한 수사학적 비평에 의하면, 바울은 오네시모를 보내면서 그를 ‘대신해서’ 청탁한(παρακαλῶ σε) 것이 아니라 오네시모 자신을 보내지 않은 채로 ‘오네시모 자신에 관한’(περὶ τοῦ ἐμοῦ τέκνου) 법적 케이스를 그를 보낸 교회보다 더 원래의 소유주로서의 ‘상위 권위’인 빌레몬에게 부탁하였다는 것이다.(10절) 이제 바울은 오네시모가 빌레몬 집에서의 노예 직무에서 해방되어 자신을 계속해서 도울 수 있도록 17과 21절에서는 결국 그를 법적으로 해방시킬 것을 암시적으로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이러한 새로운 역사적 재구성을 넘어서, 특히 칼라한은 우선 16절에서 바울은 오네시모를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16)로 대해 줄 것을 부탁하게 될 때 이미 오네시모가 빌레몬의 친형제로 소개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안에서 상관된 네게랴”(16)는 빌레몬이 도망간 노예가 아니라 잠시 떠난 친형제라는 점을 암시한다는 것이다. 또한 노예라는 단어가 나오는 결정적인 장소(16)에서 “이 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에서 “같이”(ὡς)이라는 단어를 쓰기 때문에 노예의 실제의 상황이 아니라 단지 노예의 잠정적 상황, 즉 오네시모에 대한 빌레몬의 태도와 빌레몬의 눈에 오네시모의 노예와 같은 잠정적 지위를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더군다나 원시 기독교에서의 ‘종’이라는 말은 최고 명예와 존경심과 성자로서의 지위를 갖고 있는 하나님의 종과 비열한 굴욕과 권력 없음과 불명예를 나타내는 노예라는 정반대의 의미를 가진 이중성을 갖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오네시모의 종에 대한 언급(16절)은 노예의 사회적 신분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형성된 하나님의 종을 나타낸다고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위의 새로운 경향의 연구사적 관점에 비추어 보면, 우리는 빌레몬서의 핵심 주석학적 논점들과 이에 대한 재해석의 여지가 가능한 주석학적 견해들을 다음과 같이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빌레몬서의 서사적 구조에 의하면, 오네시모는 노예라는 신분으로 주인 빌레몬과 갈등상태에 있고 이러한 절박한 상황에서 감옥에 있는 바울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바울이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로 돌아갈 것을 종용한 것은 노예의 법적 신분을 해방시키려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노예 소유자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노예제를 찬성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주석학적 판단이 더욱 설득력을 얻는다. 그래서 콘쩰만(H. Conzelmann)은 이러한 비판의 목소리를 이렇게 전한다. “노예를 그의 주인의 예속으로부터 자유케 하지 않고 노예의 신분으로 되돌려 보내는 그의 결정은 (원시-)그리스도교가 처음부터 힘 있는 자의 편이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적어도 바울은 그의 사회정치적인 입장에서 보수적이었다는 것이 분명해진다.”이에 반하여 다른 학자들은 바울이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노예로서 취급하기 보다는 주의 형제로서 받으라고 권면한 것을 보면 바울은 노예제를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그리스도인이 노예를 갖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입장을 넌지시 내비친 것이 아닌지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콘쩰만은 16절로부터 오네시모와 빌레몬 사이의 관계가 주인과 종의 관계에서 주의 형제들 간의 관계로 변화할 것을 요구한다고 해석할 것을 제안한다. 이것은 바울이 갈 3:28절이나 고전 12:13에서처럼 더 이상의 노예(종)와 자유자의 신분의 차이가 없다는 선언에 기초한다. 그러나 바울이 이 16절에서 사회적 관습인 노예제도를 폐지할 것을 주장하기 보다는 법적인 처벌을 하지 않기를 권면한다고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콘쩰만은 노예제 철폐와 같은 이러한 급격한 제도적인 변화를 도모하지 않은 이유를 고전 7:29-31절의 세상의 제도(‘세상의 형적’)나 신분관계의 변화까지도 종말이 임박하였으므로 무의미하다는 바울의 종말론적 신학에서 찾고 있다.
콘쩰만의 견해를 정리하면, 바울이 신분 변화를 요구했지만 이 신분변화는 노예제도 철폐에로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형제 간의 관계로의 변화가 구체적으로 노예 신분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노예 신분은 여전히 유지하지만 형제간의 관계를 새롭게 첨가하는 것인지 불분명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바울이 노예제도를 폐지할 것을 주장하지 못하는 이유로서 제시하는 종말론적 주장이 빌레몬 자체 내에는 존재하는지 또한 있다면 이것이 어떻게 노예 신분에 대한 태도와 연결되는 것인지 더 탐구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쟁점에 대한 최근 논의에서 홀슬리(R. Horsley)는 바울이 빌레몬서에서는 현대적 의미의 노예 해방, 다시 말해서 노예제도의 차원이나 노예사회의 사회체계적 차원에서의 노예해방을 지지하고 있다는 주석적 근거를 직접 찾을 수는 없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최근의 윈터와 칼라한의 빌레몬 현대 해석에서 오네시모가 도망간 노예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을 진지하게 수용하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고전 7:21과 갈 3:28장에서 바울이 결국 노예 해방을 주장하고 있다고 해석한다. 특히 패터슨(O. Patterson)은 노예 제도나 노예제 사회의 차원이 아니라 노예에 대한 도덕적 차원에서 개인적으로 오네시모를 해방시키려 했다는 주석적 통찰을 간략히 제안하였다. 특히 성서학자가 아닌 사회학자로서 패터슨은 바울이 오네시모를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10절)로 자신을 아버지라고 부른 것은 바로 당시에 양자 문화에 비추어 보면 양자 삼는 것은 가장 완벽한 형태의 노예 해방의 의미가 있기 때문에 이미 빌레몬에게 오네시모의 노예 해방을 요청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오네시모를 해방할 것을 노골적으로 말하지 않지만, 여러 가지 암시적인 말 속에서 불법의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가사노예를 보호하고 그에 대한 동등한 차원의 동정심(compassion)을 갖고 해방시키려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주인에게는 유익하지 않았지만 이제 자기에게는 유익한 오네시모 이름에 대한 재치(wit) 있는 바울의 말놀이 사용(11절)은 모든 노예를 비인간적인 도구로 보는 것 자체를 매우 미묘하게 비판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이미 노예 해방을 요구하고 있다고 주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최근에 크로산(J. D. Crossan)은 바울이 여기에서 급격한 평등사상을 제시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원시기독교는 평등사상을 민주주의의 기본권의 평등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라는 가족 개념 속에서 가지려고 하였다. 특히 바울은 동등성을 같은 양을 얻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누구나 자신에게 필요로 하는 것을 충분히 얻는다는 의미에서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당시의 노예제와 관련된 쟁점이, 단순히 노예제 자체를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인 주인이 기독교인 노예를 소유할 수 있느냐의 문제였다는 것이다. 이런 가정 하에 크로산은 바울도 평등의 관념에 의해서 노예를 해방시킬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고 보았다. 그는 14절에서 바울은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자발적으로 석방(manumission)해야 한다고 해석하려 한다. 더군다나 이렇게 오네시모를 석방시키려 하는 것을 의무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할 것을 권고한다는 것이다.(8-9) 또한 크로산은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16)라는 말씀에서 ‘육신’이라는 말이 첨가됨으로써 평등은 단순히 내적이고 영적인 것이 아니라 외적이고 물리적인 것을 나타내게 되기 때문에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노예 신분에서 완전히 벗어난 ‘주 안에서 사랑받는 형제’로서 받아들이기를 원하였다는 것을 입증한다고 주장한다.
크로산의 경우는 주석학적 논증이 약한 단점을 갖고 있다. 예를 들어 크로산은 14절에서 자발적으로 '선한 일'을 할 것을 권면했지, 노예를 해방시키라고 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는 너의 선한 일이 ‘부득불’(κατὰ ἀναγκή) 되지 아니하고 ‘자발적으로’(κατὰ ἑκούσιον)로 되게 하려 함이로라”(私譯: 14절) 이것은 노예를 해방시키냐, 아니냐의 도덕이나 정치의 문제가 아니라 노예를 다시 받아들이냐 아니냐의 자기 성찰적 차원의 윤리적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또한 “육신과 주 안에서”에 대해서도 노예 해방의 의미를 담고 있다는 크로산의 주석은 비약에 가깝다. 16절의 문맥에서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자”라는 표현은 육신과 주 안에서 해방할 것을 촉구하려는 것이 아니라 노예이면서 주의 형제인 것을 당연시하는 무의식적 말투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더군다나 “종처럼이 아니라 종을 넘어서”(私譯: "ουκέτι ὡς δοῦλον ἀλλ’ ὑπὲρ δοῦλον")라는 말은 단순히 ‘종이 아니라’라는 표현 대신 여전히 종의 신분이 유지된다는 것을 전제하고 말하는 것이다.
크로산의 논리 중에 또 다른 문제는 과연 고대에 어느 정도 평등의 관념이 있었겠는가라는 문제이다. 그는 평등의 관념이 가족적 은유를 통해서 형제애를 통해서 나타난다고 하였지만 이 형제애가 가부장제적 측면을 갖고 있다. 더군다나 필요한 것을 얻는 데 있어서 평등하다는 관념의 평등은 노예의 신분을 철폐해야 한다는 사회적 의미의 평등 관념으로 이행할 수 있는 매개 개념이 없고는 결코 이러한 고대의 물질적 재화 요구에 대한 평등 관념이 노예 해방을 가져오는 동기로 작용할 수는 없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게 태어나서 어떤 양도할 수 없는 권리들이 동등하게 부여되었다는 주장은 궁극적으로 현대 계몽주의의 산물일 뿐이다. 고대에는 이러한 개인의 평등한 자유나, 법 앞에서의 평등이나, 노예의 신분을 철폐할 만한 기본권의 평등 개념이 전혀 나타날 수 없다. 고대에는 인간이 육체적으로(남자나 여자로) 불평등하게 태어나거나, 사회적으로(종이나 자유자로) 불평등하게 그 역할이 부여받거나, 그리고 인종적으로(유대인이나 헬라인으로) 불평등하게 소속된다는 생각이 압도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위의 현대적 개념과 유사한 획기적인 기독교의 평등 개념(세례에 의해서 인종적 정체성, 사회적 신분, 젠더[gender] 지위가 평등함을 취하게 됨)에 의해서 노예를 해방시키려 했다는 크로산의 주장은 역사비평의 엄격한 잣대에 의해서 당시의 압도적인 관념과 얼마나 다른지 새롭게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결국 바울이 오네시모를 주인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는 한 바울은 오네시모를 적극적으로 해방시킬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바클레이(Barclay)도 오네시모를 석방하게 되었을 때 다른 노예들과의 형평성이나 교회와 가정과 사업상의 경제적 손실과 실제적인 운영의 불편한 점 등 여러 가지 빌레몬의 입장의 어려움을 알고 바울이 오네시모의 법적 해방을 직접적으로 요청하지 못하였을 것이라고 주장한다.그렇다면 바울은 오네시모에 대해서 노예(δοῦλος: 종)와 주의 형제를 동시에 인정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이러한 가능성의 어려움까지도 이미 바클레이가 제시한 바 있다. 그는 이럴 경우, 형제로서의 상호 교정(갈 6:1), 종으로서의 상호협조(갈 5:13-14, 6:2)와 형제로서의 상호존중(딤전 6:1-2)에 기반한 기독교의 윤리적 가르침과 폭력적 강압과 공포의 기제를 작동시키는 노예제는, 에티켓이 항상 요구되는 일상적인 가사활동의 맥락이나 사회적 역할에 따르는 공공 질서가 요구되는 교회의 공동생활의 맥락에서, 동시에 공존하기 매우 어렵다고 판단된다고 주장한다.그렇지만 위의 견해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충만한 은혜의 메시아적 삶의 방식을 강조하는 신학적 관점(다음 장에서 논의할 것임)을 통해서 바울이 노예 신분과 형제의 소명을 둘 다 포용하면서도 형제의 소명을 더 중요시하였다는 견해를 제시하고자 한다. 필자의 이 견해와 바클레이와의 차이는 결국 신분변화의 정도와 사태를 보는 관점에 있는 것이다. 바클레이는, 신분변화를 요구한 것이라고 해석하였던 콘쩰만과 달리, 당시의 사회사적 관점에서 보면 노예해방이나 노예신분을 유지하면서도 형제로서 대우함으로써 신분의 질적 변화를 도모하는 것 둘 다 결국 당시 고대 사회의 사회적 환경에서는 불편하고, 비참하여 매우 어렵다고 하는 반면, 필자는 신학적 관점에서 보면 결국 노예의 신분은 그냥 유지하는 반면 주의 형제의 신분이 종의 신분보다 더 우월하다고 하는 차원에서 대립과 긴장, 공존을 넘어서 두 신분 사이에는 일종의 창조적 협상이 가능하며 결국 형제라는 신분이 노예의 신분을 질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바울의 충만한 은혜의 메시아적 삶의 방식을 강조하는 신학적 관점에서 바울이 노예 신분과 형제의 소명을 둘 다 포용하면서도 형제의 소명을 더 중요시하였다면 바울은 오네시모를 사랑 받는 형제로 받아들일 때만이 오네시모의 노예라는 사회적 신분을 넘어서 그리스도의 형제애에 기반한 교회의 일치성을 확립할 수 있다는 점을 암시적으로 주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결국 바울 자신도 오네시모를 석방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어찌할 줄 몰랐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모호한 주장을 한 것이라고 상정하는 바클레이의 해석과는 차이가 있다. 그래서 바울은 그냥 주인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자기의 동역자로 머물도록 청탁하였다면 이것이 빌레몬이 오네시모 노예를 은밀하게 석방할 것을 요구하는 표시가 될 것이다. 결국 진정으로 바울은 이 오네시모의 노예 신분 자체를 바꿀 것을 직접 요청하지 못하고 전략적으로 형제의 신분을 우위로 보면서 사실은 오네시모를 다시 주인 빌레몬에게 보내주지만 그가 자신에게 다시 돌려보낼 것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방식의 해석이 노예를 해방하는 것과 노예와 형제의 신분 둘 다를 유지하는 것, 양쪽의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 가장 타당할 것이다.


III. 바울의 노예 석방(manumission)에 대한 입장의 신학적 근거
우리는 그렇다면 왜 바울이 오네시모를 돌려보내고 사랑받는 형제로 용납할 것을 요구하게 되었는지 그 신학적 근거를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위에서 논의한 크로산과 같은 학자들은 바울의 평등주의 사상의 근거를 갈 3:28절과 관련된 갈 3-4장에서 찾는다. 하지만 최근 고대 노예제에 비추어서 갈 3:28절과 3-4장을 면밀하게 연구한 노르들링과 그랜시(J. A. Glancy)는 이를 전면으로 부인하고 있다. 특히 노르들링은 바울이 갈 3:28에서 주장하고 있는 것은 종과 자유자의 신분의 차이가 없어야 한다는 사회 평등주의 선언이 아니라 종족성, 사회적 지위, 젠더(gender)의 외적인 차이들은 기독교인들이 공유하고 있는 일치성을 부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 누구나 세례를 받을 때에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동등한 지위가 부여될 수 있다는 가능성(갈 3:26)의 평등을 확인하고 있다는 것이다.또 다른 한편, 최근 Semeia 83/84에 참여한 학자들은 바울이 빌레몬에서 노예를 해방시키도록 요청한 것이라고 해석하고 그 신학적 근거를 바울의 자유 신학의 구조적 특성을 주목하였다. 예를 들면, 홀슬리와 패터슨은 바울의 신학적 구조에서 죄로부터의 해방은 노예로부터의 해방의 사회적 의미로 재해석되기 좋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마틴(D. Martin)뿐만 아니라 와이어(A. Wire)와 스토워스(S. K. Stowers)가 제시한 데로, 빌레몬서의 주석적 논의, 바울의 오네시모의 노예제 해방의 역사적 가능성, 그리고 바울의 신학적 구도가 서로 일치한다고 단순화시킬 수는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또한 홀슬리와 패터슨에 대한 노르들링의 또 다른 비판은 바로 고대의 노예제가 단순히 사회적 죽음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바로 ‘사회적 삶의 한 형식’이었다는 차원에서 보면 노예제 해방과 옹호의 이분법적 시각 자체가 현대적 관점이라는 비판이 있다.
결국 노예제 자체를 비판하거나 오네시모 자신의 노예 해방을 구체적으로 제안하였다는 역사적 근거가 희박한 이유를 근본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울의 신학을 당시의 배경에 비추어서 포괄적으로 재해석한 스토워스의 논의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그는 당시 시대 배경이나, 바울의 로마제국과 노예제도에 대한 태도, 갈 3-4장의 주석적 맥락, 바울의 위계주의적 창조질서, 바울이 당시 사회적 쟁점을 다루는 패턴을 포괄적으로 논의하면서 바울은 노예제를 철폐하는 평등주의적 사회 관념을 제시하지는 못하였다고 주장한다. 당시에는 한 계급 내에서는 평등을 주장하기는 하였지만 계급을 초월하여 평등주의를 말하기는 스토아 철학에서 사회적 비전을 제시할 뿐 사회적 프로그램으로서 실천하지는 못하였을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이다. 갈 3-4장의 맥락에서 갈 3:28절이 주장하고자 한 점은 노예와 자유자의 신분 자체를 철폐하는 평등주의 이념을 제안한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의해서 하나님의 자녀(아들)가 될 수 있다는 평등의 관념에 대하여 노예인과 자유자, 헬라인이나 유다인, 여자나 남자의 사회적 신분들은 전부 상대화된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갈 3:28, 고전 7:17-24, 12:13에서 바울은 유대인/그리스인, 남성/여성, 노예/자유인이든지 다 한 가족의 아들들의 유비에 기초하여 동등한 권리들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말하지만, 이것이 곧 모든 위계주의적 질서를 끝장내겠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바울은 평등주의적 일치를 말하는 것 같으면서도 노예제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스토워스는 홀슬리나 크로산과 같은 성서학자들의 평등주의 해석이 지나치게 현대적 의미의 非사회적인 자아 관념이나 법적, 경제적, 정치적 귄리의 주체를 설정함으로로써 현대적 의미의 평등 관념을 상정하게 되는 점을 비판한다.
위에서처럼 이제까지 자유와 평등의 문화해석학적 준거틀이 바울의 노예제에 대한 태도를 설명하지 못한다면, 필자는 바울이 제시한 메시아적 ‘삶의 형식’과 노예제의 ‘삶의 형식’을 대조하는 문화해석학의 준거틀에 의해서 바울의 노예제에 대한 태도의 신학적 근거를 새롭게 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하고 싶다. 빌레몬서의 신학적 입장의 핵심 근거에 대한 콘쩰만의 답변과 달리, 고전 7:29-31은 단순히 염세주의적 종말론이 있는 것이 아니라 법이 ‘삶의 형식’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메시아적 종말론’과 이에 근거한 금욕주의 훈련으로서의 메시아적 삶의 양식과 연관된다.그런데 바로 빌레몬에서도 고전 7:29-31절에서처럼 자신의 현재의 노예 신분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사는 메시아적 ‘삶의 형식’을 강조하는 수사학이 나타난다. 14절의 “너의 선한 일이 억지 같이 되지 아니하고(ἵνα μὴ ὡς κατὰ ἀνάγκην)”, 16절의 “이후로는 종과 같이 아니하고”, 17절의 “저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의 세 번의 호스(ὡς)가 고전 7:29-31에서 호스 메(ὡς ~ μή: hōs mē)의 “마치~ 아닌 것처럼”이라는 메시아적 삶의 양식과 수사학적으로 매우 유사하다. 여기에서 이 메시아적 삶의 문제는 특히 자신의 직분에 대한 메시아적 소명/사회적 신분의 문제와 이와 관련된 사용/소유의 문제와 밀접하게 연관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15-16절은 바로 동역자로서의 노예의 사회적 신분/메시아적 소명과 관련된 잠시 떠나는 것/영원히 두는 하는 것, 종과 같이 대하는 것/형제로 두는 것과 소유/사용의 문제와 관련된 오네시모를 노예로서 소유하는 것/노예 오네시모를 사용하는 것의 이분법적 수사학을 통해 신학적 토론을 제시하고 있다.
이때 삶의 형식은 법이 아니라 충만한 은혜의 사건 자체가 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충만한 은혜에 근거한 메시아적 삶의 양식은, 노예의 신분이나 노예제 제도의 외형은 아니더라도, 그 노예 신분과 그 제도의 존재의 근거(raison d'être)와 그 존재의 의미를 없앨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노예의 신분을 유지하면서도 형제로서 대우해야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바울의 신학적 동기는 자신의 사회적 신분을 소유하는데 있지 않고 자신의 사회적 신분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소명을 완수하려는 메시아적 삶에 대한 강조이다. 여기에서 바울이 ‘종의 신분’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도 이를 넘어서는 새로운 차원의 ‘형제의 신분’을 제시하는 사유 구조는 불의를 유도하는 ‘법’과 이를 뛰어 넘어 완성하려는 ‘은혜’를 동시에 제시하려는 그의 신학적 사유 구조와 매우 유사하다. 은혜는 충만해야 전달되는 데 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넘어서 전달된다. 그래서 법과 관련된 모든 정의의 문제는 법을 없애기보다는 무효화시키는 은혜와 관련된다. 예를 들면, 바울이 오네시모의 노예 신분을 인정하지 않는 한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저지른 불의(ἠδικησέν)에 대해서 이를 보상할 필요가 없게 된다. 그러나 바울은 노예의 신분 하에서 일어난 손해에 관해서도 바울은 대신 갚으려 한다.(18-19절) 바울은 노예 신분뿐만 아니라 이 신분 하에 일어난 피해도 인정하였고, 그것을 자신이 갚겠다고 하면서 노예제도의 ‘율법’을 완성하려 한다. 바울은 충만한 은혜로 율법을 완성하는 모양을 ‘연출하려’ 한다. 이러한 모양의 또 다른 예는 바울이 오네시모를 서신에서 전혀 도망간 노예라고 표현하지 않고 ‘하나님의 섭리 하에 잠시 떠나 있었던’(ἐχωρίσθη πρός ὥραν: 15절)<사역> 형제라고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 노예 신분 유지의 문제는 바울의 소명과 자유의 신학적 사유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바울이 더 뛰어난 형제의 신분을 첨가하면서도 노예 신분을 유지하려는 것이 그의 윤리적 태도였다는 것을 입증하는 또 다른 참조 본문은 고전 7:20-22이다: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자유할 수 있거든 차라리 사용하라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자요 또 이와 같이 자유자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여기에서 21절의 “자유할 수 있거든 차라리 사용하라”라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학자들 사이에 다양한 토론이 있게 된다. 최근에 바울의 노예 제도 철폐를 적극적으로 주장하지 않은 신학적 이유에 관해서 최근에 슈넬레(U. Schnelle)는 바울의 자유 개념이 스토아학파의 자유 관념처럼 노예제의 사회적 구조로부터 해방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의해서 법적 구속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내적 자유의 관념(고전 7:21-24)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노예제를 유지하면서도 그 노예의 상황을 근본적인 변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빌레몬서의 신학적 입장이라는 점을 강조한다.다른 한편, 이그나티우스(Ignatius)의『폴리캅에 보내는 서신』4:1-3에 보면 원시기독교에서는 그리스도인 노예를 사들여서 해방시킨 적이 있기 때문에 이 7:21은 자신의 그리스도인의 신분을 사용해서 해방의 기회를 가질 것을 권면한 것으로 해석된다.이러한 해석에서 더 나아가 홀슬리와 칼라한은 바로 고린도 교회에서는 노예 제도 자체를 철폐하는 운동을 일으키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교회들이 서로 연대하여 연보를 거두어서 기금을 만들어서 노예들을 사들여서 노예제도의 실질적 운영을 무력화시켜서 노예들을 자유롭게 하는 해방적 실천운동(emancipatory practice)에 참여했다고 본다.
이런 점에서 위의 최근 원시 기독교의 사회적 실천의 맥락을 중요시하는 해석과 달리, 노예 그리스도인은 자유의 신분을 가지려 하지는 말라고 하면서 대신 주인이 자발적으로 해방시킬 수 있도록 자유의 기회를 가지라고 하는 해석이 있기도 하다.더군다나 발취(B. S. Bartchy)의 철저한 주석적 연구는 자유자는 그리스도의 노예로, 노예는 그리스도의 자유로 살아가는 메시아적 삶의 양식의 역설성을 강조한다. 그에 따르면, 고전 7:17-24의 맥락에 비추어 보면 고전 7:21은, 그리스도인 노예가 해방되기 위해서 자유의 기회를 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노예가 해방되었다면 메시아적 소명과 사회적 신분의 역설적 관계에 기초한 새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따라 그리스도의 노예처럼 살아야한다고 권면하고 있다는 것이다.그래서 우리는, 위의 몇 가지 해석들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노예 신분을 근원적으로 철폐하려 하기 보다는 이 노예로서의 소명을 충분히 사용하여 실질적으로는 이 신분의 의미를 해체하라고 명령하시고 있다고 해석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마치~ 처럼”(ὡς: 14, 16, 17)과 마음(σπλάγχνα)의 교제(κοινωνία: 6, 7, 12, 20)로 표현되는 메시아적 삶의 양식이 구체적으로 형제애의 코이노니아(연대성)를 어떻게 형성하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바울은 자신의 영적 아들이 된 개종한 노예 오네시모를 단순히 주인에게 돌려보낸 것이 아니라 빌레몬이 자발적으로(14절의 ὡς) 다시 그를 자신에게 돌려보내는 일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오네시모의 형제됨을 토대로 바울과 빌레몬이 서로 그를 보내고 영접함으로써 형제애의 코이노니아(연대성)의 삶의 양식을 서신에게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노예 신분이 아니라 바울과 같은 형제로 받아들인(17절의 ὡς) 후에 다시 자발적으로 그를 바울에게 돌려보낸다면(16절 ὡς) 오네시모를 해방시키거나 노예 신분 자체를 철폐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주의 형제애의 연대감을 통해서 노예 신분 자체의 의미를 해체함으로써 메시아적 삶의 양식에 기초한 공동체를 확립하게 된다.또한 이제 선을 통해서 그리스도에게까지 미치는 믿음의 교제(κοινωνία)(6절), 빌레몬과 성도들의 마음(σπλάγχνα)의 평안을 누리는 교제(7절), 갇힌 중에 빌레몬 대신 자신을 섬기는 바울의 ‘심복’(σπλάγχνα) 오네시모를 통한 빌레몬과 교회와의 교제(12절),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바울의 마음(σπλάγχνα)의 평안의 교제(20)가 이제 형제애의 연대감을 형성하게 된다. 이러한 형제애의 연대감은 결국 사회적 지위로서의 노예와 형제로서의 메시아적 소명이 충돌하는 갈등을 구체적으로 해결하게 된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이것은 오네시모의 교환뿐만 아니라 상호 빚을 갚는 물질의 교환도 바로 형제애의 연대감을 형성하게 된다.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지은 경제적인 빚은 바울이 직접 방문하여 갚을 것이라고 말하는 반면, 빌레몬이 바울 자신에게 진 믿음의 빚에 대해서는 오네시모를 다시 보내줌으로써 그 빚을 갚기를 원하게 된다.(19절) 이러한 약속과 그 실천의 기대는 빌레몬이 바울에게 행해야 할 섬김의 봉사를 오네시모가 대신할 것이라는 역할의 교환에 대한 13절의 언급과 연결된다; “저를 내게 머물러 두어---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13절). 또한 21절에서 오네시모를 자신에게 돌려보내 줄 것을 다시 한 번 암시하게 된다; “---네가 나의 말보다 더 행할 줄을 아노라”(21) 이처럼 바울은 자신의 매임 속에서 오히려 오네시모의 도움으로 자유롭게 되고, 오네시모는 바울의 중재를 통해서 신분상 노예로서 매여 있지만 형제로서 빌레몬에게 진 빚에서 자유롭게 되어 그의 주인과 화해할 것을 기대하게 된다. 오네시모는, 여전히 노예의 신분을 갖고 있지만 이제 빌레몬의 파송에 의해서 자유롭게 된다면, 빌레몬에게 진 빚의 메임에서 벗어나 바울을 섬기는 그리스도의 종의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빌레몬은 오네시모를 형제로서 용서하고 그를 바울에게 돌려보내어 바울을 섬김으로써 그의 주인 됨에도 불구하고 주의 종 됨을 실천하게 된다. 이제 이들 세 사람 모두는 자유자는 그리스도의 노예가 되고, 노예는 그리스도의 자유자가 되는 역설적인 방식의 메시아적 삶(고전 7:21-24)을 형제애의 연대감 속에서 실천하게 되는 것이다.


IV. 결론: 빌레몬서의 메시아적 삶의 양식에 대한 문화해석학적 통찰
우리는 위에서 최근 노예제와 신약성서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연구 경향에 비추어서 몇 가지 논점이 되는 구체적인 성서 구절을 주석하고, 과연 바울이 노예해방을 지지했는지, 노예제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갖고 있었는지 단도직입적으로 물음으로써 이에 대한 최근 학자들의 견해들과 토론하였다. 이 과정에서 필자는 특히 빌레몬서의 주석적 논점과 연관된 역사적 문제가 어떻게 바울의 메시아적 삶, 은혜의 충만함, 형제애의 연대감(κοινωνία)의 신학적 입장과 연관되어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는지, 그리고 고대의 노예 문화 코드가 어떻게 해석학적 관점에 의해서 새롭게 신학적 문제와 연관될 있는지 논의하였다.
바울이 빌레몬서에서 제시하는 노예/주인의 역설적인 메시아적 삶이란 고대 철학자들이 추구하는 철학함의 삶의 양식처럼 어떤 공동체가 추구하는 영성 훈련의 방식으로서 참과 앎을 삶으로 실천하는 윤리적 삶의 장이다. 이러한 고대의 철학과 종교의 윤리적 실천의 장에서는 논리적 추론보다 앞서는 함께 사는 삶의 양식이 다시 아름다운 서간체와 같은 문서를 창출하게 되고, 이는 다시 이를 읽음으로써 자기 성찰의 초대가 일어나는 문화적 형태를 가진 메시아적 삶의 공동체를 구성하게 된다. 고대철학이 단순히 철학적 사유 자체만이 아니라 삶의 양식이었다는 점은 사실 기독교 윤리의 초점도 단순히 믿음의 문제만이 아니라 삶의 양식이었다는 점과 연관된다.
무엇보다 우리는 빌레몬서가 오네시모가 해방되었는지 침묵한 것은 빌레몬서의 상징과 연관된 은유(metaphor)로서 지식을 유발하기보다 독자가 실천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자리였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근원적으로 바울의 노예 해방에 대한 연구자들의 역사적 지식의 한계는 우리의 실천을 유발하는 보다 근원적인 신학적 사고를 요청한다. 이러한 침묵의 은유뿐 아니라, 3 번의 ὡς(14, 16, 17)와 3번의 마음(σπλάγχνα: 7, 12, 20)과 믿음의 교제(κοινωνία)(6)도, 노예제의 해방과 非해방의 이분법을 넘어서, 고전 7:29-31의 ὡς ~
μή에서처럼 급격한 영적 훈련과 영적 친교와 관련된 메시아적 삶의 창조적 패턴의 하나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바울은 마치 비밀 결사대의 게릴라처럼 정말 말하려고 하는 말을 침묵의 형태(은유와 상징)로 제시하면서, 독자가 암호해독을 통해 그 메시지를 찾아내어 자발적으로 메시아적 삶을 실천할 수 있도록, 치밀하게 독자의 자리를 마련하게 된다.
결국, 빌레몬서에서 바울은 노예를 해방시키든지 유지하든지 양쪽의 딜레마에 빠진 상황에서 비상한 지혜로 형제애의 연대성에 기초한 메시아적 삶의 방식을 제안함으로써 노예제의 한계를 나름대로 극복하려 한다. 이러한 문화해석학적 입장은, 삶의 딜레마의 해결점이 은유와 상징으로 표현되거나 역사와 신학의 간극에서 개념으로 생성되어 나타나나게 되는, 주석적 쟁점들을 해결하는 새로운 준거틀을 제공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성서의 역사적 배경과 그 주제가 서로 충돌하는 해석의 갈등이 형제애에 근거한 메시아적 삶의 양식을 통해서 해결되었다는 문화해석학적 관점은, 이제 바울의 노예에 대한 은유가 현대의 노예제를 지지하는 이데올로기로 잘못 활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가 노예의 은유를 사용함으로써 노예 도덕을 유포시켰다는 니체(F. Nietzsche)의 ‘의심의 해석학’의 도전 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도록, 그 실천의 중요성을 더욱 발전시킬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오늘날 우리 한국에서도 기독교의 노예 도덕에 대한 격렬한 비판에 직면하여 위에서 제시한 문화해석학적 통찰은 결국 기독교의 은유와 상징에 내재해 있는 노예제와 그 예속문화를 정당화하는 노예 도덕의 관념을 진정한 의미에서 비판적으로 극복할 수 있게 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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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코-로마 시대의 후원자-피보호자 관계(patronage)와 빌레몬서


왕인성 박사 (부산장신대학교)




I. 후원자-피보호자 관계 개요
오늘날에는 이론적으로 그리고 이상적으로는 재화에 대한 접근이 만인의 보편적 권리로 간주되지만, 그레코-로마 사회에서는 한정된 재화에 따른 불평등한 지위와 권력의 집중이 당연하던 것으로 여겨졌고 수직적 사회구조(황제-원로원-기사계급-지방자치귀족 계급-평민-해방 노예-노예)안에서 그 재화를 함께 나누고자 하는 방편으로 생성된 제도가 patronage 혹은 clientage로 불리는 후원자-피보호자 관계였다.
이 제도의 기본적 틀은 지위와 권력의 관점에서 혹은 경제적으로 우위에 있는 후원자(patron)와 보다 열등한 위치에 있는 피보호자(client) 사이의 재화(goods)와 봉사(services)의 상호교환을 통한 의존적 관계이다. 초기 로마 시대와 그 이전에는 일종의 소작 형태의 땅과 관련한 관계가 주를 이루었으나 도시화가 되면서 후원자-피보호자 관계는 다양한 양상으로 삶의 전 영역으로 확대 되었다. 즉, 후원자는 피보호자에 대해 은혜(grace 혹은 favor)로 표현되는, 음식, 재정적 지원, 신체적 보호, 승진의 기회, 법률적 도움 등을 부여하게 되며, 반대급부로 피보호자는 후원자의 명망과 명예를 공적으로 그리고 사적으로 증진시킬 목적의 다양한 의무를 감당함으로 보은(報恩)하는, 자발적인 장기간에 걸쳐 진행되는 비공식적 그리고 수직적 우호 관계를 지칭한다. 비록 자발적 관계이지만, 개인 간의 연고에 기초한, 생존의 필요에 의해 생성된 관계였기에 강한 결속력(solidarity)을 지녔고 개인의 의무와 명예가 어우러져 상호간 정신적/물리적으로 구속력을 갖고 장기간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일생동안 지속성이 요청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레코-로마 세계의 후원자-피보호자 관계를 단순히 인간의 영역으로 국한시켜서는 안 된다. 한편, ‘은혜,’ ‘은사,’ 그리고 ‘보상’과 같은 신약성경에 나타난 후원자-피보호자와 연관된 용어들은 기독교 사상을 처음 접하게 된 당시의 그레코-로마 사람들에게는 종교적 개념이 아닌 일상적 어감으로 다가왔을 가능성이 크다. 말리나(Malina)에 의하면, 1세기의 구어체 헬라어에서 구원(salvation)이라는 용어는 종교적 이미지보다는 자신과 가족들에게 닥친 환난과 경제적 어려움 등, 구체적인 삶의 곤경으로부터의 벗어나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이 사실이 구원이라는 개념 속에 종교적 심상이 전적으로 배제됨을 의미하지 않는다.
1세기 지중해 지역 사람들은 인간관계 외에도 삶의 제 분야에 영향을 미치는 비인간적인 요소들이 함께 사회구조를 형성한다고 믿었다. 즉, 농사에 필요한 날씨의 문제, 건강, 생명, 때로는 정치적인 권력들도 인간의 범주를 벗어나 초자연적 존재들에게 귀속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신들과 그들의 대리자들-영들, 귀신들, 천사들-이 세상의 창조, 유지, 조절, 그리고 지배에 관여하기에, 사회생활의 영위와 삶의 목표를 성취하는 일에는 신적 존재들의 도움이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리하여 이 인간사회와 초자연적 세계를 아우르는 사회 구조의 정점에는 절대 후원자로서의 지고의 신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후원자-피보호자 관계는 신적인 영역으로까지 확대된다.
부연적으로 그레코-로마 시대의 후원자-피보호자 관계는 비단 생존과 관련한 경제적 측면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스승의 충고와 건전한 교훈들 역시 후원자의 덕성에 근거한 큰 은혜로 간주되었다. 그리하여 세네카는 후원자가 제공하는 도움에 대해 “사람을 어떤 이는 돈으로 돕고, 어떤 이는 신용으로 도우며, 어떤 이는 영향력으로, 충고로, 혹은 건강한 교훈으로 돕는다”(Seneca, Ben. 1.2.4)라고 했다.


II. 후원자-피보호자 관계와 빌레몬서 그리고 연계된 도전적 질문들


1. 바울은 급진적 혁명론자인가 노예제도의 체제 옹호론자인가?








2. 빌레몬은 바울의 권고를 받아들이고 오네시모를 해방하였는가?


1) 후원자: 바울 vs. 피보호자: 빌레몬


2) 중개자(mediator 혹은 broker)로서의 후원자: 바울 vs. 피보호자 오네시모












3. 오네시모는 과연 해방을 원했는가?
(6쪽: “이러한 해석은 결국 바울 자신도 오네시모를 석방해야할 지 말아야할 지 어찌할 줄 몰랐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모호한 주장을 한 것이라는 바클레이의 해석”에 대한 후원자-피보호자 관계적 접근)










성만찬의 사회문화적 성격
– 1세기 그레코 로만 세계의 식사문화를 통해 살펴본 고린도의 성만찬 –


유은걸 박사 (연세대학교)




I. 들어가는 말: 성만찬에 대한 사회문화적 고찰의 필요성


고린도 교회의 성만찬 논쟁은, 떡과 포도주의 의미에 대한 것이라기 보다 교회가 이를 어떻게 실천하는지에 대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고전 11:23-26의 성만찬 전승 자체는 부인되지 않는 정황이며, 바울은 자신이 전수한 전승을 재확인하고 있을 뿐이다(참조 고전 11:2,17,23).바울이 비판하는 성만찬의 그릇된 관행은 당시 그들이 어떤 식사문화를 가졌는지를 파악할 때에만 이해가 가능하다. 예컨대 고린도인들이 모여 있는 동안에 어떻게 부유한 사람은 먼저 음식을 먹을 수 있었는가? 또 성만찬에서 음식이 모자랐던 이유는 무엇인가? 바울이 논쟁의 대상자로 삼는 대상을 적극적으로 규명하기 위하여 이 같은 논의는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II. 고린도 성만찬의 형식


1. 그레코 로만의 만찬 형식


고전 11:20-22을 보면, 성만찬이 아직 독립된 ‘의식’(儀式)으로 굳어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하는 자리가 일반 식사와 뒤섞여 모든 교회의 구성원이 참여할 수 없다는 점에서도 이 점은 두드러진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만찬이 거행되는 고린도 교회의 식사장면을 그레코 로만의 식사문화 안에 위치시킬 필요가 있다.


① 前식사 (primae mensae)
– 신들을 부름
- 전식사 (cena/ δεῖπνον/ primae mensae)
② 本식사 (secundae mensae)
- 희생제물로 가정이나 황제의 수호신을 부름
- 본식사 (흔히 처음으로 참여하는 손님들이 함께 함)
- 선한 정령(ἀγαϑὸς δαίμων)을 위해 섞지 않은 포도주를 마심
- 항아리에 포도주를 섞음, 헌주(獻酒), 노래
- 음주, 대화, 음악, 노래; 가벼운 오락


2. 만찬에 대한 추가설명


헬라와 로마의 식사 문화는 위의 예에서 거의 차이가 없다. 저녁 식사(cena; δεῖπνον)는 흔히 9시경(Ad Fam 9:16:1;Hor.,Ep1:7:71;Martial4:8:6등) 열렸고 바쁜 사람은 1시간 정도 뒤에 참여할 수 있었다. 식사는 종종 종교적 의식과 관련되어 있었다. 위의 표에서 예시되었듯이 희생제물을 드리기는 했지만, 엄숙한 의례와는 거리가 있었다. 식사 시간 내내 술을 마셨고 대화와 노래가 끊이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고대 헬라 세계에서 식사는 단합을 꾀하는 자리인 동시에, 외부인을 집단 안으로 초대하는 행사였다(cf. Plato, Symp 212 CD; 223 B; Zen. Ep. 2:46).몇몇 주석가들은 고전 14:7의 악기와 14:26의 찬송도 이런 식사 겸 예배의 형태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본다(Lampe, 189). 우리는 최소한 1세기 그레코 로마의 식사 관습이, 단순히 한가지 목적만을 갖고 있지는 않았음을 추론할 수 있다. 이곳에는 종교적, 경제적(e.g. 고전 8장), 사회친교적인 여러 요소들이 있었다. 적어도 외형상 기독교의 식사모임은 동시대의 ‘향연’과 근본적 차이를 드러내는 것은 아니었다.


III. 고린도 성만찬의 문제


1. 고린도 교인들의 사회적, 경제적 지위에 따른 불균형


위의 그레코 로만의 식사문화를 살펴보면, 11장에서 왜 부유한 교인들이 먼저 배불리 먹고 취할 수 있었는지가 이해된다. 이들은 자신이 가지고 온 식사(ἴδιον δεῖπνον)을 공동의 secundae mensae를 위해 내놓았으나 그 이전에 자신들이 먹을 수 있었다(11:21).고린도의 상류층이 먼저 모임에 참여할 수 있었고, 하류층(가령 노예들)은 늦게 모임에 올 수 밖에 없었다는 몇몇 주석가들의 추론(Klauck)과 상관없이, 본식사(성만찬) 중 음식이 고루 분여(分與)될 수 없었던 데에는 사회, 경제적 요인이 있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구체적인 부분에서는 견해가 엇갈린다. 11:21의 ἐν τῷ φαγεῖν는 성만찬 중 부유한 멤버들이 자신의 몫으로 내놓은 음식을 먼저 먹은 것이라는 해석이 있는 반면(Theißen, 189), 이 식사 행위를 primae mensae로 이해하여 성만찬 이전에 특정 부유층이 몸소 가져온 음식을 먹는 바람에 성만찬시 모두에게 돌아갈 음식이 모자랐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Lampe, 194).


우리의 본문에서 분명한 것은 τὸ ἴδιον δεῖπνον에 대한 주인의 권리가 문제되고 있다는 점이다. 11:20-22에서 우리는 각기 집에서 가져온 음식을 나누고, 그것을 토대로 성만찬을 거행했다는 점을 추론할 수 있다. 문제는 바울의 가르침(참조 11:2,23)에도 불구하고, 공동의 식사로 가져온 ἴδιον δεῖπνον에 대하여 부유한 그리스도인들이 여전히 그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여 먼저 먹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음식에 대한 문제가 본문의 핵심 주제가 되고 있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의 본문 고전 11:17-34는 – 성만찬 논란을 기화로 – 단일하게 공동체의 ‘하나됨’을 다루고 있는가(참조 10:17)?본문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고린도인들이 경제적 요인으로 분열된 것을 지적하고 교정하는 내용은 도리어 산발적으로 등장하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참조 20-21, 33절). 정작 바울이 염려하는 것은 ‘판단’의 문제로 부각된다(참조 31-34절). 바울은 어떠한 이유에서 이 두 가지 논점을 동시에 다루고 있는가?




2. 고린도 지역민들의 참여


앞서 언급한 대로 그레코 로만의 식사는 외부인을 초대하는 기회로 작용했다. 이 점은 얼마나 고린도의 성만찬에 적용되는가? “먼저 너희가 교회에(ἐν ἐκκλησίᾳ) 모일 때에”라는 어구는, 성만찬이 소위 폐쇄된 특정 공간에서 그리스도인들만이 운집한 채 거행되었으리라는 손쉬운 추정을 뒷받침하지 않는다(Garland, 536). 이 말은 ‘모임’ 자체를 가리키는 말로서(참조 14:19,23,28,35),불신자들이 참여했을 가능성을 배제하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 예를 들어보자. 고전 10:27은 고린도인들이 지역의 비그리스도인들이 제공한 식사에 초대를 받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10:21은 이 불신자들이 그리스도인들의 식사에 함께 했음을 추론하게 해준다. 더욱 의미심장한 것은 14:21-25에서 불신자들이 고린도의 예배에 함께하고 있음이 암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14장에 따르면 방언은 불신자를 위한 것이고 예언은 믿는 자를 위한 것인데(14:22),교인들이 모두 방언으로 말하면 불신자들이 이들 모두가 미쳤다고 말할 것이라 한다. 만일 고린도의 예배가 외부인에게 단절된, 그리스도인들만을 위한 폐쇄적인 모임이었다면, 어떻게 이 외부인들은 방언 현상 자체를 의아하게 생각할 수 있었겠는가? 이것은 우리의 본문에도 공히 적용되는 부분이다. 고린도 교회의 성만찬이 부유한 사람들 위주로 시행되는 것에 대해 바울은 세상이 판단할 것을 근심한다(11:32,34).이것은 그레코 로만 식사 문화에서 언제나 그러했듯이 다양한 지역민들이 만찬에 초대받아 있음을 상정해야 납득할 수 있는 내용이다.


이런 배경에서 우리는 11:27-32의 난해한 구절을 해석할 수 있다.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ἀναξίως)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는 27절은 성만찬을 사회 계층과 차별없이 시행해야 한다는 22절의 내용과 직접적으로 상응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바울이 27절 앞에서 재확인한 성만찬 전승(23-26절)이 성만찬의 시행 방법을 훈시하고 있지 않을뿐더러, ἀναξίως의 어근을 구성하는 ἄξιος는 기본적으로 ‘자격’을 나타내는 말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바울 연구에서 이 ‘합당치 않은 조건’을 고린도 교회 내부의 음행자(e.g. 5장)등과 연결짓는 것은 거의 포기된 가설인 만큼, 무엇이 바울의 근심을 일으켰는지를 물을 필요가 있다. 중요한 것은, 전술한대로 바울이 27절의 ὥστε를 통해서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행위를 바로 앞의 성만찬 전승(23-26절)과 관련 짓고 있다는 점이다. 바울은 이 전승을 통해 성만찬의 근본목적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하고 선포하는데 있음을 분명히 한 것이고, 이 맥락 하에서만 27-28절의 내용은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바울의 비판대상을 성만찬에 무질서하게 참여하며 다른 교인들을 고려하지 않은 인물로 상정한 슈라게의 추정은 빗나간 것이다(Schrage, 48). 도리어 27-28절은 불신자로서 성만찬에 초대받은 고린도의 지역민으로 보는 편이 타당하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신앙으로 공유하지 않은 채 일반 식사의 대상으로 격하시킴으로써 주의 몸과 피에 죄를 지은 것이다. 이 맥락에서 ‘사람은 스스로를 살피라’(δοκιμαζέτω δὲ ἄνϑρωπος ἑαυτὸν)는 명령도, 각자가 23-26절에서 제시된 전승의 의미를 숙지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인지를 확인한 후 성찬에 참여할 것을 권고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참조 Did 9:5).


같은 연장선상에서 29절의 내용을 해석할 수 있다.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μὴ διακρίνων τὸ σῶμα) 먹고 마시는 자”에서 개역개정과 새번역이 ‘분별하다’로 옮긴 διακρίνω 동사는 본래 ‘구별하다’(make a distinction, BDAG)라는 뜻을 지닌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이해하듯 τὸ σῶμα가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하고, 나아가 공동체를 구상화하는 ‘몸’으로 해석된다면(고전 6:13,15),이 때 바울이 비판하는 대목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몸’을 구별하지 못하고 관행처럼 주의 만찬에 참여하는 것은 스스로 ‘심판’(κρίμα)를 먹는 것이다. 신앙 없이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것을 ‘심판’이라 표현한 것은 바울의 구원론을 이해할 때 잘 설명된다. 바울에게 있어 구원은 하나님의 판단으로부터 정죄받지 않는 것임을 말한다(참조 고전 5:13;롬 8:1,33).이에 따라 교회는 세상의 판단을 뛰어넘은 존재이다(고전 4:3).기독교 공동체가 세상으로부터 ‘판단’받는 것을 바울이 꺼린 것은 고전 6장에서도 이미 잘 예증되었다고 할 수 있다.


3. 분열의 요구?


고린도 교회의 문제에 대한 바울의 대응은 좀 더 논의될 필요가 있다. 성만찬에 관한 한 바울의 반응은 고전 1장에서 고린도 교회의 분열을 꾸짖는 것과는 매우 다르다. 1:11-13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 안의 세례에 관한 분쟁을 교정하고자 한다면, 11:19절의 내용은 매우 이례적이다. δεῖ γὰρ καὶ αἱρέσεις ἐν ὑμῖν εἶναι, ἵνα καὶ οἱ δόκιμοι φανεροὶ γένωνται ἐν ὑμῖν (검증된 사람이 여러분 중에 분명해지기 위하여 여러분 중에 분쟁이있어야합니다). 11장의 주제가 ‘통합’의 기능을 수행하는 ‘성만찬’에 관한 것이라는 점을 상기하면 이 진술은 더욱 특기할 만하다. 더욱이 주석가들이 동의하듯 11:20-22,33이 성만찬이 분열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에 대한 바울의 불만을 반영한다면 11:19은선뜻이해가되지않는다.


이 점은 앞에서 논했던 사항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해결 가능하다. 바울은 성만찬이 갖고 있는 ‘통합’과 ‘구분’의 기능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것은 그에 대한 신앙없이 떡과 잔을 나누는 것을 용인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교회 외부와의 단절을 의미한다. 결국 19절은 성만찬에 고린도의 지역민들이 참여하고 있다는 가정 하에서 충분히 설명된다. 성만찬은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신앙적 근간으로 삼는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로 묶는 ‘통합’의 역할을 수행하며, 그 밖의 세상과는 구별한다(32절). 바울은 이를 위해서 primae mensae를 성만찬과 구분하도록 권고함으로써(참조 11:22,34),성만찬이 독립된 예전으로 자리잡게 했다고 할 수 있다(참조 Did 10:1).


IV. 나오는 말


본 발표는 고린도의 성만찬에 대한 기존의 연구 방향, 곧 부유한 그리스도인들이 가난한 그리스도인들을 고려하지 않고 먼저 음식을 먹었다는 내용을 거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논쟁의 또 다른 배경으로, 불신자 고린도인들 역시 만찬에 초대받은 정황을 새로이 주장하고자 한다. 가난한 이들이 먹을 것이 없어 주의 만찬 중 굶주리는 모습은, 이들 고린도 지역민에게 판단 받을 만한 빌미를 제공했다(11:34).‘식구’(食口)라는 우리 말이 잘 시사하듯 고린도 교회의 식사는 공동체의 통합과 하나됨을 가장 적극적으로 나타내는 말이나, 실제로 분열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고린도 그리스도인들의 통합을 강조하는 동시에, 고린도 지역민들이 식탁교제에 참여하더라도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나누는 성만찬에서만큼은 구분되어야 함을 역설한다. 성만찬은 일반식사가 제공하는 바 단순 교제를 넘어,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선포하는 의식으로 치러져야 함을 분명히 함으로써 이 의식이 독립된 의례행위가 되도록 했다는 점은 바울의 공헌이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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