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아서에서의 광야 전승의 기능
김회권 교수
Ⅰ. 들어가는 말
일찍이 18-19세기 유럽의 종교사학파 학자들은 낭만주의, 진화론, 헤겔의 정신진화론적 철학의 영향으로 구약성경의 종교를 원시적 정령신앙에서 윤리적 유일신신앙으로 진화된 종교라고 규정했다. 이들은 모세 시대의 종교는 비록 정경적 순서에 있어서는 예언서 앞에 배치되어 있고, 또 연대기적으로도 예언자 종교보다 앞선 시기를 반영하는 종교로 배치되어 있으나 실은 예언자들의 윤리적 유일신신앙이 이스라엘 구약 종교의 절정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들은 모세 오경이 말하는 근본적이고 토대적인 종교나 율법체제는 포로기 이전의 이스라엘 사회를 규정한 종교체제의 일부라기보다는 포로기 이후 유대교를 창시하는 종교체제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런 학자들의 주장은 시대정신에 의해 성서주석이 얼마나 크게 영향을 받을 수 있는가를 예증한 주장으로 견고한 성서주석학자들의 예리한 귀납적 주석작업에 의해 지속적으로 비판당해 오고 있다. 이 글은 이런 종교사학파적인 이스라엘 종교 이해에 대한 비판적 연구로서 주전 8세기 북이스라엘 예언자 호세아의 예언에 대한 주석적 연구다.
호세아서는 주전 8세기 북이스라엘의 예언자 호세아의 예언을 집성한 집성물로서 북이스라엘 왕국 말기의 정치적 종교적 혼란과 격변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이 예언서는 북이스라엘 왕국의 정치적 종교적인 일탈과 타락을 야웨와 이스라엘이 맺은 혼인계약의 파기라고 본다. 야웨와 이스라엘의 혼인적 관계(이스라엘의 남편이요 主로서 야웨와 이스라엘의 계약)를 전제하고 그 혼인관계가 파괴된 상황을 탄핵하고 있는 것이다. 모두 14장에 걸쳐서 예언자는 이스라엘과 야웨 사이에 있어야 할 혼인관계의 파괴상황을 규탄하며 그 원인을 다른 남자들(情夫)을 따라간 이스라엘의 음행에 돌린다.1)
호세아가 당대의 종교제의, 왜곡된 야웨 예배제의와 급격하게 단절할 수 있게 만든 원천은 이스라엘의 초기 전승, 특히 출애굽 전승에의 호소였다. 이 출애굽 전승은 엘리야에게 남아있었던 전승으로 남왕국보다는 북왕국에 더 생생하게 남아있었다. 호세아는 이스라엘의 존재(이스라엘과 야웨의 관계의 기초)는 애굽에 있었을 때(11:1; 12:13), 광야에 있었을 때(9:10; 13:5; 비교. 2:10) 이미 야웨와의 계약 관계에서 확정되어졌다는 점을 강조했다. 외형주의화되어 있는 당시의 야웨 예배, 조작적 예배 분위기에 맞서서 호세아는 인격적인 관계, 친밀한 앎을 기반한 자발적인 순종과 사랑(11:1의 아버지와 아들 관계; 2장의 남편과 아내 관계)의 관계를 역설했다. 광야시절에 야웨의 인격적 투신을 동반한 전폭적인 사랑이 이스라엘을 향하여 쏟아졌다는 점을 주목하며 신(新)광야시대를 주창한 것이다(’āhab: 11:1; 비교. 14:5).2)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가나안의 풍요를 경험하면서부터 이스라엘은 야웨 하나님께 의존하지 않고도 독자적인 국가적 생존의 길을 개척해 갔다(13:5; 비교. 9:10; 10:1-2, 11-13). 외교와 국력, 경제력과 관료조직, 왕과 군대 등이 국가공동체의 중심요소들로 부상한 것이다. 이런 탈선과 배도의 결과 국가적 멸망이 초래되었으며 이 국가적 멸망 너머에 준비되고 기획된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예고와 선포가 호세아의 핵심메시지였다.
이 글의 목적은 두 가지다. 첫째, 그것은 호세아에서 광야전승에 대한 직간접적인 언급이나 암시를 찾는 것이다. 둘째, 그것은 8세기 문서 예언자들, 특히 호세아의 예언의 선험적 근거인 ‘모세전승’ 혹은 ‘광야전승’의 기능을 밝히려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구체적으로 호세아 2:14-23에 대한 주석적 연구를 수행할 것이다. 이 주석적 연구를 통하여 호세아에서의 광야전승의 기능을 살펴봄과 아울러 또한 8세기 예언자들이 윤리적 유일신교의 창시자가 아니라 ‘모세 - 광야전승’의 르네상스 운동자이며, 그들은 ‘모세 - 광야전승’에 대한 기존의 앎을 전제하고 예언활동을 전개하였다는 것을 밝혀내고자 한다.
II. 호세아의 이스라엘 구원사의 시원(始原)(광야 전승) 의존
율리우스 벨하우젠은 주전 13세기의 모세시대가 아니라 주전 8세기 문서예언자들이 구약의 유일신 신앙과 계약신앙의 원류라고 주장하는 한편 모세오경은 고대이스라엘에 대하여 알려주는 책이 아니라 포로기 후기 유대교 상황을 반영하는 문서일뿐이라고 주장하였다.3) 벨하우젠은 이스라엘의 유일신 신앙은 특정 시점의 계시의 산물이 아니라 정령신앙-다신교-윤리적 유일신 종교로 이어지는 종교 발전 도상의 한 현상일뿐이라고 주장한 것이다.4) 그러나 이런 벨하우젠의 입장은 성경의 증언들과는 매우 다르다. 성경은 특정한 역사속에서 이뤄진 하나님의 자기계시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서 있었던 약속과 언약의 역사가 윤리적 유일신 신앙을 인류에게 선사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음을 강조한다. 벨하우젠 자신이 윤리적 유일신 신앙의 창시자들이라고 그토록 강조해마지 않았던 주전 8세기 예언자 중 한 사람인 호세아는 어디에서도 자신이 윤리적 유일신신앙의 창시자라는 의식을 보여주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그의 책 전편에서 이전에 있었던, 즉 이스라엘 역사의 시원(始原)에 있었던 전승들에 호소하여 자신의 비판적 예언들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벨하우젠의 주장에 대항하여 호세아를 비롯한 주전 8세기 예언자들은 새로운 종교의 창시자라기보다는 옛 종교의 비판적 재해석자로 간주하는 편이 낫다는 주장이 계속 있어왔다. 주전 8세기 예언자들은 모세 중심의 ‘광야 - 율법 - 제의전승’에 대한 기존의 정보를 가진 자들이며, 이 제의의 이교적 변질에 대항한 자들이었다는 것이다(카우프만, 시갈, 침멀리 등). 호세아의 중심주장은 유일하신 야웨 하나님의 자기계시가 이스라엘 역사의 시원에 있었다는 주장이다. 이스라엘의 출애굽 구원, 광야인도와 계약체결 등 일련의 구원사적 궤적들에서 이스라엘은 야웨 하나님께서 배타적 요구를 가진 하나님임을 점차로 깨달아갔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전승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지 않았다면 당대 이스라엘의 종교와 정치상황에 대한 호세아의 예언자적인 비판은 아무런 반향도 불러일으키지 못했을 것이다. 새로운 종교를 도입하는 사람이 어떻게 과거의 전승에 호소하여 당대의 지배 엘리트들과 백성들을 규탄할 수 있을까?
호세아서 전체에 걸쳐서 야웨의 역사적 구원행위의 전형인 ‘출애굽 - 광야전승’이 가나안의 자연신들인 바알제의적 음란으로 전락하는 현상이야말로 예언적 탄핵의 주요대상이 되고 있다. 야웨숭배와 야웨신앙은 바알리즘의 신화적 결혼제의로 축소될 수 없는 역사적 실재였고, 이 ‘출애굽 - 광야전승’의 역사적 체험의 핵심은 전적으로 야웨의 절대주권적 계약체결에서 비롯되었음을 밝힌 것이다. 호세아는 매우 빈번하게 광야전승이나 그와 관련된 전승을 전제하고서 당대의 이스라엘의 영적 일탈과 타락을 규탄하고 있다. 호세아서에서 적어도 광야(계약)전승과 그것과 관련된 전승을 직간접으로 암시하는 구절들은 다음과 같다(개역개정인용).
1:2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함이니라 하시니(비교. 4:15, 17-18; 5:3; 6:10;
7:4; 9:1)
1:9-10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의 이름을 로암미라 하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요 나는 너 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임이니라 10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 같이 되어서 헤아릴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을 것이며 전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살아 계신 하나 님의 아들들이라 할 것이라
2:2 너희 어머니와 논쟁하고 논쟁하라 그는 내 아내가 아니요 나는 그의 남편이 아니라
2:5 그들의 어머니는 음행하였고 그들을 임신했던 자는 부끄러운 일을 행하였나니
2:7 그제야 그가 이르기를 내가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리니
2:13 그가 귀고리와 패물로 장식하고 그가 사랑하는 자를 따라가서 나를 잊어버리고 향을 살라 바알들을 섬긴 시일대로 내가 그에게 벌을 주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2:14-23 14 그러므로 보라 내가 그를 타일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15 거 기서 비로소 그의 포도원을 그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그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 16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 17 내가 바알들의 이름을 그의 입에서 제거하여 다시는 그의 이름을 기억하여 부르는 일이 없게 하리라 18 그 날에는 내가 그들을 위하여 들 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과 더불어 언약을 맺으며 또 이 땅에서 활과 칼을 꺾어 전 쟁을 없이하고 그들로 평안히 눕게 하리라 19 내가 네게 장가 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 들며 20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 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2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내가 응답하리라 나는 하늘에 응답하 고 하늘은 땅에 응답하고 22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에 응답하고 또 이것들은 이스 르엘(심으심)에 응답하리라 23 내가 나를 위하여 그를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 라 하리니 그들은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하시니라
3:1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4:1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논쟁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4:6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 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4:12 내 백성이 나무에게 묻고 그 막대기는 그들에게 고하나니 이는 그들이 음란한 마음에 미혹되어 하나님을 버리고 음행하였음이니라
5:3 에브라임은 내가 알고 이스라엘은 내게 숨기지 못하나니 에브라임아 이제 네가 음행하 였고
5:7 그들이 여호와께 정조를 지키지 아니하고 사생아를 낳았으니 그러므로 새 달이 그들과 그 기업을 함께 삼키리로들이 여호와께 정조를 지키지 아니하고 사생아를 낳았으니 그 러므로 새 달이 그들과 그 기업을 함께 삼키리로다
6: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 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4 에브 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 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5 그러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그들을 치고 내 입의 말로 그들을 죽였노니 내 심판은 빛처럼 나오느니라 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7 그들은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 기에서 나를 반역하였느니라
8:1 그들이 내 언약을 어기며 내 율법을 범함이로다 2 그들이 장차 내게 부르짖기를 나의 하나님이여 우리 이스라엘이 주를 아나이다 하리라
8:14 이스라엘은 자기를 지으신 자를 잊어버리고
9:10 옛적에 내가 이스라엘을 만나기를 광야에서 포도를 만남 같이 하였으며 너희 조상들 을 보기를 무화과나무에서 처음 맺힌 첫 열매를 봄 같이 하였거늘 그들이 바알브올에 가서 부끄러운 우상에게 몸을 드림으로 저희가 사랑하는 우상 같이 가증하여졌도다
11:1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
12:6 그런즉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와 정의를 지키며 항상 너의 하나님을 바랄지 니
12:9 네가 애굽 땅에 있을 때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내가 너로 다시 장막에 거주 하게 하기를 명절날에 하던 것 같게 하리라
13:4-5 4애굽 땅에 있을 때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나 밖에 네가 다른 신을 알지 말 것이라 나 외에는 구원자가 없느니라 5 내가 광야 마른 땅에서 너를 알았거늘
이상의 인용구절들은 적어도 세 가지 사실을 가리킨다. 첫째, 이스라엘과 야웨 하나님은 한 때 이상적인 연합(결혼적 관계) 안에 머물렀고 그 이상적 결속상태가 이스라엘 역사의 시원이었다. 둘째, 그것은 광야와 관련된 구원사의 기억 속에 갈무리되어 있다. 셋째, 그런데 그런 한 때 감미로웠던 결속이 이제 바알숭배로 인하여 이스라엘이 행음하므로 와해되거나 해체되고 있다는 것이다. 바알신 숭배는 이스라엘 사회의 핵심구성원들인 자유농민의 토지박탈을 강요한 지주 제도를 이스라엘 사회 속에 도입하는 계기가 되었다(미 6:16).5) 호세아는 가나안 농경토착문화에서 기득권을 행사하던 바알 종교에 의하여 야웨 종교가 급격하게 약화되거나 쇠퇴하는 상황에 직면하여 가나안 농경문화에 이스라엘이 접목되기 이전 상황, 즉 광야상황에서 다시금 영적 종교적 국가적 갱신이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바알6) 종교제의와 처음으로 조우한 곳은 바알브올에서였다(민 25:3-4; 호 6:10 “그들이 바알브올에 가서 부끄러운 우상에게 가서 몸을 드림으로”).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더니 그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하니라”(민 25:1). 여기서 이스라엘 남자들이 모압 여자들과 행음하였다고 말할 때 “행음하다”의 주어는 3인칭 남성단수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온 백성을 대표하는 이스라엘 남자가 한 덩어리가 되어 즉 종교적 제의를 통하여 정식으로 행음하였음을 의미한다.7) 이 장면이 호세아가 규탄하는 이스라엘의 국가적 집단적 바알 숭배(행음)의 첫 사례다.
바알은 고대 시리아 팔레스틴 일대는 물론 바벨론 앗수르 지역에서까지 숭배되던 풍요와 다산의 신이었다(사 46:1; 렘 50:2; 51:44). 아마르나 서신(the Amarna Letters)들에서 보면 바알은 거의 항상 바벨론-앗수르 지역의 천둥신 하다드(Hadad)와 병렬적으로 언급된다. 바알브올 사건 이후 가나안 땅에 정착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이스라엘 농민들은 숱한 바알 관련 성읍들과 바알 숭배제의들을 목격하며 자신들의 종교제의로 수용하기 시작한다. 사사 기드온 사후에 이스라엘은 바알 브릿(Baal-berith)을 섬겼다(삿 8:33; 비교. 9:46). 바알과의 관련을 가리키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이름들에서 추론되듯이, 때때로 이스라엘은 야웨 예배와 바알 숭배를 동일시하기도 했던 것처럼 보인다(대상 12:5의 Bealiah[Yahweh is Baal]; 대상 14:7의 Beeliada[Baal knows]; 비교. 삼하 5:16의 Eliada[God knows]; 대조. 삿 6:32 여룹바알[Let Baal contend with him]기드온).8) 이스라엘의 바알 숭배를 비약적으로 촉진시킨 인물이 바로 오므리의 며느리요 아합 왕의 시돈 출신 아내(시돈의 바알종교 제사장 엣바알의 딸) 이세벨이었다. 그녀는 사마리아에 바알 신전을 건축하고 850명 이상의 국가지원 사제들을 고용하고 지원함으로 전이스라엘을 바알 숭배로 가득 채웠다(왕상 16:32; 비교. 왕하 10:28). 호세아는 가나안 농경문화에 너무나 깊이 함몰되어버린 동시대의 백성들에게 다시 광야로 나아갈 것을 독려한다. 광야로 나아가는 것은 나라의 멸망을 통해 땅을 빼앗기는 경험을 의미한다(비교. 사 41:17-20). 다가올 국가적 멸망, 왕조의 멸절,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의 기간 구성원들의 앗수르 유배상황을 광야상황으로 설정하는 것처럼 보인다.9) 이 파괴적이고 부정적인 경험이 오히려 이스라엘의 국가갱신, 종교갱신의 기회가 된다고 본 호세아는 광야시대의 순수한 시절로 이스라엘을 소환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호세아의 신학적 역사해석이 가장 현저하게 드러난 대목이 호세아 2:14-23(MT 2:16-25) 단락이다.
III. 호세아 2:14-23에 나타난 호세아의 케리그마(kreygma), “광야가 미래의 희망이다”
광야전승에 대한 호세아서의 적극적 해석은 2:14-23이 잘 보여 주고 있다. 이 단락에서 호세아는 세 가지를 말하고 있다. 첫째, 임박한 멸망의 위기는 이스라엘 나라의 창조적 해체의 기회를 제공한다(1장). 땅을 빼앗기고 다시 광야(미드바르)로 내몰린다. 광야는 황폐함의 상징이 아니라 영적 갱신, 국가갱신이 일어날 장소다. 이스라엘의 영적 및 국가적 갱신은 하나님과 맺은 계약갱신으로 실현된다. 아골(Achor) 골짜기(수 7:1-26)가 소망의 문으로 역전되는 처소다. 이 광야에서 야웨 하나님은 새로운 출애굽적 구원을 기획하시고 실행하실 것이다. 둘째, 광야에서는 이스라엘이 다시는 야웨와 바알을 혼동하지 않는다. 바알의 이름이나 기억은 도말될 것이다(“거기” “그곳”이 강조된다). 셋째, 광야는 새로운 번영을 초래할 언약체결이 이뤄질 곳이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다시금 계약적 친밀감으로 재결속될 것이다. 여기서 재계약은 이스라엘을 땅에 다시 심는 하나님의 행동으로 표현된다(23절; 렘 1:10). 땅에 심는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가나안 재정착을 의미한다. 호세아는 순수하고 좋았던 시절로 이스라엘 역사의 시원시기인 광야시절을 기준으로 삼고, 가나안 농경사회에 접목된 가나안 정착생활이 배교로 귀결된 상황을 타개할 해결책으로 다시 광야로 내몰리는 상황을 설정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호세아의 광야 전승 해석은 출애굽기, 민수기, 신명기의 광야 전승해석과는 사뭇 다르다. 모세오경에서의 광야경험은 배교의 시작점이자, 앞으로 가나안 땅에서 벌어질 온갖 종류의 배교와 일탈의 남상(濫賞)이었는데 어떻게 해서 호세아는 광야전승을 긍정적으로 규정하는지 연구해 볼 주제다. 아마도 가나안 농경사회와의 접촉이 가져온 온갖 폐해의 빛 아래서 볼 때 광야시절이 상대적으로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가 훨씬 더 순수하고 순전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1. 본문 사역(私譯)10)
14(MT 16) 정녕11) 보라 내가 친히12) 그녀를 유혹하여13) 광야를 걷게 하리라. 그리고 그녀의 심장에 대고 말하리라. 15 그리고 그곳으로부터14) 그녀에게 그녀의 포도원을 그에게 주며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라. 그러면 그녀가 그곳을 향하여 젊었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때처럼 응답하리라.
16 그 날에-이것은 야웨의 말씀이시다-네가 말하리라. “내 남편”. 그래서 나를 더 이상 “내 바알”15) 이라고 일컫지 않으리라. 17 내가 바알들의 이름을 그녀의 입술에서 제거하리니 그들이 더 이상 이름으로 기억되지 아니할 것이다 18 그 날에는 내가 그들을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과 더불어 언약을 맺으리라. 그리고 활과 칼과 전쟁을 이 땅으로부터 부숴뜨려 제할 것이며 그들로 평안히 눕게 하리라 19 내가 영원히 네게 장가들되16) 17) 의와 공평과 인애와 긍휼로 네게 장가들리라 20 내가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 들리니 네가 야웨를 알게18) 되리라 21 그 날에 “내가 응답하리라”고 말할 것이다19) 야웨의 말씀이시다. “내가 하늘들에 응답하며 그들은20) 땅에 응답하고 22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에 응답하고 그리고 그것들은 이스르엘21) 에 응답하리라 23(MT 25) 내가 나를 위하여 그녀를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22) 를 향하여 “너는 내 백성이라”고 말할 때 그는23) 말하리라 “내 하나님.”
2. 주석
단락 구분에 있어서는 다른 견해가 있을 수 있으나 주제적 응집성과 유기적 관련성에 비추어 14-23절을 하나의 단락으로 구별하여 읽을 수 있다고 본다. 특히 16회에 걸쳐 사용되는 1인칭 동사들의 사용은 전후 문맥과 사뭇 분위기가 다른 회복과 미래 희망으로 가득 찬 비전을 제시하는 하나님의 절대적 주도권을 효과적으로 강조하고 있다.24) 이 1인칭 동사들은 3-15절에 선포된 징계들이 주는 암울함과 비관주의를 능히 극복케 하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적 주도권이 두드러지는 적극적 회복의 약속들을 효과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1-13절이 야웨를 알지 못하고 망각한 결과 초래된 심판과 재난을 말한다면, 14-23절은 그 심판과 재난의 신학적 목적과 결과를 희망의 언어로 강조하는데 그 심판과 재난의 궁극적 목적은 이스라엘이 다시금 “야웨를 알게 되는 미래”를 창조하는 데 있다. 풍요와 다산의 종교인 가나안 농경종교 대신에 이스라엘은 이제 광야에서 새 포도원을 선물로 받는다.25)
14절은 1:1-2:13을 지배하던 심판과 징벌의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강조적 부사 라켄, “정녕”으로 시작된다.26) 이 위로 예언을 듣는 예상 청중은 바알들을 섬기고 거짓된 연인들을 따라갔다가 징벌을 당한 이스라엘이다. 야웨를 잊어버리고 바알을 섬긴 날수대로 징벌을 받은 이스라엘에게 들려준 위로다. 이사야 40장 1-2절을 방불케 하는 전환이 14절에 나타난다. 야웨께서는 부정한 아내처럼 남편을 배반한 이스라엘을 가나안 농경문화의 주신(主神)역할을 하던 바알 종교와 분리시켜 놓기 위하여 광야로 데리고 나간다. 총각이 처녀를 유혹하듯이 이스라엘을 유혹하여 광야를 걷게 하신다. 야웨께서는 이 광야길을 걷는 이스라엘의 심장에 대고 말하려고 하신다. 심장에 대고 말하는 행동(디뻬르 알 렙)은 가슴에 닿게 말하다, 감미롭게 말하다, 혹은 설득력있게 말하는 행동을 의미한다. “심장에 대고 말하다”는 “정다이 말하다”(사 40:2)와 같은 표현으로 이스라엘과 야웨와의 계약이 가지는 밀월관계의 극치를 표현한다(비교. 출 22:5[16]; 호 7:11; 참조. 창 34:3; 룻 2:13). 가나안 농경문화에 깊이 빠져든 이스라엘이 주술적이고 미신적인 바알제의에서 분리되어 단독자가 될 때 그녀의 심장에 대고 말씀하려고 하신다. 이처럼 앞 단락 3절의 “마른 땅”은 죽음과 심판의 장소인데 비해 14절의 ‘광야’는 사랑과 회복의 이미지로 역전되어 사용된다.
15절에는 광야 장소를 강조적으로 가리키는 “샴”(거기)이라는 부사어가 두 번이나 사용된다. 12절에 의하면 가나안의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는 거칠게 되고 들짐승의 먹이가 되어 버렸다.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는 단지 과수농업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스라엘 계약 공동체가 바로 하나님의 포도원이요 무화과나무 동산인 것이다(사 5장; 렘 2장).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가 수풀로 변하고 들짐승의 먹이터로 변질되었다는 것은 외국군대에 의하여 이스라엘 공동체가 파괴되고 유린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사 5:5-6).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이스라엘에게 포도원을 주시며 죄악으로 인한 심판과 징계의 땅인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15절 하반절은 이스라엘이 “그곳을 향하여” 즉 광야를 향하여, 그녀의 젊었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때처럼 야웨 하나님께 응답하게 될 미래를 그린다.
16절은 그 응답의 내용을 말한다. 야웨께서 아골 골짜기를 소망의 문으로 삼아주시는 바로 그 날에 이스라엘은 야웨를 향하여 “내 남편”이라고 부를 것이다. 이 구절은 “이것은 야웨의 말씀이시다”라는 첨기에 의하여 도입되고 있다. 이 예언은 신적 기원을 가진 말씀이라는 것이다. 야웨 하나님을 내 남편이라고 부르는 그 때 더 이상 이스라엘은 야웨를 더 이상 “내 바알”이라고 일컫지 않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야웨와 바알을 얼마나 심각하게 혼동했는지를 추정케 한다.
17절은 이스라엘의 일상언어, 종교적 언어에서 바알들의 이름들이 더 이상 언급되거나 기억되지 않게 하실 것임을 천명하시는 하나님의 결심을 강조한다. 이스라엘은 위기의 순간에, 자연재해의 순간에 야웨 하나님 대신에 바알들을 불러 댄 것이다(쿤틸레트 아주르디 비명은 지역을 관할하는 바알의 칭호들을 포함).
18절은 이스라엘의 포도원을 유린한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아모스 7:1-3의 메뚜기)과 언약을 맺으실 하나님의 계획을 강조한다. 이 피조물들은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대행자들인데 이제 하나님께서 그들과 언약을 맺어 더 이상 그들이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행위를 수행하지 못하도록 하시겠다는 의미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징벌하도록 파견한 이방군대들이 바로 들짐승이며 새와 곤충인 것이다.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가 들짐승의 밥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을 기술하는 12절과는 달리, 18절에는 모든 당신의 백성들을 위하여 들짐승과도 계약을 맺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난다. 들짐승, 새, 곤충이 이방침략군을 빗대어 말하는 것으로 읽는 이해를 지지하는 것이 18절 하반절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겨누어진 활, 칼, 전쟁을 그치게 하실 것이다. 이스라엘이 평안히 안식을 누리게 하실 것이다.
19-20절은 이 안전과 평화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구적인 안전과 평화로 정착하도록 노력하시는 하나님의 결단을 부각한다. “내가 영원히 네게 장가 들되 의와 공평과 인애와 긍휼로 네게 장가들리라 20 내가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 들리니 네가 야웨를 알게 되리라.” 야웨 하나님께서는 다시 이스라엘을 신부로 맞아들이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신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을 받은 수혜자가 되어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하게 된다. 응답하게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약적 요구를 이해하고 능동적으로 그것에 순종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영적 혼인상태가 정립된 이후에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축복은 농업 부흥(국가적 부흥의 상징)을 맛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하늘들에 응답”하실 것이다(21절). 하늘의 비와 구름을 보내주시겠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명령에 응답한 하늘은 땅에 비를 내려줌으로써 땅에게 응답하게 될 것이다. 22절에 의하면 땅은 보다 더 구체적으로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에 응답하고 그리고 그것들은 이스르엘(심으심)에 응답하게 될 것이다. 곡식을 박탈하는 대신에(9절) 이제 땅은 곡식을 풍성히 낼 것이다(22절).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에 응답하여 풍성한 수확이 거두어질 것이다. 그것들은 특히 이스르엘 평원에서 큰 풍년을 이룰 것이다. 이스르엘은 피 흘리는 장소가 아니라(호 1:4-5), 새로운 싹들(새 백성)이 심겨진 땅이 될 것이다.
23절은 야웨와 이스라엘의 새로운 혼인의 결과를 말한다. 야웨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다시 가나안 땅에 심으시며(포로들을 재정착시키는 것을 의미) 한 때는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한 때는 “내 백성 아니었던 자”를 향하여 “너는 내 백성이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그 때 가나안 땅에 새롭게 정착된 이스라엘은 “내 하나님”이라고 부르며 응답할 것이다. “나의 바알”은 “나의 남편”으로 불리워 질 것이다(16절).
결국 2:14-23은 바알리즘(Baalism)의 “신성한 결혼” 제의에 대항하는 하나의 새로운, 역사적인 ‘야웨 - 이스라엘’ 간의 결혼, 즉 계약체결이 새 출애굽의 형식으로 치뤄질 것에 대한 예언인 것이다. 이 본문은 모종의 심판과 징벌을 통과한 후에 이스라엘을 위한 야웨의 절대주권적 주도권에 의해 체결된 시내산 계약의 회복이 있을 것을 예언하고 있다.
3. 호세아서의 광야전승
붸르너 슈미트(Werner H. Schmidt)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출애굽 전승은 요셉지파에서 보양되다가, 북왕국의 선지자 아모스(3:2; 9:7)와 호세아(11:1; 12:9; 13:4)에게서 가나안화된 야웨 신앙을 갱신토록 외치는 거점이 되었다.27) 당대의 대다수 사람들이 구원사 전승을 빌미삼아 종교적 방종(성소 순례를 규탄하는 아모스)에 빠졌던 상황과 비교해 보면, 아모스와 호세아는 이 구원사 전승에 바탕하여 가나안 바알-농경문화와의 창조적 단절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아모스와 호세아는 구원론 중심의 출애굽 이해를 규탄하고 계약적 응답을 촉구한 것이다(암 3:2; 호 11:1-2). 호세아에서 사용된 공식 귀절 “나는 너희들이 애굽 땅에서 나옴으로부터 너희 하나님 여호와다”(12:9, 13:4)라는 하나님 사랑의 배타적, 독점적 성격을 나타낸다(3:1, 13:4). 바알의 풍요와 다산제의로 경사된 변질적 야웨신앙을 회복하기 위해, 호세아는 ‘시내계약-광야시절’의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계약적 밀월관계를, 이스라엘이 이미 공통적으로 알고 있는 영적 유산으로 전제하고 그의 예언활동을 전개한 것이었다(2:14-23).
구약의 공식 계약구절인 “나는 너희를 내 백성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는 광야에서 맺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계약적 밀월와 감격을 함축하고 있다. 이 호세아 단락에서 자주 반복되는 “응답하다”라는 동사는 이런 계약적 상호귀속을 천명하는 계약당사자의 선언 교환을 가리키는 말이다. 호세아 선지자는 이스라엘과 야웨와의 결혼관계적 밀월은 가나안의 다산제의에서 발생한 신들의 신성한 결혼제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고, ‘출애굽 - 시내산 계약 체결’이라는 유일회적 역사적 사실에서 연원된 것임을 강조한 것이다. 호세아는 출애굽 구원이라는 역사적 특수시점과 광야라는 특정장소에서 발생한 역사내적인 계약사건에 호소함으로써 자연순환적인 바알주의 신앙과 야웨 종교가 얼마나 다른가를 납득시키기를 원하였던 것이다. 호세아는 바알리즘의 신화적 결혼제의에 대해 야웨와 이스라엘의 계약적 밀월은 ‘역사’에서 발생하였다는 주장을 펼친 것이다. 겨울(죽음의 신 모트가 바알을 죽이는 시기)-봄(바알이 모트를 죽이고 부활하는 시기)의 자연순환적인 리듬을 극화(劇化)하는 바알제의와 대립하는 야웨 종교는 바알종교와 같은 실용주의적 실존주의적인 구원과는 전혀 다른 엄정한 도덕적 원리에 따라 이뤄지는 하나님의 구원활동을 강조한다.
그리하여 호세아(아모스도)는 그 이전의 어떤 예언자에게서도 발견되지 않는 파격적 미래상, 즉 야웨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의 ‘계약’은 해체되고, 이스라엘은 멸망하게 될 것을 선포했다. 야웨의 계약, 곧 야웨와 이스라엘의 결혼은 자연신화에 근거한 자율적 관계가 아니라, 상호간의 인격적 신실성을 요구하는 살아있는 ‘역사’적 실체임을 설파한 것이다. 바알제의가 자연신화에 근거한 ‘바알-아세라’의 “신성한 결혼”제의에 근거한 다산지상주의 종교일 때, 야웨신앙은 ‘출애굽-시내산 계약’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근거한 ‘계약’관계임을 그는 설파한 것이다.
이처럼 호세아는 그 당시 변질된 야웨신앙의 시정을 촉구할 때 그가 선험적으로 기대는 근저로서 ‘모세-광야전승’의 풍요로운 영적 유산으로 되돌아 갔던 것이다. 호세아가 말하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4:1, 6; 6:6)은 구원사 전승에 대한 친숙한 앎을 의미하는 것이다.28) 이렇게 볼 때 호세아는 벨하우젠류의 종교사학파가 그리듯 윤리적 유일신앙의 창시자라기보다는, 모세의 광야전승의 중흥자로 자리매김되는 것이 훨씬 더 균형잡힌 판단일 것이다.29) 발터 아이히로트(W. Eichrodt)에 의하면 모세 이후의 역사에서 모세의 ‘출애굽-광야’ 계약전승을 가나안 바알 종교에다 순치시키려는 과정에서 심각한 갈등이 유발되었다.30) 이 갈등을 본격적으로 인지한 것은 아마도 엘리야-엘리사-에후로 이어지는 주전 9세기 반(反)바알주의 척결운동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를 본격적인 신학적 성찰의 대상으로 삼고 바알종교와 야웨 종교의 차이를 명확하고 체계적으로 밝힌 사람들은 주전 8세기 예언자들이었다.31) 아이히로트에 따르면, 호세아를 비롯한 주전 8세기 예언자들이 야웨 종교의 혼합주의적 경향성을 인지하는 과정에서 그들은 윤리적 유일신 신앙을 주창하게 되었다. 세 가지 동화과정을 통해서 바알제의가 야웨 신앙을 위협했다.
무엇보다도, 주전 8세기 예언자들이 가장 심각하게 파악한 혼합주의적 양상은 첫째, 야웨종교의 신관이 가나안 토착 종교인 바알 종교의 신관에 의하여 심각하게 지배당하고 있었던 상황이다. “지역적 연고자에게나, 숭배나 제의에 참여하는 자에게 무조건 호의를 베푸는 바알은 의와 상호계약적 교감을 요청하는 야웨신앙을 위협했다.”32) 하지만 2:23이 분명하게 밝히듯이, ‘야웨-이스라엘’ 사이는 상호계약적 앎(교감)에 의하여 지탱되지 기계적인 주술이나 제의에 의하여 지탱되지 않는다(참조. 호 4:1, 6; 6:1-2). ‘바알-아세라’의 “신성한 결혼”제의에 참여하는 것이 풍요와 평화를 보증하지 않는다(2:18-20). 호세아는 “계약적 교감”보다는 일반적 종교제의적 위탁으로 외식화되고 변질된 야웨 신앙을 규탄하고, 그 원시적이고 순결한 광야시절의 ‘영적 교감’을 회복하기를 호소했다. 의와 공평, 인애와 긍휼과 진실함으로 결속된 계약관계를 지탱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또한 기계주의적 제의나 절기 축성(祝聖)이나 성소 순례 등이 아니라 의와 공평, 인애와 긍휼을 실천하는 부담을 스스로 떠맡아야 한다는 것이다. 호세아 12:6은 하나님께로 회복된 이스라엘은 “인애와 정의”를 지키면서 하나님의 계속적 구원을 기대하여야 함을 강조한다. 그러나 바알종교의 기계주의적 신관에 익숙한 대다수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감의 부재에도 어떤 위험도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하나님과의 결혼관계가 의와 공평, 인애와 긍휼의 가치를 공동체적으로 구현해야 할 의무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호세아가 가나안 정착생활 가운데 파괴된 야웨와 이스라엘의 결혼관계를 치유할 광야의 밀월적 계약관계의 복원을 주창하고 나선 것이다.
하지만 이 파괴된 영적 교감의 교착상태 속에서 심판과 위협이 먼저 등장했다. 그러나 이것이 “영적교감”을 회복할 순 없다. 또다시 하나님의 은혜 주도적인 ‘새로운 출애굽-새로운 광야’ 시대가 열릴 때만이 야웨 신앙은 회복된다. 호세아의 새로운 출애굽에 대한 생생한 비전은 무(無)에서 발생하지 않았다. 그가 속한 공동체 속에서 보양된 ‘모세-광야전승’에 기대어 발생한 것이다. 14절의 ‘광야’는 야웨가 말로 위로할 수 있는, 즉 심장에 대고 말할 수 있는 곳이다.
둘째, 호세아를 비롯한 주전 8세기 예언자들이 우려스럽게 주목한 야웨 종교의 가나안 동화현상은 가나안 정착 이후의 야웨신앙에서는 종교제의적 측면이 윤리적 측면보다 더 왜곡된 발전을 하였다는 점이다. 가나안 만신전에서 봄 파종기에 치러지는 ‘바알-아세라’의 “신성한 결혼”제의는 이스라엘 동경자들에게 큰 유혹이었고 배도의 지름길이었다.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그 당시 성전에서 벌어지는 제사장(Baal)과 성전창녀(Aserah)의 종교적 매음행위에 연루된 여인들은 흔히 있었던 사람들이고, 호세아의 아내 또한 예외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농업의 풍요를 보장하는 하나님의 계약적 돌보심에 대한 호세아의 강조(2:21-25)에는 당시 이스라엘의 야웨 종교에 엄청난 부정적 영향을 끼치던 가나안의 바알주의적 자연종교에 대한 변증적 의도가 깃들어 있다.33)
셋째, 가나안의 몰역사적 몰도덕적인 자연종교에 동화되어가던 야웨 종교 안에는 민족의 이익과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동일시하려는 절대적 관념론의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여로보암 Ⅱ세 때에 찾아온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풍요와 외교ㆍ국제관계에서의 득의 만만함은 북이스라엘의 거짓된 경건심을 더욱 고조시켰고, 전반적으로 낙관주의를 팽배시켰다. 이런 과정에서 이스라엘은 출애굽 구원경험과 실존적인 응답이 요청되는 야웨와의 계약을 가나안 종교의 신화적 제의 속에서 해소시켜 버렸던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 안에서의 독특한 구속사역을 자연 속에서 일어나는 순환체험으로 축소했고, “계약적 응답”이라는 야웨신앙의 본질을 외면해 버린 것이다.
이런 야웨 종교의 바알주의적 동화과정을 비판적으로 관찰하던 호세아는 이스라엘이 안일하게 도피해 있는 바알리즘적 야웨신앙의 진면목을 폭로하고, 새로운 출애굽이라는 위기상황을 연다. 하나님은 호세아의 세 자녀 이름들 - 이스르엘(뿌리신다), 로루하마(하나님의 계약적 사랑 즉, 긍휼이 더 이상 효력을 발휘하지 않는다), 로암미(더 이상 하나님과 계약적 결속과 상황응답을 수수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다)에서 이스라엘이 직면한 공동체적 국가적 위기상황을 들추어내신 것이다. 호세아에 따르면 이 위기상황은 피할 길이 없다. 심판과 징벌을 당하여 왕이나 제사장 없이 무정부 상태, 이방땅으로 끌려가는 유배상황을 거친 후에 새로운 미래가 열릴 수 있을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호세아는 그의 청중(독자)들에게 이스라엘의 음행과 우상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선행적(先行的) 심판을(2:1-13) 능히 압도하고 역전시키는(2:14-23) 새 출애굽의 여명을 희구하도록 초청하고 있는 것이다.
4. 소결론-광야에서의 새 출애굽
호세아 2:14-23에 따르면 야웨와 이스라엘 사이에 맺어진 계약의 주도권이 야웨께 있기 때문에,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야웨는 ‘계약체결-계약해제-계약 재체결’이라는 변증법적 긴장으로 “계약적 상호귀속”을 한층 더 고양시킨다. 호세아가 매음에 빠진 자기 아내를 다시 맞이해야 할 명령을 받았듯이. 이스라엘을 다시 맞이해야 할 ‘하나님-남편’의 고뇌스런 격정(pathos)을 본문은 잘 보여 준다. 음녀 이스라엘의 회개가 전제되거나 실현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로루하마-로암미’를 잇달아 선포하는, 이 신비롭고 심원한 야웨의 격정은 호세아서의 전체 주제이기도 하다. 결국 ‘로루하마-로암미’의 충격은 새로운 출애굽으로의 준비적 절차다.
시내산 계약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주도적인 계약이 갖는 함축은 야웨와 이스라엘의 계약적 상호응답 속에서 해명되면서, 예레미야와 같이 호세아는 야웨와 이스라엘 사이에 맺어진 계약의 본질을 출애굽기 19:5-6의 조건적 ‘만일’로 파악하려고 한다. ‘모세34) 계약-광야전승’에 대한 “조건적 계약”으로의 해석이야말로 호세아의 혁신적 해석인 것이다.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는 내 백성이 된다”는 계약 형식은 이스라엘이 회개를 통해 갱신될 임계점을 넘어버리는 경우에는 더 이상 효력이 없는 주문이 되어버리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백성됨은 하나님의 심판 때에 부정될 것(1:9)을 예언한 것이다. 이스라엘의 신앙과 사랑은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계약적인 긍휼에 대한 실존적이며 전인격적 응답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행음은 그 자체가 계약파기행위임을 선포하는 것이다. 따라서 가나안 땅에서 이어지던 구원사는 이제 단절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광야는 가나안 땅에서 이뤄지던 구원사의 단절을 의미하고 새로운 단계의 구원사가 시작될 수 있는 처소다.
앞의 주석에서 확인했듯이, 호세아에게 광야는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반항의 장소가 아니라, 종말론적 새 출발과 계약갱신점이 되는 곳이다. 야웨가 이스라엘을 “포도나무의 포도알을 만난 것” 같이 만난 “기쁨과 감격”의 만남의 장소였고, 계약적 밀월이 싹튼 곳이다. 이 광야의 결혼식 시내산 계약체결은 ‘로루하마-로암미’가 선포된 다음에 뒤따라 오는 절차로서, 이전보다 더 길고 오묘한 영적 상응(Mutural Knowledge)이 발생하는 새 출애굽을 예기케하는 모든 계약의 전범적(典範的) 기능을 수행한다.
호세아는 가나안 종교에서 유래하는 바알과 아세라의 신적 결혼관계를 야웨와 이스라엘 간의 역사내적인 계약적 밀월관계로 승화시켜 이해시켰다. 광야는 신부로서의 이스라엘의 (이스라엘의 정결은 하나님의 배우자적인 거룩한 관계) 정체성과 신랑으로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장소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호세아는 그 동시대의 레위 제사장 그룹에 의해 보양되어온 것으로 간주되는 광야전승을 활용하여, 야웨 백성의 이교화에 부성적 격정으로 맞선 것이다(4:6; 6:6; 8:12). 그는 ‘광야’와 포도원을 결합시키는 설교를 통해 오직 야웨만이 복지(2:7, 10)의 공급자이며, 풍요와 안식의 제공자임을 역설한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바알과 아세라의 음란제의에 의해 비가 내리고 각종 풍산이 발생한다고 신봉했으니 그 당시 이스라엘의 영적 일탈과 배교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2:5).
바알에 있어서 ‘광야’는 신적인 결혼에 의하여 회복되어야 할 “마른 땅, 불모의 땅”(죽음의 모트[Mot]가 지배하는 땅)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갖지만, 야웨의 백성에게는 종말론적 계약갱신의 거점이 된다. 가나안 만신전에서 자행되는, 성적으로 분화된 신들의 음란제의의 풍요주의로부터 이스라엘을 분리시켜 광야에서 맺은 계약적 밀월관계로 소환하려고 하는 것이 호세아 예언사역의 으뜸 목표였다. 광야에서는 육적 자아가 죽고 영적 자아가 거듭 태어나며 광야에서는 메마른 여정이 가나안 만신전의 음란 제의를 대체한다(1:9; 2:4).
이처럼 호세아 2:14-23은 지나간 구원사를 하나님의 남편과 같은 사랑과 정절에 대한 아내 이스라엘의 간음의 역사로 소급적으로 정리하되, 이렇게 정리된 배교의 역사를 배경삼아 ‘오늘’ 이스라엘의 배도를 능히 압도하고 극복하는 야웨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의 주도적 역사를 부각시킨다. 2:19-20절에 나오는 여섯 가지 주제-의, 공변됨, 은총, 긍휼히 여김, 진실함, 여호와를 아는 지식-는 4:1-2절에서 묘사되는 계약파기적인 이스라엘의 현상을 완전히 반정립시키는 주제인 것이다. 이 두 구절을 비교해 보면 십계명에 대한 기존의 앎을 반영하는 4:1-2절의 죄악상-진실과 인애 결여, 하나님을 아는 지식(da‘at ’ĕlōhîm) 결여, 저주, 허위, 살인, 훼절, 간음, 폭력 등-은 야웨의 광야계약의 갱신을 통해 극복될 것이라는 저자의 암시적 메시지를 포착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이스라엘을 ‘광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주도적 행위는 이스라엘의 멸망과 흩으심의 시작을 의미한다. 이런 부정적 심판과 징벌 경험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자신에게 복지와 풍요를 주신 분은 바알이 아니고 “광야에서도 살 길”을 내시는 야웨임을 심비(心碑)에 새기는 된다. 새 이스라엘 교회는 광야에서 태어난 공동체이며, 이 세속사회 한 가운데서 광야계약의 긴장과 밀월 속에서 생명력을 유지하는 계약공동체이다. 계약적인 응답과 교감의 세계가 제의에 우선한다. ‘광야’에서 야웨와 그 백성은 계약관계가 갖는 깊은 교감의 차원에 도달할 수 있다. 16절에 나오는 “나의 바알”은 가나안의 바알리즘에 익숙한 이스라엘의 현실에 대한 전제이며, “나의 바알”은 “나의 하나님, 나의 야웨”로 바뀌어져야 한다.
Ⅴ. 결론
이스라엘의 배교는 사실상 계약파기를 의미했고, 야웨는 로루하마와 로암미를 통해 이 계약무효를 확인시켰다. 그러나 이 계약 무효처분은 하나님의 부성적, 남편다운 포옹의 격정에 의해 철회되고, 새 출애굽으로 가는 광야여정으로의 단독자적 소환에 이른다. 음부 이스라엘은 자신의 회개 여부에 관계없이 압도적이고 선행적(先行的)인 남편의 계약적 포옹과격정인 감미로운 사랑, 긍휼, 진실, 의와 공변됨, 영적ㆍ계약적 교감(2:19-20) 속에서 망각되고 왜곡된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전적인 갱생을 맛본다. 광야에서 새롭게 실현되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계약적 연대(New Covenant-making)는 이스라엘의 회개에 대한 야웨의 보상이 아니고, 오히려 이스라엘의 회개를 촉발시키는 주도적인 조치다. 하나님의 남편다운 포옹의 격정이 이스라엘의 회개를 추동시키는 선행적 원동력이 된다. 탕자의 정체성이 아버지 집에서 새롭게 정위(定位)되듯이, 계약파기자 음부 이스라엘의 정체성은 참 남편 야웨의 계약적 포옹안에서 정위된다.
‘광야’는 가나안 풍요제의에 빠진 이스라엘의 변질된 신앙으로부터 그들의 태생적 정체성을 환기시키는 주제이다. 바알리즘의 주권이 미치지 못하는 광야, 메마른 땅, 바알리즘으로 볼 때는 죽음과 비탄의 땅인 광야가, 야웨의 계약 안에서 밀월과 교감의 처소가 된다.
호세아는 “마음에 말하는 하나님” 사랑을 목청껏 노래한다. 배도한 음부 이스라엘과 배도한 인류를 종말론적 희망의 처소 광야로 불러내는 호세아 메시지 속에, 벌써 요한복음 3:16의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내어 주신”, 광야의 현실인 십자가의 사랑, 원수마저 포옹하는 참 사랑의 포용적 격정을 선취할 수 있는 것이다. 호세아는 처음으로 윤리적 유일신에 눈 뜬 자도 아니며,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계약상태를 신학화한 사람도 아니다. 그는 그의 지나간 역사 속에 보양되어온 거룩하고 감격에 찬 ‘출애굽-시내산’ 계약관계와, 그에 따른 ‘율법-제의’에 대한 기존의 앎을 전제하고 있다. 백성들, 제사장들도 다 아는 공통의 유산과 전승의 터에서 이스라엘의 철저한 갱신을 부르짖고 있는 것이다.35) ‘광야’는 이제 이스라엘의 행음을 제거하고 야웨 하나님과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공간이 다.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과 야웨가 계약을 맺던 거친 들판이 희망의 거소(居所)로 떠오른다. 광야는 야웨와 이스라엘이 첫째 혼인예식이 거행된 곳이며 동시에 이스라엘의 미래 회복의 희망을 담보할 새로운 결혼식이 거행될 곳이다. 예언자는 여러 군데서 광야에서 이스라엘의 행음을 규탄하고 야웨 하나님과의 새로운 계약관계가 재창조될 것임을 암시한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출애굽-광야전승’이야말로 호세아 예언의 영감의 수원지이며, 종말론적 희망의 그림에 대한 원형이라고 말하는 것이 전혀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1) 레이너 알베르츠는 이사야와 호세아의 강대국 동맹의존 숭배에 대한 비판의 초점이 달랐다고 하지만 거의 대동소이해 보인다. 호세아의 경우 강대국에 대한 헛된 신뢰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는 강대국 자체에 도움을 바라고 기웃거리는 것 자체가 국가적 정체성의 상실과 정치적 도덕의 악화를 초래한다고 본다. 우리가 보기에는 이런 알베르츠의 해설이 그렇게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강대국 의존 자체가 야웨와 맺은 일편단심 계약의 파기이므로 당연히 국가적 정체성의 약화를 가져오는 것이 아닌가?(Rainer Albertz, A History of Israelite Religion in the Old Testament Period[trans. John Bowden; London: SCM, 1994], 167-168).
2) 알베르츠, Ibid., 174.
3) J. H. Hayes & F. C. Prussner, Old Testament Theology: Its history and development(Atlanta, GA: John Knox Press, 1985), 127.
4) J. Wellhausen, Prolegomena to the history of ancient Israel(Cleveland, OH: Meridian Books, 1965), 53-79.
5) 김회권, 『김회권 목사의 청년설교』(서울: 복있는 사람, 2005), 21-22.
6) 호세아가 바알을 단수 혹은 복수로 언급하는 구절들은 다음과 같다: 단수로 언급(2:10, 18; 13:1; 비교. 9:10); 복수로 언급(2:15, 19; 11:2; 비교. 2:7, 14). 그 외에는 호세아는 바알 숭배와 관련된 시설들과 제의적 물건들에 대하여 빈번하게 언급한다: 산당(4:13-15; 10:8), 돌기둥(3:4; 10:1-2), 신탁매개 나무들(4;12), 신 형상들(4:17; 8:4b; 1:2); 베델의 황소 형상(8:5-6; 10:5; 13:2); 건포도 과자(3:1; 비교. 삼하 6:19); 애도의 표시로 몸을 칼로 베는 행위들(7:14).
7) 김회권, 『하나님 나라 신학으로 읽는 모세오경 2』(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6), 189-190.
8) Allen C. Myers, “Baal,” in The Eerdmans Bible Dictionary(Grand Rapids, MI: Eerdmans, 1987), 113; W. F. Albright, Yahweh and the Gods of Israel(New York: Garden City, 1968); S. R. Driver, Canaanite Myths and Legends(Edinburgh: T & T Clark, 1956]).
9) W. Rainey Harper, A Critical and Exegetical Commentary on Amos and Hosea(ICC; Edinburgh: T & T Clark, 1973), 239.
10) MT 본문 중에서 호세아의 본문 부식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다. 레닌그라드 코덱스(1008년 경)를 대표하는 MT와 좀 더 이른 시기의 본문인 알렙포 코덱스(952년 경) 둘 다 심각하게 파손되어 있으며 그 만큼 서기관의 실수도 많이 보유하고 있다. 많은 중세사본들은 레닌그라드 코덱스나 알렙포 코덱스와 다른 이본들 혹은 다른 읽기들을 보여주고 있다. 쿰란자료(4QXIIc,d,g)들은 MT와 다른 많은 본문상의 읽기들을 보여주고 있다. 불행히도 쿰란 사본들은 한결같이 단편적이라서 본문비평에 별다른 유익을 주지 못한다. 70인역의 본문 전승과 번역의 질은 물론 초기 그리스 역본들(Aquila, Symmachus, Theodotion)의 번역도 전체적으로 일관성있는 질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다. 어떤 곳들에서 그것들은 MT보다 더 나은 본문을 보전하고 다른 곳들에서는 더 열악한 본문전승을 대표한다. 그래서 BHK나 BHS는 고대 그리스 역본들(Greek, Syriac, Latin, Aramaic)을 토대로 하여 많은 본문 수정들을 제안한다. 많은 경우들에서 MT 읽기들은 너무 어형론적으로(morphologically), 구문론적으로(syntactically), 그리고 문맥상 너무나 어려워 본문을 의미있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보수적인 학자들이라도 본문 재구(再構)를 위한 추측을 시도하지 않을 수 없다. 대다수의 영어번역본들(예. KJV, ASV, RSV, NEB, NAB, NASB, NIV, TEV, NKJV, NJPS, NJB, NRSV, REB, NCV, CEV, NLT) 다른 역본들이나 판본들에 있는 다른 읽기를 채택하거나(좀 더 빈번히) BHK나 BHS에 제시된 본문 수정제안을 따른다. 하지만 호세아 본문의 난제들은 너무 심각하여 영어성경들마저도 의견이 크게 엇갈린다. 이런 점을 감안하여 우리는 이 단락의 사역을 시도한다.
11) 접속사 라켄(lākēn)은 여기서 힌네(hinnē)와 함께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役事)를 도입하는 부사어 “정녕”으로 번역하는 것이 문맥상 더 나아보인다(JPS Hebrew-English Tanak, 1276).
12) 1인칭 대명사 아노키(’ānōkî)의 사용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적인 구원의지를 부각시킨다.
13) 머파테하(mĕpatêhā)는 파타(pātā, “유혹하다,” “꾀다,” “속이다”)의 피엘 능동분사형으로 힌네+주어+능동분사형 구문을 이룬다. 이 힌네+주어+능동분사형 구문은 근접 미래에 일어날 일을 묘사할 때 사용되는 구문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연인이나 아내로 대하며 다시 유혹할 것임을 강조한다. 그 뒤따라 나오는 홀라커티하(hôlakĕtîhā, hālak 능동분사+목적접미어)도 “그녀로 하여금 광야를 걷게 할 것이다”는 의미다. 광야를 걷는 상황은 출애굽 여정이나 제 2의 출애굽으로 비유되는 바벨론/앗수르 포로들의 귀환여정을 의미한다(사 11:10-16; 40-44장 여러 구절들).
14) 광야의 구체적으로 그리고 강조적으로 적시하는 단어 샴(šām) 혹은 샤마(šāmā)가 사용된다. 후자는 방향접미어 locale-he가 붙어있는데 이스라엘이 “광야를 향하여” “응답하는” 상황을 부각시킨다.
15) 이쉬(’îš)도 남편을 의미하고 바알(ba‘ĕlî)도 ‘남편’을 의미한다. 전자가 좀더 인격적이고 정감넘치는 사랑의 대상으로 남편을 의미한다면(창 2:23; 3:6, 16) 후자는 법적인 지위와 권리와 관련된 경우의 남편(출 21:13; 신 22:22; 24:4)을 의미한다.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바알(일반 명사인 남편 또는 바알신과 동일한 하나님으로서의 야웨)이라고 불렀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하나님은 자신이 바알로 불리는 것을 원치 않으시고 바알과 혼동되는 것을 싫어하신다.
16) “장가들다”로 번역된 에레스(’ērēś)+리(lî)는 한 총각이 한 처녀에게 구애하거나 청혼하는 행동을 묘사할 때 사용되는 구문으로서 이혼당한 아내를 다시 아내의 자리로 회복시키는 행동을 묘사하는 표현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숫처녀같은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영접하여 혼인예식을 치루시겠다는 결단에 이르신 것이다. 직역하면 이 소절은 “나는 너를 나에게 정혼시키겠다”(혹은 약혼시키겠다)는 의미다(C. F. Keil and F. Delitzsch, Minor Prophets, Vol. 10[trans. James Martin; Grand Rapids, MI: Eerdmans, 1988], 64).
17) 19-20절에 나오는 의, 공평, 인애, 긍휼, 진실함 앞에 붙어 있는 전치사 쁘(bĕ)는 신랑이 신부를 아내로 데리고 올 때 지불하는 선물(대가)을 함의하는 전치사다(BDB, 90. III. 2; 겔 3:14). 야웨께서는 압도적인 계약적 선물을 지불하시고 이스라엘을 아내로 삼으신다. 다른 말로 하면 이스라엘이 야웨의 아내로 남아있으려면 이 신랑의 예물을 잘 받아 그것들을 만천하에 과시하여야 한다. 의, 공평, 인애, 긍휼, 진실함이 신부인 이스라엘이 구현해야 할 계약적 도덕적 덕목이자 가치가 된 것이다(6:4-6; 10:12; 12:6).
18) “알다”라는 말은 계약신학적 측면에서 보면 친밀한 연합상태를 의미한다. 이스라엘이 야웨 하나님의 사랑과 계약적 투신을 아는 만큼 야웨의 계약적 요구를 알고 이해한다는 말이다. “알다”라는 말은 여기서 “순종하다”는 말과 거의 동의어다(H. Huffmon, “The Treaty Background of Hebrew yā‘da,”BASOR 181[1966]: 31-37).
19) “응답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아나(‘ānā)는 “대답하다,” “주의깊게 경청하다,” “기꺼이 반응하다,” “소통하다”를 함의한다(BDB, 772; HALOT, 852).
20) 3인칭 남성대명사가 주어로 쓰이는 이 구문은 상황절로서 앞 소절의 상황과 동시에 일어나는 부대상황을 기술할 때 사용되는 구문이다. 22절의 “그것들”도 마찬가지 구문이다. 응답이 응답을 낳는 상황이 동시발생적이라는 점을 강조한다(하나님--->하나님께 응답--->땅에 응답--->곡식에 응답--->이스르엘에 응답).
21) “이스르엘”이라는 말에는 삼중적인 어희(語戱)가 작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1) 1:4, 5절에서 이스르엘은 예후가 흘린 피가 흥건히 고인 죄악의 장소였다. 하나님의 심판을 촉발한 이스르엘이 이제 은총의 장소가 된다는 것이다; (2) 23절에 나오는 “내가 심으리라”는 말과 조응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다시 심으실 것임을 강조하는 말이다; (3) 이스르엘은 이스라엘과 유사하게 들리는 유음이의어다. 이스르엘에 대한 심판이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이었듯이, 이스르엘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된다는 것이다.
22) 이스라엘을 대표하던 호세아의 두 자녀(딸 로루하마, 아들 로암미)를 가리킨다.
23) 23절(MT 25절) 마지막 소절도 3인칭 남성대명사(hû’)로 시작되는 상황절이다. “내 백성”이라고 말하는 하나님께 동시적으로 이스라엘이 “내 하나님”이라고 응답하는 상황을 부각시킨다.
24) 단락 구분에 관하여 다른 견해를 보려면 이동수,『호세아 연구』(서울: 장로회신학교 출판부, 2005), 29-30을 참조하라.
25) 이동수, Ibid., 41.
26) Douglas Stuart, Hosea-Jonah(WBC; Waco, TX: Word Books, 1987), 61.
27) Werner H. Schmidt, The Faith of the Old Testament(trans. John Sturdy; Philadelphia: Westminster, 1983), 28.
28) Gerhard von Rad, Old Testament Theology, Vol. 2(trans. D. M. G. Stalker; San Francisco: Harper, 1965), 142-143.
29) 이 문제에 대한 자세한 논의를 보려면, 김회권의 『신명기의 기원-모세저작설의 해석학적 함축』(장로회신학대학원 미간행 신학석사 논문, 1993), 124-127을 참조하라.
30) Walther Eichrodt, The Theology of the Old Testament, Vol. 1(London: SCM, 1975), 36-46.
31) Gerhard von Rad, Old Testament Theology Vol. I. The Theology of Israel’s Historical Traditions(trans. D.M.G. Stalker; San Francisco: Harper, 1962), 64-65. 폰라트는 예언운동을 촉발시킨 네 가지 요인들을 논한다: (1) 바알 숭배의 침투로 인한 혼합주의의 득세로 야웨 숭배의 급격한 쇠퇴; (2) 상비군, 관료조직 등 국가 조직의 형성으로 이스라엘 계약공동체는 야웨의 보호와 인도로부터 자유로운 자율적 기관으로 발전; (3) 국가 운영(상비군과 관료)을 위한 징세와 군역(군사 의무)의 과다한 요구가 이스라엘의 기초사회조직인 종족사회(clan systems) 붕괴로 애국심의 기초 단위 망실. 지주들이 농토 장악, 원통한 농민 절규 발생, 과도한 징세와 군역 충당으로 국방력의 근간 쇠락; (4) 앗수르 제국의 등장.
32) Eichrodt, Ibid., 46.
33) 이동수, “나의 하나님”(호 2:18-25), 『호세아 연구』, 66-67.
34) 호세아가 12:13에서 출애굽의 영도자를 거론할 때 “모세”라는 이름을 거명하지 않고 “한 선지자”라고 언표한 점은 또 다른 연구 과제처럼 보인다.
35) 발터 침멀리도 예언자들과 고대 구전 구원사 전승과의 관계 연구에서 모세오경을 주전 8세기 예언자들의 신학보다 더 후의 저작물로 보는 벨하우젠류의 연구 방향보다는 모세가 예언자들에 대하여 갖는 우위성을 탐구하는 방향이 더 진지하게 추구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적절하게도 오경 중에는 주전 8세기 예언자들에게 돌릴 수 없는 율법들이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있음을 지적하고 있다(Walther Zimmerli, The Law and the Prophets[Oxford: Basil Blackwell Press, 1965], 30).
김회권 교수
Ⅰ. 들어가는 말
일찍이 18-19세기 유럽의 종교사학파 학자들은 낭만주의, 진화론, 헤겔의 정신진화론적 철학의 영향으로 구약성경의 종교를 원시적 정령신앙에서 윤리적 유일신신앙으로 진화된 종교라고 규정했다. 이들은 모세 시대의 종교는 비록 정경적 순서에 있어서는 예언서 앞에 배치되어 있고, 또 연대기적으로도 예언자 종교보다 앞선 시기를 반영하는 종교로 배치되어 있으나 실은 예언자들의 윤리적 유일신신앙이 이스라엘 구약 종교의 절정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들은 모세 오경이 말하는 근본적이고 토대적인 종교나 율법체제는 포로기 이전의 이스라엘 사회를 규정한 종교체제의 일부라기보다는 포로기 이후 유대교를 창시하는 종교체제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런 학자들의 주장은 시대정신에 의해 성서주석이 얼마나 크게 영향을 받을 수 있는가를 예증한 주장으로 견고한 성서주석학자들의 예리한 귀납적 주석작업에 의해 지속적으로 비판당해 오고 있다. 이 글은 이런 종교사학파적인 이스라엘 종교 이해에 대한 비판적 연구로서 주전 8세기 북이스라엘 예언자 호세아의 예언에 대한 주석적 연구다.
호세아서는 주전 8세기 북이스라엘의 예언자 호세아의 예언을 집성한 집성물로서 북이스라엘 왕국 말기의 정치적 종교적 혼란과 격변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이 예언서는 북이스라엘 왕국의 정치적 종교적인 일탈과 타락을 야웨와 이스라엘이 맺은 혼인계약의 파기라고 본다. 야웨와 이스라엘의 혼인적 관계(이스라엘의 남편이요 主로서 야웨와 이스라엘의 계약)를 전제하고 그 혼인관계가 파괴된 상황을 탄핵하고 있는 것이다. 모두 14장에 걸쳐서 예언자는 이스라엘과 야웨 사이에 있어야 할 혼인관계의 파괴상황을 규탄하며 그 원인을 다른 남자들(情夫)을 따라간 이스라엘의 음행에 돌린다.1)
호세아가 당대의 종교제의, 왜곡된 야웨 예배제의와 급격하게 단절할 수 있게 만든 원천은 이스라엘의 초기 전승, 특히 출애굽 전승에의 호소였다. 이 출애굽 전승은 엘리야에게 남아있었던 전승으로 남왕국보다는 북왕국에 더 생생하게 남아있었다. 호세아는 이스라엘의 존재(이스라엘과 야웨의 관계의 기초)는 애굽에 있었을 때(11:1; 12:13), 광야에 있었을 때(9:10; 13:5; 비교. 2:10) 이미 야웨와의 계약 관계에서 확정되어졌다는 점을 강조했다. 외형주의화되어 있는 당시의 야웨 예배, 조작적 예배 분위기에 맞서서 호세아는 인격적인 관계, 친밀한 앎을 기반한 자발적인 순종과 사랑(11:1의 아버지와 아들 관계; 2장의 남편과 아내 관계)의 관계를 역설했다. 광야시절에 야웨의 인격적 투신을 동반한 전폭적인 사랑이 이스라엘을 향하여 쏟아졌다는 점을 주목하며 신(新)광야시대를 주창한 것이다(’āhab: 11:1; 비교. 14:5).2)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가나안의 풍요를 경험하면서부터 이스라엘은 야웨 하나님께 의존하지 않고도 독자적인 국가적 생존의 길을 개척해 갔다(13:5; 비교. 9:10; 10:1-2, 11-13). 외교와 국력, 경제력과 관료조직, 왕과 군대 등이 국가공동체의 중심요소들로 부상한 것이다. 이런 탈선과 배도의 결과 국가적 멸망이 초래되었으며 이 국가적 멸망 너머에 준비되고 기획된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예고와 선포가 호세아의 핵심메시지였다.
이 글의 목적은 두 가지다. 첫째, 그것은 호세아에서 광야전승에 대한 직간접적인 언급이나 암시를 찾는 것이다. 둘째, 그것은 8세기 문서 예언자들, 특히 호세아의 예언의 선험적 근거인 ‘모세전승’ 혹은 ‘광야전승’의 기능을 밝히려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구체적으로 호세아 2:14-23에 대한 주석적 연구를 수행할 것이다. 이 주석적 연구를 통하여 호세아에서의 광야전승의 기능을 살펴봄과 아울러 또한 8세기 예언자들이 윤리적 유일신교의 창시자가 아니라 ‘모세 - 광야전승’의 르네상스 운동자이며, 그들은 ‘모세 - 광야전승’에 대한 기존의 앎을 전제하고 예언활동을 전개하였다는 것을 밝혀내고자 한다.
II. 호세아의 이스라엘 구원사의 시원(始原)(광야 전승) 의존
율리우스 벨하우젠은 주전 13세기의 모세시대가 아니라 주전 8세기 문서예언자들이 구약의 유일신 신앙과 계약신앙의 원류라고 주장하는 한편 모세오경은 고대이스라엘에 대하여 알려주는 책이 아니라 포로기 후기 유대교 상황을 반영하는 문서일뿐이라고 주장하였다.3) 벨하우젠은 이스라엘의 유일신 신앙은 특정 시점의 계시의 산물이 아니라 정령신앙-다신교-윤리적 유일신 종교로 이어지는 종교 발전 도상의 한 현상일뿐이라고 주장한 것이다.4) 그러나 이런 벨하우젠의 입장은 성경의 증언들과는 매우 다르다. 성경은 특정한 역사속에서 이뤄진 하나님의 자기계시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서 있었던 약속과 언약의 역사가 윤리적 유일신 신앙을 인류에게 선사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음을 강조한다. 벨하우젠 자신이 윤리적 유일신 신앙의 창시자들이라고 그토록 강조해마지 않았던 주전 8세기 예언자 중 한 사람인 호세아는 어디에서도 자신이 윤리적 유일신신앙의 창시자라는 의식을 보여주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그의 책 전편에서 이전에 있었던, 즉 이스라엘 역사의 시원(始原)에 있었던 전승들에 호소하여 자신의 비판적 예언들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벨하우젠의 주장에 대항하여 호세아를 비롯한 주전 8세기 예언자들은 새로운 종교의 창시자라기보다는 옛 종교의 비판적 재해석자로 간주하는 편이 낫다는 주장이 계속 있어왔다. 주전 8세기 예언자들은 모세 중심의 ‘광야 - 율법 - 제의전승’에 대한 기존의 정보를 가진 자들이며, 이 제의의 이교적 변질에 대항한 자들이었다는 것이다(카우프만, 시갈, 침멀리 등). 호세아의 중심주장은 유일하신 야웨 하나님의 자기계시가 이스라엘 역사의 시원에 있었다는 주장이다. 이스라엘의 출애굽 구원, 광야인도와 계약체결 등 일련의 구원사적 궤적들에서 이스라엘은 야웨 하나님께서 배타적 요구를 가진 하나님임을 점차로 깨달아갔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전승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지 않았다면 당대 이스라엘의 종교와 정치상황에 대한 호세아의 예언자적인 비판은 아무런 반향도 불러일으키지 못했을 것이다. 새로운 종교를 도입하는 사람이 어떻게 과거의 전승에 호소하여 당대의 지배 엘리트들과 백성들을 규탄할 수 있을까?
호세아서 전체에 걸쳐서 야웨의 역사적 구원행위의 전형인 ‘출애굽 - 광야전승’이 가나안의 자연신들인 바알제의적 음란으로 전락하는 현상이야말로 예언적 탄핵의 주요대상이 되고 있다. 야웨숭배와 야웨신앙은 바알리즘의 신화적 결혼제의로 축소될 수 없는 역사적 실재였고, 이 ‘출애굽 - 광야전승’의 역사적 체험의 핵심은 전적으로 야웨의 절대주권적 계약체결에서 비롯되었음을 밝힌 것이다. 호세아는 매우 빈번하게 광야전승이나 그와 관련된 전승을 전제하고서 당대의 이스라엘의 영적 일탈과 타락을 규탄하고 있다. 호세아서에서 적어도 광야(계약)전승과 그것과 관련된 전승을 직간접으로 암시하는 구절들은 다음과 같다(개역개정인용).
1:2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함이니라 하시니(비교. 4:15, 17-18; 5:3; 6:10;
7:4; 9:1)
1:9-10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의 이름을 로암미라 하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요 나는 너 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임이니라 10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 같이 되어서 헤아릴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을 것이며 전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살아 계신 하나 님의 아들들이라 할 것이라
2:2 너희 어머니와 논쟁하고 논쟁하라 그는 내 아내가 아니요 나는 그의 남편이 아니라
2:5 그들의 어머니는 음행하였고 그들을 임신했던 자는 부끄러운 일을 행하였나니
2:7 그제야 그가 이르기를 내가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리니
2:13 그가 귀고리와 패물로 장식하고 그가 사랑하는 자를 따라가서 나를 잊어버리고 향을 살라 바알들을 섬긴 시일대로 내가 그에게 벌을 주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2:14-23 14 그러므로 보라 내가 그를 타일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15 거 기서 비로소 그의 포도원을 그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그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 16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 17 내가 바알들의 이름을 그의 입에서 제거하여 다시는 그의 이름을 기억하여 부르는 일이 없게 하리라 18 그 날에는 내가 그들을 위하여 들 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과 더불어 언약을 맺으며 또 이 땅에서 활과 칼을 꺾어 전 쟁을 없이하고 그들로 평안히 눕게 하리라 19 내가 네게 장가 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 들며 20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 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2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내가 응답하리라 나는 하늘에 응답하 고 하늘은 땅에 응답하고 22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에 응답하고 또 이것들은 이스 르엘(심으심)에 응답하리라 23 내가 나를 위하여 그를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 라 하리니 그들은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하시니라
3:1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4:1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논쟁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4:6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 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4:12 내 백성이 나무에게 묻고 그 막대기는 그들에게 고하나니 이는 그들이 음란한 마음에 미혹되어 하나님을 버리고 음행하였음이니라
5:3 에브라임은 내가 알고 이스라엘은 내게 숨기지 못하나니 에브라임아 이제 네가 음행하 였고
5:7 그들이 여호와께 정조를 지키지 아니하고 사생아를 낳았으니 그러므로 새 달이 그들과 그 기업을 함께 삼키리로들이 여호와께 정조를 지키지 아니하고 사생아를 낳았으니 그 러므로 새 달이 그들과 그 기업을 함께 삼키리로다
6: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 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4 에브 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 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5 그러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그들을 치고 내 입의 말로 그들을 죽였노니 내 심판은 빛처럼 나오느니라 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7 그들은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 기에서 나를 반역하였느니라
8:1 그들이 내 언약을 어기며 내 율법을 범함이로다 2 그들이 장차 내게 부르짖기를 나의 하나님이여 우리 이스라엘이 주를 아나이다 하리라
8:14 이스라엘은 자기를 지으신 자를 잊어버리고
9:10 옛적에 내가 이스라엘을 만나기를 광야에서 포도를 만남 같이 하였으며 너희 조상들 을 보기를 무화과나무에서 처음 맺힌 첫 열매를 봄 같이 하였거늘 그들이 바알브올에 가서 부끄러운 우상에게 몸을 드림으로 저희가 사랑하는 우상 같이 가증하여졌도다
11:1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
12:6 그런즉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와 정의를 지키며 항상 너의 하나님을 바랄지 니
12:9 네가 애굽 땅에 있을 때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내가 너로 다시 장막에 거주 하게 하기를 명절날에 하던 것 같게 하리라
13:4-5 4애굽 땅에 있을 때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나 밖에 네가 다른 신을 알지 말 것이라 나 외에는 구원자가 없느니라 5 내가 광야 마른 땅에서 너를 알았거늘
이상의 인용구절들은 적어도 세 가지 사실을 가리킨다. 첫째, 이스라엘과 야웨 하나님은 한 때 이상적인 연합(결혼적 관계) 안에 머물렀고 그 이상적 결속상태가 이스라엘 역사의 시원이었다. 둘째, 그것은 광야와 관련된 구원사의 기억 속에 갈무리되어 있다. 셋째, 그런데 그런 한 때 감미로웠던 결속이 이제 바알숭배로 인하여 이스라엘이 행음하므로 와해되거나 해체되고 있다는 것이다. 바알신 숭배는 이스라엘 사회의 핵심구성원들인 자유농민의 토지박탈을 강요한 지주 제도를 이스라엘 사회 속에 도입하는 계기가 되었다(미 6:16).5) 호세아는 가나안 농경토착문화에서 기득권을 행사하던 바알 종교에 의하여 야웨 종교가 급격하게 약화되거나 쇠퇴하는 상황에 직면하여 가나안 농경문화에 이스라엘이 접목되기 이전 상황, 즉 광야상황에서 다시금 영적 종교적 국가적 갱신이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바알6) 종교제의와 처음으로 조우한 곳은 바알브올에서였다(민 25:3-4; 호 6:10 “그들이 바알브올에 가서 부끄러운 우상에게 가서 몸을 드림으로”).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더니 그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하니라”(민 25:1). 여기서 이스라엘 남자들이 모압 여자들과 행음하였다고 말할 때 “행음하다”의 주어는 3인칭 남성단수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온 백성을 대표하는 이스라엘 남자가 한 덩어리가 되어 즉 종교적 제의를 통하여 정식으로 행음하였음을 의미한다.7) 이 장면이 호세아가 규탄하는 이스라엘의 국가적 집단적 바알 숭배(행음)의 첫 사례다.
바알은 고대 시리아 팔레스틴 일대는 물론 바벨론 앗수르 지역에서까지 숭배되던 풍요와 다산의 신이었다(사 46:1; 렘 50:2; 51:44). 아마르나 서신(the Amarna Letters)들에서 보면 바알은 거의 항상 바벨론-앗수르 지역의 천둥신 하다드(Hadad)와 병렬적으로 언급된다. 바알브올 사건 이후 가나안 땅에 정착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이스라엘 농민들은 숱한 바알 관련 성읍들과 바알 숭배제의들을 목격하며 자신들의 종교제의로 수용하기 시작한다. 사사 기드온 사후에 이스라엘은 바알 브릿(Baal-berith)을 섬겼다(삿 8:33; 비교. 9:46). 바알과의 관련을 가리키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이름들에서 추론되듯이, 때때로 이스라엘은 야웨 예배와 바알 숭배를 동일시하기도 했던 것처럼 보인다(대상 12:5의 Bealiah[Yahweh is Baal]; 대상 14:7의 Beeliada[Baal knows]; 비교. 삼하 5:16의 Eliada[God knows]; 대조. 삿 6:32 여룹바알[Let Baal contend with him]기드온).8) 이스라엘의 바알 숭배를 비약적으로 촉진시킨 인물이 바로 오므리의 며느리요 아합 왕의 시돈 출신 아내(시돈의 바알종교 제사장 엣바알의 딸) 이세벨이었다. 그녀는 사마리아에 바알 신전을 건축하고 850명 이상의 국가지원 사제들을 고용하고 지원함으로 전이스라엘을 바알 숭배로 가득 채웠다(왕상 16:32; 비교. 왕하 10:28). 호세아는 가나안 농경문화에 너무나 깊이 함몰되어버린 동시대의 백성들에게 다시 광야로 나아갈 것을 독려한다. 광야로 나아가는 것은 나라의 멸망을 통해 땅을 빼앗기는 경험을 의미한다(비교. 사 41:17-20). 다가올 국가적 멸망, 왕조의 멸절,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의 기간 구성원들의 앗수르 유배상황을 광야상황으로 설정하는 것처럼 보인다.9) 이 파괴적이고 부정적인 경험이 오히려 이스라엘의 국가갱신, 종교갱신의 기회가 된다고 본 호세아는 광야시대의 순수한 시절로 이스라엘을 소환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호세아의 신학적 역사해석이 가장 현저하게 드러난 대목이 호세아 2:14-23(MT 2:16-25) 단락이다.
III. 호세아 2:14-23에 나타난 호세아의 케리그마(kreygma), “광야가 미래의 희망이다”
광야전승에 대한 호세아서의 적극적 해석은 2:14-23이 잘 보여 주고 있다. 이 단락에서 호세아는 세 가지를 말하고 있다. 첫째, 임박한 멸망의 위기는 이스라엘 나라의 창조적 해체의 기회를 제공한다(1장). 땅을 빼앗기고 다시 광야(미드바르)로 내몰린다. 광야는 황폐함의 상징이 아니라 영적 갱신, 국가갱신이 일어날 장소다. 이스라엘의 영적 및 국가적 갱신은 하나님과 맺은 계약갱신으로 실현된다. 아골(Achor) 골짜기(수 7:1-26)가 소망의 문으로 역전되는 처소다. 이 광야에서 야웨 하나님은 새로운 출애굽적 구원을 기획하시고 실행하실 것이다. 둘째, 광야에서는 이스라엘이 다시는 야웨와 바알을 혼동하지 않는다. 바알의 이름이나 기억은 도말될 것이다(“거기” “그곳”이 강조된다). 셋째, 광야는 새로운 번영을 초래할 언약체결이 이뤄질 곳이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다시금 계약적 친밀감으로 재결속될 것이다. 여기서 재계약은 이스라엘을 땅에 다시 심는 하나님의 행동으로 표현된다(23절; 렘 1:10). 땅에 심는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가나안 재정착을 의미한다. 호세아는 순수하고 좋았던 시절로 이스라엘 역사의 시원시기인 광야시절을 기준으로 삼고, 가나안 농경사회에 접목된 가나안 정착생활이 배교로 귀결된 상황을 타개할 해결책으로 다시 광야로 내몰리는 상황을 설정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호세아의 광야 전승 해석은 출애굽기, 민수기, 신명기의 광야 전승해석과는 사뭇 다르다. 모세오경에서의 광야경험은 배교의 시작점이자, 앞으로 가나안 땅에서 벌어질 온갖 종류의 배교와 일탈의 남상(濫賞)이었는데 어떻게 해서 호세아는 광야전승을 긍정적으로 규정하는지 연구해 볼 주제다. 아마도 가나안 농경사회와의 접촉이 가져온 온갖 폐해의 빛 아래서 볼 때 광야시절이 상대적으로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가 훨씬 더 순수하고 순전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1. 본문 사역(私譯)10)
14(MT 16) 정녕11) 보라 내가 친히12) 그녀를 유혹하여13) 광야를 걷게 하리라. 그리고 그녀의 심장에 대고 말하리라. 15 그리고 그곳으로부터14) 그녀에게 그녀의 포도원을 그에게 주며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라. 그러면 그녀가 그곳을 향하여 젊었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때처럼 응답하리라.
16 그 날에-이것은 야웨의 말씀이시다-네가 말하리라. “내 남편”. 그래서 나를 더 이상 “내 바알”15) 이라고 일컫지 않으리라. 17 내가 바알들의 이름을 그녀의 입술에서 제거하리니 그들이 더 이상 이름으로 기억되지 아니할 것이다 18 그 날에는 내가 그들을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과 더불어 언약을 맺으리라. 그리고 활과 칼과 전쟁을 이 땅으로부터 부숴뜨려 제할 것이며 그들로 평안히 눕게 하리라 19 내가 영원히 네게 장가들되16) 17) 의와 공평과 인애와 긍휼로 네게 장가들리라 20 내가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 들리니 네가 야웨를 알게18) 되리라 21 그 날에 “내가 응답하리라”고 말할 것이다19) 야웨의 말씀이시다. “내가 하늘들에 응답하며 그들은20) 땅에 응답하고 22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에 응답하고 그리고 그것들은 이스르엘21) 에 응답하리라 23(MT 25) 내가 나를 위하여 그녀를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22) 를 향하여 “너는 내 백성이라”고 말할 때 그는23) 말하리라 “내 하나님.”
2. 주석
단락 구분에 있어서는 다른 견해가 있을 수 있으나 주제적 응집성과 유기적 관련성에 비추어 14-23절을 하나의 단락으로 구별하여 읽을 수 있다고 본다. 특히 16회에 걸쳐 사용되는 1인칭 동사들의 사용은 전후 문맥과 사뭇 분위기가 다른 회복과 미래 희망으로 가득 찬 비전을 제시하는 하나님의 절대적 주도권을 효과적으로 강조하고 있다.24) 이 1인칭 동사들은 3-15절에 선포된 징계들이 주는 암울함과 비관주의를 능히 극복케 하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적 주도권이 두드러지는 적극적 회복의 약속들을 효과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1-13절이 야웨를 알지 못하고 망각한 결과 초래된 심판과 재난을 말한다면, 14-23절은 그 심판과 재난의 신학적 목적과 결과를 희망의 언어로 강조하는데 그 심판과 재난의 궁극적 목적은 이스라엘이 다시금 “야웨를 알게 되는 미래”를 창조하는 데 있다. 풍요와 다산의 종교인 가나안 농경종교 대신에 이스라엘은 이제 광야에서 새 포도원을 선물로 받는다.25)
14절은 1:1-2:13을 지배하던 심판과 징벌의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강조적 부사 라켄, “정녕”으로 시작된다.26) 이 위로 예언을 듣는 예상 청중은 바알들을 섬기고 거짓된 연인들을 따라갔다가 징벌을 당한 이스라엘이다. 야웨를 잊어버리고 바알을 섬긴 날수대로 징벌을 받은 이스라엘에게 들려준 위로다. 이사야 40장 1-2절을 방불케 하는 전환이 14절에 나타난다. 야웨께서는 부정한 아내처럼 남편을 배반한 이스라엘을 가나안 농경문화의 주신(主神)역할을 하던 바알 종교와 분리시켜 놓기 위하여 광야로 데리고 나간다. 총각이 처녀를 유혹하듯이 이스라엘을 유혹하여 광야를 걷게 하신다. 야웨께서는 이 광야길을 걷는 이스라엘의 심장에 대고 말하려고 하신다. 심장에 대고 말하는 행동(디뻬르 알 렙)은 가슴에 닿게 말하다, 감미롭게 말하다, 혹은 설득력있게 말하는 행동을 의미한다. “심장에 대고 말하다”는 “정다이 말하다”(사 40:2)와 같은 표현으로 이스라엘과 야웨와의 계약이 가지는 밀월관계의 극치를 표현한다(비교. 출 22:5[16]; 호 7:11; 참조. 창 34:3; 룻 2:13). 가나안 농경문화에 깊이 빠져든 이스라엘이 주술적이고 미신적인 바알제의에서 분리되어 단독자가 될 때 그녀의 심장에 대고 말씀하려고 하신다. 이처럼 앞 단락 3절의 “마른 땅”은 죽음과 심판의 장소인데 비해 14절의 ‘광야’는 사랑과 회복의 이미지로 역전되어 사용된다.
15절에는 광야 장소를 강조적으로 가리키는 “샴”(거기)이라는 부사어가 두 번이나 사용된다. 12절에 의하면 가나안의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는 거칠게 되고 들짐승의 먹이가 되어 버렸다.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는 단지 과수농업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스라엘 계약 공동체가 바로 하나님의 포도원이요 무화과나무 동산인 것이다(사 5장; 렘 2장).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가 수풀로 변하고 들짐승의 먹이터로 변질되었다는 것은 외국군대에 의하여 이스라엘 공동체가 파괴되고 유린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사 5:5-6).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이스라엘에게 포도원을 주시며 죄악으로 인한 심판과 징계의 땅인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15절 하반절은 이스라엘이 “그곳을 향하여” 즉 광야를 향하여, 그녀의 젊었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때처럼 야웨 하나님께 응답하게 될 미래를 그린다.
16절은 그 응답의 내용을 말한다. 야웨께서 아골 골짜기를 소망의 문으로 삼아주시는 바로 그 날에 이스라엘은 야웨를 향하여 “내 남편”이라고 부를 것이다. 이 구절은 “이것은 야웨의 말씀이시다”라는 첨기에 의하여 도입되고 있다. 이 예언은 신적 기원을 가진 말씀이라는 것이다. 야웨 하나님을 내 남편이라고 부르는 그 때 더 이상 이스라엘은 야웨를 더 이상 “내 바알”이라고 일컫지 않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야웨와 바알을 얼마나 심각하게 혼동했는지를 추정케 한다.
17절은 이스라엘의 일상언어, 종교적 언어에서 바알들의 이름들이 더 이상 언급되거나 기억되지 않게 하실 것임을 천명하시는 하나님의 결심을 강조한다. 이스라엘은 위기의 순간에, 자연재해의 순간에 야웨 하나님 대신에 바알들을 불러 댄 것이다(쿤틸레트 아주르디 비명은 지역을 관할하는 바알의 칭호들을 포함).
18절은 이스라엘의 포도원을 유린한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아모스 7:1-3의 메뚜기)과 언약을 맺으실 하나님의 계획을 강조한다. 이 피조물들은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대행자들인데 이제 하나님께서 그들과 언약을 맺어 더 이상 그들이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행위를 수행하지 못하도록 하시겠다는 의미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징벌하도록 파견한 이방군대들이 바로 들짐승이며 새와 곤충인 것이다.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가 들짐승의 밥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을 기술하는 12절과는 달리, 18절에는 모든 당신의 백성들을 위하여 들짐승과도 계약을 맺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난다. 들짐승, 새, 곤충이 이방침략군을 빗대어 말하는 것으로 읽는 이해를 지지하는 것이 18절 하반절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겨누어진 활, 칼, 전쟁을 그치게 하실 것이다. 이스라엘이 평안히 안식을 누리게 하실 것이다.
19-20절은 이 안전과 평화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구적인 안전과 평화로 정착하도록 노력하시는 하나님의 결단을 부각한다. “내가 영원히 네게 장가 들되 의와 공평과 인애와 긍휼로 네게 장가들리라 20 내가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 들리니 네가 야웨를 알게 되리라.” 야웨 하나님께서는 다시 이스라엘을 신부로 맞아들이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신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을 받은 수혜자가 되어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하게 된다. 응답하게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약적 요구를 이해하고 능동적으로 그것에 순종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영적 혼인상태가 정립된 이후에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축복은 농업 부흥(국가적 부흥의 상징)을 맛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하늘들에 응답”하실 것이다(21절). 하늘의 비와 구름을 보내주시겠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명령에 응답한 하늘은 땅에 비를 내려줌으로써 땅에게 응답하게 될 것이다. 22절에 의하면 땅은 보다 더 구체적으로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에 응답하고 그리고 그것들은 이스르엘(심으심)에 응답하게 될 것이다. 곡식을 박탈하는 대신에(9절) 이제 땅은 곡식을 풍성히 낼 것이다(22절).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에 응답하여 풍성한 수확이 거두어질 것이다. 그것들은 특히 이스르엘 평원에서 큰 풍년을 이룰 것이다. 이스르엘은 피 흘리는 장소가 아니라(호 1:4-5), 새로운 싹들(새 백성)이 심겨진 땅이 될 것이다.
23절은 야웨와 이스라엘의 새로운 혼인의 결과를 말한다. 야웨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다시 가나안 땅에 심으시며(포로들을 재정착시키는 것을 의미) 한 때는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한 때는 “내 백성 아니었던 자”를 향하여 “너는 내 백성이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그 때 가나안 땅에 새롭게 정착된 이스라엘은 “내 하나님”이라고 부르며 응답할 것이다. “나의 바알”은 “나의 남편”으로 불리워 질 것이다(16절).
결국 2:14-23은 바알리즘(Baalism)의 “신성한 결혼” 제의에 대항하는 하나의 새로운, 역사적인 ‘야웨 - 이스라엘’ 간의 결혼, 즉 계약체결이 새 출애굽의 형식으로 치뤄질 것에 대한 예언인 것이다. 이 본문은 모종의 심판과 징벌을 통과한 후에 이스라엘을 위한 야웨의 절대주권적 주도권에 의해 체결된 시내산 계약의 회복이 있을 것을 예언하고 있다.
3. 호세아서의 광야전승
붸르너 슈미트(Werner H. Schmidt)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출애굽 전승은 요셉지파에서 보양되다가, 북왕국의 선지자 아모스(3:2; 9:7)와 호세아(11:1; 12:9; 13:4)에게서 가나안화된 야웨 신앙을 갱신토록 외치는 거점이 되었다.27) 당대의 대다수 사람들이 구원사 전승을 빌미삼아 종교적 방종(성소 순례를 규탄하는 아모스)에 빠졌던 상황과 비교해 보면, 아모스와 호세아는 이 구원사 전승에 바탕하여 가나안 바알-농경문화와의 창조적 단절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아모스와 호세아는 구원론 중심의 출애굽 이해를 규탄하고 계약적 응답을 촉구한 것이다(암 3:2; 호 11:1-2). 호세아에서 사용된 공식 귀절 “나는 너희들이 애굽 땅에서 나옴으로부터 너희 하나님 여호와다”(12:9, 13:4)라는 하나님 사랑의 배타적, 독점적 성격을 나타낸다(3:1, 13:4). 바알의 풍요와 다산제의로 경사된 변질적 야웨신앙을 회복하기 위해, 호세아는 ‘시내계약-광야시절’의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계약적 밀월관계를, 이스라엘이 이미 공통적으로 알고 있는 영적 유산으로 전제하고 그의 예언활동을 전개한 것이었다(2:14-23).
구약의 공식 계약구절인 “나는 너희를 내 백성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는 광야에서 맺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계약적 밀월와 감격을 함축하고 있다. 이 호세아 단락에서 자주 반복되는 “응답하다”라는 동사는 이런 계약적 상호귀속을 천명하는 계약당사자의 선언 교환을 가리키는 말이다. 호세아 선지자는 이스라엘과 야웨와의 결혼관계적 밀월은 가나안의 다산제의에서 발생한 신들의 신성한 결혼제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고, ‘출애굽 - 시내산 계약 체결’이라는 유일회적 역사적 사실에서 연원된 것임을 강조한 것이다. 호세아는 출애굽 구원이라는 역사적 특수시점과 광야라는 특정장소에서 발생한 역사내적인 계약사건에 호소함으로써 자연순환적인 바알주의 신앙과 야웨 종교가 얼마나 다른가를 납득시키기를 원하였던 것이다. 호세아는 바알리즘의 신화적 결혼제의에 대해 야웨와 이스라엘의 계약적 밀월은 ‘역사’에서 발생하였다는 주장을 펼친 것이다. 겨울(죽음의 신 모트가 바알을 죽이는 시기)-봄(바알이 모트를 죽이고 부활하는 시기)의 자연순환적인 리듬을 극화(劇化)하는 바알제의와 대립하는 야웨 종교는 바알종교와 같은 실용주의적 실존주의적인 구원과는 전혀 다른 엄정한 도덕적 원리에 따라 이뤄지는 하나님의 구원활동을 강조한다.
그리하여 호세아(아모스도)는 그 이전의 어떤 예언자에게서도 발견되지 않는 파격적 미래상, 즉 야웨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의 ‘계약’은 해체되고, 이스라엘은 멸망하게 될 것을 선포했다. 야웨의 계약, 곧 야웨와 이스라엘의 결혼은 자연신화에 근거한 자율적 관계가 아니라, 상호간의 인격적 신실성을 요구하는 살아있는 ‘역사’적 실체임을 설파한 것이다. 바알제의가 자연신화에 근거한 ‘바알-아세라’의 “신성한 결혼”제의에 근거한 다산지상주의 종교일 때, 야웨신앙은 ‘출애굽-시내산 계약’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근거한 ‘계약’관계임을 그는 설파한 것이다.
이처럼 호세아는 그 당시 변질된 야웨신앙의 시정을 촉구할 때 그가 선험적으로 기대는 근저로서 ‘모세-광야전승’의 풍요로운 영적 유산으로 되돌아 갔던 것이다. 호세아가 말하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4:1, 6; 6:6)은 구원사 전승에 대한 친숙한 앎을 의미하는 것이다.28) 이렇게 볼 때 호세아는 벨하우젠류의 종교사학파가 그리듯 윤리적 유일신앙의 창시자라기보다는, 모세의 광야전승의 중흥자로 자리매김되는 것이 훨씬 더 균형잡힌 판단일 것이다.29) 발터 아이히로트(W. Eichrodt)에 의하면 모세 이후의 역사에서 모세의 ‘출애굽-광야’ 계약전승을 가나안 바알 종교에다 순치시키려는 과정에서 심각한 갈등이 유발되었다.30) 이 갈등을 본격적으로 인지한 것은 아마도 엘리야-엘리사-에후로 이어지는 주전 9세기 반(反)바알주의 척결운동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를 본격적인 신학적 성찰의 대상으로 삼고 바알종교와 야웨 종교의 차이를 명확하고 체계적으로 밝힌 사람들은 주전 8세기 예언자들이었다.31) 아이히로트에 따르면, 호세아를 비롯한 주전 8세기 예언자들이 야웨 종교의 혼합주의적 경향성을 인지하는 과정에서 그들은 윤리적 유일신 신앙을 주창하게 되었다. 세 가지 동화과정을 통해서 바알제의가 야웨 신앙을 위협했다.
무엇보다도, 주전 8세기 예언자들이 가장 심각하게 파악한 혼합주의적 양상은 첫째, 야웨종교의 신관이 가나안 토착 종교인 바알 종교의 신관에 의하여 심각하게 지배당하고 있었던 상황이다. “지역적 연고자에게나, 숭배나 제의에 참여하는 자에게 무조건 호의를 베푸는 바알은 의와 상호계약적 교감을 요청하는 야웨신앙을 위협했다.”32) 하지만 2:23이 분명하게 밝히듯이, ‘야웨-이스라엘’ 사이는 상호계약적 앎(교감)에 의하여 지탱되지 기계적인 주술이나 제의에 의하여 지탱되지 않는다(참조. 호 4:1, 6; 6:1-2). ‘바알-아세라’의 “신성한 결혼”제의에 참여하는 것이 풍요와 평화를 보증하지 않는다(2:18-20). 호세아는 “계약적 교감”보다는 일반적 종교제의적 위탁으로 외식화되고 변질된 야웨 신앙을 규탄하고, 그 원시적이고 순결한 광야시절의 ‘영적 교감’을 회복하기를 호소했다. 의와 공평, 인애와 긍휼과 진실함으로 결속된 계약관계를 지탱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또한 기계주의적 제의나 절기 축성(祝聖)이나 성소 순례 등이 아니라 의와 공평, 인애와 긍휼을 실천하는 부담을 스스로 떠맡아야 한다는 것이다. 호세아 12:6은 하나님께로 회복된 이스라엘은 “인애와 정의”를 지키면서 하나님의 계속적 구원을 기대하여야 함을 강조한다. 그러나 바알종교의 기계주의적 신관에 익숙한 대다수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감의 부재에도 어떤 위험도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하나님과의 결혼관계가 의와 공평, 인애와 긍휼의 가치를 공동체적으로 구현해야 할 의무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호세아가 가나안 정착생활 가운데 파괴된 야웨와 이스라엘의 결혼관계를 치유할 광야의 밀월적 계약관계의 복원을 주창하고 나선 것이다.
하지만 이 파괴된 영적 교감의 교착상태 속에서 심판과 위협이 먼저 등장했다. 그러나 이것이 “영적교감”을 회복할 순 없다. 또다시 하나님의 은혜 주도적인 ‘새로운 출애굽-새로운 광야’ 시대가 열릴 때만이 야웨 신앙은 회복된다. 호세아의 새로운 출애굽에 대한 생생한 비전은 무(無)에서 발생하지 않았다. 그가 속한 공동체 속에서 보양된 ‘모세-광야전승’에 기대어 발생한 것이다. 14절의 ‘광야’는 야웨가 말로 위로할 수 있는, 즉 심장에 대고 말할 수 있는 곳이다.
둘째, 호세아를 비롯한 주전 8세기 예언자들이 우려스럽게 주목한 야웨 종교의 가나안 동화현상은 가나안 정착 이후의 야웨신앙에서는 종교제의적 측면이 윤리적 측면보다 더 왜곡된 발전을 하였다는 점이다. 가나안 만신전에서 봄 파종기에 치러지는 ‘바알-아세라’의 “신성한 결혼”제의는 이스라엘 동경자들에게 큰 유혹이었고 배도의 지름길이었다.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그 당시 성전에서 벌어지는 제사장(Baal)과 성전창녀(Aserah)의 종교적 매음행위에 연루된 여인들은 흔히 있었던 사람들이고, 호세아의 아내 또한 예외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농업의 풍요를 보장하는 하나님의 계약적 돌보심에 대한 호세아의 강조(2:21-25)에는 당시 이스라엘의 야웨 종교에 엄청난 부정적 영향을 끼치던 가나안의 바알주의적 자연종교에 대한 변증적 의도가 깃들어 있다.33)
셋째, 가나안의 몰역사적 몰도덕적인 자연종교에 동화되어가던 야웨 종교 안에는 민족의 이익과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동일시하려는 절대적 관념론의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여로보암 Ⅱ세 때에 찾아온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풍요와 외교ㆍ국제관계에서의 득의 만만함은 북이스라엘의 거짓된 경건심을 더욱 고조시켰고, 전반적으로 낙관주의를 팽배시켰다. 이런 과정에서 이스라엘은 출애굽 구원경험과 실존적인 응답이 요청되는 야웨와의 계약을 가나안 종교의 신화적 제의 속에서 해소시켜 버렸던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 안에서의 독특한 구속사역을 자연 속에서 일어나는 순환체험으로 축소했고, “계약적 응답”이라는 야웨신앙의 본질을 외면해 버린 것이다.
이런 야웨 종교의 바알주의적 동화과정을 비판적으로 관찰하던 호세아는 이스라엘이 안일하게 도피해 있는 바알리즘적 야웨신앙의 진면목을 폭로하고, 새로운 출애굽이라는 위기상황을 연다. 하나님은 호세아의 세 자녀 이름들 - 이스르엘(뿌리신다), 로루하마(하나님의 계약적 사랑 즉, 긍휼이 더 이상 효력을 발휘하지 않는다), 로암미(더 이상 하나님과 계약적 결속과 상황응답을 수수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다)에서 이스라엘이 직면한 공동체적 국가적 위기상황을 들추어내신 것이다. 호세아에 따르면 이 위기상황은 피할 길이 없다. 심판과 징벌을 당하여 왕이나 제사장 없이 무정부 상태, 이방땅으로 끌려가는 유배상황을 거친 후에 새로운 미래가 열릴 수 있을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호세아는 그의 청중(독자)들에게 이스라엘의 음행과 우상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선행적(先行的) 심판을(2:1-13) 능히 압도하고 역전시키는(2:14-23) 새 출애굽의 여명을 희구하도록 초청하고 있는 것이다.
4. 소결론-광야에서의 새 출애굽
호세아 2:14-23에 따르면 야웨와 이스라엘 사이에 맺어진 계약의 주도권이 야웨께 있기 때문에,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야웨는 ‘계약체결-계약해제-계약 재체결’이라는 변증법적 긴장으로 “계약적 상호귀속”을 한층 더 고양시킨다. 호세아가 매음에 빠진 자기 아내를 다시 맞이해야 할 명령을 받았듯이. 이스라엘을 다시 맞이해야 할 ‘하나님-남편’의 고뇌스런 격정(pathos)을 본문은 잘 보여 준다. 음녀 이스라엘의 회개가 전제되거나 실현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로루하마-로암미’를 잇달아 선포하는, 이 신비롭고 심원한 야웨의 격정은 호세아서의 전체 주제이기도 하다. 결국 ‘로루하마-로암미’의 충격은 새로운 출애굽으로의 준비적 절차다.
시내산 계약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주도적인 계약이 갖는 함축은 야웨와 이스라엘의 계약적 상호응답 속에서 해명되면서, 예레미야와 같이 호세아는 야웨와 이스라엘 사이에 맺어진 계약의 본질을 출애굽기 19:5-6의 조건적 ‘만일’로 파악하려고 한다. ‘모세34) 계약-광야전승’에 대한 “조건적 계약”으로의 해석이야말로 호세아의 혁신적 해석인 것이다.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는 내 백성이 된다”는 계약 형식은 이스라엘이 회개를 통해 갱신될 임계점을 넘어버리는 경우에는 더 이상 효력이 없는 주문이 되어버리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백성됨은 하나님의 심판 때에 부정될 것(1:9)을 예언한 것이다. 이스라엘의 신앙과 사랑은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계약적인 긍휼에 대한 실존적이며 전인격적 응답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행음은 그 자체가 계약파기행위임을 선포하는 것이다. 따라서 가나안 땅에서 이어지던 구원사는 이제 단절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광야는 가나안 땅에서 이뤄지던 구원사의 단절을 의미하고 새로운 단계의 구원사가 시작될 수 있는 처소다.
앞의 주석에서 확인했듯이, 호세아에게 광야는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반항의 장소가 아니라, 종말론적 새 출발과 계약갱신점이 되는 곳이다. 야웨가 이스라엘을 “포도나무의 포도알을 만난 것” 같이 만난 “기쁨과 감격”의 만남의 장소였고, 계약적 밀월이 싹튼 곳이다. 이 광야의 결혼식 시내산 계약체결은 ‘로루하마-로암미’가 선포된 다음에 뒤따라 오는 절차로서, 이전보다 더 길고 오묘한 영적 상응(Mutural Knowledge)이 발생하는 새 출애굽을 예기케하는 모든 계약의 전범적(典範的) 기능을 수행한다.
호세아는 가나안 종교에서 유래하는 바알과 아세라의 신적 결혼관계를 야웨와 이스라엘 간의 역사내적인 계약적 밀월관계로 승화시켜 이해시켰다. 광야는 신부로서의 이스라엘의 (이스라엘의 정결은 하나님의 배우자적인 거룩한 관계) 정체성과 신랑으로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장소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호세아는 그 동시대의 레위 제사장 그룹에 의해 보양되어온 것으로 간주되는 광야전승을 활용하여, 야웨 백성의 이교화에 부성적 격정으로 맞선 것이다(4:6; 6:6; 8:12). 그는 ‘광야’와 포도원을 결합시키는 설교를 통해 오직 야웨만이 복지(2:7, 10)의 공급자이며, 풍요와 안식의 제공자임을 역설한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바알과 아세라의 음란제의에 의해 비가 내리고 각종 풍산이 발생한다고 신봉했으니 그 당시 이스라엘의 영적 일탈과 배교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2:5).
바알에 있어서 ‘광야’는 신적인 결혼에 의하여 회복되어야 할 “마른 땅, 불모의 땅”(죽음의 모트[Mot]가 지배하는 땅)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갖지만, 야웨의 백성에게는 종말론적 계약갱신의 거점이 된다. 가나안 만신전에서 자행되는, 성적으로 분화된 신들의 음란제의의 풍요주의로부터 이스라엘을 분리시켜 광야에서 맺은 계약적 밀월관계로 소환하려고 하는 것이 호세아 예언사역의 으뜸 목표였다. 광야에서는 육적 자아가 죽고 영적 자아가 거듭 태어나며 광야에서는 메마른 여정이 가나안 만신전의 음란 제의를 대체한다(1:9; 2:4).
이처럼 호세아 2:14-23은 지나간 구원사를 하나님의 남편과 같은 사랑과 정절에 대한 아내 이스라엘의 간음의 역사로 소급적으로 정리하되, 이렇게 정리된 배교의 역사를 배경삼아 ‘오늘’ 이스라엘의 배도를 능히 압도하고 극복하는 야웨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의 주도적 역사를 부각시킨다. 2:19-20절에 나오는 여섯 가지 주제-의, 공변됨, 은총, 긍휼히 여김, 진실함, 여호와를 아는 지식-는 4:1-2절에서 묘사되는 계약파기적인 이스라엘의 현상을 완전히 반정립시키는 주제인 것이다. 이 두 구절을 비교해 보면 십계명에 대한 기존의 앎을 반영하는 4:1-2절의 죄악상-진실과 인애 결여, 하나님을 아는 지식(da‘at ’ĕlōhîm) 결여, 저주, 허위, 살인, 훼절, 간음, 폭력 등-은 야웨의 광야계약의 갱신을 통해 극복될 것이라는 저자의 암시적 메시지를 포착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이스라엘을 ‘광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주도적 행위는 이스라엘의 멸망과 흩으심의 시작을 의미한다. 이런 부정적 심판과 징벌 경험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자신에게 복지와 풍요를 주신 분은 바알이 아니고 “광야에서도 살 길”을 내시는 야웨임을 심비(心碑)에 새기는 된다. 새 이스라엘 교회는 광야에서 태어난 공동체이며, 이 세속사회 한 가운데서 광야계약의 긴장과 밀월 속에서 생명력을 유지하는 계약공동체이다. 계약적인 응답과 교감의 세계가 제의에 우선한다. ‘광야’에서 야웨와 그 백성은 계약관계가 갖는 깊은 교감의 차원에 도달할 수 있다. 16절에 나오는 “나의 바알”은 가나안의 바알리즘에 익숙한 이스라엘의 현실에 대한 전제이며, “나의 바알”은 “나의 하나님, 나의 야웨”로 바뀌어져야 한다.
Ⅴ. 결론
이스라엘의 배교는 사실상 계약파기를 의미했고, 야웨는 로루하마와 로암미를 통해 이 계약무효를 확인시켰다. 그러나 이 계약 무효처분은 하나님의 부성적, 남편다운 포옹의 격정에 의해 철회되고, 새 출애굽으로 가는 광야여정으로의 단독자적 소환에 이른다. 음부 이스라엘은 자신의 회개 여부에 관계없이 압도적이고 선행적(先行的)인 남편의 계약적 포옹과격정인 감미로운 사랑, 긍휼, 진실, 의와 공변됨, 영적ㆍ계약적 교감(2:19-20) 속에서 망각되고 왜곡된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전적인 갱생을 맛본다. 광야에서 새롭게 실현되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계약적 연대(New Covenant-making)는 이스라엘의 회개에 대한 야웨의 보상이 아니고, 오히려 이스라엘의 회개를 촉발시키는 주도적인 조치다. 하나님의 남편다운 포옹의 격정이 이스라엘의 회개를 추동시키는 선행적 원동력이 된다. 탕자의 정체성이 아버지 집에서 새롭게 정위(定位)되듯이, 계약파기자 음부 이스라엘의 정체성은 참 남편 야웨의 계약적 포옹안에서 정위된다.
‘광야’는 가나안 풍요제의에 빠진 이스라엘의 변질된 신앙으로부터 그들의 태생적 정체성을 환기시키는 주제이다. 바알리즘의 주권이 미치지 못하는 광야, 메마른 땅, 바알리즘으로 볼 때는 죽음과 비탄의 땅인 광야가, 야웨의 계약 안에서 밀월과 교감의 처소가 된다.
호세아는 “마음에 말하는 하나님” 사랑을 목청껏 노래한다. 배도한 음부 이스라엘과 배도한 인류를 종말론적 희망의 처소 광야로 불러내는 호세아 메시지 속에, 벌써 요한복음 3:16의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내어 주신”, 광야의 현실인 십자가의 사랑, 원수마저 포옹하는 참 사랑의 포용적 격정을 선취할 수 있는 것이다. 호세아는 처음으로 윤리적 유일신에 눈 뜬 자도 아니며,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계약상태를 신학화한 사람도 아니다. 그는 그의 지나간 역사 속에 보양되어온 거룩하고 감격에 찬 ‘출애굽-시내산’ 계약관계와, 그에 따른 ‘율법-제의’에 대한 기존의 앎을 전제하고 있다. 백성들, 제사장들도 다 아는 공통의 유산과 전승의 터에서 이스라엘의 철저한 갱신을 부르짖고 있는 것이다.35) ‘광야’는 이제 이스라엘의 행음을 제거하고 야웨 하나님과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공간이 다.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과 야웨가 계약을 맺던 거친 들판이 희망의 거소(居所)로 떠오른다. 광야는 야웨와 이스라엘이 첫째 혼인예식이 거행된 곳이며 동시에 이스라엘의 미래 회복의 희망을 담보할 새로운 결혼식이 거행될 곳이다. 예언자는 여러 군데서 광야에서 이스라엘의 행음을 규탄하고 야웨 하나님과의 새로운 계약관계가 재창조될 것임을 암시한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출애굽-광야전승’이야말로 호세아 예언의 영감의 수원지이며, 종말론적 희망의 그림에 대한 원형이라고 말하는 것이 전혀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1) 레이너 알베르츠는 이사야와 호세아의 강대국 동맹의존 숭배에 대한 비판의 초점이 달랐다고 하지만 거의 대동소이해 보인다. 호세아의 경우 강대국에 대한 헛된 신뢰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는 강대국 자체에 도움을 바라고 기웃거리는 것 자체가 국가적 정체성의 상실과 정치적 도덕의 악화를 초래한다고 본다. 우리가 보기에는 이런 알베르츠의 해설이 그렇게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강대국 의존 자체가 야웨와 맺은 일편단심 계약의 파기이므로 당연히 국가적 정체성의 약화를 가져오는 것이 아닌가?(Rainer Albertz, A History of Israelite Religion in the Old Testament Period[trans. John Bowden; London: SCM, 1994], 167-168).
2) 알베르츠, Ibid., 174.
3) J. H. Hayes & F. C. Prussner, Old Testament Theology: Its history and development(Atlanta, GA: John Knox Press, 1985), 127.
4) J. Wellhausen, Prolegomena to the history of ancient Israel(Cleveland, OH: Meridian Books, 1965), 53-79.
5) 김회권, 『김회권 목사의 청년설교』(서울: 복있는 사람, 2005), 21-22.
6) 호세아가 바알을 단수 혹은 복수로 언급하는 구절들은 다음과 같다: 단수로 언급(2:10, 18; 13:1; 비교. 9:10); 복수로 언급(2:15, 19; 11:2; 비교. 2:7, 14). 그 외에는 호세아는 바알 숭배와 관련된 시설들과 제의적 물건들에 대하여 빈번하게 언급한다: 산당(4:13-15; 10:8), 돌기둥(3:4; 10:1-2), 신탁매개 나무들(4;12), 신 형상들(4:17; 8:4b; 1:2); 베델의 황소 형상(8:5-6; 10:5; 13:2); 건포도 과자(3:1; 비교. 삼하 6:19); 애도의 표시로 몸을 칼로 베는 행위들(7:14).
7) 김회권, 『하나님 나라 신학으로 읽는 모세오경 2』(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6), 189-190.
8) Allen C. Myers, “Baal,” in The Eerdmans Bible Dictionary(Grand Rapids, MI: Eerdmans, 1987), 113; W. F. Albright, Yahweh and the Gods of Israel(New York: Garden City, 1968); S. R. Driver, Canaanite Myths and Legends(Edinburgh: T & T Clark, 1956]).
9) W. Rainey Harper, A Critical and Exegetical Commentary on Amos and Hosea(ICC; Edinburgh: T & T Clark, 1973), 239.
10) MT 본문 중에서 호세아의 본문 부식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다. 레닌그라드 코덱스(1008년 경)를 대표하는 MT와 좀 더 이른 시기의 본문인 알렙포 코덱스(952년 경) 둘 다 심각하게 파손되어 있으며 그 만큼 서기관의 실수도 많이 보유하고 있다. 많은 중세사본들은 레닌그라드 코덱스나 알렙포 코덱스와 다른 이본들 혹은 다른 읽기들을 보여주고 있다. 쿰란자료(4QXIIc,d,g)들은 MT와 다른 많은 본문상의 읽기들을 보여주고 있다. 불행히도 쿰란 사본들은 한결같이 단편적이라서 본문비평에 별다른 유익을 주지 못한다. 70인역의 본문 전승과 번역의 질은 물론 초기 그리스 역본들(Aquila, Symmachus, Theodotion)의 번역도 전체적으로 일관성있는 질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다. 어떤 곳들에서 그것들은 MT보다 더 나은 본문을 보전하고 다른 곳들에서는 더 열악한 본문전승을 대표한다. 그래서 BHK나 BHS는 고대 그리스 역본들(Greek, Syriac, Latin, Aramaic)을 토대로 하여 많은 본문 수정들을 제안한다. 많은 경우들에서 MT 읽기들은 너무 어형론적으로(morphologically), 구문론적으로(syntactically), 그리고 문맥상 너무나 어려워 본문을 의미있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보수적인 학자들이라도 본문 재구(再構)를 위한 추측을 시도하지 않을 수 없다. 대다수의 영어번역본들(예. KJV, ASV, RSV, NEB, NAB, NASB, NIV, TEV, NKJV, NJPS, NJB, NRSV, REB, NCV, CEV, NLT) 다른 역본들이나 판본들에 있는 다른 읽기를 채택하거나(좀 더 빈번히) BHK나 BHS에 제시된 본문 수정제안을 따른다. 하지만 호세아 본문의 난제들은 너무 심각하여 영어성경들마저도 의견이 크게 엇갈린다. 이런 점을 감안하여 우리는 이 단락의 사역을 시도한다.
11) 접속사 라켄(lākēn)은 여기서 힌네(hinnē)와 함께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役事)를 도입하는 부사어 “정녕”으로 번역하는 것이 문맥상 더 나아보인다(JPS Hebrew-English Tanak, 1276).
12) 1인칭 대명사 아노키(’ānōkî)의 사용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적인 구원의지를 부각시킨다.
13) 머파테하(mĕpatêhā)는 파타(pātā, “유혹하다,” “꾀다,” “속이다”)의 피엘 능동분사형으로 힌네+주어+능동분사형 구문을 이룬다. 이 힌네+주어+능동분사형 구문은 근접 미래에 일어날 일을 묘사할 때 사용되는 구문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연인이나 아내로 대하며 다시 유혹할 것임을 강조한다. 그 뒤따라 나오는 홀라커티하(hôlakĕtîhā, hālak 능동분사+목적접미어)도 “그녀로 하여금 광야를 걷게 할 것이다”는 의미다. 광야를 걷는 상황은 출애굽 여정이나 제 2의 출애굽으로 비유되는 바벨론/앗수르 포로들의 귀환여정을 의미한다(사 11:10-16; 40-44장 여러 구절들).
14) 광야의 구체적으로 그리고 강조적으로 적시하는 단어 샴(šām) 혹은 샤마(šāmā)가 사용된다. 후자는 방향접미어 locale-he가 붙어있는데 이스라엘이 “광야를 향하여” “응답하는” 상황을 부각시킨다.
15) 이쉬(’îš)도 남편을 의미하고 바알(ba‘ĕlî)도 ‘남편’을 의미한다. 전자가 좀더 인격적이고 정감넘치는 사랑의 대상으로 남편을 의미한다면(창 2:23; 3:6, 16) 후자는 법적인 지위와 권리와 관련된 경우의 남편(출 21:13; 신 22:22; 24:4)을 의미한다.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바알(일반 명사인 남편 또는 바알신과 동일한 하나님으로서의 야웨)이라고 불렀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하나님은 자신이 바알로 불리는 것을 원치 않으시고 바알과 혼동되는 것을 싫어하신다.
16) “장가들다”로 번역된 에레스(’ērēś)+리(lî)는 한 총각이 한 처녀에게 구애하거나 청혼하는 행동을 묘사할 때 사용되는 구문으로서 이혼당한 아내를 다시 아내의 자리로 회복시키는 행동을 묘사하는 표현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숫처녀같은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영접하여 혼인예식을 치루시겠다는 결단에 이르신 것이다. 직역하면 이 소절은 “나는 너를 나에게 정혼시키겠다”(혹은 약혼시키겠다)는 의미다(C. F. Keil and F. Delitzsch, Minor Prophets, Vol. 10[trans. James Martin; Grand Rapids, MI: Eerdmans, 1988], 64).
17) 19-20절에 나오는 의, 공평, 인애, 긍휼, 진실함 앞에 붙어 있는 전치사 쁘(bĕ)는 신랑이 신부를 아내로 데리고 올 때 지불하는 선물(대가)을 함의하는 전치사다(BDB, 90. III. 2; 겔 3:14). 야웨께서는 압도적인 계약적 선물을 지불하시고 이스라엘을 아내로 삼으신다. 다른 말로 하면 이스라엘이 야웨의 아내로 남아있으려면 이 신랑의 예물을 잘 받아 그것들을 만천하에 과시하여야 한다. 의, 공평, 인애, 긍휼, 진실함이 신부인 이스라엘이 구현해야 할 계약적 도덕적 덕목이자 가치가 된 것이다(6:4-6; 10:12; 12:6).
18) “알다”라는 말은 계약신학적 측면에서 보면 친밀한 연합상태를 의미한다. 이스라엘이 야웨 하나님의 사랑과 계약적 투신을 아는 만큼 야웨의 계약적 요구를 알고 이해한다는 말이다. “알다”라는 말은 여기서 “순종하다”는 말과 거의 동의어다(H. Huffmon, “The Treaty Background of Hebrew yā‘da,”BASOR 181[1966]: 31-37).
19) “응답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아나(‘ānā)는 “대답하다,” “주의깊게 경청하다,” “기꺼이 반응하다,” “소통하다”를 함의한다(BDB, 772; HALOT, 852).
20) 3인칭 남성대명사가 주어로 쓰이는 이 구문은 상황절로서 앞 소절의 상황과 동시에 일어나는 부대상황을 기술할 때 사용되는 구문이다. 22절의 “그것들”도 마찬가지 구문이다. 응답이 응답을 낳는 상황이 동시발생적이라는 점을 강조한다(하나님--->하나님께 응답--->땅에 응답--->곡식에 응답--->이스르엘에 응답).
21) “이스르엘”이라는 말에는 삼중적인 어희(語戱)가 작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1) 1:4, 5절에서 이스르엘은 예후가 흘린 피가 흥건히 고인 죄악의 장소였다. 하나님의 심판을 촉발한 이스르엘이 이제 은총의 장소가 된다는 것이다; (2) 23절에 나오는 “내가 심으리라”는 말과 조응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다시 심으실 것임을 강조하는 말이다; (3) 이스르엘은 이스라엘과 유사하게 들리는 유음이의어다. 이스르엘에 대한 심판이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이었듯이, 이스르엘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된다는 것이다.
22) 이스라엘을 대표하던 호세아의 두 자녀(딸 로루하마, 아들 로암미)를 가리킨다.
23) 23절(MT 25절) 마지막 소절도 3인칭 남성대명사(hû’)로 시작되는 상황절이다. “내 백성”이라고 말하는 하나님께 동시적으로 이스라엘이 “내 하나님”이라고 응답하는 상황을 부각시킨다.
24) 단락 구분에 관하여 다른 견해를 보려면 이동수,『호세아 연구』(서울: 장로회신학교 출판부, 2005), 29-30을 참조하라.
25) 이동수, Ibid., 41.
26) Douglas Stuart, Hosea-Jonah(WBC; Waco, TX: Word Books, 1987), 61.
27) Werner H. Schmidt, The Faith of the Old Testament(trans. John Sturdy; Philadelphia: Westminster, 1983), 28.
28) Gerhard von Rad, Old Testament Theology, Vol. 2(trans. D. M. G. Stalker; San Francisco: Harper, 1965), 142-143.
29) 이 문제에 대한 자세한 논의를 보려면, 김회권의 『신명기의 기원-모세저작설의 해석학적 함축』(장로회신학대학원 미간행 신학석사 논문, 1993), 124-127을 참조하라.
30) Walther Eichrodt, The Theology of the Old Testament, Vol. 1(London: SCM, 1975), 36-46.
31) Gerhard von Rad, Old Testament Theology Vol. I. The Theology of Israel’s Historical Traditions(trans. D.M.G. Stalker; San Francisco: Harper, 1962), 64-65. 폰라트는 예언운동을 촉발시킨 네 가지 요인들을 논한다: (1) 바알 숭배의 침투로 인한 혼합주의의 득세로 야웨 숭배의 급격한 쇠퇴; (2) 상비군, 관료조직 등 국가 조직의 형성으로 이스라엘 계약공동체는 야웨의 보호와 인도로부터 자유로운 자율적 기관으로 발전; (3) 국가 운영(상비군과 관료)을 위한 징세와 군역(군사 의무)의 과다한 요구가 이스라엘의 기초사회조직인 종족사회(clan systems) 붕괴로 애국심의 기초 단위 망실. 지주들이 농토 장악, 원통한 농민 절규 발생, 과도한 징세와 군역 충당으로 국방력의 근간 쇠락; (4) 앗수르 제국의 등장.
32) Eichrodt, Ibid., 46.
33) 이동수, “나의 하나님”(호 2:18-25), 『호세아 연구』, 66-67.
34) 호세아가 12:13에서 출애굽의 영도자를 거론할 때 “모세”라는 이름을 거명하지 않고 “한 선지자”라고 언표한 점은 또 다른 연구 과제처럼 보인다.
35) 발터 침멀리도 예언자들과 고대 구전 구원사 전승과의 관계 연구에서 모세오경을 주전 8세기 예언자들의 신학보다 더 후의 저작물로 보는 벨하우젠류의 연구 방향보다는 모세가 예언자들에 대하여 갖는 우위성을 탐구하는 방향이 더 진지하게 추구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적절하게도 오경 중에는 주전 8세기 예언자들에게 돌릴 수 없는 율법들이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있음을 지적하고 있다(Walther Zimmerli, The Law and the Prophets[Oxford: Basil Blackwell Press, 1965],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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