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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가톨릭의 교리적 문제 - 교황 (김효성 목사)

by 【고동엽】 2021. 11. 18.
천주교회는 교황의 교리에 있어서 큰 오류를 범하고 있다. ‘교황’(Pope) 즉 전 세계의 감독이라는 명칭은 신약교회 시대의 처음 6백년 동안에는 사용되지 않았다. 그것은 주후 607년 황제 포카스에 의해 보니페이스 3세에게 처음으로 부여되었다.




성경과 유전(遺傳, Tradition)의 동등한 권위


천주교회는 교회와 전통의 권위를 성경의 권위와 동등히 여긴다. 1546년 트렌트 회의는 유전(遺傳)이 성경과 동등한 권위를 갖는다고 선포하였다. 천주교회의 유전의 내용은 14권 내지 15권의 외경들, 헬라 교부들과 라틴 교부들의 저작들, 교회회의들의 선언들과 교황들의 칙서들을 포함한다. 천주교회의 특징적 교리들, 예를 들어 연옥, 사제직, 미사, 화체설, 죽은 자를 위한 기도, 고해성사, 마리아 숭배, 성상 사용, 성수(聖水), 묵주알, 독신제도, 교황제도 등은 이러한 유전들에 근거한 것이다.




교황의 사도 베드로 계승을 주장


천주교회는 또한 로마 교회의 우위성과 교황의 사도 베드로 계승성을 주장한다. 천주교회 교리문답 880항은 교황은 ‘베드로의 후계자’이며 주교들은 ‘사도들의 후계자’라고 표현한다. 제2 바티칸 회의 교회헌장 18항도, “교황은 베드로의 후계자”라고 표현하였다.




교황의 그리스도 대리자 됨과 신적 권위를 주장


천주교회는 또한 교황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이며 신적 권위를 가졌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중세에 와서 발전된 교리이었다. 로마의 주교들은 자신들이 지상에서 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 주장하였고, 다른 주교들이 ‘파파’라고 불리우는 것을 금하였다. 로마의 주교들은 ‘최고승원장’(Ponti- fex Maximus), ‘그리스도의 대리자’(Vicar of Christ), ‘주교들의 주교’라는 칭호를 자신들에게만 사용하였다.


여기에서 교황제도가 발전하였고 그들은 마침내 자신들이 신적 권위를 가지고 있음을 주장하게 되었다. 중세 천주교회의 최대 신학자로 인정받는 토마스 아퀴나스는, “교황과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는 아무 차이도 없다”고 말하였다. 1885년, 교황 레오 13세는 교황이 “지상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한다고 선언하였다.”


제2 바티칸 회의 교회헌장 18항도, “교황은 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 표현한다. 천주교회 교리문답 882도,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교황은 모든 교회 위에 언제나 방해받음 없이 행사할 수 있는 완전한, 최상의, 그리고 보편적 권세를 가진다”고 말한다.


뉴욕 교리문답은, “교황은 지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한다,” “그는 그리스도의 참된 대리자,” “전혀 오류가 없는 통치자,” “하늘과 땅의 최고의 재판관,” “지상에서 하나님 자신”이라고 말한다.


교황이 쓰고 있는 삼중의 왕관은 하늘과 땅과 지하 세계의 왕권을 상징한다. 교황의 대관식에서는, “그대는 왕자들과 왕들의 아버지이며 세계의 지배자,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임을 알라”고 선포된다.


페라리스의 가톨릭 교회사전은, “교황은 대단히 존엄하시고 지극히 높임을 받으셨으므로 그는 단순한 하나의 사람이 아니라, 말하자면 하나님이시며 또 하나님의 대리자이시다”라고 말한다.




교황의 무오성(無誤性)을 주장


천주교회는 특히 교황의 무오성(無誤性)을 주장한다. 1870년 제1 바티칸 회의에서 교황 피우스 9세는 교황이 그 직분에 따라 믿음과 윤리에 관한 교리를 정의할 때 그는 무오(無誤)하다고 선언하였다.
1964년 제2 바티칸 회의도 교황을 “베드로의 계승자, 그리스도의 대리자요 전체교회의 유형적 머리라고 부르면서” 교황의 머리됨과 무오한 교훈의 직분에 관한 교리를 “모든 신실한 자들이 확고히 믿어야 할” 교리로 강조하였다.




전제주의


천주교회의 구조는 제일 꼭대기로부터 맨 밑바닥까지 전제주의적 조직이다. 조직의 맨 위에는 교황이 있다. 그 다음에는 추기경들이 있다. 그들은 새 교황 앞에 바닥에 엎드려 그 발에 입맞추므로 완전한 충성을 맹세한다. 대주교들과 주교들은 교황에 의해 직접 임명되며 교황에게 개인적 충성을 맹세하며 그에게 직접 종속된다. 그 밑에 사제들은 주교들에게 직접 종속되며 절대 복종해야 한다.


1215년 유럽 헌법의 어머니로 불리는 영국의 대헌장 마그나 칼타가 발표되었을 때, 교황 이노센트 3세는 즉각적으로 비판하고 그것의 무효를 선포하고 그것을 제정한 영국의 귀족들을 파문하였다. 13세기 말, 교황 보니페이스 8세는, “우리는 모든 존재가 로마 교황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선언하고 말하고 명확히 하고 단언하는 바이다”라고 말했다. 20세기 중엽 교황 피우스 12세는, “개인적인 자유란 실상 지독한 무질서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천주교회의 유일성을 주장


천주교회는 그들만 진정한 교회이며 개신교회들을 포함한 기타 다른 교회들은 이단들이며 존재할 권리가 없다고 본다. 가톨릭 백과사전은 “참된(로마 가톨릭) 교회는 자신 외의 이상한 교회들을 관용할 수 없다”고 말한다.


13세기 말 교황 보니페이스 8세는 “우리는 모든 피조물들이 로마 교황에게 복종해야 구원을 얻는다고 선언하다”고 말했다. 16세기 중엽 트렌트 회의는 교회법과 선언문에서 적어도 100회 이상 개신교 신앙에 대해 저주를 선포하였다. 16세기 후반 교황 피우스 4세의 신경 제14항은 다음 내용을 담고 있다: “어떤 형태의 개신교든지 가톨릭교회가 우세한 곳에서는 어떤 권리도 가지지 못하고 결코 가질 수도 없을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비가톨릭 방식들은 가짜라고 단정되어야 한다,” “모든 형태의 개신교회들은 그 자체에 있어서 정당성이 없다. 그것들은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1864년 교황 피우스 9세는 80개 항목의 “오류 목록” (Syllabus of Errors)을 선포하였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천주교 사제들이 임직 시 믿고 변호하겠다고 맹세하는 내용이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17항, “그리스도의 이 유일한 참 교회 밖에는 어떤 영원한 구원도 없으며 그것을 소망할 수도 없다.” 18항, “개신교는 가톨릭 교회와 동등하게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는 분리된 하나의 참된 기독교가 아니다.” 77항, “오늘날에도 가톨릭은 다른 모든 예배형식을 배제하고 유일한 국가종교로서 유지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20세기 후반에 요한 23세는 “교황이 그리스도의 대리자이며 이 땅에서 그의 인격을 대표하기 때문에 교황의 권위 아래 들어오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양무리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주장하였다.


2007년 7월 10일, 교황 베네딕트 16세는 로마 가톨릭 이외의 기독교 교파들을 ‘올바르지 못한 교회’(not proper churches)로 규정하는 문서를 발표하였다. 16쪽 분량의 그 문서는 “그리스도는 지구상에 오직 하나의 교회를 세웠고 이는 가톨릭 교회로 존재한다”며 “다른 교파들에 과연 ‘교회’의 자격이 있는지 알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 문서는 그리스 정교회에 대해 “교황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아 결함이 있다(defective)”고 묘사했고, 개신교회들을 “교황의 존재를 시인하기를 거부하고, 성찬식에 대한 견해를 달리하는 등 올바른 의미에서의 교회라고 볼 수 없다”고 말했다.




[비 평]




권위의 원천이 무엇인가?


천주교회와 개신교회의 근본적인 차이는 권위의 원천의 문제이다. 이것은 모든 종교적, 신학적 논의의 핵심 문제이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적 사고와 행위는 무엇에 의해 규정지어지는가? 인간의 이성인가, 교회의 전통인가, 사람들의 풍습인가, 아니면 영원불변적인 하나님의 말씀인가?


16세기의 종교개혁자들은 천주교회가 종교의 기준을 교회의 권위, 특히 교황의 권위에 둔 것에 대항했다. 그들은 우리의 신앙과 행위의 권위적 근거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뿐임을 천명하였다. 그것은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견해이며 예수님 자신의 견해이었고 또 초대교회로부터 정통 기독교의 견해이었다.


천주교회는 성경이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유일한 권위의 원천임을 부정할 뿐 아니라, 또한 성경이 신도들의 손에 들어가 읽혀지는 것을 방해하기까지 하였다. 주후 1229년 툴루세(Toulouse) 혹은 발렌시아(Valencia) 회의는 평신도들이 성경을 가지는 것 자체를 금지하였다. 교황 클레멘트 11세(1700-21)는 “우리는 평신도들이 구약과 신약이 책들을 통속적인 언어로 소유하는 것을 엄격히 금한다”는 우니게니투스(Unigenitus) 법안을 발표하였다. 1957년에 스페인의 마드리드의 영국 해외성서공회의 성경저장소는 폐쇄되었고 저장된 성경들은 몰수되어 불태워졌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그 어떤 죄보다도 큰 죄악이다.




교황이 사도 베드로의 계승자인가?


로마 주교인 교황이 사도 베드로의 계승자인가? 로마 주교들이 사도 베드로의 계승자라는 주장은 주후 3세기 초 로마 주교 칼릭스투스 때에 비로소 나타났다. 그러나 그 주장은 정당치 않다.


(1) 신약성경 어디에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드로를 교황으로 임명하셨다고 말하지 않는다. 마태복음 16:18의 ‘이 반석’이라는 말은 베드로를 가리키지 않는다. 어거스틴과 제롬은 그 말을 베드로가 아니라 그리스도라고 이해하였다. 또 마태복음 18:18은 천국 열쇠가 베드로뿐 아니라, 모든 성도들 즉 교회 전체에 주어졌음을 증거한다. 그것은 교회의 복음 전파와 권징의 권세를 나타낸다.


(2) 신약성경과 베드로의 서신들은 베드로가 다른 사도보다 더 높은 권위를 가졌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사도행전 15장에 기록된 예루살렘 총회에서도 그 회의의 결정은 베드로가 아니고 야고보의 의견을 반영하였다. 베드로전서 5:1에서 베드로는 자신을 다른 사도들이나 장로들과 동등된 자로 말하였다.


(3) 베드로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에게 무릎을 꿇고 절하게 하지 않았다(행 10:25-26). 그는 오늘날 교황들과 달랐다.


(4) 베드로는 오늘날 교황처럼 화려한 옷을 입지 않았으며 화려한 왕관도 쓰지 않았다.


(5) 베드로는 결혼한 자이었다(마 8:14; 고전 9:5).


(6) 베드로는 바울 앞에서 책망도 받았다(갈 2:11).


(7) 바울은 13-14개 서신들(2033절)을 썼으나, 베드로는 단지 두 서신(166절)만 썼다.


(8) 로마는 그 당시 이방인들의 수도이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사도인 베드로보다 이방인들의 사도인 바울에게 더 적합하였다.


(9) 베드로가 로마의 첫 번째 주교라는 역사적 증거가 없다. 주후 2세기 말, 이레니우스는 처음 로마 주교들 12명의 명단을 제공하는데, 거기에는 베드로의 이름이 없다. 로마의 제1대 주교는 리누스이었다. 교회사를 쓴 유세비우스도 베드로를 로마의 주교로 기록한 적이 없다. 다만 베드로가 말년에 로마에 왔고 그곳에서 처형되었다고 쓸 뿐이다. 베드로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단절 없는 사도 계승의 교황 족보라는 말은 역사적으로 허구에 불과하다.


(10) 베드로는 인간의 전통이나 교회의 전통을 하나님의 말씀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높이지 않았다(벧전 1:18).


가톨릭 역사가 될링거는, 마태복음 16:18을 해석한 교부들 중에 이 구절을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로마 주교에게 적용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고, 성경 주석을 저술한 교부들 중 단 한 사람에게서도 로마의 우월권이 사도 베드로에게 주어진 위임이나 약속의 결과라고 암시한 가장 희미한 흔적도 발견할 수 없고, 교부들은 한결같이 그 구절의 반석을 예수님 자신이거나 사도 베드로의 신앙고백이거나 혹은 둘 다라고 이해하였다고 증거하였다.


될링거는 또, “고대의 어떤 신앙고백도, 어떤 요리문답도, 백성들의 교육용으로 집필된 교부들의 어떤 문서들도, 교황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의 언급도 없다. 더구나, 신앙과 교리문제의 확정이 교황에게 달려있다는 내용은 전혀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고 말하였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피터 드 로사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교부들에게 그것--바위라는 것--은 베드로가 아니라, 베드로의 믿음이거나 혹은 주님 즉 베드로가 믿는 그 주님이었다. 4세기의 니케아 회의로부터 15세기 콘스탄스 회의에 이르기까지 모든 회의들은 그리스도 자신이 교회의 반석 즉 그 위에 교회가 세워진, 기초라는 사실에 동의하고 있다. . . . 교부들 가운데 단 한 사람도 베드로로부터 그의 후게자에게 권세가 이전되었다고 말한 사람은 없다. 항구적인 베드로 직분에 대한 흔적도 없다. 따라서, 초대교회는 베드로가 로마의 주교였다고 보지도 않았고 그러므로 로마의 주교가 베드로를 계승(繼承)한다고 생각지도 않았다. . . . 복음은 교황제도를 제정하지도 않았고, 일단 제정된 교황제도는 복음에 의존하지도 않았다(교황제도 안에는 복음도 없긴 했지만).




교황(Pope)의 명칭과 복장의 이교적 기원


또 교황(Pope)의 명칭과 복장은 이교적 기원을 가진다. 교황이라는 명칭은 로마 제국의 대표적 신비종교인 미트라교의 최고 제사장을 가리키는 명칭이었다. 또 교황이 가지는 최고승원장(Pontifex Maximus)이라는 칭호도 이교도들의 제사장 겸 왕인 황제를 가리키는 명칭이었다.


로마 제국의 행정조직과 로마 교회의 행정조직은 매우 비슷하다. 맨 위에 황제와 교황이 있다. 그들은 최고승원장이라는 공식명칭을 가진다. 그 다음에, 황제와 교황을 선출하는 원로원과 추기경회가 있다. 그 다음에 황제와 교황이 직할 통치하는 제국 총독과 추기경이 있다. 그 다음에 각 도와 대교구를 관할하는 각 도 총독과 대주교가 있다. 또 그 다음에 각 도시와 교구를 관할하는 지방 총독과 주교가 있다. 그 아래, 백성들과 평신도들이 있는 것이다.


교황들이 입는 매우 값비싸고 화려한 의복은 로마 황제들의 의복을 흉내낸 것이다. 교황들이 쓰는 물고기 모양의 모자는 메소포타미아의 물고기 신인 다곤 숭배에서 나타난다. 교황이 어깨에 걸치는 팔리움(영대)은 그리스와 로마의 이교 성직자들의 복장이었다.




교황 무오설의 허구


천주교회의 교황의 권위와 무오성에 대한 교리는 성경에 근거가 없을 뿐 아니라, 모든 기독교 교리들의 기초인 성경의 신적, 절대적, 최종적 권위에 대한 교리에 가장 모순된다.


신약성경의 어느 곳도 또 초대 교회의 어느 인물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주교를 교회의 무오한 교사와 치리자로 세우셨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 이레니우스도, 터툴리안도, 제롬도 그러하였다. 6세기 말의 가장 영향력 있던 교황 그레고리 1세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오히려, 1415년의 콘스탄스 회의와 1432년의 바젤 회의는 “교황일지라도 회의의 결정에 복종해야 한다”고 선포하였다. 콘스탄스 회의는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합법적으로 개최된 교회를 대표하는 모든 회의는 그 권위를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받으며 신앙문제에 있어서나 분단의 치료에 있어서나 그리고 교회의 개혁에 있어서 교황을 포함한 모든 사람은 회의에 순복한다.


가톨릭 신학자 한스 큉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로마 가톨릭교의 무오 교리의 근원에 관한 한 . . . 그것은 천천히 ‘발전’되거나 혹은 ‘전개’된 것이 아니라, 줄곧 이단으로 규탄을 받아왔으며, 비정상인 프란시스칸 수도승 피터 올리비(1298년 사망)에 의해서, 그의 일필휘지로 1200년대에 돌연히 창조된 것이다. . . . 중세 교회법 전문가들도 산앙의 보존을 위해서 교회가 무오한 교황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자는 하나도 없었다. . . . 그리고 무오설에 대한 현대의 비판적 공격은 당연히 성서와 가톨릭 전통의 후원을 받고 있다.


1870년 제1 바티칸 회의에서 선포된 교황무오의 교리는 콘스탄스 회의의 선언을 부인해버린 행위이었다. 그 회의는 예수회파의 각본에 의해 이루어진 일이었다. 헤슬러는 바티칸의 기독교일치국에서 5년간 일하는 동안 제1 바티칸 회의에 관한 비밀문서들에 접하였는데, 사건 전체가 분명한 회의의 조작이었음을 알고 어떻게 교황이 무오하게 되었는가? 라는 책을 썼고 그 원고를 탈고하자마자 ‘돌연한 죽음’으로 세상을 떠났다. 가톨릭 신학자 한스 큉은 그 책의 서문을 썼다는 이유로 교편직을 박탈당하였다.


학자이며 대주교이었던 스트로스마이어(Strossmayer)는 그 회의에서 그 교리에 반대하면서 다음과 같이 정당하게 말하였다. 나는 가장 진지하게 신구약성경을 연구하려고 애썼고, 나는 이진리의 존엄한 기록물들에게 여기에 사회하고 있는 신성한 교황께서 성 베드로의 참된 계승자이며 그리스도의 대리자이며 교회의 무오한 박사인지 나에게 알게 해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나는 사도시대에는 그 당시 존재하지 않았던 모하멧의 문제가 없었듯이, 교황에 대한 문제가 없었음을 발견합니다. 이제 나는 전 신약성경을 읽고나서 하나님 앞에 저 위대한 십자가상 앞에 내 손을 들어 선언합니다. 나는 이 시점에 존재하는 것과 같은 교황제도의 어떤 흔적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확신하였습니다: (1) 예수께서는 그가 베드로에게 주셨던 것과 같은 권세를 그의 사도들에게도 주셨습니다. (2) 사도들은 성 베드로를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결코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3) 베드로는 자신을 교황으로 생각하거나 결코 그처럼 행동하지도 않았습니다. (4) 처음 4세기의 교회 회의들은, 로마 주교가 로마라는 이유 때문에 가졌던 높은 지위를 인정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은 명예를 부여한 것이지 결코 권세나 사법권을 인정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5) 거룩한 교부들은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는 유명한 구절에 대해, 교회가 결코 베드로 위에(super Petrum) 세워진 것이 아니고 반석 위에(super petram), 즉 그 사도의 신앙고백 위에 세워졌다고 이해하였습니다. 나는 승리자의 심정으로, 역사와 함께, 이성과 함께, 논리와 함께, 상식과 함께,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양심을 가지고 결론을 내립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 베드로에게 수위권(首位權)을 부여하지 않으셨으며, 로마의 주교들은 단지 주교단의 모든 권리들을 하나씩 하나씩 몰수함으로써 교회의 주권자가 되었을 뿐입니다.


47년간 교수이었던 그 당시 가장 저명한 가톨릭 역사가이며 신학자이었던 J. H. 이그나즈 본 될링거는 교황무오설의 근거가 성경에서나 교회 전통에서 빈약하다고 지적한 죄로 파문당하였다. 그의 저작 교황과 공회라는 책은 제1바티칸 회의 개최 직전에 출판되었는데, 출판되자마자 즉시 금서목록에 포함되었다. 그 책에서 될링거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진술하였다.


고대의 신앙고백들이나 요리문답, 백성들을 가르치기 위해 기록한 교부들의 기록들 가운데 단 하나도 교황에 대한 언급이 없으면, 더욱이 모든 신앙과 교리가 그에게 의존하고 있다는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다.
교회 역사의 처음 1000년 동안 교리 문제 가운데 단 하나도 교황에 의해서 최종 결정된 것은 없다. . . . 심지어는 오랫동안 동방교회의 문젯거리가 되어 몇 번의 종교회의를 소집해야만 했던, 사모사타의 바울에 의해서 야기된 기독론마저도 교황의 어떤 개입이 없이 종결되었다. . . . 초대교회에 발생했던 세 개의 문제들--부활절 문제, 이단 세례 문제, 회개한 자들에 대한 징계 문제--에 로마 교회가 적극적으로 개입한 바가 있었다. 이 세 가지 문제 전부 다 로마 교황들은 자신들의 뜻이나 견해나 관행을 관철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른 교회들은 그들 나름대로 자기들 방법을 사용한 것이다. 소아시아 교회들이 로마의 방법을 추종하도록 강요한 교황 빅토르의 시도는 그들을 파문하겠다고 위협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터툴리언, 씨푸리언, 렉텐티어스 등은 교황의 특권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으며, 교리 문제 결정에 있어서 교황이 더 높은 권위를 갖는다는 것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었다. 헬라 교부들--유세비어스, 성 아타나시우스, 성 대(大)바실, 그레고리 형제들, 성 에피파니어스 등--의 저서들 가운데 로마 교황의 특권에 관한 기록은 단 한 마디의 언급도 없다. 헬라 교부들 가운데 가장 많은 설교를 남긴 성 크리소스톰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완전 침묵이다. 두 명의 씨릴도 마찬가지고 또한 라틴 교부들--힐러리, 파시언, 제노, 루시퍼, 설피시어스, 및 성 암부로스--도 모두 마찬가지다.


성 어거스틴은 교회의 통일과 권위에 대해서 다른 모든 교부들의 글을 합친 분량보다 더 많은 글을 썼다. . . . 그는 도나티스트들이 교회로 돌아와야 할 모든 이유들을 제시했지만, 교황 좌(座)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로텐버그 주교이었고 교회사 교수이었던 요셉 헤펠레(Hefele)는 제1 바티칸 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발언하였다. 제가 간략하게 말하는 것을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교부들의 저술들과, 공회의 기록 등을 위시하여 교회사의 원전 및 교회가 가르쳐 온 교리들에 대해서 상당히 익숙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그 문서들을 말하자면 . . . 밤낮으로 손에 들고 사는 셈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문서들 중에서 (믿을 만한 근거로부터 교황무오설에 관한) 교리는 결코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제1 바티칸 회의를 주재했던 교황 피우스 9세에 대해, 많은 부정적인 평판이 있었다. 파리 소르본 대학 학장이었던 주교 앙리 마레(Henri Maret)는 많은 증인들 앞에서 피우스 9세를 “가짜요 거짓말쟁이”라고 불렀다. 추기경 구스타브 본 호헨로헤(Hohenlohe)는 “나는 (교황무오설을 반대함에 있어서) 단지 이 사실 하나 외에 다른 어떠한 주장도 필요 없다. 즉 나는 나의 전 생애를 통해서 피우스 9세보다 더 진리에 대해서 분명하지 않은 사람을 만난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주교 두판루프(Dupanloup)는 1870년 6월 28일자의 그의 일기장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나는 더 이상 공회에 가지 아니할 것이다. 폭력과 수치를 모르는 철면피, 사기, 허영, 끝도 없는 거짓 등은 나로 하여금 거리를 두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더욱이, 역사상, 교황 비질리우스(Vigilius, 6세기 후반), 교황 인노센트 3세(13세기 초), 교황 클레멘트 4세(13세기 후반), 교황 그레고리 11세(14세기 후반), 교황 하드리안 6세(16세기 초), 교황 바울 4세(16세기 중반) 등의 교황들은 교황무오의 교리를 반대하였다.


또, 교황 무오의 교리는 교황들의 칙령들의 실제 역사에도 모순된다. 역사상 어떤 교황들을 다른 교황을 정죄하였고 또 전의 교황의 선언을 부정하였다. 또, 교황들의 사상들과 선언들 간에는 차이점들과 심지어 상호 충돌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그레고리 1세(590-604)는 누구든지 ‘전 세계의 감독’이라는 칭호를 가지려 하는 자는 적그리스도라고 말했으나, 보니페이스 3세는 황제로 하여금 그에게 그런 칭호를 주도록 만들었고 다른 교황들은 그 칭호를 합당하다고 주장하였다. 9세기 후반 하드리안 2세는 세속 결혼도 유효하다고 선언했으나, 19세기 초 피우스 7세는 그것을 무효라고 정죄하였다.


또 16세기 말에 씩스투스 5세는 성경 읽기를 권장하였으나, 피우스 7세와 여러 다른 교황들은 그것을 정죄하였다. 18세기 후반에 클레멘트 14세는 예수회 회원을 억제하는 명령을 내렸고 19세기 초 피우스 7세는 그들을 회복하는 명령을 내렸다. 15세기 초, 유게니어스 4세는 잔다크를 마녀와 이단으로 정죄하여 불태워 죽였으나, 20세기 초, 피우스 10세는 그녀를 시복하였고 베네득트 15세는 그녀를 성자로 선언하였다.


또, 많은 교황들이 이단적인 교리들을 가르쳤다. 3세기 초의 로마 주교 칼리스투스는 성부와 성자를 나눌 수 없는 한 영이라고 보았다. 그것은 이단사상이다. 4세기 중엽 리베리우스는 아리우스 이단 교리에 찬동하는 서명을 하였다. 5세기 초 조지무스는 펠라기우스를 정통 교사로 선포하였다가 후에 그 입장을 바꾸었다.


덧붙여서, 참으로 교훈의 무오성을 가진 교황이라면, 가장 정확한 성경주석을 출판함으로써 온 세계에 은혜를 베푸는 것이 얼마나 선한 일일까? 그러나 이제까지 어느 교황도 성경의 어느 한 권, 아니 어느 한 장이라도 무오한 해석을 출판한 일 없다. 또 무오한 교황이 있는데, 어떤 문제에 있어서 교황이 신학자들과 주교들의 연구보고서를 제출케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종교적 전제주의는 정치적 전제주의와 상통함


천주교회의 종교적 전제주의는 정치적 전제주의들과 상통한다. 교황 피우스 11세는 1929년 이탈리아의 무솔리니와 라테란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것은 로마 가톨릭교회가 이탈리아의 유일한 종교로 인정되는 것이며 또한 독재자 무솔리니가 로마 교회의 인정 속에서 이탈리아에서 자유로이 활동하는 발판을 얻은 사건이었다.


1933년에 교황이 독일의 히틀러와 조약을 체결한 사건도 그러하였다. 그 전쟁 기간 내내 교황청은 수백만 불의 교회세를 수입으로 얻었고 그 대신 히틀러를 파문시키지 않았고 6백만명의 유대인들의 학살도 묵인하였던 것이다.


천주교회는 공적으로 공산주의를 반대하지만, 전제주의라는 형태는 비슷하다. 소련과 중국 외에 가장 큰 공산당을 가진 나라는 천주교 나라인 이탈리아이다. 이탈리아의 투표권자들 중 거의 3분의 1은 공산주의자라고 한다. “전체주의 교회에서 전체주의 국가로의 이행은 몇 발자국만 움직이면 된다.”


이전에 천주교회 신자이었던 쿠덴호브-칼러지 백작은 “칼빈주의가 기독교의 민주주의를 대변하는 한 날개라면 가톨릭[천주교회]은 파시스트적인 한 형태이다,” “민주주의는 개인의 양심에 강조점을 두지만 파시즘은 권위와 순종에 강조점을 둔다”고 말했다.


출처 : (안산) 회복의 교회
글쓴이 : 전상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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