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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위클리프

by 【고동엽】 2021. 11. 16.

죤 위클리프

 

존 위클리프 (John Wycliff, 1324-1384)

 

"개혁의 샛별"로 불리는 개혁주의자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4-1384)는 에드워드 2세 때인 약 1324년 경에 태어났다. 성경을 번역했다는 이유로 위클리프는 이단으로 몰려 정죄를 받고 출회를 당했으나, 그래도 1384년에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성경번역을 수행했다.

 

그런데 그 때까지는 인쇄술이 발명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번역 성경은 일일이 손으로 필사를 해야했다. 보통 한 권의 성경을 필사하는데는 열 달 정도가 걸렸고, 그 가격도 만만치가 않아서 도서관에서 일하는 사서의 일년치 봉급이나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양의 성경이 필사되자, 마침내 영국 국회 법령을 제정하여 위클리프의 성경을 보급하지 못하게 하였다.

 

1382년 그의 모든 저술들은 불태워졌다. 그 해에 위클리프는 뇌졸중으로 쓰러졌고 1384년 12월 31일 두 번째 쓰러져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위클리프가 죽은 후 그의 적대자들은 1415년에 있은 콘스탄스 공의회에 위클리프의 사상을 제출하였고 그를 이단으로 정죄하였다. 그레고리 11세와 우르반 6세는 그 이전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 위클리프를 정죄한 바 있다. 1428년에는 그의 시신이 축성된 장소로부터 이장되었다.

 

후대의 사람들은 그를 1500년대의 개신교 종교개혁의 선구자로 여겼지만, 개혁의 시작에 있어서 그의 직접적인 영향에 대하여는 놀랄만큼 적게 알려져 있다. 단지 후스(Jan Hus) 만이 위클리프의 성과물들 중 어떤 것을 읽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위클리프는 주로 성서 번역에 있어서 기억되고 인정받고 있다. 1380년대 초기에 그는 성서를 영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이끌었고 다른 이들보다 더 관용적이고 일상적인 언어로 된 두 개의 완전 번역본을 내었다. 그것은 설교자들이 영어로 된 성경을 읽고 그것으로 설교하게 되는 새로운 종교적 상황을 가져왔다. 오늘날 위클리프의 성서번역은 위클리프 성서번역 협회가 뒤를 이어받아 세계의 모든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기 위한 노력으로 계승되고 있다.

 

 

2. 위클리프의 출생과 교육

 

위클리프의 후기의 삶 속에서 얻은 명성은 그의 어릴 때의 미천함과는 대조적인 것이다. 그의 출생의 날짜나 정확한 장소까지도 확실성있게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는 1320년과 1330년 사이에 출생했으며 요오크셔에 자리잡고 위클리프 교구에 속해 있는 'T'자 모양의 위클리프의 작은 마을은 그가 출생한 장소였다는 영예를 주장하고 있다. 어린 시절 그는 옥스퍼드의 대학에 보내어졌고 거기에서 그는 특별히 변증법과 수학 그리고 볍률학을 제외한 모든 분야의 학문에서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그는 1345년이라는 매우 이른 시기에 대학 학술 단체의 특별회원이 되었다. 그는 성공적으로 수사학과 철학을 강의했고, 그의 학문과 식견, 웅변술과 일반적인 능력, 또한 그의 영혼의 고상함 등으로 훌륭한 평판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1360년에 그는 발리올(Balliol)의 주임이 되었고, 1372년에 그는 16년에 걸친 신학박사 과정을 끝냈으며, 신학을 강의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던 것이다.

 

3. 에드워드 3세의 궁정교사

 

이미 출판된 그의 작품들과 그의 실천적인 재치 그리고 당시에 무섭게 타오르던 의문점들에 대한 능숙한 해결 등에 의해 그는 에드워드 3세에게 추천되었고, 그의 조언자가 되었으며 급기야 에드워드의 궁정교사가 되었다.

 

4. 우국지사, 정치 철학자로서의 위클리프

 

그 당시에 영국에 대한 교황의 강청과 요구는 거의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심지어 죤 왕(King John)이 그의 봉건적 상급자로서의 교황에게 약속한 매년 바치는 조공의 미불금의 지불 같은 것 조차도 대담하게 강조하며 요구하는 정도였다. 왕과 영주들 그리고 평민들은 모두 그 뻔뻔스러운 요구를 거부했다. 위클리프가 대중의 눈 앞에 정치 철학자요, 우국지사로서 비춰진 것은 이 위기의 시기였다. 레클러(Lechler)는 그가 특별위원의 자격을 가진 의회의 일원이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말 위클리프가 그런 자격을 가진 것 같지는 않지만 그가 발표한 한 소논문에서 보면, 왕과 의회가 따라야 할 원리들에 대해 능란한 성명을 주장하여 발표했다. 그후 곧 그의 두 위대한 역작인 『신성한 통치』와 『시민통치』가 그런 침해가 저항을 받아야만 했었던 그 시대적 배경 위에 등장했던 것이다.

 

5. 왕실의원으로 파견

 

1734년 위클리프가 몇몇 사람들과 함께 왕실의원으로서, 교황청과의 사이에서 발생한 의견상의 차이점들을 조정하고자 교황청측 위원들과 만나기 위해 브루지스(Bruges)에 파견되어졌다는 것은 그가 일찍이 획득한 영향력에 대한 증거이다. 그는 여기에서 무엄하기는 하지만 권세를 가지고 있는 곤트의 죤(John of Gaunt), 란카스터 공작(Duke of Lancaster), 그리고 그의 추원자이며 보호자가 된 에드워드 3세의 셋째 왕자들과 친밀한 교제를 가졌다.

 

6. 종교개혁자로서의 등장

 

그는 이제 그가 강사가 되었던 루터 워드(Lutter Worth)에서 설교를 하고, 옥스퍼드(Oxford)에서 강의를 하며, 교황권의 남용과 오류에 대해 보다 더 직접적인 공격을 하고 이제는 단순히 형식과 의식들 속에만 형식적으로 남아있고 없어져 버린 기독교의 진정한 정신을 선포하는 등의 일을 하는 확고한 개혁자로서, 보다 담대하게 부각되었다. 그는 성경 속에서 찾아낸 새로운 사상의 다이나마이트를 가지고 악몽처럼 인간의영혼을 괴롭히고 유럽을 노예화한 거대한 영적 독제체재의 심장부를 뒤흔들어 놓았던 것이다.

 

7. 이룩한 실재적인 일들

 

그는 철저히 실천적인 사람이었으며, 그의 사상을 활용시키기 위해 그는 보다 효과적인 일들을 이루어 놓았다. 그는 '걸식 수도사'라는 이름 하에 조잡한 모직의 옷과 거친 적갈색 겉옷을 걸치고 오직 '순수한 복음'만을 외치며 순회하는 설교자들의 무리를 훈련시키기 시작하였고 많은 대중들은 뜨거운 열심을 가지고 그들에게서 진리를 들었다.

 

8. 위클리프를 향한 비난

 

이 새로운 가르침이 교황의 대리인들에게 관용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1377년 그는 런던의 감독인 코오트네이(Courtenay)에 의해, 그의 교리들에 대한 질의에 답변하기 위해 대주교 교구회의에 나타나도록 호출되었으나 그 회합은 무질서 속에 깨어졌다. 이단의 진술들이 그의 글들 속에서 발췌되어졌고 비난이 그에게 쏟아졌다. 그러나 그의 세력있는 친구들에 의해 그의 주장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러섰던 것이다. 그의 적들에 의해 협박되어지는 대신에 그는 그것의 내적인 핵심이며, 최후의 거점인 화체설 교의를 포함한 교황권의 전체 조직을 공격해 나아갔다.

 

9. 역사 속의 새로운 일

 

그는 역사의 새로운 것을 결정했다.그는 평민들에게 직접적으로 호소했다. 그린(Green)은 "사람의 훌륭한 재능을 운명짓는 변형에 의해 그 학자는 논설의 저자로 변형되어 갔다"라고 했다. 그는 수도사들에 대해서 유우머와 재치가 넘치는 영국식 표현으로 논설을 쓰고 또 썼다. 로마의 연대기 기록자는 그 논설을 읽고 투덜거리기를, "봄철의 풀잎 같이 그의 펜 아래에서 꽃봉오리가 맺어졌다"라고 했다.

 

10. 농민의 봉기

 

와트 타일러(Wat Tyler)와 존 발(John Ball) 아래에서 농민봉기가 일어났다. 위클리프는 그것을 격려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압박받는 농민들을 향한 동정과 관용은 비슷한 상황속에서 폭동을 일으킨 독일 농민들을 향한 루터의 날카롭고도 격렬한 노호(怒號)와는 대조적인 것이었다.

 

11. 성경 번역

 

그가 그 자신과 몇 학문적 동조자들의 노력에 의하여 실행하려고 계획하고 착상한 초인적이고 획기적이며 영원한 결실을 맺을 수 있었던 일은 전체 성경을 영어로 번역한 것과 그것을 일반 대중의 손에 들려준 일이었다. 그것의 복사판들은 급격하게 증가했고 널리 배포되었다. 그리고 계속하여 보다 큰 계획이 그의 생각 속에 포함되어졌다. 그것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법 아래에 돌려 놓으려는 것이었으며, 그리스도의 말씀에 부합되도록 만들려는 일이었는데, 그가 생각한 이 일이야말로 그에게 순교자의 죽음을 맞을 수 있도록 만들어준 일이었다.

 

12. 위클리프의 죽음

 

그러나 그의 경력도 그 막을 내릴 때가 가까워져 왔다. 그의 삶의 절정으로서 폭풍우가 닥쳐왔고, 위클리프 그의 위대한 영혼은 평화가 있다고 좋아하는 음성들을 뒤로 하고 그 너머로 넘어갔다. 그러나 그때에 비로소 그는 영원히 꺼질 수 없는 불을 영국에 붙여 놓은 것이었다.

 

13. 발굴된 몸

 

콘스탄스(Constance)의 회의는 그의 유해를 신성하게 안장된 묘지에서 발굴하여 내다 버리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가 죽은지 44년 후 그들은 그것을 발굴하여 루터 워드(Lutter Worth)를 경과하여 흐르는 스위프트 강에다 내던졌다. 이것에 대하여 풀러(Fuller)는 기억할 만한 말을 남겼다.

" 이 시대는 그 유해의 조각들을 아본으로 실어갔고, 아본은 시번으로, 시번은 작은 바다로, 결국에 그것은 대양으로 떠내려 가게 되었다. 결국 위클리프의 유해는 전 세계에 펼쳐진 그의 교의를 상징한 모양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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