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8세의 수장령
1. 수장령의 배경
(1) 헨리 8세 자신의 이혼 문제
헨리 8세는 18세의 나이로 잉글랜드의 왕위에 올랐다. 그의 아버지 헨리 7세는 실제적이고 사무적인 통치로 많은 국부를 축적해놓았고, 또한 그는 장미전쟁 당시 왕위를 놓고 싸움을 벌였던 랭카스터 가와 요크 가의 피를 모두 물려받았기 때문에 정통성의 시비가 없었으므로 훨씬 강력한 왕권을 휘두를 수 있었다. 그는 패기 있고 똑똑한 사람이었으며, 스포츠에도 만능이었고, 특히 학자들과 함께 아퀴나스의 신학을 토론할 만큼 신학에 박식한 사람이었다. ‘7성사의 변증1)’이란 책을 발간하여 교황에게 증정, ‘신앙의 수호자(Defender of the Faith)’라는 칭호까지 받을 정도였으니, 그의 신학적 지식과 확고한 카톨릭적 신념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알 수 있다.
하지만 그의 결혼문제로 인해 카톨릭과의 불화는 시작되었다. 헨리 8세의 형 아서의 미망인으로 그와 재혼한 왕비 캐서린은 18년 동안의 결혼생활에서 딸 메리 밖에 남기지 못했다. 아들이었을지도 모를 다른 자식들은 모두 유산되거나 유아 때 죽어버렸던 것이다. 그는 형의 미망인과의 결혼을 금한 성경구절2)을 이용, 재상 토마스 울지(Thomas Wolsey)를 교황청 대사로 파견해 교황 클레멘스 7세에게 이혼과 궁녀 앤 불린(Anne Boleyn)과의 결혼의 승인을 요청했다. 하지만 이미 그 결혼은 교황 율리오 2세가 내린 결혼성립 인가 하에서 이루어진 것이었고, 더군다나 당시 유럽 최강국이던 스페인의 왕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칼 5세가 캐서린의 조카였다. 교황은 지지부진 시간만 끌고 있었으므로, 헨리 8세는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로마와 갈라설 것을 결심했다.
(2) 당시의 주변상황
헨리 8세의 이혼문제가 로마와의 결렬에 있어서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은 사실이지만, 분명히 그것은 주변상황의 뒷받침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미 14세기부터 영국에서는 교황과 카톨릭에 대한 반대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 형태로는 교회 성직자가 국가의 고위직을 차지하고 있는 것, 교회가 광대한 부동산을 거머쥐고 있는 것, 교회법정의 횡포에 대한 반발이었다. 또한 위클리프(John Wycliffe:1320-1384)가 주도했던 카톨릭에 대한 교리적인 반항운동도 있었지만 그리 큰 성과는 없었다. 하지만 1517년부터 시작된 루터의 종교개혁은 잉글랜드에서도 상당한 지지를 얻고 있었다. 믿음에 의한 구원을 주장하는 루터의 교리는 1520년대에 이미 잉글랜드에 전파되었고, 윌리엄 1세와 헨리 2세 시대에 그들이 추진했던 반교황주의와 위클리프 등의 전통의 바탕 위에서 그것은 쉽게 확산될 수 있었다. 헨리 8세의 심복이었던 토마스 크롬웰(Thomas Cromwell)이나 종교개혁 후 최초의 캔터베리 대주교였던 토마스 크랜머(Thomas Cranmer)같은 지도층 인사들도 루터의 개혁을 지지했다. 특히 루터와 마찬가지로 성직자의 결혼을 옹호한 크랜머는 그 자신도 이를 실행했고, 영어성경의 출판을 추진하여 1539년, 영어성경이 처음으로 출판되었다.
의회가 로마교회의 단절이라는 엄청난 일을 지지했던 것도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의회는 헨리 8세가 추진한 종교개혁적 법안들을 별다른 논의도 없이 통과시켰다. 우선 대부분의 의원들은 그들의 왕이 처한 상황을 동정하고 교황의 생각이 비합리적이라는 데에 동의했던 것 같다. 또한 하원의원들은 특히나 신학적인 문제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왕의 이혼이 잉글랜드 무역에 끼칠 영향을 신학상의 문제보다 더욱 깊이 토론하기까지 했다. 무엇보다도 종교적 변화가 가져올 영구성과 중요성을 깨닫지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중세를 통해, 왕과 교황간의 논쟁과 갈등은 수도 없이 많았고 결국에는 흐지부지 사라져 별다른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이번 경우에도 그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다음 왕이 즉위하기 전에, 헨리 8세와 교황간의 갈등이 해결될 것이라는 기대를 거의 모든 영국민이 가지고 있었다.
대중과 각 지방에 대한 정부의 강력한 통제력, 정부의 교회에 대한 상당한 영향력, 대중에 대한 교회의 강력한 영향력 또한 분명 수장령과 그에서 비롯된 영국의 종교개혁에서 굉장한 플러스 요인이었다.
하지만 분명히 말해둘 것은 이 종교개혁기의 영국 대중들은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신앙고백의 차이점을 논하는 신학적인 문제에 대해서 커다란 관심도, 그것을 이해할 지적 수준도 가지지 못했다는 것이다.
2. 의회를 통한 수장령의 반포
수장령은 한 순간에 제정된 법률이 아니며, 7차례에 걸쳐 소집된 의회를 거치면서 여러 법령들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1) 제 1차 의회 (1529. 11. 3 - 12. 17)
유언법(Probate Act)과 장례법(Mortuaries Act)을 제정, 통과시켜 그 동안 유언을 지켜봄으로써 성직자들이 받는 사례금을 금지시켰고, 성직자가 장례를 치루어준후 금전적 보상을 받던 관례 또한 막아버렸다. 결국 제 1차 의회에서 이루어졌던 것은 반 성직자적 법령의 제정이라 할 수 있다.
(2) 제 2차 의회 (1531. 1. 16 - 3. 31)
전국 성직자들의 회합을 통해 왕이 영국교회의 수장임을 인정받았으며 이는 제 6차 회의에서 의회법에 포함되어 확실한 효력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진정으로 성직자들이 왕을 교회의 수장으로 받아들였다기보다는 암묵적인 압력에 의한 ‘침묵 속의 동의’였다고 보는 편이 적절하다.
(3) 제 3차 의회 (1532. 1.15 - 5. 14)
성직자 복종법(Submission of Clergy)을 선포하여 왕의 허락이 없이는 어떠한 종교집회나 새로운 교회 법규의 제정도 할 수 없도록 했고, 종교회의의 대의원 모두를 왕이 지명하도록 했다. 이에 반발한 토마스 모어 경은 총리직을 사임하고 개인생활로 돌아갔다. 또한 안네이트 법(Annates Act)을 만들어 1487년부터 주교로 임명해준 대가로 로마 교황청에 지불해 오던 돈, 즉 안네이트3)를 금지시켰다. 이때부터 교황권에 대한 도전이 직간접적으로 본격화되었다.
(4) 제 4차 의회 (1533. 2. 4 - 4. 7)
상소 금지법(Act in Restraint of Appeals)을 제정해 왕의 통치권을 벗어난 어떠한 상소도 로마에 올릴 수 없게 했다. 즉 왕을 통하여, 왕의 허락을 받고 로마에 탄원을 하게 함으로써 실제적으로 상소를 금지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이 법이 통과된 후, 교황 클레멘스 7세는 헨리 8세와 앤 불린과의 결혼이 무효임을 선포하고, 7월 11일 헨리 8세를 파문하는 교서를 내렸다.
(5) 제 5차 의회 (1534. 1. 15 - 3. 30)
성직자 복종법과 상소금지법을 재확인하여 정식으로 입법화했고, 주교 임명법과 교황 사면 금지법을 제정하여 왕이 주교를 임명, 또는 면직시킬 수 있게 되고, 교황 대신 캔터베리 대주교가 사면을 행사하며, 수도원에 대한 순찰권도 왕에게 넘겨졌다. 또한 캐서린과의 결혼 때 제정한 왕위 계승법을 폐기하고 새 왕위 계승법을 만들어 앤 불린과의 결혼을 합법화했다.
(6) 제 6차 의회 (1534. 11. 3 - 1535. 2. 4)
마침내 수장령(Act of Supremacy)이 구체적으로 법령화되어 선포되었으며, 반역자 법(Treasons Act)을 제정, 왕권에 거역하고 수장령을 비롯한 각종 법령을 준수하지 않는 자나 국왕을 교회 분열주의자라고 비난하는 자는 누구든지 대역죄인으로 간주하여 처벌한다고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이 법의 제정으로, 수장령과 왕의 횡포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토마스 모어는 반역자로 몰려 런던탑에서 최후를 맞았다.
수장령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교회의 모든 권한은 왕에게 귀속되며, 왕이 모든 교회의 관할권을 가지고, 교황 칙서에 대한 거부권도 왕이 행사한다.
둘째, 교황권에 의해 부당하게 빼앗긴 영국교회의 모든 권리도 당연히 왕에게 귀속된다.
셋째, 교황에 의해 집행되어 온 모든 행정 관리권도 영국교회로 이전되어야 하며, 교회나 국가의 모든 회의도 왕에 의해 관장되어야 하고, 왕이 성직을 주고 박탈할 수 있으며 주교도 왕이 임명한다.
그러나 헨리 8세는 자신이 “영적인 권위의 원천은 아니며 - 이 영적인 권위는 오직 그리스도 자신으로부터 사도들을 통해 성직자들에게 오는 것 - 오직 관할권의 원천4)”에 불과함을 인정했다. 어찌됐든, 제 6차 의회를 통해 법적으로나 실제적으로나 명실상부한 영국교회(Church of England)가 탄생했고, 헨리 8세 자신도 합법적인 영국교회의 수장으로 군림하기에 이르렀다.
(7) 제 7차 의회 (1536. 2. 4 - 4. 14)
군소 수도원 해산법(Act for dissolution of smaller monasteries)을 제정하여 여러 곳에 흩어져있는 작은 수도원 및 수녀원들을 해산시키고 대형 수도원 및 수녀원들을 억압하기 시작했다. 당시 수도원과 수녀원들은 막대한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영국 정부는 전쟁으로 인한 손실을 메워야 한다는 구실로 거의 모든 재산을 몰수했다. 이렇게 몰수한 재산은 농민층의 복지, 학교설립, 해군력 증강 등에 쓰이기도 했으나 헨리 8세 자신의 사치와 호화로운 생활로 상당 액수가 지출되었다.
이렇게 수장령과 그에 따른 정치, 제도적 개혁은 마무리되었다. 지금까지 서술된 내용만 보면 영국의 종교개혁이 위로부터의 급속한 개혁이라고 밖에 생각되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영국의 종교개혁을 바라보는 데에 있어서 그러한 시각만 있는 것은 아니다.
3. 수장령과 그에 수반된 영국의 종교개혁을 바라보는 입장
(1) 위로부터의 급속한 개혁
주로 정치역사가나 전기작가들의 생각이며, 대부분의 교과서에서 주장하고 있는 입장이기도 하다. 이러한 견해를 보이는 주요한 학자인 엘턴(G. R. Elton)은, 영국의 종교개혁은 1530년대에 토마스 크롬웰에 의해 시작되고 수행된 위대한 개혁 프로그램의 결과라고 주장한다. 정부에 의한 공식적인 개혁은 교회의 민족주의화를 위한 것이었고, 종교적인 개혁은 미신적인 의식을 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개혁은 중앙정부로부터 계획적인 통치행위들에 의해 강제적으로 시행되었다. 엘턴의 주장에 따르면 1533년경에 이미 영국 대부분의 지역이 프로테스탄트화가 되었다고 한다.
(2) 아래로부터의 급속한 개혁
이 입장을 대표하는 학자 디킨즈(A. G. Dickens)에 의하면, 영국의 종교개혁은 팽창하는 후기 롤라드(Lollard)5)와 초기 프로테스탄트 주의가 연결되어 대중적인 종교개혁의 진전을 이루어냈다고 한다. 비록 법률을 개정함으로써 개혁이 승리할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졌다 하더라도 그에게 있어서 종교개혁은 국가의 강제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라기보다는 개인의 회심에 의한 것이었다.
(3) 위에서부터의 느린 개혁
위로부터 부과된 것이지만 지방에는 매우 늦게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또한 로우즈(A. L. Rowse)와 같은 사람은 종교개혁을 프로테스탄트적인 젠트리와 카톨릭적인 젠트리와의 충돌로 본다. 이 충돌의 승리자들은 ‘정신적으로 수동적인 사람들’의 종교에 대해 독단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권한을 얻었다는 것이다. 이 두 세력의 투쟁에서 프로테스탄트 진영은 1570년대 후반에 결정적인 도약을 이루며 이 때의 정치적 투쟁의 결과 해안지방의 개혁적인 젠트리들이 내륙의 보수적인 젠트리들을 밀어냈으며, 그 후로는 종교개혁에 있어서 방해될 세력은 없었다는 것이다.
(4) 아래로부터의 느린 개혁
초기의 종교개혁, 즉 수장령을 기초로 한 일련의 개혁들은 역사적으로 볼 때 별다른 진전이 없었고, 주요한 프로테스탄트의 진전은 엘리자베스 시대의 대학에서 훈련받은 목사들의 복음주의적인 노력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4. 평 가
영국의 종교개혁은 수장령으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대륙의 국가들과는 달리 다분히 정치적인 이유로 이루어졌고, 헨리 8세의 수장령, 메리 1세의 카톨릭 부활, 엘리자베스 1세의 통일령, 영국혁명 후 윌리엄 3세가 반포한 관용령으로 이어지는 수순을 살펴보면 영국의 종교개혁이 분명 위로부터의 영향력에 의해 이루어진 것임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특히 헨리 8세 시대의 영국의 개혁운동은 종교개혁이라기보다는 다분히 정치적, 구조적으로 이루어진 개혁으로서의 성격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그가 교황권을 부인하고 스스로 교회의 관할권을 차지했지만 아직도 영국교회의 로마 카톨릭에 대한 충성심은 남아있었으며, 수장령으로 인해서 영국이 유럽 프로테스탄트의 사상이나 교리를 철저히 받아들인 것도 아니었다. 영국의 종교개혁은 수장령으로 시작되었지만, 그 시작은 정치적, 구조적인 부분의 변화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헨리 8세는 수장령을 비롯한 각종 법령으로 영국의 국가주의의 기틀을 마련했고, 비록 종교적인 개혁은 미미했지만 명실상부한 영국교회를 세웠다는 것이다.
참고문헌
박지향, 《영국사》,까치.
차하순, 《새로 쓴 서양사 총론 1》, 탐구당, 2000.
김준배, <영국의 종교개혁과 튜도왕조의 개혁정책과의 관계에 대한 연구>,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1.
오찬경, <영국의 종교개혁 연구>,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0.
1. 수장령의 배경
(1) 헨리 8세 자신의 이혼 문제
헨리 8세는 18세의 나이로 잉글랜드의 왕위에 올랐다. 그의 아버지 헨리 7세는 실제적이고 사무적인 통치로 많은 국부를 축적해놓았고, 또한 그는 장미전쟁 당시 왕위를 놓고 싸움을 벌였던 랭카스터 가와 요크 가의 피를 모두 물려받았기 때문에 정통성의 시비가 없었으므로 훨씬 강력한 왕권을 휘두를 수 있었다. 그는 패기 있고 똑똑한 사람이었으며, 스포츠에도 만능이었고, 특히 학자들과 함께 아퀴나스의 신학을 토론할 만큼 신학에 박식한 사람이었다. ‘7성사의 변증1)’이란 책을 발간하여 교황에게 증정, ‘신앙의 수호자(Defender of the Faith)’라는 칭호까지 받을 정도였으니, 그의 신학적 지식과 확고한 카톨릭적 신념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알 수 있다.
하지만 그의 결혼문제로 인해 카톨릭과의 불화는 시작되었다. 헨리 8세의 형 아서의 미망인으로 그와 재혼한 왕비 캐서린은 18년 동안의 결혼생활에서 딸 메리 밖에 남기지 못했다. 아들이었을지도 모를 다른 자식들은 모두 유산되거나 유아 때 죽어버렸던 것이다. 그는 형의 미망인과의 결혼을 금한 성경구절2)을 이용, 재상 토마스 울지(Thomas Wolsey)를 교황청 대사로 파견해 교황 클레멘스 7세에게 이혼과 궁녀 앤 불린(Anne Boleyn)과의 결혼의 승인을 요청했다. 하지만 이미 그 결혼은 교황 율리오 2세가 내린 결혼성립 인가 하에서 이루어진 것이었고, 더군다나 당시 유럽 최강국이던 스페인의 왕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칼 5세가 캐서린의 조카였다. 교황은 지지부진 시간만 끌고 있었으므로, 헨리 8세는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로마와 갈라설 것을 결심했다.
(2) 당시의 주변상황
헨리 8세의 이혼문제가 로마와의 결렬에 있어서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은 사실이지만, 분명히 그것은 주변상황의 뒷받침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미 14세기부터 영국에서는 교황과 카톨릭에 대한 반대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 형태로는 교회 성직자가 국가의 고위직을 차지하고 있는 것, 교회가 광대한 부동산을 거머쥐고 있는 것, 교회법정의 횡포에 대한 반발이었다. 또한 위클리프(John Wycliffe:1320-1384)가 주도했던 카톨릭에 대한 교리적인 반항운동도 있었지만 그리 큰 성과는 없었다. 하지만 1517년부터 시작된 루터의 종교개혁은 잉글랜드에서도 상당한 지지를 얻고 있었다. 믿음에 의한 구원을 주장하는 루터의 교리는 1520년대에 이미 잉글랜드에 전파되었고, 윌리엄 1세와 헨리 2세 시대에 그들이 추진했던 반교황주의와 위클리프 등의 전통의 바탕 위에서 그것은 쉽게 확산될 수 있었다. 헨리 8세의 심복이었던 토마스 크롬웰(Thomas Cromwell)이나 종교개혁 후 최초의 캔터베리 대주교였던 토마스 크랜머(Thomas Cranmer)같은 지도층 인사들도 루터의 개혁을 지지했다. 특히 루터와 마찬가지로 성직자의 결혼을 옹호한 크랜머는 그 자신도 이를 실행했고, 영어성경의 출판을 추진하여 1539년, 영어성경이 처음으로 출판되었다.
의회가 로마교회의 단절이라는 엄청난 일을 지지했던 것도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의회는 헨리 8세가 추진한 종교개혁적 법안들을 별다른 논의도 없이 통과시켰다. 우선 대부분의 의원들은 그들의 왕이 처한 상황을 동정하고 교황의 생각이 비합리적이라는 데에 동의했던 것 같다. 또한 하원의원들은 특히나 신학적인 문제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왕의 이혼이 잉글랜드 무역에 끼칠 영향을 신학상의 문제보다 더욱 깊이 토론하기까지 했다. 무엇보다도 종교적 변화가 가져올 영구성과 중요성을 깨닫지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중세를 통해, 왕과 교황간의 논쟁과 갈등은 수도 없이 많았고 결국에는 흐지부지 사라져 별다른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이번 경우에도 그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다음 왕이 즉위하기 전에, 헨리 8세와 교황간의 갈등이 해결될 것이라는 기대를 거의 모든 영국민이 가지고 있었다.
대중과 각 지방에 대한 정부의 강력한 통제력, 정부의 교회에 대한 상당한 영향력, 대중에 대한 교회의 강력한 영향력 또한 분명 수장령과 그에서 비롯된 영국의 종교개혁에서 굉장한 플러스 요인이었다.
하지만 분명히 말해둘 것은 이 종교개혁기의 영국 대중들은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신앙고백의 차이점을 논하는 신학적인 문제에 대해서 커다란 관심도, 그것을 이해할 지적 수준도 가지지 못했다는 것이다.
2. 의회를 통한 수장령의 반포
수장령은 한 순간에 제정된 법률이 아니며, 7차례에 걸쳐 소집된 의회를 거치면서 여러 법령들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1) 제 1차 의회 (1529. 11. 3 - 12. 17)
유언법(Probate Act)과 장례법(Mortuaries Act)을 제정, 통과시켜 그 동안 유언을 지켜봄으로써 성직자들이 받는 사례금을 금지시켰고, 성직자가 장례를 치루어준후 금전적 보상을 받던 관례 또한 막아버렸다. 결국 제 1차 의회에서 이루어졌던 것은 반 성직자적 법령의 제정이라 할 수 있다.
(2) 제 2차 의회 (1531. 1. 16 - 3. 31)
전국 성직자들의 회합을 통해 왕이 영국교회의 수장임을 인정받았으며 이는 제 6차 회의에서 의회법에 포함되어 확실한 효력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진정으로 성직자들이 왕을 교회의 수장으로 받아들였다기보다는 암묵적인 압력에 의한 ‘침묵 속의 동의’였다고 보는 편이 적절하다.
(3) 제 3차 의회 (1532. 1.15 - 5. 14)
성직자 복종법(Submission of Clergy)을 선포하여 왕의 허락이 없이는 어떠한 종교집회나 새로운 교회 법규의 제정도 할 수 없도록 했고, 종교회의의 대의원 모두를 왕이 지명하도록 했다. 이에 반발한 토마스 모어 경은 총리직을 사임하고 개인생활로 돌아갔다. 또한 안네이트 법(Annates Act)을 만들어 1487년부터 주교로 임명해준 대가로 로마 교황청에 지불해 오던 돈, 즉 안네이트3)를 금지시켰다. 이때부터 교황권에 대한 도전이 직간접적으로 본격화되었다.
(4) 제 4차 의회 (1533. 2. 4 - 4. 7)
상소 금지법(Act in Restraint of Appeals)을 제정해 왕의 통치권을 벗어난 어떠한 상소도 로마에 올릴 수 없게 했다. 즉 왕을 통하여, 왕의 허락을 받고 로마에 탄원을 하게 함으로써 실제적으로 상소를 금지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이 법이 통과된 후, 교황 클레멘스 7세는 헨리 8세와 앤 불린과의 결혼이 무효임을 선포하고, 7월 11일 헨리 8세를 파문하는 교서를 내렸다.
(5) 제 5차 의회 (1534. 1. 15 - 3. 30)
성직자 복종법과 상소금지법을 재확인하여 정식으로 입법화했고, 주교 임명법과 교황 사면 금지법을 제정하여 왕이 주교를 임명, 또는 면직시킬 수 있게 되고, 교황 대신 캔터베리 대주교가 사면을 행사하며, 수도원에 대한 순찰권도 왕에게 넘겨졌다. 또한 캐서린과의 결혼 때 제정한 왕위 계승법을 폐기하고 새 왕위 계승법을 만들어 앤 불린과의 결혼을 합법화했다.
(6) 제 6차 의회 (1534. 11. 3 - 1535. 2. 4)
마침내 수장령(Act of Supremacy)이 구체적으로 법령화되어 선포되었으며, 반역자 법(Treasons Act)을 제정, 왕권에 거역하고 수장령을 비롯한 각종 법령을 준수하지 않는 자나 국왕을 교회 분열주의자라고 비난하는 자는 누구든지 대역죄인으로 간주하여 처벌한다고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이 법의 제정으로, 수장령과 왕의 횡포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토마스 모어는 반역자로 몰려 런던탑에서 최후를 맞았다.
수장령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교회의 모든 권한은 왕에게 귀속되며, 왕이 모든 교회의 관할권을 가지고, 교황 칙서에 대한 거부권도 왕이 행사한다.
둘째, 교황권에 의해 부당하게 빼앗긴 영국교회의 모든 권리도 당연히 왕에게 귀속된다.
셋째, 교황에 의해 집행되어 온 모든 행정 관리권도 영국교회로 이전되어야 하며, 교회나 국가의 모든 회의도 왕에 의해 관장되어야 하고, 왕이 성직을 주고 박탈할 수 있으며 주교도 왕이 임명한다.
그러나 헨리 8세는 자신이 “영적인 권위의 원천은 아니며 - 이 영적인 권위는 오직 그리스도 자신으로부터 사도들을 통해 성직자들에게 오는 것 - 오직 관할권의 원천4)”에 불과함을 인정했다. 어찌됐든, 제 6차 의회를 통해 법적으로나 실제적으로나 명실상부한 영국교회(Church of England)가 탄생했고, 헨리 8세 자신도 합법적인 영국교회의 수장으로 군림하기에 이르렀다.
(7) 제 7차 의회 (1536. 2. 4 - 4. 14)
군소 수도원 해산법(Act for dissolution of smaller monasteries)을 제정하여 여러 곳에 흩어져있는 작은 수도원 및 수녀원들을 해산시키고 대형 수도원 및 수녀원들을 억압하기 시작했다. 당시 수도원과 수녀원들은 막대한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영국 정부는 전쟁으로 인한 손실을 메워야 한다는 구실로 거의 모든 재산을 몰수했다. 이렇게 몰수한 재산은 농민층의 복지, 학교설립, 해군력 증강 등에 쓰이기도 했으나 헨리 8세 자신의 사치와 호화로운 생활로 상당 액수가 지출되었다.
이렇게 수장령과 그에 따른 정치, 제도적 개혁은 마무리되었다. 지금까지 서술된 내용만 보면 영국의 종교개혁이 위로부터의 급속한 개혁이라고 밖에 생각되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영국의 종교개혁을 바라보는 데에 있어서 그러한 시각만 있는 것은 아니다.
3. 수장령과 그에 수반된 영국의 종교개혁을 바라보는 입장
(1) 위로부터의 급속한 개혁
주로 정치역사가나 전기작가들의 생각이며, 대부분의 교과서에서 주장하고 있는 입장이기도 하다. 이러한 견해를 보이는 주요한 학자인 엘턴(G. R. Elton)은, 영국의 종교개혁은 1530년대에 토마스 크롬웰에 의해 시작되고 수행된 위대한 개혁 프로그램의 결과라고 주장한다. 정부에 의한 공식적인 개혁은 교회의 민족주의화를 위한 것이었고, 종교적인 개혁은 미신적인 의식을 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개혁은 중앙정부로부터 계획적인 통치행위들에 의해 강제적으로 시행되었다. 엘턴의 주장에 따르면 1533년경에 이미 영국 대부분의 지역이 프로테스탄트화가 되었다고 한다.
(2) 아래로부터의 급속한 개혁
이 입장을 대표하는 학자 디킨즈(A. G. Dickens)에 의하면, 영국의 종교개혁은 팽창하는 후기 롤라드(Lollard)5)와 초기 프로테스탄트 주의가 연결되어 대중적인 종교개혁의 진전을 이루어냈다고 한다. 비록 법률을 개정함으로써 개혁이 승리할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졌다 하더라도 그에게 있어서 종교개혁은 국가의 강제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라기보다는 개인의 회심에 의한 것이었다.
(3) 위에서부터의 느린 개혁
위로부터 부과된 것이지만 지방에는 매우 늦게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또한 로우즈(A. L. Rowse)와 같은 사람은 종교개혁을 프로테스탄트적인 젠트리와 카톨릭적인 젠트리와의 충돌로 본다. 이 충돌의 승리자들은 ‘정신적으로 수동적인 사람들’의 종교에 대해 독단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권한을 얻었다는 것이다. 이 두 세력의 투쟁에서 프로테스탄트 진영은 1570년대 후반에 결정적인 도약을 이루며 이 때의 정치적 투쟁의 결과 해안지방의 개혁적인 젠트리들이 내륙의 보수적인 젠트리들을 밀어냈으며, 그 후로는 종교개혁에 있어서 방해될 세력은 없었다는 것이다.
(4) 아래로부터의 느린 개혁
초기의 종교개혁, 즉 수장령을 기초로 한 일련의 개혁들은 역사적으로 볼 때 별다른 진전이 없었고, 주요한 프로테스탄트의 진전은 엘리자베스 시대의 대학에서 훈련받은 목사들의 복음주의적인 노력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4. 평 가
영국의 종교개혁은 수장령으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대륙의 국가들과는 달리 다분히 정치적인 이유로 이루어졌고, 헨리 8세의 수장령, 메리 1세의 카톨릭 부활, 엘리자베스 1세의 통일령, 영국혁명 후 윌리엄 3세가 반포한 관용령으로 이어지는 수순을 살펴보면 영국의 종교개혁이 분명 위로부터의 영향력에 의해 이루어진 것임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특히 헨리 8세 시대의 영국의 개혁운동은 종교개혁이라기보다는 다분히 정치적, 구조적으로 이루어진 개혁으로서의 성격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그가 교황권을 부인하고 스스로 교회의 관할권을 차지했지만 아직도 영국교회의 로마 카톨릭에 대한 충성심은 남아있었으며, 수장령으로 인해서 영국이 유럽 프로테스탄트의 사상이나 교리를 철저히 받아들인 것도 아니었다. 영국의 종교개혁은 수장령으로 시작되었지만, 그 시작은 정치적, 구조적인 부분의 변화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헨리 8세는 수장령을 비롯한 각종 법령으로 영국의 국가주의의 기틀을 마련했고, 비록 종교적인 개혁은 미미했지만 명실상부한 영국교회를 세웠다는 것이다.
참고문헌
박지향, 《영국사》,까치.
차하순, 《새로 쓴 서양사 총론 1》, 탐구당, 2000.
김준배, <영국의 종교개혁과 튜도왕조의 개혁정책과의 관계에 대한 연구>,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1.
오찬경, <영국의 종교개혁 연구>,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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