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신학 제16강
지난 시간 줄거리
지난 시간에 롬 1:3-4에서 바울이 인용하는 초대교회의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신앙고백과 바울의 서신에 나타나는 이른바 보냄의 형식(the sending formula)-갈4;1/롬8:3 등-을 비교할 때 롬 1:3-4에 인용된 초대교회의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신앙고백에는 아직 선재사상이 뚜렷이 나타나지 않는 반면에 보냄의 형식-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냈다-에는 선재사상이 뚜렷히 함축되어 있다. 그런데 롬 1:2에서 바울이 복음을 정의함에 있어서 복음은 그의 아들에 관한 것이라고 서문을 담고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을 인용함으로써 바울에 있어서 하나님의 아들은 선재하셨던 분으로 다윗의 씨로 즉 여자의 몸에서 낳은 성육신 하나님의 아들로 분명히 드러난다. 그래서 바울에게 있어서 선재사상이 드러난다는 이야기를 했다. 선재 사상은 대부분의 학자들은 전에 교회에서 이미 이루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실재에 대한 통찰력을 보는데 나는 내 책에서 주장하기를 “아마 이것은 초대 교회에서 가장 위대한 신학자였던 바울이 터득한 통찰력이고 바울이 초대교회의 기독로적 발전에 기이한 큰 공헌을 했을 것이다.” 이것을 보기 위해서 차례로 하나님의 아들의 선재사상에 대한 전반적인 것을 보도록 하겠다.
1)종교사적 배경-구약/유대교-지혜 사상
이것은 구약과 유대교의 지혜 사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지혜 사상은 초월하신 하나님의 내재하심을 천명하기 위한 신학적인 언어수단으로서 하나님의 지혜-hypostatizetion-가 하나님의 속성인 추상명사에 불과한 것이 아니고 하나의 물체화한 것으로 이해하고 인격화 한 것으로 이해되어서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아서 하나님의 창조와 계시와 구원의 역할을 감당하는 하나님의 일군 노릇한다는 의미로 하나님의 딸이라고도 불림을 받는다고 한다.
⇨보냄(sending) ??창조??일군(agent)
? 계시 ?
??구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그의 딸 지혜를 통해서 창조하시고 하나님께서 그의 뜻을 이스라엘에게 계시하시는데 그의 딸-지혜-을 보내서 그의 뜻을 계시한다. 구원의 수단으로 하나님께서 그의 딸-지혜-을 보내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시고 지혜로 광야에서 가나안으로 인도하시고 하는 것이 구원의 수단이고 지혜를 통해서 하나님의 일군 된다.
즉 지혜가 하나님의 계시와 창조의 수단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에 계시의 수단이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율법이다. 율법에 하나님의 뜻이 계시된 것이다. 그래서 지혜서라고 할 수 있는 sirach 24장에서는 이 율법이 하나님의 지혜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기 때문에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는다. 곧 지혜가 주는 구원을 얻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율법을 지키는 행위가 지혜를 받는 행위이고 의로운 행위에서 구원을 받는다. 이런 지혜신학이 발달을 했는데 바로 하나님께서 그의 딸-선재한 지혜-을 보내서 후에 창조와 계시와 구원을 하신다는 사상이 유대교에 발달하는데 이것을 앞에서 말한대로 초월하신 하나님의 이 세상에 내재하심을 말하고 후에 창조와 계시와 구원활동을 설명하기 위한 언어 수단으로 말한다.
이런 신관을 이위일체론이라고도 한다. 지혜신학이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에 선재사상과 보냄의 형식이 된 것이다.
곧 바울의 서신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내사 여자의 몸에서 낳게 하고 율법아래 낳게 했다는 것은 우리를 율법의 속박으로부터 속량해서 구원하실려고 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지혜를 보내서 모든 뜻을 계시하고 그가 구원한 것 같이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냈다. 곧 신약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점진적인 계시의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딸인 지혜 활동이라고 그려진 것은 실제로는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되기 전에 활동을 그린 것이다. 이런 종교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다루는 것 중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예수 그리스도의 선재 사상과 보냄의 형식을 초대교회에서 누가 제일 먼저 발달시켰느냐 하는 통찰력을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재정돈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지혜의 카테고리로 보기 시작한 것이 누구이냐? 초대교회에서 누가 제일 먼서 시작했느냐?
하나님의 아들의 선재사상이라든지 선재한 하나님의 아들의 보냄의 형식이 지혜신학에 근거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지혜와 동일시함으로 만들어졌으니까 초대교회에서 누가 예수 그리스도를 지혜와 제일먼저 동일시했는가를 살펴보면 누가 하나님의 아들 선재사상, 보냄의 형식을 제일 먼저 개발했는가를 해결할 수 있다.
2)예수 그리스도를 지혜와 동일시함
예수 그리스도를 지혜와 동일시함을 우선 바울신학 내에서 본다면
①고전 10:1-4 까지에서 바울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므리바에서 물을 공급한 반석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 있는 그들을 계속 동행했다. 그런데 바울은 고전 10:4에 “이 반석은 그리스도라” 한다. 이 유대 랍비들에게는 문제가 하나 발생했다. 므리바에서 모세가 반석을 지팡이로 쳐서 물을 얻어 공급해서 유대인들을 구원한 것이다.
그래서 반석이 구원의 수단이었다. 그런 이후-므리바에서 물을 잔뜻 마신 것-에 어떻게 되었는가? 그 다음에는 어디서 물을 마셨는가?
이것이 유대 랍비들에게는 문제였다. 그래서 유대 랍비들이 상상하기를 반석이 이스라엘 족속이 광야에서 헤매는 동안에 계속 그들을 따라 다니면서-동행하면서-물을 공급했다고 신학을 전개해 나갔다. 그런데 Alexsander의 Philo는 이 신학을 이어 받아서 ‘그 반석이 바로 하나님의 지혜였다’고 한다. 이것은 결국 광야에서 물을 공급한 것은 이스라엘에게 구원을 주는 구원 수단이었다. 그런데 앞에서 이야기한대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지혜를 통해서 구원한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지혜가 반석으로 나타난다는 말이다. 그런데 바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지혜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계시와 구원의 수단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아들로서 하나님의 계시와 지혜의 수단이다. 그렇다면 구약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구원의 수단인 반석-물을 공급-도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전의 활동으로 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바울은 고전 10:4에서 이 반석은 바로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바울이 반석을 지혜-Philo와 같은 유대의 신학-로 그리는 수용해서 그리스도에게 적용하는 곧 그리스도를 지헤와 동일시하는 것을 고전 10:4에서 볼 수가 있다.
②롬10:6-7(신30:12-14)
여기서 바울은 신30:112-14에 대한 해석을 하고 있다. 신명기에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 저 하늘에 있어서 인간의 힘으로 하늘에 올라가서 그것을 받아 가지고 온 것도 아니고 저 바다 밑에 있어 가지고 인간이 노려해서 바다에 가서 가져온 것도 아니고 하나님 계시의 말씀이 바로 우리와 같이-옆에,속에-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듣고 순종할 마음만 있으면 하늘로 올라가고 바다 밑으로 내려가는 엉뚱한 노력없이 금방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듣고 행할 수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계시의 수단이 말씀이 목적-대상-이다. 그런데 이것을 유대 묵시문서인 Baruch3:29ff에 보면 하나님 말씀을 지혜로 대치해 놓았다. 하나님의 지혜가 저 하늘 위에 있어서 인간들이 좇아 올라가서 구해올 것도 아니고 저 바다 밑에 있어서 인간들이 불가능한 노력을 해서 건져올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지혜가 우리와 같이 있다는 말이다. 곧 하나님의 계시는 우리에게 있다. 우리가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고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려는 의지가 있으면 하나님의 뜻에 금방 우리에게 환히 밝혀 보인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것이 바울은 롬 10:6f에서 그리스도에게 적용하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계시의 수단인 신명기의 말씀이 유대 묵시 문학에서는 지혜로 이해되었는데 바울은 그리스도라 하여 다시 한번 그리스도와 지혜를 동힐시하는 것을 볼 수 있다.
③그리스도를 하나님의 형상이라 εικων του Θεου (고전 4:4.골1:15 등)
솔로몬의 지혜라는 책 7장 25절과 26절을 보면 지혜가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다. 지혜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소리는 하나님의 계시자라는 소리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보고 우리가 하나님이 어떻게 생겼는가를 안다. 지혜가 바로 우리에게 하나님을 보여주는 형상이다. 그래서 지혜가 하나님 형상이라고 하는데 바울은 다시 한번 예수 그리스도와 지혜를 동일시 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아예 고전 1:24에서 바울이 “우리에게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 라고 불럿다. 비슷하게 고전 1:30/골2:3 등 여러 곳에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지혜라고 부르고 있다.
다음 단계로 바울이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지혜로 이해하게 된 까닭이 무엇인가? 무엇에 근거해서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지혜라고 부르게 됐느냐?
3)바울이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지혜로 부르게 된 근거-다메섹 도상에서 얻은 두 개의 통찰력에 의해 근거
①부활하여 하나님 우편에 높임받으신 그리스도께서 바울에게 주,주님으로 나타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하나님의 아들 같이 나타났고, 하나님의 형상-εικων του Θεου-을 가진자로 나타났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과 하나님 영광(δοξα)이라는 말은 거의 동의어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에 하나님 같은 자로, 하나님 같이 나타났다. 즉 하나님 형상을 가지고 나타났다. 나중에 보겠지만 오로지 바울만이 신약전체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형상 기독론이 아주 중요하다. 그런데 유대 신학에서는 하나님 형상을 지혜가 하나님 형상이다. 그러니까 예수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다메섹 도상에서 체험하고 바울은 곧장 예수를 지헤와 동일시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과 하나님의 형상 이것은 사실 같이 가는 말이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하나님 아들로 보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형상으로 보았다. 갈 1:16에서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의 계시를 말할 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쓴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나에게 계시했다. 그래서 다메섹 도상에서 자기가 예수를 하나님 아들로 인식했음을 암시한다. 그런데 고후 4:4-6까지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의 체험을 반영하는 말인데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한 것을 반영한 말인데 거기에서 바로 바울은 예수를 하나님 형상이라고 한다. 그래서 갈 1:16과 고전 4:4-6까지의 유사점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②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가 율법을 능가하고 대치했음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바울이 다메섹 도상을 향해 가는 것은 십자가에 못박힌-신21:23등-것이 하나님의 저주를 선언한 예수를 그리스도-메시야-라고 선포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이름으로 율법을 비판함으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러 다메섹에 갔다. 그러니까 다메섹으로 가고 있는 바울에게 율법이냐 예수가 그리스도냐의 정통성을 가지고 간 것이다. 율법이 정말 하나님의 계시인가? 그래서 예수에게 내린 저주가 옳은 것이냐? 유대 신학자 바울로서는 이렇게 보았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그게 아니라 예수가 메시야됨에 비추어서 이 율법이 온전하지 못하다. 예수가 도리어 율법을 완성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유대 신학-율법신학-이 옳으냐? 그리스도인들의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것이 옳으냐? 으로 가고 있다.
그런데 유대 신학에 의하면 율법이 하나님의 저주를 선언했다고 생각했던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우편에 높이셔서 계시했으므로 바울은 여기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선포가 옳다는 것을 깨달았다.
율법의 예수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 선언은 예수 자신이 죄 때문이 아니라 우리 죄를 위한 것이다. 예수는 종말에 구원을 완성한 메시야라 그렇다면 그전의 모든 성경-율법과 선지서-은 예수에 대한 예언-약속-에 불과하다. 예수가 메시야로서 율법의 성취이다. 그렇다면 예수가 메시야로서 하나님이 뜻의 종말론적인 완성된 계시로서 율법을 능가한 것이다. 성취는 불완전-율법,성경-한 것에 미완성한 것을 능가하는 것이다. 곧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로서 율법을 성취하고, 능가하고, 대치함을 다메섹 도상에서 깨달았다. 그렇다면 더 이상 율법이 하나님의 완전-메시야-한 계시가 아니라 이것은 불완전-율법성경-한 계시이다(완전한 계시에 비춰 보았을 때).
불완전하기 보다는 미완전한 계시이다. 아직 예비적 미완의 계시에 불과한 것이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체험한 하나님 아들은 완성된 종말론적인 하나님이 계시라는 것이다. 율법을 성취하고 누군각가 대치하는 것이다. 지혜신학에서 율법이 하나님의 뜻을 계시한다 해서 지혜를 담고 있다. 지혜 신학에 있어서는 율법이 지혜의 구체화(enbodyment)라고 보았다. 지혜가 하나님 계시와 구원의 수단이다. 이것이 율법에 담겨져 표현된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신학적인 입장에서 보았을 때 신학자(바울)가 예수는 율법을 성취하고 능가하고 대치하는 하나님의 아들로 체험했다는 것은 지혜를 불완전하게 또는 미완적으로 담고 표현했다. 율법이 예수에 의해 성취되고 능가하고 대치되었으니까 지혜가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완전히 담겨져 표현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런 의미로 유대 신학에서는 율법이 곧 지혜라고도 하는데 예수 그리스도-하나님 아들-야 말로 이보다 훨씬 큰 정당성을 가지고 지혜라고 해야 되지 않느냐? 지혜가 예수 그리스도-하나님 아들-을 통해서 나타나셨다. 아예 성육신했다고 해야 한다. 지혜가 예수 그리스도-하나님 아들-를 통해서 성육신하신 것이다. 왜 그러냐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완성된 계시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계시의 수단인 지혜가 하나님 아들을 통해서 완전히 몸으로 들어났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의 두 통찰력 부활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보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본 것은 바울로 하여금 예수-하나님의 아들-를 지혜의 카테고리로 생각했고 또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예수가 영광된 하나님의 아들로 계시된 것을 본 것은 곧 하나님 아들 예수가 율법을 성취하고 능가하고 대치했다는 통찰력을 주었는데 이것도 바울로 하여금 예수-하나님 아들-를 지혜의 카테고리로 생각했다-을 바울은 유대 지혜 신학에 있어서 지혜의 카테고리로 해석을 하게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지혜라고 선포를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선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롬 10:4에 율법의 τελος8)이다.
예수가 율법을 성취(완성)하고 능가하고 대치한다. 그래서 율법의 라는 말이 우리 말에는 마침이라고 번역되어 있다-“그리스도가 율법의 마침이다”-또한 τελος가 완성(성취),목적-goal,end- 또는 끝장-termiantion- 내버림이다. 끝장 내버린다는 말은 대치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로마서 문맥에 있어서는 termiantion의 뜻이 가장 강할지도 모른다. 하여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이렇게 깨달았다. 그래서 예수를 지혜로 부르고 하나님 형상으로 회복으로 봤다. 예수의 품격(person)과 사역(work)을 지혜의 카테고리로 설명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혜가 하나님의 딸이면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이다.
지혜는 헬라어의 σοφια 나 히브리어의 המקוה 로 여성명사이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딸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여자가 아니고 남자였다. 그래서 딸이라고 하지 않고 아들이라고 했다. 딸이나 아들이나 다 그림 언어이다. 하나님과 함께 속하는 하나님적인 존재라는 말이다. 이렇게 예수의 품격을 지혜의 카테고리로 해석을 하고 하나님 아들이라고 했다. 또 지혜가 하나님의 사자 노릇하는 하나님의 보냄 받은 곧 하나님의 전권 대사 노릇하는 자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의 사역을 하나님의 사자 또는 전권대사로 보냄을 받아서 창조와 계시와 구원의 중보자 노릇한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그리고 있다. 이것이 다 지혜의 카테고리로 설명한 것이다.
person(품격)⇨‘하나님의 아들’ 선재
work(사역)⇨보냄/사자/전권대사 창조,계시,구원
그러니까 구약과 유대 신학의 지혜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우리가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이와 같이 얻은 통찰력으로 예수를 지혜의 카테고리로 그의 품격과 그의 사역을 설명했다고 말해야 한다. 그러나 완성된 계시-그리스도-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거꾸로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한 하나님 아들로 하나님의 창조와 계시와 구원의 사역중 중보자 노릇함이 성육신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완전히 계시되기 전에 그 예비계시인 구약과 유대교에서 지혜의 카테고리로 그렸다고 설명해야 한다.
사실은 전자보다 후자가 더 옳은 말이다. 그래서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십자가와 부활로 완전히 스스로 계시한 하나님 아들을 체험하고 바로 이러한 계시의 카테고리를 써서 예수 그리스도의 품격과 사역을 그렸다.
그런데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품격과 사역을 지혜의 카테고리로 해석을 한 것이 바울의 신학적인 공헌이라고 주장하는 바이다. 왜냐하면 다메섹 도상에서의 사건은 초대교회에서 아주 초기의 사건-AD 32,33-이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신학자였고 바울에게만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 지혜의 칭호가 하나가 분명히 나타난다. 바로 이런 이유들로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지혜의 카테고리로 그의 품격과 사역을 해석하기 시작한 것이 바울의 초대교회에서의 신학적인 공헌이다. 그것은 다메섹 도상에서의 계시에 의한 것이었다고 나는 주장한다. 이것이 지혜기독론-지혜의 카테고리로 예수의 품격과 사역을 해석하는 것-이라고 한다.
지혜기독론의 일부가 선재사상이다. 그리고 예수의 창조와 계시와 구원의 중보자 노릇했다는 것이 지혜기독론의 일부이다. 이런 것들도 다 바울의 초대교회에 대한 고백이었다. 그래서 바울이 인용-롬1:3,4-하는 것은 아직 이런 지혜기독론이 나타나지 않지 않는가 나는 주장한다.
이 주장에 맞서서 많은 학자들이 지혜기독론을 바울서신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신약전체에서 나타난다. 요한복음에 아주 중요하게 나타나고 요한복음의 하나님 아들을 기독론의 형식으로 나타난다(요 3:17).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내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멸망하도록 하지 않고 구원을 얻도록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냈다는 보냄의 형식이 나온다. 요 3:16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내어 주셨다”는 내어줌의 형식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낸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의 이름을 믿어 구원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요한복음에도 하나님 아들이 보냄의 형식으로 나온다. 뿐만 아니라 요한복음에서 하나님 아들은 하나님의 계시와 구원의 중보자이다. 요한복음에 있어서 카테고리는 계시이다. 예수가 하나님 아들로서 하나님의 계시자이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고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 요한복음에서 예수가 계속 하나님을 ‘나를 보내신 이’ ‘나를 보내신 아버지’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아들은 보냄을 받은 자이다. 그것이 계속 보냄의 형식,선재사상,선재사상등은 요한복음에서 나오는 중요한 기독론이다. 그러니까 요한복음은 지혜 기독론이 중심이다. 이것을 한마디로 헬라적 용어로 말한다면 ‘예수가 λογος이다’ 해서 요한복음 서문에 나오는 λογος 사상이 사실은 지혜기독론을 내용으로 삼고 있다.
요한복음에서만 나타난게 아니고 요한계시록에도 있다(하나님을 지혜로 하는 사상). 또 히브리서에도 있다. 히 1:1-3까지가 기독론적인 신앙고백이다. 이것이 지혜신학이다. 지금까지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서 여러 모양-부분적으로,조각조각-으로 계시했던 하나님이 종말에 그의 아들 통해서 완전히 계시했다. 그러니까 그의 아들이 구약-율법,선지서-에 부분적인,예비적인 미완의 계시들을 완성해서 완전히 계시한 것이다(그의 아들이).왜 그의 아들이 하나님을 완전히 종말론적으로 계시할 수 있느냐면 그의 아들이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고, 본체-χαρακτηρ(도장 찍음)-이다. 예수가 하나님의 도장 찍음(형상)이다. 그러니까 απανγασμα(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라는 말이나 하나님의 본질의 도장이라는 말-바울 용어로 말하면 예수가 하나님의 형상-은 내용은 똑같다.
이것은 완전히 지혜 기독론-지혜신학-이다. 요한 문서에도 히브리서에도 뿐만 아니라 공관복음서의 이른바 Q문서에도 나타난다. 그런데 이것을 특히 마태복음이 지혜신학을 아주 많이 확대했다. 그래서 이 Q문서라는 곳에 이른바 지혜의 말씀을 5가지로 보통 양식사가들은 분류한다9).여기에서 예수의 말씀을 지혜의 말씀이라고 한다.
마11:16-19가지만 보면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옳다함을 얻느니라” 누가 복음에 의하면 “지혜는 그의 자녀들로 정당함을 받는다”고 되어 있다. 그래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약간 다르다. 왜 그런가가 아주 중요한 토론이다. 마 11:25-27까지에서 아들은 아버지의 전권을 위임받은 자로 아버지를 계시하는 자이다. 아버지를 사람들로 하여금 알게 해서 사람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즉 아버지의 전권대사이며, 계시자이다. 마 11:28-30까지는 유대 신학에서 지혜가 패역한 세대의 사람들을 불러서 지혜를 얻어 하나님을 알고 구원에 이르게 하는 초대와 같은 말이다. Q 문서에 나오는 5개의 말들을 이른바 지혜의 말씀들이라고 한다.
그래서 지혜의 말씀들을 가지고 있는 Q 자료에 있어서 이것-예수가 자신의 품격과 사역을 지혜와 견주어서 가르쳤다-이 중요하다. 이것을 먼저 분석한 Bultmann은 그의 ‘신약 전승의 역사’-양식사적 공관복음 연구에 기초를 놓은 책으로 허역 박사에 의해 번역됨-책에 지혜의 말들이 분석되어 있다. Bultmann에 의하면 이런 말들은 거의 다 교회가 지어낸 말이라고 한다. 예수가 말한 것은 몇가지 밖에 없다고 한다. 지혜는 다 Q공동체의 기독론을 표현-Q공동체가 예수의 됨됨,예수의 의미-하기 위해서 지어낸 말이라고 한다. 그 뒤에 이 말들을 중요하게 분석한 사람들 중에 J.Suggs는 미국학자,‘지혜,율법,그리스도’라는 조그만 책을 쓰고 또 스위스의 F.Christ라는 사람이 ‘Jesus σιφια’라는 책을 썼다. J.Suggs는 많은 것을 마태의 신학에 돌리는 경향이 있다. J.Suggs에 의하면 ‘예수가 자신을 세례 요한과 더불어 지혜의 마지막 사자로 그리고 있다’ 종말에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제공하는 선지자와 같은 분으로 스스로를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세례요한과 자신이 지혜의 마지막 사자로 그리고 있다. F.Christ는 좀 더 적극적이어서 ‘예수가 스스로를 지혜로 보았다’ 즉 예수가 스스로를 구약과 유대교에서 그리고 지혜역학을 한다고 보았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예수와 율법’‘예수의 율법에 대한 태도’. 이런 것들 다루는 책들은 다 이 문제를 다루게 되어 있다10). 그래서 예수의 말씀들 중에 지혜의 말씀들-앞의 주7)참고-이 있다. 여기서 F.Christ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예수가 자신을 지혜와 동일시했느냐? 아니면 J.Suggs가 주장한 바와 같이 지혜와 동일시하지 않고 자신을 지혜의 자녀로 또는 지혜의 마지막 사자들 중의 하나고 보고 있느냐? 이것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Bultmann식으로 우리는 교회가 나중에 지혜기독론 표현으로 지어가지고 예수의 입에더 집어 넣어 가지고 마치 예수가 한 것으로 한 것이냐고 하는 극단의 견해거 있지만 이런 견해를 우리가 안 따른다 해도 최소한은 우리는 ‘예수가 자신의 사역을 지혜의 역할에 근거해서 설명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Bultmann 식의 극단적인 것이 다 가짜라는 설만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최소한도 위에와 같이 말할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유들 때문에11) ‘바울전에 교회에서 이미 지혜기독론은 형성이 되었다’고 대개 주장한다. 그러나 몇년 있다가 자기 주장을 슬그머니 고쳤다. 바울 한 것이 아니고 바울 전 교회가 했든지 이것보다는 이와 같이 엄청난 신학적인 통찰력을 얻을 신학자가 누가 있겠는가? 바울과같은 훈련된 신학자나 되니까 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전이라고도 할 수 있으니까 바울과 동시애의 교회에서 일어났다. 바울전에 교회에서 발생했거나 아니면 더 정확하게 말하면 바울과 동시대에 교회에서 발생했다고 애매하게 표현했다. 나는 주장하기를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바울의 지혜기독론은 다메섹 도상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또 바울은 초대교회에서 유일하게 훈련된 신학자라는 면에서 바울의 공헌이라고 주장하는 바이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이런 책들-요한복음,히브리서,공관복음-은 바울 후의 책들이다. 그러나 분명히 바울 전의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Q 문서이다. 예수가 자신의 사역을 지혜의 역할로 그리고 있는데 이것을 부인할 수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나는 주장하기를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계시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지혜의 카테고리로 보기 시작했는데 마침 예수의 지혜의 말씀이 바울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역사적 뒷받침을 해주었다’고 본다. 역사적인 예수의 가르침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부활 후에 교회가 아직 신학하기 전에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마침 예수를 하나님 아들로,하나님 형상으로,지혜의 성육신으로 체험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품격과 사역을 지혜의 카테고리로 전개함이 예수의 지혜의 말씀이 역사적 근거를 뒷받침했다. 그래서 다른 신약의 저자들도 한편으로는 예수의 말씀에 근거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바울에게서 이미 시작된 지혜기독론의 영향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을 지혜의 카테고리로 전개했다. 지혜기독론의 대표적인 표현이 보냄의 형식이다.
4)보냄의 형식(The Sending formula)
이것의 구조는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냈다. 그것의 목적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바울의 편지 중 갈 4:4/롬8:3에 비슷하게 롬 1:2-4까지 나온다. (요3:17/요일4:9,10,14 등)
보냄의 형식에 쓰이는 칭호는 항상 아들이다. 그래서 보냄의 형식에는 선재사상-하나님이 그의 선재한 아들을 보냈다는 말-이 들어 있다. 이 아들을 보내서 여자의 몸에서 낳아 성육신했다. 이것은 지혜 사상의 표현인데 왜 보냄의 형식에 아들이라는 칭호가 쓰이냐면 보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지혜를 보냈다는 문장형식에 뒤따라서 쓰여진 말이다. 보냈다는 말은 히브리 사고의 보낸(הלשׁ, הֹלשׁ)의 전통에 의해서 설명을 한다. 히브리인들은 셈족 전체에 있어서 ‘사자’즉 ‘보냄을 받은 자는 보낸자(주인)와 같다’는 것이 히브리인들의 사자에 대한 이해이다. 이것이 아예 Mishnah12)의 Berakoth 5:5에 ‘보냄을 받은 자는 보낸자와 같다’라는 법조문이 나온다. 그래서 사자는 보낸 주인의 ‘전권대사’라는 소리이다. 보낸 주인의 전권을 위임받아서 전권을 행사할 수있는 자라는 뜻이다. 그래서 주인과 똑같다. 특히 보냄을 받은 사자가 아들일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그이유는 아들이 상속자이기 때문에 보낸자(아버지)의 전건을 위임받은 자인 것이다. 이 사상이 복음서에도 잘 반영이 되어 있다. 가령 포도원 농부의 비유(막12:5-하나님께서 마지막에 악한 농부들에게 아들을 보낸다. 그래서 이 악한 포도원 농부들이 ‘저 자를 죽이자’즉 저자가 상속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들을 죽이면 포도원이 다 자신들의 것으로 되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아들이 상속자이므로 특히 아들이 보냄을 받을 때는 더 전권대사 사상이 강한 것이다)에 나와 있다.
그래서 보냄이라는 형식은 꼭 아들이라는 칭호에만 쓰인다. 아들이라는 칭호가 쓰인 이유가 두가지이다. 하나는 지혜신학을 Model로 했기 때문에 지혜가 하나님의 딸로 그려지고 있는 것에 대항해서 하나님 아들이라고 한다. 또 하나는 보냄이 셈족의 사자의 법에 따른 것인데 그때의 사자는 보낸이의 전권대사인데 특히 아들일 경우 더 그렇다. 바로 이런 이유들 때문에 보냄의 형식에 아들이라는 칭호가 쓰인다.
보냄의 형식에서 나타낼려고 하는 것은 ‘예수가 선재한 하나님 편에서 오는 즉 초월해서 오기-우리 바깥에서 오는-때문에 우리를 다 구원할 수 있는 것이다. 세상의 일부가 아니고 초월해서 오는 즉 하나님 편에서 오는 것이다.’ 초월하는 것만 구원하는 힘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초월의 편에서 오는 구원자라는 말이다. 하나님에 의해서 하나님 편에서 오는 즉 하나님의 구원자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전권을 위임받아서 하나님의 구원(목적)을 실제로 이루는 하나님의 일군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구원을 실제로 담당하는 ‘중보자,실행자’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의 구원을 실행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 편에서 오는 아들이기 때문에 그렇다. 초월해서 오는 분으로 이런 뜻을 나타내고 있다. 이말은예수가 하나님의 본질에 참여하고 하나님의 편에서부터 오는 초월해서 오는 구원자가 됨, 예수가 하나님의 창조와 계시와 구원의 중보자임 등의 뜻이 포함되어 잇다.
하나님+그의 아들+보냈다+목적(구원)
↳사자=주인
⇩
전권대사
⇩
일군,실행자
5)내어줌의 형식(giving-up formula)
내어줌의 형식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여기에도 항상 쓰이는 칭호가 아들이다-을 내어 주였다(παρα διδομι 영어로는 give up). 이것의 목적은 구원이다.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요3:16이지만 바울 서신에서는 롬8:32/갈2:20/비슷하게 롬5:10/요일4:10 등에 나온다.
하나님+그의 아들+(내어)주셨다+목적(구원)
하나님의 사랑
내어줌의 형식은 롬 8:32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어쩌면 창22:16의 이른바 ‘이삭을 묶어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바침’을 Akdeah Issac이라고 하는데 근거하고 있을 가능성이 많다. 바울이 이 언어를 반영한다.
그래서 롬 8:32에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어 주신이가 창 22;16 언어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Akedah Issac은 아브라함이 그의 독생자를 하나님께 내어주었다(제사함). 이것은 랍비 유대교 구원론의 아주 중요한 중심적인 사상이었다. 그래서 가령 랍비 유대교에서 ‘모든 이스라엘은 구원받는다-모든 아브라함 자손은 구원받는다’- 왜? 조상들의 공로가 후손들의 모든 잘못을 덮고 조금 남는다. 그래서 구원받는 것으로 안다. 그런데 조상들의 공로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Akedah Issac-것이다. 결국 Akedah Issac 에 의해서 구원받는 것으로 안다. 그래서 지금의 신약신학에 있어서 요한에 있어서는 이것이 세례 요한ㅇ 예수에 대해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로다’라는 데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았다. 이삭이 자기 제사를 드릴 나무를 지고 갔다는 것과 연결시켜서 한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요한복음의 신학에서도 Akedah Issac 신학이 반영되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13). 그래서 요한의 구원이나, 바울의 구원론 곧 요한이나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Akedah다로 설명했을 가능성이 많다. 이렇게 했을 가능성이 많은 이유가 Akedah가 유대 신학에서 중심 신학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게 볼려는 학자들이 많이 있다14).
Akedah Issac을 반영하든지 않든지 간에-적어도 롬8:32은 반영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왜 반영하게 되고 어떻게 반영하게 되고 하는 것은 좀 더 토론할 문제이다.
아무튼 내어줌의 형식에서 그의 아들을 쓰는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내어줌의 형식이 나올 때는 주제가 항상 사랑이다. 대표적으로 요3:16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했다’ 그의 아들을 내어줄만큼 사랑하셨다. 그 다음에 롬8:32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에서도의 주제도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의 아들을 아끼지 않고 우리를 위해서 내어 주신이가 우리에게 모든 좋은 것을 그와 더불어 주시지 않겠느냐?’믿는 이로서 구원의 첫 열매를 받은 아들로 계속해서 죄악의 세상속에서 고난받는 이들에게 믿음의 확신을 주고 하나님의 사랑의 확실함을 주려고 하는 것이 롬8장의 의도이다. 바울이 ‘누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우리를 위해 내어줄 정도로 사랑을 했는데 이 사랑에서 누가 끊는다는 말인가? 하고 막반 항변-칼이냐,적신이냐,죽음이냐 등등-한다.
그러니까 내어줌의 형식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여기서는 내어줌의 형식에 반영된 그의 아들-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할 때 앞에 말했듯이 보냄의 형식에서는 예수가 하나님의 전권대사(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하나님적인 전권대사로서 창조와 계시와 구원의 중보자)라고 했다.-이라는 것은 예수가 하나님의 사랑의 체현-하나님의 사랑의 몸담아 나타냄-이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때는 예수가 곧 하나님의 사랑 덩어리이다. 이 말은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신약전체를 요약하면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오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소망이 ‘하나님의 사랑함에 있다15)’
보냄의 형식이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우리를 위해서 내어 주신 분이다’ 곧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이다. 우리의 모든 구원이 하나님의 사랑에 달려 있는 것이다. 구원이라는 것이 하나님 사랑이다. 하나님이 사랑이 아니라면 어떻게 구원의 소망이 있겠는가?
우리가 우리의 인간은 항상 지혜와 선행으로 구원받으려고 한다. 세계 모든 종교가 다 그렇다. 종교만 그런 것이 아니고 문명이 그렇다. 자본주의,공산주의,과학주의 등 모든 것이 다 그렇다. 그래서 지혜를 많이 개발해서 한 사람을 잘 교육시키고 과학기술을 많이 발달시키면 인간이 풍요로워지고, 세계 평화가 이루어지고 인간성이 회복되고 서로 사랑하고 잘 살아서 구원에 이르는 것으로 하는 것이 인본주의적인 인간 구원의 길이다. 다른 종교들-불교,힌두교,유됴-도 다 지혜로 얻고 선행을 하면 구원에 이른다고 한다. 그러나 인간의 지혜를 아무리 개발해 보아도 구원이 없다. 왜? 모든 인간적인 것은 피조물의 제한성으로 특징되는 것이고 불안한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것은 완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구원이 될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의 힘으로, 인간의 지혜로,선행으로 도저히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결국 구원은 하나님께 달려 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 몰랄라 해버리면 구원이 안일어 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분은 우리를 위한 분이다. 하나님도 사랑이다.
출처 : 잭슨빌 교회개혁포럼
글쓴이 : JaxHopes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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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 줄거리
지난 시간에 롬 1:3-4에서 바울이 인용하는 초대교회의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신앙고백과 바울의 서신에 나타나는 이른바 보냄의 형식(the sending formula)-갈4;1/롬8:3 등-을 비교할 때 롬 1:3-4에 인용된 초대교회의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신앙고백에는 아직 선재사상이 뚜렷이 나타나지 않는 반면에 보냄의 형식-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냈다-에는 선재사상이 뚜렷히 함축되어 있다. 그런데 롬 1:2에서 바울이 복음을 정의함에 있어서 복음은 그의 아들에 관한 것이라고 서문을 담고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을 인용함으로써 바울에 있어서 하나님의 아들은 선재하셨던 분으로 다윗의 씨로 즉 여자의 몸에서 낳은 성육신 하나님의 아들로 분명히 드러난다. 그래서 바울에게 있어서 선재사상이 드러난다는 이야기를 했다. 선재 사상은 대부분의 학자들은 전에 교회에서 이미 이루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실재에 대한 통찰력을 보는데 나는 내 책에서 주장하기를 “아마 이것은 초대 교회에서 가장 위대한 신학자였던 바울이 터득한 통찰력이고 바울이 초대교회의 기독로적 발전에 기이한 큰 공헌을 했을 것이다.” 이것을 보기 위해서 차례로 하나님의 아들의 선재사상에 대한 전반적인 것을 보도록 하겠다.
1)종교사적 배경-구약/유대교-지혜 사상
이것은 구약과 유대교의 지혜 사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지혜 사상은 초월하신 하나님의 내재하심을 천명하기 위한 신학적인 언어수단으로서 하나님의 지혜-hypostatizetion-가 하나님의 속성인 추상명사에 불과한 것이 아니고 하나의 물체화한 것으로 이해하고 인격화 한 것으로 이해되어서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아서 하나님의 창조와 계시와 구원의 역할을 감당하는 하나님의 일군 노릇한다는 의미로 하나님의 딸이라고도 불림을 받는다고 한다.
⇨보냄(sending) ??창조??일군(agent)
? 계시 ?
??구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그의 딸 지혜를 통해서 창조하시고 하나님께서 그의 뜻을 이스라엘에게 계시하시는데 그의 딸-지혜-을 보내서 그의 뜻을 계시한다. 구원의 수단으로 하나님께서 그의 딸-지혜-을 보내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시고 지혜로 광야에서 가나안으로 인도하시고 하는 것이 구원의 수단이고 지혜를 통해서 하나님의 일군 된다.
즉 지혜가 하나님의 계시와 창조의 수단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에 계시의 수단이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율법이다. 율법에 하나님의 뜻이 계시된 것이다. 그래서 지혜서라고 할 수 있는 sirach 24장에서는 이 율법이 하나님의 지혜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기 때문에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는다. 곧 지혜가 주는 구원을 얻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율법을 지키는 행위가 지혜를 받는 행위이고 의로운 행위에서 구원을 받는다. 이런 지혜신학이 발달을 했는데 바로 하나님께서 그의 딸-선재한 지혜-을 보내서 후에 창조와 계시와 구원을 하신다는 사상이 유대교에 발달하는데 이것을 앞에서 말한대로 초월하신 하나님의 이 세상에 내재하심을 말하고 후에 창조와 계시와 구원활동을 설명하기 위한 언어 수단으로 말한다.
이런 신관을 이위일체론이라고도 한다. 지혜신학이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에 선재사상과 보냄의 형식이 된 것이다.
곧 바울의 서신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내사 여자의 몸에서 낳게 하고 율법아래 낳게 했다는 것은 우리를 율법의 속박으로부터 속량해서 구원하실려고 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지혜를 보내서 모든 뜻을 계시하고 그가 구원한 것 같이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냈다. 곧 신약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점진적인 계시의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딸인 지혜 활동이라고 그려진 것은 실제로는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되기 전에 활동을 그린 것이다. 이런 종교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다루는 것 중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예수 그리스도의 선재 사상과 보냄의 형식을 초대교회에서 누가 제일 먼저 발달시켰느냐 하는 통찰력을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재정돈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지혜의 카테고리로 보기 시작한 것이 누구이냐? 초대교회에서 누가 제일 먼서 시작했느냐?
하나님의 아들의 선재사상이라든지 선재한 하나님의 아들의 보냄의 형식이 지혜신학에 근거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지혜와 동일시함으로 만들어졌으니까 초대교회에서 누가 예수 그리스도를 지혜와 제일먼저 동일시했는가를 살펴보면 누가 하나님의 아들 선재사상, 보냄의 형식을 제일 먼저 개발했는가를 해결할 수 있다.
2)예수 그리스도를 지혜와 동일시함
예수 그리스도를 지혜와 동일시함을 우선 바울신학 내에서 본다면
①고전 10:1-4 까지에서 바울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므리바에서 물을 공급한 반석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 있는 그들을 계속 동행했다. 그런데 바울은 고전 10:4에 “이 반석은 그리스도라” 한다. 이 유대 랍비들에게는 문제가 하나 발생했다. 므리바에서 모세가 반석을 지팡이로 쳐서 물을 얻어 공급해서 유대인들을 구원한 것이다.
그래서 반석이 구원의 수단이었다. 그런 이후-므리바에서 물을 잔뜻 마신 것-에 어떻게 되었는가? 그 다음에는 어디서 물을 마셨는가?
이것이 유대 랍비들에게는 문제였다. 그래서 유대 랍비들이 상상하기를 반석이 이스라엘 족속이 광야에서 헤매는 동안에 계속 그들을 따라 다니면서-동행하면서-물을 공급했다고 신학을 전개해 나갔다. 그런데 Alexsander의 Philo는 이 신학을 이어 받아서 ‘그 반석이 바로 하나님의 지혜였다’고 한다. 이것은 결국 광야에서 물을 공급한 것은 이스라엘에게 구원을 주는 구원 수단이었다. 그런데 앞에서 이야기한대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지혜를 통해서 구원한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지혜가 반석으로 나타난다는 말이다. 그런데 바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지혜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계시와 구원의 수단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아들로서 하나님의 계시와 지혜의 수단이다. 그렇다면 구약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구원의 수단인 반석-물을 공급-도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전의 활동으로 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바울은 고전 10:4에서 이 반석은 바로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바울이 반석을 지혜-Philo와 같은 유대의 신학-로 그리는 수용해서 그리스도에게 적용하는 곧 그리스도를 지헤와 동일시하는 것을 고전 10:4에서 볼 수가 있다.
②롬10:6-7(신30:12-14)
여기서 바울은 신30:112-14에 대한 해석을 하고 있다. 신명기에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 저 하늘에 있어서 인간의 힘으로 하늘에 올라가서 그것을 받아 가지고 온 것도 아니고 저 바다 밑에 있어 가지고 인간이 노려해서 바다에 가서 가져온 것도 아니고 하나님 계시의 말씀이 바로 우리와 같이-옆에,속에-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듣고 순종할 마음만 있으면 하늘로 올라가고 바다 밑으로 내려가는 엉뚱한 노력없이 금방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듣고 행할 수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계시의 수단이 말씀이 목적-대상-이다. 그런데 이것을 유대 묵시문서인 Baruch3:29ff에 보면 하나님 말씀을 지혜로 대치해 놓았다. 하나님의 지혜가 저 하늘 위에 있어서 인간들이 좇아 올라가서 구해올 것도 아니고 저 바다 밑에 있어서 인간들이 불가능한 노력을 해서 건져올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지혜가 우리와 같이 있다는 말이다. 곧 하나님의 계시는 우리에게 있다. 우리가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고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려는 의지가 있으면 하나님의 뜻에 금방 우리에게 환히 밝혀 보인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것이 바울은 롬 10:6f에서 그리스도에게 적용하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계시의 수단인 신명기의 말씀이 유대 묵시 문학에서는 지혜로 이해되었는데 바울은 그리스도라 하여 다시 한번 그리스도와 지혜를 동힐시하는 것을 볼 수 있다.
③그리스도를 하나님의 형상이라 εικων του Θεου (고전 4:4.골1:15 등)
솔로몬의 지혜라는 책 7장 25절과 26절을 보면 지혜가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다. 지혜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소리는 하나님의 계시자라는 소리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보고 우리가 하나님이 어떻게 생겼는가를 안다. 지혜가 바로 우리에게 하나님을 보여주는 형상이다. 그래서 지혜가 하나님 형상이라고 하는데 바울은 다시 한번 예수 그리스도와 지혜를 동일시 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아예 고전 1:24에서 바울이 “우리에게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 라고 불럿다. 비슷하게 고전 1:30/골2:3 등 여러 곳에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지혜라고 부르고 있다.
다음 단계로 바울이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지혜로 이해하게 된 까닭이 무엇인가? 무엇에 근거해서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지혜라고 부르게 됐느냐?
3)바울이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지혜로 부르게 된 근거-다메섹 도상에서 얻은 두 개의 통찰력에 의해 근거
①부활하여 하나님 우편에 높임받으신 그리스도께서 바울에게 주,주님으로 나타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하나님의 아들 같이 나타났고, 하나님의 형상-εικων του Θεου-을 가진자로 나타났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과 하나님 영광(δοξα)이라는 말은 거의 동의어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에 하나님 같은 자로, 하나님 같이 나타났다. 즉 하나님 형상을 가지고 나타났다. 나중에 보겠지만 오로지 바울만이 신약전체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형상 기독론이 아주 중요하다. 그런데 유대 신학에서는 하나님 형상을 지혜가 하나님 형상이다. 그러니까 예수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다메섹 도상에서 체험하고 바울은 곧장 예수를 지헤와 동일시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과 하나님의 형상 이것은 사실 같이 가는 말이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하나님 아들로 보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형상으로 보았다. 갈 1:16에서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의 계시를 말할 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쓴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나에게 계시했다. 그래서 다메섹 도상에서 자기가 예수를 하나님 아들로 인식했음을 암시한다. 그런데 고후 4:4-6까지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의 체험을 반영하는 말인데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한 것을 반영한 말인데 거기에서 바로 바울은 예수를 하나님 형상이라고 한다. 그래서 갈 1:16과 고전 4:4-6까지의 유사점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②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가 율법을 능가하고 대치했음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바울이 다메섹 도상을 향해 가는 것은 십자가에 못박힌-신21:23등-것이 하나님의 저주를 선언한 예수를 그리스도-메시야-라고 선포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이름으로 율법을 비판함으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러 다메섹에 갔다. 그러니까 다메섹으로 가고 있는 바울에게 율법이냐 예수가 그리스도냐의 정통성을 가지고 간 것이다. 율법이 정말 하나님의 계시인가? 그래서 예수에게 내린 저주가 옳은 것이냐? 유대 신학자 바울로서는 이렇게 보았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그게 아니라 예수가 메시야됨에 비추어서 이 율법이 온전하지 못하다. 예수가 도리어 율법을 완성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유대 신학-율법신학-이 옳으냐? 그리스도인들의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것이 옳으냐? 으로 가고 있다.
그런데 유대 신학에 의하면 율법이 하나님의 저주를 선언했다고 생각했던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우편에 높이셔서 계시했으므로 바울은 여기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선포가 옳다는 것을 깨달았다.
율법의 예수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 선언은 예수 자신이 죄 때문이 아니라 우리 죄를 위한 것이다. 예수는 종말에 구원을 완성한 메시야라 그렇다면 그전의 모든 성경-율법과 선지서-은 예수에 대한 예언-약속-에 불과하다. 예수가 메시야로서 율법의 성취이다. 그렇다면 예수가 메시야로서 하나님이 뜻의 종말론적인 완성된 계시로서 율법을 능가한 것이다. 성취는 불완전-율법,성경-한 것에 미완성한 것을 능가하는 것이다. 곧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로서 율법을 성취하고, 능가하고, 대치함을 다메섹 도상에서 깨달았다. 그렇다면 더 이상 율법이 하나님의 완전-메시야-한 계시가 아니라 이것은 불완전-율법성경-한 계시이다(완전한 계시에 비춰 보았을 때).
불완전하기 보다는 미완전한 계시이다. 아직 예비적 미완의 계시에 불과한 것이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체험한 하나님 아들은 완성된 종말론적인 하나님이 계시라는 것이다. 율법을 성취하고 누군각가 대치하는 것이다. 지혜신학에서 율법이 하나님의 뜻을 계시한다 해서 지혜를 담고 있다. 지혜 신학에 있어서는 율법이 지혜의 구체화(enbodyment)라고 보았다. 지혜가 하나님 계시와 구원의 수단이다. 이것이 율법에 담겨져 표현된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신학적인 입장에서 보았을 때 신학자(바울)가 예수는 율법을 성취하고 능가하고 대치하는 하나님의 아들로 체험했다는 것은 지혜를 불완전하게 또는 미완적으로 담고 표현했다. 율법이 예수에 의해 성취되고 능가하고 대치되었으니까 지혜가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완전히 담겨져 표현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런 의미로 유대 신학에서는 율법이 곧 지혜라고도 하는데 예수 그리스도-하나님 아들-야 말로 이보다 훨씬 큰 정당성을 가지고 지혜라고 해야 되지 않느냐? 지혜가 예수 그리스도-하나님 아들-을 통해서 나타나셨다. 아예 성육신했다고 해야 한다. 지혜가 예수 그리스도-하나님 아들-를 통해서 성육신하신 것이다. 왜 그러냐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완성된 계시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계시의 수단인 지혜가 하나님 아들을 통해서 완전히 몸으로 들어났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의 두 통찰력 부활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보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본 것은 바울로 하여금 예수-하나님의 아들-를 지혜의 카테고리로 생각했고 또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예수가 영광된 하나님의 아들로 계시된 것을 본 것은 곧 하나님 아들 예수가 율법을 성취하고 능가하고 대치했다는 통찰력을 주었는데 이것도 바울로 하여금 예수-하나님 아들-를 지혜의 카테고리로 생각했다-을 바울은 유대 지혜 신학에 있어서 지혜의 카테고리로 해석을 하게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지혜라고 선포를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선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롬 10:4에 율법의 τελος8)이다.
예수가 율법을 성취(완성)하고 능가하고 대치한다. 그래서 율법의 라는 말이 우리 말에는 마침이라고 번역되어 있다-“그리스도가 율법의 마침이다”-또한 τελος가 완성(성취),목적-goal,end- 또는 끝장-termiantion- 내버림이다. 끝장 내버린다는 말은 대치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로마서 문맥에 있어서는 termiantion의 뜻이 가장 강할지도 모른다. 하여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이렇게 깨달았다. 그래서 예수를 지혜로 부르고 하나님 형상으로 회복으로 봤다. 예수의 품격(person)과 사역(work)을 지혜의 카테고리로 설명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혜가 하나님의 딸이면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이다.
지혜는 헬라어의 σοφια 나 히브리어의 המקוה 로 여성명사이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딸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여자가 아니고 남자였다. 그래서 딸이라고 하지 않고 아들이라고 했다. 딸이나 아들이나 다 그림 언어이다. 하나님과 함께 속하는 하나님적인 존재라는 말이다. 이렇게 예수의 품격을 지혜의 카테고리로 해석을 하고 하나님 아들이라고 했다. 또 지혜가 하나님의 사자 노릇하는 하나님의 보냄 받은 곧 하나님의 전권 대사 노릇하는 자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의 사역을 하나님의 사자 또는 전권대사로 보냄을 받아서 창조와 계시와 구원의 중보자 노릇한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그리고 있다. 이것이 다 지혜의 카테고리로 설명한 것이다.
person(품격)⇨‘하나님의 아들’ 선재
work(사역)⇨보냄/사자/전권대사 창조,계시,구원
그러니까 구약과 유대 신학의 지혜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우리가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이와 같이 얻은 통찰력으로 예수를 지혜의 카테고리로 그의 품격과 그의 사역을 설명했다고 말해야 한다. 그러나 완성된 계시-그리스도-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거꾸로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한 하나님 아들로 하나님의 창조와 계시와 구원의 사역중 중보자 노릇함이 성육신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완전히 계시되기 전에 그 예비계시인 구약과 유대교에서 지혜의 카테고리로 그렸다고 설명해야 한다.
사실은 전자보다 후자가 더 옳은 말이다. 그래서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십자가와 부활로 완전히 스스로 계시한 하나님 아들을 체험하고 바로 이러한 계시의 카테고리를 써서 예수 그리스도의 품격과 사역을 그렸다.
그런데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품격과 사역을 지혜의 카테고리로 해석을 한 것이 바울의 신학적인 공헌이라고 주장하는 바이다. 왜냐하면 다메섹 도상에서의 사건은 초대교회에서 아주 초기의 사건-AD 32,33-이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신학자였고 바울에게만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 지혜의 칭호가 하나가 분명히 나타난다. 바로 이런 이유들로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지혜의 카테고리로 그의 품격과 사역을 해석하기 시작한 것이 바울의 초대교회에서의 신학적인 공헌이다. 그것은 다메섹 도상에서의 계시에 의한 것이었다고 나는 주장한다. 이것이 지혜기독론-지혜의 카테고리로 예수의 품격과 사역을 해석하는 것-이라고 한다.
지혜기독론의 일부가 선재사상이다. 그리고 예수의 창조와 계시와 구원의 중보자 노릇했다는 것이 지혜기독론의 일부이다. 이런 것들도 다 바울의 초대교회에 대한 고백이었다. 그래서 바울이 인용-롬1:3,4-하는 것은 아직 이런 지혜기독론이 나타나지 않지 않는가 나는 주장한다.
이 주장에 맞서서 많은 학자들이 지혜기독론을 바울서신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신약전체에서 나타난다. 요한복음에 아주 중요하게 나타나고 요한복음의 하나님 아들을 기독론의 형식으로 나타난다(요 3:17).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내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멸망하도록 하지 않고 구원을 얻도록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냈다는 보냄의 형식이 나온다. 요 3:16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내어 주셨다”는 내어줌의 형식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낸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의 이름을 믿어 구원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요한복음에도 하나님 아들이 보냄의 형식으로 나온다. 뿐만 아니라 요한복음에서 하나님 아들은 하나님의 계시와 구원의 중보자이다. 요한복음에 있어서 카테고리는 계시이다. 예수가 하나님 아들로서 하나님의 계시자이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고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 요한복음에서 예수가 계속 하나님을 ‘나를 보내신 이’ ‘나를 보내신 아버지’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아들은 보냄을 받은 자이다. 그것이 계속 보냄의 형식,선재사상,선재사상등은 요한복음에서 나오는 중요한 기독론이다. 그러니까 요한복음은 지혜 기독론이 중심이다. 이것을 한마디로 헬라적 용어로 말한다면 ‘예수가 λογος이다’ 해서 요한복음 서문에 나오는 λογος 사상이 사실은 지혜기독론을 내용으로 삼고 있다.
요한복음에서만 나타난게 아니고 요한계시록에도 있다(하나님을 지혜로 하는 사상). 또 히브리서에도 있다. 히 1:1-3까지가 기독론적인 신앙고백이다. 이것이 지혜신학이다. 지금까지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서 여러 모양-부분적으로,조각조각-으로 계시했던 하나님이 종말에 그의 아들 통해서 완전히 계시했다. 그러니까 그의 아들이 구약-율법,선지서-에 부분적인,예비적인 미완의 계시들을 완성해서 완전히 계시한 것이다(그의 아들이).왜 그의 아들이 하나님을 완전히 종말론적으로 계시할 수 있느냐면 그의 아들이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고, 본체-χαρακτηρ(도장 찍음)-이다. 예수가 하나님의 도장 찍음(형상)이다. 그러니까 απανγασμα(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라는 말이나 하나님의 본질의 도장이라는 말-바울 용어로 말하면 예수가 하나님의 형상-은 내용은 똑같다.
이것은 완전히 지혜 기독론-지혜신학-이다. 요한 문서에도 히브리서에도 뿐만 아니라 공관복음서의 이른바 Q문서에도 나타난다. 그런데 이것을 특히 마태복음이 지혜신학을 아주 많이 확대했다. 그래서 이 Q문서라는 곳에 이른바 지혜의 말씀을 5가지로 보통 양식사가들은 분류한다9).여기에서 예수의 말씀을 지혜의 말씀이라고 한다.
마11:16-19가지만 보면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옳다함을 얻느니라” 누가 복음에 의하면 “지혜는 그의 자녀들로 정당함을 받는다”고 되어 있다. 그래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약간 다르다. 왜 그런가가 아주 중요한 토론이다. 마 11:25-27까지에서 아들은 아버지의 전권을 위임받은 자로 아버지를 계시하는 자이다. 아버지를 사람들로 하여금 알게 해서 사람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즉 아버지의 전권대사이며, 계시자이다. 마 11:28-30까지는 유대 신학에서 지혜가 패역한 세대의 사람들을 불러서 지혜를 얻어 하나님을 알고 구원에 이르게 하는 초대와 같은 말이다. Q 문서에 나오는 5개의 말들을 이른바 지혜의 말씀들이라고 한다.
그래서 지혜의 말씀들을 가지고 있는 Q 자료에 있어서 이것-예수가 자신의 품격과 사역을 지혜와 견주어서 가르쳤다-이 중요하다. 이것을 먼저 분석한 Bultmann은 그의 ‘신약 전승의 역사’-양식사적 공관복음 연구에 기초를 놓은 책으로 허역 박사에 의해 번역됨-책에 지혜의 말들이 분석되어 있다. Bultmann에 의하면 이런 말들은 거의 다 교회가 지어낸 말이라고 한다. 예수가 말한 것은 몇가지 밖에 없다고 한다. 지혜는 다 Q공동체의 기독론을 표현-Q공동체가 예수의 됨됨,예수의 의미-하기 위해서 지어낸 말이라고 한다. 그 뒤에 이 말들을 중요하게 분석한 사람들 중에 J.Suggs는 미국학자,‘지혜,율법,그리스도’라는 조그만 책을 쓰고 또 스위스의 F.Christ라는 사람이 ‘Jesus σιφια’라는 책을 썼다. J.Suggs는 많은 것을 마태의 신학에 돌리는 경향이 있다. J.Suggs에 의하면 ‘예수가 자신을 세례 요한과 더불어 지혜의 마지막 사자로 그리고 있다’ 종말에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제공하는 선지자와 같은 분으로 스스로를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세례요한과 자신이 지혜의 마지막 사자로 그리고 있다. F.Christ는 좀 더 적극적이어서 ‘예수가 스스로를 지혜로 보았다’ 즉 예수가 스스로를 구약과 유대교에서 그리고 지혜역학을 한다고 보았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예수와 율법’‘예수의 율법에 대한 태도’. 이런 것들 다루는 책들은 다 이 문제를 다루게 되어 있다10). 그래서 예수의 말씀들 중에 지혜의 말씀들-앞의 주7)참고-이 있다. 여기서 F.Christ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예수가 자신을 지혜와 동일시했느냐? 아니면 J.Suggs가 주장한 바와 같이 지혜와 동일시하지 않고 자신을 지혜의 자녀로 또는 지혜의 마지막 사자들 중의 하나고 보고 있느냐? 이것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Bultmann식으로 우리는 교회가 나중에 지혜기독론 표현으로 지어가지고 예수의 입에더 집어 넣어 가지고 마치 예수가 한 것으로 한 것이냐고 하는 극단의 견해거 있지만 이런 견해를 우리가 안 따른다 해도 최소한은 우리는 ‘예수가 자신의 사역을 지혜의 역할에 근거해서 설명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Bultmann 식의 극단적인 것이 다 가짜라는 설만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최소한도 위에와 같이 말할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유들 때문에11) ‘바울전에 교회에서 이미 지혜기독론은 형성이 되었다’고 대개 주장한다. 그러나 몇년 있다가 자기 주장을 슬그머니 고쳤다. 바울 한 것이 아니고 바울 전 교회가 했든지 이것보다는 이와 같이 엄청난 신학적인 통찰력을 얻을 신학자가 누가 있겠는가? 바울과같은 훈련된 신학자나 되니까 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전이라고도 할 수 있으니까 바울과 동시애의 교회에서 일어났다. 바울전에 교회에서 발생했거나 아니면 더 정확하게 말하면 바울과 동시대에 교회에서 발생했다고 애매하게 표현했다. 나는 주장하기를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바울의 지혜기독론은 다메섹 도상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또 바울은 초대교회에서 유일하게 훈련된 신학자라는 면에서 바울의 공헌이라고 주장하는 바이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이런 책들-요한복음,히브리서,공관복음-은 바울 후의 책들이다. 그러나 분명히 바울 전의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Q 문서이다. 예수가 자신의 사역을 지혜의 역할로 그리고 있는데 이것을 부인할 수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나는 주장하기를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계시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지혜의 카테고리로 보기 시작했는데 마침 예수의 지혜의 말씀이 바울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역사적 뒷받침을 해주었다’고 본다. 역사적인 예수의 가르침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부활 후에 교회가 아직 신학하기 전에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마침 예수를 하나님 아들로,하나님 형상으로,지혜의 성육신으로 체험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품격과 사역을 지혜의 카테고리로 전개함이 예수의 지혜의 말씀이 역사적 근거를 뒷받침했다. 그래서 다른 신약의 저자들도 한편으로는 예수의 말씀에 근거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바울에게서 이미 시작된 지혜기독론의 영향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을 지혜의 카테고리로 전개했다. 지혜기독론의 대표적인 표현이 보냄의 형식이다.
4)보냄의 형식(The Sending formula)
이것의 구조는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냈다. 그것의 목적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바울의 편지 중 갈 4:4/롬8:3에 비슷하게 롬 1:2-4까지 나온다. (요3:17/요일4:9,10,14 등)
보냄의 형식에 쓰이는 칭호는 항상 아들이다. 그래서 보냄의 형식에는 선재사상-하나님이 그의 선재한 아들을 보냈다는 말-이 들어 있다. 이 아들을 보내서 여자의 몸에서 낳아 성육신했다. 이것은 지혜 사상의 표현인데 왜 보냄의 형식에 아들이라는 칭호가 쓰이냐면 보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지혜를 보냈다는 문장형식에 뒤따라서 쓰여진 말이다. 보냈다는 말은 히브리 사고의 보낸(הלשׁ, הֹלשׁ)의 전통에 의해서 설명을 한다. 히브리인들은 셈족 전체에 있어서 ‘사자’즉 ‘보냄을 받은 자는 보낸자(주인)와 같다’는 것이 히브리인들의 사자에 대한 이해이다. 이것이 아예 Mishnah12)의 Berakoth 5:5에 ‘보냄을 받은 자는 보낸자와 같다’라는 법조문이 나온다. 그래서 사자는 보낸 주인의 ‘전권대사’라는 소리이다. 보낸 주인의 전권을 위임받아서 전권을 행사할 수있는 자라는 뜻이다. 그래서 주인과 똑같다. 특히 보냄을 받은 사자가 아들일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그이유는 아들이 상속자이기 때문에 보낸자(아버지)의 전건을 위임받은 자인 것이다. 이 사상이 복음서에도 잘 반영이 되어 있다. 가령 포도원 농부의 비유(막12:5-하나님께서 마지막에 악한 농부들에게 아들을 보낸다. 그래서 이 악한 포도원 농부들이 ‘저 자를 죽이자’즉 저자가 상속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들을 죽이면 포도원이 다 자신들의 것으로 되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아들이 상속자이므로 특히 아들이 보냄을 받을 때는 더 전권대사 사상이 강한 것이다)에 나와 있다.
그래서 보냄이라는 형식은 꼭 아들이라는 칭호에만 쓰인다. 아들이라는 칭호가 쓰인 이유가 두가지이다. 하나는 지혜신학을 Model로 했기 때문에 지혜가 하나님의 딸로 그려지고 있는 것에 대항해서 하나님 아들이라고 한다. 또 하나는 보냄이 셈족의 사자의 법에 따른 것인데 그때의 사자는 보낸이의 전권대사인데 특히 아들일 경우 더 그렇다. 바로 이런 이유들 때문에 보냄의 형식에 아들이라는 칭호가 쓰인다.
보냄의 형식에서 나타낼려고 하는 것은 ‘예수가 선재한 하나님 편에서 오는 즉 초월해서 오기-우리 바깥에서 오는-때문에 우리를 다 구원할 수 있는 것이다. 세상의 일부가 아니고 초월해서 오는 즉 하나님 편에서 오는 것이다.’ 초월하는 것만 구원하는 힘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초월의 편에서 오는 구원자라는 말이다. 하나님에 의해서 하나님 편에서 오는 즉 하나님의 구원자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전권을 위임받아서 하나님의 구원(목적)을 실제로 이루는 하나님의 일군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구원을 실제로 담당하는 ‘중보자,실행자’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의 구원을 실행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 편에서 오는 아들이기 때문에 그렇다. 초월해서 오는 분으로 이런 뜻을 나타내고 있다. 이말은예수가 하나님의 본질에 참여하고 하나님의 편에서부터 오는 초월해서 오는 구원자가 됨, 예수가 하나님의 창조와 계시와 구원의 중보자임 등의 뜻이 포함되어 잇다.
하나님+그의 아들+보냈다+목적(구원)
↳사자=주인
⇩
전권대사
⇩
일군,실행자
5)내어줌의 형식(giving-up formula)
내어줌의 형식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여기에도 항상 쓰이는 칭호가 아들이다-을 내어 주였다(παρα διδομι 영어로는 give up). 이것의 목적은 구원이다.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요3:16이지만 바울 서신에서는 롬8:32/갈2:20/비슷하게 롬5:10/요일4:10 등에 나온다.
하나님+그의 아들+(내어)주셨다+목적(구원)
하나님의 사랑
내어줌의 형식은 롬 8:32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어쩌면 창22:16의 이른바 ‘이삭을 묶어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바침’을 Akdeah Issac이라고 하는데 근거하고 있을 가능성이 많다. 바울이 이 언어를 반영한다.
그래서 롬 8:32에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어 주신이가 창 22;16 언어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Akedah Issac은 아브라함이 그의 독생자를 하나님께 내어주었다(제사함). 이것은 랍비 유대교 구원론의 아주 중요한 중심적인 사상이었다. 그래서 가령 랍비 유대교에서 ‘모든 이스라엘은 구원받는다-모든 아브라함 자손은 구원받는다’- 왜? 조상들의 공로가 후손들의 모든 잘못을 덮고 조금 남는다. 그래서 구원받는 것으로 안다. 그런데 조상들의 공로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Akedah Issac-것이다. 결국 Akedah Issac 에 의해서 구원받는 것으로 안다. 그래서 지금의 신약신학에 있어서 요한에 있어서는 이것이 세례 요한ㅇ 예수에 대해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로다’라는 데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았다. 이삭이 자기 제사를 드릴 나무를 지고 갔다는 것과 연결시켜서 한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요한복음의 신학에서도 Akedah Issac 신학이 반영되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13). 그래서 요한의 구원이나, 바울의 구원론 곧 요한이나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Akedah다로 설명했을 가능성이 많다. 이렇게 했을 가능성이 많은 이유가 Akedah가 유대 신학에서 중심 신학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게 볼려는 학자들이 많이 있다14).
Akedah Issac을 반영하든지 않든지 간에-적어도 롬8:32은 반영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왜 반영하게 되고 어떻게 반영하게 되고 하는 것은 좀 더 토론할 문제이다.
아무튼 내어줌의 형식에서 그의 아들을 쓰는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내어줌의 형식이 나올 때는 주제가 항상 사랑이다. 대표적으로 요3:16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했다’ 그의 아들을 내어줄만큼 사랑하셨다. 그 다음에 롬8:32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에서도의 주제도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의 아들을 아끼지 않고 우리를 위해서 내어 주신이가 우리에게 모든 좋은 것을 그와 더불어 주시지 않겠느냐?’믿는 이로서 구원의 첫 열매를 받은 아들로 계속해서 죄악의 세상속에서 고난받는 이들에게 믿음의 확신을 주고 하나님의 사랑의 확실함을 주려고 하는 것이 롬8장의 의도이다. 바울이 ‘누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우리를 위해 내어줄 정도로 사랑을 했는데 이 사랑에서 누가 끊는다는 말인가? 하고 막반 항변-칼이냐,적신이냐,죽음이냐 등등-한다.
그러니까 내어줌의 형식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여기서는 내어줌의 형식에 반영된 그의 아들-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할 때 앞에 말했듯이 보냄의 형식에서는 예수가 하나님의 전권대사(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하나님적인 전권대사로서 창조와 계시와 구원의 중보자)라고 했다.-이라는 것은 예수가 하나님의 사랑의 체현-하나님의 사랑의 몸담아 나타냄-이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때는 예수가 곧 하나님의 사랑 덩어리이다. 이 말은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신약전체를 요약하면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오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소망이 ‘하나님의 사랑함에 있다15)’
보냄의 형식이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우리를 위해서 내어 주신 분이다’ 곧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이다. 우리의 모든 구원이 하나님의 사랑에 달려 있는 것이다. 구원이라는 것이 하나님 사랑이다. 하나님이 사랑이 아니라면 어떻게 구원의 소망이 있겠는가?
우리가 우리의 인간은 항상 지혜와 선행으로 구원받으려고 한다. 세계 모든 종교가 다 그렇다. 종교만 그런 것이 아니고 문명이 그렇다. 자본주의,공산주의,과학주의 등 모든 것이 다 그렇다. 그래서 지혜를 많이 개발해서 한 사람을 잘 교육시키고 과학기술을 많이 발달시키면 인간이 풍요로워지고, 세계 평화가 이루어지고 인간성이 회복되고 서로 사랑하고 잘 살아서 구원에 이르는 것으로 하는 것이 인본주의적인 인간 구원의 길이다. 다른 종교들-불교,힌두교,유됴-도 다 지혜로 얻고 선행을 하면 구원에 이른다고 한다. 그러나 인간의 지혜를 아무리 개발해 보아도 구원이 없다. 왜? 모든 인간적인 것은 피조물의 제한성으로 특징되는 것이고 불안한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것은 완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구원이 될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의 힘으로, 인간의 지혜로,선행으로 도저히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결국 구원은 하나님께 달려 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 몰랄라 해버리면 구원이 안일어 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분은 우리를 위한 분이다. 하나님도 사랑이다.
출처 : 잭슨빌 교회개혁포럼
글쓴이 : JaxHopes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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