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신학 제18강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로 표현된 기독론의 결론 부분을 하겠다.
바울신학에서 주로 다루어 왔는데 바울신학에 있어서 기독론은 요한복음에도 그대로 나타나고 깊이 있게도 나타난다. 그래서 가령 요20:31에는 “예수가 하나님인 것을 믿고 믿음으로서 구원을 얻도록 하는 것”이 요한복음을 쓴 목적이라고 한다. 요 3:17/요일4:9,10,14 등에 바울 서신과 마찬가지로 보냄의 형식이 나온다17).
그래서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예수를 보내신 이다’라는 것을 요한복음은 계속해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나를 보내신 아버지라고 지칭하기도 하고 아버지를 생략하고 나를 보내신 이라고 지칭하기도 하고 ‘예수는 보냄을 받은 이’로 지칭이 되어 있다. 그래서 예수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 했을 때 전치사가 εκ이고 다른 저자-세례 요한,제자,사도-들이 온 것에 대해서는 απο 또는 παρα라는 전치사를 쓴다. 예수-하나님 아들-가 하나님으로부터 옴은 εκ를 쓴다. 그래서 하나님과 하나된 상태에서 나옴,하나님 본질로부터 나옴을 의미한다18). 이렇게 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자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아버지’로 라는 보냄의 형식에서 이와 같은 일련의 언어가 나온다. ‘예수가 하나님으로부터 오심,하나님의 본질로부터 나오심’으로 그래서 예수가 하나님의 전권대사(planipafertiary=agent)19)를 위임받은 하나님의 agent(실행자)라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예수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하나님의 본질에 참여한 자로서 초월해서 부터왔다. 그러기 때문에 그라 하나님의 구원을 우리를 위해 대행할 수 있는 것이다. 세상에서 오는 자이면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 초월자 하나님으로부터 보낸 분이어야 한다. 초월해서오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의 이와 같은 독특한-하나님 아들 됨-분임을 나타내기 위해서 요한 복음은 μονογενης 이라는 말을 쓴다. (요1:14,18). 또 αναπητος 라는 칭호를 쓴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아들이라(갈3:16,18/요일4:9)”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아서 하나님의 일을 대행하는 하나님 아들의 주된 과업은 이 세상에 하나님을 계시하는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 아들은 하나님의 계시자이다. 하나님의 계시자이기 때문에 이 아들은 하나님과 하나이고 동시에 하나님의 뜻에 절대로 순종해야 한다.
*On tological(존재론적) Unity
하나님과 아들의 존재론적인 하나됨이 천명되어 있다. 그래서 요한 10:30에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 또는 상호 내재-아버지가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함(요10:30) 또는 εγω ειμι-“I am”(나는 --이다)-가 요한복음에 8개가 나오는데 두 종교가 있다. 하나는 절대적 용법이 있고 또 하나는 보어를 수반하는 εγω ειμι가 있다. 그래서 여기 “내가 하늘로부터 내려온 생명의 떡이다”“내가 세상의 빛이다”“내가 선한 목자다”“내가 참 포도나무다”“내가 양의 문이다”“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이런 것들이 I am의 말씀의 보어를 동반(수반)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의 절대적 용법-너희들이 그 사람 아들을 들어 올리면 그 때에 εγω ειμι 인것을 알리라 으로도 쓰인다. 그런데 이 εγω ειμι는 분명히 구약에 있어서 하나님의 이름을 두고 하는 소리이다. 가령 출 3:3에 나오는 것에 보면 하나님의 이름을 두고 하는 소리이다. 그래서 예수가 하나님의 이름을 가진 분으로 “하나님의 창조주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느니라”는 뜻으로 하나님 이름을 스스로 주장한다. 이런 것들은 다 하나님과 아들의 하나됨을 나타낸다.
*Functional Subordination(의지의 하나됨,기능적 순종)
예수는 하나님 아버지를 계시하는 아들이다. 그가 아버지를 계시하기 위해서는이 세상에서 그는 이 세상에서에 아버지의 뜻을 전적으로 따르고 순종해야 한다. 그래서 가령 요14:28에 “아버지가 아들보다 크시다”라는 언어가 나온다. 그래서 앞에 나오는 Unity-“나와 아버지는 하나다”-와는 형식적으로는 모순을 일으키는데 ‘나와 아버지가 하나다’라는 것은 존재론적으로 하나됨을 의미한다. ‘아버지가 나보다 크시다’는 것은 기능적-아버지는 아들을 보내심,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보냄을 받아서 아버지 일을 행하는 분이고 즉 아버지의 뜻을 전적으로 받듦-으로 요 8:28에 ‘나는 아버지가 나에게 가라쳐 준대로 말한다’ 나의 가르침은 나의 것이 아니고 나를 보내신 이다. 자기가 자기 마음대로 무엇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자기를 보내신-위엄하신-아버지의 가르침을 고스란히 받아서 한다. 여기서 의지의 일체(Unity of the will)-아들이 아버지에게 자기 의지를 일치시킴-이 바로 순종(Subordination)이다. 그래서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이세상에 고스란히 순종적으로 성취하고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 두가지-Ontological Unity,Functional Subordination-는 계시의 요건이다.
아들이 아버지와 같아야 아들이 아버지를 계시할 수 있다. 계시의 제일 원칙이 하나님은 하나님만 계시할 수 있다. 하나님을 보아야 하나님이 어떻게 생긴줄 안다. 아버지하고 아들하고 99.9%가 같다. 그런데 0.1%가 다르다. 그러면 0.1% 다른 것이 계시가 아니다. 동물학적으로 원숭이와 사람이 가령 99%가 같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10%가 계시가 안되어서 원숭이를 보아도 사람이 어떻게 생긴지 모른다. 그러니까 완전히 아버지와 아들이 같을 때에 아들을 보고 아버지를 안다. 이것이 고대교회에서 소위 Arianism-아리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아들이 아버지보다 조금 못하다는 것이다-논쟁이다.
이게 큰 이단이냐면 조금 모자라면 계시가 아니다. 아버지를 알 수 없다. 아버지를 알 수 없으면 구원이 안 일어난다. 그러니까 Arius 논쟁이 바로 여기에 촛점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Arius는 functional subordination-아버직 나보다 크다(요10:38)-에 논쟁에 근거를 삼았다. 여기에 반대한 아단나시우스는 ontological unity-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이다-에 근거를 삼았다. 서로 요한복음에 나와 있는 말을 가지고 논쟁을 한 것이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아버지와 아들이 존재론적-본질적-으로 같아야 한다. 본질적으로 같아야 아들이 아버지를 계시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전혀 독립적인 의지를 가지고 독립적인 행위를 하면 계시가 안일어난다. 아들의 뜻을 보고 아버지의 뜻을 알 수가 없다. 아들의 한 행위를 보고 아버지의 뜻을 헤아리지 못한다. 아들은 전적으로 아버지에게 자기 의지르 ㄹ일치시켜야 한다. 곧 전적으로 자기 의지를 아버지의 의지에 일치시켜야 한다. 곧 아버지에게 전적으로 순종해야 한다. 그래서 여기서는 본질의 Unity는 필연적 의지의 Unity를 내포한다. 의지의 Unity는 다른 말로 하면 기능적인 순종의 관계이다. 그래서 아들이 아버지의 뜻을 받드는 아버지에게 순종하는 이런 의미로 욯나복음에서는 ‘아버지가 나보다 크다’‘나의 가르침은 내 가르침이 아니고 나를 보내신 이의 가르침이다’ 아들은 자기 뜻대로 아무것도 못한다. 그를 보내신 이의 권위로 한다는 것이 요한복음에 들어 있는 것이다. 이 둘-ontological unity와 functional subordiantion-다 충족이 되어야 아들이 아버지를 계시할 수 있다. 요한복음에 이 두가지를 상당히 강조했다. 이것이 삼위일체론적인 신인식의 출발점이다.
여기에서 하나님 아버지가 하나님 아들에 의해서 계시 되었다. 이 말은 아들이 아버지와 같다는 말이다. 그래야 계시가 일어난다. 그래서 초월자가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그의 아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계시되었다는 말이다. 초월하신 하나님의 내재하심을 객관적 계시 또는 구원이라고 한다. 그러면 아들을 통해서 역사 속에서 계시된 하나님을 오늘 우리에게 계시하게되는 분은 성령이다. 성령이 아들을 통해서 또는 아들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을 우리에게 계시되게 한다. 이것이 주관적 계시 또는 구원이라고 한다. 그러기 때문에 성령은 아들을 어떻게 나타낼 수 있는가? 똑같은 논리로 아들과 하나여야 한다. 성령을 아들의 영이고 또 아버지의 영이라고 한다. 이것이 내재의 완성이다. 초월하신는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아들에게서 내재요 오늘 우리에게 객관적 계시를 주관적으로 계시되게 한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의 역사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 아들로 인식하므로서 하나님을 알게 된다. 이것이 삼위일체로적인 논리의 출발점이다. 앞에서 예수가 하나님 아들이라는 신앙고백을 삼펴보기 위해서 구약과 유대교적 배경할 때에 지혜신학의 발달,묵시문학의 이위일체론적인 발달을 이야기한 것이 아래 도표를 두고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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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월?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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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관적 구원 ?성령 ?
?(계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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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재?하나님의 아들 ????????????????????
???????????????? 주관적 계시(구원)
그때 문시문학에서나 지혜신학에서나 이위일체론적인 신 개념이 발달했고 왜 생겼냐면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동시에 천명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이것의 완성된 form이 위의 도표이다. 하나님은 초월하신고 내재하신 분으로 우리에게 스스로를 계시하시고 우리를 위해서 구원의 행위를 하실 수 있고 또 하시는 분이다라는 것의 하나님이 삼위칠체론적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이위일체론적만 있어도 부족하다. 그래서 이것을 성경신학적으로 말하면 전승사적 신개념의 발달이라고 할 수도 있고 옛날 조직신학적인 카테고리로 말하면 점진적 계시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의 구원사-그들에게 자신을 계시하려는 과정-을 통해서 그 백성들에게 점차 초월하신고 내재하시는 하나님으로 그린다. 그래서 이위일체로적인 하나님으로 그리고 드디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삼위일체론적으로 생각할 경우는 초월하신 하나님으로 역사속에서 우리에게 스스로를 계시하시고 우리를 위한 구원의 행위를 하시고 그것을 우리에게 깨닫도록 하시고 덧입게 하신다.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활동이다. 하나님이 초월하신 내재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곧 삼위일체론적으로 존재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분이 우리에게 스스로를 계시하고 우리를 구원할 수있는 분이다. 그래서 이렇게 삼위일체 신론이 이렇게 해서 발달한 것이다.
삼위일체 논리의 구조가 이러한데 이것을 존재론적으로 추상화할려고 하면 더이상 이해를 못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삼위일체론의 논리적인 구조가 그것이 하나님 초월하시고 내재하신 분으로서 우리를 위해서 스스로를 계시하시고 구원의 행위를 하신 하나님을 말할 때 삼위일체론적으로 인식할 수가 있다. 이러한 논리를 초대 교인들-바울이나 요한,마태,신약의 저자-들과 함께 터득할려고 하지 않고 이것을 존재론적으로 추상화해가지고 ‘어떻게 세 분이 한 신으로 존재하느냐’ 이런 식으로 문제를 자주 질문하면 추상화되어가지고 어떻게 셋이 하나되느냐 하는 숫자노름밖에 안된다. 그래서 삼위일체론의 근본문제가 어떻게 셋이 하나가 되느냐를 설명하는 것으로 설정이 된다. 해결할 길이 없다. 이것을 위해 많은 비유를 들고 있다. 어거스틴이 든 빛과 열과 색으로 삼위일체론을 설명했다. 셋이 한 존재에서 나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비유가 별 의미가 없다. 마치 삼위일체가 셋아 어떻게 하나가 되느냐의 문제로 추상화 되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제기되기 때문에 심지어 한국의 토착신학 한다는 유동식 교수는 ‘한국 사람의 심성이 원래 삼위일체로적인 신을 인식하고 있다’고한다. 왜 그러냐면 화랑도의 정신이 풍류정신이라는 것이다. 한국 사람의 가장 깊은 심성이 풍류정신이라고 한다. 풍류정신의 근본은 한,멋,삶을 연구하는 것이 풍류정신이고 화랑도 전신이다. 그러니까 한 ,멋,삶이 삼위일체라고 말한다. 한신교수 주재용 교수도 여기에 동의한다. 그런데 한국의 대표적 신학자들이 이 모양이냐면 삼위일체의 근본논리와 의미를 이해를 못했기 때문이다. 맨날 조직신학 카테고리로 해석해서 ‘삼위일체란 어떻게 셋이 하나가 되는 것이냐?’에 집착을 해서 그런다. 아무런 의미도 없다. 우리가 삼위일체를 이야기할 때에 기억할 것은 첫째로 19세기-자유주의학파-20세기-종교사학파-에 삼위일체론의 하나님에 댛나 신앙고백을 헬라철학의 존재론에서 나온 게 전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삼위잉ㄹ체론적으로 고백하는 자는 신약성경에 유대인들-바울,요한,마태-이다.
둘째로 이들이 쓰고 있는 언어가 어느 context에서 하나님을 삼위일체론적으로 쓰느냐면 예배용어와 신앙고백 속에 들어 있다. 아주 자연스럽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스스로를 계시하신 하나님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구원의 하나님의 계시와 구원의 체험을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때에 절대 유일신론 신앙고백-여호와가 한 주이시다-신6:4-에 의해 낳았고 교육받고, 하루에도 몇번씩 암송하고 해야 했던 바울이 요한이 마태가 아주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삼위일체론적으로 말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왜 그러냐면 그리스도 안에 체험속에 계시된 하나님,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의 구원의 행위를 하신 하나님을 논할 때에 하님의 삼위일체론적인 존재를 아주 자연스러운 언어로 그릴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은 헬라적인 ,존재론적인 사상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오로지 그리스도 안에서의 위대한 체험-하나님 자기 계시,하나님의 구원-을 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고 이 계시를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계시되게 해서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에서 하나님을 하나님 됨을 깨닫게 하는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하게 하는 하나님이 바로 초월하신고 내재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때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하시고 지금 나에게 스스로를 계시되게 하시는 하나님은 이렇게 삼위일체론적으로 말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 논리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고 어떻게 세분이 하나 되느냐 하는 이것은 조직신학적으로 인간의 지적인 흥미를 충족시키고 변증학적으로 피요한 사유 단계일지도 몰라도 거기에 삼위일체론적인 신론에 최종목표,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극단적으로 가서 우리 인간의 지혜-인간의 인식능력-는 stop하고 만다. 삼위일체론 신론이 말하고자 하는 의도까지는 충분히 깨달을 수 있다. 그런데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하나님 초월을 부인하는 Pantheism 이든가, 하나님 내재를 부인하는 Deism 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둘다 하나님의 계시,구원이 안 일어난다고 했다. 그러면 인간의 구원이 없는 것이다. 오로지 우리 구원은 삼위일체 신관에만 가능하다. 이것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이 삼위일체론적으로 존재하시기 때문에 우리 구원은 자력 구원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구원이다. 하나님은 스스로를 계시하신 분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다. 그래서 기독교의 모든 신학이 궁극적으로 삼위일체론에 정박되어 있다. 삼위일체론적 신관이 없으면 계시,구원을 논할 수 없다. 구원,계시가 안 일어난다.
이런 상황에서 구원을 논한다면 자력 구원뿐이다. 그래서 기독교의 구원론-하나님 은혜에 의한 구원-과 모든 종교들의 자력 구원론이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는 것이다. 모든 종교는 자력 구원체계를 가지고 있다. 기독교만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구원을 말한다. 이것은 신관의 궁극적 차이 때문에 나오는 것이다. 삼위일체론적인 신관에서만 하나님의 자기 계시,인간을 위한 구원의 행위가 이루어진다. 왜 초월하시는 하나님,구원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 내재하심을 삼위일체 신관은 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구원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요3:16/10:11/15:13/요일4:10 등에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내어 주심이 강조됨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강조되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그의 아들을 내어 주셨다’ 이런 점은 바울신학과 다 비슷하다. 바울에 의해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고백한 것과 비슷하다. 다만 삼위일체신관-ontoligical unity,functional suboreination-이 요한복음의 묵상이 바울신학보다 좀 더 깉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같다. 히1:1-3에 보면 하나님 아들이 계시자이다. 과거에는 부분적으로 여러 모양으로 하나님께서 계시하셨는데 가령 선지자들을 통해서 또는 다른 모양으로 종말에 완성의 순간에 아들을 통해서 자기를 말씀(계시)하셨다. 그러니까 아들이 하나님을 완전히 계시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도장-말에 도장 찍으면 자국(형상)-즉 아들이 χαρακτηρ라는 말이다. 이런 이유로 아들이 하나님 아버지의 계시자임을 말하고 있다. 그 다음 1,2장을 넘어가면 아들이 성육신하여서 우리를 하나님 아들들 되게 하는 자라는 사상이 히브리서에도 나타난다. 히브리서도 근본적으로 바울,요한에서 마찬가지로 하나님 아들에 대한 신앙고백에 있어서 ‘하나님의 본질에 참여하는 자로 하나님을 완전히 계시한 계시자요, 하나님의 뜻을 이행하는 실행자요, 우리를 하나님 자녀되게 하는 분이요 등의 뜻이 들어 있다.
결론적으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다’라는 의미는 다음과 같다.
예수가 하나님의 본질에서부터 나왔다(초월해서 오심). 그가 하나님의 창조와 계시와 구원의 하나님의 실행자 되시고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체현이고 그가 하나님의 완전한 구계시자이고 그가 창조와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구원의 약속의 성취자이시고(고후1:19/롬1:1-4) 그가 우리를 하나님 아들들 되게 하여 하나님의 무한한 부요함을 상속받게 하심 등을 나타낸다. 그러기 때문에 ‘에수가 하나님 아들이다’라고 고백하고 그 하나님 아들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하나님의 구원을 받는다는 말은 ‘우리 구원이 초월자로부터 우리에게 은혜로, 사랑으로 주어졌음’을 함축하고 있다. 하나님 아들이라는 것은 제일 먼저 하나님의 본질-초월자-로부터 옴. 즉 보냄의 형식 그리고 초월자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즉 내어줌의 형식이다. 그래서 초월자 하나님을 우리에게 계시하시고 이 초월자 하나님은 우리를 위한 구원의 행위를 담당하셨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우리 구원이 인간 내재속에서 실제-인간들이 스스로 이루어야 할 것-가 아니다.
즉 자력 구원론이 아니고 ‘예수가 하나님 아들이다’라는 소리에는 항상 우리 구원이 하나님의 초월로부터 우리에게 은혜로 왔음이 들어 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가 하나님 아들이라고 하는 고백은 기독교 신앙에서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신앙고백이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은 이와같이 하나님 이름에 대한 풍부한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기 복음을 아예 하나님 아들이라는 칭호로 정의한다. 하나님 아들에 관한 교리가 삼위일체론적인 틀 속에 가지고 있지 않은 종교들이 다 부족한 종교인 것이 여기서 들어난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삼위일체론적인 신의식의 틀 속에 하나님 아들이라는 교리가 없는 종교들은 신의 초월이 부정되거나 내재가 부정이 되는데 이런 종교들에게서는 구원이 전부 인간의 자력 구원론이다20). ‘예수가 하나님 아들이다’는 신앙고백은 원래 하나님이 초월해서 우리를 위해서 스스로를 계시하시고 우리를 위해서 스스로 구원의 행위를 하신 것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 구원의 초월자 하나님으로부터 왔고 그가 우리를 위해서 스스로를 계시하시고 우리를 위해서 사랑을 베푸셨다. 그래서 그분이 스스로 사랑이삼을 나타낸다. 초월하시기 때무에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이다. 우리에게 오셔서-내재하신-우리에게 구원의 행위를 하셨다. 이런 것을 다 나타내는 것이 ‘에수가 하나님 아들이다’라는 신앙고백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기에 구원이 가능하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통해서 계시했기 때문에 신의식이 가능하다. 이런 의미로 ‘예수가 하나님 아들이다’라는 신앙고백은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핵심인데 이것을 빼버리면 기독교에 남는 것이 없고 껍데기만 남는 것이다. 그래서 토착화의 한계가 이런데 있는 것이다.
그러면 아들이라는 그림을 쓰지 말고 다른 그림을 쓰자는 것이다. 그러면 이보다 더 좋은그림이 있는가? 하나님과 본질이 하시고, 하나님의 전권을 위임받은 자이다. 하나님이 우리에 대한 사랑의 체현의 의미보다 더 좋은 그림이 어디 있는가?
아들보다 더 좋은 그림이 어디 있는가? 인간의 체험에서 아들은 아버지의 본질을 그대로 이어 받은 존재가 아들이다. 아버지의 모든 재산을 고스란히 상속받는 자가 아들이다. 아버지의 뜻을 위임받는자도 된다. 아들을 보면 아버지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있는 것처럼 아들보다 더 좋은 그림이 없다. 요즈음 여성주의자들은 딸이라고 하자는데 상관이 없다. 그래서 지혜가 하나님의 딸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다른 어떤 비인간,비인칭 등으로는 도저히 쓸 수 없는 것이다.
Ⅱ.하나님 형상 기독론(εικων του Θεου)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한다(고후4:4-6.골1:15). 롬8:29/고전15:49/고후3:16-18/비슷한 사상 빌3:21 등의 바울은 하나님의 형상-εικων-이라는 말을 쓴다. 그리고 εικων과 어느 때는 동의어가 되는 μορφη-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형태)-를 빌2:6에서 쓰고 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 형상-εικων-언어가바울 서신에서만 나온다. 이것과 거의 동의어를 사상 또 εικων 과아주 가깝게 쓰는 말이 요한 신학에도 나오고,바로 앞에서 이야기-히1:1-3-한 그리스도의 시-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에 나타난다. 가령 요한복음에서 그리스도를 λογος로 지칭할 때에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이다. 헬라 사상 Philo의 사상에 의하면 λογος가 요한복음에서는 하나님의 계시로 지칭해서 나타난다. 에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아들로서 하나님의 계시자인 것을 한마디로 하나님 말씀이다. 말씀이라는것은 하나님의 속뜻을 계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λογος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시자로서 하나님의 형상과 일치하는 말이다. 또 히1:3에 하나님 아들이 하나님의 영광이 밖으로 발하는 광채(απανγασμα)-도장 찍듯이 나타내는 큰점(χαρατεω)-는 εικων(image)라는 말과 아주 비슷한 말이고 개념은 똑같은 것이다. 그러나 막상 다른데서는 이런 말을 쓰지 않고 오로지 바울 서신에만 쓴다. 또바울 서신에 쓰이되 여러 곳에서 스이고 기독론과 구원론을 위해서 다 나온다.
가령 롬8:29/고전15:49의 구원론적으로 나온다.
여기서 하나님 아들과 하나님 형상이 가까이 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 아들은 우리를 하나님 아들들 되게 하는 분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독특한 하나님 아들 예수와 그를 통해서 하나님 아들들 된 우리의 관계는 형제간으로 설정되었다. 독특한 아들 예수가 맏아들이다. 우리는 다 그의 동생이다. 이 사상이 히브리서에도 그대로 나타나 있다. 이것은 예수의 자기 이해와 똑같다. 예수께서 독특하게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고 그의 추종자들에게 하나님을 ‘아빠’로 부르게 했다. 자주 하나님 아들됨을 자기 추종자들에게 전달해 주었다. 예수가 하나님 아들로서 우리를 하나님 아들들 되게 하는 것이다. 이 말을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 아들이 하나님 형상이다. 그러면 그를 통해서 하나님 아들들 된 우리들은 그의 동생들로서 그의 형상에 같아지는-conform-것이다. 그래서 여기서는 ‘형상’이라는 말이 구원론적으로 쓰인다. 우리가 하나님 아들들 되고 하나님 형상인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에 일치되어서 태초에 아담이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하나님 영광에 참여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고전 15:49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원래 아담의 형상으로 지음받았으나 그 형상에 신실하지 못해서 타락한 첫 아담의 형상을 입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지 못했다. ‘하나님 형상’이라는 말은 ‘하나님 영광’이라는 말과 거의 동의어이다. 그런데 이제 우리가 마지막 아담-하늘로부터 오신 이-의 형상을 입게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도 형상이 구원론으로 쓰였다. 고후 3:16-18도 마찬가지이다.
지금까지 말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 기독론이나 그의 형상에 일치해서 하나님 형상을 회복해서 구원을 얻는다는 구원론이 바울의 서신에서 중요하게 나온다. 그러나 신약의 다른 곳에는 안 나타난다. 심지어 요한복음이나 히브리서에 비슷한 사상이 나올법도 한데 그 사상이 발달되지 않았고 막상 이런 언어들은 안 나온다.’
그래서 여기서 내릴 수 있는 잠정적인 결론은 ‘바울은 독특한 기독론 구원론’이라고 할 수있다. 그러면 그 다음 문제는 이것이 어디에서 유례했느냐?
1.기원
예수가 하나님 형상이라는 기독론과 우리가 하나님 형상을 그를 통해서 회복한다는 구원론은 어디에서 기원한 것인가?
1)전통적으로 여기에 대한 답-형상 기독론,구원론-은 바울의 아담기독론의 일부라고 한다. 이것도 바울의 독특한 기독론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담이라 부르는 것은 바울에게서만 나온다 상당히 비슷한 사상이 요한복음이나 공관복음, 특히 마가 복음 같은데서는 예수의 세례 후 시험 받을 때 시험 기사에서도 아담과 비슷한 면이 없지 않아 있다. 그래서 신약의 다른 곳에서도 예수를 아담과 비교한 면이 없지 않아 있다.
2)명백히 그리스도를 아담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바울서신밖에 없다.
바울 서신에서 형상 기독론과 마찬가지로 아담기독론은 구원론 체계를 낳아 가지고 아주 중요하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한다. 그리스도를 믿는다. 믿음의 행위로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새로운 사람으로 부활한다. 이런 것은 다 아담 기독론의 틀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아담 기독론은 Matlew,Black이 말한바와 같이 바울 기독론과 바울 구원론이 ‘Scafolding(집을 지을 때 얽어메고 견고하게 해서 틀으 짜는 것)’이라고 한다. 바울 기독론이 바울 구원론의 틀을 짜고 있는 것이다. 아주 적절한 표현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한다. 그리하여 그의 구원에 참여한다. 사실 이런 모든 구원론은 사실 아담 기독론이다. 그러기 때문에 아담기독론은 바울에게 독특하게 중요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예수가 하나님 형상이다’라는 것은 아담이 태초에 하나님 형상으로 지음 받은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고전 1:45과 같이 명백히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이었다가 잃어버림과 그리스도가 마지막 아담으로서 우리에게 하늘의 인간의 형상을 가져다줌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게 아담 기독론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3)다른 사람들은 바울의 지혜기독론에서 나왔다고 한다.
왜냐하면 솔로몬의 지혜 7:33에 의하면 ‘지혜가 하나님 형상’이라고 하고 있다. 이때의 뜻은 지혜가 하나님의 계시자라는 말이다. 지혜가 하나님의 창조와 계시와 구원의 중보자로서 계시의 수단이다. 하나님의 딸로서 하나님을 계시하는 자이다. 이것을 말하기 위해서 하나님 의 형상이라고 한다. 형상이라는 말은 형상을 보면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이런 의미로 지혜가 하나님의 형상이다.
앞에서 바울의 ‘예수가 하나님 아들이다’는 기독론에서 근접을 이루는 것이 지혜기독론이라고 했는데-보냄의 형식은 지혜기독론의 발달-바울에게 있어서 지혜 기독론은 중요하다. 그러기 때문에 지혜문서에서 이것이 전승했다가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지혜로 생각했기 때문에 지혜의 한 속성-하나님의 형상 됨-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전가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면 문제는 바울의 아담 기독론,지혜기독론의 기원은 무엇이냐? 지금까지 주로 논쟁이 바울의 아담 기독론의 논쟁의 형식으로 이어졌다. 바울의 아담기독론이 어디에서 기원하는 것이냐? 여기에 대해서는 구구한 학설이 제기 되었다.
①Ur-mensch(태초의 인간)
지중해 세계-인도,이란,이라크,바빌로니아,헬라,이집트 일대-에 태초의 인간-Ur-mensch(primal man)-에 대한 여러가지 사상들이 있었다. 이것의 히브리판이 창세기 1장에 아담론이다. 히브리판의 종말론적 표현이 다니엘 7:13에 나오는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인자(사람)’으로 온 것이다. 이거시 나중에 여러가지 혼합으로 나타나는데 영지주의에서 태초 인간이 구원자 신화의 중심인물로 나타난다. 그래서 바울이 이처럼 헬라 세계에 널리 퍼져 있는 Ur-mensch사상을 알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령 알렉산드리아의 필로의 작품에도 태초인간에 대한 상상이 많다. 이런 종교사적 자료들을 총집합시켜 가지고 이런 헬라 세계의 혼합종교에서 바울이 inspiration을 얻어 가지고 그리스도를 마지막 아담이라고 했다. 특히 Bultmann에 의해서 강조된 영지주의 구원자 신화에서 이것이 나왔다.
Bultmann이 재구성한 영지주의의 구원자 신화에 의하면 ‘태초 인간이 빛의 몸을 하고 있었고 Idea(본질)세계에서 어쩌다 암흑의 세계와의 투쟁에서 져서 타락하게 된다. 그래가지고 그 몸이 산산조각이 난다. 그래서 빛 조각들로 쪼개진다. 그래가지고 암흑의 세상에 사는 사람들의 영혼으로 들어간다. 그래서 태초에 빛의 몸으로 이루어진 태초 인간의 파편들이 빛 조각으로 이것이 사람의 영혼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 영혼은 고향을 망각하고 시간(물질)의 세계가 전체의 세계인줄 알고 산다. 그런데 어떻게 된 셈인지 Ur-mensch가 다시 나타나 가지고 여기에 속하는 암호를 발한다. 암호는 바로 비밀지식이다. 암호를 발하면 자기에게 비추었던 파편을 가지고 있는 영혼이 깨우침을 받는다. 즉 지식을 믿는다. 그래서 이 세상에 본향이 아닌 것을 알게 되어서 본향에 대한 지식을 얻고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이렇게 Ur-mensch는 암호를 발하여서 자기 몸의 파편을 다시 모은다. 그래서 자기 몸을 일어 가고 점점 빛의 세계,본질의 세계로 그 안에서 자기가 구원받음으로 자기 몸에 파편을 가졌던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영지주의적 인간들도 자기 몸에 연합시켜서 구원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영주주의 신화라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스스로 구원받는 구원자 신화라는 것이다. 독일어로 ‘der erloserythus’영어로는 ‘The redeemer Myth’(스스로 구원받으면서 남을 구원하는자 신화)
바로 이러한 영지주의-지식을 얻을 수 있는 자-에서는 구원의 수단이 비밀지식이다. 그래서 영지주의자의 교회에 들어가면 자기들끼리만 통하는 암호-비밀지식-를 얻는다. 그래서 영지주의자-영적인 지식을 나누는 자-라는 것이다.
오늘날 구원판 등에 이러한 요소가 상당히 많다. 만약에 영지주의 신학이 이렇다면 바울의 아담 기독론,구원론과 비슷하다. 아담의 이름이 사람이다. 아담이 태초의 사람이다. 그런데 아담이 타락한다. 그래서 그 때문에 그 후손들이 다 암흑속에 산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바울은 마지막 아담이라고 한다. 새로 나타난 아담(사람)이라는 말이다. 영지주의에서처럼 타락해서 몸이 산산 조각이 난 Ur-mensch가 다시 나타나듯이 아담도 다시 나타나는 것으로 본다. 또 바울 신학에 의하면 그리스도가 어떻게 우리를 자기 몸인 자기와 연합시켜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화래서 그리스도 안-εν χριστος-에 내포되어서 그리스도 안에 내포된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우리들은 그 몸의 지체들이라고 한다. Ur-mensch도 같다. Ur-mensch가 자기 파편들을 가진 자들을 모아서 자기 몸을 이루어 가지고 하늘로 올라간다. 올라간 것 때문에 Ur-mensch는 구원의 길을 개척한 개척자이고 구원의 선두주자이다. 이것이 Bultmann에 의하면 히 12:2에 믿음주의라는 말이 아니고 믿음의 개척자,앞서가는 자, 길잡이이고-απαρ-그 다음에 완성자라는 것을 두고 말한다. Ur-mensch가 자기 몸을 파편으로 가진자들을 앞장서서 본향으로 데리고 가는 것을 말한다. 상당히 그럴듯하다. 그래서 Bultmann의 영지주의 신화에서 바울의 아담 기독론이 나오고 바울의 모든 기독론-하나님 아들의 기독론,예수가 주라는 기독론-이 다 영지주의 신화에서 나왔다고 한다. 그령 빌립보서의 찬송시-그리스도가 본래 하나님의 형상이었으나 스스로 낮추어 가지고 죽기까지 우리를 구원하셨다-도 이와 같은 Movement에서 나왔다고 한다. 그래서 신약의 모든 기독론이 영지주의 신화를 예수에게 뒤집어 씌워서 역사화한 것에 불과하다는 식이었다.
특히 아담 기독론이 그렇다고 한다. 이것이 상당히 그럴듯해가지고 많은 사람들을 미혹했다. 그래서 내 책에 이 설이 틀렸다고 논증해 놓았다. 이것이 틀린 가장 큰 이유가 영지주의 신화가 어떤 문서에도 확실히 나타나지 않는다. 이말은 Bultmann 이 원래 아무 연결이 없는 조각들을 합쳐가지고 자기의 신화를 만든 것이다. 원래 헬라의 이원론적인 인간론에서 인간이 어떻게 영과 육으로 구성된 존재가 됐느냐를 설명하고 인간론적인 토론으로 헬라 이원론에 의하면 영은 본질의 세계에 속한다. 또 어떻게 해서 육인 물질의 세계에 속해가지고 우리가 이 물질의 세계가 전부가 아니고 더 완전한 영혼의 세계에 대해서 동경하게 되었느냐? 어째서 이러한 인간의 실존이 있겠느냐는 헬라적 대답으로 영-영혼,ψυχη-이 타락해서 육-σωμα-속에 갇히게 되었다. 그러므로 구원은 σωμα에 갇힌 ψυχη-ψυχη가 σωμα에 갇힌 것이 타락이다-가 다시 해방이 되어서 Idea의 세계로 귀환하는 것이 구원이라고 한다. 그래서 ψυχη의 σωμα로부터 탈출로 인한 Idea세계로 귀환하는 것이 구원이라고 하는데 이런 것을 객관화하는 극(dramatication)화 해가지고 이것을 헬라 철학,종교서적에 인칭으로 쓰는 경우가 있었다. 근본적으로 ψυχη의 타락과 σωμα로부터 구원이 객관화되고 극화 되는 것이 있는데 이렇게 될 때 이것은 신화적으로 표현될 수 있다. 이런 것이 있다. 그러나 Bultmann이 이야기한데로 이것은 원래 태초의 인간에 대한 Speculation에 의해서 태초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에 태초 인간이 다시 자기 몸을 다 모아가지고 본향으로 올라간다. Bultmann이 재구성한 이런 식은 없다.
헬라의 이런 사상-ψυχη가 뭔가에 갇힌다. ψυχη가 나중에 다시 올라간다.-에서 한 조각 배고 또 고대 문서라든지 등에 Ur-mensch에 대한 Speculation이 없지 않아 있다. 그래서 여기에서 Ur-mensch라는 이름을 빌리고 그리고 창세기에서 아담 빌리고 또 유대교와 동방 종교 연합해 가지고 거기에 보면 영지주의 현상이 2,3세기에 많이 일어났다. 여기에서 또 빌리고 또 나중에 기독교-빌2:1-11까지의 Movement 즉 예수 그리스도가 선재하셨던 분이 성육신하고(내려옴) 다시 높임 받음-적 3단계 구조에 영향을 받아가지고 구원자 신화를 말하는 영지주의가 나중에 있다. 여기서 이 체계를 따지고 해서 Bultmann 이 스스로 조각들을 붙여가지고 만든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전, 신약전 어떤 문서에도 Bultmann이 재구성한 신화는 나오지 않는다. 이것과 조금 비슷한 그림이 나오는 것은 주후 3세기 이후-신약성경에 빌2:6-11까지 같은 선재,성육신,높임의 3단계 기독론의 패턴의 영향을 받은 영지주의에서만 나타난다. 그러니까 시간적으로 영향이 신약성경에서 영지주의로 갔다고 보아야 한다. 영지주의에서 신약성경으로 갔다고 하면 안된다.
그래서 Bultmann의 영지주의 신화론을 철저히 파헤쳐 논 사람이 하나는 베르린 대학의 C.Colpe이고 또 한사람은 H.M.Schenke 또는 스코틀랜드의 R.Mcl wilson 이런 사람이 옳지 않다고 주장해 놓았다. 그래서 신약전체에 영지주의 신화가 없다. 이것은 영지주의를 배격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이다. 또하나 중요한 이유는 지금까지 요약한 것 주에 이상한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Ur-mensch가 타락해서 자기 몸이 암흑세력과 싸워서 산산 조각이 났는데 어떻게 해서 다시 Ur-mensch가 나타나서 자기 몸을 또 모은다는 말인가? 이게 논리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신화라는 것이다. Bultmann의 신화구성에서 조금 잘못되었다. 그래서 원래 Bultmann 영지주의 신화에 근거해서 Bultmann 의 제자들이 전부 신약성경의 모든 기독론,구원론,교회론을 해석하려고 달려들었다. Bultmann의 제자 H.Schlier-나주에 카톨릭으로 전향해 버림-는 에베소서의 교회론-교회를 그리스도의 몸,머리-을 신화로 해석했다.
E.Kasemann은 골로새서,에베소서에 몸,그리스도 몸에 대한 인간론,교회론을 Bultman이 구성한 영지주의 신화에 근거해서 해석할려고 한 것이 박사학위 논문이다. 그리고 E.Kasemann이 교수되는 논문은 히브리서의 기독론과 구원론을 완전히 영지주의 신화에 근거해서 해석했다(히12:2).
이 사람의 영향력있는 논문 두편이 빌2:6-11-그리스도에 대한 찬송시-을 완전히 영지주의신화로 해석한다. 골 1:15-20-그리스도에 대한 찬송시-도 완전히 영지주의 신화로 해석한다. 그는 완전히 자기 선생인 Bultmann 이 재구성한 영지주의 신화로 자기 경력을 쌓은 사람이다. 그런데 그가 1970년에 죄를 회개했다. 이런 것은 다 엉터리이고 잘못되었다고 옥스포드 대학 강연에서 말했다. 문서적으로도 기독교(신약) 전에 이런 것이 있었다는 것도 없고, 구조상으로도 문제가 많다. 그리고 1973년에 로마서 주석을 출판했다. 여기에 보면 영지주의 신화의 문제점을 예리하게 지적해 놓았다. 여기에 보면 Ur-mensch가 산산조각 나 버렸는데 다시 자기 몸을 일으켜 가지고 자기 파편들을 다 모아가지고 구원을 이루느냐? 그것이 도대체 무엇이냐? 자기 몸이 다 조각이 나버렸는데 어떻게 또 나타나 가지고 조각들을 모아서 자기 몸을 이루느냐? 몸이 두개나 되느냐? 하나는 원래 가지고 있도 또 조각을 모아서 그래서 두개나 된다는 것이다. 이 사람 말대로 Sslvadus와 Salvatus의 본질적인 것이다. Salvadus는 구원 하는 사람,Salvatus는 구원받는 사람이다. Bultmann이 구성한 영지주의 신화에 의하면 어떻게 된 것인가?
Ur-mensch가 스스로 타락했기 때문에 스스로 구원받으면서, 구원하는 자라는 말이다. 이것이 어떻게 일치하는가? 이미 자신도 타락해서(져버려서) 구원을 받아야할 입장에 있으면 어덯게 남을 구원하느냐? 그래서 영지주의 대부분의 문제가 첫째로 연대적으로 문제가 있고 둘째로 Bultmann이 재구성한 것에는 구조상 문제가 있다. 그래서 영지주의 신화에 근거해가지고 바울의 아담 기독론을 재해석할려고 하는 다양한 노력들이 있었는데 다 허사였다.
출처 : 잭슨빌 교회개혁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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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로 표현된 기독론의 결론 부분을 하겠다.
바울신학에서 주로 다루어 왔는데 바울신학에 있어서 기독론은 요한복음에도 그대로 나타나고 깊이 있게도 나타난다. 그래서 가령 요20:31에는 “예수가 하나님인 것을 믿고 믿음으로서 구원을 얻도록 하는 것”이 요한복음을 쓴 목적이라고 한다. 요 3:17/요일4:9,10,14 등에 바울 서신과 마찬가지로 보냄의 형식이 나온다17).
그래서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예수를 보내신 이다’라는 것을 요한복음은 계속해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나를 보내신 아버지라고 지칭하기도 하고 아버지를 생략하고 나를 보내신 이라고 지칭하기도 하고 ‘예수는 보냄을 받은 이’로 지칭이 되어 있다. 그래서 예수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 했을 때 전치사가 εκ이고 다른 저자-세례 요한,제자,사도-들이 온 것에 대해서는 απο 또는 παρα라는 전치사를 쓴다. 예수-하나님 아들-가 하나님으로부터 옴은 εκ를 쓴다. 그래서 하나님과 하나된 상태에서 나옴,하나님 본질로부터 나옴을 의미한다18). 이렇게 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자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아버지’로 라는 보냄의 형식에서 이와 같은 일련의 언어가 나온다. ‘예수가 하나님으로부터 오심,하나님의 본질로부터 나오심’으로 그래서 예수가 하나님의 전권대사(planipafertiary=agent)19)를 위임받은 하나님의 agent(실행자)라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예수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하나님의 본질에 참여한 자로서 초월해서 부터왔다. 그러기 때문에 그라 하나님의 구원을 우리를 위해 대행할 수 있는 것이다. 세상에서 오는 자이면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 초월자 하나님으로부터 보낸 분이어야 한다. 초월해서오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의 이와 같은 독특한-하나님 아들 됨-분임을 나타내기 위해서 요한 복음은 μονογενης 이라는 말을 쓴다. (요1:14,18). 또 αναπητος 라는 칭호를 쓴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아들이라(갈3:16,18/요일4:9)”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아서 하나님의 일을 대행하는 하나님 아들의 주된 과업은 이 세상에 하나님을 계시하는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 아들은 하나님의 계시자이다. 하나님의 계시자이기 때문에 이 아들은 하나님과 하나이고 동시에 하나님의 뜻에 절대로 순종해야 한다.
*On tological(존재론적) Unity
하나님과 아들의 존재론적인 하나됨이 천명되어 있다. 그래서 요한 10:30에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 또는 상호 내재-아버지가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함(요10:30) 또는 εγω ειμι-“I am”(나는 --이다)-가 요한복음에 8개가 나오는데 두 종교가 있다. 하나는 절대적 용법이 있고 또 하나는 보어를 수반하는 εγω ειμι가 있다. 그래서 여기 “내가 하늘로부터 내려온 생명의 떡이다”“내가 세상의 빛이다”“내가 선한 목자다”“내가 참 포도나무다”“내가 양의 문이다”“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이런 것들이 I am의 말씀의 보어를 동반(수반)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의 절대적 용법-너희들이 그 사람 아들을 들어 올리면 그 때에 εγω ειμι 인것을 알리라 으로도 쓰인다. 그런데 이 εγω ειμι는 분명히 구약에 있어서 하나님의 이름을 두고 하는 소리이다. 가령 출 3:3에 나오는 것에 보면 하나님의 이름을 두고 하는 소리이다. 그래서 예수가 하나님의 이름을 가진 분으로 “하나님의 창조주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느니라”는 뜻으로 하나님 이름을 스스로 주장한다. 이런 것들은 다 하나님과 아들의 하나됨을 나타낸다.
*Functional Subordination(의지의 하나됨,기능적 순종)
예수는 하나님 아버지를 계시하는 아들이다. 그가 아버지를 계시하기 위해서는이 세상에서 그는 이 세상에서에 아버지의 뜻을 전적으로 따르고 순종해야 한다. 그래서 가령 요14:28에 “아버지가 아들보다 크시다”라는 언어가 나온다. 그래서 앞에 나오는 Unity-“나와 아버지는 하나다”-와는 형식적으로는 모순을 일으키는데 ‘나와 아버지가 하나다’라는 것은 존재론적으로 하나됨을 의미한다. ‘아버지가 나보다 크시다’는 것은 기능적-아버지는 아들을 보내심,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보냄을 받아서 아버지 일을 행하는 분이고 즉 아버지의 뜻을 전적으로 받듦-으로 요 8:28에 ‘나는 아버지가 나에게 가라쳐 준대로 말한다’ 나의 가르침은 나의 것이 아니고 나를 보내신 이다. 자기가 자기 마음대로 무엇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자기를 보내신-위엄하신-아버지의 가르침을 고스란히 받아서 한다. 여기서 의지의 일체(Unity of the will)-아들이 아버지에게 자기 의지를 일치시킴-이 바로 순종(Subordination)이다. 그래서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이세상에 고스란히 순종적으로 성취하고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 두가지-Ontological Unity,Functional Subordination-는 계시의 요건이다.
아들이 아버지와 같아야 아들이 아버지를 계시할 수 있다. 계시의 제일 원칙이 하나님은 하나님만 계시할 수 있다. 하나님을 보아야 하나님이 어떻게 생긴줄 안다. 아버지하고 아들하고 99.9%가 같다. 그런데 0.1%가 다르다. 그러면 0.1% 다른 것이 계시가 아니다. 동물학적으로 원숭이와 사람이 가령 99%가 같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10%가 계시가 안되어서 원숭이를 보아도 사람이 어떻게 생긴지 모른다. 그러니까 완전히 아버지와 아들이 같을 때에 아들을 보고 아버지를 안다. 이것이 고대교회에서 소위 Arianism-아리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아들이 아버지보다 조금 못하다는 것이다-논쟁이다.
이게 큰 이단이냐면 조금 모자라면 계시가 아니다. 아버지를 알 수 없다. 아버지를 알 수 없으면 구원이 안 일어난다. 그러니까 Arius 논쟁이 바로 여기에 촛점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Arius는 functional subordination-아버직 나보다 크다(요10:38)-에 논쟁에 근거를 삼았다. 여기에 반대한 아단나시우스는 ontological unity-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이다-에 근거를 삼았다. 서로 요한복음에 나와 있는 말을 가지고 논쟁을 한 것이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아버지와 아들이 존재론적-본질적-으로 같아야 한다. 본질적으로 같아야 아들이 아버지를 계시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전혀 독립적인 의지를 가지고 독립적인 행위를 하면 계시가 안일어난다. 아들의 뜻을 보고 아버지의 뜻을 알 수가 없다. 아들의 한 행위를 보고 아버지의 뜻을 헤아리지 못한다. 아들은 전적으로 아버지에게 자기 의지르 ㄹ일치시켜야 한다. 곧 전적으로 자기 의지를 아버지의 의지에 일치시켜야 한다. 곧 아버지에게 전적으로 순종해야 한다. 그래서 여기서는 본질의 Unity는 필연적 의지의 Unity를 내포한다. 의지의 Unity는 다른 말로 하면 기능적인 순종의 관계이다. 그래서 아들이 아버지의 뜻을 받드는 아버지에게 순종하는 이런 의미로 욯나복음에서는 ‘아버지가 나보다 크다’‘나의 가르침은 내 가르침이 아니고 나를 보내신 이의 가르침이다’ 아들은 자기 뜻대로 아무것도 못한다. 그를 보내신 이의 권위로 한다는 것이 요한복음에 들어 있는 것이다. 이 둘-ontological unity와 functional subordiantion-다 충족이 되어야 아들이 아버지를 계시할 수 있다. 요한복음에 이 두가지를 상당히 강조했다. 이것이 삼위일체론적인 신인식의 출발점이다.
여기에서 하나님 아버지가 하나님 아들에 의해서 계시 되었다. 이 말은 아들이 아버지와 같다는 말이다. 그래야 계시가 일어난다. 그래서 초월자가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그의 아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계시되었다는 말이다. 초월하신 하나님의 내재하심을 객관적 계시 또는 구원이라고 한다. 그러면 아들을 통해서 역사 속에서 계시된 하나님을 오늘 우리에게 계시하게되는 분은 성령이다. 성령이 아들을 통해서 또는 아들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을 우리에게 계시되게 한다. 이것이 주관적 계시 또는 구원이라고 한다. 그러기 때문에 성령은 아들을 어떻게 나타낼 수 있는가? 똑같은 논리로 아들과 하나여야 한다. 성령을 아들의 영이고 또 아버지의 영이라고 한다. 이것이 내재의 완성이다. 초월하신는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아들에게서 내재요 오늘 우리에게 객관적 계시를 주관적으로 계시되게 한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의 역사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 아들로 인식하므로서 하나님을 알게 된다. 이것이 삼위일체로적인 논리의 출발점이다. 앞에서 예수가 하나님 아들이라는 신앙고백을 삼펴보기 위해서 구약과 유대교적 배경할 때에 지혜신학의 발달,묵시문학의 이위일체론적인 발달을 이야기한 것이 아래 도표를 두고 하는 말이다.
????????
초월?하나님????????????????????????????
???????? ????????
?객관적 구원 ?성령 ?
?(계시) ????????
???????????????? ?
내재?하나님의 아들 ????????????????????
???????????????? 주관적 계시(구원)
그때 문시문학에서나 지혜신학에서나 이위일체론적인 신 개념이 발달했고 왜 생겼냐면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동시에 천명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이것의 완성된 form이 위의 도표이다. 하나님은 초월하신고 내재하신 분으로 우리에게 스스로를 계시하시고 우리를 위해서 구원의 행위를 하실 수 있고 또 하시는 분이다라는 것의 하나님이 삼위칠체론적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이위일체론적만 있어도 부족하다. 그래서 이것을 성경신학적으로 말하면 전승사적 신개념의 발달이라고 할 수도 있고 옛날 조직신학적인 카테고리로 말하면 점진적 계시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의 구원사-그들에게 자신을 계시하려는 과정-을 통해서 그 백성들에게 점차 초월하신고 내재하시는 하나님으로 그린다. 그래서 이위일체로적인 하나님으로 그리고 드디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삼위일체론적으로 생각할 경우는 초월하신 하나님으로 역사속에서 우리에게 스스로를 계시하시고 우리를 위한 구원의 행위를 하시고 그것을 우리에게 깨닫도록 하시고 덧입게 하신다.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활동이다. 하나님이 초월하신 내재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곧 삼위일체론적으로 존재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분이 우리에게 스스로를 계시하고 우리를 구원할 수있는 분이다. 그래서 이렇게 삼위일체 신론이 이렇게 해서 발달한 것이다.
삼위일체 논리의 구조가 이러한데 이것을 존재론적으로 추상화할려고 하면 더이상 이해를 못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삼위일체론의 논리적인 구조가 그것이 하나님 초월하시고 내재하신 분으로서 우리를 위해서 스스로를 계시하시고 구원의 행위를 하신 하나님을 말할 때 삼위일체론적으로 인식할 수가 있다. 이러한 논리를 초대 교인들-바울이나 요한,마태,신약의 저자-들과 함께 터득할려고 하지 않고 이것을 존재론적으로 추상화해가지고 ‘어떻게 세 분이 한 신으로 존재하느냐’ 이런 식으로 문제를 자주 질문하면 추상화되어가지고 어떻게 셋이 하나되느냐 하는 숫자노름밖에 안된다. 그래서 삼위일체론의 근본문제가 어떻게 셋이 하나가 되느냐를 설명하는 것으로 설정이 된다. 해결할 길이 없다. 이것을 위해 많은 비유를 들고 있다. 어거스틴이 든 빛과 열과 색으로 삼위일체론을 설명했다. 셋이 한 존재에서 나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비유가 별 의미가 없다. 마치 삼위일체가 셋아 어떻게 하나가 되느냐의 문제로 추상화 되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제기되기 때문에 심지어 한국의 토착신학 한다는 유동식 교수는 ‘한국 사람의 심성이 원래 삼위일체로적인 신을 인식하고 있다’고한다. 왜 그러냐면 화랑도의 정신이 풍류정신이라는 것이다. 한국 사람의 가장 깊은 심성이 풍류정신이라고 한다. 풍류정신의 근본은 한,멋,삶을 연구하는 것이 풍류정신이고 화랑도 전신이다. 그러니까 한 ,멋,삶이 삼위일체라고 말한다. 한신교수 주재용 교수도 여기에 동의한다. 그런데 한국의 대표적 신학자들이 이 모양이냐면 삼위일체의 근본논리와 의미를 이해를 못했기 때문이다. 맨날 조직신학 카테고리로 해석해서 ‘삼위일체란 어떻게 셋이 하나가 되는 것이냐?’에 집착을 해서 그런다. 아무런 의미도 없다. 우리가 삼위일체를 이야기할 때에 기억할 것은 첫째로 19세기-자유주의학파-20세기-종교사학파-에 삼위일체론의 하나님에 댛나 신앙고백을 헬라철학의 존재론에서 나온 게 전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삼위잉ㄹ체론적으로 고백하는 자는 신약성경에 유대인들-바울,요한,마태-이다.
둘째로 이들이 쓰고 있는 언어가 어느 context에서 하나님을 삼위일체론적으로 쓰느냐면 예배용어와 신앙고백 속에 들어 있다. 아주 자연스럽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스스로를 계시하신 하나님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구원의 하나님의 계시와 구원의 체험을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때에 절대 유일신론 신앙고백-여호와가 한 주이시다-신6:4-에 의해 낳았고 교육받고, 하루에도 몇번씩 암송하고 해야 했던 바울이 요한이 마태가 아주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삼위일체론적으로 말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왜 그러냐면 그리스도 안에 체험속에 계시된 하나님,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의 구원의 행위를 하신 하나님을 논할 때에 하님의 삼위일체론적인 존재를 아주 자연스러운 언어로 그릴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은 헬라적인 ,존재론적인 사상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오로지 그리스도 안에서의 위대한 체험-하나님 자기 계시,하나님의 구원-을 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고 이 계시를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계시되게 해서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에서 하나님을 하나님 됨을 깨닫게 하는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하게 하는 하나님이 바로 초월하신고 내재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때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하시고 지금 나에게 스스로를 계시되게 하시는 하나님은 이렇게 삼위일체론적으로 말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 논리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고 어떻게 세분이 하나 되느냐 하는 이것은 조직신학적으로 인간의 지적인 흥미를 충족시키고 변증학적으로 피요한 사유 단계일지도 몰라도 거기에 삼위일체론적인 신론에 최종목표,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극단적으로 가서 우리 인간의 지혜-인간의 인식능력-는 stop하고 만다. 삼위일체론 신론이 말하고자 하는 의도까지는 충분히 깨달을 수 있다. 그런데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하나님 초월을 부인하는 Pantheism 이든가, 하나님 내재를 부인하는 Deism 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둘다 하나님의 계시,구원이 안 일어난다고 했다. 그러면 인간의 구원이 없는 것이다. 오로지 우리 구원은 삼위일체 신관에만 가능하다. 이것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이 삼위일체론적으로 존재하시기 때문에 우리 구원은 자력 구원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구원이다. 하나님은 스스로를 계시하신 분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다. 그래서 기독교의 모든 신학이 궁극적으로 삼위일체론에 정박되어 있다. 삼위일체론적 신관이 없으면 계시,구원을 논할 수 없다. 구원,계시가 안 일어난다.
이런 상황에서 구원을 논한다면 자력 구원뿐이다. 그래서 기독교의 구원론-하나님 은혜에 의한 구원-과 모든 종교들의 자력 구원론이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는 것이다. 모든 종교는 자력 구원체계를 가지고 있다. 기독교만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구원을 말한다. 이것은 신관의 궁극적 차이 때문에 나오는 것이다. 삼위일체론적인 신관에서만 하나님의 자기 계시,인간을 위한 구원의 행위가 이루어진다. 왜 초월하시는 하나님,구원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 내재하심을 삼위일체 신관은 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구원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요3:16/10:11/15:13/요일4:10 등에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내어 주심이 강조됨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강조되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그의 아들을 내어 주셨다’ 이런 점은 바울신학과 다 비슷하다. 바울에 의해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고백한 것과 비슷하다. 다만 삼위일체신관-ontoligical unity,functional suboreination-이 요한복음의 묵상이 바울신학보다 좀 더 깉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같다. 히1:1-3에 보면 하나님 아들이 계시자이다. 과거에는 부분적으로 여러 모양으로 하나님께서 계시하셨는데 가령 선지자들을 통해서 또는 다른 모양으로 종말에 완성의 순간에 아들을 통해서 자기를 말씀(계시)하셨다. 그러니까 아들이 하나님을 완전히 계시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도장-말에 도장 찍으면 자국(형상)-즉 아들이 χαρακτηρ라는 말이다. 이런 이유로 아들이 하나님 아버지의 계시자임을 말하고 있다. 그 다음 1,2장을 넘어가면 아들이 성육신하여서 우리를 하나님 아들들 되게 하는 자라는 사상이 히브리서에도 나타난다. 히브리서도 근본적으로 바울,요한에서 마찬가지로 하나님 아들에 대한 신앙고백에 있어서 ‘하나님의 본질에 참여하는 자로 하나님을 완전히 계시한 계시자요, 하나님의 뜻을 이행하는 실행자요, 우리를 하나님 자녀되게 하는 분이요 등의 뜻이 들어 있다.
결론적으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다’라는 의미는 다음과 같다.
예수가 하나님의 본질에서부터 나왔다(초월해서 오심). 그가 하나님의 창조와 계시와 구원의 하나님의 실행자 되시고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체현이고 그가 하나님의 완전한 구계시자이고 그가 창조와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구원의 약속의 성취자이시고(고후1:19/롬1:1-4) 그가 우리를 하나님 아들들 되게 하여 하나님의 무한한 부요함을 상속받게 하심 등을 나타낸다. 그러기 때문에 ‘에수가 하나님 아들이다’라고 고백하고 그 하나님 아들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하나님의 구원을 받는다는 말은 ‘우리 구원이 초월자로부터 우리에게 은혜로, 사랑으로 주어졌음’을 함축하고 있다. 하나님 아들이라는 것은 제일 먼저 하나님의 본질-초월자-로부터 옴. 즉 보냄의 형식 그리고 초월자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즉 내어줌의 형식이다. 그래서 초월자 하나님을 우리에게 계시하시고 이 초월자 하나님은 우리를 위한 구원의 행위를 담당하셨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우리 구원이 인간 내재속에서 실제-인간들이 스스로 이루어야 할 것-가 아니다.
즉 자력 구원론이 아니고 ‘예수가 하나님 아들이다’라는 소리에는 항상 우리 구원이 하나님의 초월로부터 우리에게 은혜로 왔음이 들어 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가 하나님 아들이라고 하는 고백은 기독교 신앙에서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신앙고백이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은 이와같이 하나님 이름에 대한 풍부한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기 복음을 아예 하나님 아들이라는 칭호로 정의한다. 하나님 아들에 관한 교리가 삼위일체론적인 틀 속에 가지고 있지 않은 종교들이 다 부족한 종교인 것이 여기서 들어난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삼위일체론적인 신의식의 틀 속에 하나님 아들이라는 교리가 없는 종교들은 신의 초월이 부정되거나 내재가 부정이 되는데 이런 종교들에게서는 구원이 전부 인간의 자력 구원론이다20). ‘예수가 하나님 아들이다’는 신앙고백은 원래 하나님이 초월해서 우리를 위해서 스스로를 계시하시고 우리를 위해서 스스로 구원의 행위를 하신 것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 구원의 초월자 하나님으로부터 왔고 그가 우리를 위해서 스스로를 계시하시고 우리를 위해서 사랑을 베푸셨다. 그래서 그분이 스스로 사랑이삼을 나타낸다. 초월하시기 때무에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이다. 우리에게 오셔서-내재하신-우리에게 구원의 행위를 하셨다. 이런 것을 다 나타내는 것이 ‘에수가 하나님 아들이다’라는 신앙고백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기에 구원이 가능하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통해서 계시했기 때문에 신의식이 가능하다. 이런 의미로 ‘예수가 하나님 아들이다’라는 신앙고백은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핵심인데 이것을 빼버리면 기독교에 남는 것이 없고 껍데기만 남는 것이다. 그래서 토착화의 한계가 이런데 있는 것이다.
그러면 아들이라는 그림을 쓰지 말고 다른 그림을 쓰자는 것이다. 그러면 이보다 더 좋은그림이 있는가? 하나님과 본질이 하시고, 하나님의 전권을 위임받은 자이다. 하나님이 우리에 대한 사랑의 체현의 의미보다 더 좋은 그림이 어디 있는가?
아들보다 더 좋은 그림이 어디 있는가? 인간의 체험에서 아들은 아버지의 본질을 그대로 이어 받은 존재가 아들이다. 아버지의 모든 재산을 고스란히 상속받는 자가 아들이다. 아버지의 뜻을 위임받는자도 된다. 아들을 보면 아버지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있는 것처럼 아들보다 더 좋은 그림이 없다. 요즈음 여성주의자들은 딸이라고 하자는데 상관이 없다. 그래서 지혜가 하나님의 딸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다른 어떤 비인간,비인칭 등으로는 도저히 쓸 수 없는 것이다.
Ⅱ.하나님 형상 기독론(εικων του Θεου)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한다(고후4:4-6.골1:15). 롬8:29/고전15:49/고후3:16-18/비슷한 사상 빌3:21 등의 바울은 하나님의 형상-εικων-이라는 말을 쓴다. 그리고 εικων과 어느 때는 동의어가 되는 μορφη-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형태)-를 빌2:6에서 쓰고 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 형상-εικων-언어가바울 서신에서만 나온다. 이것과 거의 동의어를 사상 또 εικων 과아주 가깝게 쓰는 말이 요한 신학에도 나오고,바로 앞에서 이야기-히1:1-3-한 그리스도의 시-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에 나타난다. 가령 요한복음에서 그리스도를 λογος로 지칭할 때에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이다. 헬라 사상 Philo의 사상에 의하면 λογος가 요한복음에서는 하나님의 계시로 지칭해서 나타난다. 에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아들로서 하나님의 계시자인 것을 한마디로 하나님 말씀이다. 말씀이라는것은 하나님의 속뜻을 계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λογος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시자로서 하나님의 형상과 일치하는 말이다. 또 히1:3에 하나님 아들이 하나님의 영광이 밖으로 발하는 광채(απανγασμα)-도장 찍듯이 나타내는 큰점(χαρατεω)-는 εικων(image)라는 말과 아주 비슷한 말이고 개념은 똑같은 것이다. 그러나 막상 다른데서는 이런 말을 쓰지 않고 오로지 바울 서신에만 쓴다. 또바울 서신에 쓰이되 여러 곳에서 스이고 기독론과 구원론을 위해서 다 나온다.
가령 롬8:29/고전15:49의 구원론적으로 나온다.
여기서 하나님 아들과 하나님 형상이 가까이 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 아들은 우리를 하나님 아들들 되게 하는 분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독특한 하나님 아들 예수와 그를 통해서 하나님 아들들 된 우리의 관계는 형제간으로 설정되었다. 독특한 아들 예수가 맏아들이다. 우리는 다 그의 동생이다. 이 사상이 히브리서에도 그대로 나타나 있다. 이것은 예수의 자기 이해와 똑같다. 예수께서 독특하게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고 그의 추종자들에게 하나님을 ‘아빠’로 부르게 했다. 자주 하나님 아들됨을 자기 추종자들에게 전달해 주었다. 예수가 하나님 아들로서 우리를 하나님 아들들 되게 하는 것이다. 이 말을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 아들이 하나님 형상이다. 그러면 그를 통해서 하나님 아들들 된 우리들은 그의 동생들로서 그의 형상에 같아지는-conform-것이다. 그래서 여기서는 ‘형상’이라는 말이 구원론적으로 쓰인다. 우리가 하나님 아들들 되고 하나님 형상인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에 일치되어서 태초에 아담이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하나님 영광에 참여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고전 15:49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원래 아담의 형상으로 지음받았으나 그 형상에 신실하지 못해서 타락한 첫 아담의 형상을 입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지 못했다. ‘하나님 형상’이라는 말은 ‘하나님 영광’이라는 말과 거의 동의어이다. 그런데 이제 우리가 마지막 아담-하늘로부터 오신 이-의 형상을 입게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도 형상이 구원론으로 쓰였다. 고후 3:16-18도 마찬가지이다.
지금까지 말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 기독론이나 그의 형상에 일치해서 하나님 형상을 회복해서 구원을 얻는다는 구원론이 바울의 서신에서 중요하게 나온다. 그러나 신약의 다른 곳에는 안 나타난다. 심지어 요한복음이나 히브리서에 비슷한 사상이 나올법도 한데 그 사상이 발달되지 않았고 막상 이런 언어들은 안 나온다.’
그래서 여기서 내릴 수 있는 잠정적인 결론은 ‘바울은 독특한 기독론 구원론’이라고 할 수있다. 그러면 그 다음 문제는 이것이 어디에서 유례했느냐?
1.기원
예수가 하나님 형상이라는 기독론과 우리가 하나님 형상을 그를 통해서 회복한다는 구원론은 어디에서 기원한 것인가?
1)전통적으로 여기에 대한 답-형상 기독론,구원론-은 바울의 아담기독론의 일부라고 한다. 이것도 바울의 독특한 기독론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담이라 부르는 것은 바울에게서만 나온다 상당히 비슷한 사상이 요한복음이나 공관복음, 특히 마가 복음 같은데서는 예수의 세례 후 시험 받을 때 시험 기사에서도 아담과 비슷한 면이 없지 않아 있다. 그래서 신약의 다른 곳에서도 예수를 아담과 비교한 면이 없지 않아 있다.
2)명백히 그리스도를 아담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바울서신밖에 없다.
바울 서신에서 형상 기독론과 마찬가지로 아담기독론은 구원론 체계를 낳아 가지고 아주 중요하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한다. 그리스도를 믿는다. 믿음의 행위로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새로운 사람으로 부활한다. 이런 것은 다 아담 기독론의 틀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아담 기독론은 Matlew,Black이 말한바와 같이 바울 기독론과 바울 구원론이 ‘Scafolding(집을 지을 때 얽어메고 견고하게 해서 틀으 짜는 것)’이라고 한다. 바울 기독론이 바울 구원론의 틀을 짜고 있는 것이다. 아주 적절한 표현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한다. 그리하여 그의 구원에 참여한다. 사실 이런 모든 구원론은 사실 아담 기독론이다. 그러기 때문에 아담기독론은 바울에게 독특하게 중요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예수가 하나님 형상이다’라는 것은 아담이 태초에 하나님 형상으로 지음 받은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고전 1:45과 같이 명백히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이었다가 잃어버림과 그리스도가 마지막 아담으로서 우리에게 하늘의 인간의 형상을 가져다줌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게 아담 기독론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3)다른 사람들은 바울의 지혜기독론에서 나왔다고 한다.
왜냐하면 솔로몬의 지혜 7:33에 의하면 ‘지혜가 하나님 형상’이라고 하고 있다. 이때의 뜻은 지혜가 하나님의 계시자라는 말이다. 지혜가 하나님의 창조와 계시와 구원의 중보자로서 계시의 수단이다. 하나님의 딸로서 하나님을 계시하는 자이다. 이것을 말하기 위해서 하나님 의 형상이라고 한다. 형상이라는 말은 형상을 보면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이런 의미로 지혜가 하나님의 형상이다.
앞에서 바울의 ‘예수가 하나님 아들이다’는 기독론에서 근접을 이루는 것이 지혜기독론이라고 했는데-보냄의 형식은 지혜기독론의 발달-바울에게 있어서 지혜 기독론은 중요하다. 그러기 때문에 지혜문서에서 이것이 전승했다가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지혜로 생각했기 때문에 지혜의 한 속성-하나님의 형상 됨-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전가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면 문제는 바울의 아담 기독론,지혜기독론의 기원은 무엇이냐? 지금까지 주로 논쟁이 바울의 아담 기독론의 논쟁의 형식으로 이어졌다. 바울의 아담기독론이 어디에서 기원하는 것이냐? 여기에 대해서는 구구한 학설이 제기 되었다.
①Ur-mensch(태초의 인간)
지중해 세계-인도,이란,이라크,바빌로니아,헬라,이집트 일대-에 태초의 인간-Ur-mensch(primal man)-에 대한 여러가지 사상들이 있었다. 이것의 히브리판이 창세기 1장에 아담론이다. 히브리판의 종말론적 표현이 다니엘 7:13에 나오는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인자(사람)’으로 온 것이다. 이거시 나중에 여러가지 혼합으로 나타나는데 영지주의에서 태초 인간이 구원자 신화의 중심인물로 나타난다. 그래서 바울이 이처럼 헬라 세계에 널리 퍼져 있는 Ur-mensch사상을 알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령 알렉산드리아의 필로의 작품에도 태초인간에 대한 상상이 많다. 이런 종교사적 자료들을 총집합시켜 가지고 이런 헬라 세계의 혼합종교에서 바울이 inspiration을 얻어 가지고 그리스도를 마지막 아담이라고 했다. 특히 Bultmann에 의해서 강조된 영지주의 구원자 신화에서 이것이 나왔다.
Bultmann이 재구성한 영지주의의 구원자 신화에 의하면 ‘태초 인간이 빛의 몸을 하고 있었고 Idea(본질)세계에서 어쩌다 암흑의 세계와의 투쟁에서 져서 타락하게 된다. 그래가지고 그 몸이 산산조각이 난다. 그래서 빛 조각들로 쪼개진다. 그래가지고 암흑의 세상에 사는 사람들의 영혼으로 들어간다. 그래서 태초에 빛의 몸으로 이루어진 태초 인간의 파편들이 빛 조각으로 이것이 사람의 영혼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 영혼은 고향을 망각하고 시간(물질)의 세계가 전체의 세계인줄 알고 산다. 그런데 어떻게 된 셈인지 Ur-mensch가 다시 나타나 가지고 여기에 속하는 암호를 발한다. 암호는 바로 비밀지식이다. 암호를 발하면 자기에게 비추었던 파편을 가지고 있는 영혼이 깨우침을 받는다. 즉 지식을 믿는다. 그래서 이 세상에 본향이 아닌 것을 알게 되어서 본향에 대한 지식을 얻고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이렇게 Ur-mensch는 암호를 발하여서 자기 몸의 파편을 다시 모은다. 그래서 자기 몸을 일어 가고 점점 빛의 세계,본질의 세계로 그 안에서 자기가 구원받음으로 자기 몸에 파편을 가졌던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영지주의적 인간들도 자기 몸에 연합시켜서 구원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영주주의 신화라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스스로 구원받는 구원자 신화라는 것이다. 독일어로 ‘der erloserythus’영어로는 ‘The redeemer Myth’(스스로 구원받으면서 남을 구원하는자 신화)
바로 이러한 영지주의-지식을 얻을 수 있는 자-에서는 구원의 수단이 비밀지식이다. 그래서 영지주의자의 교회에 들어가면 자기들끼리만 통하는 암호-비밀지식-를 얻는다. 그래서 영지주의자-영적인 지식을 나누는 자-라는 것이다.
오늘날 구원판 등에 이러한 요소가 상당히 많다. 만약에 영지주의 신학이 이렇다면 바울의 아담 기독론,구원론과 비슷하다. 아담의 이름이 사람이다. 아담이 태초의 사람이다. 그런데 아담이 타락한다. 그래서 그 때문에 그 후손들이 다 암흑속에 산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바울은 마지막 아담이라고 한다. 새로 나타난 아담(사람)이라는 말이다. 영지주의에서처럼 타락해서 몸이 산산 조각이 난 Ur-mensch가 다시 나타나듯이 아담도 다시 나타나는 것으로 본다. 또 바울 신학에 의하면 그리스도가 어떻게 우리를 자기 몸인 자기와 연합시켜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화래서 그리스도 안-εν χριστος-에 내포되어서 그리스도 안에 내포된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우리들은 그 몸의 지체들이라고 한다. Ur-mensch도 같다. Ur-mensch가 자기 파편들을 가진 자들을 모아서 자기 몸을 이루어 가지고 하늘로 올라간다. 올라간 것 때문에 Ur-mensch는 구원의 길을 개척한 개척자이고 구원의 선두주자이다. 이것이 Bultmann에 의하면 히 12:2에 믿음주의라는 말이 아니고 믿음의 개척자,앞서가는 자, 길잡이이고-απαρ-그 다음에 완성자라는 것을 두고 말한다. Ur-mensch가 자기 몸을 파편으로 가진자들을 앞장서서 본향으로 데리고 가는 것을 말한다. 상당히 그럴듯하다. 그래서 Bultmann의 영지주의 신화에서 바울의 아담 기독론이 나오고 바울의 모든 기독론-하나님 아들의 기독론,예수가 주라는 기독론-이 다 영지주의 신화에서 나왔다고 한다. 그령 빌립보서의 찬송시-그리스도가 본래 하나님의 형상이었으나 스스로 낮추어 가지고 죽기까지 우리를 구원하셨다-도 이와 같은 Movement에서 나왔다고 한다. 그래서 신약의 모든 기독론이 영지주의 신화를 예수에게 뒤집어 씌워서 역사화한 것에 불과하다는 식이었다.
특히 아담 기독론이 그렇다고 한다. 이것이 상당히 그럴듯해가지고 많은 사람들을 미혹했다. 그래서 내 책에 이 설이 틀렸다고 논증해 놓았다. 이것이 틀린 가장 큰 이유가 영지주의 신화가 어떤 문서에도 확실히 나타나지 않는다. 이말은 Bultmann 이 원래 아무 연결이 없는 조각들을 합쳐가지고 자기의 신화를 만든 것이다. 원래 헬라의 이원론적인 인간론에서 인간이 어떻게 영과 육으로 구성된 존재가 됐느냐를 설명하고 인간론적인 토론으로 헬라 이원론에 의하면 영은 본질의 세계에 속한다. 또 어떻게 해서 육인 물질의 세계에 속해가지고 우리가 이 물질의 세계가 전부가 아니고 더 완전한 영혼의 세계에 대해서 동경하게 되었느냐? 어째서 이러한 인간의 실존이 있겠느냐는 헬라적 대답으로 영-영혼,ψυχη-이 타락해서 육-σωμα-속에 갇히게 되었다. 그러므로 구원은 σωμα에 갇힌 ψυχη-ψυχη가 σωμα에 갇힌 것이 타락이다-가 다시 해방이 되어서 Idea의 세계로 귀환하는 것이 구원이라고 한다. 그래서 ψυχη의 σωμα로부터 탈출로 인한 Idea세계로 귀환하는 것이 구원이라고 하는데 이런 것을 객관화하는 극(dramatication)화 해가지고 이것을 헬라 철학,종교서적에 인칭으로 쓰는 경우가 있었다. 근본적으로 ψυχη의 타락과 σωμα로부터 구원이 객관화되고 극화 되는 것이 있는데 이렇게 될 때 이것은 신화적으로 표현될 수 있다. 이런 것이 있다. 그러나 Bultmann이 이야기한데로 이것은 원래 태초의 인간에 대한 Speculation에 의해서 태초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에 태초 인간이 다시 자기 몸을 다 모아가지고 본향으로 올라간다. Bultmann이 재구성한 이런 식은 없다.
헬라의 이런 사상-ψυχη가 뭔가에 갇힌다. ψυχη가 나중에 다시 올라간다.-에서 한 조각 배고 또 고대 문서라든지 등에 Ur-mensch에 대한 Speculation이 없지 않아 있다. 그래서 여기에서 Ur-mensch라는 이름을 빌리고 그리고 창세기에서 아담 빌리고 또 유대교와 동방 종교 연합해 가지고 거기에 보면 영지주의 현상이 2,3세기에 많이 일어났다. 여기에서 또 빌리고 또 나중에 기독교-빌2:1-11까지의 Movement 즉 예수 그리스도가 선재하셨던 분이 성육신하고(내려옴) 다시 높임 받음-적 3단계 구조에 영향을 받아가지고 구원자 신화를 말하는 영지주의가 나중에 있다. 여기서 이 체계를 따지고 해서 Bultmann 이 스스로 조각들을 붙여가지고 만든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전, 신약전 어떤 문서에도 Bultmann이 재구성한 신화는 나오지 않는다. 이것과 조금 비슷한 그림이 나오는 것은 주후 3세기 이후-신약성경에 빌2:6-11까지 같은 선재,성육신,높임의 3단계 기독론의 패턴의 영향을 받은 영지주의에서만 나타난다. 그러니까 시간적으로 영향이 신약성경에서 영지주의로 갔다고 보아야 한다. 영지주의에서 신약성경으로 갔다고 하면 안된다.
그래서 Bultmann의 영지주의 신화론을 철저히 파헤쳐 논 사람이 하나는 베르린 대학의 C.Colpe이고 또 한사람은 H.M.Schenke 또는 스코틀랜드의 R.Mcl wilson 이런 사람이 옳지 않다고 주장해 놓았다. 그래서 신약전체에 영지주의 신화가 없다. 이것은 영지주의를 배격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이다. 또하나 중요한 이유는 지금까지 요약한 것 주에 이상한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Ur-mensch가 타락해서 자기 몸이 암흑세력과 싸워서 산산 조각이 났는데 어떻게 해서 다시 Ur-mensch가 나타나서 자기 몸을 또 모은다는 말인가? 이게 논리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신화라는 것이다. Bultmann의 신화구성에서 조금 잘못되었다. 그래서 원래 Bultmann 영지주의 신화에 근거해서 Bultmann 의 제자들이 전부 신약성경의 모든 기독론,구원론,교회론을 해석하려고 달려들었다. Bultmann의 제자 H.Schlier-나주에 카톨릭으로 전향해 버림-는 에베소서의 교회론-교회를 그리스도의 몸,머리-을 신화로 해석했다.
E.Kasemann은 골로새서,에베소서에 몸,그리스도 몸에 대한 인간론,교회론을 Bultman이 구성한 영지주의 신화에 근거해서 해석할려고 한 것이 박사학위 논문이다. 그리고 E.Kasemann이 교수되는 논문은 히브리서의 기독론과 구원론을 완전히 영지주의 신화에 근거해서 해석했다(히12:2).
이 사람의 영향력있는 논문 두편이 빌2:6-11-그리스도에 대한 찬송시-을 완전히 영지주의신화로 해석한다. 골 1:15-20-그리스도에 대한 찬송시-도 완전히 영지주의 신화로 해석한다. 그는 완전히 자기 선생인 Bultmann 이 재구성한 영지주의 신화로 자기 경력을 쌓은 사람이다. 그런데 그가 1970년에 죄를 회개했다. 이런 것은 다 엉터리이고 잘못되었다고 옥스포드 대학 강연에서 말했다. 문서적으로도 기독교(신약) 전에 이런 것이 있었다는 것도 없고, 구조상으로도 문제가 많다. 그리고 1973년에 로마서 주석을 출판했다. 여기에 보면 영지주의 신화의 문제점을 예리하게 지적해 놓았다. 여기에 보면 Ur-mensch가 산산조각 나 버렸는데 다시 자기 몸을 일으켜 가지고 자기 파편들을 다 모아가지고 구원을 이루느냐? 그것이 도대체 무엇이냐? 자기 몸이 다 조각이 나버렸는데 어떻게 또 나타나 가지고 조각들을 모아서 자기 몸을 이루느냐? 몸이 두개나 되느냐? 하나는 원래 가지고 있도 또 조각을 모아서 그래서 두개나 된다는 것이다. 이 사람 말대로 Sslvadus와 Salvatus의 본질적인 것이다. Salvadus는 구원 하는 사람,Salvatus는 구원받는 사람이다. Bultmann이 구성한 영지주의 신화에 의하면 어떻게 된 것인가?
Ur-mensch가 스스로 타락했기 때문에 스스로 구원받으면서, 구원하는 자라는 말이다. 이것이 어떻게 일치하는가? 이미 자신도 타락해서(져버려서) 구원을 받아야할 입장에 있으면 어덯게 남을 구원하느냐? 그래서 영지주의 대부분의 문제가 첫째로 연대적으로 문제가 있고 둘째로 Bultmann이 재구성한 것에는 구조상 문제가 있다. 그래서 영지주의 신화에 근거해가지고 바울의 아담 기독론을 재해석할려고 하는 다양한 노력들이 있었는데 다 허사였다.
출처 : 잭슨빌 교회개혁포럼
글쓴이 : JaxHopes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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