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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신학 제20강
지난 시간까지 ‘예수가 하나님 형상이다’-I=εικων του θεου-는 인식을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얻었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이 인식은 훈련받은 신학자 바울로 하여금 즉각 두가지를 예수와 더불어 생각할 수 밖에 없다. 하나는 ‘예수가 하나님의 지혜이다’왜 그러냐면 지혜문서에 가령 wisdom of solomon 7:26에 지혜가 하나님의 형상이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Philo의 책 여러 곳에도 지혜가 하나님 형상이라고 한다. 지혜가 하나님 형상이라고 할 때 지혜가 하나님의 계시자라는 뜻이다. 하나님을 보여주는 자라는 말이다. 지난번에 ‘하나님 아들’을 볼때 지혜가 하나님의 속성인데 점차 독립적인 개체로 인격화한다고 했다. 이것의 논리 구조와 이러한 신학적인 의도를 지난번에 설명했다. 그래서 지혜가 창조와 계시와 구원의 중보자이다. 그래서 초월하신 하나님의 내재의 수단인데 그중에 지혜가 하나님의 계시의 중보자-하나님을 보여주는 자-라고 말할 때에 지혜를 하나님 형상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이러한 신학적 전통에 익숙한 바울은 ‘예수가 하나님의 형상이다’ 또 ‘예수가 하나님의 영광’-하나님의 본질의 나타남,본질의 계시상태-을 그 얼굴에 반사하는 자로 나타나므로 예수를 구약신학이 유대신학이 제공하는 언어로 예수의 의미를 설명할 때 ‘예수가 곧 하나님의 지혜이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공부한 고후4:4-8까지는 주로 지혜신학의 반영이다. 또 골 1:15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데 보여주는 이가 지혜라는 말이다. 그런데 예수가 바로 지혜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구약과 유대교의 전승사 속에서 또는 조직신학적 카테고리로 말하면 점진적 계시에서 지혜의 활동이라고 그려진 것이 사실은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환히 드러나 보인다.
완성된 계시에 의해서 볼때 예수의 활동을 불안전한(예비적) 계시에서 하나님의 지혜의 황동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서 지혜의 케테고리를 예숭게 적용했을 때에 유의할 것은 예수가 지혜라 할때에 예수와 지혜를 완전히 identification했다기 보다는 이제 완성된 계시에서 터득한 진리가 과거에 하나님의 구원사에거 지혜의 활동-창조,계시 구원의 중보자 노릇하는 이로서의 지혜활동-이라는것이 사실은 성육신 전에 예수의 활동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성육신 전의 예수의 활도을 과거 구약과 유대교에서는 아직 완성된 계시가 없기 때문에 부분적인 불완전한 계시에서 하나님의 지혜활동으로 깨닫게 되었다.
지혜신학-예수를 하나님의 지혜-에서 이렇게 부르게 되는 데는 ①εικων이 중요한 요인이다.②지난번에 하나님 아들과 관계에서본 바와 같이 Sir24같으데서는 모세 율법이 지혜를 담는 체현으로 보았다. 왜냐하면 지혜가 계시와 구원의 중보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세 율법은 하나님의 뜻의 계시이고 그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얻는 것이다.
그래서 율법이 계시와 구원의 중보자이다. 그래서 이런 지혜문서에거는 모세율법이 하나님의 계시와 구원의 중보자인 지혜를 담고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모세 율법을 공부함으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는 것이다. 지혜의 근본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다’율법을 공부함으로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지혜가 율법에 담겨 있다. 또는 율법이 지혜를 담아서 표현한다고 보았다. 그런데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율법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계시자임을 깨닫고 지혜가 불충분(불완전) 하게 담겨 있던 율법을 예수가 능가하는 분이므로 예수가 바로 지혜의 완전한 표현이다고 해서 예수를 지혜로 말한다. ③예수의 지혜 가르침이다. 이것이 앙식사가들은 공관복음-마11장 23장 그리고 이것의 누가복음 병행절(Q자료)-에서 보면 ‘예수께서 지혜의 사자’임을 나타낸다. 그러나 ③은 바울이 나중에 알았다. 이것은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터득한 진리로서 예수를 지혜로 생각하게 되었을 때에 예수의 지혜 가르침이 바울로 하여금 예수를 지혜로 설명하게 하는데 역사적인 뒷받침을 해준 것이다.
(지혜기독론)
그래서 지혜 기독론이 발생을 했다. 지혜기독론의 중요한 관심이 ‘예수가 하나님의 계시자’라는 말이다. 그래서 앞에서 언급한 골1:15/고후2:4-6까지가 지혜기독론의 표현이다.
1)그러므로 지혜기독론은 결국 예수의 신성을 드러내는 부분이다. 예수가 하나님과 똑같은 형상이다. ‘하나님 형상이다’라는 소리에는 본질보다 못한 모조품이라는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본질 그대로를 드러내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가 하나님 형상으로서 하나님의 본질을 그대로 드러내는 계시하는 분이다. 그래서 지혜기독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천명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2)아담 창1:26⇨새아담(마지막 아담)
‘예수가 하나님 형상이다’라는 깨달음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하나님 형상’으로 보게 됨으로 자연히 바울은 예수를 창 1:26의 아담과 비교 대조하게 되었다. 그래서 랍비들은 아담이 타락하면서 하나님 형상을 잃어보렸다는 것을 꺼려했다. 그러나 거의 이런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하나님 영광-דובכ 곧 δοξα는 εικων과 거의 동의어(고후4:6/고후3:18)-을 잃어버렸다고는 말하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다고는 하지 않는다. 그래서 바울도 롬 3:21에 ‘우리가 다 범죄해서 하나님 영광에 미치지 못했다’ 즉 하나님 영광의 결핍상태에 있다. 그래서 하나님 영광을 잃어버렸다고 한다. 하나님 본질에 참여 못함,신성에 참여하지 못함을 말한다. 그러나 바울도 라비들과 똑같이 ‘우리 인간이 하나님 형상을 다 잃어버린 것이 아니고 계속해서 하나님의 흔적을 가지고 있음을 전제(고전11장)한다. 그래서 고전 11장에서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한다.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라고 한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가 있지만 하여간 남자가 계속 하나님 형상이라고 바울을 불러 줌으로서 랍비들과 언어 사용에 있어서 비슷하다. 그러니까 인간이 완전히 하나님 형상을 일어버린 것은 아니다. 그런데 왜 랍비들이 잃어버렸다고 하지 않느냐면 아마 외적인 모양하고 관계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인간이 하나님 형상이라 할때 적어도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외모의 비슷함인데 아담이 범죄해서 외모가 달라졌다. 유대인들은 아담이 범죄후 여섯가지를 잃어버린 것으로 생각한다. 이 말은 다른 말로 형상을 잃어버리지는 않았지만 형사이 많이 달라져 조금 남았다. 굉장히 소외되고 질적,양적으로 약화되었지만 완전히 잃어버린 것은 아니다. 그래서 바울도 그러한 언어 사용에 충실해서 우리가 범죄하므로 하나님 영광을 잃어버렸다고는 하지만 형상을 잃어버렸다고는 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담이 하나님 형상이다.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아담이 잃어버린 얼굴의 광채-을 되찾음은 고후 4:6에서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반짝인다’ 그러니까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유대 신학에서 아담이 범죄하므로 얼굴에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를 잃어버렸다고 하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형상으로 그 얼굴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를 발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예수가 새 아듬으로서 아담이 잃어버린 하나님 영광을 회복하고 아담에게 축소되고 악화된 하나님 형상이 회복되었다. 그래서 예수를 하나님 형상이라고 고백한다. 그래서 비슷한 점이 옛 인류의 조상-죄와 죽음 아래에 있는 조상-과 새 인류의 조상이다. 이때에 바울이 지금 생각하고 있는 역사관은 ‘종말은 태초의 회복이다’ 그래서 예수가 하나님 형상으로 나타나고 그의 얼굴에 하나님의 영광이 찬란히 빛났다면 그것은 태초의 아담이 가졌던 하나님의 영광과 형상을 회복한 종말의 도래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태초의 아담에 상응하는 예수가 종말의 아담이다. 그래서 바울은 새 아담이라고 하지 않고 마지막 (종말) 아담이라고 부른다. 아담이 첫 인류-옛 인류-의 조상인 것같이 Endzeit(종말)은 Urzeti(태초)와 같다. 종말은 태초와 같다는 역사관에 의해서 마지막 아담은 종말의 인류-새 인류의 조상-의 조상이다. 아담은 어떻게 해서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을 잃어버렸는가?불순종으로 잃어버렸다. 예수는 죽기까지 순종함으로 마지막 아담이 되었다. 그래서 첫 아담은 죄와 죽음 아래 있게 했다. 그래서 첫 아담과 마지막 아담은 Stammvater이다.
첫 아담의 후손들은 전부 그의 불순종으로 연루시켜서 죄와 죽음 아래 있게 했는데 마지막 아담도 종말에 인류의 stammvater이다. 그래서 그의 순종에 참여-믿음으로 참여-하게 해서 그들을 의와 생명을 얻게 했다. 이렇게 아담 기독론을 대조시키고 있다. 마지막 아담에서 구원론이 나온다. 앞에서 말판 지혜기독론에 따른 구원론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하나님을 알게 됨-을 얻음이다. 그런데 아담 기독론에서 나오는 구원론은 우리가 옛 아담의 형상을 입었던 것과 같이 이제 마지막 아담의 형상을 입게 된다(고전15:49). 또는 옛 아담의 형상을 벗어버리고 옛 아담과의 연합(solidarity)에서 벗어나서 마지막 아담과 연합해서 그의 하나님의 형상에 참여하게 됨을 롬8:29에서는 마지막 아담의 형상에 같은 형상이 된다(μοροφουσθαι).하나님 아들의 εικων에 συμ(같은) μορφη(형상)이 된다. 또 고후3:18도 마찬가지이다. ‘그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면서 그의 εικων에로 μεταμορφουσθαι(같은 형상)으로 변화되어 간다. 그래서 앞에서 본 빌 3:21-συμμοροφουσθαι, μεταπορφουσθαι, συσχημασθαι(그의 틀)-도 마찬가지로 같은 틀이 되어간다는 말이다. 이렇게 마지막 아담 예수 그리스도가 회복한 하나님의 형상을 덧 입는 회복하는 것이 곧 구원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구원을 전개한다.
앞에서 말한 εικων에서 나오는 지혜기독론은 예수의 신성을 천명하는 좋은 수단이다. 그런데 형상기독론에서 나오는 아담기독론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천명하는 수단이다. 그래서 나는 주장하기를 ‘칼세돈 이래로의 교회 신학자들이 신약의 기독론에 있어서 예수의 양성론을 어떻게 이해하느냐를 줄곧 토론해왔다 이것은 예수의 신성과 인성의 존재인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가 εικων 이라는 카테고리로 설명할 때에 가장 쉽게 설명이 될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형상이라는 소리에 예수의 신성과 인성이 같이 천명되는 신학언어이다. 칼빈신학교 교수인 A.Hoekma가 ‘그의 형상으로 지음 받음’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아담 기독론이 바울의 구원론에 scafolding(버팀목) 즉 틀을 짜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우리의 대표요 대신이라고 고백하고 그를 믿으면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συν χριστω) 해서 그리스도 안에(εν χριστω) 있게 된다. 그렇게 되어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그리스도의 됨됨(What Christ was) 그리고 그가 어떤 일을 했는가?(What Christ has done)-이 우리에게 적용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됨됨이 되고 우리의 한 일이 된다. 이리하여 그리스도의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짐 곧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대표로 계심으로 말마암아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그리스도 안에 내포되어서 그의 의인됨이 우리의 의인됨이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들됨에 우리가 동참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아들들 되고 그리스도의 하나님 형상 됨이 우리의 하나님 형상됨이다. 그리스도가 하신 일-하나님께 완전한 순종-이 우리의 순종함이 되고 그리스도께서 죄에 대해서 대신 벌받음이 우리의 죄에 대해서 벌받아 버림이다. 그리스도가 하나님 우편에 높임받음이 우리의 높임 받음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죽고 부활했음-이 그리스도와 연합시키고 내포시킨다. 이 말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Stammvater 안에 내포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됨됨-What Christ was?(그가 어떤 분이었는가?)-이 우리의 됨됨이 되고 그가 어떤 일을 하셨는가?-What Christ has done?-가 우리의 하신 일로 하나님이 간주하신다.
믿음-그리스도의 대표성,대신성- ??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함???
(υπερ ημων) What Christ was
What Christ has done
↓
의, 올바른------→우리
위의 표가 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아담됨의 전제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죄은으로서 첫 아담이 우리의 Stammvater로서 우리는 첫 아담이 가지들로서 아담이 어떤 분이었는가가 우리의 어떤 분이고 아담이 한 일이 우리가 한 일이다.
아담과의 solidatrity 속에서 아담에 내포되어서, 아담과 연대해서 우리가 죄와 죽음 아래 있었다. 그런데 이제 그리스도-마지막 아담-를 믿음- 우리가 새 인류의 대표로서, 대신으로서,죽고 부활하심을 믿음-으로 우리가 이 상태-옛 아담-에서 마지막 아담상태로 전가된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그리스도 안에 내포된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됨됨이 우리의 됨됨이 되고 그리스도의 하신 일이 우리의 하신일이 되어서 우리가 그의 의와 하나님 형상과 영광, 그의 생명을 얻게 되었다. 이것이 바울 구원론의 틀이데 결국 아담 기독론에 근거하고 있다. 우리가 옛 아담과 solidarity(연대) 속에서 벗어나서 새 아담의 solidarity(연대)에 들어가므로 새 아담의 운명-자격-에 동참함이 곧 구원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아담 기독론은 스코틀랜드의 M.Black 교수가 잘 표현했듯이 ‘바울의 구원론을 가능케 하는 틀(기본)’이다. 이른바 신학자들이 그리스도와 연합한다는 사상이 그리스도 신비주의-Christ mysticism-이다.
그리스도와 연합해서 그리스도 운명-함께 죽고 부활해서 생명을 얻음-에 동참이다. 다른 말로는 아담기독론의 구원론적인 적용이라고 볼 수있다. 바울에게 있어서 또 하나의 주제는 ‘인간론’24)이다.
σομα문제를 다루면 바울의 교회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독특한 개념인 ‘교회가 그리스도의 옴’이라고 하는 그림이 어디에서 나왔고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다루게 된다. 또 바울신학에 다룰 주제는 ‘종말론’이다.
질문:창1:26에서 아담이 하나님 형상으로 지음받았다는 것에 있어서 도대체 인간이 어떤 면이 하나님 형상이냐? 하나님 형상이라는게 도대체 인간의 무엇을 지칭하는 말이냐?
답:C.Westmann의 책을 읽어보기 바란다. 수십가지 이론이 있다. 아담이 하나님의 대권자로 하나님의 피조물을 통치하려는 왕적 권위를 두고 영광이라고 하는 것도 하나의 이론이다. 또 요새 인기 있는 이론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하나님 형상이라고 한다. C.Westmann의 창세기 주석을 보면 자세히 다루고 있다. 지금까지 제시된 이론이 상호 배타적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다. 또는 아담이 하나님 형상이다 할때에 이모든 의미를 다 함축할 가능성이 많다. 지금가지 책들이 인간이 실존에 있어서 독특성-동물들과 피조물들-을 전부 하나님 형상과 빗대어 생각해볼려고 했다. 이것은 사실 다 하나님 형상이라는의미에 들어 있는지도 모른다. 그 중에 중요한 것 중에 항상 간과되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게 외모의 비슷함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항상 간과되었는데 그 이유는 항상 사람들이 헬라적 이원론으로 생각을 해서 본질과 형상은 달라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현상은 값없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추상화된 것-왕권,하나님을 아는 지식,또는 하나님과 fellowship 할 수 있는 것-만 생각했지 외모에 있어서의 비슷함은 생각안할려고 했다. 그것은 항상 값없는 것으로 낮추었기 때문이다. G.Von Rad 나 J.Barr의 책을 참고하기 바란다.
또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언어가 도대체 어떤 context에서 쓰이냐면 ‘하나님이 나타나는 환상을 보는’ context에서 쓰인다. 이것은 분명히 외모를 두고 한 말이다. 많은 신학자들이 제시한 것과 같이 ‘하나님 형상에 있어더 외모도 한 요소이다’ 이것에서 시작해서 그리스도를 하나님 형상이라고 할 때에 바울은 그리스도의 하나님 형상으로서의 의미(significance)를 설파(해설)한다. 그것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신학적 배경이 제공하는 언어와 범주를 사용해서 설명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바울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신학적인 배경을 구약-하나님의 말씀-계시로 보았다.
그러니까 구약에 하나님의 계시가 제공하는 개념과 범주들로 자기가 새롭게 받은 계시들을 해석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지혜라는 개념 또는 범주와 아담이라는 개념 또는 범주를 예수에게 적용해서 예수의 하나님 형상으로서의 significance를 해설한 것이다. 이것이 한편 지혜기독론이고 아담기독론이라는 것이다. 지혜기독론은 하나님의 계시자로서의 중요성을 들춰내는 것이니까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의 신성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아담기독론은 예수의 인성을 천명하게 하는 수단이다. 그러니까 하나나님의 형상에 들어 있는 다른 의미-왕적 권위-가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지혜 기독론이나 아담기독론에는 이런 의미가 별로 나타나지 않는다. 왕적권위가 아담기독로에 있는지 모르다. 왜 그러냐면 롬8:19‘피조물들이 하나님 아들의 계시를 간절히 기다린다’ 다시 말해 학수 고대한다. γαρ αποκαραδοκια25) 이 명사는 신약성겨에 두번 밖에 안나온다(롬8:19/빌1:20). 여기에서 αποκαραδοκια 는 바울이 피조물에 간절히 바램에 의해 쓴 것이다. 바울이 감옥에서 나가기를 간절히 바란다. 석받되는 것이 빌리보 교인들을 위해서 필요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롬8:19은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 아들들에 계시됨을 기다린다’ 우리들이 하나님 아들로서 완전히 드러나는 계시-종말론적인 개념-의 사건을 간절히 기다린다. 왜 그러냐면 그 때 자신들의 구원이 있기 때문이다. 아담이 피조물의 대표(왕)로서 범죄하므로 피조물이 같이 그 타락에 참여해서 같이 저주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구원도 새 아담-새 인류,하나님 아들들-과 더불어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 하나님 형상인 인간과 하나님 형상으로서 인간이 다스리게 된 창조와의 solidarity를 잘 나타내는 말이다. 그래서 εικων이라는 말에 이런 뜻도 있는지 모른다. 바울은 지금 우리가 마지막 아담에 solidatity 해서 하나님 아들로 그의 형상에 참여한다. 그러니까 로마서 8장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인간들과 피조물의 연대성을 살펴볼 때에 형상기독론에도 이것이 내포되어 있다.
질문:어떤 책에 보니까 ‘하나님의 전 경륜과 내면 속에서 장차 그리스도가 성육신할 그 형상을 아담이 전수받았다고 하는데..’
답:이것은 좋은 착안이다. 그런데 성육신할 형상을 아담이 본 받았다가 아니다. 이것은 불트만 간에 ‘아담과 그리스도’라는 주제로 대 논쟁-롬5:12-24 가지의 주석을 가지고-을 벌였다.
K.Barth는 여기에 대한 주석을 ‘Christus und Adam’ 여기에 대한 대답으로 Bultmann은 ‘Adam und Christus’를 썼다. 여기에서 순서가 중요한 것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원래의 형상이고 아담은 그리스도-하나님 형상-의 모조품-Abid-이다.’ 그러니까 바르트에 의하면 ‘바울신학에서 그리스도는 Urbild-하나님 형상-인데 모든 인간들의 하나님 형상됨의 Ur(원형)이다. 그러니까 아담은 하나님의 원형인 그리스도에 Abild 마찬가지로 아담의 후손들로 Abid라는 말이다.
그래서 시간적으로는 그리스도가 늦게 오는 아담 뒤에 왔지만 사실은 영원한 perspective에 보면 그리스도가 원형이고 아담은 그리스도의 abild라는 것이다. 이것에 대항해서 불트만은 아담이 먼저이고 그리스도가 마지막 아담인데 무슨 소리냐고 하면서 대 논쟁을 벌였다. ‘아담을 첫 아담’ 그리스도를 ‘마지막 아담’ 이러게 놓고 보면 불트만이 맞다. 그러나 일단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인 것을 영원한 경륜 속에서 보면 바르트가 맞다. 그래서 시간 내에서의 먼저 오고 뒤에 온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 가운데 하나님의 아들-삼위일체론적으로 영원히 존재하시는 제2위의 하나님 아들-이 Urbild로서 아담이 abild 였는데 이것에 아담이 충실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성육신 함으로 그리스도가 다시 우리에게 Urbild가 되셔가지고 우리에게 Vorbild가 되신다는 마이다. 그리스도가 Urbild로서 abild 가 나오게 하는 Vorbild라는 말이다26). 질문의 내용이 바로 이러한 관계를 말한다. 그리스도가 비록 시간적으로 아담 뒤에 오지만 (고전15:45) 예수가 영원한 하나님의 형상인 것이다. 이것의 Abild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삼위일체론적으로 영원히 존재하는 제2위이 하나님 아들로서 영원한 하나님의 계시자이다. 이것을 지혜신학에서는 지혜라고 한다. 이것의 모조품이 아담이다. 그런데 아담은 이것에 충실하지 못했다 .예수가 성육신해서 다시 우리에게 자기의 Urbild됨을 보여주어서 우리로 하여금 그를 Vorbild로 해서 그이 Abild가 되도록 했다는 말이다. 이것이 앞서서 말한 구원론적인 언어들이다. 우리가 그의 형상에 같은 모양이 되어 간다는 말이다27).
(바울의 구원론)
바울은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다음과 같은 metaphors(그림)을 동원한다.
Ⅰ.Justification(의인됨)
Ⅱ.Reconciliation(하나님과 화해함)
Ⅲ.Sonship(하나님의 아들로 입양됨)
Ⅳ.New creation(새로운 피조물)-하나님의 형상,영광을 얻음.
이와 같은 그림을 바울이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설명할 때 주로 쓴다. 이 그림들이 전부 바울의 다메섹 도상에서의 체험과 관계가 있다. 특히 이 그림-의인됨,화해함-은 바울만 슨다. 신약성경에 ‘믿음으로 의인됨’은 다른데는 없다. 물론 다른데 ‘의’에 대한 개념들이 나오지만 이런 식으로는 표현하지 않는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인됨’이라는 카테고리로 전개하는 것은 아주 바울적인 것이다. 또 하나님과 화해됨 이것은 죄인을 하나님의 원수-εξθρος-로 지칭한다. 롬5장 같은데서는 하나님과 죄인의 관계를 상호 적대관계-원수의 관계,죄를 하나님께 적대한 행위-로 설명을 하고 그것에 관해서 구원을 하나님과 다시 화해하는 관계로 그린 것은 καταλλαγη-동사로 καταλλασσω-언어는 바울에게만 나오는 것이다(롬5장/고전5장 골1:15-20). 이것이 엡 2장에서는 교회론적으로 확대되어 가지고 그리스도 몸-교회-안에서 이방인들과 서로 상호 원수 되었던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화해해서 하나됨-하나님과 인간이 화해,인류를 갈랐던 두 종류 인간이 하나됨-을 말하고 있다. 이렇게 확대되어서 해석되어지는 아주 중요한 그림인데 이것이 바울의 편지에만 나오는 개념이다. 물론 화해의 그림을 나타낼려고 하는 실제를 나타내는 사상은 다른 신약 책들에도 있다. 특히 예수이 비유 중 탕자의 비유에 잘 나타난다. 또는 예수께서 회개하고 믿음으로 그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 응하는 죄인들과 먹고 마시는 그 행위에 잘 나타난다. 죄인들이 하나님에 의해서 용서되고 그들이 하나님께 화해되어서 그 화해의 잔치 베품은 탕자의비유라든지 예수가 죄인들과 먹고 마시는 예수적 행위에 바울의 화해라는 개념의 실제가 나타나기는 한다.
그러나 그것을 구원론적으로 개념화 한 것은 바울에게만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나는 묻기를 왜 바울이 이와 같은-화해-그림을 개발했는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설명하기 위함이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런 그림을 설명했을까?
이것은 분명히 자기의 다메섹 도상에서의 체험과 관계 있다. 왜 그러냐면 자기가 다메섹 도상에서 구원받고 뒤돌아 보아서 깨달은 것이 자기가 그리스도의 원수로 행한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기를 용서해 주고 자기와의 적대감을 해소하기 위해서 화해를 시켰을 뿐만 아니라 화해의 말을 선포하는 사도적 직분까지 주었다는 것이 고후 5장의 자기 변론이다(고후5:11-21). 이것이 바울의 사도적 자기 변호의 맥락에서 나온 말이다. 고린도교회에 침투한 유대주의자들이 자기들의 정통 유대교 출신임을 내세운다. 그래서 족보를 내세우면서 사실은 그리스도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아브라함에게 한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이니까 이 그리스도인의 구원의 덕을 볼려면 너희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방인들이 할례를 받음으로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것이다. 바울이 이런 것을 받고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의 덕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을 하면서 자신들의 예루살렘교회와의 관계를 자랑하면서 곧 사도들의 추찬장을 내보이면서 자랑을 했다. 그러나 바울은 추천장이 하나도 없다. 뿐만 아니라 교회를 핍박하고 그리스도의 원수 노릇했던 자라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가 다메섹 도상에서 환상을 보았다고 갑자기 사도가 되었다고 까불고 다니는데 사실은 아무것도 없는자라고 말한다.
또 무엇을 자랑했느냐면 성령의 엄청난 체험(고후10-13장)을 이야기했다. 그래서 환상으 ㄹ보고 이적을 행하고 하는 것을 내세우면서 권위주의적으로 행사했다. 이런 것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잘 먹혀 들었다.
그래서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바울이 자기들하고 같이 있을 때는 아굴라 집에서 겨우 천막이나 짓고 했던 사람이 우리에게 감히 헌금으로 부양해달라고 말도 못했는데 에보소로 간 뒤에는 밑에 있는 자들을 시켜서 자꾸 돈 내래고 한다. 이제 보니까 바울이 우리 앞에 권위행사하지 못한게 정식 추천자이 없어서 그랬구나! 우리 있을때는 말도 제대로 못한 친구가 저리로 가서는 편지로 아주 묵직하게 쓴다고 한 것이다.
그러니까 바울이 변호하는 것이다(고후10-13장).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나도 모자라는게 하나도 없다. 족보로 말하면 나도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히브리인중의 히브리인이요 베냠니 지파요 할례로 말하면 나도 팔일만에 할례 받았다. 또 성령의 체험으로 말하면 너희는 하늘의 일층도 못갔지만 나는 삼층까지 갔으며 말할 수 없는 것을 체험했다. 그리고 또 사도의 표징들-기사,이적,권능-도 너희 못지 않게 나도 다 행사했다고 한다28).
그런데 사도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섬기는 자세로 일해야 하기 때문에 나는 너희들을 섬기기만 했는데 그것이 되어서 미안하다고 나 용서해 달라고 아주 냉소적으로 말한다. 그러면서 바울이 ‘내가 매를 들러 오랴’ 그런데 그 중에 추천장 문제로 말하면(고후3장) ‘내가 왜 추천장이 필요하냐’ 여러분들이 나의 추천장이 아닌가 말이다. 나의 복음 선포-사도적 행사-로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았으면 그것이 나의 사도직의 바름 그리고 나의 복음의 바름을 증명하는 가장 좋은 증명이지 무슨 종이에 쓴 추천장이 필요하냐고 바울이 말한다. 이 추천장을 이야기하는 그들은 꼭 유대인들이다. 왜 그러냐면 문자주의자들은 그들이 호소하는 모세 율법이 돌판에 써졌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문자주의만 주장하는데 그것은 문자는 죽이고 영이 살린다. 내가 복음 선포 했는데 그 복음 선포를 성령이 너희에게 강하게 역사해서 우상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받았는데 그 영의 역사가 진짜 추천장이고 그것이 새 언약-영적인 언약-에 합당한 복음 선포이고 사도직의 행사이다. 모세 율법은 사라져가는 영광이라고 한다(고후3장). 그래서 모세가 사라져 가는 영광을 감추기 위해서 수건을 썼다. 그래서 돌판에 수건이 끼워져 있어 가지고 너희들이 아무리 연구해도 모른다. 뿐만 아니라 너희들 마음 속에도 수건이 끼어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예레미야가 새 언약을 예언할 때 그 언약을 돌판에 새기지 않고 ‘마음 속에 새긴다’고 했다. 이렇게 지금 바울이 공박에 대해 대답을 했다. 그러면 과거에 핍박자였다는 공박에 대해서는 바울은 고후 5장에서 말하고 있다. 내가 사실 핍박자였다. 왜 핍박자였는가?(고후5:16). 여기에서 ‘그리스도를 육신대로 안다’는 소리는 역사적 예수를 안 알겠다는 그 소리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육신적인 관점에서 평가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유대교적 메시야 사상을 두고 하는 말이다.
과거에 나도 예수 그리스도를 유대교적 메시야 사상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메시야가 아니었기 때문에 핍박한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이제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가 진짜 메시야임을 하나님으로부터 계시 받은 뒤에는 더 이상 유대교적인 메시야 사상을 갖지 않는다는 말이다. 자꾸 유대 족교,율법을 주자하고 하는 자들은 지금 육신적인 관점에 사로잡힌 자들이라는 것이다. 이것은결코 옳지 않다. 그래서 내가 과거에 핍박자였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여 주셔서 그를 인식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하신 일이 다윗 왕조를 재건하고 한 것이 아니고 우리를 위해서 대속의 죽음을 하는 것이다. 이 사랑의 대속의 죽음에 완전히 녹아버려서 내가 변화되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여기서 ‘우리’라고 나오는 것은 바울의 문제의 특징으로 ‘자기’를 두고 한 소리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옛 죄인이 그의 대속의 죽음에 힘입어서 구원받은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이다. 그래서 옛 것은 다 지나가 버렸다. 더 이상 내 과거를 묻지 말라는 소리이다. 그런데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렇게 다메섹 도상에서 핍박자요 원수된 나를 용서해주고 새 피조물이 되게 하고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서 죽은 그 사랑으로 나를 녹인 하나님이 이제 나를 자기에게 화해시킬 뿐 아니라 화해의 말씀을 선포하는 사도직까지 주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의 전권대사(사도)로 하나님 대신, 사람들에게 더 이상 원수노릇하지 말고-내가 옛날 바리새 시대에 그랬듯이-그리스도를 통해서 화해 되어가고 호소하는 자가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고후5:11-21은 구구절절이 바울의 다메섹 도상의 체험을 반영하고 있다. 여기에서 나오는 카테고리가 화해라는 것이다.
출처 : 잭슨빌 교회개혁포럼
글쓴이 : JaxHopes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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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까지 ‘예수가 하나님 형상이다’-I=εικων του θεου-는 인식을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얻었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이 인식은 훈련받은 신학자 바울로 하여금 즉각 두가지를 예수와 더불어 생각할 수 밖에 없다. 하나는 ‘예수가 하나님의 지혜이다’왜 그러냐면 지혜문서에 가령 wisdom of solomon 7:26에 지혜가 하나님의 형상이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Philo의 책 여러 곳에도 지혜가 하나님 형상이라고 한다. 지혜가 하나님 형상이라고 할 때 지혜가 하나님의 계시자라는 뜻이다. 하나님을 보여주는 자라는 말이다. 지난번에 ‘하나님 아들’을 볼때 지혜가 하나님의 속성인데 점차 독립적인 개체로 인격화한다고 했다. 이것의 논리 구조와 이러한 신학적인 의도를 지난번에 설명했다. 그래서 지혜가 창조와 계시와 구원의 중보자이다. 그래서 초월하신 하나님의 내재의 수단인데 그중에 지혜가 하나님의 계시의 중보자-하나님을 보여주는 자-라고 말할 때에 지혜를 하나님 형상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이러한 신학적 전통에 익숙한 바울은 ‘예수가 하나님의 형상이다’ 또 ‘예수가 하나님의 영광’-하나님의 본질의 나타남,본질의 계시상태-을 그 얼굴에 반사하는 자로 나타나므로 예수를 구약신학이 유대신학이 제공하는 언어로 예수의 의미를 설명할 때 ‘예수가 곧 하나님의 지혜이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공부한 고후4:4-8까지는 주로 지혜신학의 반영이다. 또 골 1:15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데 보여주는 이가 지혜라는 말이다. 그런데 예수가 바로 지혜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구약과 유대교의 전승사 속에서 또는 조직신학적 카테고리로 말하면 점진적 계시에서 지혜의 활동이라고 그려진 것이 사실은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환히 드러나 보인다.
완성된 계시에 의해서 볼때 예수의 활동을 불안전한(예비적) 계시에서 하나님의 지혜의 황동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서 지혜의 케테고리를 예숭게 적용했을 때에 유의할 것은 예수가 지혜라 할때에 예수와 지혜를 완전히 identification했다기 보다는 이제 완성된 계시에서 터득한 진리가 과거에 하나님의 구원사에거 지혜의 활동-창조,계시 구원의 중보자 노릇하는 이로서의 지혜활동-이라는것이 사실은 성육신 전에 예수의 활동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성육신 전의 예수의 활도을 과거 구약과 유대교에서는 아직 완성된 계시가 없기 때문에 부분적인 불완전한 계시에서 하나님의 지혜활동으로 깨닫게 되었다.
지혜신학-예수를 하나님의 지혜-에서 이렇게 부르게 되는 데는 ①εικων이 중요한 요인이다.②지난번에 하나님 아들과 관계에서본 바와 같이 Sir24같으데서는 모세 율법이 지혜를 담는 체현으로 보았다. 왜냐하면 지혜가 계시와 구원의 중보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세 율법은 하나님의 뜻의 계시이고 그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얻는 것이다.
그래서 율법이 계시와 구원의 중보자이다. 그래서 이런 지혜문서에거는 모세율법이 하나님의 계시와 구원의 중보자인 지혜를 담고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모세 율법을 공부함으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는 것이다. 지혜의 근본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다’율법을 공부함으로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지혜가 율법에 담겨 있다. 또는 율법이 지혜를 담아서 표현한다고 보았다. 그런데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율법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계시자임을 깨닫고 지혜가 불충분(불완전) 하게 담겨 있던 율법을 예수가 능가하는 분이므로 예수가 바로 지혜의 완전한 표현이다고 해서 예수를 지혜로 말한다. ③예수의 지혜 가르침이다. 이것이 앙식사가들은 공관복음-마11장 23장 그리고 이것의 누가복음 병행절(Q자료)-에서 보면 ‘예수께서 지혜의 사자’임을 나타낸다. 그러나 ③은 바울이 나중에 알았다. 이것은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터득한 진리로서 예수를 지혜로 생각하게 되었을 때에 예수의 지혜 가르침이 바울로 하여금 예수를 지혜로 설명하게 하는데 역사적인 뒷받침을 해준 것이다.
(지혜기독론)
그래서 지혜 기독론이 발생을 했다. 지혜기독론의 중요한 관심이 ‘예수가 하나님의 계시자’라는 말이다. 그래서 앞에서 언급한 골1:15/고후2:4-6까지가 지혜기독론의 표현이다.
1)그러므로 지혜기독론은 결국 예수의 신성을 드러내는 부분이다. 예수가 하나님과 똑같은 형상이다. ‘하나님 형상이다’라는 소리에는 본질보다 못한 모조품이라는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본질 그대로를 드러내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가 하나님 형상으로서 하나님의 본질을 그대로 드러내는 계시하는 분이다. 그래서 지혜기독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천명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2)아담 창1:26⇨새아담(마지막 아담)
‘예수가 하나님 형상이다’라는 깨달음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하나님 형상’으로 보게 됨으로 자연히 바울은 예수를 창 1:26의 아담과 비교 대조하게 되었다. 그래서 랍비들은 아담이 타락하면서 하나님 형상을 잃어보렸다는 것을 꺼려했다. 그러나 거의 이런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하나님 영광-דובכ 곧 δοξα는 εικων과 거의 동의어(고후4:6/고후3:18)-을 잃어버렸다고는 말하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다고는 하지 않는다. 그래서 바울도 롬 3:21에 ‘우리가 다 범죄해서 하나님 영광에 미치지 못했다’ 즉 하나님 영광의 결핍상태에 있다. 그래서 하나님 영광을 잃어버렸다고 한다. 하나님 본질에 참여 못함,신성에 참여하지 못함을 말한다. 그러나 바울도 라비들과 똑같이 ‘우리 인간이 하나님 형상을 다 잃어버린 것이 아니고 계속해서 하나님의 흔적을 가지고 있음을 전제(고전11장)한다. 그래서 고전 11장에서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한다.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라고 한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가 있지만 하여간 남자가 계속 하나님 형상이라고 바울을 불러 줌으로서 랍비들과 언어 사용에 있어서 비슷하다. 그러니까 인간이 완전히 하나님 형상을 일어버린 것은 아니다. 그런데 왜 랍비들이 잃어버렸다고 하지 않느냐면 아마 외적인 모양하고 관계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인간이 하나님 형상이라 할때 적어도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외모의 비슷함인데 아담이 범죄해서 외모가 달라졌다. 유대인들은 아담이 범죄후 여섯가지를 잃어버린 것으로 생각한다. 이 말은 다른 말로 형상을 잃어버리지는 않았지만 형사이 많이 달라져 조금 남았다. 굉장히 소외되고 질적,양적으로 약화되었지만 완전히 잃어버린 것은 아니다. 그래서 바울도 그러한 언어 사용에 충실해서 우리가 범죄하므로 하나님 영광을 잃어버렸다고는 하지만 형상을 잃어버렸다고는 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담이 하나님 형상이다.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아담이 잃어버린 얼굴의 광채-을 되찾음은 고후 4:6에서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반짝인다’ 그러니까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유대 신학에서 아담이 범죄하므로 얼굴에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를 잃어버렸다고 하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형상으로 그 얼굴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를 발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예수가 새 아듬으로서 아담이 잃어버린 하나님 영광을 회복하고 아담에게 축소되고 악화된 하나님 형상이 회복되었다. 그래서 예수를 하나님 형상이라고 고백한다. 그래서 비슷한 점이 옛 인류의 조상-죄와 죽음 아래에 있는 조상-과 새 인류의 조상이다. 이때에 바울이 지금 생각하고 있는 역사관은 ‘종말은 태초의 회복이다’ 그래서 예수가 하나님 형상으로 나타나고 그의 얼굴에 하나님의 영광이 찬란히 빛났다면 그것은 태초의 아담이 가졌던 하나님의 영광과 형상을 회복한 종말의 도래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태초의 아담에 상응하는 예수가 종말의 아담이다. 그래서 바울은 새 아담이라고 하지 않고 마지막 (종말) 아담이라고 부른다. 아담이 첫 인류-옛 인류-의 조상인 것같이 Endzeit(종말)은 Urzeti(태초)와 같다. 종말은 태초와 같다는 역사관에 의해서 마지막 아담은 종말의 인류-새 인류의 조상-의 조상이다. 아담은 어떻게 해서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을 잃어버렸는가?불순종으로 잃어버렸다. 예수는 죽기까지 순종함으로 마지막 아담이 되었다. 그래서 첫 아담은 죄와 죽음 아래 있게 했다. 그래서 첫 아담과 마지막 아담은 Stammvater이다.
첫 아담의 후손들은 전부 그의 불순종으로 연루시켜서 죄와 죽음 아래 있게 했는데 마지막 아담도 종말에 인류의 stammvater이다. 그래서 그의 순종에 참여-믿음으로 참여-하게 해서 그들을 의와 생명을 얻게 했다. 이렇게 아담 기독론을 대조시키고 있다. 마지막 아담에서 구원론이 나온다. 앞에서 말판 지혜기독론에 따른 구원론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하나님을 알게 됨-을 얻음이다. 그런데 아담 기독론에서 나오는 구원론은 우리가 옛 아담의 형상을 입었던 것과 같이 이제 마지막 아담의 형상을 입게 된다(고전15:49). 또는 옛 아담의 형상을 벗어버리고 옛 아담과의 연합(solidarity)에서 벗어나서 마지막 아담과 연합해서 그의 하나님의 형상에 참여하게 됨을 롬8:29에서는 마지막 아담의 형상에 같은 형상이 된다(μοροφουσθαι).하나님 아들의 εικων에 συμ(같은) μορφη(형상)이 된다. 또 고후3:18도 마찬가지이다. ‘그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면서 그의 εικων에로 μεταμορφουσθαι(같은 형상)으로 변화되어 간다. 그래서 앞에서 본 빌 3:21-συμμοροφουσθαι, μεταπορφουσθαι, συσχημασθαι(그의 틀)-도 마찬가지로 같은 틀이 되어간다는 말이다. 이렇게 마지막 아담 예수 그리스도가 회복한 하나님의 형상을 덧 입는 회복하는 것이 곧 구원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구원을 전개한다.
앞에서 말한 εικων에서 나오는 지혜기독론은 예수의 신성을 천명하는 좋은 수단이다. 그런데 형상기독론에서 나오는 아담기독론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천명하는 수단이다. 그래서 나는 주장하기를 ‘칼세돈 이래로의 교회 신학자들이 신약의 기독론에 있어서 예수의 양성론을 어떻게 이해하느냐를 줄곧 토론해왔다 이것은 예수의 신성과 인성의 존재인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가 εικων 이라는 카테고리로 설명할 때에 가장 쉽게 설명이 될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형상이라는 소리에 예수의 신성과 인성이 같이 천명되는 신학언어이다. 칼빈신학교 교수인 A.Hoekma가 ‘그의 형상으로 지음 받음’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아담 기독론이 바울의 구원론에 scafolding(버팀목) 즉 틀을 짜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우리의 대표요 대신이라고 고백하고 그를 믿으면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συν χριστω) 해서 그리스도 안에(εν χριστω) 있게 된다. 그렇게 되어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그리스도의 됨됨(What Christ was) 그리고 그가 어떤 일을 했는가?(What Christ has done)-이 우리에게 적용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됨됨이 되고 우리의 한 일이 된다. 이리하여 그리스도의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짐 곧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대표로 계심으로 말마암아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그리스도 안에 내포되어서 그의 의인됨이 우리의 의인됨이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들됨에 우리가 동참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아들들 되고 그리스도의 하나님 형상 됨이 우리의 하나님 형상됨이다. 그리스도가 하신 일-하나님께 완전한 순종-이 우리의 순종함이 되고 그리스도께서 죄에 대해서 대신 벌받음이 우리의 죄에 대해서 벌받아 버림이다. 그리스도가 하나님 우편에 높임받음이 우리의 높임 받음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죽고 부활했음-이 그리스도와 연합시키고 내포시킨다. 이 말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Stammvater 안에 내포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됨됨-What Christ was?(그가 어떤 분이었는가?)-이 우리의 됨됨이 되고 그가 어떤 일을 하셨는가?-What Christ has done?-가 우리의 하신 일로 하나님이 간주하신다.
믿음-그리스도의 대표성,대신성- ??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함???
(υπερ ημων) What Christ was
What Christ has done
↓
의, 올바른------→우리
위의 표가 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아담됨의 전제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죄은으로서 첫 아담이 우리의 Stammvater로서 우리는 첫 아담이 가지들로서 아담이 어떤 분이었는가가 우리의 어떤 분이고 아담이 한 일이 우리가 한 일이다.
아담과의 solidatrity 속에서 아담에 내포되어서, 아담과 연대해서 우리가 죄와 죽음 아래 있었다. 그런데 이제 그리스도-마지막 아담-를 믿음- 우리가 새 인류의 대표로서, 대신으로서,죽고 부활하심을 믿음-으로 우리가 이 상태-옛 아담-에서 마지막 아담상태로 전가된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그리스도 안에 내포된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됨됨이 우리의 됨됨이 되고 그리스도의 하신 일이 우리의 하신일이 되어서 우리가 그의 의와 하나님 형상과 영광, 그의 생명을 얻게 되었다. 이것이 바울 구원론의 틀이데 결국 아담 기독론에 근거하고 있다. 우리가 옛 아담과 solidarity(연대) 속에서 벗어나서 새 아담의 solidarity(연대)에 들어가므로 새 아담의 운명-자격-에 동참함이 곧 구원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아담 기독론은 스코틀랜드의 M.Black 교수가 잘 표현했듯이 ‘바울의 구원론을 가능케 하는 틀(기본)’이다. 이른바 신학자들이 그리스도와 연합한다는 사상이 그리스도 신비주의-Christ mysticism-이다.
그리스도와 연합해서 그리스도 운명-함께 죽고 부활해서 생명을 얻음-에 동참이다. 다른 말로는 아담기독론의 구원론적인 적용이라고 볼 수있다. 바울에게 있어서 또 하나의 주제는 ‘인간론’24)이다.
σομα문제를 다루면 바울의 교회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독특한 개념인 ‘교회가 그리스도의 옴’이라고 하는 그림이 어디에서 나왔고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다루게 된다. 또 바울신학에 다룰 주제는 ‘종말론’이다.
질문:창1:26에서 아담이 하나님 형상으로 지음받았다는 것에 있어서 도대체 인간이 어떤 면이 하나님 형상이냐? 하나님 형상이라는게 도대체 인간의 무엇을 지칭하는 말이냐?
답:C.Westmann의 책을 읽어보기 바란다. 수십가지 이론이 있다. 아담이 하나님의 대권자로 하나님의 피조물을 통치하려는 왕적 권위를 두고 영광이라고 하는 것도 하나의 이론이다. 또 요새 인기 있는 이론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하나님 형상이라고 한다. C.Westmann의 창세기 주석을 보면 자세히 다루고 있다. 지금까지 제시된 이론이 상호 배타적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다. 또는 아담이 하나님 형상이다 할때에 이모든 의미를 다 함축할 가능성이 많다. 지금가지 책들이 인간이 실존에 있어서 독특성-동물들과 피조물들-을 전부 하나님 형상과 빗대어 생각해볼려고 했다. 이것은 사실 다 하나님 형상이라는의미에 들어 있는지도 모른다. 그 중에 중요한 것 중에 항상 간과되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게 외모의 비슷함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항상 간과되었는데 그 이유는 항상 사람들이 헬라적 이원론으로 생각을 해서 본질과 형상은 달라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현상은 값없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추상화된 것-왕권,하나님을 아는 지식,또는 하나님과 fellowship 할 수 있는 것-만 생각했지 외모에 있어서의 비슷함은 생각안할려고 했다. 그것은 항상 값없는 것으로 낮추었기 때문이다. G.Von Rad 나 J.Barr의 책을 참고하기 바란다.
또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언어가 도대체 어떤 context에서 쓰이냐면 ‘하나님이 나타나는 환상을 보는’ context에서 쓰인다. 이것은 분명히 외모를 두고 한 말이다. 많은 신학자들이 제시한 것과 같이 ‘하나님 형상에 있어더 외모도 한 요소이다’ 이것에서 시작해서 그리스도를 하나님 형상이라고 할 때에 바울은 그리스도의 하나님 형상으로서의 의미(significance)를 설파(해설)한다. 그것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신학적 배경이 제공하는 언어와 범주를 사용해서 설명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바울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신학적인 배경을 구약-하나님의 말씀-계시로 보았다.
그러니까 구약에 하나님의 계시가 제공하는 개념과 범주들로 자기가 새롭게 받은 계시들을 해석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지혜라는 개념 또는 범주와 아담이라는 개념 또는 범주를 예수에게 적용해서 예수의 하나님 형상으로서의 significance를 해설한 것이다. 이것이 한편 지혜기독론이고 아담기독론이라는 것이다. 지혜기독론은 하나님의 계시자로서의 중요성을 들춰내는 것이니까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의 신성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아담기독론은 예수의 인성을 천명하게 하는 수단이다. 그러니까 하나나님의 형상에 들어 있는 다른 의미-왕적 권위-가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지혜 기독론이나 아담기독론에는 이런 의미가 별로 나타나지 않는다. 왕적권위가 아담기독로에 있는지 모르다. 왜 그러냐면 롬8:19‘피조물들이 하나님 아들의 계시를 간절히 기다린다’ 다시 말해 학수 고대한다. γαρ αποκαραδοκια25) 이 명사는 신약성겨에 두번 밖에 안나온다(롬8:19/빌1:20). 여기에서 αποκαραδοκια 는 바울이 피조물에 간절히 바램에 의해 쓴 것이다. 바울이 감옥에서 나가기를 간절히 바란다. 석받되는 것이 빌리보 교인들을 위해서 필요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롬8:19은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 아들들에 계시됨을 기다린다’ 우리들이 하나님 아들로서 완전히 드러나는 계시-종말론적인 개념-의 사건을 간절히 기다린다. 왜 그러냐면 그 때 자신들의 구원이 있기 때문이다. 아담이 피조물의 대표(왕)로서 범죄하므로 피조물이 같이 그 타락에 참여해서 같이 저주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구원도 새 아담-새 인류,하나님 아들들-과 더불어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 하나님 형상인 인간과 하나님 형상으로서 인간이 다스리게 된 창조와의 solidarity를 잘 나타내는 말이다. 그래서 εικων이라는 말에 이런 뜻도 있는지 모른다. 바울은 지금 우리가 마지막 아담에 solidatity 해서 하나님 아들로 그의 형상에 참여한다. 그러니까 로마서 8장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인간들과 피조물의 연대성을 살펴볼 때에 형상기독론에도 이것이 내포되어 있다.
질문:어떤 책에 보니까 ‘하나님의 전 경륜과 내면 속에서 장차 그리스도가 성육신할 그 형상을 아담이 전수받았다고 하는데..’
답:이것은 좋은 착안이다. 그런데 성육신할 형상을 아담이 본 받았다가 아니다. 이것은 불트만 간에 ‘아담과 그리스도’라는 주제로 대 논쟁-롬5:12-24 가지의 주석을 가지고-을 벌였다.
K.Barth는 여기에 대한 주석을 ‘Christus und Adam’ 여기에 대한 대답으로 Bultmann은 ‘Adam und Christus’를 썼다. 여기에서 순서가 중요한 것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원래의 형상이고 아담은 그리스도-하나님 형상-의 모조품-Abid-이다.’ 그러니까 바르트에 의하면 ‘바울신학에서 그리스도는 Urbild-하나님 형상-인데 모든 인간들의 하나님 형상됨의 Ur(원형)이다. 그러니까 아담은 하나님의 원형인 그리스도에 Abild 마찬가지로 아담의 후손들로 Abid라는 말이다.
그래서 시간적으로는 그리스도가 늦게 오는 아담 뒤에 왔지만 사실은 영원한 perspective에 보면 그리스도가 원형이고 아담은 그리스도의 abild라는 것이다. 이것에 대항해서 불트만은 아담이 먼저이고 그리스도가 마지막 아담인데 무슨 소리냐고 하면서 대 논쟁을 벌였다. ‘아담을 첫 아담’ 그리스도를 ‘마지막 아담’ 이러게 놓고 보면 불트만이 맞다. 그러나 일단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인 것을 영원한 경륜 속에서 보면 바르트가 맞다. 그래서 시간 내에서의 먼저 오고 뒤에 온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 가운데 하나님의 아들-삼위일체론적으로 영원히 존재하시는 제2위의 하나님 아들-이 Urbild로서 아담이 abild 였는데 이것에 아담이 충실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성육신 함으로 그리스도가 다시 우리에게 Urbild가 되셔가지고 우리에게 Vorbild가 되신다는 마이다. 그리스도가 Urbild로서 abild 가 나오게 하는 Vorbild라는 말이다26). 질문의 내용이 바로 이러한 관계를 말한다. 그리스도가 비록 시간적으로 아담 뒤에 오지만 (고전15:45) 예수가 영원한 하나님의 형상인 것이다. 이것의 Abild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삼위일체론적으로 영원히 존재하는 제2위이 하나님 아들로서 영원한 하나님의 계시자이다. 이것을 지혜신학에서는 지혜라고 한다. 이것의 모조품이 아담이다. 그런데 아담은 이것에 충실하지 못했다 .예수가 성육신해서 다시 우리에게 자기의 Urbild됨을 보여주어서 우리로 하여금 그를 Vorbild로 해서 그이 Abild가 되도록 했다는 말이다. 이것이 앞서서 말한 구원론적인 언어들이다. 우리가 그의 형상에 같은 모양이 되어 간다는 말이다27).
(바울의 구원론)
바울은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다음과 같은 metaphors(그림)을 동원한다.
Ⅰ.Justification(의인됨)
Ⅱ.Reconciliation(하나님과 화해함)
Ⅲ.Sonship(하나님의 아들로 입양됨)
Ⅳ.New creation(새로운 피조물)-하나님의 형상,영광을 얻음.
이와 같은 그림을 바울이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설명할 때 주로 쓴다. 이 그림들이 전부 바울의 다메섹 도상에서의 체험과 관계가 있다. 특히 이 그림-의인됨,화해함-은 바울만 슨다. 신약성경에 ‘믿음으로 의인됨’은 다른데는 없다. 물론 다른데 ‘의’에 대한 개념들이 나오지만 이런 식으로는 표현하지 않는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인됨’이라는 카테고리로 전개하는 것은 아주 바울적인 것이다. 또 하나님과 화해됨 이것은 죄인을 하나님의 원수-εξθρος-로 지칭한다. 롬5장 같은데서는 하나님과 죄인의 관계를 상호 적대관계-원수의 관계,죄를 하나님께 적대한 행위-로 설명을 하고 그것에 관해서 구원을 하나님과 다시 화해하는 관계로 그린 것은 καταλλαγη-동사로 καταλλασσω-언어는 바울에게만 나오는 것이다(롬5장/고전5장 골1:15-20). 이것이 엡 2장에서는 교회론적으로 확대되어 가지고 그리스도 몸-교회-안에서 이방인들과 서로 상호 원수 되었던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화해해서 하나됨-하나님과 인간이 화해,인류를 갈랐던 두 종류 인간이 하나됨-을 말하고 있다. 이렇게 확대되어서 해석되어지는 아주 중요한 그림인데 이것이 바울의 편지에만 나오는 개념이다. 물론 화해의 그림을 나타낼려고 하는 실제를 나타내는 사상은 다른 신약 책들에도 있다. 특히 예수이 비유 중 탕자의 비유에 잘 나타난다. 또는 예수께서 회개하고 믿음으로 그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 응하는 죄인들과 먹고 마시는 그 행위에 잘 나타난다. 죄인들이 하나님에 의해서 용서되고 그들이 하나님께 화해되어서 그 화해의 잔치 베품은 탕자의비유라든지 예수가 죄인들과 먹고 마시는 예수적 행위에 바울의 화해라는 개념의 실제가 나타나기는 한다.
그러나 그것을 구원론적으로 개념화 한 것은 바울에게만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나는 묻기를 왜 바울이 이와 같은-화해-그림을 개발했는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설명하기 위함이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런 그림을 설명했을까?
이것은 분명히 자기의 다메섹 도상에서의 체험과 관계 있다. 왜 그러냐면 자기가 다메섹 도상에서 구원받고 뒤돌아 보아서 깨달은 것이 자기가 그리스도의 원수로 행한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기를 용서해 주고 자기와의 적대감을 해소하기 위해서 화해를 시켰을 뿐만 아니라 화해의 말을 선포하는 사도적 직분까지 주었다는 것이 고후 5장의 자기 변론이다(고후5:11-21). 이것이 바울의 사도적 자기 변호의 맥락에서 나온 말이다. 고린도교회에 침투한 유대주의자들이 자기들의 정통 유대교 출신임을 내세운다. 그래서 족보를 내세우면서 사실은 그리스도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아브라함에게 한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이니까 이 그리스도인의 구원의 덕을 볼려면 너희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방인들이 할례를 받음으로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것이다. 바울이 이런 것을 받고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의 덕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을 하면서 자신들의 예루살렘교회와의 관계를 자랑하면서 곧 사도들의 추찬장을 내보이면서 자랑을 했다. 그러나 바울은 추천장이 하나도 없다. 뿐만 아니라 교회를 핍박하고 그리스도의 원수 노릇했던 자라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가 다메섹 도상에서 환상을 보았다고 갑자기 사도가 되었다고 까불고 다니는데 사실은 아무것도 없는자라고 말한다.
또 무엇을 자랑했느냐면 성령의 엄청난 체험(고후10-13장)을 이야기했다. 그래서 환상으 ㄹ보고 이적을 행하고 하는 것을 내세우면서 권위주의적으로 행사했다. 이런 것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잘 먹혀 들었다.
그래서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바울이 자기들하고 같이 있을 때는 아굴라 집에서 겨우 천막이나 짓고 했던 사람이 우리에게 감히 헌금으로 부양해달라고 말도 못했는데 에보소로 간 뒤에는 밑에 있는 자들을 시켜서 자꾸 돈 내래고 한다. 이제 보니까 바울이 우리 앞에 권위행사하지 못한게 정식 추천자이 없어서 그랬구나! 우리 있을때는 말도 제대로 못한 친구가 저리로 가서는 편지로 아주 묵직하게 쓴다고 한 것이다.
그러니까 바울이 변호하는 것이다(고후10-13장).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나도 모자라는게 하나도 없다. 족보로 말하면 나도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히브리인중의 히브리인이요 베냠니 지파요 할례로 말하면 나도 팔일만에 할례 받았다. 또 성령의 체험으로 말하면 너희는 하늘의 일층도 못갔지만 나는 삼층까지 갔으며 말할 수 없는 것을 체험했다. 그리고 또 사도의 표징들-기사,이적,권능-도 너희 못지 않게 나도 다 행사했다고 한다28).
그런데 사도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섬기는 자세로 일해야 하기 때문에 나는 너희들을 섬기기만 했는데 그것이 되어서 미안하다고 나 용서해 달라고 아주 냉소적으로 말한다. 그러면서 바울이 ‘내가 매를 들러 오랴’ 그런데 그 중에 추천장 문제로 말하면(고후3장) ‘내가 왜 추천장이 필요하냐’ 여러분들이 나의 추천장이 아닌가 말이다. 나의 복음 선포-사도적 행사-로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았으면 그것이 나의 사도직의 바름 그리고 나의 복음의 바름을 증명하는 가장 좋은 증명이지 무슨 종이에 쓴 추천장이 필요하냐고 바울이 말한다. 이 추천장을 이야기하는 그들은 꼭 유대인들이다. 왜 그러냐면 문자주의자들은 그들이 호소하는 모세 율법이 돌판에 써졌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문자주의만 주장하는데 그것은 문자는 죽이고 영이 살린다. 내가 복음 선포 했는데 그 복음 선포를 성령이 너희에게 강하게 역사해서 우상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받았는데 그 영의 역사가 진짜 추천장이고 그것이 새 언약-영적인 언약-에 합당한 복음 선포이고 사도직의 행사이다. 모세 율법은 사라져가는 영광이라고 한다(고후3장). 그래서 모세가 사라져 가는 영광을 감추기 위해서 수건을 썼다. 그래서 돌판에 수건이 끼워져 있어 가지고 너희들이 아무리 연구해도 모른다. 뿐만 아니라 너희들 마음 속에도 수건이 끼어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예레미야가 새 언약을 예언할 때 그 언약을 돌판에 새기지 않고 ‘마음 속에 새긴다’고 했다. 이렇게 지금 바울이 공박에 대해 대답을 했다. 그러면 과거에 핍박자였다는 공박에 대해서는 바울은 고후 5장에서 말하고 있다. 내가 사실 핍박자였다. 왜 핍박자였는가?(고후5:16). 여기에서 ‘그리스도를 육신대로 안다’는 소리는 역사적 예수를 안 알겠다는 그 소리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육신적인 관점에서 평가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유대교적 메시야 사상을 두고 하는 말이다.
과거에 나도 예수 그리스도를 유대교적 메시야 사상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메시야가 아니었기 때문에 핍박한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이제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가 진짜 메시야임을 하나님으로부터 계시 받은 뒤에는 더 이상 유대교적인 메시야 사상을 갖지 않는다는 말이다. 자꾸 유대 족교,율법을 주자하고 하는 자들은 지금 육신적인 관점에 사로잡힌 자들이라는 것이다. 이것은결코 옳지 않다. 그래서 내가 과거에 핍박자였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여 주셔서 그를 인식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하신 일이 다윗 왕조를 재건하고 한 것이 아니고 우리를 위해서 대속의 죽음을 하는 것이다. 이 사랑의 대속의 죽음에 완전히 녹아버려서 내가 변화되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여기서 ‘우리’라고 나오는 것은 바울의 문제의 특징으로 ‘자기’를 두고 한 소리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옛 죄인이 그의 대속의 죽음에 힘입어서 구원받은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이다. 그래서 옛 것은 다 지나가 버렸다. 더 이상 내 과거를 묻지 말라는 소리이다. 그런데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렇게 다메섹 도상에서 핍박자요 원수된 나를 용서해주고 새 피조물이 되게 하고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서 죽은 그 사랑으로 나를 녹인 하나님이 이제 나를 자기에게 화해시킬 뿐 아니라 화해의 말씀을 선포하는 사도직까지 주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의 전권대사(사도)로 하나님 대신, 사람들에게 더 이상 원수노릇하지 말고-내가 옛날 바리새 시대에 그랬듯이-그리스도를 통해서 화해 되어가고 호소하는 자가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고후5:11-21은 구구절절이 바울의 다메섹 도상의 체험을 반영하고 있다. 여기에서 나오는 카테고리가 화해라는 것이다.
출처 : 잭슨빌 교회개혁포럼
글쓴이 : JaxHopes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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