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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엡 6:1-3)

by 【고동엽】 2021. 1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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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엡 6:1-3)  

오늘은 어버이주일입니다. 특별한 경우를 빼고 온 천하의 부모들은 자식들이 부모를 인정하고 고마워할 때 감격하게 될 것입니다. 저도 역시 오늘 아침에 일어나 컴퓨터를 켜니 큰 아이의 편지가 도착해 있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가장 먼저 보라고 시간을 맞추어서 보낸 것 같습니다. 내용은 이런 것입니다. 어릴 적에는 무척 가까웠는데 자랄 적에는 새벽에 가서 잠들면 들어와 멀어진 것 같다가 이제 좀 더 크니 마음이 이해되고 더 가깝게 느낀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밖의 어버이날에 대한 쓸 수 있는 이러저러한 문구들이 늘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누구나 사용하는 이러한 문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흔한 내용이 특별한 의미로 와 닿는 것은 마음에 사랑함이 있기 때문이라 생각을 합니다.

또한 저는 2년 전에 어머니께서 하늘나라에 가셔서 기쁘게 해드릴 육신의 부모가 안계시다는 생각과 그러나 섬겨드릴 교회의 많은 어머님과 아버님이 계시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며 감사했습니다. 아마 여기 계신 분들은 본인이 자녀이면서 또한 본인이 부모인 분들이 많을 것이라 생각을 합니다. 자식의 평범한 인사 한마디에도 감격하는 것이 부모입니다. 자식을 세워주지 못해서 안타까워하는 것이 부모이고 혹시라도 자식의 몸이 아플까 걱정하며 염려하는 것이 부모입니다. 남들에게 자식을 자랑하고 싶어하는 것이 부모의 생각이라는 것을 우리가 생각하게 되면 자식된 도리로서 지나온 시간들이 송구하고 또 아련해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이제는 우리 모두가 자식된 도리로서 특별히 부모님께 대한 우리의 섬김의 마음을 이 시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특별히 부모님이 안 계신다면 우리 모든 주변의 부모님들이 우리의 부모님이니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섬김을 다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라 생각을 합니다. 특별히 오늘 성경에서는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부모님께 순종하고 나아가서 공경하면 하나님의 축복까지 받게 된다라는 것을 우리들에게 권면합니다.

오늘의 본문 내용을 볼 때 2000년 전에 쓰여진 이와 같은 내용에 상황으로 미루어봐 2000년 전인 그 시대에도 자식이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그렇게 원활하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만약 이와 같은 것이 말할 필요 없이 원활히 잘 이루어진다면 굳이 사도 바울이 그의 편지를 통해 이런 내용을 기술할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도 자식이 부모를 섬기는 것이 쉽지 않았고 또 그와 같은 것들이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기에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이 서신을 써서 기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그와 같은 것을 생각해 보며 오늘 우리의 모습을 다시 한번 살펴보며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부모님을 잘 섬기고 순종하고 공경할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 봅니다. 특별히 약속 있는 첫 계명으로 세워주실 만큼 부모를 섬기는 것은 귀하고 중요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오늘의 말씀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무엇보다 먼저 생각하고자 하는 것은 부모님의 말씀을 주안에서 순종하는 것이 자녀의 본분이라는 사실입니다.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곧 부모님의 마음을 따르고 그것은 나아가서 하나님의 뜻을 이룸이라는 것을 생각을 합니다. 부모님이 연세가 들게 되면 우리의 현실과는 다른 고루한 생각을 가지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 삶의 연륜이라는 것은 전혀 무시할 수 없는 무게로 우리들에게 다가오며 그 지혜를 따르는 것이 유익이라는 것이 우리의 삶의 시간을 지내놓고 보면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나이가 드시면 기억력도 떨어지고 두뇌회전능력도 많이 늦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특별한 내용은 우리가 이제까지 알고 있는 사물의 단편적인 지식들이 연결고리가 이루어져 종합적으로 맺어져 이루어지는 통찰력이 뛰어나게 된다라는 사실입니다. 전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단편적인 지식들이 조각조각 되어서 우리들에게 부분 부분으로 조명되어졌는데 삶의 경륜을 거치면서 그것들이 조합되고 연합되어 모든 사물을 통찰하여 볼 수 있는 능력으로 생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삶에 연륜과 경험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입니다. 더욱이 우리의 현재가 어떻게 있어졌나를 잊지 말고 생각하면 특별히 부모님이 우리들에게 하신 말씀을 그냥 지나쳐도 될 만큼 가벼운 소리가 아님을 봅니다. 우리는 항상 지금 나는 어려워 불행해, 슬퍼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디를 기준으로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일까요? 지금 내가 좀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항상 그 기준이 내가 좋았을 때가 아니었는지요. 어찌 생각하면 가장 어려운 때를 기준하면 우리는 항상 행복하고 기쁘고 감사하고 무엇인가 가장 좋은 상태에 있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처음 상태를 생각해서 그 부모님이 우리를 지켜주시고 이제까지 가르치시고 섬겨주시고 우리를 위해 이제까지 헌신해 온 것을 생각해 보면 우리는 부모님의 말씀을 결코 가볍게 지나칠 수 없는 것임을 봅니다.

특별히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이라는 것은 곧 우리의 삶에 인품과 인간적인 도리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부모님께 순종한다는 것은 부모님의 의도를 성취해 드리는 것입니다. 부모님의 의도가 무엇인가를 파악해야 합니다. 나를 위한 것인가 정말 부모님을 위한 것인가를 생각해보면 결국 부모님의 모든 말씀은 우리를 위한 것임을 보게 됩니다.

저도 얼마 전까지 노모를 모시고 있었습니다. 제가 밤늦게 들어와도 언제든지 저희 어머님은 저에게 밥은 먹었느냐고 물어보셨습니다. 그 늦은 시간까지 밥 안먹고 다닐 리가 없을 텐데 언제든지 그렇게 물어보시는 것입니다. 아마 그 마음에 이러 저러한 생각으로 염려되어서 물어보는 것이라 생각이 듭니다. 괜히 마음속에 생각이 들어서 ‘아니 그럼 늦게까지 밥도 안 먹고 다니겠습니까?’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부모님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하는 것이겠지요. 부모님의 마음은 자식에 대한 안부가 생각이 나고 또 자식에 대한 애정에서 나이가 들었어도 그와 같은 질문을 하리라 생각이 듭니다.

자식도 나이가 들면 부모의 마음을 이해해 드려야 합니다. 나무도 조그만 잎이 날 때가 있고 장성해서 수목을 이룰 때가 있고 가을에 물들어 떨어질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로 이와 같이 흘러가며 삶의 유전의 역사를 이루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자식이 나이가 들면 젊어서는 그리고 어려서는 부모님의 도움을 받아 살아왔지만 이제는 부모님께 도움을 드리고 이해를 해 드려야 합니다. 피곤하다 생각하지 말고 그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가 내가 부모의 은혜를 갚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면 우리는 그 일로서 마음이 즐거울 수 있음을 봅니다.

특별히 부모님께 순종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의 인격과 믿음을 드러내는 표현입니다. 부모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자녀 그것은 그만큼 자신의 삶에 자신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부모님들은 어려운 시대를 사셨고, 우리의 부모님들은 또한 이러 저러한 삶의 환란과 고초를 거치면서 우리를 키우셨습니다. 따라서 그 삶에 이러 저러한 연륜 속에 많은 어려움이 있으셨을 것입니다. 그러한 상처를 가진 부모님들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자녀는 그 만큼 자기 삶에 자신이 있고 또 뿐만 아니라 자기 마음에 넉넉함을 드러내는 표현일 수 있는 것입니다. 나이 드신 부모를 배려할 만큼 자신이 넉넉하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약자를 배려하고 도울 수 있는 것은 강자의 가장 첫 번째 걸음입니다.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다른 부모님 같은 경우면 내가 잘 모시겠는데 내 부모는 잘 안 된다. 이런 경우가 있지요. 차라리 나이 드신 다른 노인들 같으면 내가 정성으로 대하는데 매일매일 대하는 내 부모는 잘 못 모시겠다 하시는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이해관계가 없고 오다가다 만나는 분이라면 잠시니까 부담 없이 잘 해드릴 수 있는데 매일매일 얼굴 맞대고 만나는 분이라면 그것이 우리들에게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와 같은 마음을 가졌을 때 우리 마음에 정말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이제까지 받은 은혜에 보답하는 양으로 부모님께 우리의 정성과 지식을 다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부모는 언제나 자식에게 도움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부모하나 자식에게 도움을 주지 않고 있는 부모는 없으리라 생각을 합니다.

제가 목사이다 보니 여러 가정을 다녀볼 기회가 있습니다. 여러 가정을 심방하다보면 노인들이 계신 가정이 또 많이 있습니다. 오늘도 1부예배 때 70세 이상이 되신 어머님 아버님을 이 앞으로 한번 나오시도록 했더니 가득 찼습니다. 2부예배 때는 통로까지 가득 차는 것을 봅니다. 나이 드신 분이 저희 교회에는 상당히 여러분 되신다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심방을 가서 나이 드신 분들을 보면 나오셔서 얘기하기를 좋아하시는 것 같습니다. 아마 평상시에 별로 얘기를 많이 안하셨다가 손님이 오면 얘기도 잘 들어주고 하니 마음에 있었던 얘기, 자랑하고 싶었던 얘기, 이전 얘기도 많이 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그런 경우에 또 자녀들 가운데 조금 불안해하시는 게 있는 것 같습니다. 혹시 우리 어머님 아버님이 내가 얘기 안한 과거의 비리 사실을 말씀하실까 하고 조금 불안해하시는지 혹은 또 여러 가지로 마음속에 창피해 하는 마음의 표정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괜찮습니다. 그 부모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연세가 드셔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그것은 얼마든지 마음속에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고, 은혜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고, 사랑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정말 자식들이 듣기에 부모님이 조금 부끄러운 얘기를 하신다면 그러한 말씀을 하시는 부모를 모시고 계신 그 자녀들이 얼마나 훌륭한 인격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을 우리는 평가하지 않겠습니까? 부모님이 오히려 연세 드셔서 이치에 맞지 않는 얘기를 하신다고 할수록 그 자녀는 더욱더 빛이 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또 그 부모님은 나름대로 자식을 위하여 무엇인가 아름다운 사연을 이루고 있는 것을 봅니다.

저는 저희 어머님이 마흔 두 살에 낳으셨습니다. 저희 형님하고 저하고 20살 차이가 납니다. 옛날에는 그렇게 많이 낳으셨나봅니다. 그 사이로 누님이 네분 계시니까 6남매를 낳으셨는데 저희 형님이 저에게 꼭 부모님 같은 나이뻘이 되시겠지요.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는데 학교에서 부모님을 모시고 오라고 하는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저희 어머님이 오시면 꼭 할머니 같아요. 그래서 저는 그게 굉장히 부끄러운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중학교 때나 고등학교 때 진학상담을 한다 이런 때 되면 누님들이 오셔서 대신 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시간을 지내놓고 보니 굉장히 부끄러웠습니다. 어머님이 오시는데 연세가 많이 드셨다고 부끄러울 게 뭐가 있냐? 물론 저희 교회도 요즘은 이렇게 보면 나이 드셔서 자녀들을 보시는 분이 많이 계십니다. 그러나 전혀 어려워하실 일은 없고 특별히 어릴 적의 생각이 너무나 치졸하였다하는 생각들이 들곤 합니다.

사실 어머님이 늦게까지 계셔서 이렇게 바로 2년 전에 세상을 떠나셨지만 늘 나이가 드셔도 제게 또 도움을 주신 것 같아요. 첫째, 저는 저희 어머님을 늦게까지 모시고 있다 보니 88세에 돌아가셨는데 노인들을 잘 이해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저희 교회에도 나이 드신 분들이 많이 있는데 그 노인들의 정서라든지 그 노인들이 가졌던 생각들을 많이 이해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또 이렇게 나이 드신 어머님이나 아버님을 보면 그저 저희 어머님이나 아버님이나 진배없다는 생각이 들고 마음속에 따뜻한 생각이 들고 또 여러 가지 마음속에 참으로 기쁨이 오게 되는 것을 봅니다.

목사인 저로서는 상당히 마음속에 큰 즐거움이고 마음에 큰 도움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또 뿐만 아니라 저희 어머님과 같이 어울리셨던 분을 보게 되면 아마 그분들은 저를 목사로 볼 뿐만 아니라 그저 자식중의 하나와 같이 보고 계시리라 생각을 합니다. 그러니 목사로서는 또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결국 부모님들은 나이가 드셔도 자식들에게 이러저러한 도움을 주고 계신 것이지요. 어떤 경우에도 부모가 자식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는 없습니다. 우리들의 마음에는 그저 정말 그 부모님께 감사한 마음을 가지며 어떤 형태로 내게 도움을 주시는가 찾아서 감사하는 것이 바로 부모님에게 순종하는 자녀의 모습이리라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을 보면서 또 생각을 하는 것은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할 뿐 아니라 나아가서 그 부모를 공경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지요? 부모를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부모가 기뻐할 수 있는 일을 해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부모님이 기뻐하신다는 것은 우리가 부모님께 뭘 많이 해드리는 것이 기뻐하는 것은 아니지요. 여러분 부모님들이 뭘 얼마나 많이 누리시겠습니까? 뭘 얼마나 많이 가지시고, 뭘 얼마나 많이 드시고, 얼마나 많은 것을 치장을 하시겠습니까? 부모님을 기쁘시게 해드린다는 것은 부모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 아닙니까? 가장 중요한 것은 부모님의 존재가치와 존재의 의미를 느낄 수 있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사실 부모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자식들에게 무엇인가 받아서 기쁜 것 보다 자식들에게 부모로서 뭔가를 줄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기뻐하시는 것 같습니다. 제가 저희 어머니를 모셔보니 그런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여기 어머님 아버님 계시는데 저도 나이가 들었지만 나이 드신 어머님이 밥을 차려주신 것보다는 그래도 젊은 사람이 밥을 차려주는 것이 더 낫더라고요. 그래서 늘 제가 가면 저희 집사람이 밥을 차려주지만 가끔 가다 어머님이 울적해 하시거나 할 때가 않습니까? 나이 드신 분들을 보면 이러저러한 소식 속에 또 마음이 좋지 않으실 때가 있겠죠. 그러면 제가 그 심기를 알아차리고 어머니에게 직접 밥을 차려달라고 부탁을 하면 굉장히 기뻐하시는 것 같습니다. 저희 집에서는 제 아내가 차려주면 제가 밥을 먹고 그릇을 다 싱크대에 갖다 놓는데 제 어머니가 차려주시면 저는 그릇을 싱크대에 갖다 놓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저희 어머니는 스스로 치우시는 것을 좋아하시는 것 같아서입니다. 그래서 제가 갖다놓으려고 해도 그냥 두라고 하셔서 저는 그 수고를 더 끼친다는 뜻이 아니라 그냥 그 자리에 두고 가는 것이 오히려 부모님을 더욱더 기쁘게 하는 것 같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취미 중에 하나가 요리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안 드셔 보셔서 모르시겠지만 제가 여러 가지는 못해도 10가지 정도는 잘합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하나 국수를 잘 만듭니다. 사실 국수를 잘 만드는 것은 제가 국수를 잘 먹기 때문입니다. 저는 자장면, 냉면, 쫄면, 칼국수 모든 종류의 국수를 다 좋아합니다. 제가 국수를 참 좋아하는데 그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저는 저희 어머니가 오랫동안 만들었던 음식에 길이 들어져 있기 때문에 아무래도 어머님이 해주시는 손맛이 제 입에 맞겠죠. 그런데 저희 어머니가 제가 좋아하는 것 가운데 하나인 국수를 잘 만드십니다. 그래서 제가 국수를 잘 먹었고, 또 제가 국수를 잘 만듭니다. 그래서 아이들한테 국수를 잘 만들어 주기도 합니다. 제가 지난주에도 먹으려고 보니 국수가 없어서 저희 집에서 국수는 제가 합니다. 그래서 가게에 가서 이왕이면 많이 사다 놓으려고 국수를 3개나 사왔습니다. 한참 먹을 것 같습니다.

저희 어머니가 국수를 해주시면 제가 잘 먹습니다. 그런데 저희 어머니가 마음에 그날 분위기가 별로 밝지 않은 것 같으실 때가 있습니다. 노인들은 지내다 보니 어느 날 기분에 좋을 때도 있고 어느 날 나쁜 때도 있는 것 같습니다. 저희 어머니가 왠지 모르게 좀 컨디션이 안 좋으신 것 같다 하면 제가 부탁을 드립니다. “어머니 제가 국수가 먹고 싶은데 국수 좀 해주시죠.” 그러면 아주 기쁨으로 그것을 하시는 것입니다. 어쩌다 재료가 없으면 가게에 가서 사다가 하시는데 굉장히 힘이 나시는 것 같습니다. 제가 먹고 싶어서라기보다 그저 부모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서 이렇게 부탁을 드리고는 하는데 정말 부모님이 뭔가 유익한 것을 해주고 있다라는 것에서 기뻐하시는 것 같습니다.

부모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은 정말 우리 마음에 부모님이 자식에게 무엇인가를 줄 수 있고, 주고 있다라고 느끼도록 해주는 것이 부모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사실 부모는 자식에게서 십분의 일만 마음 쏟아도 정말 부모를 잘 공경하는 사람들이 되지 않겠습니까?

저도 아파트에 살고 있는데 아파트가 아무리 방으로 칸칸이 쳐져있고 좀 거리가 떨어져 있다고 해도 밤에 기척을 내면 소리가 나지 않습니까? 밤에 있다보면 어머님이 기침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마음에 ‘어머님이 어디 편찮으신가 보다.’ 하는 마음이 듭니다. 그리고는 그냥 자게 됩니다. 그런데 밤에 또 아이들이 기침하는 소리를 들으면 ‘얘가 어디 아픈가보다’ 생각하고 일어나서 문 열고 들어가서 살펴봅니다. 저만 그런가요? 그것이 아마 부모와 자식의 차이인 것 같습니다. 저도 한편 부모이면서 한편 자식인데 도대체 제 마음이 어디로 써지나 생각하면 아무래도 자식에게 마음이 가는 것은 정한 이치라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아마 그 자식에게 가는 마음 십분의 일만 부모에게 쓴다면 아마 이 세상에서 가장 효성스런 자녀들이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합니다.

부모를 기쁘시게 하는 것은 자식의 면류관입니다. 여러분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을 보면 하나님께서 행하신 인물들은 모두 부모님께 공경을 잘한 분들임을 봅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이 이삭을 모리아산의 제물로 드리는 장면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아브라함은 이미 나이 100세에 이삭을 얻었으니 이삭이 소년이 되었으면 그 아브라함의 나이가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삭을 모리아 산에 제물로 드려라 할 때 아브라함은 이삭에게 그 내용을 말하고 이삭을 제물로 드리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삭은 아버지를 거역하고 달아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아버지 아브라함의 말을 듣고 순순히 순종하였던 것을 봅니다. 이와 같은 것을 보면 결국 믿음의 인물들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인간적인 정리에도 더욱더 겸손하게 순종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삭의 아들 야곱 그리고 에서를 한번 볼까요? 이들은 쌍둥이 형제였는데 이삭이 마지막으로 장자의 축복을 하려고 별미를 가져오라고 합니다. 에서가 들에 가서 짐승을 잡아서 별미를 가져오려 합니다. 그런데 그의 아내 리브가가 야곱에게 귀뜸해줘서 야곱이 별미를 만들어서 몰래 속이고 아버지한테 가서 그 별미를 드리고 장자의 축복을 받게 됩니다. 여기서 다른 것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식들이 아버지에게 별미를 만들어 드리고 정말 아버지로부터 축복을 받으려고 하는 그 마음입니다.

요셉이 애굽에 가서 총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애굽에 가서 총리가 되고 마지막 한 일이 무엇입니까? 그 아버지 야곱을 자기가 정말 성공한 애굽으로 모셔옵니다. 마차를 보내서 모셔오게 됩니다.
이와 같은 것을 보면 부모를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 곧 자식의 면류관임을 봅니다. 부모를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은 무엇입니까? 부모의 기쁨과 자랑거리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저희 집에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저희 같은 동에 사는 사람들이 사실 저는 잘 모르겠는데 그분들이 저에게 인사를 하십니다. 저는 얼굴을 잘 모르는데 그분들은 한결 같이 ‘목사님’ 하시면서 인사를 합니다. 그리고는 ‘어머님이 참 얘기를 많이 하셨는데요.’ 이렇게 얘기를 하시는 것입니다. 아마 저희 어머님이 그 같은 동에 여러 해 살다보니까 만나시는 분마다 우리 아들이 이 교회 목사라고 말씀을 하셨던 것 같습니다. 아마 어머니 마음에는 그래도 아들이 목사로서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게 마음에 적잖게 기쁘셨던 것 같아요. 그 마음에 기쁨이 있으니까 이렇게 말씀을 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요즘 세상을 떠나신지 2년 되셨지만 아직까지도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면 ‘아, 어머님께서 참 말씀을 많이 하셨는데.’ 그런 얘기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정말 부모의 마음에 조그마한 것이라도 자랑거리가 된다면, 기쁨거리가 된다면 그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그리고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부모의 마음에 자존감과 삶의 성취감을 드리는 것입니다.

나이 드신 부모님의 역할과 자리가 있는 것을 봅니다. 여러분 가정에 노인 한 분 계시다는 것이 가족을 얼마나 결속력있게 만드는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노인 한분 때문에 때가 되면 모이고, 노인 한분 때문에 여러 가지 관계가 형성되고 모임이 형성되고 가족의 결속력이 새로워지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그 노인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 모임도 전과 같지 않고 또 가족의 결속력도 전과 같지 않아서 멀어지게 되는 것을 봅니다.

누구든지 역할과 자리가 있는 것을 봅니다. 자신의 의미와 존재가치를 느끼도록 해드려야 합니다. 특별히 노년은 영적으로 볼 때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에 있어서 모든 작품을 완성해 나가고 마지막 순간에 그 작품완성의 대미를 이루게 됩니다. 그림을 그려나가기 시작하는데 마지막에 손질해서 마지막 붓을 놀리고 그 다음에 우리는 그림을 완성하지 않습니까? 말하자면 우리의 유년과 청년과 장년과 노년기에 있어서 노년은 우리의 인생의 마지막 작품이라고 생각을 할 수가 있습니다. 천국의 길목에 있습니다. 이제까지 살아온 것도 중요하지만 그 마지막 부분을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는 것은 정말 작품의 최고의 완성도를 높이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교회에서도 이 부분을 위해서 정말 해야 할 일이 많다하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의 삶의 노년을 아름답게 이룰 수 있고 귀하게 여길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 큰 축복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특별히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그 부모를 주신 하나님의 섭리에 따르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한다는 것은 그 관계를 형성하신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영광을 돌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연의 섭리는 그 부모를 통해서 자녀를 낳고 그 자녀를 통해서 부모에게 배우고 부모의 가르침을 받아 자식들이 자라게 되어있습니다. 나이가 들면 부모들은 자식들을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믿음의 모습인 것입니다. ‘너희가 눈에 보이는 형제들을 사랑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을 사랑하느냐’라고 우리들에게 반문하셨는데 우리가 눈에 보이는 부모님을 사랑하지 못하고 섬기지 못하면서 어떻게 우리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겠느냐고 이 시간도 우리에게 반문하고 계십니다.

마지막으로 부모를 공경함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는 자식들의 모습을 봅니다. 약속 있는 첫 계명으로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는 축복을 약속해 주실 만큼 부모 자식의 관계는 의미 있는 지상의 관계이며 삶인 것을 봅니다. 방금도 말씀드렸지만 사도 바울이 2000년 전인 이와 같은 시대에 왜 이런 글을 썼겠습니까? 자식들이 부모를 잘 모시고 있다면 이런 글을 쓸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시대도 역시 쉽지 않은 문제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와 같이 정말 목회자의 심정으로 그 교회에 있는 성도를 향하여 너희가 부모를 잘 순종하고 잘 공경하라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너희가 잘되고 장수하리라 하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을 시켜주고 있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면 축복이 있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면 하나님의 은혜의 길을 가는 것을 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결국 심은 대로 거둡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는 것은 진리입니다. 내가 내 부모님께 어떻게 섬기고 내 부모님께 어떻게 공경했는가가 내 자식이 나에게 어떻게 공경하고 섬기겠나를 결정한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어떻게 대하고 살고 우리는 우리의 부모님께 어떻게 대하고 살 것이라는 것을 결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부모님께 한 것을 보고 내 자식이 나에게 할 것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연의 섭리에 따라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가꾸는 것이 결국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요, 하나님 앞에 귀한 축복을 받는 것이니 부모를 섬기는 것은 하나님의 귀한 은혜의 모습인 것을 생각을 합니다.

이제 오늘은 이러저러한 순서가 있어서 제가 말씀을 맺어야 할 것 같습니다. 부모란 언제나 우리 마음의 모태이고 추억의 언덕이고 삶의 교훈과 선생님이심을 봅니다. 우리는 이러저러한 부모님의 삶의 행동과 모습을 보며 삶의 교훈을 받았고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아가게 됩니다. 아마 부모님에 관한 이러저러한 추억들이 다 많으실 것입니다. 아마 부모님의 대한 추억이 없는 자식들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의 부모님들은 어려운 시대에 태어나셨고 또 그 어려움을 겪으셨고 헌신적인 사랑과 그 헌신적인 애씀으로 자식들을 키우시며 살아오신 분이 우리 부모님이시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제가 저희 어머님에 대해서 두 가지 기억을 특별히 잊지 않고 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입니다. 옛날에는 고등학교 때를 말 그대로 자식들 새벽밥 해주시던 때 아닙니까? 새벽밥해서 도시락 두개씩 싸서 자녀들 보내시던 그 부모님들의 수고를 생각해 봅니다.

하루는 우연치 않게 저희 어머니가 양말을 벗으시는데 그 맨발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깜짝 놀란 것이 발에 심한 화상을 입은 상처가 있었습니다. 전에는 몰랐는데 ‘이거 어떻게 되신 겁니까?’ 하고 여쭤봤는데 아무래도 부엌에서 일을 하시면서 뜨거운 물을 들으시다가 발에 쏟으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자녀들이 알면 걱정할까봐 그것을 혼자서 다 치료하시고 그때까지 계셨던 것입니다. 제가 봤을 때는 거의 다 치료가 끝나가고 있을 때 흉터를 보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간단하게 얘기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냥 뭐, 괜찮다.’라고 얘기하면서 ‘쉽지는 않았는데 괜찮다.’ 하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쉽지 않았는데 괜찮다.’라는 그 말씀 속에 얼마나 많은 말들이 들어있는가를 생각을 해 봤습니다.
우리의 부모님들은 늘 자식을 대할 때 내 아픔과 고통이 얼마나 큰 것인가는 생각하지 않고 자녀들을 위해서 자녀들의 마음에 조금이라도 부담 끼치지 않으려고 생각한 것이 우리 모든 부모님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몇 년 전입니다. 제가 집에 들어가 보니 저희 아이들도 좀 컸을 때니까 연세가 상당히 높으셨겠죠. 80이 훨씬 넘으셨을 때인데 저희 어머님이 스웨터로 가리고 있는데 특별히 의미 없이 봤습니다. 그런데 제가 들어가니까 얘기를 하시다가 스웨터를 걷어 보이시는데 깁스를 하고 계신 것입니다. 목욕탕에 가셨다가 아마 길에서 넘어지셨나봐요. 그래서 팔이 부러지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얘기를 하시는데 ‘병원에 갔는데 집에 연락을 하라고 했는데 내가 집에 아무도 없다고 했다.’ 연락을 안 하신 것입니다. 80이 넘으신 노인이 집에 연락을 안 하시니 병원에서 노인이 걱정스럽고 하니 자식들한테 연락하라고 했을텐데도 어머니의 마음에는 집에 연락하면 자식들이 또 놀래서 뛰어오고 할까봐 연락을 안하신 것입니다. 내 집에 아무도 없다 이렇게 얘기를 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뼈를 다 맞추고 깁스를 하시고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냥 들어온 것이 아니라 또 손주들 과자 이런 것을 다 사가지고 오셨습니다. 저는 그 스웨터를 풀어 보이시기 전까지는 몰랐습니다.

그런데 부모님들의 마음에는 그런 마음이 있는 것이지요. 내가 얼마나 아픈가? 글쎄 저는 팔이 부러져 본적이 없기 때문에 아픈지 어떤지 저는 그 느낌을 잘 알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아프지 않겠습니까? 또 얼마나 불편하겠습니까? 또 노인의 심정에 ‘야, 노인이 돼서 잘 붙지도 않는데 어떻게 할까?’ 많은 여러 가지 심려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모든 것들을 그저 마음에 다 마음속에 생략하고 ‘뭐 괜찮다.’ 하는 이런 한마디로 표현하시는 이런 부모님의 모습을 보면 우리는 정말 삶의 많은 교훈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그 때 마음에 생각한 것이 있어서 칼럼을 한번 쓴 적이 있는데 제 마음속에 ‘웬만한 것 가지고 엄살 부리지 말자’ 그런 생각을 가졌습니다. ‘어렵다는 얘기하지 말자. 웬만한 것 가지고 어렵다고 생각하지 말자.’ 우리가 만약에 팔 다쳤다고 한다면 그것 가지고 아프다고 얘기하고 사람들에게 보호받으려고 생각하지 않았겠는가 하는 생각이 있습니다.

우리의 부모님들은 그저 어려운 일 있어도 자식들에게 알리지 않고 그 어려움을 감내하며 어떻게 해서든지 자식들의 마음을 편케 해주려는 이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사신 것을 봅니다. 우리는 그러한 사랑을 받았고 은혜를 받았고 참음과 인내 속에 헌신적인 섬김을 받아서 오늘 우리가 있지 않습니까?

저희 어머님이 2년 전에 세상을 떠나셨는데 마지막에는 암으로 2년 정도 조금 어려우셨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잘 다니셨습니다. 하루도 누워서 계신 적은 없었습니다. 제 마음에, 늘 기도제목 우리 써내잖아요. 그럴 때 제가 ‘그저 잠자시는 듯 평안하게 가게 해주십시오.’ 하고 기도했는데 정말 그렇게 가신 것 같습니다. 마지막까지 잘 움직이시고 그러다가 그저 한순간에 가신 것 같아요. 딱 하루 심하게 아프신 것 같아요. 많이 아파하시는 것 같아서 저녁에도 옆에 있었는데 새벽에 일어나셔서는 저보고 가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병원으로 옮겨드려야 되는 것인가 아닌가하고 생각을 했는데 그냥 괜찮으신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마침 그날 누님들도 오셨기에 같이 모시게 하고 저는 제 방으로 왔는데 그 다음날 거뜬히 일어나시겠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교회 왔습니다. 전화가 와서 가봤더니 그냥 잘 지내시고 아침에 괜찮으시더니 화장실 본인이 스스로 가셨다가 나오시면서 넘어지셨다고 합니다. 제가 갔더니 마침 세상을 떠나시더라고요. 그래서 병원에 앰뷸런스를 불러서 싣고 가는데 정말 그 가운데 제 마음속에 먼저 드는 생각이 무엇이냐 하면 아마 부모님 떠나실 때 자녀들이 이런 생각 다 하셨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제 마음에 드는 생각은 여태까지 못해 드린 것만 생각났습니다. ‘야, 내가 이렇게 못해 드렸고 또 이렇게 잘못했고 또 이렇게 마음 상하게 해드렸는데.’ 하는 생각이 쭉 나면서 정말 마음속에 걸리는 일이 많더라고요.

그런데 그런 생각이 나면서 또 한편 자동차가 병원에 도착할 때쯤 돼서 또 한 가지 생각이 났는데 어머님이 이 사실을 또 어떻게 생각하실까? 그러면서 마음이 편해지는 것입니다. 내가 왜 못해드렸는지 내가 왜 이렇게 불편을 끼쳐 드렸는지 그 마음을 다 아시고 이해해 주시는 것 같아서 입니다. ‘다 이해한다. 다 용서한다.’ 그러시는 것 같았습니다. 정말 세상을 떠나시면서 그 자식들의 마음에는 뭔가 여러 가지 부족한 것만 생각나는데 부모님은 그 부족했던 순간과 상황까지도 다 이해하실 것 같습니다. 그러니 마음의 짐이 다 없어지고 날아갈 것 같고 후련한 마음이 생깁니다.

정말 우리들의 삶 가운데 부모님 떠나시면 정말 잘 못 해드린 것만이 생각나서 후회가 되리라고 생각됩니다. 잘해드리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삶의 길에 이와 같이 잘 해드릴 날도 얼마 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또 한편 이 세상을 떠나셨을 때 우리의 부족함을 오히려 인내하시고 덮어주시고 용서해 주시는 부모님을 생각하며 우리 마음에 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마음에 기쁨과 후련함을 가질 수 있는 것이 부모를 섬기는 이와 같은 자식들의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모님은 우리를 욕하실 리 없습니다. 우리가 잘못했다고 우리를 욕하실 리 없는 것 같아요. 우리가 그럴 수밖에 없는 처지를 또 이해를 하시리라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모시고 계실 때에는 정성을 다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라 생각을 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는 부모님들도 계시고 또 부모이면서 동시에 자식인 분들도 계시리라 생각됩니다. 또 아직 자녀를 낳지 않아서 이렇게 자식의 도리만을 하고 계신 분들도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오늘 말씀에 따라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부모님께 공경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인 것입니다. 부모님을 우리의 의무 때문에 공경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의 기쁨이고 우리의 감사이고 우리의 자랑이요 영화로움이기 때문에 우리는 부모님을 섬기고 공경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부모님들 건강하시고 하나님께 대한 소망이 더욱 깊어지시고 하늘의 축복을 누리시다 주님 부르실 때 아름답게 잠자듯이 입성하시는 주의 축복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설교/최종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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