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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라너의 삼위일체론

by 【고동엽】 2021. 1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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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라너의 삼위일체론

 

Ⅰ. 들어가는 말

 

20세기 개신교회에서 칼 바르트가 삼위일체론에 대한 논의를 재개시켰다고 한다면, 로마 카틀릭 교회에서는 칼 라너(1904-1984)가 삼위일체론을 신학의 중심부로 끌어 올렸다. 라너는 신 스콜라주의의 분위기 아래,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과 신 스콜라주의 신학을 공부했다. 라너는 또한 그의 스승 마틴 하이데거에게서 실존주의 철학을 배우고 기독교의 전통적 교리를 재해석하는 작업을 시도했다. 라너는 특히 하나님의 보편적 구원 의지, 하나님의 자기 전달로서 은총의 지속적 제공, 예수 그리스도의 객관적 구속, 객관적으로 구속된 인간의 초자연적 실존 등을 토대로 ‘익명의 그리스도인’을 주장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라너는 동시에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삼위일체론의 르네상스를 가져왔다.

주)신 스콜라주의는 1840년 이후 등장했다. 신 스콜라주의는 중세 스콜라 신학의 종합을 회복함으로써 기독교에 대한 계몽주의 도전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신 스콜라주의는 풍부하고 다양성 있는 중세 신학을 엄격하고 메마른 신학으로 단순화 시켰다. 그래서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의해 비역사적이고, 근대의 주체 중심적 철학에 잘 대처하지 못하고 근대 과학과 접촉하지 못하고, 경험과 생명에 관계없는 개념에 초점을 주고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신 스콜라주의자들은 옛 신학이든 새로운 신학이든 다른 신학을 배제하고 독점적 지위를 차지하려고 하였다.

 

Ⅱ. 라너의 삼위일체론

 

1. 삼위일체 교리의 분리

 

라너는 먼저 로마 카톨릭 교회가 삼위일체 교리를 고백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적으로는 일신론적 경향을 보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라너는 삼위일체 교리가 전체 교의학 체계에서 다른 교리로부터 격리되어 있는 현실을 애석해 했다. 라너는 또한 삼위일체론이 그리스도인의 삶과 영성에서 분리되어 있는 것을 슬퍼했다. 그러면 왜 서방교회의 삼위일체론은 교의학 체계에서 격리되고 신자의 삶에서 분리되었는가? 라너는 서방교회의 삼위일체론이 철학적으로 추상적으로 발전되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라너에 의하면, 성서와 그리스 교부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생각할 때, 하나님(호 테오스), 즉 아버지의 위격으로부터 시작했다. 그런데 라틴 서방의 아우구스티누스는 한 분 하나님, 즉 하나의 신적 본질(essence)에서 시작하고, 그 후에 하나님을 위격 안에 있는 셋으로 보았다. 그 결과 라너에 의하면, 서방교회의 삼위일체론은 거의 구원 역사와 관계없는 교리가 되었다. 삼위일체론은 하나님의 형이상학적 속성에 대해 말할 뿐, 하나님이 피조물과 관련을 맺는, 구원 역사에서 경험되는 하나님에 대해 말하지 않게 되었다.

라너는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삼위일체에서 경세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의 동일성을 주장했다. “경제적 삼위일체는 내재적 삼위일체이고, 내재적 삼위일체는 경세적 삼위일체이다.”

 

2. 경세적 삼위일체에서 하나님의 삼중적 자기전달

 

라너는 삼위일체에 대한 논의를 내재적 삼위일체가 아니라 경세적 삼위일체에서 시작했다. 라너에 의하면, 경세적 삼위일체의 토대는 바로 성서의 구원 역사와 구원 경험이었다. “구원 역사, 구원 역사에 대한 우리의 경험, 구원 역사에 대한 성서의 표현은 경세적 삼위일체 대한 사전(previous) 지식을 제공하고, 경세적 삼위일체에 대한 영원한 토대와 출발점이 돈다. “경세적 삼위일체와 관련하여, 라너는 구원 역사에서 하나님의 세 위격은 각각 우리에게 자신의 고유한 위격을 전달한다고 말했다. 이것은 하나님이 단순히 창조된 효과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전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신적 본성의 전달뿐만 아니라 ‘위격들’의 전달로서 이해되는 하나님의 거하심과 창조되지 않은 은총이다. 라너가 신성의 자기 전달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의 자기 전달을 말한 것은 신학적으로 의미가 크다. 라너가 서방교회의 방식을 버리고 성서와 동방교회의 방식을 따랐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하나님은 ‘아버지’, 즉 기원이 없는 하나님으로서, 자기를 전달하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자기 전달은 단순히 생명 없는 동일성 속에서 하나님과 일치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자기 전달에서 하나님은 자유롭고 이해할 수 없는 즉 기원이 없는 분으로 존재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전달에서 하나님의 절대적 통일성을 위협하거나 파괴하지 않는다.”이어서 라너는 하나님 아버지가 자기를 전달할 때 두 가지 방식, 즉 아들과 성령의 양식으로 자기를 전달한다고 설명했다. 하나님 아버지는 아들의 성육신과 성령 강림을 통해 자기를 전달한다. “하나님이 자기 전달에서 자유롭게 자기 밖으로 나올 때, 역사적으로 인간의 육체 안에 나타난 분은 바로 아들이다. 세상(피조물)이 믿음, 소망, 사랑 안에서 하나님의 자기 전달을 수용할 수 있게 하는 분은 성령이다. 하나님이 자유롭게 자기를 전달하시는 한, 성육신과 성령 강림은 자유로운 사건이다.”

 

3. 자기를 전달하는 하나님과 수용하는 인간의 관계

 

라너에 의하면, 하나님의 자기 전달은 수령자인 인간과의 관계에서 네 가지 기본적 측면을 갖고 있다. 첫 번째 측면은 기원(origin)과 미래(future)이고 두 번째 측면은 역사(history)와 초월(transcendence)이고, 세 번째 측면은 제공(offer)과수용(acceptance)이고 네 번째 측면은 지식(knowledge,truth)과 사랑(love)이다.

첫째 기원과 미래에 대한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전달을 하는 기원이다. 그리고 이 전달은 수령자로 인간을 만드셨다. 그러므로 인간의 목적은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은 미래에 일어날 일이다. 그러나 이 미래는 자유로운 것이다. 곧 인간은 결정론적으로 하나님을 받아들이게끔 된 것이 아니라 그것은 인간의 자유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둘째 역사와 초월에 대한 것이다. 인간은 주체자로서 이 세상에서 자유로운 결정을 내리며 역사를 이루어나간다. 그러나 인간은 이 세상을 초월하고자 하는 영적 경향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해 결정을 내리게 된다.

셋째 제공과 수용에 대한 것이다. 하나님의 자기 전달에서 하나님은 자유롭게 자기를 제공하고, 인간은 자유롭게 수용한다. 수용은 인간의 수용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수용을 말한다. 하나님이인간을 수용해 주셔서 인간이 하나님을 수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는 상호 작용으로 감소되지 않는 신비가 있다.

넷째 지식(진리)과 사랑이다. 진리의 실현은 인간의 정언적(categorical)결정이 아니라 초월적 결정이다. 하나님의 자기 전달은 전인적 인간에게 전달된다. 자기 전달과 수용에서 진리와 사랑의 이원성은 극복되거나 완성될 수 없다. 왜냐하면 진(the true)과 선(the good)이 본래 구분되어 있는 것이고, 하나님의 자기 전달이 진리와 사랑이라는 두 가지 양태 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지식과 사랑의 이원성은 인간의 실재를 묘사한다. 그러므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자기전달은 인간에게 절대적 진리와 절대적 사랑의 자기 전달로서 제시되어야 한다.

여기서 라너는 기원, 역사, 제공, 지식(진리)은 그리스도의사건에서 제시된 것으로서 하나의 통일성을 이룬다고 보았다. 하나님이 세상에 자기를 전달한 것은 역사적 사람들에게 진정한 제공이다. 또한 미래, 초월, 수용, 사랑은 하나님의 자기 전달의 또 다른 형태로서 통일성을 이룬다고 보았다. 하나님이 자신을 미래로서 줄 때 초월이 일어나고, 이것은 인간의 수용을 일으키고, 인간의 수용은 사랑에 의해 의도된다. 이렇게 라너는 기원-역사-제공-지식을 하나님의 자기 전달의 한 형태로 보고 미래-초월-수용-사랑을 하나님의 자기 전달의 또 다른 형태로 보았다. 그래서라너는 하나님의 자기 전달은 두 가지 근본적 양태, 즉 진리와 사랑의 양태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하나님의 자기 전달은 역사(진리)와 영(사랑)안에 있는 일치와 구분 안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라너에 의하면, 하나님의 자기 전달의 두 가지 근본적 양태는 서로를 제약한다. 이 두 가지 형태는 기원이 없는 하나님의자기 전달의 본성으로부터 유래하기 때문이다.

 

4. 경세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의 동일성

 

라너는 하나님이 말씀과 영으로 자기를 전달하신다는 경세적 삼위일체의 개념은 곧 바로 내재적 삼위일체의 개념을 요청한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구원 역사에서 하나님의 자기 전달이 진정한 전달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바로 내재적 삼위일체의 위격의 자기 전달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진리의)역사와 (사랑의)영 안에서 하나님의 자기 전달의 구별은 ‘하나님 자신 안에서’ 하나님에게 속한 것임에 틀림없다.” 라너는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정한 자기 전달이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라너는 이런 논의를 토대로, 드디어 경세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의 동일성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은총의 역사에서 전달된 분이 하나님이라면, 바로 내재적 삼위일체에서 존재하시는 하나님이어야 하기 때문이다.”이런 (은총의 질서 안에서) 세가지 자기 전달은 하나님이 실제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세 가지 관계적 방식 안에 있는 한 분 하나님의 자기 전달이시다. 하나님은 삼중적 방식으로 우리와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이러한 우리에 대한 삼중적이고 자유롭고 무상의 관계는 내적 삼위일체의 복사나 유비가 아니라, 내적 삼위일체 그 자체이다. 전달된 것은 바로 삼위일체 위격적 하나님이다.” “구원 역사의 차원에서 신적인 종류의 진정한 전달은 하나님의 내적 삶에서 진정한 전달임에 틀림없다. 그리스도의 은총의 질서에서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관계의 ‘삼중성’은 이미 하나님 안에 있는 그대로 하나님의 실재이다.”

그러면 경세적 삼위일체는 어떻게 내재적 삼위일체 안에 근거를 두고 있는가? 먼저 라너는 내재적 삼위일체 안에 진정한 차이가 있다고 보았다. “자신을 자신에게 전달하는 기원 없는 분(아버지), 자신을 위해 진리 안에서 말씀되어진 분(아들), 자신을 위해 사랑 안에서 수용되고 용납된 분(성령) 사이에 차이가 있다.”하나님 안의 진정한 차이는 아버지의 이중적 자기 전달에 의해 이루어진다. “아버지는 이러한 자기 전달을 통해 말해진 분(아들)과 수용된 분(성령)과 구분된다. 그러나 전달된 것은 하나님의 본질이다. 라너에 의하면, 위격들의 구분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다. “원초적 자기 전달자(아버지)와 말씀되고 수용된 분(아들과 성령)사이의 끈(bond)은 상대적인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 끈은 단순히 ‘본질’의 동일성으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5. 라너의 삼위일체론에서 새로운 개념

 

1) 심리학적 유비의 거부

 

라너는 특별히 아우구스티누스의 심리학적 유비를 거부했다. 라너에 의하면 심리학적 유비는 단순히 가설에 불과하다. “심리학적 유비는 교회의 교리가 아니라 신학적 이견이다.” 왜 그런가? 라너에 의하면, 심리학적 유비는 신성 안에서 지식과 사랑의 작용이 서로 구분되는 현존 위격을 만들어 내는 이유를 충분히 설명해 주지 못한다. 사실 인간의 영안에서도 지식과 사랑의 작용이 개별 위격을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있는데 말이다. 또 라너에 의하면, 심리학적 유비는 경세적 삼위일체와 관련이 부족하다.

 

2) 점유 이론에 대한 재고

 

삼위일체론에서 점유(appropriation), 즉 고유한 속성의 이론은 세 위격의 공동 사역을 인정하면서도 유사성에 근거하여 한 사역을 한 위격에게 돌리는 것을 말한다. 이를테면 아버지에게 창조 사역을 돌리고, 아들에게 구속 사역을 돌리고 성령에게 성화의 사역을 돌리는 것이다. 그런데 라너는 점유 이론을 따라 아버지에게 창조 사역을 돌리고 성령에게 은혜의 사역을 돌릴 수 있으나, 성육신을 아들에게 돌릴 수는 없다고 보았다. 성육신은 세 위격의 공동 사역이 아니라 아들의 고유한 사역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구원 역사에서 성육신은 아들에게만 돌려질 뿐만 아니라 아들에게 고유한 사역이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성육신했고 다른 위격은 성육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3) 위격 개념의 재규정

 

보에티우스는 위격(person)을 이성적 본성의 개별적 실재 라고 규정했다. 그런데 라너는 보에티우스의 위격 개념은 세 개체를 의미할 수 있다고 보았다. 라너는 또한 근대의 위격은 여러 영적 활동의 핵심, 여러 주체성과 자유를 의미하기 때문에 세 주체를 의미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라너는 위격 대신 ‘개별적 존재방식’ 개념을 제시했다. ‘한 분 하나님의 하나의 자기 전달은 주어진 것의 세 가지 다른 방식으로 일어난다. 한 분 하나님이 세 가지 구분되는 개별적 존재방식 안에서 존재한다.” 라너는 바르트의 존재방식 보다는 구별된 개별적 존재방식이 더 낫다고 주장했다. 라너에 의하면, 개별적 존재 방식은 하나님의 통일성을 강조하지만, 하나님 안에 세 주체성의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다. 구별된 개별적 존재는 관계적인 것, 즉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순서 안에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에 근거하여 라너는 다음과 같이 삼위일체를 재진술하였다. (1) 한 분 하나님이 세 가지 구분되는 방식으로 개별적으로 존재한다. (2) 아버지, 아들, 성령의 현존 방식은 대립의 관계로서 구분되어 있다. (3)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각각 서로 다른 개별적 존재 방식 안에서 한 분 하나님이다. (4) 하나님은 그의 세 가지 개별적 존재 방식을 통해 삼중적으로 존재한다.

 

4) 필리오케의 거부

 

라너는 또한 필리오케를 주장하지 않았다. 라너는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온다고 하지 않고, 그대신 “성령은 아버지로부터 아들을 통해 나온다”고 말했다. 라너는 아버지와 아들의 상호 사랑이란 개념에 반대했다. “로고스는 말하는 분이 아니라, 말해진 분이다. 엄격하게 말하면,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상호 사랑은 없다. 왜냐하면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상호 사랑은 두 행위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Ⅲ. 나가는 말

 

칼 라너는 삼위일체론 신학에서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세적 삼위일체의 동일성을 주장한 것으로 유명하다. 우리는 이것을 보통 ‘라너의 공리’라고 부른다. 라너는 은총을 하나님의 삼중적 자기 전달로 이해하고, 구원의 역사에서 하나님 아버지가 아들과 성령을 통해 삼중적으로 자기를 전달한 것이 바로 삼위일체의 핵심이라고 이해했다.

토랜스에 의하면, 라너의 삼위일체론은 세가지 화해를 이룩했다고 한다. 첫째, 삼위일체에 대한 조직 신학과 그리스도에 대한 신약성서의 가르침을 화해시켰다. 둘째, 서방신학과 동방 신학을 화해시켰다. 셋째 로마 카톨릭 신학과 바르트로 대표되는 복음주의 신학을 화해시켰다. 서방교회가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본성에 대한 확신과 신학에서 삼위일체론의 규범적 역할에 대해 확신을 공유하게 해주었다.

 

 

[출처] 칼 라너의 삼위일체론|작성자 kaist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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