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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와 성경해석
/ 김영규 교수
중세시대에 교단신학교들의에 조합형태의 대학이 발생할 때(대략 1200년쯤), 네 기본 단과들중 신학과의 총 8년의 수업방식은 주로 강론방식과 토론방식이었다. 성경주석이나 교의주석은 강론방식이었다면, 토론방식은 학교 수업에 내포된 14일 토론회와 특별절기를 기하여 2주와 4주 동안에 하는 공개토론회에서 사용된 방식이다. 후자의 방식은 학생들이 논문들을 발표함으로 발제하고 선생이 결정하는 식이다. 그런 두 가지 방식은 지금도 유럽의 정기적인 학습 방법들로서 현존해 오고 있다. 역시 유럽에서 책의 역사란 이런 학교 학습 방식과 밀접해 연결되어서 발생한 것이 많다. 그러나 이런 강의 방식이나 묻고 대답하는 토론식과는 다른, 역사적으로 오랜 교회 유산이 설교이다. 루터가 분명히 주장하였던 대로 설교직은 교회안에 고유한 직권으로서 세속나라에서 관원이 칼을 통하여 그리고 다른 은사를 가진 자는 다른 수단들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것과 다른 것이라 하였다.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자는 다른 사람들을 판단할 때 그 세속법을 이용하여 판단할 수 있지만, 그들에게 관련된 일에 관해서 세속법에 호소하거나 그 법을 사용해서는 않된다는 것이요 세속정부로부터 자신의 독특한 권리와 자유가 침해 받아서는 않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믿음의 일은 성령안에서 자유로운 것이고 그의 나라는 세속정부의 법과는 전혀 상관이 없이 내적으로 영적인 칼인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에 의해서만 통치되기 때문이다. 교회직원들이 이단에 대해서조차도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거나 영혼들을 그것으로 다스리지 않고 세속정부에게 칼을 사용하도록 명하여서는 않된다고 하였다. 이단들은 철무기로 칠 수 없고 불로도 태울 수 없으며 물에도 빠뜨릴 수 없는 영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말씀만이 힘과 효력과 강제력이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을 다스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이끌고 그것으로 그들을 인도하며 이단들도 극복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것이 아니다는 강한 루터의 주장이였다.
따라서 이런 의미에서 설교란 교회안에 독특한 의미를 갖는 것이였다. 이런 기본적인 입장에서 설교와 성경해석의 문제를 접근된다고 본다.
1. 파숫군의 사명
예수님의 비유에 의하면 하나님은 경륜에 따라서 선지자들을 보내셨다 하였다. 선지자에게 중요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 편에서 친히 먼저 그들에게 자신을 알리고 그와 대화한다 하였다. 그 분이 그 이스라엘과 계속 함께 있다는 것도 조상 때부터 말씀하신 같은 소리로 그가 세우신 자를 통해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이 인간이 소지하도록 한 유일한 것은 그 분의 말씀뿐이었다. 자신에 대한 우상도 거절하셨고 자기를 위한 성전도 말씀에 기초한 상징적인 것으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어거스틴에 의하면 선지자를 보내신 그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으로서 언제든지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이해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종교개혁시대에 이미 구약의 여호와가 누구인가에 대해서 종교적 논쟁이 생겼을 때, 이런 어거스틴의 입장에 대해서 완전 동의를 하지 못했어도 거의 공통적으로 여호와의 이름으로 이미 그리스도께서 불리어 졌다는 점에서 거의 동의를 보았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 개혁주의 정통주의자들 중 한 사람이면서 정통주의를 집대성했다고 할 수 있는 Heinrich Heiddegger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이미 영원 전부터 선지자직, 대제사장직과 왕직을 가진 자로서 그의 선지자직을 행사해 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따라서 오늘날 K. Barth가 이런 입장에 서서 영원한 예정의 주체자도 그리스도라고 주장하고 있고, H. Bavinck를 포함한 A. Kuyper의 견해를 따르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창조의 중보직을 주장하고 있다.1)
그러나 우리 웨스트민스터 성직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선택에 대한 내용으로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직 뿐만 아니라 삼직론을 언급하였고 요한복음의 표현대로 영원 전부터 성부께서 성자께 주신 자기의 백성에 대해서 고백하였다(8. 1). 동시에 그리스도의 공로와 유효 및 은택들은 태초로부터 모든 시대에 타당하고 그 안에서 교회의 통일성을 확고히 고백했었다(8. 6). 더구나 어거스틴의 경우에 따라 창조사역을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으로 고백하고 있다(4. 1). 그러나 아주 특별한 것은 그들의 종교개혁 전쟁동안에 창조전 예정론을 주장하되 그의 택자들을 위한 수단들까지 미리 정하였음을 고백하였으며(3. 6), 자신의 영광을 위해 행복과 불행에 대한 예정(3. 7)까지 고백함으로서 인간의 평화나 재난과 관계없이 사람의 영원한 구원의 궁극적인 자리로서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그 분의 자유롭고 기뻐하신 뜻과 성경에 있음을 확고히 했다. 따라서 평화의 때나 재난과 전쟁의 때나 인간의 구원의 보증으로서는 그 하나님이 그를 부르심에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당연히 교회를 모으시고 부르신 자가 누구이시며 또한 말씀증거가 무엇을 의미하며 말씀을 맡은 자의 성격이 무엇인지를 깊이 사려하게 된다. 한편 개혁주의자들 중에 구약시대에 그리스도께서 족장들과 선지자들을 신성에 따라 직접 조명하고 오히려 신약시대에는 두 본성에 따라 간접적으로 조명하였다는 인상을 주는 학자들이 있었어도, 결코 그리스도의 선지직의 중단을 주장해 본 일은 없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그의 선자자직을 수행하실 때, 그의 선지자들을 부르시면서 그 특성을 어떻게 계시하였느냐가 중요하다.
그러면 모세이래 여호와의 종, 하나님의 종으로 여긴 바된 선지자들의 사명은 어디에 있는가? 그들이 종이였다면 그 중은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고, 한편 구약 교회를 향하여 보내신 중요한 특성이 있었다면, 그것은 물론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였다는 사실일 것이다. 사실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소지하도록 한 유일한 것은 그 분의 말씀 뿐이었다. 자신에 대한 우상도 거절하셨고 자기를 위한 성전도 말씀에 기초한 상징적인 것으로 남아 있었음이 그 모든 구원의 역사를 통해서 알 수 있었다. 동시에 그 분이 그 이스라엘과 계속 함께 있다는 것도 조상 때부터 말씀하신 같은 소리로 그가 세우신 자를 통해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이렇게 선지자에게 중요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 편에서 친히 먼저 그들에게 자신을 알리고 그와 대화한다는 것이었다(민12:6). 그들에게 주신 그 계시의 내용이 선포되어야 하고 선포했던 내용이었다면, 그는 아직도 하나님의 대언자(출7:1)로 있을 뿐이었다라고 할 수 있다. 그 때 그 말씀이 임하였던 자에게는 그 말씀에 대한 특별한 자세와 규범이 중요한 것이었다. 이 선지자들의 자세는 후대에 와서 파숫군의 사명으로 잘 정의되고 있다.
구약에서 이미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선지자라 부르고 있고(창20:7) 사도시대에도 약속하신 성령이 마가 집에 있는 제자들에게 임하신 것처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임한 여호와의 영이 이스라엘 70인 장로들과 다른 두 사람에게도 곁들어 임하게 하였다(민11:25). 이 때 모세를 통해서 중요한 사실들이 알려지고 있는데, 첫째는 선지자에게는 여호와의 영이 임한다는 것, 둘째는 여호와께서 자신의 영을 주시는 자는 누구나 선지자가 될 수 있음을 선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선지자는 하나님의 택한 종으로서 계보와 상관없이 백성 중에서 부름을 받았던 것이었고 이런 특별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이스라엘 안에서 여호와가 역사하는 상징적인 직책이 되었다. 그래서 모세이래 오랫동안 그 직책은 정치적인 지도자로 겸하게 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왕 제도는 사실 이스라엘의 본래의 것이 아니었고(삼상8:4-9; 호13:9-11), 이스라엘의 유일한 왕은 여호와 하나님이었다. 그 왕과 하나님 사이에는 선자지가 있었던 것이다. 이스라엘에게 왕제도가 있었어도 초기에는 사사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야만 하였던 것이고 용병제도에 불과 하였다. 동시에 스스로 아무나 여호와로부터 부름을 받았다고 하는 거짓 선지자가 생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모세에게 하나님은 선지자의 특별한 표징에 대해서 계시하셨다. 이미 오랜 전부터 근동에는 마리문서들에서나 애굽의 문헌에서 볼 수 있듯이 다양한 신접자들과 신의 말을 하는 자들이 있었는데, 이런 자들을 여호와께서 심히 가증히 여기셨고 결코 본받지 말 것을 선포하셨다(신18:9-14). 이와 관련해서 여호와의 말씀에 대해서 가져야 할 선지자의 특성에 대해서 계시하고 있다. 첫째로 여호와께서 명한 모든 것을 무리에게 선포해야 한다는 것이요, 두 번째로 선포할 때 그 말씀을 가감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요, 셋째로 자기 말을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는 것이요, 넷째로 여호와의 이름으로 임한 말씀을 다른 신의 이름으로 말해서는 안되는 것이요, 다섯째로 그 선포된 말씀에는 증험과 성취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선지자의 선포는 하나님의 말씀 자체와 같았다.
참으로 모세는 바로 앞에서 하나님과 같이 되게 하시기까지 하였던 것이다(출4:16; 7:1). 그 때문에 모세의 글이래 모든 선지자의 글에서 선지자 나와 여호와 나와 구별이 되지 않는 것이다. 이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경우 이사야 40장 이하에 이사야의 이름이 없음으로 그 전체를 다른 저자의 저서로 생각하기 쉽다. 또한 이 사명을 어겨도 하나님 자신이 벌하시는 직책이었다(신18:19-20). 그 좋은 예로 열왕기상 13장에 기록된 무명의 유대 초기 선지자의 죽음에 대한 기사이다. 그 기록은 솔로몬 왕국이 두 왕국으로 나뉘어진 직후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인 여로보암 1세가 예루살렘 성전과 독립적으로 섬기고자 벧엘에 세운 두 송아지 우상 제단에 대한 예언의 내용뿐만 아니라, 예언의 말씀을 선포한 후 유대까지 돌아오는 행동에 대해서도 말씀을 받았다. 그는 예언을 선포하고 돌아오는 마지막 행동에 있어서도 성공했다. 그렇게 모든 사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서 이스라엘의 나이든 선지자가 천사의 말을 빌어 우연히 식사 초대한 것에 응함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침을 당하였던 기사인데, 그 사건은 이스랑엘의 모든 선지자에게 상징적인 것이 되고 있다. 나귀와 그를 죽였던 사자와 그것을 목격하였던 모든 자와 그를 초대하였던 그 나이든 이스라엘 선지자가 그 일을 이룬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해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것을 증험하셨고, 그러나 그가 전한 예언의 내용은 하나님의 것이었고, 결국 모든 선지자들에게도 같은 말씀으로 예언하시고 그 예언대로 이루신 것이다. 이스라엘과 유다의 멸망의 원인에 대한 열왕기서 기록이란 이 핵심 주제로 맥이 이어져 있는 것이다. 그 긴 역사는 마지막 유대의 멸망의 원인에 대해서 예언한 예레미야 선지자로 하신 말씀대로 즉 "(렘7:25) 너희 열조가 애굽 땅에서 나온 날부터 오늘까지 내가 내 종 선지자들을 너희에게 보내었으되 부지런히 보내었으나(렘7:26) 너희가 나를 청종치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고 목을 굳게하여 너희 열조보다 악을 더 행하였느니라"(호12:9-10)였기 때문에, "그 종 모든 선지자들로 하신 말씀대로"(왕한17:23;21:10;24:2) 멸망한 것이다.
성경이 역사에 대해서 말한다 해도 하나님이 보는 역사인 것이다. 그의 긍휼로 그 분의 것이 아닌 우리의 것을 자세히 설명해도 그 사실들은 우리에게 증명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 칼로 벤 것처럼 "(호6:5) 그러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저희를 치고 내 입의 말로 저희를 죽였노니 내 심판은 발하는 빛과 같으니라"하였다. 히브리서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성격이 정확하게 이해되고 있다(히4:12-13). 그 본문의 전체 문맥은 구약의 하나님의 말씀에만 제한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약시대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성격을 가리키고 있다. 그와 같이 "(렘23:29)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말이 불같지 아니하냐 반석을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렘23:30)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므로 보라 서로 내 말을 도적질하는 선지자들을 내가 치리라"하였다. 말하는 자가 바르게 말하지 아니하면 그 말씀을 도덕질하는 것이요 그의 바르게 지키지 않는 것도 침을 당하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남의 말과 글을 도덕질하는 경우가 있는데 선지자는 그 혀를 놀려 도덕질을 못하는 직책이었다. 학자의 진실과 선지자의 신실이란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도 이것이 엄중한 말씀이라 말할 수 없는 존재이다. 하나님이 친히 엄중한 말씀이라 했을 때에만 엄중한 말씀이 되는 것이다. "(렘23:35) 너는 또 말하기를 너희는 서로 이웃과 형제에게 묻기를 여호와께서 무엇이라 응답하셨으며 무엇이라 말씀하셨느뇨 하고" 함부로 물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십계명의 기초에 깔려 있는 대로, 여호와 말씀을 망령되이 사용하는 것은 사시는 하나님을 망령되이 취급하는 것이요, 실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인 것이다. 십계명의 전반부와 후반부가 다 통일을 이루어 선지자의 사명과 이스라엘 역사가 설명되어지고 있는 것이 구약 선지자들의 글의 구체성이다. 하나님의 말씀이라 그것을 받는 자의 것도 아니고 그것을 듣는 자의 것도 아닌 것이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것인 것이다. 말씀을 전달하는 자의 사명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것을 정직하고 바르게 전달하고 그 말씀을 지키는 자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다. 선지자가 취한 사람 같으며 포도주에 잡힌 사람같은 것인가? 아니다. 자기의 마음의 것을 완전히 분리하고 여호와의 말씀으로 가득 채워야 하기 때문에 취한 것이다. 그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와 그 거룩한 말씀으로 취한 것이다. 그러나 그 일은 기쁨이 아니라 쑥을 먹고 독한 물을 마시는 것처럼 쓴 일이었다. 호세아가 너는 가서 음란한 아내를 취하여 음란한 아내를 취하라는 말씀은 그에게 고통인 것이다. 요나 선지자가 니느웨성에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더 나았던 것이다(욘4:3). 그러나 이들은 이스라엘의 파숫군으로서 악인에게 "너는 꼭 죽으리라"란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은 그들을 죄악 중에 죽게 내버려 두는 것이었다(겔 4:16-21;33:7-9). 이런 선지자들의 오래된 사명에 따라 쯔빙글리, 칼빈은 파숫군의 사명을 정의하였고 이 사명을 말씀맡은 자의 독특한 사명으로 내세웠다. 그런 사명의 독특성 때문에 주교와 목사를 구별하지 않았다. 그들은 평등하게 선지자들과 같이 그리스도의 청지기들이요, 하나님의 신비의 분배자들이다. 동시에 파숫군의 그런 오직 성경의 원칙이 바로 모든 선지자들과 교회목자들의 일반 규칙이었다.
2. 오직 성경과 그것의 해석문제
우리가 여기 칼빈의 생각하고 말하는 규범으로서의 오직 성경의 차원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는 줄 안다. 여기에서 새롭게 언급하기를 원하는 것은 성경대로 생각하고 성경대로 말하는 일이란 우리 자신이 가장 방해거리가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의 시대가 방해거리이며 나의 인간성이 방해거리가 된다는 것이다. 동시에 전제없는 사고와 전제없는 순수학문을 말하지만 그것이 가장 큰 우리의 전제인 것이다. 우리가 흔히 성경에 대해서 문법적 해석, 역사적 해석에 대해서 말한다. 성경의 언어로 돌아간다는 것이나 성경의 역사로 돌아간다는 것이란 어떤 언어로 돌아가느냐가 중요하고 어떤 역사로 돌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동시에 그렇게 돌아가는 것이란 각각 분리해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생의 세계전반 즉 통합적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최소한 다음 두 가지 조건들이 만족되어야 한다. 즉 그를 위해서 1)우리시대까지 우리 자신의 생의 모든 형식과 모양을 제거할 수 있는 능력과 2)성경의 언어표현들 귀에 있는 그 시대의 역사적 생의 세계와 현장을 정확하게 돌아갈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이 두 가지 조건들이 만족시키는 것은 바로 언제든지 학문의 총체적인 작업이며 가장 엄밀한 자비판 과정을 의미한다. 이때 나타나는 모든 한계들에 따라서 가장 중요한 단계가 본문을 본분 그대로 내버려두는 단계이다. 모든 학문에서도 가장 어려운 작업은 그 자체로 내버려두는 작업이다. 이런 한계에 도달하여 이르게 되는 자연스러운 해석학적 입장이 소위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는 방식이다.
역사적으로 종교개혁자들이 이런 해석학적 입장을 취하였던 근거는 성경의 신적 기원 때문이라 말할 수 있다. "오직 성경"이 갖는 해석학적인 입장이란 늘 궁극적인 저자에 대한 의식과 분리할 수 없다. 동시에 이것 때문에 문법적, 역사적 해석을 벗어나 혹은 넘어서 과도한 해석을 시도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과도한 해석들을 잘 분석해 보면 실제로 거기에 문법적, 역사적 해석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미 언급한 두 조건에 만족시키는 능력의 부족으로 생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성경의 제 1원인자에 대한 강한 입장 때문에 정통주의에서는 기계적인 영감을 계속 믿어 왔으나 17세기 후반에2) 와서 제2원인자인 성경의 인간 저자를 좀 더 의식하여 유기적 영감이론이 등장하였다고 볼 수 있는데, 이때 인간 저자의 사고방식과 역사적 언어 및 생활습관을 고려하게 된 것이다. H. Bavinck는 이런 영감방식의 특성에 따라 "성경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의 산물임과 동시에 전적으로 저자의 현실성의 산물이다"는 말을 남기고 있다. 이런 입장에서 조심이 영감된 성경에는 문학의 장르들이 있음을 인정하여 비유 및 우화까지(삿9:8) 있음을 인정하였다. 그렇지만 성령의 인도아래 성경의 저자들이 신화들, 고화들, 전설들의 예를 통하여 종교적 혹은 더덕적 진리를 가르치고자 하였다는 카이우스의 입장을 그는 거절하고 있다. 이러한 영감방식의 서술은 성경의 판명성을 보증하고 한층 더 성경기록의 역사성과 관련된 사실들을 부정하지 않으려는 조심한 입장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이런 영감이해란 바로 위에 두 가지를 해석자가 얼마나 충족시켜야 하는가를 강조하고 있는 셈이다.
3. 성경의 언어 역사성으로 돌아가는 방식들
주전 256년의 한 파피루스(PSI IV 341)에 두 직물공이 관원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들이 만드는 옷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그 종류를 보면, 망또, 통옷, 띠, 겉두루기, 칼집, 베, 여성뜸새옷, 브, 긴 옷, 화려한 여성옷 등이 있다. 여기에는 우리의 개념인 내의의 개념들은 없다. 여성의 수영 비키니의 모양은 이미 주 후 5-6세기에도 정확하게 그림으로 증명되고 있고 아래 속옷은 아주 구석기 시대에서부터 증명되고 있다. 그러나 위 파피루스의 경우에도 내의 옷이란 개념이 형성되어 있지 않다. 우리의 성경에도 로마군인들이 예수님의 머리에 가관을 씌울 때 겉두루기를 벗기고 그 망또를 두르게 하였다. 그리고 조롱 후에는 망또를 벗기고 다시 겉두루기를 입혔다. 마지막 십자가상에서 겉두루기를 벗기고 통옷도 벗겼다. 그것이 옷을 벗기는 모든 것이었다. 역시 예수님의 산상보훈에서도 통옷을 달라하면 겉두루기도 주어라고 하셨다. 이런 옷들에 대해서 요한복음 만이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의 겉두루기를 군인들이 네 깃으로 나누어 가져갔고 예수님의 통옷, 정확하게 바느질하지 않고 위로부터 통으로 엮은 통옷이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말하는 속옷의 개념을 말하기 꺼려 하였든지 속옷의 개념이 없었든지 둘 중 하나이다. 그러나 그 본문은 시편 22편 18절과 연결되어 있다. 거기에서 사용된 "덮는다"와 "입는다"는 약간의 뉘앙스가 다른 셈 족적인 옷의 표상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70인역의 번역자는 두 옷을 다 겉두루기의 옷으로 번역해 버렸다. 물론 우리 요한복음이 히브리어 원문에 가깝게 사용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본문이 인용된 표상은 70인역의 표상들에 머물러 있다. 역시 나사로의 주검의 수족을 베들로 매어 묶었고 수건으로 얼굴을 둘렀다고 기록하면서(요11:44), 예수님의 경우 세마포로 묶었다(요19:40)고 기록되어 있다. 이 경우에도 베, 세마포, 수건의 우리말 개념이 정확히 그 원어에 대응하는지는 애매하게 남아 있다. 실제 베에 대한 헬라어 표기에 있어서 철자법의 차이란 어떤 시대나, 지역이나 방언이나 개인의 차이가 아니라 개인의 일시적 성향의 차이임이 주 후 1세기의 철자법의 특성으로 남아 있다.
이렇게 몇 가지 예로 당시 그 시대의 언어관용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한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들이 관찰되고 있다. 첫째로 언어를 이해한다는 것이란 가능한 한 구체적인 직관적인 표상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둘째로 언어와 그 표상들의 역사성이다. 그 언어를 이해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발생한 비슷한 언어들을 버리는 작업이 요청될 뿐만 아니라 비슷한 표상을 가진 언어일지라도 표상의 역사성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모든 예들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얻어지는 결론은, 해석자 자신의 언어관용들을 포기하고 벗기는 작업이 바로 그 시대로 돌아가는 것이고, 성경의 이해와 직결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신의 언어관용을 벗기는 작업에 있어서 고고학적 작업이 쉽게 도울 수 있다. 그러나 그 때에도 나의 관련된 문환전체성이 방해되는 것이다. 과거로 돌아가고 본문을 이해한다는 것은 문화전체의 역사성을 나로부터 분리시키고 독립시키는 작업이 선행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작업의 정도와 능력에 따라 사전과 주석의 차이가 있다고 말할 수 있고 우리가 돌아가는 한계가 결정된다. 성경기록의 역사성이란 그런 한계에 따라 이해되는 것이다. 무엇을 얼마만큼이나 알지 못한가를 아는 그 한계의식은 모든 것을 알 때 동시에 생기겠지만, 정상적인 방식에 의해서 해석자가 자기비판의 방식이 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1) 우리에게 판명성을 향한 근원적 성향이 있다.
일반적으로 증명하기를 원하는 정신에는 늘 이런 성향이 있다. 혼돈의 상징인 자연을 개조하는 문화의 형성은 이런 성향 때문이다. 놀이와 예술을 좋아하는 것도 늘 이런 성향에 따라 좋아하는 것이다. 어린아이에게 언어능력이 형성된다는 것은 본성으로부터 혹은 대상으로부터 공간성 형성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동시에 통합적 사실에 대한 포기와 분화화이며 자연에 없는 새로운 자기혼돈의 세계에 들어간다. 자기 혼돈에서 분화화되기 전의 구체적 표상으로 돌아가는 해석이란 우리의 근본적 판명성을 향한 성향에 대한 만족이라 할 수 있다. 말보다 예를 찾고 개념보다 그림을 찾는 것은 인간의 근원적 성향과 관련되어 있다. 일찍이 칸트가 경고하였다. 그런 판명성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에 판명성을 줄 때 모든 오류와 가상이 발생한다고 하였다. 특별히 그에 의하면 인간능력이 피할 수 없는 가상도 있다하여 선험적인 가상이라 부르고 있다. 자유의 개념 같은 것이 그 예다. 우리가 성경을 해석한다는 것은 이런 근원적 성향에 대한 직접적인 만족을 의미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비판이란 이런 성향으로 생긴 모든 결과들을 일단 괄호 안에 넣은 작업을 의미한다.
2 언어는 근본적으로 개방적이다.
언어를 발생하는 측이든 언어를 사용하는 측이든 자신표상방식과 더불어 발생하고 사용한다는 근본적 성격을 의미한다. 이런 성격 때문에 이해의 통일성을 잃고 있다. 본문에 대해서 한 의미를 가져야 된다는 당위성일 뿐 실제성은 아니다. 그래서 이런 자유성으로 생길 수 있는 모든 것을 괄호 안에 넣는 작업이 자기비판의 모습이다.
3) 역사적으로 발생하여 축적된 다양한 사고방식들로부터 벗어나는 작업이 자기비판작업이다.
기계적인 사고방식과 수학적인 방식이 이루어 놓은 기능적인 사고방식, 모든 대상을 3인칭화하는 사고방식, 실존이나 행위를 본질이나 개념을 선행시키는 사고방식, 언어와 개념의 분활화현상, 현상과 방법을 분리하는 경향등등 그 역사적인 사고방식으로부터 완전 자유로워질 수 있는 능력이 자기비판의 모습이다.
4. 성경해석의 궁극적인 목표로서 하나님의 뜻을 찾는 일
이런 자기비판의 능력이란 하나님이 보는 절대적 역사성(계시성)을 찾는데 주 목적을 두고 있는 것이다. 중세시대를 지배하였던 Hugo von St. Victor의 세 단계의 주석이나 세 가지 눈들, 세 가지 관조들은 실제적으로 위에서 자기비판의 과정과 한계를 의미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것이 아니다. 이런 중세시대의 다양한 의미를 비판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입장에서도 성경해석이 추구하는 한 의미란 참되고 완전한 의미를 의미하고 있다. 다만 그 고백에서 핵심적인 것은 어느 누구도 변명할 수 없을 만큼 충분한 이해와 성령의 조명이 필연적인 구원적 이해와의 구별이다. 전자의 이해에 관련해서 언급되었던 내용들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과 인간의 구원, 믿음과 삶에 필연적인 모든 것들에 관한 하나님의 전체적인 뜻은 선하고 필연적인 귀결에 의해서 연역된다는 것과 구원을 위해서 알아야 하고 믿고 지켜야 할 필연적인 것들은 어느 누구든 정상적인 수단들을 정당하게 사용함으로 충분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이해는 구원과 상관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칼빈으로부터 시작하는 중요한 해석관이다.
그러나 구원적 이해에도 한계가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위에서 든 자기비판의 모든 과정은 인간의 결정적인 한계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설교를 위한 해석은 이런 결정적인 한계를 넘어서는 해석이어야 하고 이런 해석을 구원적 해석이라해도 무방하다. 동시에 구원적 해석은 성령의 역사와 참된 신앙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비록 성경은 자체가신성을 가졌기 때문에 고유한 객관성이 있는 것이고 그 객관성은 다만 제1저자인 하나님의 영에 의한 조명과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는 방식으로 들어난다는 생각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일찍이 종교 개혁주의자들은, 특히 쯔빙글리, 불링거, 칼빈 등의 개혁주의자들이 성경의 표현들을 희랍의 수사학적인 분석방법을 통해서 어느 정도 성공할 수 있었다. 칼빈은 선지자들의 말씀을 이해할 때 대표적으로 5가지 원리를 깨달았다. 첫째는 같은 사실을 여러 가지 말로 반복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선지자들의 말씀의 중요한 특성이다. 계속 반복하여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시는 이런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의 하나님을 나타내고 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하여 그의 은혜를 표하신 이후 그 은혜는 계속 확대되었던 것이다. 둘째로 칼빈을 통해서 분석된 사실은 그 말씀들이 제유법을 쓰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법은 하나의 중요하고 특징적인 표상을 가지고 전체를 포괄하는 방법으로 관찰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현저한 표현방식이다. 포도나무를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를 표상한다든지, 그루터기를 역사적인 성격을 표현한다든지 등이다. 셋째로 환유법이다. 이것은 신비한 것이 논의될 때 사용되는 표현방법으로, 더 놓은 것으로부터 더 낮은 것으로 전이되는 식일 뿐만 아니라, 볼 수 있는 표징명사가 실제들에게 주어지는 방식이라 설명하고 있다. 예를 들어 어린양이 유월절이라 한다든지, 반석이 그리스도라 한다든지 언약궤를 하나님의 얼굴이라 한다든지 비둘기를 성령이라 한다든지 하는 식이 다 그런 방법이라 정의하고 있다. 넷째로 일반적인 비유법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고 마지막 다섯째로 가장 중요한 원리로서 하나님이 스스로 인간의 방식에 적응하는 계시방식을 아주 자주 언급하고 있다. 이런 대표적인 원리들은 다른 정상적인 원리들과 함께 성경을 해석하는 종교 개혁적 좋은 유산으로서 남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는 그런 원리들로서도 설명되지 않는 여러 가지 표상들이 있는 것이다.
결론
기독교의 진리는 그 자체로부터 진리이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 진리성이 진리자체인 하나님 이외에 어떤 길로도 보충되거나 감해지는 것이 없다. 우리가 그 진리성에 참여하는 것도 우리 스스로 참여하는 것이 아니다. 빛이 세상에 있었으되 빛으로 오지 못하는 우리의 한계가 우리의 어두운 죄에 있었고(요3:19-20)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 속하여 있지 않기 때문이다면(요8:47), 성경의 참된 해석과 이해도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과 연결되어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 영원한 진실성 안에서만 무한한 자기비판과정이 열려있는 것이고 그 안에서만 모든 것으로부터 독립적이다. 말씀의 참된 선포자는 그 진실성안에서 절대적 독립성을 가지고 있다. 파숫군의 사명은 그런 독립성 이외에 다른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 안에서 파숫군의 독립성을 어느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것이다. 동시에 그 진실성안에서만 보편성이 있다. 그 독립성은 항상 같은 하나님 안과 그 역사 안에서 보편성을 갖는다. 그 하나님은 자연과 인간역사를 무시하고 계시하신 일이 없다. 오히려 그만이 자연과 역사의 참된 해석자로 남아 있기를 원하시고 있다. 이런 조건하에 역사적 자료들과 고고학 자료들을 사용할 수 있다. 오히려 참된 신앙의 조건하에서는 역사적 실재성을 알려주는 자료들은 성경에 대한 확신을 깊게 하고 이해의 폭을 넓게 한다. 그런 객관적인 자료들은 사람으로 하여금 변명할 수 없게 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역사적 상황으로 돌아가는 인간능력을 보여줄 뿐, 진리자체에 어떤 것을 보충하거나 감소하지 못하는 것이며 성경본문이 주어진 목적에 합한 이해에는 질적인 한계가 있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축적된 모든 다양한 사고방식들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자기비판의 모습에서도 구원적인 이해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즉 성경에 대한 확신과 이해는 전혀 다른 원리에 기초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따라서 설교를 위한 성경이해와 해석이란 성경의 본저자로 말미암아 조명되는 역사안에서만 의미가 있다.
미주
1) K. Schilder는 이런 입장을 강하게 부정하고 나서고 있다. 그에 의하면 창조역사에 성령의 사역과 성자의 사역의 개입은 분명하나 성자의 사역이 중보의 이름으로 표현해야 하느냐에 대해서는 성경적 근거가 없는 사변적이라하여 전혀 부정하였다. 이에 대해서 Apeldoorn의 입장은 기본적으로 스킬더의 입장에 동조하면서도 바빙크의 입장을 변호하고 있고, 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입장에 가까이 머물러 서 있다는 것이 주목되고 있다.
2) Johannes Cloppenburg는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이나 그의 입으로 말씀하시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것이나 혹은 간접적으로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입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영이 말씀하신 것이나 차이가 없다"라고 하였고, H. Heidegger는 기록영감방식에 관한 견해에 있어서 좀 더 현대입장에 가깝다. 1) 성령은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고 듣는 일에 주의 깊게 관심하도록하여 그들을 정당하게 인식하고 그 일에 대해서 정당하게 명철을 가지고 마랗게 하고 모순이 없이 실증하도록 하였다. 2) 하나님의 말씀을 성찰하여 그들로부터 진리와 그것의 논증을 통찰하도록 하였으며 선포나 기록에 있어서 그들에게 선한 양심을 주어 마음으로 파악한 것들을 말하고 기록하도록 그들을 매 계시를 통해서 영감하였다. 3) 선포된 말에 있어서나 묵시에 있어서 혹은 내적으로 영혼과 대화함으로 계시들에 꼭 맞게 어떤 방식을 신비와 예언을 표현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다만 신비적인 말로 아니라 그들의 말로 구술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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