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자의 사랑
눅 15:3-7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 까지 찾아다니지 않겠느냐 또 찾아낸
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
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오늘 제목을 “목자의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잃은 양의 비유입니다. 성경에는 양에 대해서 500여회나 언급하고 있고 목자라는 말도 100여회나 나타나고 있습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과 뜻과 관심을 양치는 목자의 심정을 통해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몇가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1. 하나님의 사랑
본문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가를 목자의 삶을 통해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어느 목자가 양 100마리를 사육했습니다. 목자는 양을 보통 해발 평균 500고지에서 끌고 다니며 풀을 뜯게 하고 양을 칩니다. 팔레스타인에서는 양을 사육하는 것이 본업입니다. 마치 우리나라에서 농사짓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만큼 양을 치는 일은 유대인들에게는 천직인 셈입니다. 유대인들이 양을 치게 된 근원을 보면 창세기 4장에서 가인과 아벨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양을 치는 일은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천직이었습니다. 그리고 양을 치는 일은 단순히 양을 치는 것만 아니고 종교의식과도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양들이 때로는 제물용으로 바쳐지기 때문입니다. 보통 목자 한명이 20마리에서 200마리를 사육했습니다. 그리고 300마리 이상 사육자는 대 규모 목축 업자에 속합니다. 목동생활은 단순히 멋있고 재미있고 쉬운 분야가 아닙니다. 목자의 삶에는 큰 책임이 뒤따릅니다. 목자는 양을 물가로 인도하고 때로는 초지로 쉴 곳으로 안전한 곳으로 인도하고 저녁이면 집으로 인도해야 합니다. 때로는 맹수로부터 지켜야 하고 도적떼로부터도 지켜내야 합니다. 그것이 목자의 삶입니다.
그리고 목자는 현장성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다윗은 왕으로서 성공한 사람입니다. 그 이유는 그가 목자의 삶을 충실하게 살았던 그 경험 때문입니다. 그는 수천마리의 양을 인도해서 물가로 초지로 쉴 곳으로 안전한 곳으로 인도하고 저녁이면 집으로 안내하는 자상한 배려와 책임감을 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맹수들이 양을 물어갈 때는 쫒아가 그 입에서 양을 뺏어왔고 수많은 도적떼들로부터 양을 지키기도 했습니다. 그 책임감과 양을 사랑하는 마음이 나중에 왕으로서 백성을 다스릴 때 양을 보살피던 그 책임감으로 다스렸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왕으로서 성공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과 솔로몬과 르호보암이 왕으로서 실패를 합니다. 그들에게는 이 현장성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기 목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 목자는 양 한 마리의 필요와 애환과 아쉬움을 다 들어주는 목자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2. 한 마리 소중히 여기심
수천 마리 양을 치다 보면 때로는 이탈하고 길을 잃는 양이 나오게 될 것입니다. 그곳에서 만일 양이 길을 잃으면 반드시 사고가 납니다. 그래서 저녁이 되면 목자는 양의 수를 셈해서 수가 맞으면 집으로 이동합니다. 그런데 만일 한 마리라도 없어지면 온 지역을 헤매며 찾아야 합니다. 본문은 그래서 온 산을 헤매는 목자의 심정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길 잃은 양은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아 헤매는 목자는 하나님의 심정을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에 대해서 끊임없는 관심과 애정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헤매고 돌아다닙니다. 그래서 찾으면 “양을 어깨에 메고” 마치 온 세상을 정복하고 돌아오는 승리자의 모습으로 돌아와 잔치를 베풀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본문 7절을 보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하늘에서 더 기뻐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스바냐 3장17절을 보면 “그가 너를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신다”고 했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한 마리를 소중히 여깁니다.
3. 인간 사랑의 표현
여기 양의 비유는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기도 했지만 그 중심은 모두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을 말씀하시려는 뜻입니다. 여기서 인간의 값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은 너무 집착할 정도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너무 신비한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1) 사랑받기 위한 존재로
목자는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서 동분서주 합니다. 그것은 한사람의 인간의 값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난 존재“입니다. 인간은 마땅히 사랑받아야 합니다. 어린 아이가 태어나면 마땅히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그 아이는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태어나서 충분히 사랑받은 아이는 다릅니다. 어느 어머니는 사회적으로 너무 유명해서 날마다 밖으로 나 다녔습니다. 그런데 집에 있는 아이는 불구아였습니다. 그 아이는 늘 언제나 집에서 혼자 있었습니다. 여류명사인 어머니는 집에 올 때 마다 선물을 사 가지고 왔습니다. 하루는 생일날 하루 종일밖에 나가 있던 어머니가 큰 선물을 사 가지고 왔습니다. 그런데 아이는 선물을 받고 기뻐하지 않고 눈물만 흘렸습니다. 어머니는 “왜 선물을 주는데도 기뻐하지 않고 눈물을 흘리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아이가 말했습니다. “나한테는 선물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어머니가 함께 있어주는 일이 이 더 필요합니다.”
부모들이 때로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용돈을 많이 주고 선물이나 장난감을 많이 사 주면 다 되는 줄 압니다. 그래서 오늘 아이들이 풍성하게 자라기는 하는데 정서가 부족한 것입니다. 아이들은 함께 있어주고 마음을 주고 같이 놀아주는 일이 더 큰 선물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사람들이 만든 발명품들은 모두 일하고 돈을 버는 기계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는 사랑의 대상으로 지으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사랑을 받아야 살아가지는 존재입니다. 사람은 사랑받을 자격을 가지고 태어난 존재들입니다.
2) 받은 사랑을 누리는 존재
사랑은 받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받은 사랑을 누리는 것은 더 중요한 일입니다. 누릴 줄 모르면 소용없습니다. 물질이 많으면 무엇합니까. 지식이 많으면 무엇합니까. 그것을 누리고 즐기고 향유해야 합니다. 어느 부자는 돈이 많았습니다. 그런데도 그 분은 평생 외식이라면 자장면만 사 먹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아주 인색했습니다. 결국 늙어 병석에 누웠습니다. 그러자 자식들이 뻔질나게 드나들었습니다. “어디 아프십니까, 우리 집으로 가십시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별로 개의치 않고 “빨리 불이나 끄라, 전기세 나온다”하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그는 어둠속에서 홀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여기까지라면 그 인생은 참으로 비참한 인생입니다. 그 많은 물질이 그에게 무슨 즐거움을 주었습니까.
그런데 그 다음은 그의 인생에 감동을 주는 대목입니다. 아버지의 죽음 소식을 듣고 자식들이 순식간에 모여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변호사가 나타나더니 “아버지께서 모든 재산을 자선단체에 기증하셨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가 버렸습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그렇게 인색했던 분이 세상을 위해서는 이웃을 위해서는 그렇게 풍성하고 넉넉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감동을 준 것입니다. 이것이 그 좋은 물질을 향유하고 즐기고 누리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그곳에 감동이 주어지고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너무 많이 받고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마땅히 그 사랑을 누리고 즐기고 향유해야 합니다. 누리면서도 불평하고 불화하고 원망하는 것은 별로 소중함도 모르는 삶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받을 줄도 알고 누릴 줄 알아야 합니다. 성숙한 사람은 줄줄도 알지만 적절히 누릴 줄도 압니다.
삶은 주고받고 누리는 것입니다. 특히 사랑을 받아본 사람은 주기도 하고 누리기도 합니다. 아이 때는 받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아이 때는 받아야 할 사랑이 부족하면 아이가 부실해집니다. 그래서 아이는 사랑을 충분히 받고 자라야 합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어른이 되면 받았던 사랑을 주는 대상을 찾습니다. 그리고 사랑을 주지 못해서 안달하고 몸살을 앓습니다. 사랑은 주고 나누고 베풀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줌으로서 얻은 것 보다 더 좋고 기쁜 것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사랑을 줄 때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고 보람을 느끼며 삶의 뜻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이 사랑이 지니는 독특한 속성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주체시고 사랑의 불덩어리가 되십니다. 그 불덩어리는 모든 것을 녹이고 태워버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사랑으로 접촉하는 것 마다 사랑으로 녹여버리십니다.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는 존재마다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으로 동화시켜 버리십니다. 하나님은 방황하는 존재를 사랑의 존재로 바꾸어 놓으십니다.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온전한 사랑을 주셔서 치료하십니다. 우리는 사랑의 하나님의 창조물이기 때문에 한편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이고 또 우리는 그 사랑 자체를 누리고 즐기고 향유하고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3) 사랑을 세상에 전하는 존재
받고 누리는 것은 나만을 위해서만은 아닙니다. 내가 배우는 것은 나만을 만족시키기 위함도 아닙니다. 배움은 사용하기 위해서 입니다. 내가 오늘도 누군가를 만나는 것은 그들로부터 사랑을 받기 위함이고 동시에 그들에게 전달할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사람들을 만날 때 마다 저 사람에게 무슨 일을 시킬 것인가를 생각하기보다 저 사람을 위해서 내가 무엇을 줄 것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 생각을 마음에 품으면 즐거움과 기쁨이 만들어집니다. 그런데 그 받은 사랑을 전하고 나누는 것은 더 중요한 일입니다. “전하는 자” 얼마나 영광입니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사람의 발걸음이 아름답다”고 성경은 말씀했습니다. 전쟁에서 승전보를 백성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죽도록 뛰어가는 전령의 발걸음, 피곤하고 지쳤지만 멈추지 않고 더 빨리 뛰어갑니다. 왜냐하면 반가운 소식을 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만난 하나님을 전하고 내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말로 전하고 내 입으로 간증하는 것도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들로부터도 사랑을 많이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도 사랑을 많이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사랑을 받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그 사랑이 어떤 사랑입니까.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위해서 온 종일 길을 잃고 헤매고 있을 양을 생각하며 험한 비탈길을 헤매고 다니는 목자의 사랑,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그 사랑을 말하고 나누고 소개하고 증명하는 몫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에 전하기 위해서 태어난 존재들입니다.
4) 아름다운 존재로 살게
사랑을 받고 누리고 전하는 일도 소중한 일이고 복된 일입니다. 그런데 목자의 품안에서 잘 자란 양 자체도 복된 일입니다. 길을 잃은 양을 찾아 헤매다가 찾았을 때 얼마나 기쁘고 행복했겠습니까. 얼마나 기쁘면 집에 돌아와 잔치를 베풀었겠습니까. 그런데 온전한 곳에 있는 99마리의 양은 더 아름다웠을 것입니다. 집에 돌아온 탕자도 반가운 일이지만 집에 조용히 아버지의 뜻을 따르며 살아가는 아들은 더 아름다운 아들입니다. 오늘 회개하고 돌아온 잃었던 양이 돌아왔을 때 하늘의 하나님은 하늘에서 더 기뻐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타락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울안에 있는 양들을 보시고는 더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것이 아름다움입니다.
오늘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시대입니다. 아름다움이 오늘은 최대의 우상입니다. 그래서 저마다 아름다워지려고 안간힘을 다 씁니다. 이 아름다움의 추구는 영상매체가 등장하면서 더욱 극성을 떨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안에서의 아름다움은 모양의 아름다움도 중요하지만 그 보다 하나님의 성품을 지님의 삶이 더 아름다움 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성품뿐이 아니고 아름다움의 성품도 지니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지으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감탄하셨습니다. 하나님 자체가 아름다움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 속성에 따라 세상도 인간도 아름다운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그래서 시편 27편4절을 보면 “내가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하고 고백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동화시키는 아름다움이기에 우리의 내면과 영혼과 정신 깊숙이 아름다움을 침투시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추한 사람도 아름답게 만드십니다. 외모의 추함에도 내면을 고상하게 만드십니다.
15세기 이태리의 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42세 때에 밀라노의 로드비치 공이 예수의 최후의 만찬 모습을 그려달라고 부탁해 왔습니다. 그래서 다빈치는 혼신을 다해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리고 친구에게 그림을 평가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친구는 “좌우에 제자들을 반씩 배치한 것이 참 좋고 무엇보다 예수의 손에 든 은잔이 가장 아름답다”고 평가해 주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다빈치는 얼굴이 하얗게 굳어지더니 마침내 붓으로 그림을 지워 버렸습니다. “이 그림은 예수가 중심이 되어야 하는데 은잔이 중심이라니 실패작”이라면서 지웠습니다. 아름다움은 모양만이 아니고 생김새만이 아닙니다. 아름다움은 옷을 잘 입어서가 아니고 품위가 있어서 만도 아닙니다. 진정 아름다움은 그 중심입니다. 그 중심에 예수께서, 하나님께서 자리하시도록 배려하고 인정하는 삶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오늘 사람들이 아름다움의 근처에도 가지 못하는 것은 모두 그 중심에 자기 자신이 버티고 서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름다움은커녕 냄새가 자꾸 나는 것입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가를 표현하기 위한 비유입니다. 어느 목자가 양 100마리를 양육하는데 한 마리가 이탈하여 길을 잃었습니다. 100마리 중 한 마리는 별로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한 마리는 참 중요합니다. 한 마리의 소중함을 모르는 목자는 나머지 양도 귀함을 모를 것입니다. 그래서 잘 양육할 마음도 없고 충실한 인도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아무리 큰 것도 작은 것 하나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작은 한 마리 양부터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그 하나님은 이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나 한사람에게까지도 관심을 가지시고 사랑하고 계십니다. 나는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난 존재입니다. 나는 이점을 알아야 합니다. 그때 나의 삶이 당당해지고 소중해지고 책임 있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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