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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연구 총정리〓/바울 신학(김세윤)

바울신학 제2강 (김세윤 교수)

by 【고동엽】 2021. 11. 2.
바울신학 제2강 -김세윤



7.종말론적인 해석

종말론적 해석의 창시자는 W.Wrede인데 이를 발전 시킨 사람이 A.Schweitzer이다. 아프리카에 의료 선교사로 간 그는 원래 신학자였다. 젊은 나이(30대 초)로 스트라스부르그 신약한 교수였다. 기숙사이면서 동시에 신학교육도 일부 시키는 대학에 소속된 곳의 長이기도 하였다. 그는 '에수전 연구(라이마루스에게)'라는 유명한 책을 통해서 예수 연구에 하나의 분수령을 이루었는데 바울 운역에 있어서도 두권의 책으로 하나의 분수령을 이룬다. Geschichte Paulus Forschurg(바울 연구의 역사 1912)와 Die Mystik des Paulus(사도바울의 신비주의,1931)라는 책이 그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마치 20시기의 대표적인 그리스도 신앙인으로 생각하는데 전혀 그렇지 안다. 오히려 그는 인본주의자였다. 그는 그의 의과대학 논문 '예수의 정신 상태'에서 예수가 조금 미쳤다고 봤다.

그는 주장하길 임박한 종말-하나님 나라가 금방 임박할 것으로 예수가 알았다. 예수가 가지 제자들을 갈리리 여러동네에 보내어 하나님 나라가 임박했으니 빨리 회개하라는 선포를 하라고 내보내고 나서는 그 제자들이 자기에게 돌아오기 전에 하나님 나라가 도래할 주로 알았는데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지도 않았고 이스라엘이 회개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안되겟다고 생각하고 하나님과 연결해야겠다고 여기고 회개하지 않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과 대결해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도록 부름 받아서 온 자기를 그들이 잡아 죽이면 하나님은 하는 수 없이 역사에 개입하셔서 심판을 하시고 하나님 나라는 도래하지 않겠나 하는 판단으로 절망적 상황가운데 유대 지도자들과 대결하여 죽음을 자초했다. 이렇게 함으로해서 하나님이 패역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고 하나님 나라를 이루실 것으로 기대했는데 불행히도 하나님 나라는 도래하지도 않고 역사는 쉬지도 않았으며 그 역사의 수레바퀴는 계속 돌아가버렸다. 결국 불행하게도 멈추지 않고 계속 돌아버린 역사의 수레바퀴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멈출려고 수레바퀴를 꽉 붙들고 있는 예수의 몸을 산산조각으로 찢어 놓았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라는 것이다. 이것이 그의 '역사적 예수의 추구(라이마루스에게)'라는 책의 결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론에서는 갈릴리의 예수가 나를 따르라고 우릴 부른다고 신비스럽게 써 놓고 있다. 그리고는 자기가 스트라스부르그 대학에서 신약교수로 있을 때 하루는 자기가 그 목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어느 주일날 예배갔다 와보니까 자기 책상 위에 아프리카 내지 선교를 하는 개신교 선교단체(파리에 본부가 있는)의 자료가 있었다. 이것을 보고 하나님이 부르심으로 알고 교수직을 팽개치고 선교사 의사고 가야겠다고 결심하였다고 한다. 갈릴리 예수의 나를 따르라는 목소리를 자기가 듣는 듯한 감을 느겼다고 한다. 그래서 선교사가 되기고 하고 선교단체에 지원을 했다. 그런데 선교단체에서는 이런 Liberal 중의 Liberal, 이런 이단자를 선교사로 보낼리가 없다. 이것을 미리 알고는 선교단체의 이사회가 열리기 전에 이사들을 한 사람씩 찾아다니면서 '내가 가서 절대 신학자나 목사 행세는 하지 않고 오로지 의사 노릇만 하겠다'고 약속하면서 설득한다. 이렇게 해서 선교사가 아닌 의사로 파견받기로 결의를 받는다. 그때부터 의학공부를 한다. 스트라스부르그 신학교수를 하면서 의과대학에 입학해서 의사 훈련을 받는다. 그런데 그는 이미 Bach 연구의 대가로서 특히 커다란 Organ(파이프 올겐)의 건축 기법에도 정통해서 그에 관한 책을 쓸 정도였다고 하며 또한 연주의 대가이기도 했다. 이렇게 재주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의사 공부를 시작하였는데 그의 졸업논문이 '예수의 정신 상태'라는 제목이었다.

그후 그는 아프리카에 가서 일체 목사 행세를 하지 않고 의사만 한다. 하루는 아프리카 교회에 문제가 발생해서 선교사들과 흑인 본토박이 목사들이 논쟁을 벌였는데 참석자들끼리 서로 이야기하다가 선교사 하나가 그럼 우리 Dr.슈바이처의 의견을 들어 보자고 제안하자 한 흑인 목사가 하는 말이 그 사람은 우리처럼 신학자가 아니니까 그 사람의 의견을 들을 필요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그의 일기책에서). 이정도로 그는 자기가 신학자,목사라는 감추기로 합의한대로 자기의 신분을 감추었다. 그러니까 그는 우리 전통적인 개념의 선교사는 아니었다. 그런데 신학을 초보도 공부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를 위대한 신앙인으로 보는데 그는 비록 위대한 신학자이긴 하였어도 신앙은 별로 없는 사람이다.

그는 무엇보다도 신학자였다. 그는 현대 신학에 있어서 중요한 이슈들을 아주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다. 그 당시까지 제기된 여러 해결책의 옳지 않음을 아주 예리하게 파헤친 사람이었다(예수 연구나 바울 연구에서) 그런 점에서 신약학에 있어서 하나의 분수령을 이루는 유명한 신학자였다.

그는 종교사학파가 바울 신학을 헬라 종교사적인 배경에 비추어서 해석하려고 하는 것에 반대하여 철저하게 유대교, 유대 묵시사상에 비추어 해석해야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A.Schweitzer, W.Wrede,J.Weiss 등을 가리켜 '철저 종말론 학파(Konsequente Eschatologie Schule;Thorough going eschatological school) 라고 한다. 곧 임받한 종말의 사상적 배경-종말이 임박하다는 유대 묵시 문학적 배경으로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도, 바울 신학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석해서 슈바이처에 의하면 신비주의라고 한다. 그리스도와(with) 연합하고 그리스도 안에(in)있게 된다는 이 사상이 바울신학의 중심이라는 것이다.

Christ-mysticism+-with Christ(그리스도와 연합하고)
+-in Christ(그리스도 안에 있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신학의 중심은 그리스도-신비주의(Christ-mysticism)라고 한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가?

(1)임박한 종말-예수의 가르침.
예수는 종말이 임박했다고 가르쳤다.

(2)예수의 죽음과 부활:종말의 실현
그런데 초대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서 이 종말이 실현됐다고 봤다.

(3)종말의 미완성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바로 아직 완성되지 않은 종말읻. 종말의 미완성이다. 온 세상 모두가 심판받고 모든 죽은 자들이 부활하는 그런 종말은 아직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문제였다. 예수는 종말이 임박하다고 가르쳤으며 초대 교회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서 종말이 실현됐다고 가르쳤는데 객관적인 사실로는 죽은 자들이 부활한 것도 아니고 세상이 심판을 받아서 역사는 끝나고 새하늘과 새땅이 이루어진 것도 아니다. 그래서 이것은바울에게 그리고 초대 교회에 있어서 문제였다.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한편 종말이 실현됐다고 말할 수 있으며 다른 한편 종말의 완성이 아직도 미래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 문제를 바울은 다음과 같이 해결했다는 것이다. 어떻게 해결했느냐?

(4)Paul-already-but not yet: 메시야 왕국 Kingdom of God
벌써(already) 종말이 실현됐다는 것과 그러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but not yet) 는 갈등, 긴장 관계를 바울이 어떻게 해결했느냐 하면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기 전에 메시야 왕국이 있을 것을 천명함으로써 곧 그리스도가 통치하는 시대가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는 시대와는 별개로서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는 시대 이전에 그리스도가 통치하는 메시야 왕국이 있을 것을 강조함으로써 해결했는데 이것은 주로 묵시문학에서 특히 바룩서와 제4에스라서의 종말론적 사상에서 바울이 도움을 받아서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는 메시야 시대, 하나님 나라 시대 전에 메시야 왕국이 있다는 것을 빌려 가지고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는-모든 죽은 자들이 부활하고 세상이 심판받고 새하늘과 새 땅이 새롭게 시작하는 하나님 나라는 아직 오지 않았디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메시야 왕국이 지금 벌써 수립되었다는 식으로 바울이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메시야 왕국이 시작되는 시점이라는 것이다.

(5)+-세례-with Christ(union)-죽고 부활
+-성만찬-in Christ-Christ mysticism justicism
그리스도인들은 세례를 통해서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는 경험을 한다. 그리스도와 연합하여(하나되어;롬6장)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된다. 또 성만찬을 통해서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그리스도안에 있는 그 체험을 날로 새롭게 한다.

(6)새 하늘과 새 땅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할 때에 곧 메시야적 왕국의 끝에 모든 사람들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하나님의 심판대에 서고 그때에는 하나님께서는 역사를 종결하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룬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완성(하나님 나라의 도래)이다. 이때에 모든 사람들의 부활, 보편적 부활이 있다. 그래서 슈바이쳐에 의하면 바울은 두 부활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믿음 가운데 세례를 통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진짜 종말-예수의 재림때 이루어질 보편적 부활로서 이중 부활 교리를 가르쳤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 신학의 핵심은 우리가 세례와 성만찬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함게 옛사람은 죽고 새로운 사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으로 사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는 곧 앞에 이야기한대로 Christ-Mysticism(그리스도와 연합한다는 그리스도-신비주의)이라고 말한다. 이 Christ-Mysticism이 바울 사상의 중심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이뤄졌냐면 유대교 묵시문학적 종말론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이다. 지난 강의에서 종교사학파의 주장은 mysticism이 헬라 종교사, 헬라 신비종교의 배경에서 왔다고 그랬는데 슈바이쳐에 의하면 유대묵시문학적 배경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슈바치여는 주장하길 이것은 바울이 또 하나의 구원론의 범주인 Justification(칭의,의롭다함;은혜로,믿음으로 의인됨)의 사상과 별로 연관성이 없다는 것이다. 지난 시간에 이야기한 자유주의자는 바울의 구원론이 서로 연결되지 않는 두가지 범주들, 즉 신비주의적 카테고리(Mysterical category;성례적 범주)와 법률적 범주(juridical category;이는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법정의 언어로 표현한 것)로 해석되어 있다고 했고 종교 개혁자들은 법률적 범주가 바울 신학의 근본이라고 하였는데 슈바치쳐는 Christ-Mysticism이 근본이라고 한다. 그의 표현대로는 신비적 범주가 화산의 주분화구이고 법률적 범주는 이 분화구의 언저리에 연결되어 있는 조그마한 분화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즉 신비적 범주가 중심이고 법률적 범주는 신비적 범주에 곁들여 있는 부속물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면 왜 바울이 왜 법률적 범주를 자랑했느냐 하면 법률적 범주는 바울 전의 교회에서 자기에게 전승된 것인데 바울이 갈라디아와 로마에서 유대주의자들과 싸우기 위해서 법률적 범주를 강조하다보니까 오늘의 바울 서신들에는 마치 법률적 범주가 바울 신학의 중심인것 같이 보이는데 사실은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이 주분화구이고 법률적 범주는 종속된 조그만 분화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처럼 법률적 범주는 바울에 있어서 중심을 이루지 못한다고 주장을 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이러한 슈바이쳐의 결론의 영향이 계속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바울신학에 있어서 신비적 연합, 즉 그리스도와 연합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되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삶에 동참한다는 구원론이 바울신학의 중심이고 종교개혁자들이 생각했던 칭의의 교리는 겨우 바울신학의 일부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슈바이쳐가 이렇게 결정한 이유들 중에 하나는 바울의 윤리적 가르침을 보면 전부 신비적 연합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옛사람이 죽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새사람이 되었으니 새사람을 입으라, 그리스도를 덧입으라. 옛 아담적인 인간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덧입으라. 윤리적인 가르침이 전부 신비적 연합의 범주에 근거를 두고 있다. 법률적 범주로부터는 윤리가 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이미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사람으로 선언이 되어버렸는데 더 의로와질 것이 뭐 있느냐는 말이다. 그래서 은혜로만 구원받는다. 그래서 롬6:1에 보면 그 전까지의 내용에서 바울이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교리를 열심히 설명한다. 그러다가 곧장 냉소주의적인 질문에 부딪히게 되는데 하나님의 은혜로만 된다면 죄를 더 저지르자.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더 커질 것이 아닌가? 소위 방종주의를 낳게 된다. 모든 법적인 절제를 다 떨쳐버리고 우리 마음대로 하자.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더 커질 것이 아니냐 는 식으로 이른다. 이에 대해 바울은 '그럴 수 없없느니라 그런말도 안되는 소리 마라' 그리고는 설명하기를 신비적 연합으로 설명한다. 그리스도와 연합으로 설명한다. 우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 옛사람은 죽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새사람으로 부활했는데 어떻게 그런 엉뚱한 소릴 하느냐고 바울이 설명한다. 여기에 근거하여 슈바이쳐는 주장하길 여기서 법률적 카테고리로는 윤리를 뒷받침할 수 없으니까 윤리를 논할 때는 어느새 바뀐다. 그러므로 바울 신학의 진정한 중심은 신비적 연합이고 법률적 카테고리는 Kampferlehre(싸움의 가르침,논쟁적 가르침) 바울이 유대주의자들과 논쟁ㅎ기 위해서 법률적 카테고리로 가르쳤다고 한다.

따라서 우리가 바울 신학을 함에 있어서 큰 문제 하나가 진짜신비적 카테고리와 법률적 카테고리가 별개의 것이냐? 이렇게 연결되지 못한 것이냐? 하는 것이 큰 문제이다. 이것보다 더 큰 문제는 바울 신학의 중심이 무엇이냐? 슈바이쳐가 주장한 것같이 신비적 연합이냐? 아니면 종교개혁자들이 주장한 법률적 카테고리냐? 또는 요사이 어떤 이들이 주장하는 어떤 다른 것이냐? 도대체 바울신학의 중심이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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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며 도대체 중심이란게 없는 것인가? 즉 바울신학에 중심이 있어서 모든 주제들이 다 중심으로 연결된 일관성이 있는 것이냐 아니면 바울 신학이 논리적 일관성도 없고 기회주의적으로 저때는 저런 가르침, 이때는 이런 가르침을 그때 그때 조각조각 만들어서 통일되지도 못한 상태로 있느냐? 하는 이런 문제들이 우리가 바울신학을 함녀서 항상 해결하려고 노력해야할 문제들이다. 슈바이쳐의 이 철저 종말론적인 바울 해석은 종교사학파들의 헬라주의적 배경에 의해서만 바울신학을 해석하려는 것에 대한 중대한 교정임에 틀림없다. 바울신학에 있어서 유대교적 배경 특히 묵시문학적 배경이 중요하다는 것을 일깨우 주는데에 큰 공헌을 했다. 그러나 슈바이쳐의 바울 해석도 무리가 많고 문제가 많다. 그 문제점을들 보면

(1)유대 묵시문학,유대묵시문학적 종말론을 마치 통일된 것으로 단순화하여 설정해서 바울신학의 배경으로 삼은 것이 벌써 문제가 되고,

(2)바울 서신들의 자료들을 자기 사상에 맞는 것만 골라쓰는 해석방법도 문제가 되며

(3)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세례와 성만찬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다는 것을 너무 물질주의적으로 생각하는 것도 문제가 있으며

(4)궁극적으로 예수와 바울의 종말론이 사실은 환상에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

(5)우리가 나중에 토론하겠지만 바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와 연합한다는 사상과 은헤로,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두 사상을 완전히 분리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 사실은 이게 기가막히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여러가지 문제가 있다.

8.불트만 학파(R.Bultmann)
R.Bultmann의 '바울 연구'를 보려면 그의 신약신학(허혁 열)을 보면 된다. R.Bultmann의 바울 신학은 많은 오류에도 불구하고 통찰력들이 많다. 배울 것이 많다. 불트만도 몇조각의 좋은 진리를 발견한다. 그게 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다.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것이다 .불트만이 발견해도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다.

불트만은 신학적으로 말하면 Kant같은 자이다. Kant를가리켜 모든 철학의 커다란 저수지라고 한다. 모든 철학적인 경향이 칸트에와서 다 종합되었다고 해서 칸트를 저수지같은 자라고 한다.

불트만의 신학에 있어서 여러가지 토론한 신학적인 경향들이 불트만에 와서 통합된 위대한 종합을 이루는 저수지와 같은 사람이다. 그래서 그에게서 다시 여러 다양한 신학자들이 흘러 나온다. 그러므로 불트만 이전의 다양한 바울 해석의 경향들이 전부 불트만에게 큰 영향을 주어서 그러한 것들이 불트만에게서 모두 나타난다.

(1)Lutheran 신학의 영향
루터신학이 큰 작용을 한다. 루터신학의 유산이 불트만에게 중심을 이룬다. 특히 불트만 신학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이 가조, 불트만의 말로 하자면 선포의 신학을 강조한다. 루터의 하나님 말씀의 강조에 근거한다.
그리고 루터 신학의 유산인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칭의 신학의 강조가 불트만에게서 강력히 나타난다. 물론 정통 루터파나 정통 개신교도들이 입장에서 보면 불투만이 이걸 다 재해석했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불트만에게 물어보면 루터를 제일 충실히 이어받았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것은 따져봐야 할 것이다. 가령 엘랑켄 대학의 정통파 루터교의 대표인 보수주의자 K.Kunneth는 불트만이 루터를 완전히 재해석할 뿐 아니라 왜곡했다고 주장했다. 불트만은 W.Kunneth가 잘못했고 자기가 더 맞다고 할 것이다.

(2)종교사학파의 영향
종교사학파의 영향이 또한 불트만에게 지대하다.
불트만 스스로가 자기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책들중 하나를 지난 신간에 이야기했던 W.Bousset의 를 꼽는다. 그래서 그는 종교사학파의 영향으로 인해 바울의 헬라적 배경을 아주 강조한다. 그래서 그는 바울이 헬라 교회의 케리그마에 의해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못을 박고 바울은 헬라 교회에 속한 사람으로 헬라 교회의 신학적 대표라고 한다. 그러므로 헬라 종교사적 배경 아해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불트만의 선생은 W.Hertmuller이었는데 그는 W.Bousset과느 거의 동시대 사람(불트만보다 조금 더 올라감)이고 W.Bousset이 W.Heitmuller의 사상을 전개시켰다. 여기서 두 교회를 분리한다.

유대 기독교와 헬라 기독교를 분리하는 사상을 처음으로 W.Heitmuller가 제시했는데 그것을 W.Bousset이 발전키셨다고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다.

유대 기독교의 신앙의 본질은 예수가 바로 재림할 '그 사람의 아들'로 예수를 기다리는 것이라고 했도 헬라 기독교는 지금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세례와 성만찬을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리스도의 죽고 부활하는 운명에 동참해서 구원받는다고 하였다. 이처럼 유대 기독교와 헬라 기독교를 구분해서 전혀 다른 두개의 종교가 되어 버렸다고 했다. 그것을 불트만이 이어받는다.
뿐만 아니라 지난 시간에 이야기한 종교사학파의 대표, 라이쯘 스타인의 영향으로 영지주의, 그중에서도 구원자신화를 매우 강조한다. 그래서 종교사학파의 영향이 불트만에게 계속 나타난다.

(3)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의 관념론의 영향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의 관념론이 그에게 양형을 주어서 그는 바울에게 있어서 바울 신학의 중심은 인간론이라 한다. 인간의 존재, 인간의 실존, 인간론은 변하지 않는 거이고 다만 인간의 스스로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 인간의 자기 이해를 알도록 시대에 따라 다양한 언어 수단으로 표시한다는 것이라는 자유주의의 관념론의 영향을 받았다.

(4)슈바이쳐의 영향
슈바이처식의 철젛나 종말론이 영향을 끼쳐서 불트만도 종말론에 대한 강조가 강하다. 그러나 그의 종말론이란 슈바이쳐식의 철저한 종말론, 즉 시간적으로 미래의 종말론이 아니라 실존으로 재해석된 지금 믿음의 결단을 통해서 하나님이 심판을 받고 시간적으로 종말에 일어난다고 하는 객관화된 종말론이 아니다.

이 시간의 끝,예를 들어 서기 2500년에 종말이 있는 것, 가령 2500년에 하나님으로부터 심판과 구원이 있다고 한다면 이것을 시간적인 종말론이라고 한다면 그런 것이 아니고 지금 우리가 믿음의 결단을 통해서 하나님의 대면을 하고 우리의 죄적인 실존에 대한 심판,불트만의 실존주의적 용어로 하면 우리의 가짜 실존에 대한 심판을 바독 새로벡 진짜 값있는 실존을 하도록 하는것이 구원이라고 한다. 그래서 구원이 지금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종말론이고 재해석한다 .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불트만 이전의 신학적인 경향들이 불트만에게서 전부 영햐을 발휘해서 불트만이 모두 종합을 한다. 그의 새로운 다이맨손(차원;demension)이라 한다면 하이데거의 실존론적 철학을 도구로써서 바울을 해석하려고 한데 있다. 이것이 아마 불트만이 새로운 공헌이라고 할 수 있겠다.

불트만의 신학이 강조점을 몇가지 줄쳐본다.

(1)첫째로 인간론 중심이다. 불트만의 신약신학 p191에서 하나의 원칙을 천명한다. 아주 자주 인용되는 중요한 원칙이다. 바울의 신론은 동시에 인간론이고 그 역도 옳다. 인간론은 동시에 신론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에 대한 어떠한 언명도 동시에 인간에 대한 언명이고 그 역도 참이며 사실이다. 즉 그리스도에 대해서 우리가 뭐라고 하든지 그것은 동시에 인간에 댛서 말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또 바울의 기독론은 동시에 바울의 구원론이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신약 성경이 하나님에 대해 여러가지를 말하는데 스콜라의 철학이나 신학에서 말하는 하나님 자체에 대해 반영하지 않는다. 하난미에 대해서 신약성경에서 말할 때는 항상 우리의 창조주 우리의 구원자 우리의 심판자로서의 하나님에 대해서 말한다. 항상 인간에 관곗하시는 그래서 인간에게 말씀하시고 인간에게 은혜 베푸시고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분으로 하나님을 말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바울의 신론은 동시에 인간론이며 그 역도 성립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바울은 인간을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한 존재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요구 앞에 서 있는 존재로서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해서 살지 않으면 안되는 존재로 본다. 바울이 인간에 대해 말한다면 동시에 하나님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바울은 하나님의 속성이 어떻게 어떻게 생겼다는 식으로 스콜라 철학이나 스콜라 신학으로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가령 거룩하다고 하면 그것이 인간에게 의미가 있기 때문에 그렇다. 하나님이 전능하다고 하면 사람이 하나님께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바울의 신론은 동시에 인간론이고 그 역도 성립한다는 것이다.

또 바울은 그리스도가 교회 신학에서와 같이 신성과 인성을 가졌느냐 하는 이런 것을 추상적으로 토론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신성을 천명할 때 그것은 그리스도가 인간에게 하나님을 보여주는 분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그래서 인간이 하나님을 알게 되는 계시를 하나님을 알게 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신성을 말한다.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말할 때는 또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대표를 통해서 하나님의 요구를 만족시킨다. 하여간 인간의 대표로서 그리스도를 말한다. 그래서 바울의 기독론은 가령 그리스도의 신성, 인성 이런 것을 추상적으로 토론하기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전부 그가 우리의 구원자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권한다는 것이다.

바울이 기독론은 동시에 구원론이며 그 역도 성립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불트만의 신약신학을 읽어보면 바울의 신학을 인간론 중심으로 전개하는데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눈다.

제1부는 믿음이 오기 전의 인간, 제 2부는 믿음 아래의 인간, 이렇게 나누어서 바울의 신학을 요약하고 체계화 한다.

①제1부, 믿음이 오기 전의 인간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의 피조물로써 세상에 있게 되었고 어떻게 하나님께서 죄를 진죄인인가 드을 다룬다. 그래서 세상,죄,율법,인간의 육신,몸 등을 다룬다.

②제2부 믿음 아래서의 인간

믿음이 무엇인가? 구원은 무엇인가? 은혜가 무엇인가? 믿음에 의해서 의롭다 함을 받은 인간,이런 것을 토론한다.

이처럼 철저한 인간론 중심으로 바울 신학을 요약한다. 그 이유는 앞에서 이야기한대로 19세기식 자유주의의 관념론을 이어받아서 궁극적으로 인간의 실존의 변하지 않는 중심이고 다른 것들, 즉 신학이라든지, 기독론이라든지 구원론이라든지 하는 것들을 인간이 자기 이해를 표현하기 위한 다양하 언어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자기 이해가 가장 중요한 문제이고 그것을 여러가지 시대시대의 다양한 언어,숙어로 표현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불트만에게 있어서 신학의 과제는 다양한 언어들로 표현된 본질적인 문제, 인간의 자기이해를 해석하여 터득하는 것이 바울신학의 근본이라는 것이다.


(2)또한 불트만 신학의 강조점 하나가 영지주의이다. 불트만에 의하면 바울 전 헬라 교회나 바울 자신도 당시의 헬라 세계의 영지주의 사상과 영지주의 개념들을 잔뜩 이용해서 가독교적 실존의 이해를 표현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불트만의 신약신학 책에 바울전의 헬라 기독교 바울 신학을 토론하기 직전에 '영지주의'라는 section이 있는데 읽어보라 불트만 신학을 이애하는데 상당히 도움을 받는다. 불트만에 의하면 영지주의의 근본 본질은 인간과 세상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이 세상은 인간의 진정한 자아-그것을 헬라말로 표현하면 인간의 영혼이다. -영혼의 감옥이며 타향이다. 그러면 인간의 진정한 자아인 영혼의 고향은 바로 Idea의 세게, 영원의 세계이다. 그런데 시간의 세계인 이 세상, 물질과 시간의 세계는 인간의 진정한 자아의 타향이고 감옥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세상속에 인간의 진정한 자아가 여러 악령들에 의해서 감옥에 갇혀 있어서 대다수의 영혼들이 자기 본향을 망각하고 이 세상이 진짜 자기들 삶의 무대이며 본향이고 자신이 마땅히 존재할 수 밖에 없는 전부인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 세상은 물질 세계이고 시간세계이며 암흑의 세례로서 본질의 세계가 아니고 본질의 모조품에 불과하다. 본질, 실재가 있는 것이 아니고 사실은 모조품인데 다만 실제인 것처럼 보일 뿐이다.


현상의 세계(phenomena) 현상, 곧 본질의 나타남이 모조품에 굴과한데 우리에게 마치 이 것이 본질처럼 보일 따름이라는 것이다. 이 세상은 환상의 세계,가짜 세계이다. 그런데 인간의 영호이 가짜 세계인 이세상에 갇혀 있어서 이 세상이 가치들이 가짜이며 사실은 환상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마치 우리에게 행복을 주는 것같이 영생이나 구원을 줄 것같이 우릴 속이며 우리가 그렇게 환상을 한다. 그래서 그것을 추구하려고 발버둥 친다. 돈,권력, 이세상의 지식, 명예같은 것들은 사실상 시간의 세계에 변화의 세계에 속해서 썩어 없어져 버린다. 잠깐 있다 없어지며 본질적인 것이 못된다. 영원성도 없다. 그래서 reality가 없다. 그러니까 그런 가치들을 우리가 얻었다 한들 사실은 우리가 행복하지도 않고 이것들이 우리에게 구원을 약속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이 가짜 세상 속에서 이런 세상의 가치들이 진짜 좋은 것으로 보이고 우리에게 행복을 주며 영원을 주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영혼은 세상이 이런 가짜 모조품의 환상에 갇혀 있는 한 구원이 없다는 것이다. 이 시간의 세계와 함께 썩어져 버릴 것이다. 그러니까 영지주의에서의 구원은 영혼(진정한 자아)이 '자기의 본향은 이 세상이 아니고 영원의 세계, 본질의 세계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즉 본향에 대해서 알게 되는 것-이 세상이 가짜임을 알게 되어서 이 세상의 가치로부터 자유로와져서 영원한 가치(영원의 세계)에로 복귀하는 것이 구원이라는 것이다.

Essence(본질의 세계)
Reality(실제의 세계) 영원--자기 본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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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세계 +--------------+
모조품 | 세상 | 영혼(인간의 진정한 자아)
Phenomena(현상의 세계) |감옥,타향,변화| 지식(구원자 신화)
llusion | 물질,시간 |
+--------------+

그러면 어덯게 그렇게 아느냐? 지식을 얻는다. 그 지식이라는 것은 바로 '인간의 진정한 자아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고 본질의 세계에 속한 것이며 이 세상은 가짜라는 것, 이 세상에서 우리를 유혹하는 것 ,혹은 가짗들이 덧없는 것이고 가짜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이것이 플라톤적, 헬라적인 이원론이다. 이것이 동방의 이원론과 섞여서 만들어진 것이영지주의인데 이것이 영지주의의 본질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이 영지줒의는 '구원자 시노히'로 객관화되고 극화했다고 한다. 어떻게 객관화하고 극화했느냐면 영혼을 '태초의 인간(primal man, ,Ur-mensch)이 암흑의 세계와 싸워가지고 져서 세상으로 굴러 떨어졌다. 이것이 타락이다. 굴러 떨어질때 태초 인가은 영원희 세게, 본질의 세계, 빛의 세게에 속한 자로서 빛으로 된 자이다. 그런데 이 자가 떨어져서 몸이 산산조각이 났고 바로 이 조각들이 영지주의 인간들의 영혼, 빛의 조각들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자들은 큰 조각을 받았고 어떤 자들은 작은 조각을 받앟다. 어떤 자들은 하나도 못받았다. 그래서 영지주의에서는 인간을 3등급 또는 4등급으로 나눈다. 그래서 영지주의적인 인간,즉 빛의 조각을 많이 받은 자를 영적 존재라고 한다. 조금 받은 자는 혼적 존재, 아예 못받은 자는 땅 흙의 존재로서 구원의 여지가 없다. 영지주의 인간만이 그 영혼에 아직 본향에 대한 지식이 가물가물 살아 있다. 그 가물가물 살아 있는 상태를 가리켜서 잠자는 상태로 있다고 한다. 본향에 대한 지식이 영지주의 인간의 영혼속에 잠자는 상태로 살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된 셈인지 이 (불트만의 영지주의 신학을 배격하는 자들은 바로 이부분에서 공격함)-영지주의의 가 이 세상에 나타나서 암호를 발한다. 암호를 발하면 자기 편만 알알듣고 자기 편만 모인다. 그러니까 기 암호를 발하면 자기 몸 조각을 받아서 하늘의 세계-본향에 대한 의식이 아직도 잠자는 상태로 있는 가물가물하게 살아 있는 사람들만 알아 듣고 모인다. 이렇게 해서 몸을 이룬다. 그래 가지고 자기 조각들의 몸을 이루어서 이들은 하늘로 올라간다. 이 세상을 벗어나서 하늘로 복귀함이 곧 구원인데 이에 필요한 암호는 바로 비밀지식이다. 그것이 영지주의자들의 지식이다. 그래서 영지주의 종교에 들어여면 이 비밀의 지식을 가르쳐 준다. 이 비밀의 지식에 의해서 모여든 자들만을 가 하늘로 인도한다. 그러니까 이 가 믿음의 개척자이며 믿음의 구원의 완성자라는 말이다. 이 말이 히브리서에 나온다. "그리스도가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신 분'이라고 한다. 그래서 케제만 같은 자는 히브리서의기독론도 이런 영지주의 신화에 근거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그림을 볼때 생각나는 것은 또한 빌립보서의 찬송시 같은 것이다(빌2:6-11). 그리스도의 본체가 하나님의 동일 본체시나 세상에 낮아져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여 낮아졌는데 하나님이 높이셨다. 요한복음의 기독론도 다 이런 그림이다. 그러니까 불트만에 의하면 바울의 기독론이나 요한의 기독론이나 히브리서의 기독론이나 모두 다 영지주의의 신화를 예수에게 뒤집어 씌워서 역사화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불트만은 주장하길 이는 스스로 구원받는 구원자 신화라고 한다. 자기가 창세전에 태초에 졌기 때문에 스스로 구원받아야 하는데 스스로 구원받는 과정에서 자기 몸의 파편들을 다시 모아 가지고 자기 몸의 파편을 받은 영지주의자들을 구원하는 구원자가 된다는 신화라는 말이다. 이것이 구원자 신화이다. 그런데 이 구원자 신화 사상을 초대교회의 신학의대표자들인 요한,바울,히브리서 기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했다는 것이다.

이 사상은 사실은 영혼의 타락과 영혼의 구원에 관한 영지주의 근본벅인 세계관과 인간관을 객과화해서 극화한 것에 불과하다. 영혼이 본질의 세계에 속하는데물질이 세곙니 이 세상에 갇혀 자기고 보통의 영혼들은 물질의 세계가 전부인줄 알아야 물질의세게의 가치들이 진짜 가치인줄 안다. 그러는한 이 물질 세계에 탐닉하고 빠져 가지고 이 물질 세계와 함께 썩어지고 사라져 버린다. 이런 상태 속에서 영혼의 세계가 구원 받으려면 이 물질의 세계의 가짜성을 알고 이 물질 세계의 가치에 대해서 휩쓸리지 않기로 결단을 하고 영원의 세게의 가치를 사모하고 추구해야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영지주의의 본질적인 문제인데 그것을 객관화하고 극화한 것이 이 구원자 신화이다. 불트만에 의하면 그 영지주의 신화를 바울이나 요한이 예수에게 뒤집어 씌워서 역사화했다고 한다. 또한 바울과 요한이 영지주의의 틀을 이용해서 기독론과 구원론을 전개하지만 바로 그렇게 함으로서 영지주의를 교정한다는 것이다.


너희들의 영혼의 힘으로 이 세상의 가짜성을 발견하고 영혼의 세게로 갈 수 있는 게 아니고 그리스도가 곧 하늘에서 온 (구원자)라는 것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비로소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닌 것을 알고 영원희 세게에 대해서 알아서 우리가 믿음의 결단을 할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의 가치들이 전부인줄 알고 이 세상의 세려들에 휩쓸려서 자기가 자기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지 못하고 이 세상의 데세에 밀려 그저 사는 삶, 이세상의 가짜 가치들을 추구하며 사는 삶을 '가짜 삶'이라 하는데 이제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이 세상이 가짜인것을 알고 하나님의 영원의 세계에 대한 가치를 아니까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이 세상의 가치들과 대세에 휩쓸려서 사는 가짜 삶을 청산하고 내가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는 삶을 살므로 나의 진정한 자아가 영원의 세계에,본질의 세게에 속함을 재확인하고 본질의 세계의 가치를 추구하게 된다는 것인데 이 런 삶을 주권자적인 삶이라고 한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구원을 받고 가짜 삶을 청산하고 의미있는-자기가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되는 주권자적 진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구원이라고 한다. 이것은 보다 시피 실존주의적인 인간론을 표시한 것이다. 바로 그걸 표시할 때 영지주의 사상이 불트만에게 아주 큰 도움이 된 것이다. 그래서 불트만이 이런 식으로 신학을 전개했다.

이것에서 부터 불트만의 비신화론을 잘 이해할 수가 있다. 불트만이 말하는 비신화란 무엇이냐 하면 진짜 복음의 핵심은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의 가치와 이 세상을 우리의 생각을 추구하는 가짜 삶에서 벗어나서 진정한 가치, 진정한 삶,이 세상이 대세에 휩쓸려서 그냐 ㅇ남이 결정하고 자기는 할 수 없이 따라가는 가짜 삶이 아니고 자기가 진짜 영원한 가치를 위해서 결정하는 것이 구원이며 이것이 진정한 복음이며 그 복음의 핵심이고 본질인데 그 복음을 영지주의적인 객관화된 신화적인 언어로 표시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신화적인 언어의 껍질을 벗기면 이러한 본질에 도달한다. 그래서 그것(이러한 작업)을 비신화라 하자는 것이다. 그래서당시 3층적인 우주론에 의해서 신화적인 언어로 표현된 복음 즉 창조전부터 하나님 아들로 존재한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셔가지고 우리를 위해 대속의 죽음을 하고 우리를 하나님의 영원한 세계로 구원한다는 식의 신화적인 언어로 표현된 복음을 진짜로 분석하면 그것은 영지주의적인 세계 이해와 인간 이해를 객관화 한 것인데 근본적으로 인간의 자기 이해를 당시의 숙어로 표현한 것이다. 그라니까 우리가 그 숙어에 붙들려 있으면 그 숙어가 표현할려고 하는 진짜 의미를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숙어를 비신화함으로써 그 껍질을 벗김으로서 그 본질을 터득하자는 것이 소위 불트만이 비신화론(denythologization)이다. 이런 모든 불트만적인 신학의 프로그램을 그놉ㄴ이 되는 것은 하이데거의 신존의 신학(존재의 신학,Sien)이다.

(3)불트만에 있어서 또 하나의 신학적인 강조점이 케리그마 신학이다. 말씀의 신학이다. 그래서 이 신앙 아래의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구원사건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에게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과거에 한번,그리고 영원히 효과가 있도록 일어난 우주적 사건이 아니라 지금 선포되는 말씀, 곧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의 가짜 삶을 버리고 진짜 삶을 살도록 신앙의 결단을 하도록 하는 선포에 의해서 지금 발생하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상당히 이해하기에 난해하다. 불트만에 의하면 바울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과거 사건으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자기의 선포 속으로 예수가 부활한다는 것이다. ins wort(지금 자기 속으로) 지금 자기가 선포하는 케리그마 속으로 에수 그리스도가 부활해서 그 케리그마 속에서 선포되는 설교의 말에서 듣는 사람은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부활한 예수를 체험하게 되는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새로운 자기 이해를 갖게 한다. 그래서 세상 속에 존재하는 옛 자기 이해를 가진 가짜 인간은 죽고 새로운 자기 이해를 가진 진짜 삶을 사는 살마으로 되게 한다는말이다. 그래서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체험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해서 새로운 사람이 되는 체험을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과거의 사건으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지금 그와 같은 자기 이해의 변화를 가져로도록 하는 선포의 말에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불트만에 의하면 케리그마, 설교가 예수의 죽음과 부활 사건과 함께 동시에 구원의 사건으로서 종말론적인 사건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무슨 말이냐면 객관적인 구원의 사건(2000년 전에 팔레스틴에서 일어났던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과 주관적 구원의 사건(그 구원의 사건이 오늘날 나에게 효력을 발생하는)의 분리를 거부하고 그것을 하나의 사건으로 해석하려고 한다.



그래서 바울신학의 구원사적,종말론적인 틀을 신화적인 껍데기라고 부인하는데에 그의 신학에 문제가 있다.

그런데 이 불트만의 신학은 하이데거의 실존주의적 철학을 빌려서 바울 신학을 오늘 우리들에게까지 20세기 인간들에게 의미있게 선포하려고 하는 Hermeneutic의 노력이다. 곧 하이데거의 실존주의를 20세기 사고방식을 대표한다는 것으로 보고 20세기의 우리들에게 의미있게 서노하려고 하는 Hermeneutic의 위대한 노력이었다. 그래서 거기에 통찰력이 참 많다. 앞에서 이야기한대로 불트만이 책을 읽어보면 우리가 설교에서도 즐겨 인용할 수 있는 통찰력이 많이 있다. 그런데 신학 전체로서는 문제가 많다. 그래서 불트만의 신학책 읽고 설교 듣고 그리스도인이 됐다는 소리는 못들었다. 여기에 큰 아이러니, 역설이 있다. 불트만은 예낫 1세기식의 원시적인 세계관,우주관으로 표현된 그때의 신화적인 언어로 표현된 복음을 아무리 선포해 봤자 오늘 우리에게 복음의 본질이 이해되지 않는다. 그래서 전도를 위해서라도 20세기 사고 방식으로 바울과 요한의 언어를 번역해서 선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가끔 보수 신학자들이 지적하는 것이 이것인데 그러면 불트만 설교 듣고 그리스도인 된 사람이 한명이라도 있냐? 한사람이나 있을지 모르겠으나 별로 없다.

불트만의 가장 큰 문제점은 역사성을 부인한다는 것이다. 특히 구원사적,종말론적 틈을 옛날 고대의 원시적인 신화의 껍질에 불과하다고 해서 중요시 하지 않는다. 그러기 때문에 역사성을 많이 부인한다. 그래서 비록 그의 요한복음 주석이 위대한 주석이어서 거기서 신학적인 묵상이 깊이는 배울 수 있지만 요한복음에 기록된 예수의 가르침이나 행적의 역사성에 대해서는 아주 철저히 부인하는데 그런 것이 불트만 신학에서 우리가 배울 수 없고 본받을 수 없는 점들이다.

또한 영지주의 신화가 이런 식으로 1세기에 있었다는 것이 완전히 부인된다. 나중에 2세기 후반 3세기에 이와 비슷한 영지주의 신화가 발달한 것이 사실인데 그것은 우리 신약 성경의 기독론에 영향을 받아서 영지주의가 발달한 것이다. 그 영향이 영지주의 신화에서 바울과 됴한에 빌린 것이 아니고 거꾸로 영지주의자가 주후 2세기 후반부터 발달하는데 유댜교와 기독교 특히 성경의 기독론, 예수의 선재 사상에서부터 출발하고 그의 인간되고 십자가에 죽도 다시 높임 받은 이와 같은 신약성경의 기독론의 틀에 맞춰서 헬라 시대 영혼의 본질의 세계에서 물질의 세계로 타락하고 다시 본질의 세계로 복귀하는 것을 객꽌화하고 극화했을 때에 비로소 발생하는 신화라는 것이다. 이 신화는 우리 신약성경에서 빌린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점에 있어서 불트만이 아주 완전히 망했다.

다음 시간에 불트만의 제자들을 하겠는데 불트만이 제자들이 불트만을 많이 비판한다. 이 비판을 보면 불트만의 신학이 한계점을 우리가 알게 된다.

질문:지혜사상과 구원자 신화와의 한계?

답:월피스 같은 사람은 지혜( )신화가 구원자 신화의 일종으로 보았다. 그런데 실제로 헬라 사상에 사상이 있었느냐? 헬라 사상에 사상이 있는게 아니고 유대교 지혜 사상이 있었느데 헬라 유대교에서 막강하게 발전한다. 이것은나중에 영지주의 구원자 신화에 신약의 기독론과 함께 공헎나다. 신약의 기독론 , 예수 그리스도의 선재 사상은 유대교의 지혜 사상을 전승사적으로 이어받아서 발달하는 사상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내재함을 말하기 위한 언어 수단이다. 나중에 또 다루게 된다.



출처 : 잭슨빌 교회개혁포럼
글쓴이 : JaxHopes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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