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신학 제 3강
8.Bultmann의 제자들
Bultmann의 제자들은 E.Kasemann,G.Bornkamm,E.Fuchs,C.Ebeling 등이 있다.
또 E.Kasemann이라는 사람이 1952-1953년에 ‘역사적 예수의 문제’라는 강연을 시작으로 해서 Bultmann의 실존주의 신학이 너무 역사를 무시하는 신학이라면 반기를 들기 시작하여 역사적 예수의 신학에 있어서 중요성을 강조하는 Bultmann의 제자들의 달라진 시각을 E.Kasemann,G.Bornkamm,E.Fuchs,G.Ebeling 등에서 처음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바울 연구에 있어서는 다른 제자들보다 E.Kasemann이 상당히 중요한 연구의 진전을 가져왔다.
(1)E.Kasemann
Kasemann은 Bultmann에 반기를 든 역사적 예수 문제에 있어서의 논문 뿐만 아니라 기독교 신학에 있어서 묵시사상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하는 중요한 논문을 발표했다. 그래서 그는 ‘묵시 사상이 기독교 신학의 어머니다’라는 중요한 These를 제출해서 불트만식의 실존주의 신학이 세계적인 하나님의 온 창조를 포괄적으로 다루는 면을 너무 무시하고 너무 개인주의적인 집중을 한다는 비판을 가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바울 신학에 있어서 우주적 평면을 강조하여 바울 신학의 관심이 ‘주권의 영역’이라고 하는 말로 표현하려하여 바울에게 있어서 구원의 개념은 ‘주권의 변화’라는 말로 표현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이 말들이 신학교 책들에 가끔 나오는데 ‘주권의 영역’이란 말은 독일말로 Herrschafts bereiche(복수로 ‘주권의 영역들’)이다. 그래서 사단이 악과 고난을 다스리는 주권의 영역과 예수 그리스도가 주로서 다스리는 주권의 영역과의 대결이다. 그래서 역사의 장 또는 세상을 사단과 에수의 주권 다툼으로 보고 사단의 주권의 영역에서 예수의 주권의 영역으로 이동하는 것이 구원이라 한다.
따라서 구원이란 내 개인의 주권이 바뀜(Herrschagwechse;Herrschaf=주권 wechse=바뀜) 주가 바뀌는 것이다. 사단을 주로 섬기던 자가 예수를 주로 섬기는 주권의 변화로 표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Kasemann은 그의 중요한 논문 바울 실학의 중심이 과연 기독론이냐 인간론이냐 하는 토론에서 Bultmann은 너무 일방적으로 바울 신학의 중심을 인간론으로 봤는데 이는 틀린 것이다고 하고 바울 신학의 중심은 기독론이며 이 기독론이 우선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하나님이 의’라는 개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누어주시는 의라는 선물의 의미도 있지만 그런 의미보다 먼저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힘’이라 한다.
Bultmann은 하나님의 의δικαιοτυνη του Θεου를 우리 개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로서 우리가 의롭다하게 되는 것은 우리가 새로운 자아,새로운 자기 이해를 갖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Kasemann은 주장하길 그게 아니고 하나님의 의란 말은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는 하나님의 힘’이라고 한다 그래서 의롭다함도 새창조로, 새로운 창조의 사건으로 이해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의롭다함이 사탄의 주권 영역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 영역으로 새롭게 창조됨을 의미하는데 이것이 바로 묵시적인 사건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 등등으로 불트만의 여러 신학적인 주제에 대해서 새로운 도전을 했다.
Bornkamm도 사실은 바울이라는 중요한 책을 썼지만 Kasemann과 같은새로운 제안을 하지 않아서 우리는 그것을 중요시 다룰 필요가 업고 다름 단계로 Bornkamm의 제자이면서 Bultmann신학에 하나의 영향을 이어간 사람이 F.Hann이다.
(2)F.Hann
그의 ‘신약 기독론’이라는 중요한 저서에서 지난 시간에 이야기한 W.Heitmuller나 Bousset같은 사람들이 초대교회의 신학의 발달사는 근볼적으로 두 교회로 유대 기독교와 헬라 기독교로 나누어 가지고 유대 기독교의 신앙중심은 ‘그 사람이 아들’로 재림하는 예수를 기다리는 것이 그들이 신앙의 중심이었는데, 헬라 기독교에서는 헬라 종교들의 영향을 받아서 예수를 주, 하나님의 아들 등등으로 고백을 하고 지금 그 예수의 구원의 능력을 체험하는 것 특히 성례신(세례와 성만찬)을 통해서 체험하는 것을 중심으로 하는 신앙고백이라고 했다. 그런데 불트만에 와서 이둘 사이에 또 한단계를 넣는 그런 암시를 한다. 곧 헬라 유대기독교이다.
그런데 Hann에게 와서는 세교회의 단계를 확실히 구분해서 초대교회의 신학을 분류하고 초대 교회 신학의 발달단계를 설명하려고 했다.
③헬라 기독교
②헬라,유대기독교
①유대기독교→아람
첫째 단계를 팔리스틴 유대 기독교라 하면 즉 아람말을 사용하는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는 유대 기독교와 헬라 말을 상요하는 diaspora세계의 유대인들 가운데 전파된 복음에 의해서 생성된 헬라 유대 기독교, 그다음 이방인들 사이의 헬라 기독교, 이처럼 삼단계로 나누어서 초대 교회의 신학 발달 과정을 설명하려 했다. 대개 바울은 헬라 기독교에 속하는 것으로 설정을 해서 신약에 있어서 신학의 발달 과정의 제일 마지막에 속하는 것으로 바울과 요한을 설정했다.
이런 것이 한동한 유행이었다. 그래서 가령 W.Kramer같은 사람도 그렇게 했고, 또 영국 사람으로 미국의 유니온신학교에서 오래 가르친 R.H.Fuller도 비슷한 도식을 가지고 신약을 이해하려 했다. 이 ‘세교회신학’의 문제점은 그들이 무엇보다도 역사를 무시한 것에 있다. 시간의 문제를 무시한 것이다.
ⓐM.Hengel
이것을 가장 예리하게 제시한 사람이 튀빙겐의 M.Hegel교수이다. 이 사람은 역사가로서의 자질이 많은 사람이어서 가장 기본적인 관찰부터 시작을 한다. 바울이 약 주후 32-34년에 그리스도인이 되었는데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주후 30년에 일어났다. 그렇다면 예수의 죽음과 부활 이후 불과 2,3년만에 바울이 초대교회에서 거의 유일하게 신학교육을 받은 신학자로서 초대교회에 참여했다. 아주 초창기부터 참여하였다. 그런데 어떻게 가장 끝 단계인 헬라 교회에 소속될 수 있으며 도대체 바울이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에 공헌한 것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처럼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의 그리스도인이 된 사건의 역사를 보더라도 바울과 초대 교회 사이에 이런 세교회는 물로두교회의 단계를 거쳤다는것도 말이 안된다.
또한 우리가 간진하고 있는 바울의 편지를 보면 제일 빠 편지가 48,49년의 편지이다(다수의 의견을 따르면 데살로니가 전서가 가장 오래된 편지로 약 49년이며 또 영국의 소수 의견 F.F.Bouce같은사람의 의견을 따르면 우리가 가진 편지중에 갈라디아서가 가장 첫 편지로 약 48년 쯤에 쓰여진 편지이다). 그렇다면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서 바울의 첫 편지 사이에 불과 18-19년 차이 밖에 없다. 그런데 바울은 누구에게 그 편지를 썼는가?자기가 이미 복음 선포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된 사람들에게 편지를 썼다. 그러헥 되면 한해쯤 또 줄어든다. 그러면 바울의 첫 편지에서 부터 완숙한 단계의 편지라고 볼 수 있는 로마서,고린도 후서, 또는 나중에 쓴 편지라는 갈라디아서, 이들 사이에 기독론에 있어서 신학적인 큰 발전이 있었느냐면 그렇지 않다. 가령 주후 58년 쯤에 쓴 편지들까지 별 큰 진전이 없다. 무슨말이냐하면 적어도 이때쯤이면 바울신학이 거의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불과 15,6년 사이에 무슨 세단계의 교회들을 거쳐서 바울이라는 사람이 나타날 수 있느냐하는 문제이다. 이처럼 가장 근본적인 시간적인 이유 때문에 이런 학설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I.H.Marshall
또 에버딘 교수로서 복음주의 신약학자의 대가인 I.H.Marshall은 주장하길 도대체 헬라 유대교외 세 교회로 가르치는데 있어서 전제가 무엇이냐 하면 헬라 사상과 유대 사상이 완전히 다랐고 헬라 유대교-디아스포라 세계의 유대인들의 사상과 팔레스틴의 유대인의 사상이 완전히 달랐다는 것인데, Hengel의 중요한 연구(Heellenismus und Judentum)나 다름 사람의 연구를 볼 때 팔레스틴이 주전 330년 알렉산더에 의해 정복된 이래로 계속해서 헬라의 통치를 받았다. 그래서 팔리스틴이 완전히 헬라화 됐다. 고고학적인 발견에 의하면 예루살렘에서도 사람들이 헬라말을 많이 썼다. 예수의 제자들도 헬라 이름을 썼고 무덤에는 헬라 묘비명도 많다 .그래서 예수님도 헬라말을 썩 잘했을 가능성이 많다. 또한 헬라 사상이 유대교에 많은 영향을 주어서 유대교 중에 정통 유대교를 대변하는 쿰란 문서에도 헬라적인 용어나 헬라적 이원론적인 사고방식이 많이 침투해 있다. 따라서 일단 헬라 사상과 유대 사상이 그렇게 본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것이 아니었다. 둘째로 특히 헬라 유대교와 팔리스틴의 유대교가 그렇게 크게 달랐다는 것은 더 말도 안된다. 그래서 이런 세 교회를 가르치는 전제를 무너드린다.
거기에 근거해서 Marshall 같은 사람은 가령 Hann이나 Kramer 같은 사람이 주장대로 이 신앙고백은 헬라 사람들에게 나왔고 저 신앙고백을 팔레스틴에서 나왔다는 식으로 그것들을 자세히 간추려 가지고 나누는 그런 것들을 모두 너무 억지주장인 것을 밝혀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세 교회 Scheme으로 초대교회 신앙을 설명하고 바울과 요한의 신학을 제일 마지막 단계에 두는 그런 책들을 많이 볼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은 이제 퀘퀘묵은 것이 되어 버렸다.
9.구원사적 해석
O.Cullmann,J.Munck,H.Ridderbos 같은 사람의 이름을 들 수 있다.
(1)O.Cullmann
O.Cullmann은 ‘Christ and Time''Salvation in History' 같은 책에서 ①구원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②구약과 신약의 관계를 약속과 성취의 관계로설명을 하고③ Typology의 중요성을 강조하고④바울이 전승받은 초대교회의 케리그마 즉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 창조부터 종말에 이르는 하나님의 구원사의 중심이라는 것을 강조하며⑤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이 복음의 계시를 받았고 사도로 부름을 받았는데 그때에 그는 이방인들을 위한 하나님이 구원의 계획을 겸하여 계시를 받아서 바울은 자기의 이방인 선교의 구원사적 의미를 철두철미하게 깨달아서 그렇게 열심히 이방인 선교에 힘을 썼으며 롬 9-11장에서 이방인 선교의 구원사적 의미를 파헤치고 있다는것⑥또 종말론에 있어서 벌써 우리가 구원의 첫열매를 받았으나 아직 구원이 완성되지 않았다는 벌써와 아직의 scheme의 중요성 속에서 불트만이 강조한 오늘 믿음의 결단이 필요하다는 것을 굉장히 강조해서 신약 전체의 신학에서 뿐 아니라 바울 신학에 있어서도 구원사적인 사고방식이 중심을 이룸을 강조했다.
(2)J.Munck
J.Munck는 ‘Paul and salvation of mankind'라는 책에서 바울에 있어서 하나님의 구원사 또는 구원의 계획에 대한 이해가 아주 중요했음을 아주 강력하게 개진한다.
그래서 바울은 이방인들 선교를 통해서 이방인들의 충만한 수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면 유대인들이 다 구원을 받고 그러면 종말이 올 것으로 생각하고 자기가 바로 하나님의 종말에 들여오는 하나님의 구원사를 완성해서 하나님의 종말을 들여오는 자로 생각해서 바울에게 있어서 로마와 예루살렘의 신학적인 중요성을 보고 바울이 로마로가려고 했으며 로마를 지나서 스페인까지 아마 어쩌면 전세계를 돌아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옴으로 이 모든 하나님의 구원계획(이방인들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완성하여 하나님의 종말이 임하게 하려고 했다고철저하게 구원사적으로 바울신학을 개진하고 있다.
(3)H.Riddelbos
H.Riddelbos는 ‘Paul'이라는 책에서 바울신학이 중심은 어떤 한 구원론적인 개념에 있지 않고 종말론적인 또는 구원사적인 출발점에 있다고 주장한다. 바울의 설교의 모든 내용은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고 십자가에 죽고 부활함로 종말의 구원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선포하는 것이며 그 종말의 구원의 시대를 설명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구원사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우리는 바울 신학의 여러 다양한 면들이 다 통일된 의미, Unity를 가지고 상호 연관된 것을 나타남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10.바울의 유대교적 배경에 의해서 바울신학을 해석하려는 시도
좀더 자세히 다루려고 한다. 이것이 현대의 1970년대로부터 지금까지의 바울신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경향이다. 여기서 주로 소개하려고 하는 것은 E.P.Sanders와 그의 추종자들인데 그 이전부터 살펴봐야 할 것은 J.Klausner과 C.G.Montefiore이다.
(1)J.Klausner과 C.G.Montefiore-H.J.Schoeps
먼저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것은 J.Klausner C.G.Montefiore(개혁 유대인들)인데 이 두이 바울신학을 연구해서 다음과 같이 주장을 했다.
바울의 반유대교적 경향과 유대교를 율법종교로 정의하는 경향은 그가 당시 팔레시틴의 정통 유대교, 즉 랍비 유대교를 오해한데서 발생한 것이다. 그는 헬라 Diaspora 유대인으로서 Torah, 모세 율법을 헬라적인 법(νομος)로 이해했다. 그런데 이 토라는 법으로서, 그 법을 어기면 벌을 자초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표징으로 주어진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였고 특히 유대교에서의 회개와 용서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바울 신학 자체가 바로 유대교에 대한 이런 오해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많은자기 모순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니까 Montefiore에 의하면 바울이 헬라 유대인으로서 정통 유대교에 있어서의 토라의 의미, 즉 하나님의 선택의 표징으로서의 토라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것을 헬라 그레코로만식의 법으로만 이했다.(그레코로만의 법사상은 어때요? 법을 어기면 벌을 받고 법을 지키면 의롭게 된다).그렇게 이해해서 헬라 유대교를 율법종교로 낙인을 찍었는데 그것은 오해였다. 또 바울이 무엇을 잘못했느냐면 정통 유대교에 있어서의 회개와 용서의 중요성을 깡그리 무시해 버렸다. 이러한 Klausner나 Montefoire의 학설을 더 학적으로 깊이 한 것이 독일의 유대학자 H.I.Schoeps였다. H.I.Schoeps도 Modtefoire와 마찬가지로 바울이 헬라 유대인으로서 정통 랍비 유대교를 깡그리 무시해버렸다는 것이다(1959년에 쓴 그의 중요한 책에서)
(2)W.Davies
그런데 바로 이런 Klausner 나 Mintefoire를 염두에 두고 또한 바울신학을 전적으로 헬라적 배경으로만 해석하려고 했던 당시의 신학적인 경향에 반하여 영국의 W.Davies가 ‘Paul and Rabbinic Judaism’을 1948년에 출판했는데 거기서 Davies는 바울신학의 중요한 주제들을 랍비 유대교의 배경에 의해서 설명하고 있다.
Davies에 의하면 바울의 사상적 배경은 전적으로 랍비 유대교적 배경이었다. Montefiore나 Schoeps에 완전히 반해서 또는 Bousset나 Bultmann이나 불트만의 후계자들에 반해서 설명하기를 바울의 신학적 배경은 헬라사상이 아니라 전적으로 유대교인데 그것도 Montefire나 klausner가 말하는 정통 랍비 유대교였다. 다만 메시야가 벌써 왔다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를 통해서 메시야가 벌써 도래했다는 바울의 확신에 의해서 교정된 랍비 유대교에 비추어 바울 신학의 중요한 주제들을 해석해야도니다고 W.Davies는 주장했다.
(3)E.P.Sanders
한동안 W.davies의 영향을 받았던 E.P.Sanders(원래 캐나다 사람인데 현재 옥스포드에서 교수로 있다)는 ‘Paul and Palestinian Judaism 1977)’이라는 책,그리고 최근의 ‘Paul,Law and Jewish People, 1983’이라는 책에서 바울연구에 있어서 현재 벌어지고 있는 가장격력한 토론을 야기시켰다.
Sanders는 그의 첫 책에서 유대교가 율법의 행위를 통해서 의롭다함을 얻는 율법종교라고 왜곡한 가운데에 그 유대교에 반한 것으로 바울의 신학을 해석하려고 했던 전통적인 바울 연구를 Anti Semitism으로 규정하고 특히 독일의 루터전통을 이어받은독일의 신약학자들을 아주 Anti Semitism으로 규정하여 맹렬히 공격을 하고 바울과 바울 당시 팔레스틴의 유대교를 공정히 비교해야 된다고 한다. 바울 당시의 유대교를 방루 신학의 카테고리로 해석하려고 하면 유대교에 대한 공정한 이해를 알 수 없다. 그러므로 바울은 바울신학 자체로서 우리가 연구를 해야 되고 유대교도 유대교 자체를 살펴 연구를 해서 바울 사상과 유대교가 각각 어떠한 종교의 패턴을 가지고 있는가를 추출한 뒤에 그것을 비교해야 된다고 주중했다. 그래서 이런 방법론으로 살펴보니까 팔레스틴의 유대교는 한마디로 Covenantal Nomism(언약적 율법주의)이라고 할 수 있다. 언약적 율법주의라고 정의할 수있는 유대교에 대항해서 바울이 싸웠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면 언약적 율법주의가 도대체 무엇이냐?
이것은 다음과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 즉 바울 당시 팔레스틴의 유다교는 다음과 같은 구조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①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였다.
②그리하여 율법을 주셨다.
③이 율법은 하나님의 선택을 지탱하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담고
④이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로 하여금 순종해야 한다는 요구를 담았다.
⑤하나님은 순종을 상 주고 불순종은 벌 주신다.
⑥그러나 율법은 속죄의 수단을 제공한다.
⑦속죄는 언약의 관계를 지탱하거나 또는 언약의 관계를 회복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⑧순종에 의해서 또는 속죄에 의해서 또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의해서 언약관게에 지탱되는 모든 사람들은 종국에 구원받을 사람들이다.
이런 것이 언약적 율법의 구조였다.
다시 말하면 Sanders가 8가지로 요약한 이 요점들을 가진 것이 바울 당시의 유대교였다는 말이다. 즉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셔서 그들과 언약을 맺었는데 그들의 하나님 노릇을 해주겠다고 언약을 맺었다. 그러니까 이 언약은 은혜의 언약이며 곧 선택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선민이다. 이 언약의 또는 선택의 표징으로서 율법, 토라를 주셨다. 그래서 토라는 두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하나님 쪽에서 이 언약을 지탱하겠다는 하나님의 언약 지탱의 의지이며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도 이 언약을 지켜서 언약의 관계 속에 있어야 된다는 언약을 지켜야 된다는 요구 즉 순종의 요구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은이 율법을 지켜야 한다.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해야한 된다. 그러나 이 순종은 구원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언약으로 약속된 구원의 관계속에 머무르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Sanders는 말하길 유대인들이 바울 당시 율법을 지키는 것은 구원의 공동체에 들어가기(getting in)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자기들이 들어가 있는 구원의 공동체에 머루르기(staying in)위해서 율법을 지키는 것이라 한다. 그것을 Covenantal Nomism이라 한다. 그래서 이 두가지를 아주 중요하게 구분한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당시 율법을 열심히 지키는 것은 구원의 공동체에 들어가기 위해서(getting in)가 아니라 이미 자기들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과 언약의 은혜 위에서 구원의 공동체에 있으며 하나님의 백성이다 .그러니까 그 속에 지탱되고 그 속에 머무르기 위해서 율법을 지킨다는 것이다.
언약-선민-율법(Torah) ꠏꠏꠏꠏꠏꠏꠇꠏ하나님의 언약 지탱 의미
ꠌꠏ요구-순종
언약 ↓
-----→이스라엘 staying in→atonement(제사,회개)
은혜
그러면 구원의 공동체 속에 머무르기 위해서 율법을 지킴에 있어서 가끔씩도 아니라 여분 이 언약을 지키지 못하면 어덯게 되느냐? 그렇게 되면 이 구원의 공동체에서 쫓겨나는 위기가 발생하게 되는데 이런 때는 위해서 율법은 이 속죄의 하나님과 다시 언약의 관계를 회복하는 방도를 제시했는데 속죄의 제사가 그런 것이고 또 회개함이 그런 것이다. 율법은 이처럼 속죄의 제사와 회개를 통해서 설령 율법을 못지켜도 언약의 공동체, 구원의 공동체에 머무를 수(staying in) 있는 방도를 율법은 또한 제시했다고 한다.
그러나 어느 상황에서 완전히 구제불능의 상태가 되어서 이 구원의 공동체에서 완전히 추출당하느냐 하면 이 언약 자체를 부인할 때 곧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하나님을 부인하고 스스로 더이상 이스라엘,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이 아니라고 주장할 때 그렇다는 것이다. 가령 당시의 유대인으로서 로마 세계에서 출세하기위해 유대교를 완전히 부인하고 유대교를 핍박하는 로마 사람들의 앞장을 서서 유대인들을 핌박하는 유대인들이 있었는데 그런 사람들만 언약의 공동체에서 완전히 구제불능으로 쫓겨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언약 자체를 부인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당시 팔레스틴의 유대교였는데 바울 서신들을 보면 이러한 유대교에 대한 가르침이 아니고 유대교가 이런 식으로 그려져 있는 것이 아니고 율법을 지키면 그 공로를 쌓고 이 공로에 대한 보상으로 하나님께서 의롭다 한다는 식으로 마치 유대교가 이런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 같이 바울은 유대교를 그리고 있다. 그리고 이런 것을 가르친 유대교에 대항해서 바울은 그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무료로 은혜로 거저 우리의 율법의 행위 없이 우리의 아무 공로없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이 은혜로 우리를 의롭다 한다고 그의 구원론을 전개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 바울이 유대교를 완전히 왜곡했다는 것이다.
율법→지킴→공로→賞→義
그러니까 Sanders에 의하면 이처럼 아름다운 유대교를 바울이 왜 이렇게 더러운 종교로 만들었느냐?
그이유는 다음과 같다. 바울이 다메식 도상에서 예수가 메시야로서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우리를 의롭다 하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나타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바울은 문제에서 해결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먼저 해결을 받고 그 해결에서 문제로 갔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류를 구원하려는 은혜를 나타냈다면 그 해결에 있어서 유대교 내에 구원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왜 구원이 있을 수 없느냐? 그 이유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완전한 율법을 지킬 수 없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면 유대인들의 율법을 지키려는 행위는 무엇이냐? 그것은 자기들 힘으로 구원을 얻으려는 행위인데 그것은 도리어 하나님께 반발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해결에서부터 시작을 해서 유대교를 바라보니 유대교가 갑자기 이런 것으로 이해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당시 유대교가 사실 앞에서 말한 그런 체계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Sanders는 한마디로 말하면 바울이 유대교를 왜 비판하느냐?
그는 그의 책에서 되풀이해서 말하기를 한마디로 바울은 유대교가 기독교가 아니기 때문에 비판한다고 되풀이한다. 다시 말하면 바울은 기독교만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제공한다고 다메섹 도상에서 확신을 갖게 되자 자연히 유대교를 보았을 때 이것은 율법의 행위를 통해서 공로를 쌓아서 스스로 구원하려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의 은혜를 베풀었는데 그것은 저버리고 스스로 율법을 지켜서 구원하려는 못된 짓이라 해서 유대인들을 공격했다는 것이다.
질문:Snaders가 말하는 유대교 사상과 구약에 나타난 사상과 같은 것을 말하는가? 다른 것을 말하는가?
답:Sanders는 바울 당시의 팔레스틴 유대교를 말하는데 그것을 추출하기 위해서 주로 외경이나 위경과 초기 랍비 문서들, 쿰란 문서들을 살핌으로 이러한 당시 유대교의 패턴과 구조를 추출했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단 하나의 예외가 4에스라 책이라고 한다. 4에스라 책은 사실 유대교를 비판하는 것이 바울 사상과 비슷하다. 이 하나만 예외이고 외경과 위경과 랍비 문서, 쿰란 문서를 다 조사해 보면 자신이 요약한 그런 사상을 가졌는데 이는 바로 구약의 사상과 아주 깊이 연괸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Sanders는 당시 유대교를 이런 것에 재구성하지만 자기가 여기서 재구성한 유대교는 구약의 사상과 맥이 통하는 것이라고 주장을 한다.
이 책이 아주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서 영,미에서 Snaders의 추종자들이 많이 나오고 Sanders는 일약 위대한 신약학자가 되어서 옥스포드의 교수로 불려갔다.
이 사람의 영향을 받아 가지고 바울의 율법신학을 아주 가장 실랄히 비판한 사람이 H.Raisanan이라는 헬싱키 대학의 교수이다. 이 사람의 ‘Paul and the Law 1983’이 라는 책이 튀빙겐에서 출판이 됐는데 이 사람은 1981,82년 나와 함께 튀빙겐 대학에서 흄볼트 연구 교수를 했다. 그래서 Raisanan은 당시 이책을 쓰고 있었고 나는 ‘Son of Man’을 쓰고 있어서 이 책은 WUNT라는 시리즈의 29권(83.11)으로 나오고 내 책은 30권(83.12)으로 나왔다. 그래서 나하고 인연이 많다. 또 이 친구와는 튀빙겐 대학의 외국인 교수 아파트의 위 아래 집에 살았다. 그래서 잘 안다. 차도 같이 많이 마시고...그런데 이 친구가 이 책을 출판했는데 내 책을 많이 비판했다. 내가 다시 1983년에 튀빙겐에 흄볼트 교수가 갔을 때 그런데 내가 내가 1984년에 내 첫책 2판이 나오게 되었다. 독임에서 그때 독일의 은사들이 Sanders 와 Raisanan이 나를 비판한 것에 대해서 답을 하고 도리어 Sanders와 Raisiana에 대해서 내가 아주 실랄히 공격하는 후문을 달았다. 그래서 Raisanan과 내가 대 논쟁이 벌어져 가지고 그 뒤에 Raisanan이 나에게 답한답시고 New Testment Stuidis라는 권위있는 저널에 1986년 논문을 하나 써서 김세윤 욕을 잔뜩 해놓았다. 그런데 그것은 답할 필요도 없이 형편없는 친구이다.
얼마전 1988년 G.Klein이라는 불트만 학파의 불트만의 마지막 제자 중 하나인데 1960-70년에 아주 영향력이 있었던 뮌스터 대학 교수인데 이 친구가 바울신학에 있어서의 태풍의 눈이라는 article에서 Sanders와 Raisanan의논지를 집중적으로 점검을 한다. 왜냐하면 현재 바울 연구에 있어서 가장 격렬히 토론되는 주제가 바로 이 사람들이 제출한 주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Klein은 바울 연구에 있어서 태풍의 눈이라 해가지고 이 사람들의 책들을 아주 비판적으로 토론하는데 거기에서 H.Weder(지금 취리히 대학 교수)의 논지도 조금 인용을 하지만 주로 내 논지를 많이 인용을 해가지고 이 추친구들을 여지 없이 박살낸다. 그래서 H.Klein이 내 대신 Raisanan에게 충분히 답했다고 본다. 하여근 그런 상태이다. 이 Klein의 article이 개혁사상에 번역되어 나오니까 읽어보기 바란다. 그러면 지금 바울신학이 어떻게 토론이 되고 있으며 이 못된 친구들이 어떤 자들인지 알 수있다.
Raisanan도 방루 시대의 유대교는 Sanders가 아주 정확히 기술했다고 보고 심지어 Raisanan에 의하면 Sanders가 예외고 취급한 4에스라 책도 Sanders가 기술한 유대교 그대로를 반영하고 있다고 주장을 한다. 더 나아가서 Raisanan은 바울에게 있어서 법이라는 말νομος의 사용법을 아주 꼼꼼히 점검해 보면 바울이 이 법이라는 말을 여러가지 의미로 썼을 뿐만 아니라 바울이 법에 대한 νομος에 대한 언급들이 상호 모순 투성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한마디로 바울은 일관된 율법신학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고 기회주의적으로 상황에 따라 어떤 때는 율법이 하나님의 법이라고 , 영적인 것이라고 우리 생명을 위해 주어진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말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이 율법이 죄와 세상과 사단에 도구라고 욕하기도하고 이렇게 상호 모순 덩어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의 반율법적인 은혜에 의한 믿음을통한 nustification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이 가르침은 그가 갈라디아에서 유대주의자들과 투쟁하는가운데에 우연히 발생한 것이라는것이다. 그의 신학이 처음부터 중심적인 복음의 이해로 발달한게 아니고 갈라디아에서 유대주의자들과 투쟁하는 그 상황에서 우연히 발생한 교리라는 것이다. 갈라디아에서 이와 같은 투쟁의 과정에서 바울은 비로서 율법을 유대인들의 구원의 길로 왜곡하고 이렇게 함으로서 바울은 당시 유대교를 완전히 공정하지 못하게 왜곡했다고 말한다. 그래서 율법과 그리스도가 마치 서로 상극을 이루는 두 구원의 수단인 것인양 대조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지난 1700년 동안 있어온 서양의 Anti Semitism에 대한 모든 첵임이 바울에게 있다는 것이며 심지어 나찌 히틀러의 유대인 핍박도 바울이 책임을 져야 된다고 주장을 하고 있다.
거기에 반해서 J.D.G. Dunn은 바울이 유대교를 왜곡한 것이 아니라 Sanders와 Raisanan이 전제하는 당시 유대교에 대해서 바울이 반응을 한다고 봐야 한다. 그래서 바울 서신에 나오는 율법들에 대한 가르침을 우리가 잘 살펴보면 Sanders와 Raisanan이 요약하여 기수한 그 유대교를 왜곡한 것이 아니라-그들이 말하는대로 왜곡한 것이 아니라 그 유대교를 전제하고 그 유대교에 반응하는것이라고 바울 연구에 있어서 새로운 관점으로 출발하자는 논문도 쓰기도 했다. 그래서 지금 이야기한 것들이 바울 신학에 있어서 가장 격렬히 토론되는 주제들이다.
11.J.Christian Bekker
그는 지금 프린스톤 신학교의 신약 교수인데 화란 사람이다. 그의 저서 ‘Paul the Apostle 1980’이라는 책이 유럽에서는 별로인데 미국에서는 교과서로 많이 읽히고 있는 책이다. 그는 Cullmannr과 Ridderbos와 좀 비슷한 사상을 가지고 있다고 봐야 하는데 내가 따로 떼어서 취급하는 이유는 최근의 책이고 해서 그런다 .
그는 바울신학의 일관된 중심은 당시 유대교의 묵시 사상이라고 한다. 곧 그리스도 사건에 의해서 조정된 당시 유대교의 묵시 사상이 바울신학의 일관된 중심이라고 한다. 바울은 그러기에 그리스도 사건을 당시 유대교의 묵시상을 빌려서 그 언어로 표현한 것이다. 의,의롭다함, 화해,자유, 하나님의 아들로 입양,그리스도 안에 있음,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함, 영광 등등이 바울적인 신학언어들은 바울 사상의 상징적 구조를 구성하는 요인들로서 바울의 복음을 독자(수신자) 또는 바울의 특수 상황의 필요에 따라 바울신학을 해석하는 것들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표면적인 것에 불과한데 바울신학을 구성하는 그런 표면적인 상징어들(의, 의인됨, 화해,자유,입양,영광, 주안에 있음, 주와 함께 연합함) 을 모두 움켜쥐고 이런 것들을 바울신학의 구조를 구성하는 요인들이다.
그런데 이런 것은 표면상에 나타난 것들로 이러한 요인들은 다 바울이나 독자들의 특수상황에 따라 바울의 복음을 해석하는 상징symbol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상징을 통해서 복음을 해석하는 것이다. 가령 독자의 상황을 따라 이러한 상징을 통해서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상징들이 표현하려고 하는 복음, 이를 다른 마로 하면 이런 상징들을 모두 일관되게 상호연관되게 얽고 있는 근본중심의 복음은 ‘그리스도의 사건이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이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건이 묵시사상의 평면에서 이해되었다. 묵시사상이 무엇이냐 하면 세상의 악과 고난의 역사가 하나님의 계시(묵시)로 곧 하나님의 오심, 하나님의 개입에 의해서 하나님 심판으로 끝나고 새로이 오는 세상이 시작한다는 것이 유대 묵시사상의 근본인데 이러한 묵시상의 언어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구원사건을 해석하는 것이 바울신학의 복음이고 바울의 복음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묵시계시
십자가/오는 세상 ↓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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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하나님의 오심이고 하나님께서 역사를 심판하시고 새로운 세상, 새역사를 열으신 사건이라는 것이 유대 묵시문학적으로 그리스도의 사건을 해석한 것이라는 것이며 그것이 바울신학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하나님의 역사속에 개입이고 하나님이 새역사를 열은 사건이며 새세상을 창조한 사건이고 우리를 구원한 사건으로서 그의 재림때 완성된다는 이것이 바울 복음의 본질이며 이 복음이 유대 묵시 사상의 언어로 이해되었다는 것이다. 그 묵시 사상으로 이해된 이 복음을 독자의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표현하는 것들이 이런 symbol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중 어느 하나를 바울신학의 중심으로 삼아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Lutter이하 개혁자들은 ‘의’를 바울신학의 중심으로 삼았는데 이것은 하나의 표면상의 symbol에 불과하고 더 깉은 structure에서의 바울 신학의 중심은 유대묵시사상의 언어로 표현된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하나님의 계시사건으로 하나님의역사 개임의 사건으로 즉 우리를 위해서 새 역사를 열고 새 세상을 창조하고 한 사건으로 구원의 시대를 연 사건으로 보는 것이라는것이다. 또 지난 번에 그리스도 안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한 것을 바울신학의 중심으로 삼는 사람들(브레덴와 그 이전 사람들)이 있었다고 그랬는데 그런 것도 다 이것과 동일한 선상에 있는 표면의 symbol에 불과하고 더 깊은 것은 유대 묵시문학이 제공하는 언어로 이해된 하나님의 계시의 사건으로 또는 하나님의 역사의 개입의 사건(구원의 사건)으로 이해하는 그리스도의 사건이라는 말이다.
뿐만 아니라 바울의 궁극적인 관심은 종말에 예수의 재림으로더불어 있을 하나님의 완전한 승리이고 하나님의 완전한 영광받음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Bekker에 의하면 바울에 있어서 구원사의 climax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의 현재 영광받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지금 주로서 대신 행사하는 하나님의 영광, 곧 예수의 재림때 완전히 드러날 하나님의 영광이다. 그것이 구원사의 cliamx라는 것이다. 한번 읽어보라. 이 친구도 하도 술을 잘 마셔서 학회에 갈 때마다 얼굴이 빨갛게 하도 술에 취해가지고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른다. 1986년 11월 아틀란타에서 ‘바울 연구 150년사’라는 주제를 가지고 예일 대학의 L.Keck 교수가 주제발표를 하고 Bekker가 거기에 대해서 반응-답을 하기고 했는데 시카고의 B.Xkrucks가 사회하는데 약 2000명 가령이나 모여 있었다. Keck가 강연을 다 마치고 사회하는 스트락스가 베커 보고 나와서 답변을 하라고 하니까 이 친구가 넥티아는 반쯤 풀어 내려지고 와이셔츠는 다 풀려진 상태에서 나와 가지고 몇 마디 시작하다가는 ‘어 이거 아닌데 내가 원고를 어디다 두고 왔는가? ’하는 것이었다. 술이 잔득 취해가지고 자기 원고가 어디 있는지 조차 몰라서 망신을 당했다. 그런데 본인은 그게 망신이라고 생각 않하겠지...그리고 그 이듬해에도 튀빙겐에서도 그와 비슷한 일이 있었는데 내 앞을 지날 때 술냄새가 얼마나 나는지.... 그 친구 책에서도 술냄새가 조금 많이 난다. 그래서 뒤죽박죽되어 있다. 뒤죽박죽되어 있는 것을 내가 맑은 정신으로 정리를 하려니까...반번 읽어보라. 이 뒤에도 바울 연구가 많이 진전되었다. 가령 H.Ludemann이 지금 바울에 관한 책을 연속으로 1,2,3권 식으로 쓰고 있는데 이런 것도 앞으로 더 붙여야 할 것이다. 별로 중요성이 없으니까 이 정도로 바울 연구사를 간단히 마쳤다.
아주 간단간히 바울 연구사를 마침에 있어서 바울연구들을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다음과 같은 issue들을 문제점들을 염두에 두고 해결하려고 해야 한다.
(1)바울 신학의 배경이 무엇이냐?
바울의 유대교와의 관계,바울의 팔레스틴 유대교와 헬라 유대교와의 관계, 또 바울 당시의 유대교가 진짜 Sanders와 Raisanan이 말한대로냐? 그래서 바울 신학의 배경에 대한 토론이 새롭게 전개되고 있다. 바울과 헬라사상과의 관계는 무엇인가? 이전의 Bousset나 종교사학들이 생각하고 있던 거냐? 아니면 그 어떤 것이냐? 그래서 바울신학의 배경이 중요한 문제이다. 바울의 유대교와 헬라 사상과의 관계가 중요한 문제이다.
(2)바울과 초대교회의 바울 전 기독교와의 관계
바울이 초대교회로부터 얼마만큼 케리그마를 이어 받았으며 얼마만큼 바울 스스로 신학자로서 초대교회의 신학 발전에 공헌을 한 것이냐? 이것이 상당히 중요한 issue이다. 바울과 역사적 예수와의 관계, 불트만이 말하는대로 역사적 예수는 바울에게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냐? 왜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예수의 말을 그처럼 인용않느냐? 왜 예수의 행적은거의 한마디도 않느냐?
왜 그는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만 집중하느냐? 이런 바울과 역사적 에수와의 관계가 중요한 이슈이다.
(3)바울 신학의 중심이 무엇이냐?
바울신학이 도대체 중심이라는 게 있느냐? 바울신학의 중심이라는 말은 바울 신학의 다양한 요소들 혹은 다양한 주제들을 일관되게 모두 상호 관계 속에 있도록 정이할 수있는 중심 사상이 있느냐? 종교개혁자들은 은혜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것이 바울사상의 중심이라고 했고 또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자들로부터 일어나서 종교사학파에게 더 확실하게 주장된 심지어 Schwetizer와 W.Davies까지와 Sanders까지에 이르러서 계속 주장되는 ‘그리스도와 연합이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리스도 안에 참여하는 ’ 이른바 그리스도 신비주의가 바울신학의 중심이냐? 불트만식으로 인간론이 바울신학의 중심이냐? Cullmann이나 Kasemann식으로 기독론이 바울신학의 중심이냐? Christian Bekker식으로 묵시 사상이 바울신학의 중심이냐? 등등 바울신학의 중심이 무엇이냐의 문제이다. 또는 도대체 중심이란게 있느냐? 아니면 바울신학은 별로 정리되지 못한 어떤 일관된 체계를 갖추지 않은 그냥 미완성의 사상이냐?
(4)바울의 연대도 중요하다.
(5)바울의 개별적인 신학적인 주제들
바울의 기독론,인간론,구원론,바울의 율법신학,바울의 윤리,바울에 있어서 구원사와 종말론, 바울의 성령론,교회론, 이런 것들이 다 중요하게 토론되어야 한다.
(6)그러면 앞으로 이런 것들을 어떻게 다루려고 하냐면,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복음을 계시받고 사도로 부름받은 그 체험에서부터 출발하여서 바울이 자기에게 계시된 그리스도 안에 이루어진 하나님이 구원사건을 어떻게 해석해 가는가? 구약과 유대교, 그리고 초대교회의 케리그마 전통이제공하는 카테고리드로가 개념들을 사용하여서 하나님의 구원사의 평면에서 어떻게 해석해 가는가? 또 그가 선교지에서 부딪힌 다양한 상황에 대응하여 어떻게 해석해 가는가?
이런 것들을 추구해 보려고 한다. 이렇게 해 봄으로 우리는 바울 신학에 있어서 변하지 않는 상수와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는 변수가 무엇인지 따져보고 이렇게 해서 바울신학의 중심도 헤아려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다음 시간부터 그렇게 살펴 보려고 한다. 내 책을 읽어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질문:교수님께서 구원사적 해석에서 O.Cullmann을 소개했는데 그의 사상을 우리가 받아야합니까?
답:그분의 사상에서 배울게 많고 또 배우지 못할게 또 많다.
질문:개혁주의 신행협회에서 나온 신학 사전에 보니까 O.Cullmann을 좌경신학자로 구분해서 개혁주의에서는 받기 힘들다고 해 놓았는데....
답:그런식으로 한 사람들은 다 엉터리들이다. 왜 그러냐면 우리가 Cullmann의 영향이 굉장이 많다. Ridderbos책도 보면 Cullmann의 영향이 굉장히 많다. Ridderbos는 다 훌륭하지. 그분은 우경신학자지. Ridderbos의 하나님 나라 라든지 바울이라는 책에 보면 Cullmann의 영향이 지대하다 .그것은 옳지 않다. 그게 아니고 쿨만 신학이 복음주의 신학에 공헌한 공헌이 지대하다. 특히 최근에 신약학사에서 그가 우리 보수주의 신학을 위해 한 공헌은 지대하다. 그런데 그의 구원사적 신학이 특히 어느 점에서 받아들이기 함드냐면 만일 구원론쪽으로 흐른다. 그리고 K.라너식의 ‘익명 그리스도인’신학으로 흐른다. 그것은 만인 구원론과 같이 가는 것이다.
‘Christ and Time’보다는 그의 더욱 완숙한 책 ‘Salvation within Hisatory’에서 아주 강력하게 드러나는데 이런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신학이 다 틀렸다고 한다? 그러니까 신학을 그렇게 하면 안된다. 누구는 좌경신학자이고 누구는 우경이고... 신학을 했다면 그런 식으로 사고하지 말고 쿨만에게서 배울 것은 무엇이고 배우지 못할 것은 무엇인지 불트만에게도 마찬가지아. 이런 것을 Criticism한다고 한다. 이 말은 헬라의 κρινειν이라는 말에서 왔다. 이것은 분리,분간한다는 말이다. 좋고 나쁜 것을 가른다. 그런 것을 할줄 아는 사람이 공부하는 사람이다. 배울 것은 우경이니까 우측에다 놓고 못배울 것은 좌경이니까 좌측에 놓고 이렇게 분리해서 이런 것은 안배우면 된다.
질문:영지주의가 신약성경의 영향을 받아서 발전했습니까?
답:지난 시간에 무엇을 들었는가? 영지주의 신화는 분명히 주후 2세기 이후이다.(구원자 신화) 그래서 도리어 신약의 기독론의 도움으로 발전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영지주의적 경향-지식을 강조하는 플라톤적인 이원론적 구조에다가 영혼이 지식을 얻어 Idea의 세계에 영혼의 세계에 복귀한다는 영지주의의 경향(지식을 강조,신화가 아직 없는) 그런 gnosticism을 요새는 incipient gnosticism이라고 한다. 이제 막 잉태된 영지주의라는 말이다. 또는 영지주의적 경향이라고 한다. 그런 것은 어쩌면 신약시대에 벌써 여기저기서 시작을 볼 수 있다. 가령 고린도 사람들이 무엇을 그렇게 주장하고 자랑하고 사고하고 난리를 피웠는가? 지식을 요한의 세계에도 그런 것이 있다. 요한일서나 요한복음에 보면 그래서 incipient gnosticism 막 시작하는 잉태된 영지주의는 벌써 신약시대에 시작했는데 신화는 주후 2세기 이후에 발생하였다. 그것은 이렇게 발전하는 영지주의 신약의 기독론과 유대교의 소피아 사상이라든지 로고스 사상, 또는 천사 사상이라든지 이런 것의 영향을 받아 가지고 만든 것이다.
출처 : 잭슨빌 교회개혁포럼
글쓴이 : JaxHopes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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