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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

by 【고동엽】 2021. 11. 1.
span>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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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교부출생선종교파축일수호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그리스어: Ιωάννης ο Χρυσόστομος 이오안네스 오 크뤼소스토모스[*], 349년경 – 407년)또는 요한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은 초기 기독교 교부이자 제37대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주교였다. 뛰어난 설교자였던 그는 중요한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고 끊임없이 기독교 교리에 대해 설전을 펼쳤다.
동로마 황제 아르카디우스와 그의 아내 아일리아 에우독시아에 의해 박해를 받고 유배를 당해 유배지에서 죽었다. 그의 죽음 이후 ‘황금의 입을 가진’이라는 뜻의 그리스어인 크리소스토무스라는 별칭이 붙었다.
로마 가톨릭교회 동방 정교회, 성공회 모두 그를 성인으로 추대하였으며, 축일은 각각 9월 13일 11월 13일이다. 대한성공회에서 사용하는《성공회 기도서》의 저녁기도(만도)에도 성 크리소스톰의 기도[1]가 포함되어 있다.
목차
행적[편집]초기 생애[편집]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는 349년 안티오키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로마 군단 장교였고 그가 어려서 죽었기 때문에 주로 어머니 밑에서 양육되었다. 법학 수사학을 공부하면서 신학도 함께 공부했으나 결국 기독교에 헌신하기로 하고 은둔 수사가 되어 성서를 공부하였다.
지나치게 공부를 많이 한 탓에 건강이 나빠지자 안티오키아로 돌아온 그는 381년 멜레티우스주교에 의해 부제서품을 받았고 곧이어 386년 사제서품을 받았다. 이후 12년 동안 안티오키아 교회에서 사목활동을 했다.
387년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의 즉위 10주년을 맞아 안티오키아에 특별세가 부과되자, 시민들이 납세거부 투쟁을 일으켰는데 시민들은 테오도시우스와 그 가족의 석상을 부수고 공중목욕탕을 파괴하였다. 이 때의 납세거부 투쟁은 요한네스의 부추김을 받은 것이었는데, 결국 안티오키아 당국의 과잉 진압으로 참혹한 학살극으로 끝나는 결과를 낳았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대주교[편집]
398년 요한네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주교로 추대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도 그는 공부를 많이 한 신학자다운 특유의 명쾌한 설교와 강의로 그 곳 시민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권력자와 부자들의 사치와 인색함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예언자적인 설교를 하였기 때문에 많은 물의를 일으켰고, 적도 많이 만들었다.




에우독시아 황후와 논쟁을 벌이는 요한네스. 19세기 프랑스 그림.
그 중 가장 강력한 적은 바로 동로마의 황제 아르카디우스 황후 아일리아 에우독시아였다. 에우독시아는 사치스럽고 방탕한 행실로 크리소스토무스 대주교에게 공공연하게 비판을 받았기 때문에, 크리소스토무스 대주교를 제거하려고 하였다. 또한 그는 청빈의 의무를 실천하지 않는 성직자들을 교회에서 추방하고, 그의 감독을 받는 사제, 수녀,수사들은 모두 독신생활을 해야 하였다.
이러한 강직하고 까다로운 성격은 알렉산드리아 대주교 테오필루스와도 불화를 일으켰다. 403년 테오필루스는 오크 회의에서 요한네스와 설전을 벌였다. 회의에서 그는 여러가지 죄목으로 요한네스를 기소하였는데, 정작 요한네스가 출두하지 않자 그를 단죄한 뒤 대주교직에서 면직시켜 버렸다. 이를 기회로 유독시아는 남편 아르카디우스를 부추겨 그를 비티니아로 유배시켰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들은 그들이 존경하는 요한네스 대주교가 유배되자 폭동을 일으켰고, 테오필루스의 지지자들과 충돌했다. 그 날 밤,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지진이 일어나고 에우독시아가 유산을 하자 황제는 그를 다시 불러들였다. 그러나 이후 에우독시아의 은상(銀像)을 둘러싸고 다시 황후와 요한네스 대주교는 대립했고 결국 다음 해에 벌어진 종교회의에서 요한네스 대주교는 다시 추방당했다.
대주교는 유배를 떠나기 직전, 교황 인노첸시오 1세에게 억울함을 호소했고, 교황 서로마 황제 호노리우스의 도움을 받아 이 사태에 개입을 시도했다. 호노리우스와 교황은 아르카디우스를 압박하여 크리스소토무스 대주교를 돕고자 하였으나 아르카디우스는 응하지 않았다. 406년 서방 황제와 교황은 대표단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파견했으나 아르카디우스는 이들을 도시에 들어가지도 못하게 하고 감금한 후 이탈리아로 다시 돌려보냈다.
407년 가을, 요한네스는 소아시아 폰투스의 외딴 유배지에서 죽었다. 그의 죽음으로 로마 교회 콘스탄티노폴리스 동방교회는 감정의 골이 깊어졌다. 그가 죽은 뒤 약 31년 후인 438년 요한네스는 공식적으로 명예 회복을 받았고 그의 유해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왔다. 당시 동로마 황제이자 유독시아의 아들인 테오도시우스 2세가 엄숙히 장례를 치러주었다.
그러나 1204년 제4차 십자군 원정 당시 베네치아 공화국 제4차 십자군 세력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침공하여 약탈을 벌일 때 그의 유해는 십자군에 의해 파헤쳐져 로마로 옮겨졌다. 그로부터 800년 후인 2004년 11월 27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요한네스의 유해는 다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와 이장되었다.
설교[편집]
현재 전승되는 크리스토무스 대주교의 설교를 보면, 지금 지니고 있는 것을 잃지 않으려거든, 그것을 남들과 나누라거나,그리스도의 제대가 으로 된 잔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 그리스도께서 굶주림으로 돌아가신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라는 설교처럼 부자들의 인색함과 사치를 비판하는 내용이 있다.
고린도전서 12장에 대한 설교에서 3절에 나오는 '예수를 저주하는 자'는 그가 악령에 씌어서 눈에 보이도록 또한 난폭하게 행동하는 것이라고 비판하였다.[2]


각주[편집]
  • 전능하신 하느님, 이 시간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어 한 마음으로 기도하게 하시고,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여 기도하는 곳에 나도 그들과 함께 있겠다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약속하셨나이다. 비오니, 우리 기도를 들으시고, 가장 유익한대로 채워주시며, 이 세상에서 당신의 진리를 깨닫고 후세에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아멘.
  • Owen, John, 1616-1683. ([1965-68]). 《The works of John Owen.》. London, Edinburgh: Banner of Truth Trust. 19쪽. ISBN 0-85151-123-6.
외부 링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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