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하르낙(Adolf Von Harnack)의 생애
하르낙은 1851년 5월 7일 리보니아(Livonia)에 있는 도르팟(Dorpat)에서 출생하였다. 선조때 독일에서 러시아로 이거(移居)했으며 외조부는 도르팟대학의 교수와 도르팟 교구의 목사였었다. 부친도 동대학에서 실천신학과 조직신학 교수로 재직하다가 독일 에어랑겐 대학으로 옮겨 13년동안 교수로 봉직하다가 다시 도르팟으로 돌아와 1889년에 별세하였다.
이런 훌륭한 가문에서 성장한 하르낙은 에어랑겐과 도르팟에서 공부하다가 1872년 10월에 집을 떠나 라이프찌히(Leipzig) 대학으로 갔다. 그는 그 곳에서 1874년부터 교리사(敎理史) 강사 생활을 시작하여 1876년에는 시간강사로 강의하였다.
그는 1879년에는 기센(Giesen) 대학의 교수로 임명되었다가 그후 마르부르크(Marburg)로 자리를 옮겼다. 그로부터 2년후 베르린 대학에서 청빙하여 왔다.
그러나 개혁파 총회의 반대를 받았다. 이 총회는 프러시아 국가교회의 최고기관이었기 때문에 신학교수 임명에 대한 거부권이 있었다. 이유는 그가 쓴 "교리사"(敎理史)라는 저서 때문이었다.
내용은 요한 복음과 에베소서 및 베드로 전서의 저자문제에 대한 회의(懷疑), 기적에 대한 비판적 태도, 동정녀탄생과 부활 승천에 관한 전통적 해석거부, 또한 세례는 예수의 직접적 제정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베르린대학 교수들과 문교부의 지지와 수상 비스마크(Bismark)의 추천으로 황제 윌리암 2세의 허락을 받았다. 이와 같이 그의 생애는 교회의 빛을 보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적으로 가장 권위 있는 신학자로써 군림하였다. 수천명의 신학도들은 그의 강의를 들으려고 운집하였다. 대부분의 저서는 교회사였고 연구중심부분은 신약신학, 교부, 종교개혁 및 프로테스탄티즘(Protestantism)에 대한 것이었다.
그의 저서로는 "교리사" "3세기까지의 기독교 선교 및 확장" "고대기독문헌사" "기독교의 본질"등이다. 그는 베르린 대학의 교목으로 있을 때 "기독교의 본질"이라는 책을 써서 전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1906년 그는 독일에서 가장 큰 베르린 왕립 도서관장이 되었다가 1930년 6월 10일 마침내 별세하였다.
2) 하르낙의 신학.
하르낙의 신학은 교회에서 자유하자는 신학이다. 즉 여러 세대동안 교회의 권위속에 교리가 존속되다 보니 이제는 파국 직전에 놓이게 되었다고 선언하였다.
동방정통교회는 제사의식에서만 존재하는 유물로 변질되었고, 로마교회는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절대권위의 계층적 제사 제도로 바뀌었고, 개혁교회는 복음의 우선권을 주장함으로써 교리적 원리를 무너뜨리고 말았다.
개혁파가 종교개혁은 하였으나 교리를 그대로 존속시키는 오류를 범하였다. 즉 루터파, 개혁파, 성공회 등은 목사나 성직자의 권위에 여전히 복종할 것을 강요하고 있다. 그런즉 종교개혁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종교사에 있어서 순수한 것을 찾기 위하여 비평하는 것은 진실한 개혁의 정신이다. 삼위일체 교리를 결정한 니케아 교리, 신인양성의 교리를 결정한 칼케톤 회의, 이런 신조가 영원히 지속될 필요가 없다. 기독교는 수세기 동안 내려온 교리의 총체는 아니다. 종교회의가 결정한 교리가 어떻게 절대무오한 진리가 될 수 있느냐? 그런즉 교리의 근거가 되어지는 모든 힘의 권위는 파괴되어야 한다. 개혁주의의 교리의 역사라는 것이 있을 수 있는 것인가?
그러므로 역사에 나타난 여러가지 형태의 기독교가 절대화되거나 표준화되어서는 안된다. 교회주의란 복음의 진수를 가리우는 어두운 휘장이다. 그러므로 폐쇄화되고 경직화된 교리에 붙들려서는 안된다. 정통주의에서 해탈되어야 한다. 역사에 의하여 교리는 정화되어야 한다. 기성교회만큼 뻣뻣하고 보수적인 것은 없다. 이러한 제도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그래서 종교개혁이 하다 못한 잔재를 현대신학이 완수하여야 한다.
신조 중에서 틀린 것은 자유롭게 변경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교리가 없는 기독교로 탈 바꿈을 하여야 한다. 교회는 자유로운 교회가 되어야 한다. 그 시대, 시대의 신조와 교리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새로운 신앙고백을 재정 하여야 한다.
하르낙은 종교와 문화, 성경과 역사, 하나님과 인간의 조화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교훈에는 기독교의 본질이 있다고 하였다. 예수의 교훈에는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 인간 영혼의 무한한 가치, 의(義)와 사랑의 법이라고 하고 이 모든 것을 조화와 진보에 결부시켜 해석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는 훌륭한 교사다. 복음이란 십자가, 죄, 용서가 아니다. 이런 것은 그의 제자들이 만든 교리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교리는 포기하고 사랑만 취하면 족하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제자들의 신앙이었지 그리스도의 주장은 아니다.
하나님은 진노할 줄 모르는 분이시다. 그리스도는 구세주가 아니고 고귀한 사랑이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윤리적 노력뿐이라고 하였다.
하르낙은 역사신학의 권위 있는 학자로써 기독교의 본질과 교리를 구별하고 이중적 복음을 언급한다. 즉 그리스도의 복음과 사도들의 복음의 부동성을 주장하였다. 예수의 복음은 기독교의 본질이지만 사도들의 복음은 교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복음의 핵심은 아들이 아니고 아버지이며 그리스도가 성부에게 나간 체험을 사도들이 승인하였다.
즉 그리스도가 자기자신을 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증거 하였고 이것을 제자들이 추인하여 교리를 만들었다. 그런즉 교리란 복음의 타락이요 그리스도의 증거만이 복음의 진수라고 하였다.
☞ 하르낙 신학에 대한 반증
정통 기독교교리(基督敎敎理)는 어디에서 산출(産出)되었는가?
기독교교리의 출처는 분명히 성경이다. 하르낙이 말하는 교리를 제자들이 만들었다고 하는 역사적 근거(歷史的 根據)나 성경적 근거가 없다.
교리는 성경의 집약인데 교리가 역사적으로 교정되어야 한다고 하면 교리의 근거가 되는 성경자체가 시간 따라 변경되어야 한다.
구약과 신약은 일신동체(一身同體)인데 어떻게 일신의 상체(上體)와 하체(下體)를 분리시킬 수 있단 말인가? 신앙고백을 세대마다 교체해야 한다면 그 제정자(制定者)는 누가 되어야 하는가?
겨자씨 한 알이 성장하여 큰 나무가 되듯이 기독교의 씨앗을 뿌린 후 역사를 따라 교리와 신조가 성장 완성하였다. 사과가 배가되고 귤이 감이 될 수가 없다. 결국 하르낙의 신학은 교리 없는 신학에서 성경 없는 신학으로 타락하고 말았다. 그는 이중적 복음(二重的 福音)을 창안하면서 그리스도의 복음과 사도들의 복음이 상이하여 예수의 복음은 사랑이고, 사도들의 복음은 교리라고 하였으나 교리없는 사랑, 사랑없는 교리는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독생자의 영광을 보니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기 때문이다.
하르낙은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는데 제자들이 꾸며낸 말이라고 주장하였으나 성경을 읽어보면 예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선포한 사실을 많이 본다.
하르낙은 교리를 등지고 사랑을 강조하며 윤리신학을 주장하였으나 그리스도는 윤리 이상이신 우리의 구세주, 즉 그리스도이시다.
하르낙이 사랑을 내세우지만 하나님이 없는 선은 악이고, 교리없는 사랑은 맹목적(盲目的)이다. 횡적인 사랑은 수평선이지만 종적인 교리는 수직이라 영생과 직결한다.
*. 본 내용은 신학교수이며 개혁신학연구소장 장관섭 목사님에게 저작권 이있으므로 무단 사용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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