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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트 아인슈타인

by 【고동엽】 2021. 10. 30.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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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사망국적분야출신 대학지도 교수주요 업적수상배우자자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독일어: Albert Einstein, 영어: Albert Einstein 앨버트 아인스타인[*], 1879년 3월 14일 ~ 1955년 4월 18일)은 독일 태생으로 스위스 미국에서 활동한 이론물리학자이다. 그의 일반 상대성이론은 현대 물리학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1] 1921년 광전효과에 관한 기여로 인하여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였다.
아인슈타인은 생애 동안 300개 이상의 과학 논문을 포함하여 다양한 업적과 활동으로 학문의 발전에 기여했으며, 현대에도 천재적 인물의 대명사로 잘 알려져 있다.[2]
목차
초기 생애[편집]




유년시절의 아인슈타인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독일제국 울름에서 전기 회사 사장이었던 유대인 아버지와 독일인 어머니 사이에서 1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두 살 아래인 여동생 마야(Maja)가 있었다. 그의 아버지 헤르만 아인슈타인과 어머니 파브리네는 매주 가톨릭 성당에 나가는 로마 가톨릭 신자였으며, 집안에도 청동으로 만든 십자고상이 있었다. 한 살 때 아버지와 숙부의 전기 회사 설립으로 대대로 살던 울름을 떠나, 뮌헨으로 이사했다.[3] 초등학교 시절 아인슈타인은 유럽인들의 뿌리 깊은 반유대주의로 인해 상처를 받기도 했다. 계몽사에서 펴낸 백과사전 전집인 계몽사 학생대백과사전 과학의 역사에 따르면, 아인슈타인이 다닌 초등학교는 로마 가톨릭 학교였는데, 교사가 수업 시간에 대못을 보여 주며, "유대인은 예수를 죽인 민족"이라고 말했던 것이다.[4] 반유대주의는 유대인 아인슈타인이 존경 받는 과학자가 된 후에도 그를 괴롭혔다. 학생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초등학교 시절은 불평등한 현실에 눈이 뜨는 기간이기도 했다. 그가 다니던 학교는 가난한 학생들이 남아서 청소하고, 부잣집 학생들은 청소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백부와 숙부의 영향으로 일찍이 수학 과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아인슈타인의 과학과 수학 성적은 매우 좋았으나 학교에서는 대체로 군대식 전체주의 교육에 대한 저항의식으로 반항적인 학생이라 여겨졌다. 1894년에는 부친의 사업부진으로 가족 전체가 이탈리아 밀라노로 건너가게 된다. 그는 이후 홀로 독일의 김나지움에 진학했으나, 학생의 개성을 무시하는 군대식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였다. 결국 신경쇠약으로 공부를 쉬어야 할 정도로 건강이 나빠지자, 17세의 아인슈타인은 "다시는 독일 땅을 밟지 않겠다."라며 학교를 떠났다.[4] 이후 독학으로 공부하여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교(ETH Zürich)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게 된다. 그러나 그의 뛰어난 수학 성적을 눈여겨본 학장의 배려로 1년간 아라우에 있는 자유로운 분위기의 고등학교에서 공부하고 나서 결국 연방 공과대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계몽사에서 펴낸 계몽사 그림위인전기 아인슈타인에 따르면, 학장이 부르더니 1년동안 아라우 고등학교에서 공부하고 오면 대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학생들의 개성을 존중하지 않는 독일의 전체주의 교육 탓에 고등학교 교육에 지쳐있던 아인슈타인에게 1년은 자유롭고 행복한 시기였다.
대학교 시절 아인슈타인의 성적은 중상위권을 맴도는 수준으로 특출하지는 않았다. 그는 당시 연방 공과대학교 교수였던 저명한 수학자 헤르만 민코프스키와의 마찰 때문에 수학에 대한 흥미를 상실한 상태에서 물리학에 더욱 심취하여 출석도 잘 하지 않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학과 물리학 시험에서는 1등을 하기도 했으나 졸업 시험 때는 만점 6점에 평점 4.91점을 받아 전체 6명 중 4등을 했다. 그러나 대학 동기이자 후일 아내가 되는 밀레바 마리치는 졸업 시험에 통과하지 못해서 결국 졸업을 하지 못한다. 밀레바는 특히 수학 성적이 부족했는데, 추후 재수를 했지만 결국 실패한다. 이는 후술하게 되는, 밀레바 마리치가 초기 아인슈타인 논문의 조력자인가에 대한 논란을 해소하는 한 근거가 된다.
물리학 연구[편집]
기적의 해
1905년 아인슈타인은 랜덤 워크를 통해 브라운 운동의 이론적 원리를 설명하는 논문 1편, 빛의 입자성을 입증하는 광전효과 관련된 논문 1편, 잘 알려진 특수 상대성에 관한 논문 1편, 총 3개의 논문을 잇따라 발표하는 데 이 논문들은 각각이 당시 최고 수준의 물리학자들이 즐비한 영국, 프랑스, 독일등의 최고 명문 대학 교수가 평생가서 한 편 낼까 말까 한 논문들이다. 모든 물리학계가 이에 놀랐으며, 떠오르는 신생 천재 물리학자에게 엄청난 관심이 쏟아졌다. 사실 저 논문 들 중에서 중요도는 상대론에 관한 것이 가장 높은데, 진위 여부를 가리기에 시기가 무르익지 않아, 확실하다고 판단되는 광전효과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게 된다. 하지만, 양자 역학의 태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광전 효과이지만, 그 내용이 너무나도 쉬운 것이라, 특수 상대성 이론의 중요도에 한없이 떨어진다. 후에 물리학자들이 차츰 아인슈타인의 엄청난 천재성을 느끼게 되면서, 1905년은 물리학의 해로서 지정하여 백년마다 그를 기리고, 주기율표 상에서 발견된 무거운 어떤 한 물질을 아인슈타이늄이라고 명명하였다.
특수 상대성 이론과 광양자설[편집]
1900년 봄, 아인슈타인은 연방 공과대학교를 졸업하였지만, 시민권 문제와 유대인에 대한 배척으로 취직을 하지 못하였다. 그는 가정교사, 임시교사 등을 전전하다가, 다행히 스위스 시민권을 취득한 후, 대학 친구였던 수학자 마르첼 그로스만의 아버지의 도움으로 베른에 있는 특허 사무소의 심사관으로 채용될 수 있었다. 특허 심사관으로 근무하던 1905년, 아인슈타인은 독일의 물리학 연보(Annalen der Physik)에 일련의 중요한 논문들을 다섯 편 연달아 발표한다. 우선 5월 한 달 동안 차례대로 브라운 운동에 관한 '정지 액체 속에 떠 있는 작은 입자들의 운동에 대하여'[5], 막스 플랑크 플랑크 상수를 도입해 빛의 광전 효과를 설명하여 고전 양자론을 태동시킨 '빛의 발생과 변화에 관련된 발견에 도움이 되는 견해에 대하여'[6], 그리고 특수 상대성이론을 소개한 '운동하는 물체의 전기역학에 대하여'[7]를 발표하였다. 1905년 8월에는 질량과 에너지의 등가설을 제창한 '물체의 관성은 에너지 함량에 의존하는가'[8]를 발표하였다. 상대성이론의 초기 아이디어들은 당시에 앙리 푸앵카레, 앨버트 에이브러헴 마이컬슨, 에드워드 몰리, 헨드릭 로런츠등 여러 학자들에 의해 알려져 있었지만, 이 두 논문은 당시 상대성에 대해 알려져있던 관련 사실들을 포함하면서 관성계의 상대성 이론을 명쾌하게 정립하였고 특수 상대성 이론의 대표적 논문들로 여겨진다. 1905년에 발표한 이 네 편의 논문들은 최초로 원자의 존재와 통계적 요동을 바탕으로 브라운 운동을 설명하는 한편, 현대물리학에서 두 축으로 불리는 양자역학 상대성이론에 크게 기여하는 뛰어난 논문들이었다.
또한 도중에 같은 해 7월에는 '분자의 크기에 관한 새로운 규정'[9]을 발표한다. 아인슈타인은 이것으로 취리히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게 된다.[10] 이 논문은 고체를 이루는 분자의 운동과 에너지에 관련된 것이었다.
일반 상대성 이론의 전개[편집]
이후 특수 상대성이론이 알려짐에 따라 아인슈타인은 유럽에서 점점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일반 상대성 이론은 중력을 시공간의 기하학으로 설명하는데, 관성계에 대해서는 헤르만 민코프스키 민코프스키 공간을 도입하여 특수 상대성 이론 시공간을 기하학적으로 다루는 방법을 제안하였다. 아인슈타인은 관성계에만 해당하는 특수 상대성 이론을 중력을 포함한 이론으로 확장하는 노력을 계속하였다. 리만 기하학이 그 이론의 틀로써 적당하다고 생각한 수학자 마르첼 그로스만이 아인슈타인에게 리만 기하학을 알려주면서 아이슈타인은 일반 상대성 이론을 본격적으로 만들어 나가기 시작하였다. 특허 사무소를 떠나서 학계로 입성한 그는 스위스에서 그리고 프라하와 독일의 대학교에서 정교수로 있었으며, 1912년 겨울에 모교인 ETH 취리히의 교수로 돌아왔다. 1914년에는 독일의 프로이센 과학 아카데미에 자리를 얻어 베를린에 머무르게 된다. 1914년에 드디어 일반 상대성 이론의 측지선 공식에 대한 최초의 형식화인 '일반 상대성 이론의 형식적 기초'[11]를 발표하게 되었다. 그는 일련의 시행 착오 끝에 1915년에 발표한 4편의 논문 중 마지막인 '중력의 장방정식'[12] 에서 마침내 일반 상대성 이론의 완결된 장방정식을 최초로 구현해 내었다.
국제적 명성과 노벨상 수상[편집]
1919년 런던 왕립 학회는 기니 만에 있는 프린시페 섬에서 있었던 관측에서 그해 5월 29일의 일식을 촬영하였는데, 일반 상대성이론에서의 예측이 검증되었다고 발표하게 된다. 이로써 아인슈타인은 뉴턴의 고전역학적 세계관을 마감한 인물로서 범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다. 그리고 1921년에는 광전 효과에 대한 공로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였다.




닐스 보어와 아인슈타인 (1925년)
양자역학의 거부와 통일장 이론의 추구[편집]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광양자설을 통해 양자역학의 초기 기반을 닦는 주요한 기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우주의 비인과성과 우연성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양자역학을 온전한 이론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보어 하이젠베르크 등에 의해 제창된 코펜하겐 해석 역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수 년에 걸친 보어와의 논쟁을 통해 EPR 역설 등의 사고 실험을 제기하며 양자역학의 비결정론을 폐기하려 노력하였으나 이것은 역설적으로 두 석학의 논쟁을 통해 다른 과학자들이 양자역학의 개념적 기반을 공고히 이해하도록 도움을 주는 결과를 낳았다. 그는 우연처럼 보이는 양자역학적 사건에 어떤 알려지지 않은 원인이 있다고 생각했다(숨은 변수 이론). 말년에는 양자역학과 거리를 두고 홀로 통일장 이론을 연구하였다.
논란[편집]연애 논란[편집]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젋었을 때 꽤 훈훈한 외모를 지니고 있어 대학친구인 밀레바 마리치와 결혼, 두 명의 아이까지 낳지만,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여 피난을 갔을 때 자신의 친척 누이인 엘자와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결국 아인슈타인은 친척 누이인 엘자와 결혼을 하기 위해 이혼을 요구하지만 두 아들들 때문에 밀레바가 거부하자, 자신과 살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요구했다.


하지만 이를 견디지 못했던 밀레바는 결국 아인슈타인과 1919년에 이혼을 하고 만다. 그렇게 밀레바와 이혼을 한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친척 누이 엘자와 두 번째 결혼생활을 하는데, 이후에도 대여섯명의 애인[14][15]들과 사귀면서 편지 약 1400여통을 보냈는데, 그곳에는 애인 에스텔라, 에델, 토니, '러시아 스파이'라는 애칭의 마리타 등과 편지를 주고받았다.[16] 이후에 그 편지가 경매에 나오기도 했다.[17] 하지만 이따끔씩 반박 또는 부정하는 글이나 뉴스가 올라오기도 한다.반박 뉴스 중 하나
밀레바 마리치의 기여 논란[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밀레바 마리치 § 물리학에서의 역할입니다.




1912년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 밀레바 마리치
밀레바 마리치가 아인슈타인의 초기 연구, 특히 1905년 소위 '기적의 해'에 씌여진 광양자설 특수 상대성 이론 논문들에 관여하였다는 주장이 한 동안 논쟁거리가 된 적이 있었다.[18][19] 특히 1905년에 발표된 논문의 저자에 "아인슈타인-마리치"라는 이름으로 작성된 것이 논란을 촉발시켰다.[20] 그러나 역사가들과 물리학자들의 조사를 통해 그녀가 과학적 연구에 기여하였다는 특별한 증거는 없는 것으로 결론이 내려졌다.[21][22][23]
아인슈타인의 초기 논문에 잠깐 등장한, 이름을 이어 붙인 저자 명은 밀레바가 아인슈타인과의 첫 아이 리제를(나중에 사생아 혹은 결혼 직전에 입양해버림)을 임신한 전후 시기에 힘들었을 때, 당시 스위스에서 관습적으로 서명하던 방식(뒤에 아내의 성을 붙여 적음)을 결혼 전에 미리 사용했던 것이다.[20] 아인슈타인은 마리치와 1914년 이혼한 이후에도 국제적인 명성을 얻으며 지속적으로 왕성한 과학적 활동을 하였으나 그녀는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교의 졸업에 실패하였을 뿐만 아니라 독자적인 과학적 결과물을 출판했던 적이 없다.[23][24] 마리치는 두 번의 도전 끝에, 특히 수학 성적의 부족으로 졸업 시험에 실패하였던 것이다.[23] 또한 마리치 본인은 그녀의 친구와 (아인슈타인 본인이 수없이 많은 연구 아이디어를 공유했던) 그의 동료에게 그녀 본인이 그의 연구에 관여되었다는 언급을 단 한번도 한 적이 없다. 그녀의 가장 가까운 친구인 헬레네 사비치(Helene Savić)에게 보낸 어떤 편지에서도 아인슈타인의 과학적 연구에 관여하였다는 힌트는 보이지 않는다.[25] 부부의 첫 번째 아들 한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그녀가 결혼과 동시에 과학에 대한 열의를 상실하였다고 증언하였다.[26]
미국 생활과 말년[편집]




미국 시민권을 받는 아인슈타인
1933년 미국 방문 중에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 집권자가 되었다는 것을 알고서, 같은 해 5월에 잠시 벨기에 안트베르펜에 있는 독일 영사관을 방문하여 독일 시민권을 완전히 포기하고 미국으로 망명하였다.[27] 이미 그의 재산은 나치 독일에 의해 압류된 뒤였으며, 시집간 그의 두 딸도 독일을 벗어나 인근 국가에서 살아야 했다. 1940년에는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였고, 이후 프린스턴 고등 연구소에서 교수로 지냈다. 미국에서 머무는 동안, 나치 독일에서 핵무기 개발하는것에 상대적으로, 미국의 군사력을 키워서 전쟁을 막아야 한다는, 여러 사람의 설득과 고심 끝에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원자 폭탄 제조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하였다.[28]
그는 1955년 4월 18일 프린스턴 대학교 자택 근처의 병원에서 복부대동맥류로 인한 출혈로 76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철학과 사상[편집]
"나는 천재가 아닙니다. 다만 남보다 오래 한 가지 일만 해 뿐입니다.[29]
정치적 견해[편집]
아인슈타인은 어려서부터 반유대주의를 느꼈으며 그의 상대성이론이 점차 전 유럽으로 확산될 때 학계에서 반유대주의의 방해를 받기도 했다.[30] 또한 나치에 반대한 평화주의자였으며 사회주의자이자[31] 유대인 국가 건립을 지지한 시온주의자였다. 말년에 그는 미국 내 일부 반공주의자들로부터 공격을 받기도 했다. 미국 하원 내 반공 정치인들은 "아인슈타인은 수년 전부터 공산주의자로 활약해 왔다.", "지금 그가 퍼뜨리고 있는 허튼 소리는 공산당 노선의 이행일 뿐이다."라며 비난했으며, 에드거 후버 FBI 국장(1924년부터 1972년까지 FBI 국장직 역임)은 아인슈타인의 사상 보고서를 작성하기도 했다. 그가 작성한 보고서에서 아인슈타인은 1947년부터 1954년까지 34개 공산주의 단체와 연관된 골수 공산주의자로 묘사되어 있다. 심지어는 독일에서 정치적 활동을 하지 않았던 1923년부터 1929년까지도 아인슈타인의 집은 공산주의자들의 본거지이자 회합 장소로 알려져 있었다고 했다.[32]
종교적 견해[편집]
아인슈타인은 불가지론자였다. 특히 확률적으로 존재하기 어려운 인격신, 유대교 기독교 세계관의 야훼를 부정하였으며, 자유의지의 존재도 과학적으로 확인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믿지 않았고, 생명체의 사고는 주로 환경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았다. 생전에 아인슈타인은 이런 말을 했다.[33]


또한 1954년에 아인슈타인이 철학자 에릭 구트킨트(Eric Gutkind)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이런 내용들이 적혀있다.[34]


아인슈타인의 종교적 관점에서의 창조주에 대한것은 다음과 같은 아인슈타인의 견해가 기록되어 있다.[35]


그러나, 위의 아인슈타인이 직접 적인 견해와 달리, 주변에서 본 아인슈타인의 모습에 대해서는 "아인슈타인은 같이 연구를 하는 동료 과학자들과의 입장과는 달리, 비록 성경에서 기록된 창조주는 아니라도, 아인슈타인은 우주를 창조한 창조주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졌다." 라고 휴 로스(Hugh Ross, 점진론적 창조론자) 박사는 책에 기록하였다.[36] 아인슈타인의 종교관을 스피노자의 합리주의적인 범신론에 가깝다고 보기도 한다.
저서[편집]
아인슈타인은 평생을 통틀어 수많은 책과 논문을 출판하였다. 대부분은 물리학에 대한 내용이며 몇 가지는 정치와 세상에 대한 견해를 담은 내용도 있다. 학술적인 내용 이외의 그의 견해를 밝힌 책 혹은 연설의 모음집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Albert Einstein (2005) [1934]. 《Mein Weltbild》 (독일어). Europa Verlag Znrich. ISBN 3856655107.
  • Albert Einstein (2007) [1934]. Alan Harris, 편집. 《The World As I See It》 (영어). Filiquarian Publishing, LLC. ISBN 1599868245.
  • Albert Einstein (1988). 《Ideas and Opinions》 (영어). Bonanza Books. ISBN 0517003937.
  • Albert Einstein (1993). 《Out of My Later Years》 (영어). Gramercy. ISBN 0517093804.
기타[편집]




이스라엘 지폐 도안의 아인슈타인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 "아인슈타인"은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교의 등록 상표이다.[37]
  • 독일에서 출생한 미국의 음악사학자 법학 알프레드 아인슈타인(Alfred Einstein)은 6촌 남동생이다.
  • 그의 초상화가 5 이스라엘 파운드(Lirot) 지폐의 도안으로 사용된 바 있다.
  • 천재 답게 괴짜이며 성격이 매우 재미있다. 하루는 기자가 아인슈타인에게 사진을 찍어도 되냐고 묻자 아인슈타인은 메롱을 하면서 사진을 찍으라고 했다.[38] 이 사진은 현재 매우 유명한 사진으로 남아 있다.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외부 링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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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데에프 선정(2003년) 위대한 독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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