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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회퍼의 계시현상의 실체적 해석학

by 【고동엽】 2021. 10. 27.

본회퍼의 계시현상의 실체적 해석학
(D. Bonhoeffers Hypostatische Hermeneutik der Offenbarungsphänomen)


김 재 진
(Dr. theol. 전 계명대학교 교수, 현 케리그마 신학연구원장)
출처: 케리그마 신학연구원(http://www.kerygma.or.kr)

I. 하나님 말씀의 원문(Urtext)인 예수 그리스도


디트리히 본회퍼(D. Bonhoeffer, 1906-1945) 신학의 특성은 해석학적 전망에 따라서 학자마다 다르게 강조되고 있다. 박봉랑 교수는 본회퍼 신학의 특성을 “基督敎의 非宗敎化”라고 특징지어 말한다. 그러나 본회퍼 신학의 특성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그 강조점에 있어서 조금씩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박재순 박사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본회퍼의 신학을 하밀톤(W. Hamilton)과 필립스(John. A. Phillips)는 세속화 신학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뮐러(Hanfried Müller)는 맑스주의적으로, 몰트만(J. Moltmann)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대리적 사역으로 해석하였다. 그린(Clifford J. Green)은, 본회퍼가 복음을 사회학적으로 전개하였다고 보고 있으며, 파일(Ernst Feil)은, 본회퍼의 신학이 그리스도와 세상에 대한 이해로 일관성있게 통일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래서 베트게(Eberhard Bethge)도, 본회퍼의 신학은 계시의 구체성을 강조하는데 있어서 수미일관하였다고 본다.
그러나 본회퍼 신학에 관한 연구는 최근 트로비취(M. Trowitzsch), 파일(Ernst Feil) 그리고 크뢰트케(W. Krötke)에 의해서 사회학 뿐만 아니라, 해석학과 철학적 차원에서 새롭게 연구되고 있다. 본회퍼 신학에 대한 이러한 최근 연구는 본회퍼 신학의 철학적 혹은 해석학적 근거를 찾아보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본회퍼가 교회와 역사 속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자유로운 계시행위를 칸트적 선험철학과 헤겔적 관념철학을 극복하고 그리스도-존재론적으로 전개하게 된 해석학적 방법을 분석해 보고자 하는 연구이다. 왜냐하면 본회퍼의 초기 작품인 ?성도의 교제(Sanctorum Communio), 1927?와 ?행위와 존재(Akt und Sein), 1930?의 해석학적 방법은 당시를 지배하고 있었던 독일의 위대한 두 철학자 칸트(I. Kant)와 헤겔(G.W.F. Hegel) 철학을 신학적으로 종합한 저작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본회퍼는 여전히 칼 바르트(K. Barth)의 그리스도 중심적인 개신교 신학의 핵심적 주제를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박봉랑 교수는 바르트의 신학이 본회퍼에게 미친 영향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본회퍼는 초기 바르트의 하나님 말씀의 神學을 따라가면서도 (‘성도의 교제’) 계시의 초월적인 행동과 위기의 지나친 강조에 대해서 계시의 존재의 면으로 억제하고(‘행위와 존재에서’), 계시의 객관적인 권위성의 위험에 대해서 계시의 세상적인 언어를 강조 했지만(‘옥중서간’) 본회퍼는 ‘종교적’ 인간의 인간학적 가능성으로부터가 아니고, 인간에게 오고 인간에게 말함으로써 행동하는 하나님의 현실로(예수 그리스도: 필자 주)부터 신학을 세우는데 있어서, 다시 말해서 그의 신학의 구조와 골격, 그리고 방법론에 있어서 본회퍼의 신학은 항상 바르트의 신학이었다.”


이러한 박봉랑 교수의 해석은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본회퍼 신학에 대한 해석학적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본회퍼가 그리스도론적으로 안내된(christologisch orientiertes) 말씀의 신학 내지 계시의 신학을 전개하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는 학자들마다 공통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박봉랑 교수의 본회퍼 해석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정당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이 제기된다: 어떠한 근거에서 본회퍼의 신학이 그리스도론적으로 안내된 말씀의 신학이라고 볼 수 있는가?이에 대한 답변의 일환으로서 트로비취(M. Trowitzsch)는 본회퍼의 해석학에 대한 10가지 중요한 명제를 제시하였다. 그 첫 번째 명제에 의하면 “근원적인, 그리고 무엇보다도 일차적으로 이해되어져야 하는, 필연적인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다.”이와같이 트로비취가 이해하고 있는 본회퍼의 해석학적 명제는, 본회퍼의 해석학이 철저히 기독론적 출발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더 자세히 말하면 본회퍼는 “신학의 대상은 그 자체의 대상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교회 안에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이다.”그런데 이 말씀, 곧 성서의 원전(Quelle), 혹은 최초의 본문(Urtext)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으로 본회퍼는 본다.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격적인 말씀이다. 바꾸어 말하면 본회퍼는 하나님의 말씀을 존재론적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교회에서 선포되고 있는 말씀도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격적 말씀에 기초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제 설교자는 분명히 말씀을, 곧 십자가에 달리신 분에 관한 말씀을 회고해야하고, 그 말씀을 선포해야 한다. 왜냐하면 설교자의 회고에는 오로지 신적인 사건에 대한 ‘회상(Gedächtnis)’에서 나온 일반적인 ‘문장들’과 ‘말씀’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말씀들을 설교자는 따라 말할 수 있고(nachsprechen), 그러나 그리스도인격(Christusperson)의 살아있고 창조적인 말씀 자체를 이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이 말은 예수가 성서 텍스트와 설교자에 의해서 선포되는 말씀의 원본문(Urtext)이 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예수의 존재는 단순히 육신으로 살았던 33년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성서의 말씀이 선포되는 설교자의 말씀 속에 존재하게 되고, 더 나아가 그 말씀이 실현되는 곳 속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은 말씀이 선포되는 교회에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본회퍼가 하나님의 말씀의 세가지 형태, 더 자세히 말하면 ‘설교’와 ‘성서’와 ‘예수 그리스도’ 속에는 “그리스도의 인격(Christusperson)”이 계시되었다고 봄으로서 말씀을 존재론적으로 해석한다. 왜냐하면 본회퍼에게 있어서 존재(ist)는 단지 “있음(es gibt)”이 아니라 “행위(in Akt)” 속에서 인식되어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격은 행위를 통하여 인식되어지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 곧 로고스(λογος)라는 것은 본회퍼의 ?그리스도론(Christologie), 1933?에서도 지배적으로 나타난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은 자신의 자유 안에서 말씀으로 자신을 계시하신다. 왜냐하면 인간도 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말씀하시는 로고스 안에서 인간과 만나시기로 결정하셨다. 인간의 로고스 안으로 하나님의 로고스가 들어오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이다.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그 인격 속에 말씀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더 자세히 말하면 “하나님의 인격적인 말씀”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인격적인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교회의 말씀, 곧 설교 속에 실존(existieren)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선포된 말씀으로서 현존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는 설교 속에 현존한다. 바꾸어 말하면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재 형태(Daseinsgestalt)”이다.예수 그리스도가 설교 속에 현존한다는 것은 그가 “객체적 말씀”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주체, 곧 “...에게 말씀을 건네는 분”으로 현존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설교를 듣는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이러한 의미에서 교회의 설교는 전적으로 인간의 말이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 곧 하나님의 인격적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러한 근거에서 본회퍼 해석학은 말씀의 세가지 형태 속에 현존해 있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본회퍼의 성서 해석학은 곧 그리스도론이다.




II. 말씀하고 계시는 하나님


본회퍼에 의하면 하나님은 영원히 자기 자신 곁에 머물러 있는(Beisichselbstbleiben) 분이 아니라, 즉 독자적으로 현존해 계신(Aseität) 분이 아니라, 자기출현(Aussichheraustreten)을 하시는 분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현존한다는 것(Gott ist da)은, 하나님께서 영원히 인간의 “비대상성(Nichtgegenständlichkeit)”으로, 즉 인간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존재로 계신다는 뜻이 아니라, “교회(Kirch) 안에 있는 당신의 말씀 안에서 파악하고 이해할 수 있는(faßbar)” 분으로 계신다는 것을 뜻한다. 더 자세히 말하면, 하나님은 교회 안에 있는 “말씀과 성만찬”을 통하여, 그리고 인간과 스스로 맺어진 “계약(Bund)”을 통하여 자기를 인간에게 계시하신다. 이렇듯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서 말씀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은 교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말씀의 선포행위 가운데 현존해 계시다는 것을 뜻한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 성서와 설교와 성만찬을 통한 사귐을 통하여 말씀하고 계신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계시는 하나님의 자유 속에서, 곧 “역사적인 인간에 자기 자신을 스스로 얽어매는 그러한 자유(in dem Frei-sich-gebundenhaben) 속에서 그리고 인간의 처분에 내어 맡겨진 자신(in dem Sich-dem Menschen-zur-Verfügung-geben) 속에서” 일어난다. 그래서 본회퍼는 바르트(Barth)의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주체성 개념을 수용한다:


“하나님은 항상 주님(Herr)으로, 항상 주체로 머물러 계신다. 그래서 누구든지 하나님을 대상으로 갖고자 하는 자는 결코 그를 가질 수 없을 것이다;그 분은 항상 ‘오고 계시는(kommende)’ 분이시지, 결코 ‘현존하시는(daseiende)’ 하나님이 아니다”


이에 상응하게 하나님의 말씀도 자유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본회퍼는 하나님 말씀의 자유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하나님 말씀의 자유는 명백한 신학적 진술들로 인하여 구속되지 않는다. 하나님 말씀의 자유는 오히려 그러한 진술들은 두 가지로 쪼갠다. 그래서 신학적 진술들은 단지 ‘비판적 유보’ 아래 있을 뿐이다.” 이러한 바르트(K. Barth)의 하나님 말씀의 자유 개념에 덧붙여 본회퍼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바르트의 모든 신학적 명제들은 필연성, 곧 내가 하나님에 관하여 언설(reden)하는 곳에서는 (왜냐하면 내가 그 분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닌 분을(Nicht-Gott)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내가 신앙하고 있는 나(Ich)에 관하여 언설하는 곳에서는 내가 아닌 나를(Nicht-Ich) 이야기하고 있다는 필연성에 기초해 있다.“ 이 말은, 인간은 하나님을 객관적 대상으로 증언할 수 없으며, 하나님을 인식과 증언의 객체로 삼을 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의 스스로 자유롭게 우리들에게 말씀을 걸어오고,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말하게 하심에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에 관하여 증언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이 제기된다: 기록된 말씀이나 교회에서 선포되고 있는 설교의 말씀은 무엇인가? 본회퍼에 의하면 교회 안에서 선포된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유로운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자유의 말씀”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즉 “설교자가 ‘말씀들’ 그리고 성서의 ‘문장들’을 ‘순수한 가르침(reine Lehre! recte docetur)‘으로 정확히 설명되는 곳에서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인격(Christusperson)이 그 말씀 속에서 증언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에서 선포되는 모든 말씀이나 성서에 기록된 말씀의 주체는 언제든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라는 것이다.
이상의 분석에서 분명히 드러난 것은, 본회퍼는 말씀을 통한 하나님의 순수한 계시행동으로부터 존재개념으로 넘어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본회퍼는 자신의 기독론 강의에서 “기독론의 대상은, 그리스도가 인격이라는 것 속에서 그 대상의 초월을 증명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문제가 되는 로고스(Logos)는 하나의 인격이다. 그래서 이 사람은(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킴: 역주) 초월하신 분이다.” 이제 여기서 더 없이 분명해진 것은, 본회퍼는 해석학적 대상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나 “선포”를 “문자” 혹은 “문장”이나 “말씀”으로된 객관적인 말씀으로 이해하지 않고, 주관적 내지는 주체적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로 존재론적으로 그리고 능동적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본회퍼의 해석학은 보이지 않는 존재가 구체적인 인격을 취하는 실체적인 의미(hypostatischen Sinn)를 갖는다.




III. 말씀의 행위로서의 인격개념(Personbegriff als Akt des Wortes)


본회퍼에게 있어서 인격(Person) 개념은 결코 철학적 개념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인격은 우주적 이성(理性)에 참여하고 있는 한에서만 인격이고, 스토익(Stoic) 학파에 있어서 인격은, 인간이 더 높은 의무에 복종함으로써 인격체가 된다. 그리고 헤겔에게 있어서 인격은 그것이 정신(Geist)인 한에서 인격이다. 따라서 본회퍼는 철학자에게서는 진정한 인격 개념을 찾을 수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철학자들은 동일한 차원에서 인간 이성을 우주적 이성 혹은 절대정신과 형이상학적으로 결합시키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리고 철학적 인격 개념은 사고의 원리에 있어서 무시간적(無時間的)이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한다. 따라서 본회퍼에게 있어서 인격은 무시간적으로 보편적 이성이나 정신에 참여 함으로써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타자(他者)에게 내어주는 행위 속에 존재한다. 그래서 본회퍼는 “오로지 자신을 내어주는 행위(Akt) 속에서 만이 인격은 ‘존재한다(ist)’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격은, 인격이 자신을 내어주는 자로부터 자유롭게 ‘존재한다(ist)’”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러한 인격이해는 그리스도인격(Christusperson)을 통하여 획득된 것이고, 단지 그리스도 안에 기초한 기독교적 교회의 인격적 사귐(Persongemeinschaft)에서만 유효한 것”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기독교적인 인격 개념은 하나님과 인간의 절대적 구별 속에서 신적 인격과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고 본회퍼는 본다. 이러한 의미에서 본회퍼에게 있어서 인격 개념은 우선 기독론적, 교회론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본회퍼에게 있어서 자신을 타자(他者)에게 내어주는 행위는 곧 계시행위이다. 역으로 말하면 계시는 순전히 행동과 관련해서 해석되어야 하는데, 그 “행동은 곧 말씀을 듣고 있는 사람에게 일어나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자세히 말하면 신적 로고스가 인간에게 주어지고, 그 신적 로고스를 신앙적으로 수용하는데서 하나님과 인간의 인격적 사귐은 일어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그 말씀을 듣고 결단하고, 그 말씀에 대하여 도덕적 책임을 지는 행동 속에 인격은 존재한다. 왜냐하면 본회퍼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에게 자신을 계시하고 있는 자(예수 그리스도: 필자 주)에게와, 이렇게 자신을 계시하고 있는 자의 말을 듣게된 자(Gehörtwerden)와 믿게된 자(Geglaubtwerden)에게 비종속적(unabhängig)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와 상응하게 본회퍼는 예수 그리스도 인격을 통한 사회적 관계차원에서 인격개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인간이 존재자(Seiender)로서 자연스럽게 지속해서 속해 있는 사물세계(Dingwelt)에서 나온 다른 사람은 그리스도 인격(Christusperson)을 통하여 사회적 인격 영역(Personsphäre) 속으로 되돌아간다. 따라서 이웃(der Nächste)은 나의 실존 저편에서 나에게 절대적인 방법으로 주장하고, 나에게 주장하고 있는 자로서 나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로서 만난다.”


그런데 말씀을 통한 계시행위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하나님과의 인격적 사귐은 무엇보다도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책임감있게 결단하고 응답하는 신앙의 행위 속에서 일어난다: “이러한 사귐의 말씀은 설교와 성만찬이고, 이를 실행하는 것은 신앙과 사랑이다.”따라서 본회퍼에게서 인격은 계속적으로 시간 안에서 일어나고 지나가는 교회의 사건 속에 현존하며, 사회적이고 윤리적 성격을 가진다.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신앙 안에서 그리스도를 나의 인격적 대상으로, 곧 나보다 능력있으니 나의 주님으로, 나를 화해시키시고 구원하시는 나의 주님으로 ‘가지고 있다(habe)’”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신적 로고스인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 로고스에 대항하는 대립된 “로고스(Gegenlogos)”가 된다. 그렇지만 “이러한 구체성 속에서 계시의 존재는 ‘공동체로 실존하고 있는 그리스도’로 생각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본회퍼에게 있어서 “신앙 인식의 대상은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말씀이다. 그리고 신학적 인식의 대상도 선포된 말씀이다.” 따라서 사귐을 위한 계시는 인격의 의미를 가지며, 인격은 계시된 존재가 된다. 본회퍼 자신의 말을 빌리면: “대상적인 것과 비대상적인 것 사이를 떠돌고 있는 계시존재는 ‘인격’, 자세히 말하면 하나님의 계시된 인격이고, 인격의 사귐인데, 인격의 사귐은 하나님의 계시된 인격을 통하여 정립된다.”
결국 본회퍼에게 있어서 말씀은 계시의 매개체, 바꾸어 말하면 인격적 사귐의 매개체이다. 왜냐하면 계시를 통하여 인격적 사귐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회퍼에게 있어서 말씀은 단지 사귐의 매개체만으로, 혹은 계시의 매개체 만으로 머무르지 않는다. 왜냐하면 말씀 그 자체가 인식의 대상, 곧 화육되어 인격적 사귐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께서 자신의 자유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신을 내어주시는 행동이 곧 하나님의 계시이며, 이것이 계시의 사건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안에서 선포되어지는 로고스가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계시존재이다. 따라서 본회퍼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은 역사 속에 현존한 살아있는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다른 분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회퍼에 의하면 인격적인 하나님의 로고스가 인격적 사귐의 대상이 되기 위해서 화육되는 사건은 단 한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은 인간과 지속적으로 사귐을 갖기 위해서 교회에서 선포되는 말씀과 성만찬을 통하여 지속적으로 그리고 연속해서 화육하신다. 이것이 바로 본회퍼에게 있어서 “계시의 연속성”이다. 본회퍼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계시의 연속성 속에 있는 인격적 사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계시의 존재는 과거 단 한번 일어났던 사건 속에 있는 것도 아니고, 나의 옛(alt) 혹은 새로운 실존(neu Existenz)과 무관하게, 근본적으로 자기 마음대로 처신할 수 있는 존재자(Seinenden) 속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계시의 존재가 또한 그 때 그 때 개개의 실존을 의미하는 단지 항상 자유롭고, 순수하고, 비대상적인 행동(Akt)으로 파악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계시의 존재는 오히려 인격들의 사귐(Gemeinschaft), 곧 그리스도의 인격에 의해서 결성되고 그 인격 안에 닫혀있는 사귐, 그리고 개개인이 새로운 실존 속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사귐의 존재(das Sein der Gemeinschaft der Personen)‘이다(ist)’.”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현존하는 “계시의 존재(Das Sein der Offenbarung)”이고, 예수 그리스도는 계시된 말씀, 곧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 이외에 다른 분이 아니다. 그래서 본회퍼에 의하면, 하나님은 항상 계시의 “주님(Herr)”과 말씀의 “주체(Subjekt)”로 머물러 계신다. 따라서 누구든지 하나님을 인식의 대상 곧 객체로 간주한다면, 그러한 사람은 결코 하나님을 대상 곧 객체(Objekt)로 대할 수 없을 것이다.이러한 점에서 본회퍼는 “현존하고 계시는(der daseinde Gott)”이 아니라 바르트(K. Barth)의 “오고 계시는 하나님(der kommende Gott)”개념을 수용한다. 왜냐하면 본회퍼는 계시를 “우발적인(kontigent)” 것으로 보고, “우발적인” 것이란 곧 “미래적인” 것이고, “자유로운” 것으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이제 여기서 우리는 간단히 다음과 같이 종합할 수 있다: 하나님의 존재와 인간의 존재는 말씀의 성육신 사건에서 비로소 계시된다. 그런데 본회퍼는 말씀의 성육신 사건을 낮아진 그리스도로 해석한다.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되신 하나님말씀(신적 로고스)의 실존양식이다. 이러한 신적 로고스의 화육을 통하여 하나님과 인간의 인격적 사귐이 이루어진다. 이러한 의미에서 말씀의 행위는 인격적 의미를 갖는다. 그런데 말씀의 인격적 개념은 나-당신의 관계 혹은 주-객 관계의 도식 속에 있지않다. 왜냐하면 신적 고로스가 인간적 로고스 속으로 화육됨으로서 스스로 인격적 사귐의 대상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사귐의 대상이 아니라, 오로지 대상이 되어주심으로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주체적 대상성이다. 이와 상응하게 화육된 신적 말씀에 대한 해석도 내가 듣고 인식할 수 있는 말씀이 아니라, 이해하도록, 깨닫도록 해 주심으로서 비로서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는 말씀이다. 인격적 사귐의 주체는 교회로 현존하는 화육된 말씀 그 자체이다. 이러한 말씀의 행위 속에 인격은 존재한다.




V. 말씀의 실체적(hypostatische) 해석


본회퍼은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인 ?성도의 교제(Sanctorum Communio), 1927, 1930?에서 교회를 사회학적으로 해명하고자 한다. 이 논문의 부제: “교회(혹은 공동체: 필자 주)로 존재하는 그리스도(Christus als Gemeinde existierend)”가 암시하는 바와 같이, 그는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가 현존하는 장소로 설명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교회를 하나님의 계시 자체인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das Sein)로 이해한다. 바꾸어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피안의 세계에, 곧 우주공간에 형이상학적으로 현존해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혹은 신앙 공동체”라는 구체적 장소에 실제적으로 현존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질문이 제기된다: 어떻게 교회가 하나님 계시의 존재 곧 예수 그리스도인가? 이에 대한 답변은 본회퍼의 말씀의 “비종교적 해석”으로 대신 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본회퍼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히 개념, 이념 혹은 교리로서가 아니라, 사건 속에 그 현실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말씀의 “비종교적 해석”이란 어떠한 것인가?
우선 본회퍼에게 있어서 말씀의 “비종교적 해석”이란 그리스도적 해석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본회퍼의 “비종교적 해석”은, 바르트가 그리스도의 하나님과 일반종교의 신(神)을 예리하게 구별하는데서 착안을 얻었기 때문이다.다시 말해서 바르트가 성서를 철저히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윤리적으로 확산시킨 것이 바로 “말씀의 혹은 성서저 개념의 비종교적 해석”이라고 바꾸어 쓸 수 있을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성서가 증언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 내지는 그의 말씀을 “성인이 된 세계(Die mündige Welt)” 속에서 교회론적 혹은 사회-윤리적으로 재해석하는 것이다. 따라서 본회퍼의 “비종교적 해석”의 출발점은 역사 속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현실(Wirklichkeit) 내지 존재(Sein)이다. 그러므로 본회퍼의 성서적 개념의 “비종교적 해석”은 성서의 증언과 화육된 말씀이신(요 1:14) 예수 그리스도의 행동(Akt)을 사회-윤리적으로 해석하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본회퍼는 말씀의 “비종교적 해석”의 근원을 구약성서에서 찾는다. 그는 구약성서에서 “세상 가운데 현실적으로 현존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발견한다. 왜냐하면 살아계신 하나님은 인간의 삶 ‘여기’ 혹은 ‘지금’에서만 알려지기 때문이다. 성서에는 저 세상(초월), 죽은 자의 거처, 내적 감정, 영혼의 세계에 대한 어떠한 사변적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오직 이 세계의 현실에서만 만나질 수 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다른 종교의 하나님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은 죽은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요, 세상 저 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이다. 본회퍼에 의하면 구약의 하나님은 초월적 세계와 내재적 세계의 창조주, 즉 하늘과 땅의 창조주이시다. 이렇듯 후기 본회퍼에 의하면 하나님은 역사 속에 곧 세상 속에 “현존해 계시는 분(Der daseiende Gott)”이다. 그래서 본회퍼는 “우리가 관심하고 있는 것은 저 세상(다음의 세상)이 아니고, 창조되고, 보존되고, 법칙에 속해 있고, 속량받고 새롭게 된 이 세상이다. ... 이것이 창조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십자가와 부활의 성서의 의미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구약성서의 하나님 개념에 상응하게 신약성서에서도 하나님 개념은 철저히 이 세상적이라고 본회퍼는 말한다. 신약성서의 하나님도 이 세상으로부터의 도피를 이야기 하지 않고, 이 세상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 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의 세상사랑에 근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참고. 요 3:16). 따라서 복음적 기독교, 곧 그리스도의 기독교는 세상적 기독교라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화육으로부터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철저히 이 세상 속에 살고 있는 우리를 위한 사건이다. 특히 예수의 부활이 저 세상으로의 부활이 아니라, 다시 먹고, 만질 수 있는 몸의 형식으로 완전히 새로운 땅의 존재로 부활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결코 피안적 혹은 형이상학적 사건이 아니라, 이 세상적인 것임을 분명히 말해 주고 있다고 본회퍼는 강조한다.
그러나 성서의 하나님은, 더 자세히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 권세잡은 자들에 의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 따라서 성숙한 세대에는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역사 속에 현존해 계시는 하나님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신다. 그래서 성숙한 세계는 오히려 하나님이 없는 것과 같은 세상이다. 따라서 참된 신앙인은 “비록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더라도(etsi deus non daretur)” “하나님 앞에서(coram deo)”에서 살아야 한다. 이러한 비종교적 성서이해를 본회퍼는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우리와 같이 계신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시는 하나님이다(막 15:34). 그렇지만 우리를 이 세상에서 살게하신 하나님은 우리가 항상 그 앞에 서 있는 하나님이다.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하나님과 같이 우리는 하나님 없이 산다.” 이제 성서의 말씀은 단지 ‘언설’, ‘교훈’, ‘증언’으로 머무르지 않는다. 성숙한 시대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들의 삶으로 실현할 때 그 말씀은 참된 말씀이 되는 것이다. 즉 성서의 말씀이 우리들의 삶 속으로 화육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성서의 말씀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서 이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처럼 고난 받으며 살아가도록 요청한다. 바꾸어 말하면 성서의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고난의 삶 속에 현존한다. 이 때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화육되어 한 인격을 형성하였듯이,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실현되어질 때, 바로 그 곳에 성서의 말씀이 현존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 앞에서 약술한 본회퍼의 ‘비종교적 성서해석 방법’은 말씀의 “실체적(hypostatische)” 해석이라고 특징지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선 첫째 본회퍼는 성서를 교회의 책으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더 자세히 말하면 교회에서 선포되고 있는 말씀과 성만찬으로 현존하는 말씀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말씀은 그리스도와 존재론적으로 일치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둘째로 본회퍼는 성서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성서의 중심, 의미 그리고 목적으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약성서의 말씀들은 말씀하시는 인격 예수 그리스도와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 셋째로 본회퍼는 성서를 “비종교적” 곧 예수 그리스도의 삶와 그리스도인의 삶을 위한 현실적이고 현재적 말씀으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넷째 무엇보다도 본회퍼는 구약성서의 시편 주석에서 시편기자 “나(Ich)”를 예수 그리스도로 해석한다. 다시 교회론적으로 바꾸어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시편의 “우리(wir)”로 해석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본회퍼의 ‘비종교적 성서해석 방법’은 말씀을 역사 속에 현존하는 예수 그리스도 내지 그리스도인으로 인격적 “실체(hypostase)”로 이해하는 해석학적 방법이다. 이러한 말씀의 “실체적” 해석 방법은, 본회퍼의 관심이 처음부터 단순히 신앙 혹은 성서의 언어를 이해하는데 있었던 것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내용을 “비종교적”으로 해석하고자 하는 의도에 기인한 것이다.




VI. 관념론적 초월(선험)철학과 존재론적 현상학의 극복: 실체적 해석학


본회퍼에게 있어서 계시이해는 곧 말씀이해이고, 말씀이해는 곧 그리스도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래서 본회퍼의 하나님 계시론은 교회로 존재하는 그리스도론으로 수렴한다(konvergieren). 따라서 교회의 설교를 포함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해석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론적 인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본회퍼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계시는 항상 말씀을 통하여,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말씀의 실체화(hypostase) 혹은 인격화가 일어나고, 말씀의 화육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를 역(逆)으로 본회퍼 자신의 말을 빌어서 설명하면,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으로서의 기독론은 고유한 학문이다. 왜냐하면 기독론의 대상은 말씀이며, 로고스(Logos)인 그리스도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독론은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말씀을 뜻한다. 따라서 기독론은 말씀론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말씀에 대한 해석은 곧 교회론적 기독론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본회퍼에게 있어서 말씀은 단순히 이념(Idee)이나 이념의 형태(Gestalt)가 아니다. 그에게 있어서 “말씀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다(Christus ist Wort ...).” 더 자세히 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신적 로고스(Logos)는 인간적 로고스로 들어간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짐이다.” 이러한 본회퍼의 기독론적 말씀론, 혹은 말씀론적 기독론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계시라는 기본 전제 위에서 우선 칸트적 초월(선험)철학과 헤겔적 관념론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계시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혹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계시실체로 해석한다. 왜냐하면 칸트의 초월(선험)철학에 의하면 하나님은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인간의 이성 안에만 형이상학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이 진정으로 초월적 존재라면, 인간의 이성을 초월한 하나님은 결코 인간의 이성에 의해서 인식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초월(선험)철학에서는 인간이 신(神)에 대하여, 혹은 신(神)의 말씀 인식하였다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의 인식의 대상으로 계신 참된 하나님이 아니라, 단지 신(神)에 대한 인간 이성의 성험적(a priori) 종합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칸트의 인식론은, 본회퍼에 의하면, 내가(Ich) 나 자신(sich selbst)을 이해하려는 시도, 즉 “나의 자기이해 가능성(die Möglichkeit des Sich-verstehens des Ich)”에 불과한 것이다. 이러한 근거로 칸트적 하나님을 존재를 인식하고자 하는 초월(선험)적 시도는 참된 신인식(神認識)에 도달할 수 없다고 본회퍼는 평한다. 본회퍼에 의하면 참된 인식이 이루어지려면 인식의 대상이신 하나님 자신이, 곧 신적 로고스가 인간의 존재 속으로, 더 자세히 말하면 인간 존재의 시-공간 속으로, 들어와야 한다고 말한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해서 본회퍼는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A.C. 2,67: “Deus non potest apredhendi nisi per verbum(하나님은 말씀을 통하지 않고는 결코 이해 혹은 인식될 수 없는 분이시다)” 수용한다. 이러한 본회퍼의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의 수용은 하나님 인식을 인간 이성에서 출발하지 않고, 말씀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로부터 출발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본회퍼는 헤겔식 관념론도 거부한다. 왜냐하면 관념론은 우선 하나님의 존재를 객관적 절대 타자로 이해하지 않고 인간의 이성과 동일한 이성적 혹은 형이상학적 존재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초월(선험) 철학에 의하면 “세상이 나와 관련하여 존재하는” 반면에, 관념론에 의하면 “세상이 인간 이성를 통해서 존재한다”고 본다. 그래서 관념론에서 하나님은 인간의 이성에 의해서 피조된 하나님이고, 인간의 사유 속에만 존재하는 하나님이다. 그래서 본회퍼는 관념주의의 하나님은 데카르트(R. Descartes)의 “Cogito, ergo sum” 원칙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다고 본다.
본회퍼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존재론적으로 접근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관념론이 하나님의 존재를 인간의 사고 속에 제한 시키고 있는 반면에 존재론은 ‘의식 밖에, 로고스 영역밖에, 이성의 영역밖에 참된 존재가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존재론(Ontologie)의 문제는 이성(Logos)과 존재(ὄν)의 결합을 시도하지만, 이성과 존재는 서로 대립한다고 본다. 그렇다면 존재론에서는 어떻게 이성밖에 있는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을까? 존재론에서 주장하는 하나님 인식의 전제는 바로 토마스적 스콜라 철학의 존재의 유비(analogia entis)이다.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하나님은 피조물로부터 분리되어 있지 않다.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존재하며, 하나님은 인간 안에 그리고 인간 위에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본회퍼는 이러한 존재론적 하나님 인식은 실존(existentia)과 본질(essentia)를 동일한 것으로 보기 때문에 참된 하나님 인식이 될 수 없다고 한다. 본회퍼에 의하면 존재-본질(esse-essentia)의 긴장 속에 존재하는 인간은 그 자신 안에 주어진 실존적 가능성으로서 “존재(ist)”, 즉 존재-본질의 동일성을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존재는 신적인 것도 아니고, 인간의 본질은 비신적인 것도 아니며, 그 역(逆)도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자기 관계는 인간의 본질과 존재의 차별(essentia-esse-Differenz des Menschen)과 하나님의 본질과 존재의 일치(essentia-esse- Identität Gottes)라는 전체성 속에 있다.”
이상 앞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본회퍼가 관념론적 초월(선험)철학과 존재론적 현상학을 거부하는 이유는 단 한가지이다. 그것은 본회퍼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 로고스의 화육이라는 요한복음 1장 14절의 말씀에 굳게 서 있기 때문이다. 즉 요한복음 1장 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을 본회퍼는 하나님 인식의 출발점으로 삼았고, 이 사건을 하나님의 행동 속에 있는 계시로 이해하였다. 왜냐하면 이 사건 속에서 형이상학적 말씀은 단지 이념과 교설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 안에 구체적으로 현존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인격(Christusperson)이라고 해석하였기 때문이다. 이를 통하여 본회퍼는 하나님을 인간의 이성에서 출원한 관념 속에 있는 하나님이 아니라, 실존적 존재로 이해하는 동시에 하나님을 인간의 이성 밖에서 인간의 삶 속으로 뚫고 들어온 객관적 실체로 이해하게 되었다. 이러한 본회퍼의 해석 혹은 계시 이해를 그 사실(Sache)로 따르면 말씀의 실체론적 해석이라고 특징지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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