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개혁교회와 역사(1) 분리 또는 복귀의 선언(1934년) 2007년 10월에 네덜란드 기독개혁교회는 총회에서 한국의 독립개신교회와 자매 관계에 들어가기로 결정하였고, 2008년 5월에 독립개신교회에서도 그 교회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였다. 또한 2008년 5월에 열린 네덜란드 개혁교회(해방) 총회에서도 독립개신교회와 공식적인 접촉을 갖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역사”라는 제목으로 두 교회의 역사를 살펴보려고 한다. 자매 관계가 유명무실하지 않으려면 서로의 역사에 대하여서 잘 아는 것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힘을 주시는 대로 다음의 주제를 다루려고 한다. 1부. ‘분리 또는 복귀’의 선언 (1834년) 2부. 애통(1886년)과 연합(1892년) 3부. 해방(1944년) 4부. 거룩한 보편적 교회 - 분리(1834년)와 애통(1886년)과 독립(1964년) 교회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과 함께 시작하고 고백과 함께 존재한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그리스도로 고백하였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 고백 위에 주님의 교회를 세우실 것을 말씀하셨다. 교회는 신앙고백과 함께 존재하고 신앙고백과 함께 전진한다. 따라서 교회의 역사를 볼 때에도 우리는 신앙고백적인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제도적인 관점이나 사회 경제적인 관점으로는 교회의 독특성을 바르게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네덜란드 개혁교회도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과 함께 시작하였다.1) 1561년에 작성된 네덜란드 신앙고백서는 “네덜란드에 사는 신자들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순전함을 따라 살기 원하여 일치된 의견으로 만든”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2) 네덜란드 개혁교회는 1563년에 독일 팔츠에서 작성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자기의 신앙고백으로 고백하였을 뿐 아니라 1618-19년에는 도르트에서 종교 회의를 열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와 예정을 부인하는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을 이단으로 정죄하였다. 네덜란드 신앙고백서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과 도르트 신조를 ‘하나 되는 세 고백서’(The Three Forms of Unity)라고 부른다. 신앙고백으로 교회가 통일되기 때문에 그러한 이름을 얻은 것이다. 하나 되는 세 신조로써 네덜란드 개혁교회는 로마 교회나 재세례파나 아르미니우스주의자와 다름을 천명하였다. 네덜란드 개혁교회는 처음부터 신앙고백적인 교회로 서서 전진하여 왔다. 1. 종교개혁에서 도르트 대회(1618년)까지 - 민족 교회의 성립과 전진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역사에서 독특하게 주목할 사실이 있다. 그것은 로마 가톨릭으로부터의 ‘종교개혁’이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으로부터의 ‘정치적인 독립’과 긴밀히 연결되었다는 점이다. 네덜란드 북부의 일곱 개 주가 주체가 되어서 독립운동을 하였는데 오란여(Oranje) 왕가는 특히 개혁 교인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독립운동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였다. 오란여 왕가는 개혁교회와 제휴하여서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였기 때문에 개혁교회는 루터교회나 재세례파에 비하여서 특권적인 지위를 누렸다. 국가의 공직자는 개혁 교인이어야 하였고 왕실이나 주(州) 정부가 목사의 사례비도 담당하였다. 그렇지만 개혁교회는 ‘국가 교회’의 방식을 따르지 않고 ‘민족 교회’를 세우려고 노력하였다. 국가 교회에서는 그 나라의 국민이 모두 출생과 동시에 교인이 되는데, 그렇게 되면 세례를 받고 교인이 된다는 사실이 무의미하게 되기 때문이다. 개혁교회는 동시에 재세례파처럼 국가 제도를 경시하거나 무시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왕권을 자기의 민족 안에서 높이 드러내려고 노력하였다. 가정과 교육뿐 아니라 사회나 정치에서도 성경의 원칙을 시행하려고 노력하였다. 즉 민족 교회로서 하나님을 섬기려고 한 것이다.3) 네덜란드 개혁교회는 ‘민족 교회’로 전진하였지만 동시에 ‘보편적 교회’로서 다른 교회들과도 적극적으로 교류하였다. 특히 아르미니우스의 주장을 반박하는 도르트 대회를 소집할 때에도 이웃 나라의 교회들을 초청하여서 교회의 중요한 문제를 함께 결정하였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은혜로 구원을 얻는 도리를 확정한 도르트 회의에서는 동시에 ‘도르트 교회법’을 채택하였다. 이 교회법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고백한 신조의 내용을 교회 정치에 구체적으로 적용한 것이다.4)도르트 교회법의 핵심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지역 교회가 자충족적인 면에서 온전한 교회이고, 교회들 사이는 ‘연맹’의 관계로 조직한다는 것이다. 지역 교회가 자충족적인 면에서 온전한 교회라는 것은 ‘목사의 강설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종교개혁의 원칙을 교회 정치에 적용한 것이다. 지역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직분자를 통하여서 전파되는데, 그 말씀이 동일하고 동등하기 때문에 모든 교회는 외형적인 크기에 상관없이 동일하고 그 직분자들도 동등하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는 곳이 지역 교회이기 때문에 교회 회의의 기본은 치리회[당회]이다. 노회나 총회는 ‘상회’(上會)가 아니고 교회들의 연맹체, 곧 ‘광의(廣義)의 회의’일 뿐이다. 2. 도르트 대회(1618년)에서 ‘교회 치리 정관’(1816년)까지 - 국가 교회의 성립 1618-19년에 아르미니우스주의자를 쫓아낸 이후 개혁교회는 평안하게 진행하였고, 네덜란드는 사회 경제적으로도 황금기를 맞이하였다. 17세기 전반기에는 네덜란드가 해상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엄청난 부(富)가 네덜란드로 몰려들었다. 그렇지만 평온하고 부유하다고 할 때에 세속적인 요소가 교회 안에 슬금슬금 들어왔다. 왕실과의 긴밀한 관계는 다른 면에서도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총회를 소집하려면 국왕이나 주 정부 관리의 동의를 얻어야 하였는데 왕이 그것을 미루었기 때문에 1618년 이후에 거의 2백 년 동안이나 총회로 모이지 못하였다. 따라서 네덜란드 안에서도 교회의 통일성을 잘 나타내지 못하고 지역별로 교회의 주장들이 나뉘었다. 18세기에는 계몽주의 사조가 교회에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계몽주의에 근거한 자유주의적인 신학 사상이 교회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하였고, 심지어 계몽주의가 기원한 프랑스의 것은 무엇이든지 좋다는 생각을 갖는 사람도 생겨났다.5)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은 네덜란드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자유와 평등과 형제애의 기치 아래 구제도의 모순을 타파하려고 일어났던 프랑스 사람들은 혁명의 정신을 주위의 다른 나라에 전파하려고 하였다. 프랑스 혁명군이 1795년에 네덜란드를 점령하였다. 그들은 주일을 없애고 제10일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도록 하였다. 왕실이나 주 정부가 지급하던 목사의 사례금도 중지시켰다. 뿐만 아니라 개혁교회의 재산이 국가나 로마 교회로 넘어가는 경우도 발생하였다. 프랑스 혁명의 혼란을 종식시키고 권좌를 차지한 나폴레옹은 네덜란드를 프랑스의 일부로 만들려고 하였다. 1806년에 동생 루이 나폴레옹을 홀랜드의 왕으로 앉혔을 뿐 아니라 같은 해에 교육법을 제정하여서 국가가 교육을 관장하도록 하였다. 그전에는 공립학교에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가르쳤지만 이제는 프랑스 혁명 기간 동안에 섬긴 ‘최고의 존재’를 가르치고 그것에 근거하여서 사회 윤리도 가르쳤다.6)1807년에는 찬송가를 출간하였는데 그 내용은 사람의 윤리적 선행을 강조하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구속과 삼위일체에 대한 것은 없었다.7)나폴레옹은 1810년에 네덜란드를 합병하고 세금과 징병 등을 엄격히 시행하였으며, 20인 이상이 집회로 모이는 것도 금지하였다.8) 나폴레옹의 몰락 후에 공화파와 왕당파 사이에 권력 투쟁이 있었는데 군주들이 승리를 거두고 오란여 왕실이 근 20년 만에 복귀하였다. 빌럼 5세의 아들이 빌럼 1세로 취임하였다(1814년). 그러나 왕정의 복귀가 20년 전의 과거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 혁명군과 나폴레옹의 통치 기간에 영국에 망명하였던 오란여 왕가는 각 주에 자치권을 주기보다는 왕권을 강화하려고 하였다. 교회에 대하여서도 영국 성공회의 모델을 따라서 왕실이 교회를 주관하려고 하였다.9) 오란여 왕정이 복구되었을 때에 로마 교회 신자들이 많은 벨기에 지역도 네덜란드에 포함되었는데, 그들은 오란여 왕가로부터 독립하려고 하였다. 따라서 왕은 그들도 만족시키면서 왕실이 종교를 통제하는 방안을 모색하려고 하였다. 왕은 개혁교회의 교인으로서 살기보다는 왕으로서 교회들을 통치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왕실 재정에서 목사의 사례금을 주었는데 이제는 이것도 교회를 통제하려는 방법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새로운 시도는 1816년 1월에 반포한 ‘교회 치리 정관’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교회 치리 정관을 따르면 총회가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최고 의결 기관이고 왕이 총회장을 매년 임명하였다. 1816년 6월에 교회 치리 정관을 따라서 총회가 열렸는데 총대(總代)로 모인 목사 12인과 장로 8인은 모두 왕이 임명한 사람이고 의장과 서기와 회계도 모두 왕이 지명하였다.10)그들은 네덜란드 개혁교회를 ‘총회-지역 대회-노회-지교회’의 상하 관계로 재조직하였다.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점이 있다. 첫째는 도르트 교회법의 핵심인 지역 교회의 독립성이 없어지고, 국가가 교회를 주관한다는 것이다. 왕이 임명한 사람으로 구성된 총회가 지역 교회의 문제를 주관한다는 사실이 사람들에게 심리적인 어려움을 주었고 반대가 일어났다. 그 문제에 대하여서 국가는 교리적 문제에 간섭하지 않고 교회의 정치 체제 문제만을 다루겠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교회의 정치 체제를 국가가 관장한다는 것은 “이 참된 교회는 우리 주께서 그의 말씀에서 가르치신 영적인 질서에 따라서 통치되어야 한다고 우리는 믿는다”(네덜란드 신앙고백서 제30조)와 정면으로 어긋나는 일이다. 교회를 정치 조직의 일부로 보는 것은 은혜의 복음을 전파되는 그리스도의 신령한 몸으로 보는 것과 정반대가 된다.11) 따라서 둘째로, 교회 치리 정관과 함께 신앙고백서도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이것은 새로운 임직 서약문에서 더 분명히 드러났다. 조그마한 키가 큰 배의 항로를 바꾸듯이 새로 작성한 임직 예식문의 한 구절이 도르트 신조를 유명무실하게 만들었다. 1618년의 임직 서약문과 1816년의 임직 서약문을 살펴보겠다.12) 이 서약과 함께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서와 요리문답에 담겨 있는 교리의 조항과 요점들이 모두, 1618-19년에 도르트 총회에서 앞의 교리의 몇 조항을 설명한 것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과 완전히 일치함을 진정으로 믿는다고 신실하게 또한 주님 앞에서 선한 양심으로 선언한다. 따라서 앞에서 언급한 교리를 근실히 가르치고 신실하게 변증할 것을 약속한다. (1618년 임직 서약문. 강조는 필자의 것)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하나 되는 고백서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담겨 있는 교리를 선한 양심으로 받아들이고 전심으로 믿는다고 선언하고, 근실히 가르치고 지지할 것을 선언한다. (1816년 임직 서약문. 강조는 필자의 것) 두 서약문을 비교하면, “1618-19에 도르트 총회”라는 표현이 새로운 임직 예식문에서는 생략되고 대신에 “하나 되는 고백서”라는 표현이 나온다. ‘하나 되는 세 고백서’가 ‘하나 되는 고백서’로 바뀌면서 도르트 신조는 조용히 사라졌다. 또한 옛 임직 예식문의 “하나님의 말씀과 완전히 일치함”이라는 말이 새로운 임직 예식문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라는 말로 바뀌었다. 얼른 보면 이것은 큰 차이가 아니다. 그러나 다시 읽어 보면 “고백서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담겨 있는 교리”라는 표현은 이전의 임직 예식문과 전혀 다른 말이다. 옛 서약문은 신조가 성경에 ‘일치하기 때문에’ 구속력이 있다고 하는데 새 서약문은 성경과 ‘일치하는 한’ 받아들인다고 말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13) 1827년에 작자 미상으로 출간된 “나의 개혁 동우(同友)들에게 고함”이라는 팸플릿은 서약문의 교묘한 함정을 바르게 지적하였다. 이 서약문[새로운 서약문]은 매우 교활하고 교묘하게 작성되어서 지혜롭고 정직한 크리허르(Krieger, 당시 총회장)도 어떤 악한 것이 있음을 의식하지 못하고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였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이 크리허르처럼 그것을 빨리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우리 앞에 있는 임직 서약문을 세심하게 살펴본 사람은 ‘우리 교회의 신조가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교회의 신조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담겨 있는 교리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따라서 서약하는 것은 신조가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는 한 따르겠다는 말이다.14) 익명의 저자가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전에는 세 신조가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한다고 하였지만 이제는 세 신조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과 부합하는 교리만을 전심으로 받아들인다고 하였다. 익명의 저자는 세 신조를 전체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판단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는 것만을 받아들이고 다른 부분은 무시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준 것을 지적하였고, 더 나아가서 ‘그렇게 교활하게 도르트 신조를 무시하는 것보다는 정직하게 도르트 신조가 잘못되었다고 지적하고 새로운 대회를 여는 것이 더 성경적일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사실 “하나 되는 고백서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담겨 있는 교리를 받아들인다”고 함으로써 세 고백서가 성경적 교리라고 고백하지 않고, 그 안에서 성경적인 것만 교리라고 인정하는 것이 되었다. 이것은 세 고백서를 실질적으로 부인하는 것이다. 따라서 신학교에서도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서를 가르치지 않을 문을 열어 둔 셈이 되었다. 실제로 신학교에서도 신조를 가르치지 않았다. 1834년의 개혁자 드 콕은 도르트 신조를 읽어 본 적도 없이 신학교를 졸업하였다. 무명의 팸플릿에 총회 관계자들은 당황하였고, 경찰의 힘을 빌어서 저자를 찾아내었다. 저자는 덴하흐[헤이그]의 은퇴 목사인 몰레나르(Dirk Molenaar)였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몰레나르가 그러한 주장을 익명으로 인쇄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교회의 분위기가 달라졌다는 것이다. 왕실에서 교회를 주관하려고 하였고 왕실에서 생활비를 받는 목사들은 그러한 변화를 받아들였다. 이제 교회의 생활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신앙고백서가 아니라 목사의 사례금을 지불하는 세속 권력이었다. 목사들이 ‘하나 되는 신조’에 ‘형식적으로 서명’을 하였지만 이제는 거기에 매이지 않았다. 자기들의 생각에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한다고 믿는 한에는 무엇이든지 자유롭게 가르쳤다. 심지어 아르미니우스적인 주장을 공공연하게 가르치는 목사도 있었다. 신앙고백서는 사람의 양심을 속박하는 것으로 간주하였고 도르트 신조를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사람들도 많이 생겼다. 심지어 “회중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일이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일도 있었다.15) 이러한 개악을 어떤 교회사가(敎會史家)는 “1816은 1618을 바꾼 것이다”고 통탄하면서 말하였다. ‘16’과 ‘18’의 순서를 바꾼 것은 결코 사소한 차이가 아니었다. 교회의 주인이 뒤바뀌는 중대한 문제였던 것이다. 이제 왕실이 교회 위에 군림하고, 교회 안에서도 세속화의 영향이 강하게 작용하였다. 민족 교회가 국가 교회로 타락한 것이다. 3. 교회 치리 정관(1816년)에서 ‘분리 또는 복귀’(1834년)까지 교회 치리 정관 이후 네덜란드 개혁교회는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가르치는 형편이 되었다. 사사기 말기와 같은 시대였지만, 그러한 때에 주목할 만한 두 가지 “운동”이 발생하였다. 첫째는 ‘비밀 집회소 운동’이다.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지 못하였기 때문에 영적 갈증이 있는 교인들이 따로 모여서 이전 세대의 목사들의 설교집을 읽고 거기에서 영적 자양분을 취하였다. 대체로 교회에 출석하지 않고 따로 모였다. 따라서 그들은 세례와 성찬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거듭나지 않은 목사의 손에서 주님의 살과 피를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개인의 거듭남을 확인할 수 있는가를 내적으로 살피는 데에 주력하고 제도적인 교회를 점점 강하게 비판하였다. 교회의 공적인 감독이 없이 모인 그들은 대체로 신비주의적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모임의 상당수가 반(反)교회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쟝 드 라바디(Jean de Labadie, 1610-1674) 파의 이단 운동에 가담하였다. 그렇지만 그 가운데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진실하게 사모하는 신자도 있었고 후에 ‘분리의 교회’에서 안식을 찾은 경우도 많이 있었다.16) 둘째는 스위스에서 시작하여서 귀족층에 전파된 ‘부흥 운동’(르베이, Réveil)이다. 칼빈이 사역하였던 제네바도 18세기에는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성경을 가르치지 않고 있었다. 이성이 성경의 자리를 찬탈하였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를 아는 사람이 소수에 불과하였다. 그때 스코틀랜드 출신의 할데인(Robert Haldane)이 소수의 학생들에게 로마서를 강의하였고 그 학생들은 성경을 정기적으로 공부하였다. 복음의 진리를 깨달은 그들은 기존의 교회에서 분리하고 복음주의적 신학교를 세우는 데까지 나아갔다. 나폴레옹이 몰락한 이후 부흥 운동은 유럽의 다른 지역에도 전파되었는데 네덜란드에는 1820년대에 영향을 끼쳤고 주로 귀족층에 전파되었다. 빌더르데이크, 스코츠만, 이삭 다 코스타, 아브라함 캅파도서, 흐룬 판 프린스터러, 판 자윌런 판 네이어펠트 등이 그 대표자이다. 그들의 저작은 비밀 집회소에서도 널리 읽히기 시작하였다.17)그러나 부흥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은 제도적인 개혁의 필요성은 절감하면서도 기존의 교회를 떠나서 새로운 개혁교회를 세우려고 하지는 않았다. 특히 이삭 다 코스타는 병든 어머니와 같은 기존의 교회에서 나오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태도는 그들의 신학적 강조점과도 관계가 있다. 그들은 개인의 경건에 주의를 기울였고 신학의 다른 면, 곧 성경적인 교회 정치 제도 등에 대하여서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교회가 아니라 자기의 저택에서 성경 공부 모임을 가졌고, 그것으로 만족하였다. 여기에 덧보태서 생각할 점은 부흥 운동의 지도자들이 대부분 귀족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이고 정치적으로도 보수적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어떤 형태의 ‘반란’도 싫어하였다.18) 그러나 그들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1834년 개혁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1834년에 첫째로 면직된 드 콕이 판 자윌런 판 네이어펠트의 책을 탐독한 것이나 두 번째로 면직된 스콜터(Scholte, 1805-1868)가 그의 친구들과 함께 다 코스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것이 그 증거가 된다.19)스콜터는 레이던에서 젊은 신학생과 함께 공부하였는데(스콜터 클럽) 이들이 모두 1834년에 가담한다. 이 점에서는 “분리의 선조들이 그들[부흥 운동]의 어깨 위에 선 것이다”고 말할 수 있다.20) 4. 개혁된 개혁자 - 드 콕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한 왕이시요 백성이 없을 수 없는 왕이시기 때문에”(네덜란드 신앙고백서 제27조) 주님의 교회를 부흥시키실 것이다. 그러나 그 부흥은 정치의 중심지인 암스테르담이나 신학의 중심지인 레이던이 아니었다. 북쪽의 변두리에 있는 윌룸(Ulrum) 교회에서 시작하였다. 윌룸은 11세기에 개간되었고 인구 2천 명 정도의 작은 마을이다. 윌룸의 개혁자는 헨드릭 드 콕(1801-1842)이다. 그런데 윌룸의 개혁은 먼저 목사인 드 콕의 내적 개혁에서부터 시작하였다. 교회의 개혁 이전에 목사의 개혁이 먼저 있었던 것이다. 드 콕은 자유주의적인 배경에서 자랐고, 매우 윤리적인 사람이었다. 그의 고향 교회 목사는 그리스도의 대속과 중생의 필요성을 부인하지는 않았지만 윤리적인 교훈만을 중요하게 가르침으로써 기독교의 핵심 교리를 간과하였다. 그런데 드 콕에게 요리문답을 가르쳐 준 헨드릭 니만(Hendrik Nieman)은 사람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었다. 드 콕은 요리문답 반에서 배운 것의 의미를 다 알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흐로닝언 대학에 진학하여서 신학을 공부하면서는 요리문답 반의 선생님의 가르침과 신학 교수의 가르침 사이에 차이가 있음을 느꼈다. 그의 안에서 내적 갈등이 시작된 것이다.21) 흐로닝언 대학을 졸업한 그는 1824년에 에펜하위전(Eppenhuizen) 교회에서 목사로 임직되었고 1829년에 윌룸 교회의 청빙을 받았다. 목사로 임직될 때에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서를 가르치겠다고 서약하였지만 그 당시의 다른 목사들처럼 그 신앙고백서를 읽어 본 적도 없었고, 칼빈의 『기독교 강요』는 들어 본 적도 없었다. 그는 회중을 합리적으로 교육하면 그들이 윤리적으로 선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정도의 생각을 품고 가르치고 있었다. 그러한 드 콕의 마음에 개혁을 가져온 것은 윌룸의 회중이었다. 특히 그가 요리문답 반에서 만난 클라스 카위펭아(Klaas Pieters Kuypenga)는 오히려 목사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제대로 교육을 받은 사람이 아니지만 영혼에 큰 갈망을 안고 있었다. 그는 “만일 내가 나의 구원에 눈곱만큼이라도 [직역하면, 숨을 한 번 쉬는 것이라도] 덧보태야 한다면 나는 영원히 멸망할 것입니다” 하고 고백하였다.22)드 콕의 전임자는 자유주의자였는데 그는 그 목사 앞에서 신앙을 고백하려고 하지 않았었다. 드 콕은 진지한 목사였고 회중의 고민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하나님의 은혜의 완전성이라는 문제를 두고 고민하는 교우를 놓고서 신임 목사는 자기 자신을 돌아보았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기 자신을 돌아보았을 뿐 아니라 비밀 집회소에서 읽던 이전 세대 목사들의 설교집을 읽기 시작하였다. 1831년에는 이웃 교회의 목사에게서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빌려서 몇 차례 탐독하였고 다음 해에는 교회의 어떤 과부로부터 도르트 신조를 얻어서 철저히 공부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를 깨닫고 그렇게 성경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드 콕은 도르트 신조를 꼼꼼히 공부한 후에 19쪽에 이르는 서문과 함께 그 신조를 자비로 출판하였다(1833년 9월). 또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서 핵심적인 것을 발췌하여서 요리문답반 교재로 출간하였다. 개혁자 드 콕은 먼저 자신이 말씀과 성신으로 개혁되었다. 그는 ‘개혁된 개혁자’(a reformed reformer)였다.23) 5. 개혁된 회중 - 윌룸 교회 1) 유아세례의 문제와 노회에서의 재판 드 콕의 복음적 설교에 대한 소문은 널리 퍼졌다. 주일에는 이웃 마을뿐 아니라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도 그의 설교를 들으려고 윌룸으로 몰려들어서 마차가 70대나 주차할 정도였다. 예배당이 좁아서 옆에 있는 목장에서 야외 집회로 모여야 할 정도였다. 드 콕에 대한 명성이 높아지면서 반대도 커졌다. ‘이성의 원칙을 따르지 않고 성경을 문자적으로 믿고 따르는 드 콕의 회중은 목장의 소보다 더 미련하다’고 직설적으로 비판하는 사람도 있었다. 목장에서 모이는 것을 두고서 그렇게 조롱한 것이다. 특히 같은 노회에 속한 두 목사가 드 콕을 비판하였다. 두 사람은 모두 전통적인 개혁 신앙과 신앙고백서를 비판하는 책자를 썼다(1833년 3월). 그 가운데 한 사람인 레딩히우스(G. B. Reddingius)는 신앙고백서를 종교개혁의 상황에서 나온 역사적인 산물로 보아야 하고 네덜란드 신앙고백서 27조에 나오는 ‘참된 교회’도 신자들의 모임으로 볼 것이 아니라 사해동포주의(四海同胞主義)에 근거하여서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로 구성된다고 주장하였다.1) 1833년 6월에 열린 노회 모임에서 다른 목사들도 모두 그 두 사람의 편이 되어서 드 콕에게 그의 주장을 써서 발표하라고 요구하였다. 드 콕은 “이른바 개혁교회의 목사라는 두 사람이 비판하는, 참된 개혁 신앙과 참된 개혁 신자를 변호함, 혹은 두 마리의 늑대가 그리스도의 양 무리를 공격하고 윌룸 개혁교회의 목사 드 콕이 변호함”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하였다(1833년 11월 15일). 여기에서 드 콕은 그들이 아르미니우스의 주장을 반복하고 외식(外飾)하는 사람임을 지적하면서 회중을 그릇된 교훈과 탐욕으로부터 보호하려고 그 책을 출간한다고 밝혔다.2) 여기에 문제를 크게 만든 것이 다른 회중에 속한 사람의 유아세례에 대한 문제였다. 1618-19년의 도르트 대회 때에 채택한 유아세례 예식문에는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있다. 둘째, 그대들은 사도신경에 요약되어 있고 여기에 있는 ‘이’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가르치는 구약과 신약의 교훈이 구원을 위한 참되고 완전한 교훈이라고 고백하십니까? “여기에 있는 ‘이’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가르치는 구약과 신약의 교훈”이라는 말은 구체적인 회중을 가리키는 말이다. 여기에 있는 ‘이’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표현은 말씀을 전파하는 지역 교회를 완전하고 독립적인 교회로 보는 도르트 대회의 정신을 잘 담아낸 말이다. 그런데 그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고 깊고 풍부하게 가르쳐서 구원을 확신하는 데에 이르도록 하지 않으면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긴다. 1834년에 생긴 유아세례의 문제는 바로 이것과 관련된 것이다. 윌룸에 출석하는 어떤 부모들은 서너 살이 된 자녀들을 데리고 와서 그들이 속한 교회에서는 구원을 위한 참되고 완전한 교훈을 가르치지 않기 때문에 그 교회에서 세례를 받게 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윌룸 교회에서 세례를 베풀어 주기를 간청하였다. 윌룸 교회의 치리회에서는 그 문제를 심각하게 논의하였고, 무명으로 팸플릿을 출간하였던 덴하흐의 은퇴 목사 몰레나르에게 자문을 구하였다. 몰레나르는 다른 교회의 자녀에게 세례를 베푸는 것을 금하는 경우는 없지만 교회의 평화를 위하여서 베풀지 말기를 권하였다. 그러나 그 부모들의 간청이 너무 간절하였기 때문에 윌룸 교회의 치리회에서는 그들에게 유아세례를 베풀기로 결정하였다(1833년 9월 29일).3) 노회에서는 그 문제를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노회원들은 왕이 임명한 총회장과 총회 비서와 서신을 몇 차례 교환하면서 드 콕을 정죄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때 막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은 얀선(J. D. Janssen)이었다. 그는 나폴레옹 정권에서도 일하였고 왕정복고 후에는 국왕을 위하여서 일하였다. 노회(老獪)한 정치가였던 얀선은 드 콕의 주장이 왕실에 미칠 파장을 알았기 때문에 그를 미리 제거하려고 하였다. 이후 거의 1년을 끌었던 재판은 사전에 결정된 각본을 따라 진행되었을 뿐이었다. 드 콕은 노회의 소환서를 받고서 치리회 위원들과 함께 갔다(1833년 12월 19일). 다른 교회의 자녀에게 세례를 준 것은 윌룸 교회 치리회의 결정이었기 때문에 치리회 회원이 함께 간 것이다. 그러나 노회원들은 드 콕만 입장하도록 하였고, 기도로 모임을 시작하자는 드 콕의 제의도 거절하였다. 그들은 미리 준비한 각본대로 재판을 진행하였다. 노회는 드 콕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하였고, 드 콕이 자기의 생각을 포기하지 않고 성경을 들어서 변호하려고 하자 그를 퇴정시켰다. 그리고 다음 날에 판결문을 전달하였다. 판결문에서는 다른 교회의 자녀에게 유아세례를 베푼 것, 노회에 속한 두 목사를 비방하는 책자를 쓴 것, 교회에 분열의 씨를 심은 것을 들어서 무기한으로 목사의 직무를 수행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때까지는 드 콕의 사례금을 그대로 지급하였다. 그렇지만 다른 목사가 와서 강설을 하거나 성례를 집행하는 비용은 드 콕의 사례금에서 지출될 것이라고 하였다. 노회는 드 콕에게 자기의 입장을 밝힐 기회를 주지 않았고 또한 의사 정족수를 채우지 못한 상태에서 정직(停職) 결정을 내렸다. 이 결정은 내용 면에서뿐 아니라 형식 면에서도 불법적인 결정이었던 것이다.4) 그러나 드 콕과 윌룸 교회의 치리회는 노회의 “상회”(上會)인 대회에 상소하면서 변명할 기회를 요청하였다. 대회에서는 드 콕에게 그의 주장을 철회하겠는가를 물었고 드 콕이 거부하자 노회의 정직(停職) 결정을 그대로 인정하고 덧붙여서 목사 사례금을 받지 못하게 하였다(1834년 4월 1일). 대회 당국자들은 드 콕을 2년간 정직시키고 사례금을 지불하지 않았을뿐더러 소송에 대한 비용을 모두 드 콕이 부담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대회는 세 가지 근거 가운데서 두 가지를 각하시키고 한 가지, 곧 노회에 속한 두 목사를 비방하였다는 것만을 근거로 드 콕에 대한 정직을 인정하였다. 2) “복음적 찬송”의 문제와 총회 법정의 결정 여기에서 새로운 문제가 나왔는데 그것은 드 콕이 이른바 복음적 찬송의 사용을 반대하는 책자에 서문을 쓴 일이다(1834년 초). “복음적 찬송가”(Evangelische Gezangen)는 1805년에 192곡을 모아서 출판한 것인데, 이 찬송가가 나오기까지는 역사적인 배경이 있다. 그 이름을 ‘복음적’이라고 붙인 데에는 시편 찬송에 대한 반대가 깔려 있다. 즉 시편 찬송은 ‘구약적’이므로 신약의 성도는 복음에 근거하여서 찬송해야 한다고 하였다. 특히 계몽주의의 영향 아래에서 낙관적인 인간관을 가진 사람들은 시편에서 말하는 ‘선인과 악인의 대비’,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보복’ 등이 정서적으로 잘 맞지 않았다.5)따라서 그들은 착한 일을 하는 사람에 대한 복과 평안에 대한 것을 노래하기를 좋아하였다. 하나님을 우주를 붙잡고 있는 ‘무한자’로 부르는 찬송들이 나왔고,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는 찬송은 사라졌다.6) 경건주의도 “복음적 찬송”이 나오는 데 영향을 끼쳤다. 경건주의는 종교개혁의 정신이 날이 갈수록 퇴색하여 ‘죽은 정통’이 되어 버리자 거기에 대한 반발로 ‘계속된 종교개혁’을 주장하였고, 신자의 마음과 주관적인 체험을 강조하였다. 이들은 주님과의 연합을 다분히 감상적이고 신비주의적으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특히 ‘비밀 집회소’에서 모이는 사람들은 이러한 찬송을 즐겨 불렀다.7) 1805년에 출간된 “복음적 찬송”에는 계몽주의적인 낙관적 인간관과 경건주의적인 주관적 체험을 강조하는 곡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계몽주의적 인간관과 경건주의적 인간관은 상반되지만 성경의 교훈을 온전히 모두 전파하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다. 두 가지 상반되는 입장이 “복음적 찬송”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출판되었다. 그런데 드 콕은 사람의 감정을 자극하는 노래와 아르미니우스적인 사상이 “복음적 찬송”이라는 명목으로 교회에 들어오는 것을 비판하였다. 드 콕은 “복음적 찬송”을 반대하는 팸플릿의 서문에서 “복음적 찬송”을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사이렌’에 비유하여서 말하였다.8) 그것은 사이렌의 노랫소리와 같아서 개혁 신자들을 구원에 이르는 교리에서 벗어나게 한다. 드 콕이 “복음적 찬송”을 반대하고 시편 찬송을 부른 데에는 ‘분리 또는 복귀’의 중요한 주제인 ‘도르트 대회의 결정’과도 관련이 있다. 도르트 교회법 69조에서는 “교회에서는 다윗의 시편 150편, 십계명, 주기도문, 사도신경, 마리아의 찬송, 사가랴의 찬송, 시므온의 찬송만 부를 것이다”고 규정하고 있다. 도르트 교회법에서는 구약의 시편이나 신약의 성경에 근거한 찬송만을 부르도록 하였는데, 19세기에서는 도르트 신조와 그 교회법을 옆으로 밀어내면서 시편 찬송도 함께 배척하였던 것이다. 이에 대해 드 콕은 도르트 신조와 교회법을 회복하면서 시편 찬송도 함께 회복하려고 하였다.9) “복음적 찬송”은 교회 안의 문제로 국한되지 않고 거기에는 정치적인 요인도 함께 작용하였다. 1805년에 출간된 찬송은 1807년에 네덜란드 각 주의 총독의 명령으로 모든 교회에 강제되었다. 당시 나폴레옹의 치하에 있던 정부의 종교부에서 그러한 결정을 하였고, 예배 시간에 적어도 한 곡 이상을 부르지 않으면 목사를 면직시키겠다고 위협하였다. 정부나 주에서 사례금을 받는 목사는 그 찬송가를 사용하여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논리였다. 따라서 그 찬송가를 비판하는 것은 교회들을 통일시키려는 국가의 정책에 반대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용인할 수 없었다. 정직을 당하였던 드 콕은 결국 해직되었는데 이른바 “복음적 찬송”에 대한 반대가 그 직접적인 이유였다(1834년 5월 29일).10) 드 콕과 윌룸 교회는 해직의 결정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총회와 왕에게 상소하였다. 드 콕은 개인적으로 빌럼 1세 앞에 서기도 하고 총회 위원회까지 출두하여서 이야기하였지만 그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834년 10월 2일에 최종 판결이 내려졌다. 총회 법정에서 그들은 드 콕이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질서와 통일을 어지럽힌 것”에 대하여서 무조건적으로 깊이 통감하면서 회개하고 “교회의 모든 규례와 규칙을 따라서 단정하게 행동할 것”을 약속해야 그가 해직된 것에서 해벌(解罰)될 수 있다고 하면서 그러한 내용이 담긴 문서를 제시하였다. 그리고 아무런 말도 없이 드 콕으로 하여금 그 문서를 친필로 베끼고 서명하여서 제출하도록 하였다. 드 콕이 그 결정을 받아들이고 베끼기 시작하였을 때 법정의 의장이 ‘여전히 그전처럼 빨리 쓸 수 있느냐’고 조롱하였다. 드 콕은 그러한 법정에서 서명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고서 그 자리에서 나왔다. 그는 밖에서 기다리던 사람과 기도하고 무거운 마음으로 고향으로 돌아왔다. 3) 스콜터의 방문과 ‘분리 또는 복귀’의 선언 윌룸으로 돌아왔을 때에 그에게 슬픔을 안겨 준 또 다른 사건이 기다리고 있었다. 세 살 난 딸의 병이 더 심해지다가 며칠 후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10월 5일). 10월 9일에는 뜻하지 않은 방문자가 찾아왔다. 레이던 지역에서 ‘스콜터 그룹’의 인도자로 널리 알려진 스콜터 박사가 예고도 없이 처음으로 방문하여서 드 콕과 그의 가족을 위로하였다. 그는 10월 10일 금요일에 그 회중을 상대로 말씀을 전파하였다. 주일에 강단에서 말씀을 전하는 것은 노회에서 금지하였기 때문에 주중에 집회를 가진 것이다. 많은 교우들이 모였기 때문에 집회는 목장에서 열렸다. 스콜터도 마차 위에 올라가서 복음을 전하였고 목사의 면직 기간 동안에 세례를 받지 못한 일곱 명의 아이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오후 7시에 시작한 모임은 10시 반이 되어서야 끝났다. 10월 12일 오후에는 예배당을 폐쇄하였기 때문에 목사관 옆의 목장에서 설교하였다. 회중은 스콜터 목사를 통하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지만 노회 측에서는 스콜터와 같은 목사가 설교하는 것도 인정할 수 없었고 오직 현대주의자가 설교하는 것만을 허용하였다. 그로 인해 긴장이 고조되기 시작하였다.11) 그가 떠난 후에 회중은 다른 길을 원하였다. 드 콕은 거의 1년 내내 교회에서 공식적인 업무를 수행하지 못하고 재판 사건에 매달렸고 총회나 국왕에게 호소한 것도 효과가 없었다. 그러한 때에 이웃 교회의 목사가 와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들을 격려하였다. 스콜터가 돌아간 후에 드 콕 목사는 두 명의 장로 및 세 명의 집사와 함께 모여서 의논하였다(10월 13일 월요일). 드 콕은 자기에게 맡겨진 양 떼를 위하여서 남은 유일한 선택은 기존의 교회에서 분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고 다른 직분자들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들은 “분리 또는 복귀의 선언”을 작성하여서 서명하였고 그다음 날인 10월 14일에 회중의 가장들도 서명하였다. 247명을 대표하는 가장 130명이 서명에 참가하였다. 이로써 1834년의 개혁이 시작한 것이다. 10월 14일 모임에 대한 윌룸의 치리회 회의록은 이렇다.12) 10월 14일 화요일 저녁, 무릎을 꿇고 주님을 앙망하며 기도를 드린 후에 우리는 거짓 교회로부터 분리하였고, 주님의 권위로 우리는 만인 제사장직을 취하였다. 그 직분은 전능하신 여호와, 영원하신 삼위 하나님께서 확정해 주신 것이다. 시편 찬송과 기도로 엄숙한 회집을 마쳤다. 윌룸의 치리회에 속한 그들은 자기들이 개혁자라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그들이 서명한 문서가 개혁의 시발점이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단지 자기들이 있는 위치에서 그 문제와 씨름하면서 주님의 인도를 따라서 서명했을 뿐이었다. 6. ‘분리 또는 복귀’의 선언(1834년)과 그 의의 윌룸의 회중이 발표한 문서의 이름은 “분리 또는 복귀의 선언”이다. 기존의 교회가 전통적인 신앙고백으로 복귀하지 않으면 그들은 그러한 교회에서 ‘분리’하여서 하나님의 말씀과 종교개혁의 신앙고백으로 ‘복귀’하겠다고 선언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신앙고백으로 ‘복귀’하려고 ‘분리’를 선언한 것이다. 좀 길지만 우리의 논의에서 중요한 문서이므로 ‘분리 또는 복귀’의 선언의 전문(全文)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13) 윌룸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개혁교회의 직분자와 회원으로서 아래에 서명한 우리는 상당한 기간 동안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타락을 지켜보았다.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우리 조상들의 교리를 삭제하거나 부인하였고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성례를 그분의 말씀대로 시행하지 않고 변질시켰고, 교회의 권징이 거의 사라졌다. 그러한 것은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서 29조를 따르면 참된 교회의 표지(標識)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회중은 ‘목사와 교사’를14) 선물로 받았는데, 그분은 하나님의 말씀의 어느 한 부분이나 전체를 능숙하게 해명하는 분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우리를 우리 조상들이 고백한 순수한 교리로 인도해 주었다. 그 결과, 회중은 점점 더 믿음의 규칙과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의 규례로 인도함을 받아서 신앙고백을 하고 생활도 하려고 하였다(갈 6:16; 빌 3:16). 또한 사람의 규례를 따라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을 멀리하려 하였는데, 그것은 그러한 예배가 헛된 것이라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가르치기 때문이다(마 15:9). 동시에 하나님의 영원한 은혜의 언약의 표와 인을 속되게 하는 것에 대하여서는 예의 주시(銳意注視)하며 막아내려고 한다. 그렇게 이곳 회중은 고요하고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우리의 ‘목사와 교사’가 매우 부당하고 경건하지 않은 방식으로 정직(停職)되었을 때에 이 고요함과 평화가 파괴되었다. 우리의 목사는 거짓된 교리와 오염된 공적 예배를 공적으로 반대하였다는 이유로 정직되었다. 지금까지 우리 회중은 우리의 ‘목사와 교사’와 더불어서 조용하고 정숙하게 행동하였다. 우리의 ‘목사와 교사’, 그리고 회중의 치리회의 다른 회원들이 매우 합리적인 몇 가지 제안을 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고 그 말씀을 따라서 사실을 살피고 재판할 것을 여러 번 요구하였지만 모든 것이 허사로 끝났다. 교회의 노회와 대회와 총회의 각 위원회는 가장 합리적인 이 요구를 거부하고 대신 회개와 자숙을 요구하였다.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으로 무엇이 그릇되었는가를 보여 주지도 않고서 그렇게 하였다. 또한 총회적 규칙과 규정이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것임을 보여 주지도 않으면서 무조건 따를 것을 요구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네덜란드 교회의 위원회는 우리의 조상들이 거부한 교황 교회와 같이 되어 버렸다. 앞에서 언급한 부패가 있을 뿐 아니라 거기에 더하여서 교회적인 법과 결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거부되고 무력하게 되고 있다(마 15:4; 23:4; 막 7:7-8). 또한 그분의 말씀에 기록된 대로 그분의 규율을 따라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있고(마 2:13; 5:11-12; 10:23; 23:34; 눅 11:49; 12:11; 요 5:16; 15:20; 행 7:52; 9:4; 22:4, 7; 26:11, 14-15; 롬 12:14; 고전 15:9; 갈 1:13, 23; 4:29; 빌 3:6; 살전 2:15; 계 12:13; 마 5:10; 13:21; 막 10:30; 행 8:1; 13:50; 롬 8:35; 고전 4:12; 고후 4:9; 12:10; 갈 5:11; 6:12; 살후 1:4; 딤후 3:11-12),15) 사람들의 양심을 결박하고 있다. 끝으로 우리 가운데서 개혁 신앙의 교사로 잘 알려진 목사, 곧 북부 브라반트(Brabant) 주(州)의 회스던(Heusden)과 알테나(Altena) 지역에 있는 두퍼른(Doeveren)과 헨더른(Genderen)에서 사역하는 하 페 스콜터(H. P. Scholte) 박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을 이 지역의 교회 위원회는 자기의 권위로 금지하였다. 또한 신자들이 공적으로 함께 모이는 것도 벌금형으로 막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것을 모두 모아 놓으면, 하나님의 말씀과 우리의 신앙고백서 제29조를 따를 때에 네덜란드 개혁교회는 참교회가 아니고 거짓 교회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아래에 서명한 사람들은 여기에 덧붙여서 아래와 같이 선언한다. 모든 신자의 직분을 따라서(제28조), 그[참] 교회에 속하지 않은 사람과 분리하고, 따라서 네덜란드 개혁교회와는 그들이 주님께 대한 참된 예배로 돌아오기까지는 더 이상 교제를 갖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선언한다. 동시에 우리는 모든 참된 개혁 신자들과 교제를 나누기를 원하고, 어느 곳에서나 하나님께서 불러 모으신 곳에서 하나님의 무오(無誤)한 말씀에 근거하여서 세워진 회중과는 연합하기를 원한다고 선언한다. 우리는 역사를 두고 존중받아 온 ‘하나 되는 고백서’(네덜란드 신앙고백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618-19년에 열린 도르트 대회의 결의들)에 모든 일에서 머물고 싶다고 그들과 함께 증언하며, 우리의 공적인 예배는 역사를 두고 존중받아 온 교회의 예식과 일치하며, 예배와 교회 정치에 대하여서는 이제 앞에서 언급한 도르트 대회에서 작성한 교회법에 머물려고 한다. 끝으로, 우리는 부당하게 정직된 우리의 설교자를 합법적으로 부르심을 받고 임직된 우리의 ‘목사와 교사’로 여전히 인정한다고 여기에서 선언하는 바이다. 윌룸, 1834년 10월 13일 장로 뵈커마 (J. J. Beukema), 장로 바르커마 (K. J. Barkema), 집사 판 데르 란 (K. A. van der Laan), 집사 리처마 (D. P. Ritsema), 집사 보스 (Geert K. Bos). ‘분리 또는 복귀’의 선언은 네덜란드 신앙고백서 제29조의 순서를 따르고 있다. 참된 교회의 세 가지 표지(標識)로 말씀과 성례와 권징을 열거한 후에 그것을 변질시킨 거짓 교회의 모습을 조목조목 밝힌다. 첫째, 윌룸의 회중은 그 교회의 목사를 선물로 받았고 그분으로부터 생활의 구체적인 데에서도 주님의 인도하심을 맛보았고 신앙고백으로 인도를 받으면서 예배를 드렸다고 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면서 말씀이 인도하는 대로 살고 고요함과 평온함을 누렸다. 그러나 네덜란드 교회의 지도자들은 그들이 선물로 받은 목사를 정직시킴으로써 그들의 평화로운 삶을 깨뜨렸다. 둘째, 사람의 규칙을 따르는 예배는 헛것이고 그러한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영원한 은혜의 언약의 표와 인을 속되게 한다’고 하였다. 윌룸의 회중은 하나님의 언약의 표와 인을 속되게 사용하는 것에 대하여서는 예의 주시하면서 막아내려고 하였다. 셋째로, 교회의 권징은 영적인 것인데, 네덜란드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엇이 그릇되었는가를 보여 주지 않고 “총회적인 규칙과 규정을 무조건 따를 것을 요구”하였다. 이것은 권징이 성경적으로 시행되지 않았다는 구체적인 예이다. 요약하면, 네덜란드의 국가 교회는 교회의 세 가지 표지를 갖추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러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참된 교회를 핍박하였다. 참된 교회를 핍박하는 그들은 곧 거짓 교회임이 분명하다고 밝혔다. ‘분리 또는 복귀’의 선언은 네덜란드 신앙고백서를 따라서 주의 깊게 작성되었고, 여기에서 분리와 복귀의 뜻을 분명히 밝혔다. 그들은 지금은 ‘분리’하지만 국가 교회의 상황이 개선되면 ‘복귀’하겠다고 말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신앙고백으로 ‘복귀’하려고 거짓 교회로부터 ‘분리’한다고 밝혔다.16) 1834년 개혁의 진정한 핵심은 국가가 교회를 간섭한 것에 대한 반발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신앙고백으로 복귀하려고 분리한 것인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마지막 문단에서 천명하는 것처럼 특히 ‘도르트 신조와 교회법으로 복귀하는 것’이었다. 도르트 신조에서 가르치는 대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를 성경적으로 가르치고, 도르트 교회법에서 규정하는 대로 목사의 강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기 때문에 교회들과 직분자들이 서로 동등이고, 하나님 외에는 그들 위에 다른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천명하였다. 1816년의 교회 치리 정관에서 삭제된 1618년의 도르트 신조와 도르트 교회법으로 복귀하려는 것이 1834년의 핵심이었다.17) 1934년에 1834년에 대한 백 주년 기념식에서 클라스 스킬더 박사는 “또한 우리의 시대를 위한 ‘분리’의 교의학적 의미”라는 글에서 ‘분리 또는 복귀’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하였다.18) 사람들이 1834년에 도르트 신조의 ‘해석’을 가지고 오지 않고 ‘좋아하는 주제’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단지 교회가 역사적으로 받아 온 영적인 재산에 교회가 책임을 지도록 지속적으로 주장하였기 때문에, 바로 ‘그’ 사실에서 1834년의 신앙의 용사들은 ‘파당’을 형성하기를 원하지 않고 교회 생활의 울타리 안에 교회적 신조로서 이미 ‘존재한 것’에 자기들을 복속시키기를 원하였음이 입증된다. 네덜란드 개혁교회가 그 신조로 복귀하기를 원하였다면, 달리 말하여서 권력자들이 거짓된 표현으로 (신조를) 유명무실하게 만든 서약 형식을 버린다면,……이러한 방식으로 사람들이 도르트 대회 이후에 교회의 합법적인 재산을 단지 유지하기를 원했다면……‘그러면 그들은 만족하였을 것이다.’ 1834년의 개혁자들이 주장한 것은 교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나 신기한 주제가 아니었고 이미 교회가 결정한 그 신앙고백서 안에 계속 거하는 것이었다. 성경과 신앙고백에 머물려고 한 점에서 이들은 ‘분리주의자’가 아니었고 비밀 집회소의 모임과도 구분된다.19) 드 콕과 윌룸의 회중이 왕에게 호소한 것도 ‘민족 교회’에 대한 전통적인 생각을 견지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윌룸의 회중과 드 콕은 성경의 교훈을 따라서 주님의 전적인 주권과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를 교회의 역사적인 신조를 따라 고백하기를 원하였다. 주님의 은혜를 강조하지만 개인적인 차원에만 안주하는 비밀 집회소나 부흥 운동과 달리 그들은 교회의 강설로써 주님의 은혜를 맛보고 교회의 직분을 통한 주님의 신령한 통치가 교회에서 나타나기를 소원하였다. 당시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도르트 신조를 따르는 것은 200년 전으로 회귀하는 것이고 이성의 법칙을 따라서 계몽된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였지만, 드 콕과 그의 회중은 교회에서 선포되는 말씀에서 생명을 얻었다. 목사가 주님의 말씀으로 개혁되고 회중 전체가 목사의 강설로 개혁되어서 오래된 신앙고백서를 오늘 자기의 것으로 고백하였는데, 이러한 교회가 역사적으로 중차대한 개혁에서 쓰임을 받았다. 이것이 바로 참된 개혁의 길이고 개혁 신학의 길이다.20)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역사(3) 분리 또는 복귀의 선언(1834년) 7. 계속된 ‘분리 또는 복귀’, 그리고 국가의 핍박 1) 계속된 ‘분리 또는 복귀’ ‘분리 또는 회복’의 선언으로 참된 개혁의 길을 걷기 시작한 윌룸의 회중은 이제 자유롭게 예배를 드릴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노회에서 파송한 자유주의적인 목사의 설교를 듣기를 거부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바람대로 드 콕이 자유롭게 설교한 것은 아니었다. 드 콕은 그다음 주일에 에베소서 2:8-10을 본문으로 하여서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는 복음을 강설하였다. ‘오직 은혜’를 강조하는 것이 ‘분리 또는 복귀’의 핵심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 예배당 건물에서 행한 마지막 강설이었다. 오후 예배부터는 예배당에 들어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고 그다음 주일에는 서재에 구금되었다. 목사관에는 군인 12명이 상주하면서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였고, 심지어 신약 성경을 제외한 책과 공책을 모두 압수당하기도 하였다. 드 콕은 불법 집회를 인도하였다는 죄목으로 벌금도 내고 11월 28일부터 석 달 동안 흐로닝언에 있는 감옥에 투옥되어서 추운 겨울을 지냈다. 그가 감옥에 있을 때인 1835년 2월 15일에 드 콕의 가족은 목사관에서 쫓겨났다. 드 콕 목사의 부인 페이너마(Venema)는 남편의 옥바라지뿐 아니라 가정의 살림까지도 책임을 져야 하였다.1) 그러나 드 콕을 감옥에 가두었다고 하여서 윌룸 교회가 분리 이전의 상태로 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교우들은 어려움 가운데서도 ‘분리 또는 복귀’의 길을 함께 갔다. 그들이 당한 어려움은 매우 크고 무거운 것이었다. 150명의 군인들이 ‘분리 또는 복귀’의 교회에 속한 교인들 집에 머물렀는데 교인들은 그들의 잠자리뿐 아니라 먹을 것도 제공하여야 하였다. 가난한 교우들이 짊어진 경제적인 부담 이외에도 군인들의 안하무인격인 행동과 폭행, 심지어 성폭행 등으로 괴롭힘을 당하였다. 그렇지만 그러한 폭행은 ‘분리 또는 복귀’에 가담하는 것을 막으려는 전략의 일환이었기 때문에 정부에서는 수수방관(袖手傍觀) 하였다.2) 스콜터가 윌룸에서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에 그는 윌룸에서 설교하고 그 회중의 유아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는 이유로 노회에서 면직 통고를 받았다(1834년 10월 29일). 스콜터와 그의 회중은 분리를 선언하고 287명의 회중이 거기에 서명하면서 복귀의 길에 참여하였다(1834년 11월 1일).3) 스콜터와 그의 회중은 그들이 모이던 예배당에서 쫓겨나서 다른 곳에서 예배를 드려야 하였고 스콜터 목사는 11월 말에서 12월 초까지 흐로닝언의 감옥에서 지냈다. 목사가 죄수로 취급을 당하는 모욕을 당하였는데, 그때의 심경을 스콜터는 이렇게 기록하였다.4) 11월 29일 토요일 여기에서 나는 나쁜 사람 취급을 받는다. 주님께서 나를 도와주셔서 그 모욕을 즐거이 감당하게 하신다. 혼자 있을 때에 나의 마음은 가득 채워짐을 느낀다. 주님과 교제를 나눌 때에 나의 상한 마음이 누그러든다. 주님께서는 내가 주님의 이름 때문에 옥에 갇혔다는 것을 아신다. 나 자신과 사랑하는 가족들, 그리고 나의 회중을 주님의 전능하신 보호에 맡기고 잠에 들었다. 11월 30일 주일 주님의 말씀으로 힘을 얻고서 시편 68편의 처음 석 절을 불렀다. 하루 종일 주님께서 나를 지금까지 어떻게 인도하셨는가를 생각하고 국가와 교회의 상태를 생각하면서 지냈다. 함께 갇혀 있는 사람에게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었다. 비록 옥에 갇혀 있지만 그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였다. 드 콕(1801-42)과 스콜터(1805-68)가 투옥되었지만 ‘분리 또는 복귀’의 일은 계속 진행되었다. 스콜터 그룹에 속한 다른 목사들, 곧 브루멜캄프(1811-88), 판 펠젠(1809-96), 미르뷔르흐(1806-55), 판 랄테(1811-76) 등이 가입하였다. 브루멜캄프, 판 펠젠, 미르뷔르흐는 ‘복음적 찬송가’를 부르기를 거부하였다는 이유로 1835년에 면직되었다. 총회에서 ‘복음적 찬송가’를 부르기로 결정하였는데 그것을 따르지 않는 것은 교회의 통일과 화평을 해친 것이라고 하면서 그들을 면직시켰던 것이다.5) 1834년 말에는 70여 개 회중이 조직되었고 1835년에는 130여 개의 회중이 조직되었다. 23-33세의 젊은 목사 6명이 130여 개의 회중을 순회하면서 예배를 인도하였다. 비밀 집회소에서 모이던 많은 사람들은 젊은 목사들의 인도를 따라서 교회로 조직하면서 전진하기 시작하였다. 비밀 집회소에서 모였던 사람들이 ‘큰 비밀 집회소’로 발전한 것이 아니라 신앙고백에 근거하여서 ‘교회’로 서서 전진하였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6) 여전히 핍박이 있었고 목사의 수가 매우 부족하였지만 그들이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을 자기들의 것으로 고백하면서 교회로 선 것은 1834년의 복귀가 몇몇 목사의 개혁 운동이 아니라 회중들의 자발적 참여에 의한 것임을 나타낸다. 1836년에는 2,000명이 복귀의 길에 가담하였고 1840년에는 6,000명이 되었다.7) ‘분리 또는 복귀’의 길에 들어선 그들은 1836년 3월 2-12일에 비밀리에 1차 총회를 열었다. 목사 세 명과 장로 열한 명이 총대(總代)로 모여서 도르트 교회법의 정신을 따라 교회법을 작성하려 하였고 국왕에게 그들이 새로운 교회를 조직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의 교회로 돌아가는 것임을 밝히는 글을 작성하여서 보냈다. ‘복귀’를 위하여서 ‘분리’한 자기들이 진정한 ‘기독개혁교회’라고 천명한 것이다. “우리는 이제 우리의 권리를 받고 새로운 교파라는 이름을 얻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진실로 기독개혁교회로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하고 편지를 보냈다.8) 2) 국가의 핍박 국왕 빌럼 1세는 ‘분리 또는 복귀’에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1814년 왕정복고 이후에 왕실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가 ‘국가의 통일’이었기 때문이다. 통일을 반대하는 것은 어느 것이든 용인할 수 없었고 ‘분리’라는 말은 결코 허용할 수 없었다. 왕은 새로 조직된 교회는 불법이므로 해체되어야 한다고 선언하였다. 그래서 집회의 자유를 금하려고 나폴레옹 시대의 법령, 곧 20인 이상이 모이지 못하게 하는 법을 개혁 교인을 대상으로 적용하였다. “빌럼 1세가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의 침대에 잠자러 들어갔다”는 말을 들을 정도가 되었다.9) ‘분리 또는 복귀’가 열매를 맺는 데에는 이름 없는 많은 성도의 믿음과 인내가 있었다. 집회 금지법을 어기고 모였다가 발각되면 그들은 벌금을 내야 하였다. 벌금은 일인 당 최고 100길더까지 부과할 수 있었는데 당시 드 콕 목사의 1년 사례비가 300길더였던 것을 생각하면 매우 무거운 것이었다.10) 가난한 사람들은 그 벌금을 낼 수 없어서 재산을 압류당하였는데 압류 재산을 경매하는 날은 대체로 주일이었다. 부자 교우가 그것을 구입하여서 가난한 교우에게 다시 돌려주지 못하게 하려는 속셈이었던 것이다. 압류당할 것이 몸밖에 없으면 감옥에 갇히기도 하였다. 예배의 자유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당국의 눈을 피하려고 배를 타고 바다에 나아가서 선상(船上) 예배를 드리기도 하였다. 무명의 많은 성도가 함께 복귀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11) 네덜란드의 기본적인 종교 정책은 ‘관용’이었다. 루터교나 재세례파뿐 아니라 아르미니우스파나 로마 교회도 관용되고 있었다. 이와 같이 심지어 이단까지도 관용하면서, 하나님의 진리를 선양하고 나온 ‘정통 개혁교회’를 핍박하는 역설적인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이제 외국에서도 빌럼 1세에게 ‘종교적 관용으로 이름이 높은 네덜란드에서 개혁교회를 핍박하는 일이 있으면 어떻게 되느냐’는 항의 서한들이 도착하였다. 안팎의 압박 때문에 빌럼 1세는 1839년부터 회집을 허용하기 시작하였다. 왕에게 보낸 문서에서는 ‘기독개혁교회’라는 말을 사용하였지만, 빌럼 1세가 ‘개혁교회’라는 말을 다른 곳에 사용하는 것을 싫어하였기 때문에 레이던의 스콜터 목사는 ‘기독분리교회’라는 이름으로 집회 허가를 얻기도 하였다. 공식적인 박해는 1848년에 헌법이 개정되었을 때에야 끝났다.12) 그렇지만 사회적인 차별은 계속되었다. ‘분리 또는 복귀’의 교회에 속하였다는 이유로 취업이 거부되는 경우도 있고 농산물을 시장에서 판매하지 못하게도 하였다. 종교적인 박해가 계속되었기 때문에 분리에 속한 사람들은 목사와 함께 집단적으로 신대륙으로 이주하기도 하였다. 판 랄테와 스콜터와 같은 사람이 미시간 주로 이주하였는데 그들이 지금의 북미 기독개혁교회(the Christian Reformed Church in the North America)와 연합개혁교회(the United Reformed Church), 미국 개신 개혁교회(the Protestant Reformed Church in America)의 선조가 되었다.13) 드 콕은 여러 어려움과 과로로 인하여 1842년에 4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문화적으로도 낙후되고 가난한 지역에서 봉사한 평범한 목사였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사랑하고 그 말씀대로 가르쳤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개혁된 목사와 회중을 사용하여서 개혁의 큰일을 이루셨다. 8. 초기의 발전 - 위기와 안정과 연합 활동 1) “청소년기의 위기” 윌룸의 작은 회중에서 시작한 ‘분리 또는 복귀’가 교회 개혁으로 발전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였다. 그렇지만 그 발전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분리 또는 복귀’에 참여한 사람들은 외적인 핍박 이외에도 내적인 어려움도 크게 겪었다. 주님과 말씀과 신앙고백서에 대한 충성심, 그리고 핍박 가운데서도 신절(信節)을 지키고 나아오는 데에서는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그들이었지만, 서로 힘을 합하여서 새로운 교회 연맹을 이루고 나아가는 데에서는 큰 어려움을 겪었다. 물론 이 위기도 그 당시의 상황에서 생각하면 크게 놀랄 일은 아니다. 반세기 동안 교회가 집중적인 어려움을 겪었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거의 한 세기 동안 교회의 영적인 상태가 악화되고 있어서 그들은 비밀 집회소에 모여서 자기들끼리 신앙생활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 결과, 교회관, 교회법, 역사관 등 신학적인 문제에서 그들의 생각이 미묘하게 서로 달랐던 것이다. ‘분리 또는 복귀’의 대표자였던 드 콕과 스콜터 사이에서도 그러한 차이가 명백히 드러났다. 교회와 유아세례에서도 두 사람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스콜터는 교회를 ‘참된 신자들의 모임’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드 콕은 그리스도께서 불러 모으시는 것을 중심으로 생각하였다.14) 교회에 대한 이러한 생각은 유아세례를 시행하는 데에서 더 분명하게 나타났다. 스콜터는 참신자의 자녀에게만 세례를 주었는데, 이것은 사람에게서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나 드 콕은 하나님의 언약에서 시작하여서 회중에 속한 자녀에게 모두 세례를 주었다. 교회관에 대한 차이는 교회법에 대한 차이로 이어졌다. 스콜터는 교회를 참된 신자들의 모임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단순히 성경으로 만족하려 하였고 도르트 교회법에 대하여서는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드 콕은 도르트 교회법을 강조하였는데 이것이 교회의 직분과 교회들 사이의 관계를 성경적이고 신앙고백적으로 잘 규정한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초기에는 스콜터의 주장이 우세하여서 1837년 총회에서 이른바 ‘위트레흐트 교회법’을 택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분리 또는 복귀’의 교회들 안에서 더 많은 혼란을 일으켰다. 1840년 총회에서는 개교회주의적인 위트레흐트 교회법을 포기하고 다시 1618년의 도르트 교회법을 택하였다. 그 과정에서 스콜터 목사와 다른 목사들 사이의 관계는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악화되었다. 1840년 총회에서 스콜터 목사는 면직되었고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서 ‘펠라’(Pella)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공동체를 세웠다. 여기에는 스콜터 목사의 종말관이 잘 반영되어 있다. ‘펠라’는 70년에 예루살렘이 로마 군인에게 멸망당할 때에 기독교인들이 그곳으로 피하여서 재난을 면한 곳이다. 스콜터는 구대륙은 바벨론과 같은 곳이 되어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이라고 하면서 임박한 재난을 피하여서 신대륙으로 갔고 거기에서 나름의 ‘펠라’를 건설하였던 것이다.15) 이상과 같은 신학적인 차이 이외에도 핍박 가운데서 형성된 성격과 기질, 그리고 목회 경험의 부족도 그들 사이에 분열과 다툼의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1834-35년에 ‘분리 또는 복귀’에 가담한 목사 여섯 분을 ‘분리의 아버지’라고 부르는데 그들은 모두 20대 중반이나 30대 초반이었다. 따라서 목회적 경험이나 연륜이 부족한 사람들이었고, 그들을 중재할 ‘어른’이 없었다. 말하자면 캄펀 신학교의 교회사 교수 바우만(H. Bouwman)이 적절히 표현한 것처럼 “청소년기의 위기”를 거친 것이다.16) 그들은 외적으로뿐 아니라 내적으로도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처음 13년 동안 5번의 내적 분열을 겪었다.17) ‘분리 또는 복귀’가 사람의 일이었다면 “청소년기의 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졌을 것이다. 오직 주님의 자비하심과 기이한 섭리가 있었기에 내적인 부족과 결핍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새로운 교회 연맹으로 전진할 수 있었다(시 127:1-2). 캄파위스의 표현대로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교회를 다시 불러 모으신 일”이었다.18) 헨드릭 드 콕의 아들인 헬레니우스 드 콕이 1866년에 말한 대로, “하나님의 은혜로 교회는 전수받은 신앙고백서를 붙잡을 수 있고 붙잡을 수 있을 것이다.”19) 2) 안정기 - 캄펀 신학교의 개교 (1854년) 주님의 은혜로 “청소년기의 위기”를 넘긴 ‘분리 또는 복귀’의 교회들은 50년대부터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1853년부터 「바자윈」(나팔)이라는 잡지를 간행하여서 교회들의 소식을 공유하고 통일된 의견을 형성해 나아갔다. 또한 1854년에 츠볼레에서 열린 총회에서 신학교를 세우기로 결정하고 네 목사를 교수로 임명하였다. 그 전에는 목사 후보생을 사숙(私塾)의 형태로 가르쳤는데 그러한 형식으로 계속 가르쳤으면 신학 교육의 질이 낮아졌을 것이고 내적인 분열을 극복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교회의 감독 아래에서 통일되게 가르쳤다.20) ‘분리 또는 복귀’의 영적인 열정이 학문적 완숙함과 결합하여서 교회가 안정기에 접어든다. 칼빈 선생이 프랑스의 교회들에게 “우리에게 나무를 보내 주십시오. 그러면 우리는 날카로운 화살을 만들어 드리겠습니다”21) 하고 말하였는데, 캄펀 신학교에서 영성과 학문성을 겸전(兼全)하도록 훈련 받은 사람들이 곳곳에 박혀서 사역하였다. 이후 ‘분리 또는 복귀’의 교회는 비약적이고 안정되게 발전하였다. 3) 교회적 연합 1834년의 ‘분리 또는 복귀’의 선언은 마지막에서 다음과 같은 호소와 선언을 한다. 동시에 우리는 모든 참된 개혁 신자들과 교제를 나누기를 원하고, 어느 곳에서나 하나님께서 불러 모으신 곳에서 하나님의 무오(無誤)한 말씀에 근거하여서 세워진 회중과는 연합하기를 원한다고 선언한다. 이 선언은 단지 수사적인 표현이 아니었다. 성경과 신앙으로 ‘복귀’하려고 ‘분리’한 그들은 같은 신앙을 고백하는 신자나 교회들과의 연합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와의 교류이다. ‘분리 또는 복귀’의 교회의 1857-69년 총회록에는 매번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복귀 또는 분리’의 또 다른 배경이 제네바에서 시작한 ‘부흥 운동’(르베이)임을 앞에서 이야기하였는데 스코틀랜드에도 ‘르베이’의 영향이 있었고, 그 결과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에서도 1843년에 ‘분열’(Disruption of 1843)이 있었다. 따라서 1834년의 ‘분리 또는 복귀’의 교회와 1843년의 ‘분열’의 교회는 자연히 가까워졌다. 1866년에 브루멜캄프와 헬레니우스 드 콕이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를 방문하여서 이렇게 말하였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교회를 존재하도록 부르시기 약 10년 전에 그분은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여러분 교회와 마찬가지로 우리 교회도 생명을 주시는 성신의 열매로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불신앙과 세속적인 것을 누르시고서 어느 곳에서나 그분의 복된 영향력을 느끼게 하십니다.22) 교회적인 연합을 위한 노력은 ‘분리 또는 복귀’의 교회가 분파가 아니라 거룩한 보편적 교회라는 증거가 된다. 대륙의 개혁교회와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사이에는 교회 정치 체제에서 차이가 있지만 교회는 진리와 사랑 안에서 통일되는 것이기 때문에 작은 차이를 큰 문제로 삼지 않았다. 심지어 헬레니우스 드 콕은 1618-19년에 도르트 대회에서 네덜란드 개혁교회는 영국 성공회의 ‘감독’들과도 개혁 신앙을 토론한 것을 들어서 외적인 차이를 크게 부각시키지 않았다. 이러한 교류는 20세기 후반에 결성된 ‘개혁교회들의 국제회의’(The International Conference of the Reformed Churches; ICRC)의 전신(前身)이라고 할 수 있다. 9. 신조에 대한 서명의 문제 -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19세기와 한국 장로교회의 20-21세기 1834년의 ‘분리 또는 복귀’는 은혜의 복음을 재발견하고 교회에서 선포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였다. 그들은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는 종교개혁의 신앙고백을 높이 드러내고, 목사의 강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다는 원칙을 따라서 교회 정치에서도 주님의 신령한 다스림을 나타내었다. 1834년의 ‘분리 또는 복귀’의 핵심은 ‘오직 은혜’라는 종교개혁의 신앙을 재발견하고 특히 도르트 신조와 교회법으로 그것을 표현한 것에 있다. 그들은 도르트 신조와 교회법으로 ‘복귀’하려고 ‘분리’한 것이다. ‘분리 또는 복귀’는 종교적인 행사가 많으나 신조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우리의 현실에서도 곰곰이 되새겨볼 만한 일이다. 특히 1834년 이전의 네덜란드 교회의 형편은 한국의 장로교회와 비슷한 점들이 있다.23) 첫째, 한국 장로교회에서는 신앙고백이 유명무실한 점에서 1834년 이전의 네덜란드 교회와 비슷하다. 네덜란드에서도 목사 임직 때에 신앙고백을 가르치겠다고 서약하였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는데, 한국 장로교회에서도 그렇다. 목사 임직뿐 아니라 장로와 집사의 임직 때에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을 자기의 신앙으로 고백한다고 하는데 실상은 그 내용을 모른다. 신학교에서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가르치지 않거나 겨우 선택 과목으로 가르치는 정도이다. 따라서 목사도 신앙고백서를 모른다. 읽어 보지도 않고 자기의 신앙고백서로 고백한다는 것은 거짓 서약이고, 동시에 교회의 생활에서 신앙고백서가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둘째, 신앙고백서가 교회의 생활에서 ‘(성경 말씀의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권위에서) 파생된 권위’로서 제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에 교회의 가르침에 통일성이 없고 목사들이 자기 소견에 옳은 것을 가르칠 뿐이다. 신앙고백서에 요약된 핵심을 가르치지 않아서 말씀의 권위가 제대로 나타나지 않으면 설교와 생활은 윤리적인 수준에 머물고 그릇된 의미의 교권(敎權)이 세력을 떨친다. 담임 목사가 총회장이 되는 것을 자기 교회의 영광이라고 생각하고 그 일을 위하여서 천문학적인 돈을 사용하는 행태는 말씀에 의한 신령한 통치를 모르는 데에서 나오는 일이다. 말씀이 권위를 행사하지 않으면 정치꾼 목사가 활동할 기반이 갖추어진 셈이다. 셋째, 그릇된 교권이 횡행하면 그에 대한 반발로 두 가지 종류의 모임이 생긴다. 하나는 개인적인 체험을 강조하는 ‘신비주의적인 모임’이고, 다른 하나는 지식인 중심의 ‘개인 성경 공부 모임’이다. 두 모임은 나름대로 열심이 있으나 개인의 구원과 영성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성경이 중요하게 가르치는 교회의 아름다움에 대하여서는 무지하고 무관심하다. 19세기에도 평민들은 비밀 집회소에서 모이고 귀족은 성경 공부 모임을 가졌으나 두 모임 모두 거기에서 끝났다. 교회 개혁의 일에 쓰임을 받은 것은 그러한 모임이 아니라 윌룸이라는 시골 교회의 회중이었다. 그 회중에 속한 참된 교우들이 자유주의적인 신앙을 가졌던 목사에게 좋은 영향을 끼쳤고, 그 목사가 개혁됨으로써 회중이 함께 개혁되었다. 교회의 개혁은 ‘교회 안에서 그리고 교회와 함께’ 이루어진다는 중요한 사실을 여기에서 볼 수 있다. 지금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이 없이 온전히 전파하는 교회, 그리고 신앙고백이 성경적 주해와 더불어서 바른 기능을 하는 교회가 주님께서 사용하시는 교회이며, 주님의 개혁은 그런 교회를 통해 이루어진다. 끝으로, 교회의 주인이시고 교회를 말씀과 성신으로 개혁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한 왕이시요 백성이 없을 수 없는 왕이시기 때문에”(네덜란드 신앙고백서 제27조) 주님께서는 주님의 교회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신다. 윌룸 회중의 분리 또는 복귀의 선언이 그렇게 많은 사람의 호응을 얻은 것은 오직 주님의 은혜요 주님의 역사(役事)이다. 1840년에는 6,000명, 자유가 허용된 시기인 1849년에는 40,000명, 사분오열되었던 교회들이 기독개혁교회라는 이름으로 연합한 1869년에는 107,000명에 달하였다. 개혁은 사람의 노력이나 운동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주님의 은혜로 이루어진다. 윌룸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는가? 궁벽한 변방이었던 윌룸에서는 나올 수 없다. 그러나 말씀과 성신으로 개혁된 목사와 개혁된 회중에서는 항상 선한 것이 나온다. 주님께서는 외모를 보시지 않고 주님을 참되게 고백하는 교회를 사용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신앙고백을 생생하게 고백하는 교회, 그러한 교회를 주님께서는 지금도 진리의 기둥과 터로 사용하셔서 주님의 일을 친히 이루신다. 비텐베르크나 제네바도 역시 유럽의 중심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었지만 그곳에 신실한 회중이 있었기 때문에 개혁의 중심지로 삼으셨다. 교회는 신앙고백과 함께 존재하고 신앙고백과 함께 전진한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질문은 주님께서 교회에게 항상 물으시는 내용이고, 우리는 예배 가운데 그 대답을 하면서 주님께 나아간다. 이것이 복귀, 곧 개혁의 길이다. 개혁교회는 말씀과 성신으로 항상 개혁되는 교회이다. 각 주 1) J. Bout en N. J. Spaan, “Een markante persoonlijkheid: het leven van Frouwe Venema”, Oude Paden 12 (2007), 7-8; I. van Dellen, The Secession of 1834 (Eerdmans, 1934), 19-21. 2) E. Kampen, The Secession from the Netherlands Reformed Church in 1834, 82. 3) L. Oostendorp, H. P. Scholte: Leader of the Secession of 1834 and Founder of Pella, 61-66. 4) L. R. Scholte, A Stranger in a Strange Land, 16. 5) H. Veldman, De Fakkel van het woord. 3A: Gereformeerd blijven in de negentiende eeuw (Gereformeerd Pedagogisch Centrum, 1997), 46-49. 6) W. Van"t Spijker, De kerk bij Hendrik de Cock, 26-27. 7) E. Kampen, The Secession from the Netherlands Reformed Church in 1834, 90. 8) W.W.J. VanOene, Patrimony Profile, 76. 9) G. J. tenZythoff, Sources of Secession, 34. 10) A. Baars, The Secession of 1834, 22. 11) P. Y. De Jong, “The Dawn of a New Day”, The Reformation of 1834, 31-32; P. K. Keizer, Church History, 162-63. 12) 1834-39년에 심하게 박해하였던 것과 1848년에 신앙의 자유를 허용한 것은 네덜란드의 정치적 상황과도 관련이 있다. 1814년에 오란여 왕조가 복고되었을 때에 로마 가톨릭 지역인 벨기에도 포함되었다. 벨기에는 1830년부터 반란을 일으켜서 독립을 요구하다가 1839년에 독립을 획득하였다. 따라서 국왕으로서는 1816년의 ‘교회 치리 정관’을 따르지 않는 1834년의 ‘분리 또는 복귀’ 측에 정치적 자유를 주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벨기에의 독립 이후에는 자유를 허용하였고 1848년에 자유주의자들이 정권을 장악하였을 때에는 정치적 자유뿐 아니라 종교적 자유도 허락하였다. ‘분리 또는 복귀’ 측이 반대하던 자유주의자들이 그들에게 종교적인 자유를 주는 역설적인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J. A. Schröeder, Secession and Emigration, 1834-1847, 9-11. 13) 미국으로 이주한 것에는 종교적인 자유뿐 아니라 경제적인 어려움을 피하려는 동기가 함께 작용하였다. 1840년대의 흉작이 미국으로 이주하는 데에 큰 영향을 끼쳤다. 1835-57년까지 약 2만 명이 미국으로 이주하였는데 그 가운데서 38%가 분리의 교인들이고 나머지는 국가 교회 출신이었다. 초기에는 분리의 교인들의 비율이 더 높은데 그것은 그들이 종교적인 이유로 이주하였기 때문이다. R. P. Swierenga et al., Family Quarrels in the Dutch Reformed Churches in the Nineteenth Century (Eerdmans, 1999), 7. 14) W. Van"t Spijker, De Kerk bij Hendrik de Cock, 30-33. 15) L. Oostendorp, H. P. Scholte: Leader of the Secession of 1834 and Founder of Pella, 151ff. 16) H. Bouwman, De crisis der jeugd : eenige bladzijden uit de geschiedenis van de kerken der Afscheiding (Kok, 1914). 17) Nelson D. Kloosterman, “The Doctrinal Significance of the Secession of 1834”, The Reformation of 1834, 37. 18) J. Kamphuis, “The ‘Afscheiding’ of 1834: God Brought Back His Church”, Lux Mundi 3:2 (1984), 7-9. 19) Helenius De Cock, The Secession in the Netherlands, 87-88. 20) B. de Graaf en G. van Klinken, Geschiedenis van de Theologische Universiteit in Kampen 1854-2004 (Kok, 2005), 26-32. 21) 파브르(J. Faber), 『성신의 신학자, 존 칼빈 』(성약출판사, 2004), 42. 22) E. Kampen, The Secession from the Netherlands Reformed Church in 1834, 123-24. 23) 역사에서 어떤 유형을 찾아내어서 다른 시대에 적용하는 일은 역사가가 피해야 할 기본적인 덕목에 속한다. 보편적인 규칙을 찾아내려다가 구체적인 사실을 놓치기 쉽기 때문이다. 또한 역사에서 특정한 교훈만을 찾아내려고 공부하는 것도 피하는 것이 좋다. 교훈으로 생각하는 것만을 살피다가 더 중요한 사실을 놓치기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는 전도자의 말처럼 어떤 현상은 반복되기도 하고, 거기에서 교훈을 받을 것도 있다. ------------------------------------ 1) W. Van’t Spijker, De Kerk bij Hendrik de Cock, 14-15. 2) E. Kampen, The Secession from the Netherlands Reformed Church in 1834, 63-67. 3) 이 부분에 대한 상세한 서술은 J. S. Sheers, Son of Secession - D. J. Vander Werp (Eerdmans, 2006), 21-22. 여기에서 생각할 점은 ‘세례의 효력은 집례자의 경건에 좌우되는가’에 대한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 선생은, 훼절한 감독(혹은 목사)이 베푼 세례를 인정하지 않고 교회를 떠나 분파를 형성한 도나투스 파의 잘못을 지적하였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7장 3절에서는 이렇게 고백한다. “성례의 유효성도 그것을 집례하는 자의 경건이나 의도에 의존하지 않고, 성신의 사역과 제정의 말씀에 달려 있다.” 후에 스콜터도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인용하면서 부모가 교회를 옮긴 다음에 그 자녀의 유아세례를 주는 것이 좋다고 주장하였다. L. Oostendorp, H. P. Scholte: Leader of the Secession of 1834 and Founder of Pella, 49-50. 4) H. Bouma, “De ‘Acte van Afscheiding’ historisch belicht”, in D. Deddens et al. ed., Afscheiding-Wederkeer(Vijlbrief, 1984), 19-22; W.W.J. VanOene, Patrimony Profile, 39-45; G. J. tenZythoff, Sources of Secession, 122-24. 5) R. Faber, “The Introduction of Evangelical Hymns in the Dutch Reformed Churches: Eighteenth Century Developments”, Clarion (2003), 446, 448. 6) A. Baars, The Secession of 1834: A Reformation Movement in the Netherlands (VanderMeyden, 2004), 10; R. Faber, “The Introduction of Evangelical Hymns in the Dutch Reformed Churches: Eighteenth Century Developments”, Clarion (2003), 449. 7) R. Faber, “The Introduction of Evangelical Hymns in the Dutch Reformed Churches: Developments in the Seventeenth Century”, Clarion (2003), 330-332. 8) R. Faber, “The Introduction of Evangelical Hymns in the Dutch Reformed Churches: The Reaction in the Secession of 1834”, Clarion (2003), 583. 9) H. van Veen, “De Afscheiding en de gezangenstrijd”, in D. Deddens et al. ed., Afscheiding-Wederkeer(Vijlbrief, 1984), 117-18. 10) H. van Veen, “De Afscheiding en de gezangenstrijd”, 119-120; E. Kampen, The Secession from the Netherlands Reformed Church in 1834, 75-77. 11) L. Oostendorp, H. P. Scholte: Leader of the Secession of 1834 and Founder of Pella, 58-60. 12) H. Bouma, “De ‘Acte van Afscheiding’ hostorisch belicht”, 9. 13) 네덜란드어 원문은 G. Keizer, De Afscheiding van 1834 (Kok, 1934), 575-576. 영어 번역은 J. Smith “Act of Secession or Return (1834).” in http://www.spindleworks.com/library/smith/scaneva.htm. (2008년 7월 9일). Helenius de Cock, The Secession in the Netherlands, Explained and Judged in the Light of History, the Word of God and the Confessional Standards of the Reformed Church, 60-63에도 영어 번역이 나오지만 두세 군데에서 문단의 순서가 다르다. 14) ‘목사와 교사’는 두 가지 직분이 아니라 한 가지를 말하는 것이다(엡 4:11). 15) 여기에 인용된 성구 가운데서 두 구절이 원본과 다르다. 원본에는 누가복음 12:12; 고린도전서 5:12이 나오지만 그 구절들은 핍박에 대한 말씀이 아니다. 여기에서는 H. Bouwman, Na vijf en zeventig jaren: de afscheiding te Ulrum (Kampen: Ph. Zalsman, 1909), 60-61의 교정을 따라서 각각 누가복음 12:11과 고린도전서 4:12로 표기하였다. 16) 캄파위스(J. Kamphuis), 『개혁 그리스도인과 신앙고백의 특징』(성약출판사, 2005), 135-140. 17) Nelson D. Kloosterman, “The Doctrinal Significance of the Secession of 1834”, The Reformation of 1834, 35-36. 18) K. Schilder, De dogmatische beteekenis der “Afscheiding”, ook voor onzen tijd (Kok, 1934), 21. 19) W. Van’t Spijker, De Kerk bij Hendrik de Cock, 25-26. 20) J. Kamphuis, Eb en vloed: overzicht van de geschiedenis van de nederlandse gereformeerde theologie in de 19e en 20e eeuw, 19. --------------------------------------- 1) Helenius de Cock, The Secession in the Netherlands, Explained and Judged in the Light of History, the Word of God and the Confessional Standards of the Reformed Church (Unofficial publication: original in the archives of Calvin College, Grand Rapids, Mich.; 네덜란드어 출간은 Kampen, 1866. 영어 번역은 John C. Verbrugge, n.d.), 2. 헬레니우스 드 콕은 1834년의 개혁자 헨드릭 드 콕의 아들이고 캄펀 신학교의 초대 교의학 교수를 지냈다. 2) 네덜란드 신앙고백서의 권위와 수용 과정에 대하여서는 N. H. Gootjes, The Belgic Confession: Its History and Sources (Baker Academic, 2007) 6장 참조. 고재수 교수는 네덜란드 신앙고백서를 1565년 안트베르펀 총회에서 공식적으로 택하지만 이미 1561년 교회 회의에서 택한 사실을 중요하게 지적한다. 특히 112-15 참조. 3) 유해무, 『헤르만 바빙크: 보편성을 추구한 신학자』 (살림, 2004), 14-16. 4) W. Van"t Spijker, De Kerk bij Hendrik de Cock(Apeldoornse Studies No. 21; Kok, 1985), 5-6. 5) W.W.J. VanOene, Patrimony Profile (Premier Publishing, 1999), 2. 6) G. J. tenZythoff, Sources of Secession (Eerdmans, 1987), 25-29. 7) E. Kampen, The Secession from the Netherlands Reformed Church in 1834: An Integral Part of the Dutch Réveil (Th. M. Thesis, Regent College, 2004), 16. 8) G. J. tenZythoff, Sources of Secession, 48-49. 9) P. Y. De Jong, "A Darkness over the Land", The Reformation of 1834: Essays in Commemoration of the Acts of Secession and Return, ed. by The Faculty of Mid-America Reformed Seminary (Pluim Publishing Inc, 1984), 12-13. 10) W.W.J. VanOene, Patrimony Profile, 12-13. 11) W. Van"t Spijker, De Kerk bij Hendrik de Cock, 8-12. 12) Helenius de Cock, The Secession in the Netherlands, 3, 9. 13) J. Kamphuis, Eb en vloed: overzicht van de geschiedenis van de nederlandse gereformeerde theologie in de 19e en 20e eeuw (Uitgeverij van den berg, 1985), 18. 14) D. Molenaar, Adres aan alle mijne Hervormde Geloofsgenooten. W.W.J. VanOene, Patrimony Profile, 21에서 재인용. 15) P. K. Keizer, Church History (Inheritance Publications, 1990), 157. 구체적인 사례들은 Helenius de Cock, The Secession in the Netherlands, 11-23 참조. 16) P. Y. De Jong, "A Darkness over the Land", The Reformation of 1834, 15-17; E. Kampen, The Secession from the Netherlands Reformed Church in 1834, 17-19, 97-98. 17) E. Kampen, The Secession from the Netherlands Reformed Church in 1834, 32, 40-42, 51. 18) J. A. Schröeder, Secession and Emigration, 1834-1847 (Algemeen Handelsblad, 1947), 9. 19) L. Oostendorp, H. P. Scholte: Leader of the Secession of 1834 and Founder of Pella (Ph. D. Dissertation, Vrije Univ.; T. Wever, 1964), 27-36. 20) E. Kampen, The Secession from the Netherlands Reformed Church in 1834, 140. 21) P. Y. De Jong, "The Dawn of a New Day", The Reformation of 1834, 21. 22) L. Doekes, "Het credo der Afscheiding, Dordtrecht en Ulrum", in D. Deddens et al. ed., Afscheiding-Wederkeer (Vijlbrief, 1984), 71. 23) Herman Hanko, "Hendrik De Cock: Reformed Reformer", Portraits of Faithful Saints (Reformed Free Publishing Association, n.d.). http://www.prca.org/books/portraits/decock.ht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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