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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분노 치유를 위한 기독교 교육 모델 연구

by 【고동엽】 2021. 10. 7.

청소년 분노 치유를 위한 기독교교육 모델 연구

-기독교 교육 연구소-

목차

Ⅰ서론

Ⅱ.청소년의 이해

1.청소년의 신체적 특징

2.청소년의 정서적 특징

3.청소년의 발달심리학적 특징

Ⅲ. 분노의 이해

A.어원적 의미

1.하나님의 진노

2.인간의 분노

B.신학적 인간이해

1."피조물"로서의 인간

2.타락한 존재로서의 인간

3.그리스도의 형상으로서의 인간

C.분노의 본질과 원인

1.분노의 본질

2.분노의 원인

Ⅳ.분노와 청소년과의 상관성

1.가족 및 가정환경에서의 갈등

2.학교, 학업 및 교우관계에서의 갈등

3.정체감 혼란으로 인한 갈등

Ⅴ.청소년분노조절을 위한 기독교교육에의 적용 프로그램

A.청소년기독교교육의 목적

B. 분노의 기독교적 치유방법

C. Motivational dynamics program을 통한 실재적 적용

Ⅵ.결론



Ⅰ.서론

프로이드는 분노를 인간의 마음속에 숨겨진 일종의 악의 미끼라고 했다. 그는 인간은 누구나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누군가에게 화를 내며 이를 억제하려고 할 때 무의식적 분노의 세계에서 허우적거리며 우울해 한다고 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분노는 지극히 자연스러운(natural) 원초적 감정이다. 그리고 현대를 살아가는 이 청소년들은 이 자연스러운(?) 감정의 정체와 그 해소법을 모른 채 혼자만의 갈등과 고민 속에 때로는 통제할 수 없는 폭력으로, 때로는 그로 인한 지나친 죄의식 때문에 무거운 침묵의 세계로 자꾸만 자신을 함몰시킨다.

따라서 본 소고의 목적은 이러한 성서의 입장에서 분노의 본질과 원인을 규명하고 청소년 기독교교육의 목적을 다시 한번 상기한 후 심리 역동적 프로그램을 통한 기독교 교육적 모델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를 위하여 먼저 청소년의 신체적, 정서적, 심리적 발달의 특성을 알아본 후 분노의 성서적 조명을 통해 이것이 정말 자연스러운 감정인지를 성서적 신학적 반증을 통해 알아보고 청소년과 분노의 상관성을 알아볼 것이다.

기독교교육을 책임지고 있는 사역자들은 널려 있는 수많은 프로그램 속에서도 계속 또 새로운 것을 계발해 내야 하는 중압감속에 오늘을 살고 있다. 본 소고 역시 이런 부담감에서 출발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프로그램보다는 본질을 그러나 피상적인 것보다는 실제적인 면을 중요시하고 싶은 작은 열망으로 쓰여진 글임을 밝혀 둔다.



Ⅱ.청소년의 이해



1.신체적 특징

사춘기(puberty) 청소년의 신체적 변화 중 가장 현저한 것은 신장과 체중의 증가, 초경 연령의 저하, 그리고 성적 성숙이다. 이러한 신체적 발달이 급격하게 이루어지는 것은 호르몬의 영향 때문인데, 두 개의 기본적 호르몬이 안드로겐(남성호르몬)과 에스트로겐(여성호르몬)이다. 이 안드로겐중의 하나인 테스트로겐은 남성의 신체발달과 상관이 있어 외부생식기와 신장의 증가. 목소리의 변화와 같은 것에 영향을 미친다. 또한 에스트로겐의 일종인 에스트라디올은 소녀들의 가슴과 자궁, 뼈대의 발달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이 테스트로겐과 에스트라디올은 소년과 소녀 모두에게 발생하는 것으로서 서로 구별된 것은 아니나 테스트로겐은 소년들에게, 에스트라디올은 소녀들에게 더 많이 발생하며 이는 문화적 분위기에 따라 그들에게 당혹감과 불안감을 안겨 줄 수 도 있다. 어떤 보고서에 따라서는 이 호르몬의 증가가 청소년들의 공격성을 부추긴다는 보고도 있으나(Inff-Germain & others,1988.) 이것은 단지 청소년발달의 변량 중에서 단지 작은 부분만을 설명해 주고 있으며 이러한 호르몬의 영향보다는 사회적 요인이 이와 더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이야기한다.



2.정서적 특징

청소년기는 보통 "질풍노도의 시기"로 알려져 있다. 이 말에는 그들의 과격하고 불안정한 특성이 그대로 함축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청소년기는 점차적으로 안정되고 보다 풍요하게 순화되어 정서적 긴장에 견디어 낼 수 있는 힘과 자기통제의 능력이 증가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청소년기독교교육의 희망이 여기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즉 그들에게 어떠한 분명한 가치관과 해방의 올바른 출구를 만들어 주기만 한다면 청소년문제의 해법도 쉽게 나올 수 있으리라는 낙관적 견해도 가져 본다.

하지만 이러한 낙관은 인내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청소년 전기에서 중기로 가는 동안 그들의 감정은 두드러져 조그만 자극에도 크게 감정표출로 반응하고 그 흥분은 지속성을 갖기 때문이다. 또한 기분이 자주 변하고 감정이 불안정한 상태로 반항, 난폭, 방탕등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또 격렬한 자기 혐오와 고독, 반대로 자기 열등감과 같은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또한 청소년후기로 갈수록 지적생활과 과학적 생활의 양태가 두드러진다. 종래의 지식을 정리하고 조직하며 모든 것을 과학적으로 이해하려 하기 때문에 지적생활의 심화를 꾀하기도 한다. 이 청소년기의 지적발달은 본격적인 발달을 하기 시작한다. 추상성과 논리성이 현저해지고 객관적 지각의 발달 논리적 기억의 발달, 추상적 사고와 형식추리의 발달 문제해결책사고, 비판적 사고의 발달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러한 청소년기의 정서적 발달을 지.정.의로 요약하자면, 지적 과학적 생활의 발전으로 논리적, 추상적 특징을 가지며 감정생활의 변동으로 성적(性的)경향을 표출하며 사색성을 지닌다. 이 사색은 허무, 회의, 고독, 공포, 불안 같은 것이 따르기도 한다. 이러한 특성들은 청소년기의 정신상태와 적응상태를 진단하는 기초가 되고 있다.



3.청소년의 사회 심리학적발달의 특징

에릭슨은 인생주기의 발달단계를 여덟 단계로 보고 각 단계에는 사회환경이 개인에게 주는 어떤 정신적인 요구가 있고 이러한 사회의 요구에 적응하기 위한 개인의 심리적 긴장 상태를 심리 사회적 위기라고 보았다. 청소년은 이 위기를 잘 극복해 나가면 정체감이 잘 형성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혼란에 직면하게 된다고 보았다.



1)정체감의 개념

에릭슨에 의하면 청소년기는 12세 이후부터 성인초기에 이르는 23세 이전까지로 보고 있고 자아정체감이란 용어는 그가 처음으로 사용한 용어이며 그 정의는 아래와 같이 설명될 수 있다.

자아정체감이란 개인의 자아가 그의 인격체계(id, ego, super ego)를 통합하는 방식에 있어 자신의 동질성과 연속성의 유지상태를 아는 동시에 자신의 자아통합방식(ego-system)이 타인에게 주는 개인적 의미의 동질성과 연속성의 유효성을 아는 것이다.

이를 다시 말하면, 청소년들은 개인의 내적 요구와 충동, 외부의 압력 그리고 유혹들에 대해 '자기다운' 독특한 방식으로 이런 것들을 조정하고 탐색하는 데 이를 자아정체감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아정체감이 강한 사람은 비록 자신이 다른 사람과 같은 동기와 흥미, 가치를 공유하고 있다 할 지라도 자기를 어디까지나 다른 사람과 분리된 '독특한 개인'으로 자각하는데, 엘킨드(D. Elkind)는 그 한 예로서 "상상속의 청중"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그 특징을 보다 쉽게 설명했는데 그에 의하면, 청소년들은 행동할 때 언제나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다고 느끼며 비록 자기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할 지라도 어디엔가 자신의 생각을 받아들여 주고 갈채를 보내는 청중이 있다고 믿는 것이라고 했다.

이것은 자신의 행동이 주체자로서 보다는 오히려 관찰의 대상으로 느끼는 것으로, 이를 보완하기 위한 정신구조로 "개인적 우화"를 활용하는데 이는 타인은 죽을 수 있어도 자신만은 죽지 않는다고 믿는데서 보여지는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마아샤(J. Marcia)는 자아정체감을 "여러 가지 충동, 능력, 신념 및 개인의 생활사 등의 자체 발생적 내적, 역동적 체계로서 이는 곧 자기구조" 라고 정의하고 있는데 그에 의하면 개인의 자기 구조는 정적인 개념이 아니고 동인적인 개념으로 자아정체감 발달은 자기 통합성을 이루려는 심리기능들의 역동적 체계과정이라고 설명하였다.

위의 모든 의견들을 다시 종합해 보면 자아정체감이란 대인관계에서의 역할과 목표, 가치들이 자신만의 독특한 고유성의 자각과 함께 상호작용에 의해서 형성되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2)정체감의 형성과정

청소년기의 이러한 정체감의 형성과정은 흔히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으로부터 시작하여 개체의 환경, 문화, 세계관 같은 것들과 연결되게 된다. 이때 사실상 한 개인은 보통 한 집단에 속해 있게 되며 그 집단 안에서의 다른 구성원들과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되는데 바로 이 집단의 정체성은 개인의 정체감을 형성하는데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때 자신이 속해 있는 집단의 정체성이 긍정적인가 혹은 부정적인가에 개인의 정체성이 확립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기의 가정의 분위기나 또래집단의 역할, 부모님의 양육태도는 그들의 정체성확립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청소년들이 때에 자신의 개성에 대한 강한 인식을 갖고 사회로부터 안정을 획득하게 된다면 확고한 정체감을 형성하게 되지만 정체감의 위기를 잘 극복하지 못한다면 부정적이거나 타인에 대한 잔인성, 영웅에 대한 무조건적인 동일시나 충성을 맹세하는 미성숙함을 보이는데 분노는 이러한 자아정체성을 확실히 확립하지 못한 청소년들에게 더 많이 나타날 수 있다.



Ⅲ. 분노의 이해



A. 성서에서의 분노

성서에 나타나는 분노는 신약보다 구약에 더 많이 나타난다. 그리고 여기에서 하나님은 스스로 분노하시는 모습을 드러내신다. 하나님은 스스로 분노하시면서 우리에게 분노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 때로는 모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여기에 분노에 관한 성서적 조명의 필요가 있다.

성서에서 분노라는 말은 600번이나 나타나고 있고 그 단어를 사용하는데 있어서도 하나님의 분노와 인간의 분노를 구별해서 사용하고 있지 않다. 구약에서는 '아나프'란 단어와 그의 준말인'아프'가 쓰였고, 신약에서는 'orge'라는 단어가 흔히 분노의 표현으로 쓰이고 있다. 하지만 단어가 같이 쓰인다고 해서 인간의 분노라는 감정이 정당화 될 수 있는 것 인지는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라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제일 완전한 상태라고 믿는 창조시는 이러한 분노의 감정이 있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고찰하게 될 하나님의 분노와 인간의 분노를 통해 그 차이점과 모순을 해결해 나가고자 한다.

1. 하나님의 분노

폴리슨(D. Powlison)은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그의 분노를 이해할 수 없다고 이야기했다. 그의 분노는 전적으로 정당하며, 선하고, 적절하고 악에 대한 정당한 반응이었음을 알아야 하며 이 모든 것은 오로지 도덕적으로 불변하고 구별되는 존재이기에 가능하다라는 것이었음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항상 같이 이해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범하기 쉬운 이해중의 하나가 하나님을 너무 "신인 동형화" 한다는 것이며 따라서 그의 분노의 모습조차도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피조물의 불완전한 모습으로 이해하곤 한다. 그러므로 그의 분노는 우리가 이해하는 범주로서 추측할 수 있는 죄 된 모습이 아니라 적법(lawful)한 것이었으며 그의 거룩함과 정의에 대한 표현이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기에 성경에서의 하나님의 분노는 지속적이지 않았다. 인간들이 회개하면 하나님은 진노를 그치셨고 (요나 4:3),인내와 용기를 갖고 진노하셨다(사 48:9, 단 9:9, 시 130:3-4). 하나님의 진노는 인간을 사랑하셨기에 일어난 반응이었고 따라서 분노에는 목적이 있었다. 인간의 불의를 바르게 하여(욘 3:9, 렘 3:12)하나님의 대리자로서의 위치를 회복시키고자 한 것이다. 신약에서 하나님의 분노에 대한 구절은 구약만큼 흔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진노를 표현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이는 주로 예수님에 의해 나타났는데 바울도 하나님의 진노를 발한적이 있다(행 17:16). 구약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진노는 악(롬 12:19, 13:14), 율법의 파기(롬 2;17, 3:19),배신(롬 5:8,10)등에서 나타난다.

이런 면에서 볼 때, 하나님의 진노는 인간의 죄(하나님과 타인에 대한)로 인해 일어나는 하나님의 의(義)의 표현이다. 하지만 그의 진노는 항상 용서와 인내를 갖고 있었고 인간이 불의에서 떠나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위치를 회복케 하려는데 목적이 있었다.



2. 인간의 분노

하나님의 분노와는 달리 인간의 분노는 대부분 자신들의 이익에 제한을 받기 때문에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기가 쉽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서 가인의 분노는 아벨을 살해했고 이 가인의 분노의 결과로 말미암아 다른 많은 사람들도 가인에게 분노를 일으킨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동기는 성경에 명확하게 나와 있지는 않다. 그러나 이 분노가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싶었던 욕구가 좌절되었기 때문이라고 분석되기도 한다. 이처럼 분노의 원인에는 '죄'라고 꼭 정의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기도 하지만 이러한 분노의 결과는 죄의 열매들을 가져오게 되는 경우가 많다.

민수기 20장에는 이스라엘백성들이 마실 물이 없어서 모세와 아론을 공박하자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어떻게 대처할지를 가르쳐 주셨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았다. 아마도 모세는 너무나 격분한 나머지 하나님의 말씀에 귀기울이지 못했던 것 같다. 그 결과 모세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못했다는 책망을 하나님으로부터 듣게되고 그렇게 꿈꾸던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다.(민 20:12) 사울도 다윗이 불레셋 사람들을 죽이고 돌아왔을 때 심히 노(努)를 발하였다.(삼상 18:8) 이는 다윗의 지혜와 용맹이 뛰어남을 시기하고 질투 한 결과이다. 그 후로부터 사울은 다윗을 죽일 기회를 엿보기 시작했고 평생에 다윗의 대적이 되었다. 사울의 분노는 다윗에 대한 열등감에서 시작했지만 이는 분노로 발전했고 결국 자기 자신을 비참한 최후로 몰아가고 말았다.

물론 몇몇 인간의 분노는 정당한 부분이 있고 하나님의지에 대한 반영이었다. 하지만 대부분 성경은 분노를 참고 버려야 할 것으로 경고하고 있다,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딤전 2:8)",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고 성내기도 더디하라.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라고 했다.



지금까지 전술한 내용을 볼 때 하나님의 분노는 구원의 역사를 이루고 인간으로 하여금 회개케 하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 돌아오게 하는데 인간의 분노는 대부분이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분노자체는 중립적인 감정이며 옳은 것도 그른 것도 아니다. 적절한 것도 적절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타락이후 인간에게 존재할 수 밖 에 없는 인간비극의 연약함으로 보아야 할 지도 모르겠다. 또한 분노의 강도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화를 냈다고 꼭 나빴다고 또한 참았다고 꼭 좋은 것만도 아니다. 결국 분노의 감정이 옳으냐 그르냐 하는 것은 분노자체가 어디에서 연유한 것이냐는 동기의 분석과 어떤 방식으로 표출 되었느냐에는 결과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분노를 금하고 있는 이유는 인간의 분노에 죄가 병행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달리 불완전하고 죄성을 갖게 된 인간의 본질을 살펴봄으로서 인간의 분노를 좀더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B. 신학적 인간론

성서 안에서 가장 먼저 우리가 발견하는 인간의 규정은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이다. 인간론에서는 여러 가지 담론과 논의점이 많지만 여기서는 인간의 분노와 관계된 부분으로만 한정시켜 고찰해 보도록 하겠다.



1.'피조물'로서의 인간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되었다.(창 1:26)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것은 인간이 그 누구도 자신의 결단과 능력으로 존재하게 된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나님에 의하여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있게 된 존재이며 하나님에게로 돌아가야 할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으로 부여받은 생명에 대하여 감사해야 하며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모든 인간을 찾으시고 자기와 화해시키며 그리하여 새로운 피조물의 세계를 열어 주신 하나님을 기뻐하고 감사 드려야 한다.

또한 인간이 피조물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야 할 존재임을 말한다. 하나님과 함께 사는 존재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이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아가야 할 존재, 자기의 존재를 가능케 한 은혜로우신 하나님에게 응답하면서 살아가야 할 존재임을 뜻한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존재로서 하나님과 함께 사는 존재인 인간은 책임적 존재라고 정의된다. 책임적 존재에 대해 바르트(K. Barth)는 다음의 네 가지로 말한다.



①하나님을 알아야 할 존재

②하나님에게 순종해야 할 존재

③하나님의 역사를 위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 이 부르심에 응답하며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는 일을 이루어야 할 존재

④인간은 자유로운 존재 .



다시 말해 창세기 2장에서 홀로가 아닌 배우자와 함께 살아가야 할 존재이듯이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가야 할 존재인 동시에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이웃과 함께 이웃을 위하여 살아가야 할 책임적 존재인 것이다. 인간이 만물의 통치자로서 위치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인간만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그는 이 세계 속에 홀로 있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과 대면하고 있는 존재이다. 인간의 참된 인간성은 하나님이 이 인간에게 부여하신 인간의 존재규정을 파악하고 실현하는데 있다. 즉 하나님과 이웃을 위하여 그들과 함께 살아가야 할 규정을 파악하고 실현하는데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인간은 자연을 파괴하고 착취하여야 한다는 의미에서 다스릴 권한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법과 질서를 지키는 가운데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를 존경하고 사랑하며 가꾸는 통치자로 창조된 것이다.



2. 타락한 인간

최초인간인 아담이 하나님께 범죄 함으로 죄가 이 세상에 들어왔고 죄는 또 사망을 불러들였다고 성서는 기록하고 있다.(롬 5:12) 그러므로 인간이 가진 하나님의 형상은 자신의 죄에 의하여 파괴되었고 그는 하나님과 이웃과 자연에 대하여 파괴된 관계 속에서 살고 있다. 즉 그는 하나님을 부인하고 자기를 하나님의 자리에 세우며 모든 것의 중심으로 삼는다. 이리하여 그와 하나님의 관계, 곧 "계약의 파트너"로서의 관계는 파괴된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될 때 인간과 그의 이웃과의 관계도 파괴된다. 그의 이웃은 더 이상 사랑을 주고받는 파트너의 관계가 아니라 자기를 위한 이용대상이나 지배대상으로 되어 버린다. 모든 인간관계는 자기중심적 성향을 가지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창세기 3장 5절에서 뱀이 인간에게 약속하는 모습 "하나님과 같은 인간"은 가장 근원적인 인간의 죄가 드러난다. 교만은 하나님의 권리와 율법의 위반을 뜻할 뿐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반역을 뜻한다. 틸리히(P. Tillich)가 말하듯이 '교만은 죄의 일부가 아니라 죄의 전체'라고 볼 수 있다. 죄의 모든 내용은 이 교만이라는 개념 속에 다 포함되어 있다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교만은 본래 하나님이 있어야 할 자리에 인간이 자기 자신을 세우는 것을 말한다. 성서로부터 추론하여 볼 때 하나님이 창조하신 본래의 세계에 있어서 모든 것의 중심은 하나님이다. 그러나 죄의 시점으로부터 인간은 하나님을 배제한 채 모든 것의 중심을 자기에 두고 자기중심적으로 말하고 행동하게 된다. 이웃은 파트너가 아니라 경쟁의 대상이다. 여기에서 질투와 미움과 위선과 거짓,교만,속임,파벌,중상모략,살인등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신의와 온정 자비는 사라지며 난폭하고 잔인한 마음이 인간을 지배한다.

자기중심적 인간은 아무런 한계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모든 행위와 삶의 규범에 있어서 자신의 생각과 판단이 준거가 된다. 양심은 있지만 욕망을 제어할 수 있는 결정적인 힘을 갖고 있지 않다. 이러한 한계를 모르는 자기중심적 욕망은 하나님과 이웃과 참된 자기 자신과의 모든 관계를 단절한다. 그러므로 타락한 인간은 참된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소외된채 사실상 혼자 살아간다. 이러한 의미에서 죄인은 고독하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자기 자신으로부터 이웃으로부터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3.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받은 인간

전 인류는 아담 안에서 멸망했으나 화목 재물 되신 그리스도에 의하여 다시 회복되었다.성서에 의하면 모든 믿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새 사람으로 갈아입어야 한다(엡 4:24) "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새 사람을 입는다는 것은 단순히 내면적으로 그리스도에 자기를 동화시키는 차원을 넘어서 옛날의 자기는 죽고 하나님의 새 피조물로서의 그리스도의 삶의 길을 따르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 인간이 예수그리스도의 신적 본성을 입는다는 것은 인간이 신적인 존재로 변형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상응하는 인간", "하나님 자신과의 상응관계에 있는 존재"가 된다. 자기를 낮추시고 고난 당하신 하나님에게 상응하여 자기를 낮추고 자기의 이웃을 섬기는 자가 되는 것으로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인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입어야 할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이 소유할 수 있는 어떤 자질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 하나님의 새로운 피조물의 세계를 향하여 부르심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성령을 통하여 연속성을 가진다. 부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지금도 간구 하신다(롬 8:34). 따라서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람으로서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된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가 이루어지고 겉 사람은 후패 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로워진다. 성령을 통해서 채워진 의식은 기독교적 사랑을 감행하도록 능력을 주어 인간을 자유롭게 하고 진리 인식전체의 본질에 맞는 행위에 까지 이르게 하는 것이다.



C.분노의 본질과 심리적요인

분노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요인들을 분류해 보면 몸의 생화학작용, 환경적 요인들, 인식하는 태도, 인간의 죄 성에서 오는 기본 성격적 결함으로 분류할 수 있겠다. 이에 본 소고에서는 먼저 위에서 전술한 바를 토대로 하여 분노의 본질적 성격과 심리적 요인들을 분석해 보기로 하겠다.



1.분노의 본질

본인은 지금까지 전(前)장에서 인간의 창조와 타락, 구속에 입각하여 인간이해를 진술하였다. 인간은 창조 시 흠 없는 최대의 걸작품이었으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인격은 자기중심적 죄의 열매들을 맺게 되었다. 정신분석학에서는 분노를 본능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분노가 성격이 발달함에 따라 대인관계에서 발달한 것으로 본 반면 모든 행동은 자극에 의한 것이므로 분노도 타인들의 행동을 보고 배워 온 행위라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분노의 근원은 두 가지로 추측할 수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이나 예수님도 분노하셨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았기에 하나님의 속성인 분노가 창조 시 부여받았다는 주장인데 단, 이 분노, 기쁨, 질투의 정서는 창조 시 부여받은 하나님의 속성이나 타락으로 인해 오염되었다는 주장으로 분노의 자연성(natural)은 하나님의 창조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창조 시 부여받은 속성이 아닌 타락 후 죄인으로부터 나오는 감정이라는 것이다. 후자의 견해를 지닌 사람들은 타락 전 분노를 낼 이유가 전혀 없으며 성경 어느 곳에도 인간이 분노를 일으켰다는 구절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논쟁 속에서 우리가 찾아야 할 핵심문제는 분노가 문제를 향하지 않고 인간에게 향해질 때 항상 죄로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을 안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분노는 하나의 복합현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우리가 경험하는 분노는 신체적 강성체제오부터 시작하나 그 각성이 일어나는 때와 강도는 우리의 개인적인 두뇌화학(brain chemistry)으로부터 방금 식사를 했느냐 안 했느냐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신체적 요인들로 인하여 아주 다양해 질 것이다. 이 원초적인 정신사태는 우리의 기대와 희망, 두려움,삶에 대한 철학적 신념등과 함께 우리의 정신상태에 의하여 결정된다. 삶의 목적과 고난의의미에 대한 신념, 자기 자신의 중요성에 대한 견해, 책임감과 도덕적 관념 등이 모두 우릭 다 분노할 가능성을 제공하고 우리가 선택할 반응의 성질을 조성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고 반복이 되면서 분노반응은 뿌리를 내리고 습관화된다. 또한 이것은 더 이상 억제될 수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2.분노의 원인



1)외적요인

분노의 원인에는 어린 시절 아이들이 부모가 분노를 표현하는 모양과 가족 간에 용납되었던 화풀이의 모양을 보면서 분노를 학습한다. 아주 어린 시절에 아이들은 부모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의 영향을 받고 자주 그 분노를 억제하는 것을 배운다. 뉴욕주에서 연구한 어떤 보고를 보면 자녀들이 경험하는 가정생활의 수준, 특히 부모의 행동과 그 자녀들의 공격성은 서로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또한 분노를 적절하게 표현하는 것을 방해하는 또 하나의 요인은 기독교와 분노에 대한 오해이다."분노를 표현하지 말아라. 모든 분노는 다 죄다.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부끄러워하라. 권리주장을 하지 말라"이렇게 분노에 대한 기독교의 견해를 잘못 받아들이면 고함을 치거나 논쟁을 벌이는 것보다 더욱 교활하게 표현되는 수동공격형의 분노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 밖에 직업의 종류나 호르몬의 수치를 높이는 운동.소음과 신체건강, 알콜등이 분노의 감정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분노를 유발하는 또 하나의 외적인 요인으로 문화적 요인을 부인할 수 없을것이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오랜 유교적 문화권에서 뿌리내린 가부장적인 제도아래 여성에게 삼종지덕(三從之德)을 강요해 왔다. 이러한 남성 우월주의의 문화 속에서 남성들이 여성들을 무시하고 횡포를 저질러도 자신의 분노나 감정을 표출하는 것은 죄악시되었고 여성들은 분노를 안으로 쌓아 한으로 품게 되었다. 남편의 외도를 불평하면 '칠거지악'이라 하였고 시부모의 부당한 학대에도 한 마디 말 한마디 할 수 없었던 한국의 문화는 분노를 안으로 삭이는 한국여성의 한(恨)을 양산한 셈이었다. 이러한 독특한 한국문화권에서 양육 받은 한국의 청소년들은 서구의 청소년보다 훨씬 더 많은 좌절과 긴장을 경험했었을 것이다.



2) 내적 요인



a. 낮은 자존감

낮은 자존감을 가진 사람일수록 점점 더 자기 자신에게 몰입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매일매일 일어나는 일들을 날카롭게 알아차리고 그것들이 그들에게 무슨 영향을 미치는지 고통스럽게 점검한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은 정상적인 상황이라도 위협을 느낄 수 있다. 두려움과 상처와 질투가 쉽게 표면에 나타난다. 특히 자기의 약점이라고 생각되는 영역에 대한 비판은 너그럽게 받아들이기 어렵다.

대부분의 발달심리학자들은 청소년의 자존감 또는 자아정체감 형성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주는 것은 자녀에 대한 부모의 태도라고 본다. 즉 자녀가 부모에 대하여 신뢰하는 관계속에서 성장할 때 정체감 형성도 잘 이루어지고 독립성이 제대로 발달하게 된다고 한다. 그리고 자녀에 대한 부모의 풍부한 사랑과 격려,그리고 기본적 신뢰감이 청소년들로 하여금 긍정적인 자아상과 자아정체감을 형성하도록 유도한다.



b. 좌절

사람들은 설정한 목표를 향해 나아가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장애물, 사건, 혹은 물리적 장애가 나타났을 때 다시 말하면 제지를 당하거나 창피를 당하는 식으로 좌절당했을 때 분노하게 된다. 좌절감이 직접 분노를 일으키는 것은 아니나 사람들이 좌절감을 느끼는 정도의 차이는 그들의 목표들이 얼마나 중요하냐 좌절스러운 일이 얼마나 지속되느냐에 달려있다. 또한 폭력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은 오랫동안 계속해서 쌓인 좌절을 참아 내다가 드디어 폭력적인 분노를 터트리게 되는 일이 종종 있다.



c. 완벽주의(perfectionism)

완벽주의는 상상된 완전에 미치지 못할 때마다 분노를 초래한다. 완벽주의자들은 아주 재능이 많은 사람일 수 도 있으나 여전히 비현실적인 표준들을 세워놓고 좌절한다.그들이 세워놓은 표준들은 자기자신이 가치있는 존재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느낌을 충분히 갖기 위해서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져야만 하는 것들이다. 예를 들면 항상 A학점만 받는 학생이 B+의 학점을 받아놓고는 화가 나서 우울증에 걸린다. 골프를 치는 사람들은 휘어져 날아간 공 때문에 몹시 화를 낸다. 이렇게 완벽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목표가 가로막혀져 있을 때도 화를 내지만 또한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높은 표준을 제시해 놓고 그대로 이룰 것을 요구하며 쉽게 화를 내고 정죄하는 태도를 취한다.

크리스챤 완벽주의자들은 더 심각하다. 이러한 사람들은 신앙 안에서 성장하는 속도가 느린데 이는 자신의 실수와 부적합함을 솔직히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크리스천 완벽주의자는 만성적인 참회자들(chronic confessors)일 가능성이 높은데 습관적으로 참회하는 행위는 보여주고 싶어하는 겉모습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또한 대중매체를 통해 보여지는 일부 성공한 사람들의 예는 완벽주의자들을 더 높은 기대치와 자기학대로 이어간다.



d. 교만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하는 아담의 교만한 마음은 타락이후 자기중심적으로 세상을 보게되었다. 아담이 이렇게 자기중심적인 사고에 굴복한 결과 이것이 그의 인격의 중심적인 부분이 되었고 이러한 경향성은 그의 후손들에게 깊숙이 박혀져 왔다. 이러한 원죄성은 분노의 모든 부적절한 형태를 수반하여 소리를 지르거나 조롱하거나 비난하거나 혹독한 침묵속으로 물러나거나 '왜 이 사람들은 내가 말한 대로 그대로 할 수 없을까?'라는 교만한 마음을 품게 만든다.

분노의 내적 요인으로서의 교만은 우리가 이미 앞장에서 많은 부분들을 살펴본 것 이기도하며 분노의 뿌리로서 교만은 자기를 남보다 낫게 여기고 그 중심에 하나님이 아닌 자기가 있기 때문이다.



Ⅳ. 분노와 청소년과의 상관성



1.가족 및 가정환경에서의 갈등

청소년들의 정서적 문제를 다루는 연구결과들에서는 어떤 심각한 위험요소가 가족과 관련이 있다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면 정서적 문제를 경험하고 있는 청소년들은 그와 같은 문제를 가지지 않은 그들과 비슷한 청소년들보다 신경증적 장애를 가진 부모들을 더 많이 가지는 것으로 드러났다. 세대간에 걸친 그들의 심리적 문제에는 많은 그럴 듯한 이유들이 있다. 첫 번째, 부모가 정서적 혹은 행동상의 문제를 가진 경우 이러한 유전적 경향이 자녀들에게 전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 가능성은 어떤 가정에서는 부모와 자녀모두에게 공통되는 문제를 일으키는 공통의 스트레스가 있다는 것이다. 자녀들은 여기에 영향을 받고 부모와 부정적인 상호작용을 경험하게 된다. 세 번째는 부모의 정서가 청소년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청소년 딸의 경우 적응이 간접적으로는 부모의 표현에 그리고 직접적으로는 부모의 수용도와 관련이 있다고 하겠다.

이렇게 가정에서 안정감을 쉽게 갖지 못한 청소년들은 분노의 내적 요인이 되는 낮은 자존감과 좌절을 경험하게 되고 제어할 수 없는 분노는 비행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2.학교에서의 갈등

청소년들은 자신의 대부분의 시간을 학교에서 보내기 때문에 학교가 청소년의 성장발달에 미치는 영향은 매우 크다. 특히 입시와 관련하여 정서나 도덕예절, 인성 등에 관한 교육기회가 전무한 실정에서 청소년들은 자신의 필요를 충족하거나 자아통제력을 훈련할 수 있는 길이 없다. 이러한 비교육적인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아이들은 심한 열등감과 소외 의식 속에서 자신감을 상실하게 되고 자신을 비하시키며 나아가 자신의 곤경을 비정상적인 분노의 탈출구로 삼는다.



3. 정체감 혼란으로 인한 갈등

청소년기가 시작되면서 대부분의 청소년들은 청소년들이 가장 먼저 겪게 되는 정신적 과제는 '나는 누구이며,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내가 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와 같은 심각한 정체감혼란이다. 이 정체감의 획득이 청소년기에 중요시되는 이유는 급격한 신체적 발달로 인해 심리 역동적 체계의 균형이 깨어지게 되고 이제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경험들에 대한 혼란이 시작되기 때문이고 이러한 갈등은 자아의 위협과 불안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증대되는 인지능력으로 인해 모든 것을 과학적이고 객관적으로 바라보려는 노력을 하게 되며 자신의 심적 참조계로서 동일시 대상을 물색하게 되고 성장과정에서 가장 자기가 좋아하거나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을 따라 그의 행동양식,기호,가치관 등을 내면화해 나간다.

이러한 의미에서 청소년기독교교육의 목적이 중요시되며 그들이 처음 정체감의 위기를 겪을 때 어떤 가치관을 갖고 사물을 바라보는지는 그들의 평생 삶의 방향에서 중요한 기점이 될 수 있기에 다음 장에서는 청소년기독교교육의 목적과 기독교적 치유방법 그리고 이의 교육적 적용모델을 통해 살펴보려고 한다.





Ⅴ.청소년 분노조절을 위한 기독교 교육적 적용프로그램



A. 청소년 기독교교육의 목적

주크(R. Zuck)는 청소년 교육의 목표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첫째, 청소년들로 하여금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게 하며 그 분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도록 지도한다. 둘째, 성경말씀을 자신의 체험과 의미 있는 관계로 맺어서 받아들이도록 지도한다. 셋째, 하나님 말씀의 심오한 뜻에 대하여 진지하고도 체계 있게 생각하도록 지도한다. 넷째, 청소년들로 하여금 열심을 가지고 성경을 공부하며 근본적인 문제들과 스스로 싸우게 지도한다. 다섯째, 그리스도 중심의 생활태도를 발전시키며 그들의 기독교적 통찰력을 자신들이 가늠해보고 평가할 수 있도록 지도한다. 여섯째, 청소년들로 하여금 신앙과 이성의 관계에 대한 쟁점에 마음을 열어놓고 직면하게 지도한다.

청소년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여 구원을 얻게 하고, 확실한 영적 성장을 하게 하며, 나아가 그리스도의 주권아래 자신들의 왕성한 젊음의 자원을 계발하게 하는 것은 청소년 사역자들이 당면한 가장 중요한 도전이다. 바울이 말했던 것처럼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게 하는 것이 우리의 참 목표이며 이것을 근거로 십대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시험해 보고 발전시키며 관념적인 신앙에서 직접적인 신앙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특히 그들이 가지고 있는 솔직한 고민에 대해 정죄하는 자세가 아닌 마음을 열어 놓고 듣는 경청의 자세가 필요하다.



B. 분노의 기독교적 치유방법



청소년들은 자신의 분노의 원인이나 본질을 알지 못한 채 무조건 억압하거나 혹은 무조건 폭발시키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대부분 그들이 화를 내는 이유는 자기중심성과 왜곡된 사고구조에 의한 것이 많으므로 이를 합리적 정서요법을 창안한 앨리스(A. Ellis)의 이론을 중심으로 분석해 나가고자 한다.





1.인식의 전환

어떤 학생이 입학시험에 두 세 번 떨어진 후 말할 수 없는 우울증에 빠져들어 매사에 의욕을 상실하고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다고 할 때, 흔히"계속해서 시험에 떨어졌다"는 사건이 우울증을 가져오게 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엘리스는 연속적으로 시험에 떨어졌다는 사건이 우울증의 원인이 아니고 "연속적으로 떨어졌으니 이제 나는 끝장이다. 나는 불효자식이고 사람들 보기에도 정말 수치스럽다. 내 인생은 이제 절망이다. 나는 무가치한 인간이다!" 라고 비합리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자살까지 가게 되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시험에 떨어진 상황을 놓고서 모든 사람이 다 이 학생처럼 우울증과 좌절에 빠지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는 "계속해서 시험에 떨어져서 기분이 몹시 좋지는 않지만 할 수 없는 일이며 다른 사람들도 떨어지는데 나라고 그러지 말라고 하는 법은 없지....부모님께는 정말 죄송하지만 좀 더 열심히 해서 보답해 드려야지..." 이러한 반응의 차이는 엘리스에 의하면 사고방식의 차이라는 것이다.

엘리스에 의하면 쉽게 화를 내는 사람들이 가지는 비합리적 생각들은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①"당신이 나에게 그런 부당한 행동을 하다니 얼마나 터무니 없는가!"

②"당신의 무책임하고 부당한 태도를 나는 참을 수가 없다."

③"당신은 나에게 절대로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④"당신이 나에게 그렇게 행동한 것을 보니 당신은 아무런 가치도 없고 벌을 받아 마땅한 엉터리 같은 사람이다."



위의 네 가지 문장은 공통점이 있다. 모두 부정적인 의미가 강하며 또한 행동을 사람과 동일시하고 있다. 즉 그 사람의 부정적인 행동에 대한 평가를 그 사람전체에 대한 것으로 확대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이 비합리적 생각들을 엘리스가 제시하는 전반적인 범주 안에서 크게 세 가지로 간추려 보고 적절한 기독교적 인식으로 전환해 보고자 한다.



<비합리적 신념 1>



"나는 늘 우등생이어야 하고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아야만 한다. 그렇지 못하면 나는 썩어빠진 인간이다."



⇸이러한 신념은 개인적 성취에 관한 기대에 관한 것들이며 타인이 자기를 어떻게 평가하는지에 관해 신경을 쓰는 내용이다. 여기서 자기 가치를 재는 척도는 자신이 일을 얼마나 성취하느냐와 동일하다. 자신이 해내지 못 했을 때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비난할 것이라고 여긴다. 이러한 비합리적 생각을 바꾸기 위해서는 우리는 성서적으로 인식을 전환할 필요가 있다.

잠언 16장 1절에는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 나는 도다"라고 하였다. 또한 9절에는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자는 여호와 시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사람이 계획을 세우고 그 목표에 도달하려는 최선을 다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 일이 이루어지지 못했을 때는 타인을 의식하기 전에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바라보아야 한다. "구하라 그러면 주실 것이요 두드리라 그러면 열릴 것이니라"하신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계획과 간구를 이루시는 분이며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잘못 구함"이 아닌가를 깨달아야 한다. 물론 순전하고 정직한 욥과 같은 사람에게도 뜻하지 아니하는 고난이 주어지기도 하지만 어떠한 상황에서도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이다.

성공의 기준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다. 하나님께서는 복의 근원이 되시고 인간이 잘되기를 원하시는 분이시므로 성공의 기준은 자기 자신이나 타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음을 알아야 한다. 또한 진정한 승리는 세상의 부귀나 영화가 아니라 그리스도의구속과 부활에 의지하여 그리스도를 따라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성공의 목표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는 대 전제가 있어야 할 것이다.

예수그리스도는 죄인인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위에서 모진 수치를 당하신 채 돌아가셨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산 귀중한 존재임을 깨닫게 될 때 낮은 자존감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이다.



<비합리적 신념 2>

"세상은 왜 이렇게 공평하지 못할까? 왜 사람들은 이렇게 사려 깊지 못할까?......남들에게 피해를 주고 사려 깊지 않고 내게 불친절한 사람들은 세상에서 심하게 비난받고 저주받고 벌받아야만 해"



⇸ 여기서도 비합리적 신념의 독단성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자신을 향해서 라기보다는 타인을 향한 비현실적 기대를 갖고 있다. 엘리스는 두 사람이상 상호작용 할 때는 각자가 자신의 입장을 우선적으로 고려하기 때문에 항상 갈등이 일어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자신의 처지와 다른 사람의 처지를 항상 고려한다면 바람직한 일이겠지만 불행하게도 이러한 바람직한 태도는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예수그리스도께서는 가장 중요한 계명이 무엇이냐는 한 율법사의 질문에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다. 즉 이 세상은 결코 자신이 중심이 아니라 모든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이며 남도 자신과 똑같이 소중한 존재임을 가르쳐 주셨다. 따라서 상대방이 부당하게 텖을 때, 그 원인이 상대방의 인격이나 성품의 결함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의 태도가 자기중심적이었는지를 고려 해야 할 것이다. 전자의 경우라면 그것은 내가 분노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상대방의 문제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똑같은 상황에서 같은 반응을 보이지는 않기 때문이며 이러한 인식에 도달할 수 있다면 불쾌한 감정은 남겠지만 분노는 터뜨리지 않을 수 있다. 반면에 문제가 상대방이 아니라 자기중심적인 사고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성서의 가르침에 따라 하나님중심의 사고로 인식을 바꿔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자기중심에서 벗어나 하나님말씀에 순종할 수 있다면 자기중심적인 사고로 인한 분노에서 벗어나 인식의 전환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비합리적 신념3>

"이 세상은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성취할 수 있도록 그렇게 되어져야 한다. 뿐만 아니라 내가 원치 않는 것은 발생하지 않도록 그렇게 되어 있어야 한다. 또한 내가 원하는 것은 곧바로 손쉽게 얻을 수 있어야 한다."



⇸ 이러한 생각도 위의 두 경우와 동일한 요소를 가지고 있으나 그 중에서도 가장 비합리적 요소는 환경적 요건이 우리의 욕구에 부합하여 변화한다는 기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요구가 실현되지 않을 때 부질없이 자신을 괴롭힌다.위의 생각은 지합리적 요소를 넘어 극단적인 교만의 상태에 있는 것이다. 성서는 교만을 죄라고 말하고 있으며 교만한자는 멸망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릇된 자존심은 진리를 왜곡하고 참된 자아를 직시하는 것을 막는 장애물이다. 반면 겸손은 한 사람이 지니고 있는 한계와 참된 능력에 대한 인식이다. 그것은 사물에 대한 올바른 견해를 갖게 한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에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오히려 섬기려 하고 자기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는 말씀을 통해 이 세상의 사물들과 사람들이 자신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비합리적인 생각인가를 말씀해 주신다.



지금까지 분노의 감정에 빠지기 쉬운 비합리적인 감정의 세 가지 유형을 알아보았다. 앨리스는 이러한 비합리적 감정이 전환되는 데는 다음의 세 가지 단계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나 이렇게 분노를 인식하였다고 하여 분노를 스스로 묻어 두거나 수동공격형으로만 변한다면 이는 온전한 치유가 아닌 위장된 평화에 불과할 수 있기에 인식을 전환한 다음 어떠한 방법을 사용해야 하는지를 알아보고 이의 실제적 프로그램을 시도해 보겠다.



2. 분노의 적절한 표현



에베소서 4장 25절은 분노에 대해서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고 권면 하고 있다. 또한 이 구절은 분노감정의 적절한 표현에 대해서 일반적인 교훈을 가르쳐 준다.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이 구절들은 분노의 감정을 지닌 사람들에 대해서 도와줄 삼중 적인 전략을 알아볼 수 있 다. 첫째, 분노는 표현해야 할 때 가 있다는 것. 둘째는, 분노를 죄를 짓지 않고 표현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셋째, 속히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위한 구체적인 방법을 아래와 같이 알아보자.



a. 정직한 면책

내담자가 자기를 화나게 만든 상대방에게 분노를 적절히 표현하고 면책할 준비를 갖추려면 먼저 상담자에게 도움을 받아 단호하게 말하는 법을 익힌다. 마크 코스그로브는 상대방을 면책하는 과정에서 다음의 열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① 상대방에게 개인적인 자리에서 분노를 표출하라.

② 상대방의 잘못보다는 상처입은 감정의 관점에서 말하라.

③ 논쟁의 초점을 현재의 문제에만 국한시키라.

④ 상대방을 꼭 이기겠다는 생각보다 의사소통을 좀더 효과적으로 하여 서로를 더 잘 이해하도록 하라.

⑤상대방에 대한 비평은 부드럽고 긍정적인 분위기에서 하라.

⑥문제를 위협하거나 과장하지 말라.

⑦상대방이 반응을 보일 기회를 허락하라.

⑧말을 할 때는 상대방이 한말을 풀어서 설명하라. 그 사람의 말을 정확히 이해했는지 확인하라.

⑨상대방이 화를 내면 더욱 평온한 분위기를 유지하라

⑩해결을 위한 방향으로 나아가는데 집중하라.



b.고백

내담자들은 단순하고 직설적인 방법으로 자기 잘못을 시인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당면 문제에 있어 자기 책임이 아닌 것까지 사과할 필요는 없다. 그 문제에 대해서 자기 잘못이 없다고 생각할 경우에는 자기를 화나게 한사람이 그것을 모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지혜로울 것이다. 상대방이 화를 내고 있는 일에 대한 사과를 함으로서 그 문제에 접근하면 효과적인 출발이 될 것이며 그러한 고백을 통해 분노한 사람들이 자신의 감정에 대해서도 자기도 책임이 있다는 것을 시인하게 될 것이다.



3.회개와 용서

치유의 마지막 단계는 용서이다. 분노의 동기와 원인에는 아주 복합적인 것들이 있다. 분노의 동기가 자기중심적인 욕망에 기인한 것이라면 치유의 마지막단계는 그러한 모든 것의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한 회개와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와 안정감일 것이다. 그러나 분노의 원인이 외부로부터 오는 갈등에 기인한 것이라면 가장 중요한 단계는 먼저 잘못한 상대방을 용서하는 태도일 것이다. 우리는 이미 전장에서 분노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나 중심적인 비합리적 인식을 바꾸어 합리적인 전환을 하는 방법을 알아보았고 상대방에게 분노의 감정을 표현하고 하나님께 기도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단계까지 지나왔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을 실행하고도 완전하게 치유의 단계까지 나아가지 못하는 경우를 보게 될 것이다. 이는 그가 아직 '용서'의 단계까지 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며 아무리 객관적인 입장에 서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당사자가 아닌 이상 권유하는 문제도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성서는 이에 대해 예레미야 31장 34절, 마태복음 18장 23-25절등에서 명확하게 용서할 것을 말씀하신다. 그리고 이 명령은 큰 설득력을 갖는다. 왜냐하면 이는 십자가위에서 직접 벌거벗은 채로 수치 당하시고 죽으셨던 그분이 그 누구보다 상한마음의 정체를 잘 아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이미 우리에게 이루어진 구원을 우리는 고백해야 할 의무만이 남아 있는 것이다.



C.소그룹을 통한 청소년분노조절의 실제프로그램

소그룹은 성경의 주된 가르침과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도록 도와주는데 있어 가장 적합한 기초공동체라 할 수 있다. 그룹은 정적인 것이 아니라 동적인 유기체로 항상 움직이는 것이다. 그것은 한 단일체로 움직일 뿐만 아니라 그룹 속에 있는 여러 가지 요소들이 항상 상호작용을 하고 있는 장점이 있기에 이러한 역동성이 청소년들의 그 문화적 특성상 또래 집단을 선호하는 경향과 잘 맞을 수 있다는 판단 아래 소그룹 형식의 모임을 선택하게 되었다.



1.소그룹의 구성방법과 절차

소그룹 활동을 위한 절차에 있어 먼저 기간과 구성방법을 다루고자 한다. 본인이 다루게 될 청소년분노조절에 관한 생활지도프로그램 구성은 교회 학생부 전체교육과정 프로그램에 따라 예배 이후의 2부 활동으로 3주에 두가지 주제로 진행되며 기간은 한 과제 별로 1주의 시간이 주어진다.

모이는 곳은 예배후의 교회 교육관이나 조용한 곳이며 1회에 대한 시간은 2시간-2시간 30분으로 한다.



2.소그룹모임의 실제- 프로그램 작성



1)분노감정 다루기의 진행





2)실제적용:2주의 motivational dynamics 프로그램의 실제 예를 통하여

①활동목표: 분노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하나님의 사랑과 주권을 인정할 수 있다.

②성경말씀: 민수기 11장 1절-35절

③내용진행



#묵도----------------------지도자

"우리의 입으로 예수님을 주님이라 고백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 셨다는 것을 믿을 때 구원을 얻게 하시는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들로 하여금 이 시 간 하나님만이 오직 영원하신 분이라는 것과 구원의 본질이심을 알게 하시옵소서"

#사도신경-----------------다같이

#찬송-----------------------"주님과 같이(There is non like you)"

#기도-----------------------학생 중에서

#숙제 점검

(숙제를 통해 한 주간의 삶 속에서 얼마나 들은 말씀을 기억하고 그 말씀을 적용시켰 는가를 점검한다. 이로써 듣는 말씀에서 실천하는 말씀을 훈련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독서과제가 있을 때에는 독서과제를 점검하고 그 느낀 점을 발표한다.)

#성경본문 묵상하기--------민 11:1-35---------다같이



#토의

1.지금 이스라엘 백성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무엇인가? 구체적으로 써 보자.



2.이스라엘백성들은 왜 이런 일들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을까?



3.이에 대한 모세의 반응은 어떻게 나타났는가?



4.왜 모세는 이러한 반응을 보여야만 했을까?(모세의 속마음에는 어떤 것이 있었을까?)



5.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며 모세를 어떻게 인도하셨는가?



6.하나님을 인정하게 된 모세는 어떻게 되었는가?



7.이후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선 모세의 모습은 어떻게 나타났는가?





#적용------------------------------------- 나의 경험 나누기



<미영(고2)의 경우>

미영이는 화가 났다. 그리고 눈물도 났다. 오빠(20)가 직장생활을 시작한 후로 교회를 등한히 하기 시작했다. 업무를 핑계로 주일을 한 두 번씩 빼먹기 시작하더니 십일조조차 온전히 하지 않았다. 더욱이 화가 나는 것은 아버지의 침묵이었다. 아버지는 항상 "우리식구가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면서 큰 아들의 신앙적 나태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아버지의 외식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했다. 이번 주일에는 이런 생각과 그에 따른 분노로 끙끙 앓다가 자 버렸고 교회를 못 가게 되었다.



④평가 및 정리





⇨ 1) 학생에 관련된 질문

①학생들은 무엇을 배웠는가?

②그들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③학생들은 프로그램에 적극적이었는가?

④학생들은 프로그램의 목표를 인지하고 있었는가?



2)프로그램에 관한 질문

①프로그램과 교육목적은 적절했는가?

②예배환경분위기는 프로그램에 효율적이었는가?

③사용된 방법들은 적절했는가?



3)교사를 위한 질문

①모임을 위해 기도로 준비하였는가?

②학생의 스스로의 판단보다 교사의 의견을 주도적으로 이끌지는 않았는가?

③더좋은 프로그램을 위해 보완되어야 할 점은 무엇인가?

④이를 위해 사전에 충분한 준비를 하였는가?



Ⅵ. 결론

본 소고에서는 지금까지 청소년과 분노의 치유방법을 알아보기 위하여 먼저, 청소년의 신체적, 정서적, 심리적 특성을 알아보고 일반적인 분노의 성격과 본질을 성서적 검증을 통해 알아본 후, 분노의 신학적 인간학을 조명함으로써 일반정신분석학에서 주장하는 분노의 시각과 기독교에서 보는 분노의 시각이 서로 다른 것임을 반증하였다. 그리고 이의 기독교적 적용모델을 연구하기 위해 4장에서는 분노와 청소년의 상관관계를 조사한 후 5장에서는 이것의 기독교 교육적 실제적용모델을 만들어 보았다.

청소년은 그 발달적 단계상 많은 갈등과 변수가 동반되는 시기이지만 특히 이때가 중요한 것은 청소년기의 건강한 자아개념을 갖게 되는 것이 평생발달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청소년 기독교교육의 목적도 여기에 있다.

분노는 아담이후에 인간에게 원죄로써 남겨진 하나의 그림자(shadow)이다. 우리는 그것을 미워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다. 만약 부정하면 할수록 그 그림자는 더 커지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제 과감히 이것을 짐 지고 나가야 한다. 내 안의 그림자를 애통히 여기며 세상 밖으로 드러내야 한다. 우리가 문제를 드러낼 때 주님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연약함을 책망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체휼 하신다. 그러나 우리가 드러내지 않는다면 이 연약함은 가시가 되어 나를 찌르고 다른 사람을 찌르는 악의 도구가 될지도 모른다. 분노의 위험성은 여기에 있으며 그 폭발적인 위력은 청소년비행으로 이어질 것이다.

한국사람은 감정을 표현하지 모른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특히 전통적인 가부장적 문화의 희생자들인 여성들에게 이런 현상은 더 두드러지며 이런 어머니에게 양육 받은 한국의 청소년들은 누구나 비슷한 종류의 아픔을 경험하면서 청소년기를 해답 없이 보낸다. 청소년들에게 우리는 너무나 많이 "너의 책임이 아니야....!"라는 말들로 그들에게 면책을 해왔다. 그러면 그들의 부모의 잘못인가? 그럼 그들의 부모 역시 그 전대의 악습의 희생물이 아닌가? .... 아무도 책임이 없다. 그런데 악습은 되물림 된다.

청소년들에게 일시적인 면책보다는 이 길고 지루한 전쟁을 끊도록 그들을 훈련 시켜야한다. 정직하게 직면하는 법을 배우며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오늘날 기독교교육을 책임지고 있는 자들에게 남겨진 과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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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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