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의 시작과 기독교
유명론, 근대를 열다
플라톤은, 인간은 자신 안에 절대선과 신 그리고 보편에 대한 관념(Idea)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보편은 감각 세계에서는 찾을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 볼 수 없는 보편이 실재(reaality) 한다는 사상 입니다.
스콜라 학자들은 사물에 대한 실재와 관념 사이 관계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한 사물이 그 자체로만 존재하는지 혹은 그 사물이 가지고 있는 관념도 존재하는지에 대한 추구 입니다.
중세 스콜라 학자들은 플라톤 사상에 따라서 실제 존재는 경험되는 개체가 아니라 천상에 존재하는 보편이 실재라고 합니다.
빌헬름 폰 옥캄(1285/90 - 1348년경)은 이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그는 '노랑색'이 어딘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름뿐이고, 실체를 설명하는 술어이고, 의미 전달하는 기호 일뿐 입니다. 노란 꽃으로 존재하는 것만이 실재 입니다. 보편은 정신 속에 있거나 말이나 글속에 존재합니다. 보편은 어떤 의미를 전달하는 개념 입니다. 보편이 이름으로만 존재한다 해서 유명론 입니다.
옥캄은 토마스 아퀴나스가 세운 이성과 신앙 협력 관계를 거부했습니다. 그에게 신은 이성으로 파악할 수 없는 존재로서 믿음 대상 입니다. 토마스와 안셀무스는 이해 가능한 계시와 이해 가능하지 못하는 계시를 구분합니다. 옥캄은 모든 계시를 이성으로 이해 가능하지 못하다고 합니다. 옥캄에 와서 이성과 계시가 최종으로 결별합니다.(1)
신이 철학 대상이 아니고 역사를 지배하는 실재라는 사상은 신학의 새로운 차원을 열었습니다.(2)
옥캄은 보편을 중시하는 중세 체재를 해체하고 개별을 존중하는 근대 사상을 연, 새 시대를 만든 인물로 평가됩니다.(3)
개별주의는 교회의 성직 계급 위계질서를 반대했습니다.(4)
옥캄은 최상위 존재라 하며 예수 요구인 사도적 빈곤을 위반한 교황을 이단이라고 비난했습니다.
루터는 옥캄 학파를 두루 섭렵하여 그로부터 영향받았습니다.(5)
중세 실재론은 개인에게 그 가능성을 발전시키지 못했습니다. 개인 인격성에 대한 존중은 유명론에서 싻 텄습니다.
중세 성례전(예배)은 신과 개인에 대한 관계를 물을 수 없었습니다. 집행자 주관 요소만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중세 교회가 무너지고 루터 등에 의해 종교 개혁이 일어난 동기 입니다.(6)
중세 자연신학은 자연이 하나님 직접 계시 입니다. 옥캄은 이에 반대하여, 인간은 자연에 편만해 있는 신 계시를 파악하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이것은 믿음이 신 계시의 진리를 믿는 기초가 되었습니다.(7)
유명론은 집단으로 존재하는 중세 실재론을 마감하고 궁극 실재는 각 개인에 있다고 하여, 르네상스( 문예부흥), 종교개혁으로 이어져서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려는 용기가 전면으로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개인에 고유한 자유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힘을 제한하면서까지 인간에게 준 선물 입니다.
우리가 고대로부터 내려온 종교 지도자 자신들 지배를 위해 세운 신학을 거부할 때 종교 억압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습니다. 이점은, 종교개혁 신학을 논의하면서 설명하겠습니다.
유명론이 근대 경험론과 유물론 토대 입니다.
앞으로 우리는 근대가 시작하면서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그 종교개혁 신학이 어떻게 성서 중심 신앙을 가로막게 됐는지 살펴봅니다.
유명론과 종교개혁이 인간 존엄과 평등에 기여한 바가 실로 커서 인류 정신사 발전에 괄목할 사건임에 틀림 없습니다.
그러나 후대는 그 정신을 올바로 따르지 못해서 믿음에 치명상을 입습니다. 앞으로 설명합니다.
먼저, 종교개혁이 일어나게 된 배경 입니다.
종교개혁 전야
16 세기까지 교황국 이탈리아는 전혀 신앙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백성들은 명예욕, 노름, 복수, 간통, 도둑질이 일상화였습니다.
도미니크 수도회에 종교경찰(종교재판관) 직이 주어졌는데 백성들 미움과 조롱 대상이었습니다.
탁발 수도회인 프란치스코회는 속이고, 도둑질하고, 간음하고 돈이 떨어지면 스스로 성자라 하면서 하인을 매수하여 거짓 병든체하다가 자신 옷자락을 만지고 낫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이고 모금했습니다.(
교황 알렉산더 6 세 사생아인 체사레 보르지아(1475 - 1507)는 아버지를 협박하고 형제, 매제, 친척들을 교황의 은총을 많이 받거나 그들 지위가 불쾌하면 모두 죽였습니다. 교황국을 넓히기 위해 점령한 도시들을 약탈, 방화, 살인을 서슴치 않았습니다.(10)
교회는 성직자가 지배하기 좋게 만들어진 교리와 폭력 수단까지도 함께 아울러 참된 진리라고 우기고 있었습니다.
당시 성서 진리가 그 시대 가치체계에 전혀 울림을 주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성서 진리가 자본주의, 특히 신자유주의가 주는 불공정과 빈부 격차에 전혀 감동을 주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탈리아는 권력을 부정하는 일 외에는 어떤 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반면에 독일은 확고한 교리 덕을 입어서 종교개혁에 성공합니다.
그 교리는, 선한 행위로는 아무 소용이 없고 믿음으로만 구원이 있다는 교리 입니다.(11)
알비파 그리스도인은,
12 - 13 세기 가톨릭 교리에 반대하여 프랑스 남부와 이베리아 반도 일대에서 발생한 카타르파 그리스도인 입니다.
이들은 성직자들 부패를 비판하고 반성직자 교파를 결성했습니다.
교황청은 백 여년 동안 십자군을 파병하여 5 백만 여명의 알비파 그리스도인을 학살했습니다.
얀 후스(1372/3 - 1415)는 체코 성직자로, 교황 등 로마 성직자들 부패를 비판하다가 1415 년에 화형 당했습니다. 그는 교회 위장은 너무나 튼튼해서 모든 것을 삼켜도 체하지 않는다고 한탄합니다.
그의 사상을 이어받은 보헤미안(모라비안)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었습니다. 종교 개혁자 웨슬리는 이들 신앙 모습에 감명받고 종교개혁 운동에 투신합니다. 얀 후스 개혁은 루터 종교개혁 기틀이 되었습니다.
니체가 유일하게 존경하는 그의 스승인 야콥 부르크하르트는 가톨릭이 부패로 인해 사회로부터 버림받고 망할 것인데, 루터 종교개혁으로 인해 자정하여 살아남게 되었다고 합니다.
종교개혁 전까지는 믿음에 성서가 전혀 역할하지 못했습니다. 성서가 집 반채 값이고 성직자를 포함해서 거의 모든 사람이 고대 라틴어를 모르기 때문에 성서는 교회 비치용이었습니다. 번역 성서는 종교개혁과 함께 인쇄술 발달을 통해 세계로 전해졌습니다. 중세는 성서를 사용하지 않아서 문제고, 오늘날은 성서가 자기 주장 전거로 사용되는 등 오남용이 심해서 문제 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성서 저자들은 하나님 의가 지금 이땅에서 어떻게 실현되고 있는가를 증언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은, 인간 가치체계와 하나님 의가 어떻게 다른지 주목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1. 에띠엔느 질송 중세철학입문 강영계 서광사 1987, 85p
2. 김동건 그리스도론의 역사 대한기독교서회 2018, 278, 377, 424, 430p
3. 헤를레 / 바그너 신학자 사전 남정우 한들출판사 1992, 255p
4. 로저 E 올슨 이야기로 읽는 기독교 신학 김주한 김학도 대한기독교서회 2009, 426p
5. 헤를러 / 바그너 255p
6. 폴 틸리히 그리스도교 사상사 잉개베르크 C 헤넬 엮음 송기득 대한기독교서회 2020,
237, 255p
7. 로저 E 올슨, 423p
8. 폴 틸리히 존재의 용기 차성구 예영 2012, 132p.
9. 야콥 부르크하르트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안인희 푸른숲 1999, 515 - 548p
10. 같은 책, 156p
11. 같은 책, 54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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