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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삶을 떠나다6

by 【고동엽】 2021. 10. 2.
기독교, 삶을 떠나다
4. 5 세기에 성서와 다른 신학이 정립되다 1
5 세기가 되기까지 백가쟁명으로 신학이 논의되다가 아우구스티누스(354 - 430)에 의해 신학이 정립되어서, 이 신학이 12 - 13 세기 스콜라 신학과 16 세기 종교개혁 신학으로 이어집니다.
종교개혁시 루터는 가톨릭에 남아있기를 주장하는 에라스무스와 자유의지 논쟁에서, 누가 아우구스티누스 신학에 더 충실한가를 다툽니다. 그 시대 진보란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옛날로 돌아가는 것이고, 그만큼 아우구스티누스 신학은 절대 입니다.
오늘날에도 아우구스티누스 신학을 바탕으로 성서 해석하고 설교합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그를 신학 아버지라 부릅니다.
2- 3 세기 교회 지도자를 교부, 즉 교회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가톨릭 성직자도 아버지(신부)라고 부릅니다. 예수께서 가르치는 사람에 대해 아버지라 부르지 말라고 하십니다. 아버지는 하나님 한 분 뿐이라 하시면서요.(마태23:8-9)
기독교는 출발부터 예수 가르침은 무시하고 출발했고 지금도 고칠 의사가 전혀 없습니다.
기독교가 성서와 어떻게 다른 신학 속에서 발전되어 왔는가를 말하기 위해서 아버지 이야기부터 시작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 식민지 아프리카 소도시 타가스테에서 354 년 11 월 13 일에 출생했습니다.
교회 사가들은 그가 방탕하고 타락한 삶에서 기독교로 개종했다고 합니다. 칼빈이, 아우구스티누스가 로마서 13 장 13 절 '단정히 행하며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를 읽고 회심했다는 고백으로 인해서 오해했기 때문 입니다. 필자도 신학생 때 그렇게 배웠습니다. 그러나 전기 사가들(피터 브라운, 게리 윌스 등)은 그가 금욕하고 경건하게 살다가 개종했다고 합니다. 그는 10 여년 간 마니교 신자였는데, 마니교는 금욕주의 종교 입니다. 그는 마니교에서 신플라톤주의로 개종합니다. 마니교는 이 땅에서는 구원이 없고 하늘 천국만 구원으로 인식하는 종교인데, 선한 의지를 통해 행복하게 살며 신에게로 가는 구원이 있는 신플라톤주의로 개종했습니다. 그는 신플라톤주의자인 포르피리우스, 플로티누스, 키케로 등 저술들을 탐독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기독교로 개종했습니다. 그는 신플라톤주의 사상을 지니고 바울 서신들을 읽었습니다.(*1)
그는 한 번도 신플라톤주의에서 벗어난 때가 없습니다.(*2)
흔히, 기독교가 4 세기 코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로마 국교가 되면서 일탈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일탈하게 된 신학이 무엇인지 말하는 신학자가 전혀 없습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사회 지배층과 기득권층으로부터 차별과 억압 속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과 법 밖에서 고통받고 있는 소외자들에게 자유와 평화를 부여함으로써 세상을 구원하는 민중 종교임에 반하여, 아우구스티누스는 황궁 교사 출신이고 당시 지배층 철학인 신플라톤주의 자로서 제국에 봉사하는 어용 신학자 입니다.
그에 의해서 5 세기에 지배자와 기득권층을 위한 신학이 정립되었습니다.
신플라톤주의는 지식과 영성 물질은 일자一者인 신에 더 가깝고 다른 물질은 신에게서 더 멀다는 위계와 서열을 존중하는 세계관으로서 평등을 주장하는 기독교와는 다른 세계관 입니다.(*3)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대박해 때에 성서를 불태우거나 예수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았습니다. 도나투스파는 303 년에서 305 년 사이에 일어난 대박해를 꿋꿋하게 견딘 사람들 후예 입니다. 그들은 가톨릭 교회가 로마 제국과 결탁하여 권력화되었으며 교인들과 감독들이 신앙 지키지 못한 것을 추궁했습니다. 배교 후에 돌아온 70 여 명 사제로부터 세례받거나 가르침을 거부했습니다. 강경론자들은 316 년에 카르타고에서 도나투스(? - 355)를 새 감독으로 임명했습니다. 이로써 북 아프리카 교회는 감독이 두 사람이 되었고 그 후 100 여 년 간 내분에 휩싸였습니다. 도나투스파는 농민과 노동자들로부터 전폭 지지를 받았습니다. 이들은 지주들과 제국에 근심이 되었습니다. 411 년 황제를 대리한 가톨릭 아우구스티누스와 도나투스 대표 간 밤샘 협상이 결렬되고,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 군대의 도나투스파 학살을 승인합니다.
우리는 아우구스티누스 신학 전반을 검토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신학 중에 무엇이 성서와 다른지를 찾아봅니다.
1. 아우구스티누스 신학 중심은 향유(享有enjoy)와 이용(利用use) 입니다. 하나님 통해 즐거움 얻는 게 향유고, 하나님께로 가기 위해 세상을 도구로 사용하는 게 이용 입니다.
이것이 전형적인 신플라톤주의 사상이고 기독교와 반대 사유 입니다.
그런데, 그는 사람들이 거꾸로 하나님을 이용하고 세상을 즐긴다고 한탄합니다.(*4)
신앙인들이 잘하고 있는 사실을 한탄합니다.
이용이라는 말이 좀 그렇지만, 하나님 통해서 세상에서 기쁨과 평화하게 사는 게 기독교 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 첫 기적으로, 예수께서 혼인 잔치에서 술이 떨어지자 정결 예식에 쓰는 6 항아리에 고급 술 만들어 주신 걸 증언합니다.(요한2장) 종교 억압에서 벗어나 기쁘고 평화하게 살라는 뜻 입니다.
바울도 우리가 사는 이 땅에서 하나님나라는 기쁘고 평화하게 사는 나라를 말한다고 합니다.(로마14:17)
세상에서 즐거움 얻으면 안된다는 인식과 우리가 죄인이라는 아우구스티누스 사유가, 기독교가 세상을 악하게 인식하는 단초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기성 교회가 세속화 되었다며 보다 더 금욕과 경건으로 신앙하기 위해 기성 교회를 떠난 사이비등 유사 기독교 그리스도인이 3 백 만 명 입니다.
실은, 기성 교회도 세상에서 즐거움 얻는 오락, 놀이, 문화 예술을 죄악시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신앙 양태에 대한 반 작용으로, 자기들은 예수로부터 자유함을 얻었다고 하면서 책임은 회피하는 구원파 그리스도인이 2 백만 명 입니다. 기독교가 이 지경이 된 연유가 아우구스티누스로부터 인데 신학자들은 그를 신학 아버지라 칭송하니 이 노룻을 어찌합니까?
신학자들은 인식하지 못하는 걸 인문학자들이 깨달은 게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한나 아렌트는 하이데거 지도로 아우구스티누스 사랑 연구를 통해 박사 학위 받았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아우구스티누스에게는 하나님 스스로 인간이 되셨다는, 말씀이 육신이 되신(요한1:14) 하나님 개념은 전혀 없다 라고 합니다.(*5)
그 때문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예수와 함께 하나님나라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없었습니다.
머, 한국 교회성당도 아직 이 땅 우리 삶에서 이루어가는 하나님나라를 모릅니다. 그러한 연유로 그리스도인에게서 예수사랑이 전혀 작동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새상을 심판하려함이 아니라 구원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없었습니다.(요한3:16-17)
이때부터 기독교는 역사 예수께서 이 땅에서 하나님 계시를 사역하고 가르치신 것이 무엇인가를 탐구하지 않고 철학으로 신이 누구이며 어떻게 믿고 하늘 천국에 가는가에 중점을 두게 되었습니다.
20 세기가 되기까지 역사 예수에 대한 탐구가 없었습니다. 한국 교회성당은 아직도 역사 예수에 대해선 관심 없습니다.
역사 예수 탐구가 주 특기인 필자 스승 안병무 박사가 하나님이 육신이되셨다를 강조하면서 신이 살(사르케)이 되었다고 '사르케'를 강조하던 강의가 생각납니다.
2. 2 세기 교부 유스티누스(Justin)는 신플라톤주의에서 기독교로 개종했습니다. 그는 플라톤 신 개념을 따라서 선善 관념(이데아)이 하나님이라고 합니다.(*6)
아우구스티누스도 아리스토텔레스가 신은 최고선最高善이라한 데 따라서 하나님 본질은 선善이라고 합니다.(*7)
그는 선에 참여하고, 선을 넘어서, 선에 참여한 선 자체를 봄으로써 하나님을 본다고 합니다.(*8)
그는 신에게 올라가는 선善이 목표 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플라톤주의를 통해서 금욕하며 경건한 생활을 했지만 그것이 신에게로 가는 길이라는 막연한 기대에 있다가 기독교로 개종하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다만, 그는 신플라톤주의에서 선으로 가는 행위에서 교만을 보았는데 예수그리스도에게서 겸손을(humility) 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모방하십시오 하나님 사랑은 인간 교만을 치료하는 해독제 입니다 라고 합니다.(*9)
그는 신앙을 통해 도덕과 선을 겸손으로 이루기 원했지만, 사실 그것은 허망한 바램 입니다. 그는 신플라톤주의와 예수그리스도를 양손에 같이 쥐려고 했습니다.
이로써 기독교는 계시를 떠나 도덕 종교 길로 가게 되었습니다.
신플라톤주의 선善을 통해 신에게로 가는 사상은 자그레브 신화에 의한 영향 입니다.
여러 버전이 있는데, 제우스 신이 자기에게 반항하는 5 아들을 불태워 죽인 재로 인간을 만들었습니다. 인간에게는 그 재에 남아 있는 '신성한 불꽃'이 있어서 인간 속에 있는 그 '산성한 불꽃'인 선을 찾는다는 원리 입니다.
성서는 하나님은 선善이 아니라 사랑이라고 합니다.(요일4:8) 성서에 하나님이 선善이라는 구절은 전혀 없습니다. 사랑은 상대를 포용하고 용납하지만 도덕과 선善은 상대가 선하지 않음을 인식해야 내가 선함을 알 수 있습니다.
도덕과 선은 차별과 배제를 일으킵니다.
나는 이제껏 교회에서 도덕적이고 경건한 신앙인이 사랑 많음을 보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 난폭성은 신을 선善 안에 가두었기 때문 입니다. 자의恣意 판단에 의해 선善하지 않은 사람은 모조리 배척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신을 선善이나 사랑으로 한정할 수 없습니다. 신을 한정하는 습관은, 코페르니쿠스 이전에 지구가 우주 중심이라는 결정론 세계관에서 온 습관 입니다. 오늘날 양자역학 세계관은, 세계가 불확정 원리로 섭리된다고 고백함이 적절합니다. 불확정 세계관에서 우연은 자기 멋대로 일어남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연은 하나님 사랑과 자유 안에서 하나님 섭리로 이루어가는 사건 입니다.(칼 융)
결정론 세계관은 우리를 강박하게 만들어 타자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하나님이신 예수그리스도가 저항한 사람 류를 우리도 저항합니다.
신에 대한 문제는, 부분은 전체를 담을 수 없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신에 대해 알 수 없고 언어로 표현 할 수도 없습니다.
예수께서 성서를 통해 계시하신 현실에 우리가 참여함으로써 알아 가는 과정 입니다.
글이 길어져서 다음회로 이어갑니다.
하는 김에 더 파보겠습니다.
여러분과 가정에 평화가 !
1. 프리스, 크레취 마르 신학의 고전 정지련 대한기독교서회 서울 2008, 128-134p
2. G 로핑크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정한교 분도출판사 서울 1985, 304p
화이트헤드도 과정과 실재에서 그렇게 말합니다.
3. 폴 E 카페츠 그리스도교의 신 역사적 개관 김지호 도서출판 100 고양시 2021, 78p
4. 같은 책, 79p
5. 한나 아렌트 사랑 개념과 성 아우구스티누스 서유경 도서출판 텍스트 서울 2013, 65p
6. 에띠엔느 질송 중세 철학 입문 강영계 서광사 서울 1987, 28p
7. 어거스틴 아우구스티누스 : 후기저서들 공성철 두런노아카데미 서울 2011, 56p
8. 같은 책, 6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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