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삶을 떠나다
4. 5 세기에 성서와 다른 신학이 정립되다 2
20 세기 들어서면서 학문이 세분화 되었습니다. 대학 수익성을 위해 학과를 새분화해서 교수와 학생 수 늘리기 위한 방책입니다. 전문성은 강화되었지만 통합 사유가 어려워졌습니다. 일반 학문은 융합하려는 시도가 일어나고 있는데 반해서 신학은 요원합니다. 우리는 옛날과는 비교할 수 없는 새로운 세계관으로 삽니다. 근대가 오기 전까지는 결정론 세계관이지만 지금은 양자 역학 세계관으로서 불확정 세계관 입니다. 이렇게 통합적이지 못하고, 옛 세계관으로 해석한 신학이 젊은이들을 비롯한 현대인에게 공명을 줄 수 없습니다.
우리 시대에, 우리 땅에서, 우리 삶을 위한 성서 해석을 위해 그동안 신학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탐구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 믿음 이해
2 세기 교부 클레멘스는 그리스 철학인 스토아 인식론에 따라서 믿음을 예수그리스도가 요구하는 변화된 삶이 아니라, 개념(관념)에 대한 '동의어'로 이해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사상을 이어받아 믿음을 교리에 대한 동의와 이것을 전하는 권위에 대한 동의로 발전시켰습니다.(*1) 이 기조가 라틴 스콜라 신학과 종교개혁 신학으로 이어지고, 오늘날까지 이어집니다.
믿음은 충족되지 않습니다. 확신이란 단지 의심 앞에서 눈 감고 있는 현실 입니다.(*2)
신 없이 살며 과학이 신앙이 된 세속 사회에서,
이성 중심주의 즉, 요즘 유행어인 확증편향은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을 빼앗기는 꼴 입니다.
정확성은 하나 견해 입니다. 그러나 모호성은 다수 견해를 찾을 수 있는 가능성 입니다.(3)
우리는 옛 사고 체계에 묶여서 가장 단순하고 간명한 우리 눈에 보이는 평범한 현실이 주목받지 못하고 개념으로 숨어있는 사실이 주목받는 현실에서 삽니다.(*4)
아우구스티누스와 펠라기우스 논쟁
펠라기우스는 로마 사제들 극심한 부패와 타락을 보면서 도덕 신학을 주장합니다.
신학자들은 아우구스티누스가 펠라기우스 도덕 신학을 물리치고 은혜 신학을 세웠다고 말합니다. 신학생 때 그렇게 배웠지만, 지금 생각은 다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도 도덕 신학임에 틀림 없습니다. 그가 신플라톤주의 자인 것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유대교도 은혜 종교고, 펠라기우스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은혜에 충실한 신앙인 입니다.
다만, 펠러기우스는 인간성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혐오했습니다. 그에게는 니체와 칼 마르크스 처럼 인간성에 대한 지나친 신뢰가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이란 하나님 은혜를 구하는 죄인으로서 무기력한 인간 입니다. 그래서 펠라기우스 보다는 하나님 은혜를 강조합니다.
그러나 대게 사상가들이 그러하듯이 아우구스티누스는 다중적 입니다.
무기력한 죄인이면서도 신플라톤주의에 따라 신에게 가는 덕을 말합니다.
바울과 차이가 바로 여기 입니다. 바울은 신에게 가는 덕을 말하지 않습니다. 신이 우리에게 오는 은혜 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에게 가기 위한 사랑을 말하지만, 바울은 하나님 사랑하시는 현실에 내가 참여하는 사랑을 말합니다. 바울은 인간 노력을 배제하고 신 은혜를 강조함으로써 인간 서로 화해와 평화를 이룹니다.(엡2:9)
펠라기우스에게 예수그리스도는 교사와 모범자로 나타납니다. 그에게 그리스도는 죄 사하는 은혜 베푸는 분이지만 하나님 의를 행하고 지혜롭게 살도록 가르치는 분 입니다. 반면, 아우구스티누에게는 예수그리스도가 하나님과 우리를 맺어주는 중보자요 구원자 입니다.(*5) 아우구스티누스는 펠라기우스 모범 기독론을 물리치고 기독론을 관념화, 영성화, 심령화했습니다.
역사에서, 신학 논쟁은 언제나 권력 투쟁 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펠라기우스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권력을 쟁취했습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승자는 영웅시하고 패자는 악마화하는데 익숙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영웅이었고 펠라기우스는 악한 사람이 되었습나다. 이후로 아무도 펠라기우스 모범 기독론을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땅에 오신 예수 즉, 역사 그리스도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예수 즉, 관념 그리스도를 신앙했습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우리 구원자라는 사실이 예수 따르는 삶을 잊게한 아우구스티누스 신학은 기독교 비극 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죄론
아우구스티누스 죄 이해가 성서와는 다르게 시작되어 도덕주의가 기독교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는 善의 결핍, 곧 인간 의지 타락을 죄로 인식합니다. 이 기조가 루터에게도 이어지고 현대 신학자들에게도 이어져서, 신학자들은 죄를 신에 대한 '구부러진 의지'라고 합니다.(김영한 김세윤) 일상 범죄가 성서에서 말하는 신앙 죄와 결합되었습니다.
인간 의지로 죄를 이길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죄론은, 믿음을 신플라톤주의에 따라 의지 문제로 파악한 결과 입니다.
그래서 교회성당은 회개 기도하라고 매번 다그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바울처럼 죄를 독립된 실체로 보지 않습니다.
바울은 죄가 영 세력 입니다.(로마서7장)
죄를 영 세력으로 보지 않고 의지 문제로 본 아우구스티누스 죄 이해가 바울 신학과 크게 다르고, 인간 한계를 절감하고 신 은혜를 구하는 기독교 정신에서 크게 벗어난 신학 입니다. 인간 의지가 아니라 신에게 구하는 길만이 인간 교만을 벗어나고 생명과 자유, 평화를 얻을 수 있는 길 입니다.
이 길이 얼핏 보면 미신 같고 비 과학으로 보일 수 있지만, 이 길만이 인간 탐욕을 버리고 서로 화해 평화할 수 있는 길 입니다.
바울은 이성 의지 중심으로 하나님 신앙하는 중에 갈등과 증오 경험하다가 예수그리스도 만나고 화해 평화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에덴 동산 이야기에서 '원죄론'을 만들었습니다. 이 원죄론은 이야기 생산자인 유대교에 없고, 기독교 다른 축인 동방 정교회에도 없습니다. 원죄론은 아우구스티누스의 하나 견해 입니다.(기독교 죄에 대하여, 원죄는 있는가 항에서 자세히 설명합니다 필자 계정에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죄를 인간 정욕과 결부시켰습니다. 아담 원죄가 부모에게 이어져서, 나에게 온다는 식 입니다. 우리는 육신 정욕을 통하여 이 세상에 온 자들로 아담과 함께 유죄 판결 받았다고 합니다.(*6)
이러한 성 인식은 구원을 저 세상 피안 문제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성 욕구를 죄악시 했으나 인간은 여기서 결코 벗어날 수 없습니다. 교회성당은 인간은 결코 이러한 죄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 진노를 당하게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사람들은 절망적인 죄 결과로부터 구원받어야할 필요를 느꼈습니다.(*7) 그래서 구원이 성서에서 증언하는 바 데로 우리가 사는 이 땅에서가 아니라 저 세상 피안에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성욕은 식욕과 함께 인간 생리 욕구 입니다. 식욕처럼 관리 대상이지 죄악이 아닙니다.
버트란트 러셀은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아닌가'에서 기독교가 성욕을 죄악시해서 자기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합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죄를 인간 억압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언급했는데, 아우구스티누스와 그를 이은 오늘날 신학자와 목사신부는 인간을 지배하고 통제하기 위하여 죄를 인간 억압 수단으로 이용합니다.
그래서 매번 삶에 대한 회개(변화되어 가는 삶)가 아니라 회개 기도하라고 다그칩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사랑 개념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웃 사랑과 자선 행위가 죄를 씻어 준다는 원시 기독교 믿음을 받아들였습니다.(벧전4:8)
그는 이웃 사랑이 하나님께 가는 동기 입니다.(*8)
이것은 신플라톤주의 구원 방법이고 에로스 사랑으로 얻는 구원 질서 입니다.(*9)
그는 하나님 은혜를 말하면서 사랑이 선행으로서 덕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데 아무런 불편이 없습니다. 그가 신플라톤주의 자이기 때문 입니다.
한나 아렌트는 그가 그리스 철학에 따라 마음에서 신 발견을 찾는 내면 성찰을 주장하면서, 이웃 사랑도 주장하는 것은 특이한 현상 이라고 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세계를 등지고 자기 내면에서 신 만나는 인식과 세계 안애서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모순이 동시에 일어나는데, 이 모순을 무시하고 이웃 사랑하는 사회 일반 개념을 따랐다고 합니다.(*10) 남에게 대접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태7:12) 자신에게 원하지 않는 바를 남에게 하지 마라가 인류에게 공통된 사회 일반 개념 입니다. 황금률이라고 합니다.
바울이 선한 일을 하면서 내 안에서 신을 찾는 성찰이 아니라 하나님 은혜를 말하며 이웃 사랑을 말하는 것은 교만하지 않기 위해서 입니다.(엡2;9)
기독교는 세계를 떠나 내 안에서 신을 찾고 성찰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이것은 기독교를 제외한 모든 종교가 추구하는 길 입니다.
기독교는 세상 속에서 역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구원 사역에 동참함으로써 구원받는 종교 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가 치유되기 전에 사랑해서는 안된다고 합니다.(*11)
사랑하기 전에 자신이 정화되어 있어야 한다는 게 신플라톤주의 사유 입니다.
그는 하나님은 우리 안에 계시다. 우리는 그것을 우리 안에 양심이 있음을 알게 됨과 같은 방식으로 알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요한복음에 관한 논고 24, 5)
신이 내 안 마음에 있다는 사상은 그리스 사상과 같습니다. 그리고 자기 성찰을 이루기 위한 노력은 기독교를 제외한 모든 종교 사유 입니다.
신이 내 안 마음에 있다는 사유는 하나님나라가 우리 삶이 아니라 내 마음에 있다는 생각으로 발전하여 저 세상 피안 구원을 기대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나라를 실제 우리 삶이 아니라 심령, 관념, 영성으로 이해하는 믿음은 아우구스티누스로부터 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펠라기우스보다는 강화된 하나님 은혜를 말하지만 바울과는 상당히 다른 은혜론을 말합니다. 결국 그는 바울 은혜 신학을 땅에 묻었습니다.
바울 신학은 천 년 동안 묻혀있다가 16 세기에 루터에 의해 발굴 됩니다.
실용주의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는 아우구스티누스와 루터가 우울한 인간형이라서 이 우울이 기독교에 짙게 깔려 있다고 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에는 일상 삶이 죄로 고백되는 내용이 허다합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는 이 세상은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빌어야 하는 세상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서 참 생명과 자유, 평화를 향유(享有enjoy)하는 세상 입니다.
우리가 서구 신학을 따라야할 이유가 1 도 없습니다. 그것도 성공한 신학이 아니라 천 오백 년 동안 성공하지 못한 신학 입니다.
신학이란 자기 시대 고백 입니다.
우리가 성서로 가야 하는데, 저마다 성서로 간다고 하지만 성서는 위험한 글 입니다. 바른 성서학자가 해설한 해설서와 함께 읽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 삶에서 예수그리스도가 주시는 참 생명과 자유, 평화를 얻는 게 믿음 길 입니다.
축 성탄,
여러분과 가정에 평화가 !
1. 볼프하르트 판넨베르그 판넨베르그 조직신학 3 신준호 새물결플러스 서울 2019, 243 - 244p
2.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철학적 탐구 이승종 아카넷 파주시 2916, 642
3. 같은 책, 142 - 145p
4. 같은 책, 162 - 163p
5 . 김동건 그리스도인의 역사 대한기독교서회 서울 2018, 393p
6 . 같은 책, 386 - 387p
7. 존 캅 영적인 파산 박만 한국기독교연구소 2014, 79 - 80p
8. 마르틴 부버 인간의 문제 윤석빈 도서출판 길 서울 2007, 79 - 80p
9. 같은 책, 487 - 488p
10. 한나 아렌트 사랑 개념과 성 아우구스티누스 서유경 도서출판 텍스트 서울 2013, 91p
11. 게리 윌스 성 아우구스티누스 안인희 푸른 숲 2005 199 - 20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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