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마 21장 1-11절 오늘은 교회력으로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이 그의 공생애의 마지막 주간을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므로 시작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입성을 백성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길에 펴고, 손에 들고 흔들어 환영했습니다. 여기서 종려주일의 명칭이 유래했습니다. 따라서 종려주일은 고난주간이 시작되는 주일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성도들은 이 종려주일로부터 일주일을 고난주간으로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며 보내게 됩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세지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 본문의 정황을 먼저 살펴보자. 1절 상반절 감람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감람산은 예루살렘 성의 동쪽에 위치한 산이다. 벳바게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베다니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목에 감람산의 기슭에 위치한 마을로 생각이 된다. 예수님은 벳바게에서 두 제자를 마을로 보내시어, 나귀새끼를 끌고 오게 하셨다. 제자들은 나귀를 끌고와서, 자신들의 겉옷을 벗어서 나귀 위에 얹었고, 예수님은 나귀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셨다. 벳바게에서 예루살렘 성까지는 직선거리는 1km가 조금 넘는 거리였고, 벳바게와 예루살렘 사이에는 기드론 꼴짜기가 있었다.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서는 기드론 골짜기를 따라 내려가서, 다시 예루살렘성으로 올라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교회에서 출발해서 한샘약수터 정도까지 올라갔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얼마 정도의 시간이 걸렸을까? 새끼 나귀의 보통 걸음으로 30분정도? 그런데 그냥 갈 수 없었다. 왜? 환호하는 무리들로 인해서... 따르는 무리들이 얼마나 되었을까요? 8절의 '무리들 대부분은'을 직역하면, '아주 많은 무리들', '매우 큰 무리'라는 뜻으로, 예수님을 따른 무리들의 수가 상당히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이 무리들이 예수님을 앞에서 뒤에서 따랐다. 요한복음에 보면 요 12:12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 함을 듣고 13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큰 무리가 예수님을 맞으러 나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골짜기로부터 언덕으로 난 길을 따라 나귀를 타고 올라가실 때, 아주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따라가며 열열히 환영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으로 오신다는 소문을 듣고 마중나온 무리들이 합세했다. 학자들에 의하면 유월절 행사 기간 중에 예루살렘에는 2백만 이상의 유대인들이 모인다고 한다. 예수님이 입성할 당시 예루살렘은 말 그대로 인산인해였다. 2백만이 넘는 사람 중에 상당 수가 예수님의 입성을 환호하며 따랐다고 보면, 환영하는 인파는 적어도 수만명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 무리들이 어떤이는 자신의 겉옷을 벗어 예수님이 가시는 길에 깔았고, 또 어떤 이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베어 길에 깔았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겉옷과 종려나무를 밟으시면서 예루살렘 성으로 올라가셨다. 그리고 무리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이렇게 생각하시면 된다. 사직동 월드컵 경기장에서 6월 4일 한국과 폴란드가 축구 게임을 한다고 상상을 해 보라. 5만 4천의 관중이 입추에 여기자 없이 꽉 들어찼다. 운동장 거의 2/3가 붉은 색으로 가득 채워졌다. 그런데 전반 내내 졸전을 펼치다 결국 1대0으로 뒤진채 마쳤다. 후반전, 답답한 상황의 연속 가운데 40분경 결정적인 찬스를 잡은 황선홍이 멋진 슛으로 동점골을 성공시켰다. 온 구장 안에 태극기의 물결, 그리고 환호성!!!! 그런데 그기에서 끝이 아니다. 종료 직전 문전 혼전 중에 황선홍의 발이 움직이는 순간 드라마와 같이 역전 결승골이 골네트를 갈랐다. 그때 온 경기장 안의 분위기가 상상이 되는가? 미친듯이 발을 구르며 자리에서 일어나 서로 얼싸안고, 옷을 벗어서 흔들고, 태극기를 흔들며, 떠나가도록 외치는 함성 소리가 상상이 되는가? '황선홍' '황선홍' 여러분 그 광경을 상상해 보라. 바로 그 장면을 생각하면서 오늘 본문의 광경을 떠 올리면 된다. 10절에 보니까 환영 인파의 물결과, 환호성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온 예루살렘 성이 소동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소동했다는 단어는 땅이 흔들리는 상태를 의미한다. 예수님의 입성으로 인해 예루살렘 성이 진동한 것이다. 모인 수많은 군중들 사이에 급속도로 예수님의 이름이 퍼져 나갔다. 예수님이 주로 갈릴리 지방에서 사역을 하셨으므로, 예수님을 아직도 잘 모르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흩어진 디아스포라 가운데 예루살렘을 찾은 순례객들도 예수님을 잘 알지 모를 수 있다. 그들에게 예수님의 등장은 실로 충격이었다. 온 성안에 이 외침 소리가 가득찼다. '이는 누구뇨?' 요즘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노무현 바람이 부는 것처럼, 성안에 바람이 불었다. 예수 바람! 이것이 본문의 정황이다. 본문의 분위기가 그려지는가? ● 자 그렇다면 왜 그렇게 무리들이 환호했을까? 무리들이 예수님께 취한 태도를 통해서, 그 이유을 발견할 수 있다. 8절을 한 번 읽어보자. 마 21:8 무리의 대부분은 그 겉옷을 길에 펴며 다른 이는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겉옷을 펴는 것은 왕에 대한 충성을 나타낸다. 구약에서 예후가 왕이 될 때 이런 행위가 있었다. 왕하 9:13 무리가 각각 자기의 옷을 급히 취하여 섬돌 위 곧 예후의 밑에 깔고 나팔을 불며 가로되 예후는 왕이라 하니라 -나무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여기서 '나무가지'는 '종려나무가지'였다(요12:13). 요 12:13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그런데 종려나무 가지는 보통 승리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계 7: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그래서 주로 왕이 지나는 길에 펴놓거나 그것을 들고 흔들었다. 결국 무리들이 종려 나무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또 흔든 것은 예수님을 왕으로 환영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무리들은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환영하고 있는 것인가? 왕으로 환영하고 있다. 자 그런데 9절에 보니까 예수님을 향해 무리들이 지르는 함성이 있다. 마 21: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이 함성에도 의미가 있다. - '다윗의 자손이여'라는 환호에는 예수님이 다윗 왕의 후손이라는 인정뿐 아니라, 메시아이길 희망하는 기대가 담겨 있다. 이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환호성은 시편 118:25-26에서 따온 것이다. 시편 113-118편을 할렐 시편들이라고 하는데, 유월절 축제 기간에 정기적으로 낭송되었던 시였다. 유월절이 무엇을 기념하는 절기인가? 이스라엘의 애굽의 압제에서 탈출한 것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그런데 바벨론의 침공으로 멸망을 당해, 나라없은 설움 속에서 헬라와 수리아, 그리고 로마의 압제를 계속해서 받아오던 유대인들에게 유월절은 민족의 해방을 대망하는 절기로 의미가 부여 되었다. 유월절에 낭송되었던 이 시편들의 내용은 순례객들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노래였고, 이 시편에는 그들의 간절한 소망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높이 외치던 '호산나'는 '구원하소서'란 뜻이 아닌가? 무리들의 함성은 이것이다. '다윗의 자손이여 하나님이 보내신 바로 그 메시야이신 예수님! 이제 우리를 구원하소서' 무리들은 지금 예수님을 왕으로 환영하고 있다. 또한 예수님을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구원할 하나님의 메시야로 환영하고 있는 것이다. 즉 오랜 메시야 대망을 가졌던 무리들은 예수를 정치적인 메시야로 인식하고 그가 당장에 예루살렘에서 왕위에 올라 이스라엘을 압제와 고통에서 해방시킬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우리의 왕으로 오시는 당신을 환영합니다. 당신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킬 메시야로 환영합니다. 어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다윗의 무너진 왕조를 회복하시고, 이스라엘의 영광을 회복시켜 주소서. 이것이 무리들이 예수님을 향해 함성을 지른 이유였다. ● 옹위하는 무리들 속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섞여 있었다. 제자들은 지금 굉장히 흥분된 상태이다. 왜냐하면 평소와 다른 예수님의 모습을 접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자들의 마음 속에는 예수님에 대한 기대가 있다. 예수님이 세례요한의 제자들과 나눈 대화가 있다. 마 11:2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3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선지자로부터 예언된 메시야가 행하실 일들 사 35:5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6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사 61:1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요한의 질문에 예수님은 바로 내가 그 예언된 메시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소경을 보게 하시고, 귀머거리를 듣게 하시고, 앉은뱅이를 걷게 하시고, 벙어리가 말하게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므로 자신의 메시야 되심을 증거하셨다. 제자들은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이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마침내 이분이 오실 메시야이심을 확신했다. 그리고 예수님을 다윗의 왕조를 회복할 이스라엘의 왕으로 옹립할 것을 결심했다. 대권을 향한 도전이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메시야이심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항상 자기를 숨기려는 태도를 취했다. 병을 고쳐 주신 후에도 아직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지 말라고 말씀하시고, 높아지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시고, 한번은 많은 무리가 와서 그를 억지로 왕으로 세우려고 할 때 예수님은 그들을 피하여 다른 곳으로 도망을 가버리기도 하셨다. 제자들이 보기에는 이것이 너무나 이상했다. 능력도 있고 인기도 있고 기회도 주어졌는데, 왜 예루살렘으로 가셔서 메시야 시대의 도래를 선포하지 않으실까? 왜 왕으로 군림하지 않으실까? 그런데 오늘은 예수님의 태도가 그와는 정반대였다. 제자들을 시켜서 나귀새끼를 가져오라고 말씀하셨다. 구약의 예언대로 나귀를 타시고, 왕의 모습으로 예루살렘에 들아가시면서, 무리들이 즐거이 부르는 호산나와 찬양을 받으셨다. 누가복음 19장에 보면(눅 19:40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하시니라), 어떤 바리새인이 이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해서 제자들을 책망하려고 할 때 주님은 "만일 이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오늘 왕으로 말씀하고 행동하고 계신 것이다. 제자들은 흥분했다. 드디어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드디어 예수님이 왕으로 로마를 몰아내고 이스라엘을 회복하시기 위해, 행동하시기 시작하신다고 생각했다. 마 21:7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제자들이 가장 먼저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하는 표를 했다. 그들의 마음에 이제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왕이셨다. 환호하는 무리들 속에서 그들을 황홀했다. 상상의 나래를 폈다. 화려한 예수님의 대관식, 그 자리에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려한 의상으로 높은 단상에 도열한 자신들의 모습을 상상했을 것이다. "이제 수고는 끝났어, 조롱과 수치와 배고픔과 가난과 무시는 다 끝났다." "이제 부귀와 영광과 안락과 연락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제자들은 이런 꿈으로 한껏 부풀어 있었을 것이다. ● 그런데 여러분! 사랑하는 제자들의 동행 속에서, 자신을 향해 환호하는 수많은 무리들 속에서, 홀로 외로이 탄식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하나님의 메시야로 만왕의 왕으로 입성하시나, 그러나 그 입성은 세상 임금의 입성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하늘과 땅과 땅 아래의 모든 만물을 통치하시고, 그 나라를 제자들에게 주시지만, 그러나 그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나귀 새끼를 타심으로 나타내셨다. 나귀는 사람이 타거나 짐을 실어 나르는데 사용되었다. 그리고 겸손과 평화를 상징하는 동물이다. 왕들은 나귀를 타지 않았다. 나귀는 일반 평민들이 타는 동물이었다. 그러므로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온다는 것은 이 세상의 임금들과 다른, 예수님이 겸손과 평화의 왕이심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스가랴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대로 되어진 일이었습니다. 스가랴 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슥 9:10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정권은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예수님은 평화의 왕으로 세상에 평화를 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기에 그분은 평화를 상징하는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고, 죄악으로 인해 참된 평화를 잃어버린 세상에 평화를 주기 위해 평화의 왕으로 입성하셨습니다. 그 평화는 전쟁으로 무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압제자에게 받은 그대로 더 큰 힘으로 짓밟고 보복함으로 임하는 평화가 아닙니다. 그 평화는 십자가를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엡 2: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15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만이, 죄로 막힌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담을 허시고, 원수된 관계를 회복하실 수 있음을 아셨기에, 섬김을 받는 왕이 아니라, 겸손히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내어 주시는 겸손의 왕으로 입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영광을 위하여 나아가시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수치와 고통과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20:17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실 때에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길에서 이르시되 18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19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능욕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하리니 제 삼 일에 살아나리라 마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그러나 아무도 예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세상의 욕망으로 가득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십자가를 향한 결단의 한 걸음 걸음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환호하는 군중들도,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제자들도 예수님의 마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예수님은 긴여정의 마무리를 향해 가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여정은 나사렛에서부터 예루살렘까지 정도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늘 위에 지극히 높은 보좌에서, 이 낮고 낮은 땅에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골고다 십자가를 향해서 지금 나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도대체 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의 영광을 버리시고, 낮고 낮은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죄인들과 같이 되셨을 뿐 아니라, 수치와 모욕과 저주의 고통스런 십자가를 향하십니까? 왜 수많은 동족들이 환호하며, 자신의 왕으로 영접하며, 군림하며 절을 하는 그 자리에서, 묵묵히 저주의 십자가를 향하십니까? 도대체 왜? 무엇 때문에? 바로 우리들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죄의 저주로부터의 해방과 평화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베드로전서 3장 18절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벧전3:18) 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여러분!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십니까? 바로 저와 여러분 때문입니다. 조금만 손해를 봐도 예수님을 원망하는 우리 때문입니다. 조금만 바빠도 예수님이고 교회고 사역이고 다 내 팽겨쳐 버리는 우리 때문입니다. 모든 것, 목숨까지 다 주신 예수님 앞에서, 그 예수님을 위해서 아무것도 내어놓지 않으려는 지극히 이기적인 우리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발을 씻으시고, 이제는 나를 대신해서 지체를 사랑으로 섬겨라 하신 예수님 앞에서, 나와 맞지 않다고 지체를 비난하고 헐뜯고 여전히 욕하는 우리 때문입니다. 우리자신 위해서는 우리 가족을 위해서는 시간과 돈과 정열을 아낌없이 다 사용하면서, 예수님을 위해서 몸된 교회를 위해서는 조그만 것 드리는 것도 벌벌떠는 아까와하는 우리들 때문에, 이 부족한 우리들 때문에 이 패역한 우리들 때문에 예수님은 십자가를 향해 묵묵히 나아가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당신의 십자가로 인해 죄사함을 누리고 하나님과 화목하는 복을 누릴 우리들을 위해서 입니다. 십자가의 사랑 앞에서 굴복하므로,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위해 생애를 던질 우리들의 가능성을 위해서입니다. ●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나아가십니다. 군중들의 환호속에서, 제자들의 흥분 속에서 무엇을 발견하십니까? 종려나무를 흔들며 환호하는 무리들 속에 바로 나의 모습이 들어 있지 않습니까? 나귀새끼에 겉옷을 걸쳐주며 헛된 욕망으로 가득차 있는 제자들의 모습에서 나를 발견하지 않습니까? 십자가를 향해서, 자신의 몸과 피와 물을 다 쏟아서, 바로 우리들의 구원과 평화를 주시고자 나아가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 예수님을 기억하는 이 종려주일을 지키며 나는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의 욕망이 내 안에 가득차 있습니까? 높아지고자 하는 욕망이 나를 지배하고 있습니까? 섬김을 받고자 하는 마음이 여전히 나의 마음입니까? 나의 바람은 오직 물질적인 회복입니까? 세상적인 회복과 성공을 바라며 예수님을 따르고 있습니까? 여러분! 예수님은 십자가를 향하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눅 9:23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십자가를 향한 그 길에, 사랑하는 제자들, 그리고 수많은 군중들이 있었지만, 예수님은 홀로 그 길을 가셨습니다. 외롭게 십자가의 길을 걷는 그분의 옆에 이제 여러분이 함께 걷으시지 않겠습니까? 십자가의 길을 함께 걷는 일주일이 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는 한 주간이 됩시다. 그리고 이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십시오. 예수님! 왜입니까? 왜 십자가입니까? 예수님의 이 한마디를 들으십시오. "바로 너 때문이다. 바로 너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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