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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자를 향한 책망 (요한계시록 3:14-22)

by 【고동엽】 2021. 11. 28.

사랑하는 자를 향한 책망   (요한계시록 3:14-22)


사람들 중에는 책망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고, 책망을 할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책망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고, 책망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누가 나에게 책망을 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복된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는 책망도 하지 않습니다. 또 나에게 가능성이 보인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 사람은 꾸지람이나 책망도 하지 않습니다. 포기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말하기를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나 책망이 없으면 그는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히 12:8).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을 때에 낙심하거나 이를 경히 여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히 12:5). 참된 신자는 하나님의 칭찬보다는 책망에 귀를 기울이는 신자입니다.

라오디게아는 빌라델비아 동남쪽 약 72km, 에베소에서 동쪽으로 약 160km 지점에 위치한 도시로서 라이커스(Lycus) 계곡에 있는 여러 도시들 중 하나입니다. 또한 맞은 편으로 10km 지점에는 히에라볼리가, 약 14km 지점에는 골로새가 위치해 있었는데 이 곳들은 바울 서신에서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곳입니다(골 4:13,16). 라오디게아는 유명한 의학교가 이름나 있었으며, 고대 세계전역을 통해 안질의 치료로 유명했습니다. 또 이곳의 특징은 교통의 요충지였을 뿐만 아니라 모직물 공업의 중심지였으며 소아시아에서 가장 부유하고 번창하는 도시중 하나였습니다. 그 도시는 전지역에서 주요한 금융 중심지였으며, 자신의 부를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자연히 소아시아에 있는 대부분의 도시들처럼, 그 도시도 쾌락에 미쳐 있었습니다. 3개의 극장과 3,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경기장은 라디오게아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라기보다는 쾌락을 사랑하는 자들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자연히 교인들도 부자였습니다. 넉넉하여 생활에 걱정은 없었으나 주님으로부터 칭찬은 한 가지도 듣지 못하고 책망만 받은 교회였습니다. 이 라오디게아 교회는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현대 교회의 모습이요, 이 시대에 신자되어 주님을 섬긴다고 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교회를 주님은 사랑하므로 책망하셨으니 오늘 아침 우리는 주님의 이 책망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1. 사람들이 다 아는 것 같으나 알지 못하는 것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지 못합니다.

교회는 다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기 때문에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경륜이 어디 있는지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선지자 호세아는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호 4:6)라고 탄식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아버지 하나님을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라오디게아 즉 의인이란 이름을 가졌으나 라오디게아 교인들처럼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은 것입니다.

이것은 열심이 없다는 뜻입니다. 주를 떠난 것도 아니고 신앙을 등진 것도 아닙니다. 가끔 교회는 나오지만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도 없고 하나님의 일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저 주일에 한 번 교회에 나오는 것으로 만족하며 삽니다. 기도회가 있건 말건, 주중에 성경공부나 전도프로그램이 있건 말건 관심 밖입니다. 토요일마다 교회당 청소는 누가 하는지, 새로 온 식구가 누군지 알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헌금위원이나 안내위원이 돌아와도 무관심하고 제직회가 있어도 한 번 참석해 본 일이 없습니다.

또한 이것은 신자의 특징이 없다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인지 불신자인지 잘 구별이 되지 않습니다. 어떤 분은 말하기를 차다는 것은 머리가 찬 것을 의미하니 지적인 신앙을 의미하는 것이요 뜨겁다는 것은 가슴이 뜨거운 것을 의미하니 정적인 신앙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냉철하게 배우든지 뜨겁게 기도하고 열심을 내든지 무슨 특징이 있어야 하는데 배우는 열심도 기도하는 열심도 없으니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둘째, 자기의 신앙적 형편을 바로 알지 못합니다.

정신병자가 자신이 정신병자인줄 알면 그 때부터 치료가 가능하다고 합니다. 신자가 자신의 신앙적 형편을 알고 있으면 신앙이 회복될 수 있고 올바른 신자가 될 수 있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 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그렇습니다. ‘나는 부자다’ ‘나는 부족한 것이 없다’ 하지만 사실은 곤고하고 가련한 신자요, 가난하고 눈이 멀었을 뿐 아니라 벌거벗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찾아왔던 부자 청년에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인간이 재물만 가지고 만족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부족한 것은 무엇입니까? 기도가 부족합니까? 말씀이 부족합니까? 봉사가 부족합니까? 아니면 겸손한 마음이나 순종이 부족합니까? 무엇이 부족한지 바로 알아야 합니다.

암이 무서운 것은 내가 모르는 사이에 온 몸에 퍼지기 때문입니다. 정기적으로 자주 건강진단을 받아 일찍 발견해야 하지 감각으로 느껴지면 이미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내 신앙 형편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의 척량자로 자주 진단을 받아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다는 착각 속에 삽니다.

셋째, 자기의 앞날도 바로 알지 못합니다.

오늘 밭을 갈지만 내일 씨를 뿌릴는지 알지 못합니다. 오늘 씨를 뿌리지만 누가 거둘지 모르고 사는 것이 인생입니다. 앞날이 궁금하여 점쟁이를 찾아가고 신령하다는 사람을 찾아가 예언기도를 받아보기도 하지만 그들도 자신의 앞날조차 모르고 사는 인생들입니다. 하나님은 인생의 앞날을 알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인생의 앞날은 그만두고 일기예보조차도 맞추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앞날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매자는 말을 많이 하거니와 사람이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신후사(身後事)를 알게 할 자가 누구이냐”(전 10:14)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 앞길을 작정하고 인도해 주실 하나님께 맡기고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하면서도 다 아는 것처럼 행세합니다. 부족함이 없다고 향락과 안일에 젖어 삽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책망하십니다. “회개하라. 열심을 내라.”

2. 우리가 열심을 내야 할 것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무엇보다 먼저 믿음의 성장을 위해 열심을 냅시다.

믿음은 어디서 생깁니까? 들음에서 생깁니다. 그러니 신앙적 믿음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들을수록 생깁니다(롬 10;17). 열심히 참석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믿음이 생기고 믿음이 쑥쑥 자랍니다. 사단은 이것을 알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하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교회에 못 나오게 합니다. 자꾸 빠질 일이 생깁니다. 주일 예배에 빠지는 것을 친구와 약속 어기는 것보다 더 쉽게 생각하도록 합니다. 말씀의 깊이가 더한 밤예배나 수요예배는 아예 안 나가는 것으로 못박아버립니다. 교회에 나와서는 말씀에 집중을 하지 못하게 합니다. 예배시간마다 졸게 만듭니다. 말씀을 경청하지 못하게 하고 자꾸 잡념을 집어넣습니다.

말씀을 들은 후에는 곧 잊어버리게 합니다. 그러므로 베뢰아 사람들처럼 집에 돌아와 성경 본문을 다시 읽어보고 주보에 실린 설교문을 읽어보고 녹음된 설교 테이프를 들어보고 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지난 주 설교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할 수 있겠습니까? 학생은 특히 복습을 잘 해야 공부를 잘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 수준과 성적이 높지 않고 낮은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는 설교를 복습하여 잘 공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들은 말씀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이 자신의 기억 속에 남아 있어야 합니다. 만일 여러분의 자녀들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듯 그저 학교에서 강의만 듣고 노트도 하지 않고 복습도 하지 않는다면 백이면 백, 다 낙제생이 될 것입니다. 평생동안 교회를 다녔는데도 신앙의 낙제생이 많은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말씀과 설교는 그저 듣고 읽는 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공부를 해야 합니다. 말씀을 복습하고 그 말씀이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적용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케 하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의 부자가 제일 큰 부자입니다. 천하를 소유했다 해도 믿음이 없으면 가난한 것이요, 가진 것이 없어도 믿음이 있으면 부자입니다.

둘째, 부끄럼을 보이지 않기 위하여 열심을 냅시다.

성도가 언제 부끄럼을 당할까요? 성경을 모르면 부끄럼 당합니다. 기도할 줄 모르면 부끄럼 당합니다. 주일날 교회에 가지 않고 다른 곳에 가있으면 부끄럼 당합니다. 무엇보다 성도가 바른 행실을 보이지 못하면 부끄럼을 당합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흰옷을 사서 입어 부끄러움을 보이지 않게 하라.” 하늘나라에 가면 의의 흰옷을 입어야 합니다. 성경은 성도들이 입을 흰옷은 곧 성도들의 옳은 행실(계 19:8)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기 위하여 열심을 내야 하겠습니다.

셋째, 영안이 열리기 위해 열심을 냅시다.

성도가 왜 눈이 어두워집니까? 먼저, 돈에 대한 욕심이 눈을 어둡게 합니다. 언젠가 신문에 보니 김모 여인은 돈에 욕심이 나 친구, 형제 여러 명을 독살했습니다. 이처럼 돈에 욕심이 생기면 눈이 어두워집니다. 부모도 몰라보고 형제도 몰라보고 친구도 배신합니다. 가룟 유다가 그랬습니다. 게하시가 그랬고 아간이 그랬습니다.

그리고, 사람에 대한 미운 감정이 눈을 어둡게 합니다. 사람의 감정은 눈을 어둡게 하기 때문에 특히 화가 날 때 조심하지 않으면 큰 사고를 저지르고 맙니다. 사울왕이 다윗을 미워한 나머지 까닭 없이 죽이려 하다가 국력이 쇠하여지고 결국 자신이 망하고 말았습니다.

또한, 세상에 대한 무지가 눈을 어둡게 합니다. ‘아는 것이 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몰라서 보지 못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알지 못하여 십자가에 못박게 했습니다. 초대 이승만 대통령은 권력에 눈이 어두운 주변 사람들에 의해 세상을 보는 눈을 뜨지 못했습니다. 결국 실각 당하고 말았지요.

그러나 영안이 열리면 ①하나님의 뜻과 섭리와 경륜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에베소 성도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을 너희가 들었을 터이라”(엡 3:2)고 했습니다. 영안이 밝아진 사도 바울이 기록한 성경을 읽게되면 바울이 깨닫게 된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을 깨닫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②자신의 처지와 형편을 바로 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는 영안이 열려 자신의 모습을 본후 “화(禍)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 6:5)라고 하였습니다. ③자신의 미래를 바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소경 바디매오는 자신의 처지를 알고 주님께 나와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막 10:46-52)하고 외쳤습니다. 알렉산더 대제 휘하에 알렉산더라는 병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병사는 대제 알렉산더와는 달리 아주 방탕하고 게으르며 지저분한 생활 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결국 형편없는 그의 생활로 말미암아 알렉산더라는 이름이 마구 아무렇게나 불려졌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알렉산더 대왕은 예고 없이 졸병의 막사를 방문하였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겁에 질려 경례를 하고 있는 졸병 알렉산더에게 말했다고 합니다. “네가 알렉산더라지?” “네!” “내가 명령한다. 두 가지 중 하나를 택하라. 네 이름을 바꾸든지, 바꾸기 싫다면 네 삶을 바꾸어라.”

오늘 말씀을 마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형편을 진단해 봅시다. 내 신앙은 과연 어떤 형편에 처해 있습니까? 걱정 없는 풍요한 생활 속에서 신앙은 병들고 영적인 눈이 멀어 가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까?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책망하십니다. 회개합시다. 그리고 열심을 냅시다. 주님을 향해 불타던 바울의 열정을 가집시다.

출처/황의봉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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