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장 칼빈주의 문화관에 영향 미친 어거스틴의 사상고찰
서론
어거스틴의 사상이 칼빈주의 문화관에 미친 영향을 체계적으로 고찰하려면 우선 칼빈주의 자체에 대한 개념규정과 역사적발전과정 등을 밝혀야 할 것이며 칼빈의 생애와 사상도 언급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칼빈주의 문화관에 대하여 성경적으로 조명하는 작업이라든지 칼빈주의 입장에서 문화개념을 정의하는 일등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지만 여기서는 어거스틴의 문화관을 중심으로 그의 사상이 칼빈주의 문화관에 미친 영향을 주로 다루고자 한다.
이를 위하여 어거스틴의 시대적 배경과 그의 생애를 간략하게 소개하고 그의 신학의 원리와 중심사상을 살핀 다음 어거스틴이 문화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가를 몇 가지 방면에서 기술하되 문화의 개념 및 그리스도와 문화에 대한 세가지 모델을 아울러 소개하고 끝으로 어거스틴의 사상이 칼빈주의 문화관에 미친 영향을 몇 가지로 나누어 고찰하고자 한다.
1. 어거스틴의 시대와 그의 생애
(1) 어거스틴의 시대적 상황
낡은 세계가 사라져가고 새로운 세계가 도래하고 있던 시대적 전환기에 어거스틴(353~430)은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시기는 기독교를 국교로 인정한 콘스탄틴 황제가 죽고 그의 세 아들에 의하여 로마제국이 분할 통치되다가 셋째 아들인 콘스탄티우스에 의해 재통일되던 해(353년)이다. 그가 361년에 죽자 그의 사촌인 배교자 쥴리안이 왕위에 올라 1년 반(361~363) 로마제국을 다스렸고 그 후 데오도시우스(379~395)가 죽자 로마제국은 동서로 나누어지게 되었으며 이로써 로마제국의 위력이 급격하게 쇠퇴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북방의 여러 민족이 로마제국의 영토 안으로 대량 유입되어 왔다. 게르만족의 대이동으로 알려진 이 침입으로 말미암아 유럽의 정치무대의 주인공이 바뀔 위기에 놓였던 것이다. 훈족, 고트족, 프랑크족, 반달족 등의 연쇄적인 이동과 침입으로 인하여 로마제국이 세력을 잃고 마침내 서로마제국은 476년에 완전히 멸망하고 정치권력이 게르만민족의 손에 들어갔다. 이 게르만 민족의 이교적 문화에 맞서 그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며 기독교적 문화를 보존 발전시켜야할 중차대한 사명을 5세기의 교회가 떠맡았던 것이다. 이 시대적 사명을 위하여 어거스틴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태어났다.
(2) 어거스틴의 생애
아우렐리우스 어거스틴(Aurelius Augustine, 354년 11월 13일 출생하여 430년 8월 28일에 죽음)은 아프리카 누미디아의 타가스테(Tagaste)에서 혼혈아로 태어났다. 당대의 사회가 전반적으로 혼혈혼인을 하였던 까닭에 이교도인 아버지와 경건한 기독교인이었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던 것이다. 어거스틴의 아버지는 쾌락적인 성품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고, 과격하였으며, 지적 재능이나 도덕적인 품위는 별로 없었다. 하지만 아들의 장래가 촉망되자 어거스틴이 16세가 되던 해에 어거스틴의 아버지는 아들의 장래를 생각하여 학습교인이 되었으며 그 후 곧 죽었다.
한편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는 성품이 귀족적이고 우아했으며 어려서부터 기독교 교육을 받고 자라났다. 그녀의 신앙은 뜨겁고 경건했으며 아주 지성적이었다. 그녀의 가르침을 받아 어거스틴이 하나님에 대하여 어려서부터 배울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어린시절의 경건은 그가 16세 되던 해에는 완전히 소멸되고 큰 악에 빠져버렸으며 17세에 결혼하여 약14년 간 이교도적 생활을 하였다. 그는 명목상으로만 그리스도인이었다. 이 동안 어머니 모니카는 쉬지 않고 눈물과 기도로 어거스틴을 염려하였다.
마침내 383년 30세가 다 되어 어머니의 사랑의 기도와 밀라노에서 만남 암부로시우스의 감화 그리고 바울의 로마서등을 연구한 끝에 근본적인 회심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는 387년 34세에 암부로시우스에게 세례를 받고 392년 장로가 되었으며 395년에는 힙포의 감독이 되었던 것이다.
어거스틴은 자신의 경험을 397년『참회록』으로 엮어 펴냈으며 5세기 초엽부터 로마가 멸망의 위기를 당하자 413년부터 쓰기 시작하여 13년에 걸쳐『신의 도성』(Cititas Dei)을 완성하였다. 그는 그의 저서들을 통하여 인간의 전적 부패,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 하나님께 대한 전적 의존 및 하나님의 통치의 불변성등을 주장하였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죄인은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에 전적으로 의존하며 따라서 이 은혜는 불가항력적이요, 필요불가결한 것이다.
어거스틴은 그가 살고 있던 역사적 상황과 그가 기독교로 개종하게 된 특별한 환경 때문에 그는 두 세계의 분기점에 서있었다. 그래서 그의 어깨에는 낡은 세계의 문화를 새 세계에로 전이시키는 시대적 책무가 지워져 있었다.
2. 어거스틴의 신학의 원리와 중심사상
(1) 어거스틴의 신학의 원리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그의 신학의 형식적 원리(formal principle)는 성경에 구체화되어 있는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난 신적 계시의 권위이다. 요약하자면 성경계시의 권위가 그의 신학의 형식적 원리이다. 그리고 그의 신학의 실질적 원리(material principle)는 하나님께 대한 전적 의존(the absolute dependence of man on God)이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능력’이시다고 하는 것이 그의 신학의 실질적 원리이다.
그는 고린도전서 4:7, “그런즉 심는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는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하나님의 은사인 것과 하나님의 은혜가 신앙에 선행함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는 성경의 권위라고 하는 형식적 원리를 따라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하기에 이르렀다. 어거스틴은 인간의 이성을 성경의 권위보다 위에 두기를 거부하고, 인간이성의 자율성을 부인하였다. 인간과 우주에 대한 참된 지식은 성경의 권위에 대한 신앙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보고서 “믿으면 알게 된다”(Crede ut intellegas)라고 말했다. 그에 의하면 인간적 확신의 궁극적인 근거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있으며 이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계시된 성경의 권위에 순복하는데서 비롯된다.
(2) 어거스틴의 신학의 중심사상
어거스틴의 신학의 중심사상은 그의 신학의 원리에 이미 나타나 있으며 특별히 그의 『참회록』을 통해서 알 수가 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구원받은 자녀로서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을 그의 신학의 중심사상으로 삼았다. 인간은 죄인인 까닭에 구원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하나님을 생각할 때 반드시 죄를 생각하고 죄를 생각할 때는 반듯이 그리스도를 생각하게 된다고 말한다. 죄인의 유일한 희망은 사랑의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에 달려있다. 하나님께서 죄인은 찾으시며 구원하는 은혜가 어거스틴의 중심주제인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하는 은혜(God's saving grace)를 어거스틴은 그의 신학의 중심에 두고 있다. 이 은혜로 인하여 죄인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등이 어거스틴 신학의 중심사상으로 요약될 수 있다.
3. 어거스틴의 문화에 대한 이해
(1) 문화의 개념
문화라는 말은 ‘쟁기질하다’, ‘경작하다’(창 2:15)라는 단어에서 온 것으로 ‘도구, 언어, 사유의 체계를 사용하여 자연을 탐구하는 인간의 제반행동과 그 산물’이 문화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문화란 하나님의 피조세계를 ‘경작한’ 결과인 것이다. 이로 보건대 문화란 인간이 인간의 목적을 따라 손과 머리를 사용하여 개발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문호는 하나님이 창조해 놓으신 세계를 바탕으로 하는 인간의 생산적 활동의 결과이다. 그런데 문화에는 인간이 가진 가치관이 반영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문화활동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의 피조세계를 개발하여 모든 문화영역이 기독교적 가치를 반영하도록 하는 것이어야 한다.
성경상에 나타난 ‘인간의 문화적 책임’은 ‘다스리라’(dominion, 창 1:26, 28), ‘정복하라’(subdue, 창 1:28), ‘경작하고 지키라’(창 2:15)는 세 단어에 표현되어 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에게는 피조세계를 주관하는 권리가 위임되어 있는 것이다. 인간에게 주관권이 있다는 것은 인간이 문화적 책임을 지니고 있으며 그 책임의 근거는 하나님의 뜻에 있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과 자연에 대하여 바른 조화의 관계를 갖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사탄의 미혹으로 말미암아 아담과 하와가 타락함으로써 하나님의 피조세계에 있었던 조화와 평화가 파괴되어 ‘악과의 끊임없는 투쟁’이 생겨나고 남편과 아내 사이의 동역자 관계에 균열이 있게 되었으며 노동이 투쟁적 성격을 띄게되었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에 있어서보다 더 근본적이고 심각한 것은 인간이 하나님에 대적하여 자신의 자율성을 주장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와 그의 주권적 의지에 반역하고 하나님과의 동등권을 주장함으로써 피조세계에 조화와 평화를 파괴한 사실이다. 이로써 하나님의 앞을 떠나간 가인의 후예들은 하나님과 상관없이 자율적으로 문화를 발전시키려 하였다. 이에 반하여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한 셋의 후손들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문화를 이룩하려 한 것이다.
여호와와 상관없이 건설한 문화는 죄악으로 깊이 물들어 있고 항상 악하여 그 파멸이 불가피해졌었다. 이로 보건대 사람은 환경 때문에 악하게 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인간 자신이 환경을 악하게 만들었다. 그 죄의 결과로 인간은 자기파멸의 길을 걷는 것이다. 이같은 파멸적 문화활동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의 뜻을 행하는 백성들이 남아있어서 건전한 문화창조를 이루어왔다.
결론적으로 요약하여 말하자면 초월적인 하나님께서 자기의 형상으로 창조하신 인간에게 땅을 지배하고 경작하여 조화와 평화를 이 땅 위에 이룩하라고 한 그의 명령이 인간의 전생활영역에서 실현되는 활동과정과 그 결과가 바로 문화인 것이다. 그런데 사탄의 역사로 인하여 죄가 침입해 들어옴으로 해서 이 문화에 자기파멸적 요소가 생겨났다.
(2) 그리스도와 문화에 대한 모델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긴장관계에 있다. 이에 대하여 그리스도와 문화의 관계를 이해함에 있어서 세 가지의 모델이 있다.
①분리모델(opposition type)
이 분리모델은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나라를 배타적인 삶의 영역으로 간주하고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 나라에서보다는 하나님 나라에서 살아야 할 필요성을 강조한다. 이에 대한 성경적 근거로 노아가 방주를 지어 홍수심판을 면한 사건과 아브라함이 더 나은 하늘의 본향을 생각하고 자기의 고향을 떠난 사건(히 11:9~10; 창 12:1), 모세가 자신을 키워준 애굽인을 떠나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즐거워한 일(히 11:25) 그리고 많은 선지자들이 광야와 산중과 토굴에서 유리하며 산것(히 11:37~38) 등을 제시한다. 분리모델에 의하면 이 모든 사람들은 이 세상나라의 문화와는 절연하고 살았던 것이다. 세상과 하나님의 나라는 본질상 전혀 다른 영역이어서 그리스도인의 이 두 영역에 동시적으로 거주할 수가 없다는 것이 분리모델의 주장이다. 이 분리모델의 교회사적 실례로는 콘스탄틴 이전의 교회와 재세례파 등이 있다.
②동일시 모델(dualist type)
분리모델의 경우,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의 삶과는 전혀 별도의 삶을 살아야한다. 세상나라를 멸시하고 하나님 나라에서만 살아야 할 것을 강조한다. 이에 비하여 동일시 모델은 그리스도인들이 동시에 하나님 나라와 이 세상 나라에 속하여 살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이에 대한 성경적 근거로는 요셉이 애굽에서 총리 대신이 된 사실, 다니엘이 바벨론에서 높은 지위를 얻은 사실 및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의 친구가 되어 먹고 마신 일 등을 제시한다. 또한 로마서 13장에서 바울이 세속정부의 권위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고 보고 세상의 통치자들을 하나님의 일꾼으로 부른 점을 열거한다.
동일시 모델에 따르면 그리스도인들은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이고 피조물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썩어짐의 종노릇에서 해방되었으면서도 동시에 그리스도의 재림까지는 썩어짐의 종노릇을 한다. 이로써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죄인이면서 동시에 의인으로 산다. 즉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나라와 세상나라라고 하는 두 영역에 동시에 속하여 살고 있는 것이다.
동일시 모델의 대표자인 루터에 의하면 하나님이 두 종류의 왕국을 세우셨다. 성령으로 통치되는바 영적 정부인 하나님의 나라와 정치적인 시민법에 의하여 통치되는바 세속정부를 세우셨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두 영역의 통치를 동시에 받으며 산다. 인간의 현세적 실존과 영적 실존은 모두 동시적으로 하나님의 통치권 아래 있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 중 어느 한쪽 영역에만 속하여 그리스도인이 살아서는 안된다. 그리스도인들은 두 가지의 다스림을 받으며 산다. 즉 영적 실존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살며 현세적 실존에 있어서는 세속적 권세 아래서 산다. 그러나 이 두 영역 모두의 머리가 하나님이시므로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통치권 아래서 사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 세상 나라도 다스리므로 그의 다스림은 전인에 대한 다스림이다.
동일시모델의 경우 주의할 점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삶을 성과속이라는 별개의 다른 두 영역으로 나누어 생각하거나 삶을 사는 대신에 하나님의 통치권아래에서 두 영역을 동시적으로 보면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즉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요 동시에 세상 앞에서 죄인이기 때문에 성령을 따라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으로 살아야 함과 동시에 세속적 권위와 시민법에 따라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③변혁모델(conversionist type)
분리모델이 현실에서의 도피 또는 은둔을 강조하고 동일시모델이 현실과의 타협적 적응에의 길을 열어놓고 있는데 반하여 변혁모델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나라에 동시적으로 살고 있음을 보면서 이 세상나라를 구조적으로 변화시켜 나갈 수 있음을 강조한다.
변혁모델은 창조, 타락, 구속 그리소 종말론 등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이론적 근거로 삼는다. 요약하자면 첫째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선하게 창조하였으나 둘째로 사탄의 유혹으로 말미암아 죄가 들어옴으로 인간과 세상이 타락하였고 셋째로 이 타락으로 인하여 인간의 본성이 부패하고 악하여졌으며 넷째로 인간의 죄악성이 모든 삶의 영역에 반영되어 문화가 파멸적 성격을 지니게 되었고 다섯째로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말미암아 인간과 피조세계의 타락한 상태가 역전되었으며 여섯째로 마지막 날 새하늘과 새땅이 도래할 때 사람과 피조세계가 다같이 죄의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나 새롭고 완전한 상태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 변혁모델의 성경적 근거이다.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으로 말미암아 인간과 피조세계가 새롭게 변화를 받아 갱신될 수 있다는 희망을 변혁모델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모든 죄악이 마침내 소멸되고 피조세계가 부패의 멍에에서 벗어나는 문화적 변혁의 가능성을 변혁모델은 바라보는 것이다. 이 변혁 모델에 대한 대표적 신학자는 어거스틴과 칼빈이다.
(3) 어거스틴의 문화관
어거스틴의 신학의 원리와 그의 중심사상에서 나타난대로 죄로 말미암아 인간의 본성이 부패되고 그 부패한 본성이 왜곡된 문화를 산출하였으며 왜곡된 문화가 다시 인간의 본성을 더욱 썩게 만들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죽으심과 부활로 말미암아 죄가 용서되고 사탄의 세력이 것임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의롭다 함을 받아 새로운 피조물로 갱신됨으로써 피조세계 또한 변화를 받는다는 것이 어거스틴의 변혁이론이다.
인간의 죄는 개인적인 범주에 머물지 않고 사회적인 것이어서 죄로 말미암아 공동체사회 안에 대립, 갈등, 탄압, 착취, 전쟁등 각종의 무질서가 난무하게 되고 문화의 모든 부분이 왜곡되었다.
어거스틴의 문화관은 그의 작품 『신의 도성』(Civitas Dei)에 잘 나타나 있는데 그가 이 작품을 쓰게 된 것은 이교도들이 로마제국의 쇠퇴에 대한 책임을 기독교인들에게 도리는데 대하여 반박하기 위함이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나라 등 두 나라로 구분하고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을 따르는 하나님의 백성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한다. 세상나라는 하나님을 멸시하는바 인간의 이기적 자기사랑에 기초하고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 자아를 경멸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에 기초한다. 세상나라는 인간 자신을 영화롭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나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세상나라의 생활원리는 육체적 욕구를 만족시키는 이기적 사랑 곧 소유욕에 있는 까닭에 이 욕심이 자라면 개인과 가족과 국가가 패망된다. 왜냐하면 이 욕심이 끝없는 투쟁과 착취를 낳고 그리하여 공포와 무질서가 팽배해지기 때문이다. 이에 반하여 하나님 나라의 생활원리는 사랑에 있다. 이 사랑은 믿음과 함께 하는 것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은 자는 자신을 거룩케 할 뿐 아니라 사회를 변혁시키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를 믿어 의롭다 함을 받은 자들이 서로 사랑하고 또한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여 하나님의 법에 온전히 순종하는 곳에서 이루어진다. 세상나라가 인간의 소유욕에 의하여 붕괴하고 무질서와 투쟁이 지배하는 곳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믿음이 역사함으로 세상나라가 새롭게 갱신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이 세상나라를 변혁하고 갱신한다.
어거스틴의 시대적 상황을 보면 로마제국이 위기에 처해 있었다. 로마의 문화가 붕괴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로마의 문화를 구한 것은 교회였으며 어거스틴이 그 시대적 사명을 맡은 것은 하나님의 비상한 섭리였다.
어거스틴은 이교문화를 기독교문화로 변혁시키고자 했다. 이교의 덕이 기독교의 사랑으로 변화되고 하나님을 떠난 부패한 인간의 악한 본성에서 나온바 왜곡된 문화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하게 될 때 변혁되고 갱신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다시금 창조주의 영광을 선포하게 된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기본관계가 신앙을 통해서 회복 될 때 기타의 모든 관계가 질서를 회복하고 문화가 갱신된다. 그러기에 어거스틴은 하나님과의 평화(또는 화목)가 사회적 평화보다 앞서는 것으로 믿었다.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세상나라와 왜곡된 문화를 변혁시킬 수 있다고 어거스틴은 믿었다.
어거스틴이 의미하는 문화의 변혁은 이 세상나라에서 죄악을 일시에 일소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적 사랑을 믿고 체험한 그리스도인의 근본적인 인경의 변화를 통하여 문화자체를 갱신시키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된 그리스도인이 문화를 변혁시킨다는 의미이다. 그리스도인이 삶의 구조가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통하여 변혁되고 갱신된다면 그 결과로 하나님의 피조세계가 구조적으로 변화를 받으며 문화가 변혁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은혜로 인간의 죄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용서되고 복음을 믿는 자가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문화변혁의 선행조건이 된다는 것을 어거스틴은 역설한다. 문화변혁에 있어서 어거스틴의 목표는 모든 사람들의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시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안에서 변화된 인격이 문화 자체를 변혁시키기 때문이다.
4. 어거스틴의 사상이 칼빈주의 문화관에 미친 영향
(1) 신학의 원리면에서
워필드(B.B Warfield)가 지적하는대로 칼빈이 가르친 교리체계는 어거스틴주의의 대부흥이다. 칼빈의 신학사상의 형식적원리는 성경 곧 하나님의 객관적 계시(objetive revelation)이다. 이 계시와 관련하여 칼빈은 성령의 주관적 활동 곧 내적 증거(inner testimony)를 강조한다. 죄악으로 부패한 인간이 하나님의 객관적 계시인 성경의 권위에 순복하고 그 계시를 깨달아 수납할 수 있기 위하여는 성령께서 사람의 마음에 주관적으로 즉 내적으로 증거하여 깨우침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칼빈의 경우 그러나 성령의 내적 증거가 말씀의 객관적 계시를 대신하지 못한다.
칼빈의 신학사상의 실질적 원리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knowledge of God)이다. 그는 하나님을 창조주 아버지이시자 절대 주권적인 주님으로 안다.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모든 좋은 것의 원천이시기에 우리의 사랑과 신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며 그는 절대 주권자이시기에 그의 위엄 앞에서 우리가 두려움을 가지고 경배하기에 합당하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뜻(또는 의지)이 만물의 제일 원인(prima causa rerum)이고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선포하는 신학의 목표로 삼는다.
그러기에 칼빈의 신학사상을 이어받은 칼빈주의 신학의 기본원리 또한 마찬가지이다. 워필드가 요약한 대로 칼빈주의의 기본 원리는 객관적으로 말하자면 유신론(theism)이고 주관적으로 말하자면 순수한 종교적 관계(religious)이고 구원론적으로 말하자면 복음적 종교(evangelical religion)이다.
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자요, 보존자요, 통치자로서 그의 의지가 만물의 궁극적 원인이다. 그리고 가장 순수한 종교적 관계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하는 태도가 기도를 통해서 뿐만 아니라 지적, 감정적, 의지적 삶의 모든 활동들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즉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적 기도생활에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여 그의 주권에 순복할 때 순수한 종교적 관계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도한 죄악된 영혼이 겸손하게 자신을 비우고서 은혜의 하나님을 구원의 유일한 직접적 원천으로 진실하게 신뢰할 때 복음적 종교가 뿌리를 내린다.
이상의 세 가지가 어거스틴과 칼빈으로 이어져 내려온바 칼빈주의 신학의 원리이다.
(2) 신학의 중심사상 면에서
칼빈은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를 만물의 궁극적 원인으로 보는가 하면 상실된 죄인(lost sinner)이 구주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에 전적으로 빚진바 된 것을 강조한다. 그는 도한 인간의 자율적 권위의 포악과 인본주의적 중재의 불확실성으로부터 인간의 영혼을 해방시켜 하나님을 직접 면대하게 하고 오직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만을 의존케 하였다.
이와같이 칼빈주의자는 하나님을 본 자(the man who has seen God)이요 영광중에 계시는 하나님을 볼 때 한편으로는 죄인으로서 자신의 무가치함을 뼈저리게 느낌과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이 하나님이 죄인을 용납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알고 감격해 하는 자이다. 이렇듯 칼빈주의는 하나님에 대한 의식(sense of God) 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knowledge of God)에서 출발한다. 하나님이 칼빈주의자의 감정과 사상의 전지평(horizon)에 충만해 있다. 그러기에 칼빈주의는 고차원의 초자연주의(high super-naturalism)이다. 칼빈주의자는 모든 현상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심을 보며 자기의 뜻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감지하는 자이다. 또한 삶의 모든 활동에서 기도할 때의 바로 그 태도를 취하여 하나님의 은혜만을 오직 의지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된바 하나님이 것으로 인간의 존재의 최고의 목표는 창조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다. 칼빈주의에 의하면 하나님이 인간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인정되고 찬양되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힘입어 살며 활동하고 우리의 존재의미를 갖는다. 하나님은 자연 가운데, 역사 가운데, 은혜 가운데, 어디에나 계신다. 칼빈주의자는 어디에서나 하나님의 권능의 발자취를 보며 그가 강한 팔로 일하시는 것을 느끼며 하나님의 심장이 파도치는 것을 듣는다.
어거스틴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전적으로 의지할 것과 하나님을 높이고 범사에 하나님을 찬양할 것을 강도한 대로 칼빈주의도 하나님만을 먼저 의식한다. 칼빈주의 사상의 시작과 끝이 하나님이시다. 칼빈주의는 하나님을 항상 보며 그의 영광을 높이는데 열정적이다.
(3) 문화관 면에서
칼빈은 어거스틴처럼 문화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에 관하여 변혁모델을 주장한다. 이 변혁모델의 특성은 첫째로 인간의 삶의 구조가 변혁되고 변화이어야 한다는 데 있다. 즉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나라 한복판에서 경험 되고 인간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을 보며 그의 영광이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로, 변혁모델은 죄의 치명적 영향이 삶의 모든 구조에 스며들어 있음을 전제한다. 죄로 인하여 인간의 문화가 왜곡되고 부패되어 있는 것이다. 셋째로 변혁모델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우주적 성격을 전제한다.
그리스도의 구속은 그 영향을 인간의 영혼뿐만 아니라 모든 삶의 영역과 피조세계 전반에까지 광범위하게 미친다.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은 모든 문화를 변혁시키는 능력이 있다. 넷째로 변혁모델은 교회를 이해함에 있어서 모든 삶의 구조에 복음의 구속적 영향력을 미치도록 부르심을 받은 새로운 공동체 즉 문화적 사명의 공동체로 본다. 부패하고 왜곡된 사회질서와 문화를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변혁하여 갱신시켜 하나님의 주권 아래 순복케 하고 그의 뜻과 목적을 따라 문화가 이루어지도록 촉매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교회인 것이다.
요약컨대 어거스틴과 칼빈의 문화관의 핵심은 복음이 인간의 모든 삶의 영역에 스며들어 그것을 변화시킴으로써 삶의 한복판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죄인을 용서하시고 용납하는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및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는 믿음의 은사가 아울러 강조되는 것이다.
결론
칼빈주의 신학사상의 모체에 해당하는 어거스틴과 칼빈의 신학은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가슴에서 나왔다. 그들의 신학의 태도는 세리의 경우처럼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옵소서”(눅 18:13)였다. 이들에 의하면 죄악된 인간이 눈이 멀어서 자연과 기록된 말씀 속에서 하나님을 볼 수가 없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을 수가 없었으나 은혜의 하나님이 성령의 특별한 내적 증거를 통하여 죄인의 눈을 열어 하나님을 보고 알 수 있게 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을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먼저 보았다. 리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았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권능을 알았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인이 의인이 될 뿐만 아니라 부패하고 왜곡된 피조세계까지도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케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생각과 사상을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순복케 하여 질서를 회복시킨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로써 어거스틴과 칼빈 및 그들의 사상체계를 따르는 칼빈주의자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인간의 모든 삶의 영역과 문화적 활동과 그것의 성취에 스며들어 그것을 변혁시켜 하나님의 영광이 선포되는 기독교 문화가 이루어져야 할 것을 강조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죄사함을 받아 의롭게 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부정하는 세속적 문화의 왜곡되고 부패한 것을 변혁시켜 참으로 하나님을 인정하고 경외하며 그에게 영광과 찬미를 돌리는 문화를 계발시킬 수 있다고 그들은 확신하는 것이다. 인간의 문화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를 섬기도록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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