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개혁가였다 새는 알을 까고 나온다. 알은 한 세계다. 태어나려 하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 독일의 헤르만 헤세가 쓴 <데미안>에 있는 말이다. 그는 파괴야말로 진보의 지름길이라 말했다. 우리는 요사이 '좌파'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그런데 문제는 좌파가 무슨 큰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좌파가 준동한다느니 어쩐다느니 하는 말을 듣는 것이다. 좌파는 빨갱이고 그래서 '좌빨'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우리는 역사의 발전 과정에서 소위 좌파 또는 진보주의자들에 의해 민주주의가 발전되어왔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좌파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민주주의는 상상할 수 없다. 국어사전에 보면 '진보주의'란 '사회의 모순을 변혁하려는 전진적인 사상이며 정치·경제·사회 체제의 개혁을 주장하는 사상이다'라고 나와 있다.
누가 이 글을 보고 마다하겠는가. 좌파란 말의 기원은 프랑스 혁명 당시 국민의회에서 왕 중심의 정치를 계속하자는 왕당파가 우측에, 의회파인 쟈코방당이 좌측에 앉았던 것에서 비롯한다. 의회파는 당시로서는 혁명세력으로 좌측에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의회주의자들을 좌파라 부르지 않는다. 좌파 우파는 항상 움직인다. 어제의 좌파가 내일의 우파가 될 수 있다. 그만큼 좌파는 역사의 전진을 향해 나아가게 하는 힘이다.
이와 같이 오늘날의 민주주의가 형성되는 데는 좌파·진보주의자들이 있었다. 지금은 빈부귀천·남녀노소를 떠나서 보통선거를 하는데 이는 모두 좌파들의 끈질긴 노력 때문이다. 우리나라 역사만 보더라도 조선 건국의 일등 공신은 정도전, 기묘사화의 희생자인 조광조, 대동사회를 제창했던 정여립, 홍길동전의 허균, 삼일천하의 김옥균 그리고 정약용이 있다. 이들은 한결같이 그 시대 삶 속에서 부응하지 못하고 이상사회를 그렸다. 이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다.
우리는 하늘에서 떨어진 사람이 아니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방대한 기독교 역사를 쓴 기독교 역사가인 필립 샤프(Phillip Shaffer)는 <종교개혁사>의 시작을 이렇게 열고 있다. "16세기 독일과 프랑스에서 일어난 종교개혁은 역사상 기독교 형성에 버금가는 중대한 사건이다. 종교개혁운동은 이후의 모든 진보적 운동에 직·간접적으로 강력한 자극을 주었으며 개신교는 근대문화사에 주된 동력이 되었다.
16세기는 르네상스의 자유주의적인 경향과 운동의 키를 쥐고 그것들을 기독교적 삶의 수로로 인도했으며, 그리하여 파괴적인 혁명에서 이 세상을 구원했다. 종교 개혁자들은 오류에 대해서는 부정적이고 파괴적이었지만 진리에 대해서는 긍정적이고 생동적이었다. 긴 겨울의 눈은 봄 햇살 앞에 녹아서 살아나고 있었다. 세상은 젊음을 회복하고 있다. 낡은 것이 지나가고 만물이 새로워지고 있다.
비관주의자들과 세심한 보수주의자들은 소중히 여겨왔던 관념과 제도들이 위협받고 전복 당하는 것을 경계했다. 여기서 비관주의자들과 세심한 보수주의자들은 당시 가톨릭을 말한다. 종교개혁은 중세적 형태의 껍질을 깨버렸고 새로운 길을 활짝 열었으며 그리하여 유럽을 지적·도덕적·영적 문화로 그 어떤 시대보다 더 높은 차원으로 이끌어 올렸다." 이것이 진정 종교개혁의 정신이다. 우리는 성경에 나타난 예언자들을 기억한다.
예언서가 구약 성경의 삼분의 일을 차지하고 있음에도 한국교회는 예언자에 별 관심이 없다. 기껏해야 십일조를 강조하기 위해 말라기로 달려갈 뿐이고, 예수님 예언의 확증을 위해 이사야서로 달려갈 뿐이다. 예언자들은 한결같이 사회 정의를 외쳤고 종교와 사회의 부정과 부패에 항거했다. 하나님의 심판을 외쳤다. 그들은 누구에게도 칭찬과 격려를 받지 못했다.
그들은 그 시대의 좌파들이었다. 그러나 예언자들은 이 땅에 웅혼한 비전과 생명의 소식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예수님을 예언자적 반열에서 읽지 않는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크게 오해하는 것이다. 예언자요 하나님의 아들이었던 예수님은 껍데기만 남은 현실을 부정하고 아예 새 포도주, 새 부대를 말씀하셨다. 성령은 새 것을 좋아한다.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 예루살렘을 향하여 전진하고 있다. 예수님의 말씀 말씀은 구구절절이 급진적이고 혁명적인 것들이다.
그는 33세 젊은 나이에 죽을 정도로 급진적이었다. 그는 십자가에 처형될 정도로 혁명적이었다. 예수님은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내가 이 땅에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아버지와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와 딸이, 딸이 어머니와, 시어머니와 며느리,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분쟁하리라.'(눅12:53) 변혁과 갱신은 멀리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 시어머니와 며느리사이에서부터 일어나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자기 생각에 맞추어 예수님을 포장해 왔다. 필자도 그러한 오류에 빠지지 않기를 바란다.
진정 예수님이야말로 영원한 좌파시오, 우리들의 이상이요, 소망이시다. 예수님은 시대의 이단아였고, 이상주의자였고, 진보주의자였다. 불행하게도 우리나라가 전 세계적으로 가장 늦게까지, 지금 이 시간까지도 이데올로기의 최후 전투장으로 남아있다. 교회까지도 이 전투장에 서툴게 투입되었다. 아직도 색깔 논쟁이 통하는 세상이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우리가 눈을 떠서 진정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가자. 회칠한 무덤에서 예수님을 불러내라 우리는 <태백산맥>을 한장 한장 넘기면서 내가 빨갱이가 되고 싶다는 회개를 해야 한다. 한국교회가 소위 좌파 빨갱이로 돌아가지 않으면 이 땅에 희망이 없다!, 한국교회가 예수님의 급진적이고 혁명적인 언어를 구사하고 실천하지 않는다면 이 땅의 사람들에게 신뢰를 얻기 어렵다. 한완상 교수가 <교회 안에 예수님이 없다>는 책을 썼다.
나는 이 말에 적극 동의한다. 교회 안에, 한국교회 안에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다. 예수님의 말씀이 없다. 예수님의 정신을 찾아볼 수 없다. 당신들의 눈에는 예수님이 보이는가. 예수님은 정통주의자들에 의해 오래 전에 죽었다. 그 자리에는 온갖 영광스런 메시야를 향한 승리주의와 소비자 중심 교회만이 난무하고 있지 아니한가. 나는 소위 세상이 다 아는 정통 보수주의 신학교 출신이다. 보수주의자는 성경에 있는 말씀을 있는 그대로 듣는 자들을 말한다.
그런데 이 땅에 예수님의 말씀은 어디가고 사람의 말들만 난무하고 있는가. 복음서는 성경이 아닌가. 아니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가. 왜 볼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골라 듣는가. 한국교회가 변하려면 국어 공부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 땅에, 한국교회 안에 예수님의 말씀이 살아있게 하자.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생으로 듣자. 이런저런 핑계로 예수님의 말씀을 변개하지 말고 예수님의 있는 그대로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자. 그 때 우리는 새로워질 수 있다. 그 때 우리는 다시 태어날 수 있다. 이 땅에 박제된 예수님을, 회칠한 무덤으로부터 예수님을 불러내야 한다. 그래야 한국교회가 살 길이 있다. 박철수 / 분당두레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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