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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권 5장 '복음'이란 말의 의미 pp77-86
(각 장에 붙은 제목은 한글판 편집자에 의해 붙여진 듯 합니다. 영문판에는 제목이 없습니다.)
로이드존스 목사님은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교회에서 1955년 1장을 서두로 1968년 14장 17절까지 13년간 로마서를 강해하였습니다. 출판은 3:20-4:25 부분부터 시작하였기 때문에 로마서 1장은 한글판 제7권으로 출간되었습니다. 제5장에서는 1장 1절의 <하나님의 복음>이란 말에 대하여 강해합니다.
(각 장에 붙은 제목은 한글판 편집자에 의해 붙여진 듯 합니다. 영문판에는 제목이 없습니다.)
로이드존스 목사님은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교회에서 1955년 1장을 서두로 1968년 14장 17절까지 13년간 로마서를 강해하였습니다. 출판은 3:20-4:25 부분부터 시작하였기 때문에 로마서 1장은 한글판 제7권으로 출간되었습니다. 제5장에서는 1장 1절의 <하나님의 복음>이란 말에 대하여 강해합니다.
pp77-80 까지는 요약하여 번역하였고, pp80-86까지는 전체를 번역하였습니다.
우리가 알듯이 '복음 gospel'은 언어학적으로 '기쁜 소식(喜消息) good news'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이 복음이 정말 우리에게 기쁜 소식으로 다가옵니까? 우리가 복음을 기쁜 소식으로 알고 있다면, 그 말의 문자적 의미 뿐만 아니라 복음 그 자체를(1) 실제로 이해하는 겁니까?
사도 바울이 '복음'이란 말을 1절에 곧바로 도입한 것은 율법과 대조시키려는 의도가 있는 듯합니다. 그는 바리새인으로서 율법 교사였지만 지금은 복음을 선포하는 사자(使者)(2)입니다. 율법에는 기쁜 소식이 없습니다. 율법은 범죄 때문에 '끼여 들어 왔습니다'(3). 율법은 죄를 집어내려고 우리에게 들어왔습니다. 율법은 구원의 도구나 방법으로 주어진 적이 결코 없습니다. 율법에 은혜의 요소가 있는건 사실이지만, 율법이 기쁜 소식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점을 이해하는 데 많은 사람들이 실패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스스로 구원할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율법을 주셨다고 합니다. 사도는 율법에 관한 이런 몰이해(沒理解)가 비극적임을 보여주려고 애씁니다. 율법이 실패하고 나서야 복음이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4)으로 왔다는 발상은 율법과 복음을 둘 다 오해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한다는 단순한 발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건 율법시대(5)에도 잘 알려진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구양성서에는 매우 위대하고 훌륭한 죄사함의 교리가 있습니다.
또한, 복음은 우리에게 어떤 것을 행하도록 호소하는 메시지가 아닙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선하게 살면서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사람이 되라고 호소하는 메시지로 복음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건 기쁜 소식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앞으로 복음이 무엇인가 자세히 밝히겠지만, 여기 서두에서 복음이 하나님의 아들과 관련된 어떤 일임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하나님 당신과 하나님께서 이루어놓은 일에 관한 어떤 것입니다. 다시 반복하지만 복음은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는 호소문이 아닙니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이미 행하신 일을 선포하는, 우리를 향한 하나의 공표(公表)입니다. 사도는 1장 16절 17절에서 이를 장엄하게 기록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왜 그렇습니까? <이 복음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기 때문입니다. 인간더러 스스로 구원하라는 권고가 아니라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방도입니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이것이 구약성서에서 발견하지 못하는새로움입니다! 죄사함이 여기도 있지만, 하나님의 義의 완전한 현시(顯示)는 새롭고 유일무이하며 특별하여서 복음을 복음되게 만듭니다.
친구들이여! 복음이 참으로 우리에게 이런 의미로 다가옵니까? 복음이 가장 위대한 최고의 기쁜 소식이라고 지금-여기에서 정직하게 고백할 수 있습니까?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그리스도人인지 의심해 보아야 합니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복음이 지금까지 이 세상에 도달한, 또는 인간이 받은 최대의 기쁜 소식이란 사실이 실감나지 않는다면, 이는 당신이 죄에 대해 부적절한 감각을 가졌거나 자기의 죄인됨을 충분하게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세상에는 자기의 현재상태에 만족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선한 사람이며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그들에게 기쁜 소식이 아닙니다. 그들은 도움을 필요로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복음에 대해 스릴을 느끼지 못하며 복음이 얼마나 경이로운지 알 수 없습니다. 아마도 우리가 주님 안에서 기뻐하는 데 실패하는 가장 큰 원인을 들자면 우리의 죄인됨에 대한 부적절한 이해일 것입니다. 만일 당신에게 기쁨이 부족하다면 성서를 펼치고 율법을 읽으며 당신의 죄인됨을 보십시오. 기쁨을 향한 순전한[궁극적인] 길은 항상 죄의 심연(深淵)을 경유합니다 (The positive road to joy is always via the depth of sin).(6)
기뻐함이 결여되는 또다른 이유는 우리가 죄의 결과[대가]를 깨닫는 데 실패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옥과 영원한 형벌을 믿지 않는 현대 철학이나 사고 방식을 받아들여서, 하나님은 사랑이심으로 모든 사람이 결국에는 다 괜찮을 것이라고 한다거나, 사는 동안의 제한적인 고통이 마침내 은혜롭게 종결되는 죽음 후에는, 우리 영혼이 소멸하여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어서 모든 일이 상대적이라고 믿는다면, 우리는 죄를 응징하는 믿음에서 떨어져 복음의 기쁜 소식으로부터 멀어지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구원의 위대함 자체를 깨닫는 데 실패하기 때문에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구원을 단순한 용서만으로 보는 경향을 말합니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지옥 형벌을 벗어나기 위해 용서를 구하지만, 용서를 받았다고 느낀 다음에는 그걸로 만족합니다. 우리는 그 기쁜 소식의 높이와 깊이, 그리고 광대하고 심오한 구원의 모든 위대함을 놓쳐버립니다.
우리가 알듯이 '복음 gospel'은 언어학적으로 '기쁜 소식(喜消息) good news'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이 복음이 정말 우리에게 기쁜 소식으로 다가옵니까? 우리가 복음을 기쁜 소식으로 알고 있다면, 그 말의 문자적 의미 뿐만 아니라 복음 그 자체를(1) 실제로 이해하는 겁니까?
사도 바울이 '복음'이란 말을 1절에 곧바로 도입한 것은 율법과 대조시키려는 의도가 있는 듯합니다. 그는 바리새인으로서 율법 교사였지만 지금은 복음을 선포하는 사자(使者)(2)입니다. 율법에는 기쁜 소식이 없습니다. 율법은 범죄 때문에 '끼여 들어 왔습니다'(3). 율법은 죄를 집어내려고 우리에게 들어왔습니다. 율법은 구원의 도구나 방법으로 주어진 적이 결코 없습니다. 율법에 은혜의 요소가 있는건 사실이지만, 율법이 기쁜 소식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점을 이해하는 데 많은 사람들이 실패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스스로 구원할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율법을 주셨다고 합니다. 사도는 율법에 관한 이런 몰이해(沒理解)가 비극적임을 보여주려고 애씁니다. 율법이 실패하고 나서야 복음이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4)으로 왔다는 발상은 율법과 복음을 둘 다 오해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한다는 단순한 발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건 율법시대(5)에도 잘 알려진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구양성서에는 매우 위대하고 훌륭한 죄사함의 교리가 있습니다.
또한, 복음은 우리에게 어떤 것을 행하도록 호소하는 메시지가 아닙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선하게 살면서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사람이 되라고 호소하는 메시지로 복음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건 기쁜 소식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앞으로 복음이 무엇인가 자세히 밝히겠지만, 여기 서두에서 복음이 하나님의 아들과 관련된 어떤 일임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하나님 당신과 하나님께서 이루어놓은 일에 관한 어떤 것입니다. 다시 반복하지만 복음은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는 호소문이 아닙니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이미 행하신 일을 선포하는, 우리를 향한 하나의 공표(公表)입니다. 사도는 1장 16절 17절에서 이를 장엄하게 기록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왜 그렇습니까? <이 복음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기 때문입니다. 인간더러 스스로 구원하라는 권고가 아니라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방도입니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이것이 구약성서에서 발견하지 못하는새로움입니다! 죄사함이 여기도 있지만, 하나님의 義의 완전한 현시(顯示)는 새롭고 유일무이하며 특별하여서 복음을 복음되게 만듭니다.
친구들이여! 복음이 참으로 우리에게 이런 의미로 다가옵니까? 복음이 가장 위대한 최고의 기쁜 소식이라고 지금-여기에서 정직하게 고백할 수 있습니까?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그리스도人인지 의심해 보아야 합니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복음이 지금까지 이 세상에 도달한, 또는 인간이 받은 최대의 기쁜 소식이란 사실이 실감나지 않는다면, 이는 당신이 죄에 대해 부적절한 감각을 가졌거나 자기의 죄인됨을 충분하게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세상에는 자기의 현재상태에 만족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선한 사람이며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그들에게 기쁜 소식이 아닙니다. 그들은 도움을 필요로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복음에 대해 스릴을 느끼지 못하며 복음이 얼마나 경이로운지 알 수 없습니다. 아마도 우리가 주님 안에서 기뻐하는 데 실패하는 가장 큰 원인을 들자면 우리의 죄인됨에 대한 부적절한 이해일 것입니다. 만일 당신에게 기쁨이 부족하다면 성서를 펼치고 율법을 읽으며 당신의 죄인됨을 보십시오. 기쁨을 향한 순전한[궁극적인] 길은 항상 죄의 심연(深淵)을 경유합니다 (The positive road to joy is always via the depth of sin).(6)
기뻐함이 결여되는 또다른 이유는 우리가 죄의 결과[대가]를 깨닫는 데 실패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옥과 영원한 형벌을 믿지 않는 현대 철학이나 사고 방식을 받아들여서, 하나님은 사랑이심으로 모든 사람이 결국에는 다 괜찮을 것이라고 한다거나, 사는 동안의 제한적인 고통이 마침내 은혜롭게 종결되는 죽음 후에는, 우리 영혼이 소멸하여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어서 모든 일이 상대적이라고 믿는다면, 우리는 죄를 응징하는 믿음에서 떨어져 복음의 기쁜 소식으로부터 멀어지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구원의 위대함 자체를 깨닫는 데 실패하기 때문에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구원을 단순한 용서만으로 보는 경향을 말합니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지옥 형벌을 벗어나기 위해 용서를 구하지만, 용서를 받았다고 느낀 다음에는 그걸로 만족합니다. 우리는 그 기쁜 소식의 높이와 깊이, 그리고 광대하고 심오한 구원의 모든 위대함을 놓쳐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복음의 위대함과 영광스러움을 강조하려는 게 분명합니다.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를 쓰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사도는 그들이 복음의 위대함을 알기 원합니다. 사도는 그들이 이미 신도임을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정말 복음을 움켜잡아 터득했을까 하는 의구심도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팬을 들어 사도의 권위로서 영감을 받아 복음의 충만함과 웅대함을 들어내어 그들에게 보여주려고 합니다. 복음! 우리가 얼마나 손쉽게 사용하는 말입니까! 경박하게 청산유수로 얼마나 자주 입에 담는지!
복음의 가장 중요한 사실은 복음이 <하나님의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사람에 대해 행하신 일입니다. 구원에 관한 하나임의 일입니다. 사도는 "내가 인간의 철학에 대해 논하려는 게 아니다. 당신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나의 의견을 피력하려는 것도 아니다. 당신이 무엇을 행해야 하는걸 알려주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무엇을 이미 행하셨는가 선포하기 위함이다" 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기쁜 소식은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신약성서에는 복음에 대한 여러 표현이 있습니다. ‘평안의 복음’(7)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8) ‘구원의 복음’(9) ‘영원한 복음’(10) 등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복음> 만큼이나 사도 바울에 의해 지속적으로 쓰여진 복음의 정의(定義)는 없습니다. 사도는 거기에 머물지 않습니다. 저는 여기서 특별히 성령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 주셔서 근본적이며 절대적 핵심인 복음의 정수를 우리에게 보여주시길 간구합니다. 사도는 성삼위(the blessed Holy Trinity)의 위대한 핵심 교리를 우리에게 소개합니다. 들어 보십시오. <바울은... 택정함을 입었으니 Paul... separated (KJV)> 그는 계속 말합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괄호로 묶을 수 있는 2절을 넘어 3절로 가서)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성령님]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11) 이것이 사도가 <택정함을 입은> 복음입니다. 복음은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에 관한 것입니다. 복음은 일(the work)입니다. 특별한 일입니다. 세 위격(the three Persons)이 행하신 영광스런 일입니다. 복음에는 세 위격의 한분 한분이 참여하여 함께 일하셨습니다.
사도는 성령님의 감화와 인도와 영감 아래에서 로마서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이렇게 쓴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사도는 뭔가 빠뜨리지 않으려고 의례적으로 성삼위의 교리를 쓴 것이 아닙니다. 복음이 성삼위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라는 관점은 절대적으로 중요하므로 강조되어야 합니다.
복음은 성부 하나님만이 관련된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과 대화해 보면 그들은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 하고 복음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복음이란 무엇이며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물어보면 그들의 대답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빠졌음을 간파하게 됩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관하여 많은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죄의 용서와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 그리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해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자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언급 없이 대화를 끝맺습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여깁니다. 그들은 성자 하나님을 떠난 어떤 부류의 기독교를 가진 듯합니다.
타고난 신비주의자들(12)에게는 특이한 위험이 존재해 왔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뿐만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에 관한 지식 전부를 가질 수 있음을 믿는다고 하며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 하나님을 알려고 합니다. 거기까진 괜찮습니다. 그러나 그런게 가능하다며 신비주의자들이 갖는 그 '생각'의 문제점은, 그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 없이 그걸 추구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들은 신비주의 안내서를 가지고 관상(觀想)(13)의 최종 단계에 도달할 때까지 '영혼의 암울한 밤'을 통과하는 수행을 한다고 합니다. 이는 신비주의자들이 지속적으로 당면하는 위험입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당신이 해야 할 일은 마음을 안으로 기울여서(turn in) 스스로를 고찰하여(examine) 자아를 관조(look)함으로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 즉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일이라고 합니다. 이걸 가르치는 책들이 많습니다. 어떤 책은 아주 유명합니다. 40여년 전에 In Tune with the Infinite라는 책이 있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유행했습니다. 그 책은 주 예수 그리스도 없이 당신에게 하나님을 직접 체험시켜 준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성부 하나님만 있는 복음은 위험합니다.
한편, 성부 하나님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성자 하나님에게만 전적인 강조점을 두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성부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시는 일을 탐탁치 않게 여긴다는 인상을 주려는 정도에 까지 나아갑니다. 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아버지께 우리를 용서해 달라고 탄원하는 모습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성자께서 하나님 존전에 나아가 "제가 인간들을 위해 죽었고 그들을 값주고 샀습니다"라고 말하며 인간들을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을 설득하려는 아들로 묘사합니다. 그들에게는 기독교가 성자 안에서만 존재합니다. 성부께서는 간여하지 않으시고 그의 아들의 탄원을 마지못해 들어주시는 듯한 하나님으로 묘사됩니다. 이것이 두번째 위험입니다.
셋째 위험은 전체의 강조점을 성령님께만 두려는 경향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쉽게 길을 잃고 정도에서 벗어나 오류에 빠지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구원이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14)이고 <우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15)신다니얼마나 위안이 되는지요! 만일 그가 우리 안에서 일하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모두 어디론가 미혹되어 길을 잃어서, 어떤 사람은 성부만, 어떤 사람은 성자만, 어떤 사람은 성령만에 빠져버릴 것입니다. 성령 제일주의 무리들은 체험과 능력(power)을 구합니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성령님에 관한 교리에 몰두합니다.
복음의 가장 중요한 사실은 복음이 <하나님의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사람에 대해 행하신 일입니다. 구원에 관한 하나임의 일입니다. 사도는 "내가 인간의 철학에 대해 논하려는 게 아니다. 당신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나의 의견을 피력하려는 것도 아니다. 당신이 무엇을 행해야 하는걸 알려주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무엇을 이미 행하셨는가 선포하기 위함이다" 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기쁜 소식은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신약성서에는 복음에 대한 여러 표현이 있습니다. ‘평안의 복음’(7)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8) ‘구원의 복음’(9) ‘영원한 복음’(10) 등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복음> 만큼이나 사도 바울에 의해 지속적으로 쓰여진 복음의 정의(定義)는 없습니다. 사도는 거기에 머물지 않습니다. 저는 여기서 특별히 성령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 주셔서 근본적이며 절대적 핵심인 복음의 정수를 우리에게 보여주시길 간구합니다. 사도는 성삼위(the blessed Holy Trinity)의 위대한 핵심 교리를 우리에게 소개합니다. 들어 보십시오. <바울은... 택정함을 입었으니 Paul... separated (KJV)> 그는 계속 말합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괄호로 묶을 수 있는 2절을 넘어 3절로 가서)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성령님]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11) 이것이 사도가 <택정함을 입은> 복음입니다. 복음은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에 관한 것입니다. 복음은 일(the work)입니다. 특별한 일입니다. 세 위격(the three Persons)이 행하신 영광스런 일입니다. 복음에는 세 위격의 한분 한분이 참여하여 함께 일하셨습니다.
사도는 성령님의 감화와 인도와 영감 아래에서 로마서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이렇게 쓴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사도는 뭔가 빠뜨리지 않으려고 의례적으로 성삼위의 교리를 쓴 것이 아닙니다. 복음이 성삼위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라는 관점은 절대적으로 중요하므로 강조되어야 합니다.
복음은 성부 하나님만이 관련된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과 대화해 보면 그들은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 하고 복음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복음이란 무엇이며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물어보면 그들의 대답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빠졌음을 간파하게 됩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관하여 많은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죄의 용서와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 그리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해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자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언급 없이 대화를 끝맺습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여깁니다. 그들은 성자 하나님을 떠난 어떤 부류의 기독교를 가진 듯합니다.
타고난 신비주의자들(12)에게는 특이한 위험이 존재해 왔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뿐만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에 관한 지식 전부를 가질 수 있음을 믿는다고 하며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 하나님을 알려고 합니다. 거기까진 괜찮습니다. 그러나 그런게 가능하다며 신비주의자들이 갖는 그 '생각'의 문제점은, 그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 없이 그걸 추구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들은 신비주의 안내서를 가지고 관상(觀想)(13)의 최종 단계에 도달할 때까지 '영혼의 암울한 밤'을 통과하는 수행을 한다고 합니다. 이는 신비주의자들이 지속적으로 당면하는 위험입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당신이 해야 할 일은 마음을 안으로 기울여서(turn in) 스스로를 고찰하여(examine) 자아를 관조(look)함으로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 즉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일이라고 합니다. 이걸 가르치는 책들이 많습니다. 어떤 책은 아주 유명합니다. 40여년 전에 In Tune with the Infinite라는 책이 있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유행했습니다. 그 책은 주 예수 그리스도 없이 당신에게 하나님을 직접 체험시켜 준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성부 하나님만 있는 복음은 위험합니다.
한편, 성부 하나님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성자 하나님에게만 전적인 강조점을 두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성부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시는 일을 탐탁치 않게 여긴다는 인상을 주려는 정도에 까지 나아갑니다. 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아버지께 우리를 용서해 달라고 탄원하는 모습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성자께서 하나님 존전에 나아가 "제가 인간들을 위해 죽었고 그들을 값주고 샀습니다"라고 말하며 인간들을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을 설득하려는 아들로 묘사합니다. 그들에게는 기독교가 성자 안에서만 존재합니다. 성부께서는 간여하지 않으시고 그의 아들의 탄원을 마지못해 들어주시는 듯한 하나님으로 묘사됩니다. 이것이 두번째 위험입니다.
셋째 위험은 전체의 강조점을 성령님께만 두려는 경향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쉽게 길을 잃고 정도에서 벗어나 오류에 빠지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구원이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14)이고 <우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15)신다니얼마나 위안이 되는지요! 만일 그가 우리 안에서 일하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모두 어디론가 미혹되어 길을 잃어서, 어떤 사람은 성부만, 어떤 사람은 성자만, 어떤 사람은 성령만에 빠져버릴 것입니다. 성령 제일주의 무리들은 체험과 능력(power)을 구합니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성령님에 관한 교리에 몰두합니다.
여기에는 아주 미묘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고백이지만, 예전에 제가 그곳에 한동안 빠져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위험에 대하여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속죄(贖罪 the atonement)의 절대적 필요를 숙지하는 일이 없이도 중생(重生 regeneration)의 교리에 관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오늘날 영국에는 그런 사례들이 여럿 있습니다. 거듭남(re-birth), 거듭난 존재(being born again), 중생, 하나님으로부터의 생명에 대하여 상당히 바르고 건전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속죄를 믿지 않습니다. 그들은 새 생명과 새 능력의 필요에 대해서 자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제공되고 있음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십자가를 우회하여 체험과 능력에 직접 달려갑니다. 성령님을 통하여 살아계신 그리스도와 연결되는 것에 대하여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갈보리 십자가를 그냥 지나쳐 갑니다. 대속(代贖)(16)의 필요를 보지 않습니다. 여기엔 아주 미묘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매우 조심하지 않는 한 우리가 길을 잃고 빠지기 쉬운 세가지 오류와 위험들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들 하나 하나가 잘못 되었지만, 아시다시피, 각각이 약간의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그들이 위험한 이유는 바로 거기 있습니다. 부분적 진리를 부풀려서 진리의 전부인 마냥 떠들어대는 일 보다 더 위험스런 일이 없습니다. 그들 세 부류의 사람들이 주장하는 내용은 그들이 말하는 데까지는 꽤 타당합니다. 그러나 동등하게 중요하고 본질적인 부분을 말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에 따르면, 구원은 성삼위(the blessed Holy Trinity) 안의 세 격(the three Persons)이 행하신 일입니다.
지금까지 매우 조심하지 않는 한 우리가 길을 잃고 빠지기 쉬운 세가지 오류와 위험들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들 하나 하나가 잘못 되었지만, 아시다시피, 각각이 약간의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그들이 위험한 이유는 바로 거기 있습니다. 부분적 진리를 부풀려서 진리의 전부인 마냥 떠들어대는 일 보다 더 위험스런 일이 없습니다. 그들 세 부류의 사람들이 주장하는 내용은 그들이 말하는 데까지는 꽤 타당합니다. 그러나 동등하게 중요하고 본질적인 부분을 말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에 따르면, 구원은 성삼위(the blessed Holy Trinity) 안의 세 격(the three Persons)이 행하신 일입니다.
구원은 성부께서 주도적으로 행하신 일로서 그의 아들에 관한 <하나님의 복음> 입니다. 성부가 첫째입니다. 복음은 성부께서 계획하셨고 성부께서 작정하셨으며 성부께서 시작하셨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이브에게 복음에 관하여 처음 언약하신 분도 성부이십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분명히 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성부께서 주도하신 일에 대하여 명확하게 하기 전까지는 성자께서 행하신 일과 성령께서 행하신 일과 그가 지금도 여전히 행하시는 일에 대하여 고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걸 망각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성경구절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성부 하나님이]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 말씀의 순서에 유의하십시오. 구원은 하나님이 행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 모든걸 시작하셨습니다. 그가 장본인으로서 모든 일을 행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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