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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는 구원받기 어려운가?

by 【고동엽】 2011. 1. 27.
 

 

부자는 구원받기 어려운가?

 

 

“나를 따르려고 제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백배의 상을 받을 것이며, 또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그리스도교 성서에는 신자들에게 위로와 평안을 주기보다 무거운 짐을 안겨주는 난해구절이 많습니다. 위의 본문도 그 중 하나입니다. 본문이 과거에나 지금이나 여전히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에게 갈등을 주는 이유는 “신앙이 가정보다 우선한다.”는 전제를 지지한다는 데 있습니다.

지난 이천 년 동안 교회는 줄기차게 “교회는 가정 뿐 아니라 민족이나 국가 등 그 어떤 사회조직보다도 우선한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본문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가정도 아낌없이 교회를 위해 헌금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기성교회의 논리를 뒷받침해주기에, 교회의 유지와 발전을 위해 더없이 유용한 구절로 활용되며, 교회를 새로 건축하거나 부흥회를 열 때마다 설교 본문으로 자주 인용되고 있습니다.

만일 예수의 진의가 이렇게 교회의 일그러진 의도를 뒷받침해주는 것이라면 그가 직접 하신 말씀이라 하더라도 비판받아 마땅합니다. 손가락이 달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고 왜곡된 정보를 제공해 준다면 그 손가락을 바라보아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하기에 본문이 가정의 소중함에 눈뜨지 못한 젊은 선지자의 철없는 인식을 반영하는 것이라면 아무리 성서의 본문이라 하더라도 기꺼이 “그리스도교인의 신앙과 생활에 해로운 구절이므로 이제는 폐기처분하자.”고 결론을 내리고 싶습니다. 종교는 선택사항이 되어도 상관없지만 이미 가정을 이룬 사람이 그 가정에 대한 책무를 선택사항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현대 그리스도교 신앙인은 예수가 한 말로 기록된 구절이라 하더라도 비판적으로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신학자들 중에는 성서에 예수의 말로 기록된 구절 중에서 실제 예수가 한 말은 그리 많지 않고, 전달자나 기록자, 또는 교회 조직이 예수의 입을 빌어 말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또한 예수라는 인물이 아무리 뛰어난 선각자라 하더라도 그가 살았던 시대의 한계 뿐 아니라 개인의 편견이나 유한성에 갇혀 있을 수 있다는 점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예수가 편협하고 극단적인 생각의 결과로 그렇게 말한 것이라면 그를 비판하고 넘어서기를 망설일 이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의 진의가 나눔과 공동체의 정신을 가르치기 위한 휴머니즘에서 나온 것이라면 우리는 그 정신을 놓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의 가르침은 오늘날 교회에 대한 헌금과 충성을 강요하는 설교자들의 해석과는 매우 거리가 멀다고 생각됩니다. 우선 본문의 의도를 제대로 읽기 위해 앞뒤 문맥을 세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시간을 낼 수 있는 독자들은 마태오의 복음서 19:16-30, 마르코의 복음서 10:17-31, 루가의 복음서 18:18-30을 모두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본문은 한 젊은이가 예수를 찾아와 영생의 길을 묻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젊은이는 예수를 ‘선한 선생님’이라 부르며 무엇을 해야 영생의 길을 얻을 수 있는지 묻습니다. 예수와 젊은이의 대화에서 젊은이는 당시 율법이 가르치는 계명들을 모두 지켰다고 자신 있게 대답합니다.

그러나 예수는 젊은이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며 “네 재산을 모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리고 나서 나를 따르라”고 말합니다. 특히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라는 부분은 세 복음서에 똑같이 강조되어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니 내가 시키는 대로 하고 나서 나를 따라오너라.” 하셨다. (마태오의 복음서 19장 21절)

예수께서는 그를 유심히 바라보시고 대견해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니 내가 시키는 대로 하고 나서 나를 따라오너라.” (마르코의 복음서 10장 21절)

예수께서는 이 말을 들으시고 “너에게는 아직도 해야 할 일이 하나 더 있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를 얻게 될 것이다.” 하셨다. (루가의 복음서 18장 22절)

유감스러운 일은 웬일인지 본문을 인용하는 설교자 중에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라.”는 부분을 강조하는 설교자가 별로 없다는 점입니다. 대신에 이 구절이 “교회에 헌금을 바쳐야 한다.”는 내용으로 바뀌어 선포되는 경우가 다반사지만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청중이 별로 없는 것 또한 참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쨌든 마르코의 복음서는 예수께서 젊은이를 “대견해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예수는 왜 율법을 준수하기 위해 노력한 젊은이를 대견하게 여기면서도 그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짐을 안겨주었을까요?

예수는 젊은이가 겉으로는 율법을 준수하면서도 그 참 뜻을 헤아리지 못하는 한계를 좀 과격하게 지적한 것이 아니었을까요? 본문의 예수는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합니다. “네가 율법을 모두 지켰다면 그 안에 담긴 실제 정신을 삶으로 살아내야 하지 않겠는가?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그 뜻을 너의 삶 전체로 말이다.”

본문에서 계속 이어지는 제자들과의 대화를 통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예수의 진의가 어디에 있는지를 충분히 짐작하게 합니다. “가족과 재산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의 말씀이 저에게는 이렇게 들립니다. “네 자신과 가족은 사랑할 줄 알면서 이웃의 고통을 외면한다면 계명을 모두 지켰다 하더라도 그것은 겉껍질에 불과하다. 진정으로 신의 뜻을 따라 살고자 한다면 가족이기주의에 매몰되지 말고 삶의 지평을 넓혀라. 그래야 진정 하느님의 나라가 이루어진다.”

“네 재산을 모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어라.” 이 말은 초창기 예수운동이 얼마나 공정한 사회를 목표로 하고 있었는지, 또한 그 목표를 실현하고자 하는 열망이 얼마나 강렬하고 과격했는지를 보여주는 단서가 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초창기 예수의 공동체, 즉 예수 복음의 원형은 종교적이기보다는 과격한 사회적 성격의 운동이었을 것입니다. 부자에 대한 거부감과 가난한 자들에 대한 깊은 애정은 그로부터 2천년 후에 발생한 공산주의의 태동을 연상케 합니다. 그래서 예수는 급진적인 빨갱이였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어려운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예수의 가르침을 각 개인에게 주는 메시지로 제한한다면 누가 지키고 따를 수 있을까요?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그러면 구원받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고 걱정하는 제자들의 장탄식에 예수는 이렇게 시원한 답변을 해주십니다.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무슨 일이든 하실 수 있다.” 예수는 개인의 한계와 연약성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개인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사람들의 회심과 연대를 기대했던 것이 아닐까요?

얼마 전, 이명박 대통령이 대선 때 약속한대로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하여 국민들로부터 눈가리고 아웅식이라는 비난과 환영을 아울러 받았습니다. 대통령의 진의가 어디에 있건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부문화는 자본주의의 독성을 중화시키는 좋은 방안이 될 수 있기에 기부문화를 최선이 아닌 차선으로 환영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저는 개인의 기부보다는 제도에 의한 나눔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교 성서가 가리키는 하느님의 나라는 부자의 기부가 아니라 소유의 공정한 나눔과 인권의 존중이 제도적으로 확립될 때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천 년 전의 예수께서 오늘날 다시 태어난다면, 그 어느 시대보다도 밀월을 즐기는 오늘날의 부자 정치인과 부자 종교인들을 향해 어떤 말씀을 하실까요?

어쩌면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든가 “네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라” “나를 따르려고 제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백배의 상을 받을 것이며, 또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라는 칼날 같은 독설을 또 다시 퍼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은 가난한 서민을 울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끝없이 파이를 늘려야 한다며 나누기를 거부하는 ‘욕심 많은 부자들’을 향한 독설이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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