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창세기에서 길을 잃다 2
(신앙인의 폭력성 문제, 같은 제목 앞글의 보충 입니다)
1. 순종하라는 것은 폭력이다.
에덴동산의 이야기에서 본질은 인간이 선악을 알게 되어 하나님같이 됨으로 동산에서 추방된 것 입니다.(창3:22)
유대교와 기독교는 공히 이 이야기의 중심을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한 것에 두었습니다.
신앙인은 신에 상응한 행동을 하기를 원 합니다. 신에 대한 관념으로 신앙인이 폭력성을 갖게 됩니다. 유대교와 현재 기독교의 신이 폭력적 신이기 때문 입니다. 현재 기독교가 믿는 신은 다음과 같은 신 입니다. 여기 예수그리스도는 없습니다. 그래서 현재 한국교회는 기독교가 아니라 유대교 입니다.
1. 전지전능한 신은 세상을 지배하고 통제 합니다. 이에 상응해서 목사, 신부도 교우를 지배하고 통제하려고 합니다. 따라서 신앙인은 지배하려드는 게 습관 입니다.
2. 유대교 신앙의 핵심은 하나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입니다. 거룩은 악한 사람과 차별하라는 말 입니다. 현재 기독교는 이것을 경건이라는 이름으로 신앙인은 악한 사람과 차별된 사람으로 압니다. 차별은 정죄이고 폭력 입니다. 도덕적이고 경건한 사람인 바리새인은 차별했다는 한가지로 예수로부터 독사새끼들이라는 쌍욕을 들었습니다.
3. 사르트르는 자녀를 양육하라는 도덕률을 따를 때 자유를 느낀다고 합니다. 그 도덕률에 순종해서 하는 행위가 아니라 사회적 가치를 따름으로서, 자녀의 올바른 성장을 보면서 얻는 기쁨 때문 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이와 같습니다. 순종해서 행하는 게 아니라 그 말씀을 존중해서, 그 말씀을 따름으로서 얻는 평화가 기쁨으로 따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면 자유와 평화가 있습니다.
4. 유대교, 기독교가 말씀에 순종하라를 신앙의 목표로 삼습니다. 목사, 신부가 자기가 하나님 말씀 대언자니 순종하라고 합니다. 구역장도 순종하라고 하고 신앙인 엄마도 아이들 한테 순종하라고 합니다. 그게 신을 닮는 행위이기 때문 입니다. 순종을 요구하는 행위는 폭력 입니다.
유대교의 법은 순종이 맞지만 기독교의 복음에는 순종이란 없습니다.
2. 선과 악을 아는 문제
유대교는 선악을 아는 것이 잘못이라는개념이 없습니다.
창세기 미드라시 14: 7 에 나오는 이야기 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20 살로 만들어져 선과 악을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유대인은 18 세에 결혼하고 20 세에 선과 악을 분별하는 지혜가 생겨서 재판에 증인으로 설 수 있기 때문 입니다.(조철수, 창세신화) 선과 악을 아는 게 잘못이라는 인식 자체가 없습니다.
축의 시대에 현자들은 지혜와 선이 정신문명의 2 기둥이라는데 합의를 보았습니다. 선은 악함과 차별을 이루어야 알 수있는 개념 입니다.
이때 예수가 사랑을 제시 합니다. 예수사랑이란 악한 사람을 악하지 않다고 해야 할 수있는 행위 입니다. 예수사랑이란 친절이 아니라 나쁜 사람을 존중해 주는 것을 말 합니다.
예수가 착취하며 민족을 반역하고 악질적으로 세금을 징수하여 로마에 바치는 세리와 창녀, 죄인들과 교제하고, 도덕적이고 경건한 바리새인들에게는 쌍욕을 하자 바리새인들이 예수에게 항의를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는 다음의 비유설교를 합니다.
어떤 주인이 자기 돈을 관리하는 청지기가 횡령한다는 소리를 듣고 그 청지기를 불러 언제까지만 일하고 그만 두라고 해고 통보를 했습니다. 통보를 받은 청지기는 그 주인에게 빚이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 빚을 절반 정도로 탕감해주는 장부를 조작하여 주고 자신의 퇴직후의 삶을 대비 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주인이 청지기를 불러서 일을 지혜있게 했다고 칭찬 했습니다.(누가16:1-8)
예수가 바리새인들에게 황당한 설교를 한 겁니다.
9 절에 예수가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한 것으로 나옵니다. 이것은 예수의 말씀이 아니라 누가의 해석 입니다.(요하킴 에레미아스, 예수의 비유)
여러분은 성서에 예수가 한 말씀을 누가의 말이라고 하는 필자의 말에 당황할 것 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1. 예수가 남의 돈을 횡령해서 친구를 사귀라고 했다.
2. 누가가 하도 이해할 수 없는 황당한 설교라서 친구를 사귀라고 해석했다.
요하킴 에레미아스와 필자는 2 번을 택 합니다.
이게 하도 황당한 설교라서 기독교를 배교한 로마황제 율리아누스 황제는 자신이 배교한 이유가 이렇게 사회에 해로운 설교를 하는 예수를 믿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20 세기 최고의 신학자 불트만은 이 비유설교는 해석할 수 없다고 선언 했습니다.
당시에는 하나님나라가 현재 지금 우리의 삶에서 이루어져 가고 있다는 하나님나라 신학이 없었기 때문 입니다.
예수말씀에는 선포, 교훈, 계명이 있습니다. 이 비유설교는 선포이고 역설(irony) 입니다. 선포는 지금 당장 그렇게 하라는 게 아니라 급진적 문제의식을 가지라는 것이고요,
역설이란 본인의 뜻과는 다르게 말하면서 자신의 뜻을 주장하는 수사법 입니다.
자신들은 도덕적이고 선하다고 하면서 사회적 약자를 배제하고 소외 시키는 바리새인들에게 남을 미워하고 배제하는 너희 경건한 신앙인이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악하고 죄인이라고 정죄하는 저 주인돈을 횡령한 도둑놈이라도 하나님은 선하다고 칭찬해 줄 수 있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소외시키는 죄를 범하지 말라는 말씀 입니다.
기독교는 에덴동산 이야기에서 예수가 선과 악의 경계를 허물었다는 사실을 주목하지 못해서 그 이야기를 순종의 문제로만 파악하여 모두에게 순종하기만 바라는 폭력적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선악을 아는 게 잘못이라는 개념은 부모, 교사, 판사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신앙의 문제로 판단하여 죄인을 만드는 것을 말 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1:18- 31 에서 성소수자 문제를 포함한 온갖 당시의(윤리나 법은 시대에 따라 바뀌므로 성서 시대를 오늘에 기준으로 삼으면 안 됩니다) 죄악상을 열거한 후에
신앙인에게 첫 번째 주는 말씀으로 2:1 에서 판단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어서 2:4 에서 하나님은 용납하셨는데 따르지 않고 판단하여 용납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행위라고 합니다.
성서에서 판단하지 말라는 대상에 사회에 불의를 일으키는 기득권세력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힘없고 가난하여 소외된 사람이 대상 입니다. 예수는 사회 불의에 격렬하게 저항 했습니다.
여러분과 가정이 평화하기를 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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