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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창세기에서 길을 잃다. 1

by 【고동엽】 2006. 7. 10.
기독교, 창세기에서 길을 잃다. 1
(신앙인의 폭력성 문제)
유전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기독교가 없어져야 한다고 말 합니다. 기독교가 반 평화세력이기 때문이라면서요. 기독교 학자와 이야기해 보면 잘못 믿는 사람들 때문이라고 말하는데 자기가 보니 교리 자체가 반평화적이고 역사가 그걸 입증한다고 말 합니다. 십자군 전쟁, 마녀사냥 노예무역 등 예수이름으로 저지른 만행에 할 말을 잃게 되고요, 오늘날 인권증진 덕에 정도가 약해진 거지 신앙인의 폭력성은 비신앙인을 능가 합니다.
성서시대에 예수에게서 화해와 평화를 본 사람은 바울이 유일 합니다. 바울은 예수를 대속제물이 아니라 화목제물이라고 한 최초의 사람 입니다.(로마3:25)
바울에게서의 영향이 분명한 누가는 예수가 이 땅으로 온 목적은 평화 때문이라고 합니다.(누가2:14)
예수가 예루살렘 성을 보고 멸망을 예견하시어 우십니다.
'오늘 평화의 일을 알았다면 좋았을 텐데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라'(누가19:41-44)
'보살핌 받는 날'은 원어에서 'visit' 로서 영원이 이땅으로 왔다는 의미로서 하나님나라를 말 합니다. 즉 예루살렘이 하나님나라가 임했음을 알지 못하여 평화하지 못하다고 우신 겁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사두개파, 바리새파, 에세네파, 젤롯당, 하베림, 암 하레츠(땅의 사람들) 등으로 분열되어 서로 적대하였습니다. 결국 AD 70 년에 로마에 의해 예루살렘성은 파괴되고 국가는 멸망하여 2 천 년 동안 나라없는 백성이 됩니다.
로마는 관대한 정책을 써서 점령한 국가의 왕과 종교를 인정하고 자치제를 시행했습니다. 로마가 멸망시킨 국가는 2 나라 뿐인데 경쟁국가로서 한니발이 12 년 동안이나 로마 근교까지 와서 괴롭혔던 카르타고와 끝까지 용납할 줄 모르고 배타적인 이스라엘 입니다.
평화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요. 예수가 바라는 건 평화인데 신앙인이 왜 일반인보다 더 폭력적이고 배타적인가를 살펴 보는 게 우리의 목표 입니다. 유대교 기독교 공히 창세기에 그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에덴동산에 지식나무가 있고 그 열매를 선악과라 하는데 하나님이 먹지말라 명령한 것을 어기고 아담과 이브가 먹었습니다.
2 가지 사실이 발생 합니다.
1. 불순종했고, 그로인해 죄가 발생했다.
2. 선과 악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이 이야기가 성경에 쓰인 배경 입니다.
2 가지 설이 있습니다.
1. 모세가 BC 13 세기에 썼다.
2. 벨하우젠의 문서설로서 고대부터 여러문서(J E P D)가 파편적으로 전해 오던 걸 BC 5 세기 포로기 시에 수집하여 성서로 편집했다. 문자의 역사가 5 천 년을 넘지 않으므로 오래동안 구전으로 전해오는 이야기가 성서가 된 것은 분명 합니다.
그 이유는 선과악을 아는 게 잘못이라는 개념이 전혀 없던 시기에 선악과 이야기가 기록되었기 때문 입니다.
칼 야스퍼스는 BC 8 세기부터 AD 2 세기까지 천 년 간을 인류 정신문명이 정립된 축의 시대라고 합니다. 이때 현자들은 지혜와 선을 정신문명의 2 축으로 삼았습니다.
이러한 때 그 의미도 모르며 선과악을 아는 게 잘못이라는 개념이 성서에 기록된 것이 신비 합니다.
유대교나 기독교 공히 선악을 알게 되는 게 잘못이라는 사실은 버려두고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다는 것에만 주목했습니다. 기독교는 거기에서 성서에도 없는 원죄개념을 만들었습니다.(죄 개념은 따로 글 올리겠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이 통치하고 지배하기 위해 본질은 무시하고 명령에 순종하는 문제만 부각시킨 겁니다.
중국에도 비슷한 일이 있습니다. 사마천의 사기를 보면, 유방이 천하를 통일하고 한무제로 등극을 하였는데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신하들이 궁정에서 툭하면 취해 싸우고 칼로 기둥을 치고 해서 통제가 안 됩니다. 그래서 동중서가 당시 제자백가 중에 유학을 선택하여 100 여 명의 학자들로 하여금 유학을 연구하게 합니다. 그 유학의 예절에 따라 신하들의 궁정 출입을 통제할 수 있었습니다. 유학이 국가질서를 세우는 데 적합하기 때문에 즉 사람들을 복종시킬 수 있기 때문에 중국의 국가이념이 되었습니다
다시 에덴동산의 이야기로 가서 유대교는 아직도 선악과의 의미를 모르고 예수에게 와서야 그 비밀이 해명됩니다.
예수는 선과 악을 나누지 않고 악을 용납 합니다. 엄밀히 말해서는 악과 악인을 분리 대응 합니다. 악인인 세리와 창녀 등 죄인을 용납 합니다. 그렇게 평화를 구합니다.
예수가 순진한 평화주의자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평화는 기득권자들, 지배자들이 도전하지 말라고 하는 말로 쓰이기 때문 입니다. 예수는 차별하고 소외시키는 기득권자들에게는 격렬히 저항했습니다.
이제 우리가 목표했던 신앙인들이 왜 더 폭력적인가에 대해 말씀드립니다.
철학자들이 이 문제를 연구 했습니다.
카렌 암스트롱은 신앙인 중에서도 근본주의자들이 더 폭력적인데 그들은 신의 사랑을 체험해 보지 못해서 사랑할 수 없다고 합니다.(신을 위한 변명)
윤리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는 신앙인들이 '전통'과 '정통'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해서 신앙인들이 폭력성을 띈다고 합니다.(테러시대의 철학)
필자가 이 말이 하고 싶어서 긴 이야기를 했습니다.
대부분의 신학자나 목사들은 5 백 년 전의 종교개혁신학을 정통이라하며 거기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이나 종교개혁신학은 정통이 아니라 전통 입니다. 루터, 칼빈, 웨슬리 등의 종교개혁 30 년 전쟁으로 유럽인구의 삼분지 일이 죽었습니다. 그들은 평화를 모릅니다. 선악을 아는 문제는 무시하고 지배하고 통제하기 위해 에덴동산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해서 있지도 않는 원죄를 지었다고 우긴 겁니다.
예수와 성서저자로 돌아 가는 것이 정통 입니다.
신이 주는 평화를 얻는 것이 구원 입니다.
(다음 주에 예수설교 악한 청지기 비유(누가 16:1-8)를 분석하여 악인의 용납문제를 살펴 보겠습니다)
여러분과 가정이 평화하기를 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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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창세기에서 길을 잃다. 1
(신앙인의 폭력성 문제)
유전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기독교가 없어져야 한다고 말 합니다. 기독교가 반 평화세력이기 때문이라면서요. 기독교 학자와 이야기해 보면 잘못 믿는 사람들 때문이라고 말하는데 자기가 보니 교리 자체가 반평화적이고 역사가 그걸 입증한다고 말 합니다. 십자군 전쟁, 마녀사냥 노예무역 등 예수이름으로 저지른 만행에 할 말을 잃게 되고요, 오늘날 인권증진 덕에 정도가 약해진 거지 신앙인의 폭력성은 비신앙인을 능가 합니다.
성서시대에 예수에게서 화해와 평화를 본 사람은 바울이 유일 합니다. 바울은 예수를 대속제물이 아니라 화목제물이라고 한 최초의 사람 입니다.(로마3:25)
바울에게서의 영향이 분명한 누가는 예수가 이 땅으로 온 목적은 평화 때문이라고 합니다.(누가2:14)
예수가 예루살렘 성을 보고 멸망을 예견하시어 우십니다.
'오늘 평화의 일을 알았다면 좋았을 텐데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라'(누가19:41-44)
'보살핌 받는 날'은 원어에서 'visit' 로서 영원이 이땅으로 왔다는 의미로서 하나님나라를 말 합니다. 즉 예루살렘이 하나님나라가 임했음을 알지 못하여 평화하지 못하다고 우신 겁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사두개파, 바리새파, 에세네파, 젤롯당, 하베림, 암 하레츠(땅의 사람들) 등으로 분열되어 서로 적대하였습니다. 결국 AD 70 년에 로마에 의해 예루살렘성은 파괴되고 국가는 멸망하여 2 천 년 동안 나라없는 백성이 됩니다.
로마는 관대한 정책을 써서 점령한 국가의 왕과 종교를 인정하고 자치제를 시행했습니다. 로마가 멸망시킨 국가는 2 나라 뿐인데 경쟁국가로서 한니발이 12 년 동안이나 로마 근교까지 와서 괴롭혔던 카르타고와 끝까지 용납할 줄 모르고 배타적인 이스라엘 입니다.
평화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요. 예수가 바라는 건 평화인데 신앙인이 왜 일반인보다 더 폭력적이고 배타적인가를 살펴 보는 게 우리의 목표 입니다. 유대교 기독교 공히 창세기에 그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에덴동산에 지식나무가 있고 그 열매를 선악과라 하는데 하나님이 먹지말라 명령한 것을 어기고 아담과 이브가 먹었습니다.
2 가지 사실이 발생 합니다.
1. 불순종했고, 그로인해 죄가 발생했다.
2. 선과 악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이 이야기가 성경에 쓰인 배경 입니다.
2 가지 설이 있습니다.
1. 모세가 BC 13 세기에 썼다.
2. 벨하우젠의 문서설로서 고대부터 여러문서(J E P D)가 파편적으로 전해 오던 걸 BC 5 세기 포로기 시에 수집하여 성서로 편집했다. 문자의 역사가 5 천 년을 넘지 않으므로 오래동안 구전으로 전해오는 이야기가 성서가 된 것은 분명 합니다.
그 이유는 선과악을 아는 게 잘못이라는 개념이 전혀 없던 시기에 선악과 이야기가 기록되었기 때문 입니다.
칼 야스퍼스는 BC 8 세기부터 AD 2 세기까지 천 년 간을 인류 정신문명이 정립된 축의 시대라고 합니다. 이때 현자들은 지혜와 선을 정신문명의 2 축으로 삼았습니다.
이러한 때 그 의미도 모르며 선과악을 아는 게 잘못이라는 개념이 성서에 기록된 것이 신비 합니다.
유대교나 기독교 공히 선악을 알게 되는 게 잘못이라는 사실은 버려두고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다는 것에만 주목했습니다. 기독교는 거기에서 성서에도 없는 원죄개념을 만들었습니다.(죄 개념은 따로 글 올리겠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이 통치하고 지배하기 위해 본질은 무시하고 명령에 순종하는 문제만 부각시킨 겁니다.
중국에도 비슷한 일이 있습니다. 사마천의 사기를 보면, 유방이 천하를 통일하고 한무제로 등극을 하였는데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신하들이 궁정에서 툭하면 취해 싸우고 칼로 기둥을 치고 해서 통제가 안 됩니다. 그래서 동중서가 당시 제자백가 중에 유학을 선택하여 100 여 명의 학자들로 하여금 유학을 연구하게 합니다. 그 유학의 예절에 따라 신하들의 궁정 출입을 통제할 수 있었습니다. 유학이 국가질서를 세우는 데 적합하기 때문에 즉 사람들을 복종시킬 수 있기 때문에 중국의 국가이념이 되었습니다
다시 에덴동산의 이야기로 가서 유대교는 아직도 선악과의 의미를 모르고 예수에게 와서야 그 비밀이 해명됩니다.
예수는 선과 악을 나누지 않고 악을 용납 합니다. 엄밀히 말해서는 악과 악인을 분리 대응 합니다. 악인인 세리와 창녀 등 죄인을 용납 합니다. 그렇게 평화를 구합니다.
예수가 순진한 평화주의자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평화는 기득권자들, 지배자들이 도전하지 말라고 하는 말로 쓰이기 때문 입니다. 예수는 차별하고 소외시키는 기득권자들에게는 격렬히 저항했습니다.
이제 우리가 목표했던 신앙인들이 왜 더 폭력적인가에 대해 말씀드립니다.
철학자들이 이 문제를 연구 했습니다.
카렌 암스트롱은 신앙인 중에서도 근본주의자들이 더 폭력적인데 그들은 신의 사랑을 체험해 보지 못해서 사랑할 수 없다고 합니다.(신을 위한 변명)
윤리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는 신앙인들이 '전통'과 '정통'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해서 신앙인들이 폭력성을 띈다고 합니다.(테러시대의 철학)
필자가 이 말이 하고 싶어서 긴 이야기를 했습니다.
대부분의 신학자나 목사들은 5 백 년 전의 종교개혁신학을 정통이라하며 거기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이나 종교개혁신학은 정통이 아니라 전통 입니다. 루터, 칼빈, 웨슬리 등의 종교개혁 30 년 전쟁으로 유럽인구의 삼분지 일이 죽었습니다. 그들은 평화를 모릅니다. 선악을 아는 문제는 무시하고 지배하고 통제하기 위해 에덴동산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해서 있지도 않는 원죄를 지었다고 우긴 겁니다.
예수와 성서저자로 돌아 가는 것이 정통 입니다.
신이 주는 평화를 얻는 것이 구원 입니다.
(다음 주에 예수설교 악한 청지기 비유(누가 16:1-8)를 분석하여 악인의 용납문제를 살펴 보겠습니다)
여러분과 가정이 평화하기를 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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