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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예화모음 95편

by 【고동엽】 2023. 4.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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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마르십니까?
 
가정에서 사용하는 스펀지는 용도가 놀라울 정도로 다양합니다. 스펀지를 가지고 설거지를 하거나 마루바닥을 닦거나 아이들을 목욕시키고 차를 닦기도 합니다. 스펀지가 이처럼 다양한 용도로 쓰일 수 있는 것은 거듭하여 물을 빨아들였다 내놨다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영적 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앤드류 머리는 그 원리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습니다. "삶이 존재하는 곳에는 어디에나 받아들이고 내놓고 하는 일이 계속 일어난다… 받아들이고 내놓고 하는 일은 상호 의존하는 관계이기 때문에 많이 내어 줄 수록 많이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우리가 가진 것들을 내어 주어 마음이 비어있을 때에만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충만함이 들어올 수 있다."
예수님은 목마른 사람들에게 그에게로 와서 마시라고 초대했습니다 (요 7:37). 예수님은 누구보다도 주님을 믿어야 할 사람들에게 말씀하심으로써 성령께서 그들을 구원의 기쁨으로 채우시게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를 위해 살며 그를 섬길 때 당신은 언제나 성령이 당신 안에 충만함으로써 그분이 당신 안에서 또 당신을 통해서 역사 하셔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혹시 당신은 지금 가슴을 죄는 시련 속에서 목말라 하고 있지 않습니까?

손에 쥐고 있는 스펀지가 바짝 말라 물을 흠뻑 빨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생수의 필요를 느끼는 사람들만이 그리스도로 갈증을 해소할 수 있다는 것을 여기서 교훈으로 배울 수 있습니다. 생명샘에 와서 마시니 나 이제 행복합니다. 영혼이 만족합니다. 생명 샘에 와서 마시니 놀랍고 풍성한 물을 얻어 갑니다 .하나님을 찾는 갈급함은 생명수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만 해소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부자 3대를 못 간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경주 최 부잣집의 만석꾼 전통은 이 말을 비웃기라도 하듯 1600년대 초반에서 1900년 중반까지, 무려 300년 동안 12대를 내려오며 만석꾼의 전통을 가졌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1950년, 전 재산을 스스로 영남대 전신인 ‘대구대학’에 기증함으로써, 스스로를 역사의 무대 위로 던지고 사라졌다. 그렇다면 이 가문이 그동안 300년을 넘게 만석꾼 부자로 지켜올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1. 절대 진사 이상의 벼슬을 하지 말라.
높은 벼슬에 올랐다가 휘말려 집안의 화를 당할 수 있다.

2. 재산은 1년에 1만석 이상을 모으지 말라
과욕은 화를 부른다. 1만석 이상의 재산은 이웃에 돌려 사회에 환원했다.

3. 나그네를 후하게 대접하라.
누가 와도 넉넉히 대접하여, 푸근한 마음을 갖게 한 후 보냈다.

4. 흉년에는 남의 논, 밭을 매입하지 말라.
흉년 때 먹을 것이 없어 싼값에 내 놓은 논밭을 사서 그 사람들의 마음을 원통케 해서는 안 된다.

5. 가문의 며느리들이 시집오면 3년 동안 무명옷을 입혀라.
내가 어려움을 알아야 다른 사람의 고통을 헤아릴 수 있다.

6. 사방 100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사람들이 먹을 것이 없어 부족을 느낄 때, 최소한 사방 100리 안에 백성들의 먹는 문제는 집안이 나서서 해결했다.

이상은 [경주 최 부잣집 300년 부의 비밀]이란 책에 나오는 글이다. 움켜쥐는 것이 가지는 것이 아니라, 나누어 줄 때 더 많이 가지게 되는 비결을 가르쳐 주는 역사의 지혜이다. 힘들고 어려운 이 때, 우리 크리스천들이 이런 만석꾼들이 넘쳐나기를 기대해본다. 우리 모두가 만석꾼의 마음을 소유한 사람들이 되기를 또한 소망한다. 그래서 아름답고 선한 소문들이 여기저기서 들려오면 참 좋겠다. 

 

 
 
평생 모은 재산
 
한 80대 실향민이 평생 모은 재산 270억원을 KBS에 기부했습니다. 평양 태생인 강태원(83세)씨는 지난 8월 16일 현금 200억원이 든 통장과 경기도 평택시에 있는 1만 6000평부지, 용인시 기흥읍 87평형 빌라 1채 등 70억원 상당의 부동산을 기탁했습니다. 강씨는 작년 7월에도 100억원 상당의 부동산을 충북 청원군 꽃동네 현도사회복지대학에 기증한 적이 있습니다.

평양 지주였던 선친은 평생 모은 돈으로 논과 밭 100만평을 사서 소작인에게 나눠주고 강옹을 포함한 두 형제에게는 한 푼도 남겨 주지 않았는데 그 당시 그의 어머니는 "아버지가 너 잘되라고 그런 것"이라며 "돈은 모름지기 자기가 벌어서 써야지 부모덕을 보면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고 회상했습니다.

평소 모금을 통해 불우이웃을 도와주는 KBS 1TV 의 '사랑의 리퀘스트'를 시청하면서 KBS에 재산을 기탁하기로 결심했다는 강씨는 "자식을 위해서는 한 푼도 물려주지 않아야 한다는 선친(강봉수. 1942년 작고)의 유언을 받들어 재산을 모두 사회에 내놓게 됐다"고 말하면서 "1남 4녀인 내 자식들은 재학까지 공부 가르치고 결혼시켜 아파트까지 사줬으니 더 이상 물려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어여." 하며 담담하게 말했습니다.

평양서 보통학교(초등학교) 5학년까지 다닌 게 학력의 전부인 강씨는 광복 때 혈혈단신 월남해 전국을 떠돌며 막노동을 하여 간신히 모은 돈으로 서울 광장시장에서 원단가게를 차렸고 그 뒤에 서울 시내버스 회사 '동원여객'을 운영하였습니다. 60년대 제3한강교(현 한남대교)가 건설되기 이전에 한강 근처 땅을 한 평당 2000원에 사둔 땅이 큰 돈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안 쓰고 안 먹고 신용 지키고 남보다 잠 안 자고 그러면 돈이 따라오는 거야.먹는 것은 주로 쉰 떡을 사먹었지. 쉰 떡은 싸고 소화가 잘 안돼 오래 배가 부르거든"라는 그의 말에서 우리는 그가 자신에 대해서는 얼마나 구두쇠이며 남에게 대해서는 얼마나 자비로움이 많은가를 읽을 수 있습니다.

작년 꽃동네 성금 기탁 때는 인터뷰를 꺼렸지만 "이번에는 나 같은 사람이 한명이라도 더 있었으면 하는 생각에 기자들을 만나기로 했다"고 그의 바램을 이야기했습니다. 그 큰 재산을 기부한 뒤 "재산을 기탁하고 나니까 기분이 명량하고 상쾌해요. 오늘 밤에 잠이 잘 올 것 같아요."라 했습니다. 현재 폐가 좋지 않아 제주도 서귀포에서 살고 있는 강옹은 "공기 좋은 곳에서 살면서 어려운 사람을 도우며 남은 생을 마감하고 싶다"고 말했다.

우리 모두는 이 세상에서 살다가 저 세상으로 갑니다. 내것처럼 사용하던 모든 물질들을 하나 남김없이 다 그대로 두고, 우리의 육체마저 훌쩍 벗어버리고 떠납니다. 지금 갖고 있는 것이 "네 것 아니다"란 말에 저항할 생각도 못하고 그냥 떠나갑니다.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많이 벌었느냐 묻지 않으시고 어떻게 사용하다 왔느냐 물으십니다. "남에게는 후하게 자신에게는 인색하게" 하는 것이 재물의 올바른 사용법이란 것을 다시 배우게 됩니다. 
 

 

 
 

최부자의 나눔정신

경주 최씨네는 12대 300년 동안을 만석꾼으로 내려온 집안이었다.
단지 부자였을 뿐 아니라 사방 백 리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흉년에는 땅을 사지 마라 등의 가훈을 통해 이웃에 대한 사랑과 배려를 실천에 옮겨 존경 받았다.

찾아오는 과객은 귀천을 구분하지 말고 후하게 대접하라도 이 집안이 지키는 여섯 개의 가훈(六訓) 중 하나였다.

한말 의병장 신돌석 최익현을 비롯해 손병희 최남선 정인보 안희제 여운형 조병옥 등 숱한 인사들이 이 집 사랑방을 다녀갔다. 손님이 많을 때는 큰 사랑채, 작은 사랑채 해서 100명이 넘을 때도 있었다.

최부잣집의 1년 소작 수입은 쌀 3000석 정도였는데, 이 가운데 1000석을 손님 접대에 썼다. 손님이 떠날 때면 과메기 한 손(두 마리)과 하루 분의 양식을 쥐여보냈다.

최부잣집은 재산을 모으되, 만 석 이상은 모으지 말라는 철칙도 갖고 있었다. 혹시 논을 더 샀더라도 재산이 1만 석을 넘지 않으려면 소작료를 낮춰 적게 받을 수밖에 없었다. 소작인들은 최부잣집의 논이 늘어나면 그만큼 소작료가 떨어지기 때문에 최부자네가 땅 사는 걸 배 아파하기는커녕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정(情) 가름
 
옛날 시골에 혼사·상사가 있으면 마을 사람들은 그 집에 가 대사를 돕는다. 대사가 끝나 그 대가로 곡식을 퍼주면 "정가름인데 뭘~" 하며 한사코 받지 않는다. 정가름이란 정을 나눈다는 관행으로 우리나라에서 다양하게 발달한 정서 문화재요 민족 특허품이다. 보릿고개에 양식이 떨어지면 동네 여인들은 무리 지어 산나물을 뜯어 이고 좀 사는 집을 찾아간다. 뒤란에 멍석을 펴고 산나물을 쌓아놓으면 그 집 마님은 한솥에 밥을 지어 먹이고 돌아갈 때 곡식 한 됫박씩 퍼준다. 강매행위처럼 보이지만 가진 사람 못 가진 사람 공존하는 산채 정가름이다.

속칭 돼지사돈이라는 정가름도 있다. 좀 사는 집에서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의 수복을 비는 뜻에서 3-5-7-9 홀수 돼지새끼를 사서 이웃에 나누어준다. 이 복돼지가 자라 새끼를 낳으면 그중 한 마리를 돌려주는 조건이요 그렇게 돌아온 새끼를 다시 퍼뜨려 나간다. 이렇게 온 고을에 퍼뜨려 한 조상어미 젖을 먹고 자란 돼지사돈끼리 친화력을 갖는다. 이것이 복돼지 가름이다. 석덤 가름이라는 것도 있다. 여유가 있는 집 마님은 끼니마다 뒤주에서 쌀을 낼 때 식구 먹을 양식만 내는 것이 아니라 세 몫을 더 내 밥을 짓게 했다. 셋을 더한다 하여 석덤 이라고 하는 이 잉여의 밥은 그 마을에 못먹고사는 사람의 예상 몫이요, 뒤란 울타리 개구멍을 통해 정이 갈라져나갔다. 그래서 개구멍을 남도에서는 정구멍 이라고도 한다.

이렇게 한솥밥, 한 어미젖을 공식한 정가름 사이는 그를 변제할 의무는 없으나 대사가 있거나 품이 필요할 때 타산 없이 노력을 제공한다. 그래서 대사 끝에 곡식을 퍼주면 정가름 사이인데… 하고 사양을 한다. 일제 때 농촌 생활실태를 조사해 놓은 것을 보면 제 식구 먹고 살 수 있는 가구는 겨우 30%요, 70%는 노력 이외에 먹고 살 아무런 대책이 없는데도 조금도 불안하거나 각박하지 않고 그토록 유쾌하게 살아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면에 만연된 정가름 때문이었다.

도시화로 징발되고 없어진 이 정가름 문화를 한국에 진출한 외국인 업체들이 도입, 한솥밥 더불어 먹는 기회를 늘리는 업체들이 늘고있다는 보도가 있었다. 오히려 한국의 경영자들은 개인주의를 북돋우는 구미경영으로 빗나가고 있는데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다. 
 
 
 
나누는 계절
 
99년 11월, 미국에서는 한 손으론 바지춤을 붙잡고 다른 손으론 벽에 의지한 채 25센트 동전을 구걸하던 노숙자 레이먼드 로렌스를 도운 선한 사마리아 사람 빈센트 존스씨의 이야기가 단연 화제였다.

존스씨는 뉴욕 맨해튼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종종 배설물을 몸에 묻힌 채 술에 찌들어 고함지르며 돌아다니던 거지 로렌스를 3년 간 계속 만나면서 관심을 기울였고 그가 가족을 만날 수 있도록 도왔다는 것.
그 기사를 읽으면서 더 인상 깊었던 것은 존스씨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도록 한 어머니의 유언이었다.

"일으켜 세울 생각이 없으면 내려다보지 말아라."

나눠 가질 줄 아는 사람은 자신이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내어놓는다.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받은 것을 남과 함께 나누어 가지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핑계가 있으면 나누지 못한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만이 나눌 수 있다.

이 성탄시기에 이웃들에게 내가 가진 복음과 물질과 시간을 나눔으로써 보다 더 큰 기쁨과 행복으로 풍성해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나누며 사는 사람들
 
세계 제1의 부자 빌게이츠는 돈을 모아서 나누는 방식을 택하였다.

빌게이츠는 1975년 마이크로소프트사를 설립하여
지금까지 퍼스널 컴퓨터의 운영체제에 혁신을 일으키며
30년도 채 안 되는 역사에 대를 이어도 이룰 수 없을 세계 제일의 부를 이루었다.

이 후 그는 가진 부를 쉼 없이 나누어 주며
보통사람으로는 꿈도 꿀 수 없는 천문학적인 돈을 고통당하는 이에게 나눠주고 있다. 자신의 생애 마지막에는 모든 돈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한다.

여기에 또 전혀 다른 나눔의 방식을
행하는 이가 있다.

그의 이름은 인터넷의 모든 주소 앞에 있는
월드와이드웹(www) 발명자인데 현재 스위스 제네바의 유럽소립자 물리학연구소(CERN)의 버너스리박사다.

1989년 3월 과학자들이 정보체계를 쉽게 공유할 수 있는 수단을 개발하자고 제안하며 ‘www’를 만들었다.
그는 원래 연구에 너무 몰두하여 건망증이 심하여 만난 사람 얼굴도, 이름도 알지 못하여 이 프로그램을 개발하게 되었다.
이 후 주위에서 너무나 쉽게 만들어졌지만 획기적 발명이기에 주변에서는 특허를 출원하라 했다. 1991년 주위의 권고를 물리치고 이를 무료로 공개했다.

기술은 많은 사람들이 공유해야 한다는 그의 철학 때문이다. 돈을 벌고자 했다면 빌게이츠보다 더 많이 벌었을 수도 있었을지도 모른다.

지난 15일 핀란드 정부가 제1회 밀레니엄 기술상을 안겨 줬다. 당연한 보상이다. 그러나 상금 1백만유로(한화 14억)는 그 공헌에 비해 애교스런 미미한 액수. 그러나 그는 위대한 정신의 소유자라는 칭호를 주저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적은 금액을 평생을 꾸준히 후원하는 이도 있고
평생을 구두쇠처럼 벌어 몽땅 사회 환원하는 이도 있고
시간만 생기면 불우시설에 달려가 봉사하는 이도 있습니다.

어떤 방식이든 나눔은 사회를 살맛나게 합니다.
이 세상은 나누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눅 6:38) 
 
 
 
주어라
 
아무리 가진 것이 많아도 나누어 줄줄 모르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입니다. 가진
것 없어도 남에게 줄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진정 풍요한 사람입니다.

유치원 어린이들에게 담임선생님이 \"가난한 어린이에게 인형을 나누어 줄테니
집에서 인형을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이 어린이가 집에 와서 자기 인형들을 눕혀
놓고 유치원에 가져 갈 인형을 골랐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낡은 인형은 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일 좋은 인형을 골랐습니다. 그리고 그 인형의 옷을 갈아
입히고 벽난로 옆에서 따뜻하게 재웠습니다.

다음날 아침,이 어린이는 섭섭했습니다. 그때 아버지가 \"너 왜 우느냐?\"고 물었
습니다. 이 아이는 제일 좋은 인형을 남에게 주려고 하니까 섭섭해서 운다고 대답
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괜찮아. 하나님은 그것보다 더 좋은 것으로 갚아 주실 거야.\"라고 했습니다. 이 아이는 자기의 인형을 갖다가 가난한 어린이에게 기쁜
마음으로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해 크리스마스에 아버지는 시중에서 제일 좋은 인형을 사다가 그 어린 이에게 선물로 주었습니다.

이웃을 위해서 무엇인가 나누어 주는 우리가 될 때에,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축 복이 되는 것이며,오늘의 이 결단이 내일의 축복을 약속받는 것입니다. 
 

 

 
 
누룽지 한 그릇에 500만원?
 
서울 하나로교회 유정옥사모의 간증이다. 교회건물은 12층에 있고 6층에 목욕탕이 있었다. 인근 평화시장 등에서 큰 가게를 운영하거나 세를 준 여주인들이 모여 계속 음식을 시켜 먹으며 잡담을 했다.
그들의 일상을 보니 아예 돈 버는 기계들 같았다.
나와 같이 목욕하던 한 부인이 “아! 뜨끈한 방에서 몸좀 지지고 숭늉이나 먹었으면 좋겠네”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 말에 영감을 얻어 엘리베이터와 목욕탕에 ‘12층으로 오세요.
구수한 누룽지탕을 드시고 편안히 주무실 수 있습니다.
하나로교회는 당신을 기다립니다’라는 글을 써붙였다.
아이들 밥을 하루 두 차례나 하기 때문에 누룽지는 넘쳐흘렀고 교회 모자실에 따끈하게 불을 넣었다. 당시는 찜질방이 없었으므로 이 소문은 금방 퍼졌고 교회 누룽지탕을 먹겠다고 부인들이 모여들었다.
수억원 아니 수십억원씩을 주무르는 여인들이 누룽지가 최고의 음식이라며 교회에 찾아와 맛있게 먹었다.

이렇게 찾아오던 여인들이 내가 힘들게 탁아소를 운영하며 목회를 돕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요즘 세상에 이런 분이 어디 있느냐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교회가 봉사했다고 칭찬을 받는다면 간호사가 간호했다고 칭찬 받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닌가? 그저 나는 부인들에게 전도한다는 생각으로 틈만 나면 누룽지를 맛있게 끓여냈다.
그런데 하나님은 놀라운 분이셨다. 이 누룽지가 매월 우리가 필요한 500만원을 만들어내는 씨앗이 되었던 것이다.
누룽지 한 그릇에 수십만원까지 내고 사라져버리는 천사들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 교회는 모두가 무료였다. 한번도 돈을 받은 적이 없었다.
탁아소도 무료요,누룽지탕도 무료였지만 모든 비용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산해주신 것이다.

탁아소 운영비도 하나님이 온전히 책임져 주셨다. 요즘도 가끔 그때 아이들이 벌써 대학생이 되었다며,누룽지탕을 먹던 분들이 권사가 되었다며 전화를 한다. 나는 목욕탕에서 때를 밀어주며 전도를 했다. 대상자가 물색되면 일단 계속 그녀를 위해 무조건 기도한 뒤 말문을 연다. K는 내가 전도한 후 그녀의 말을 잘 들어주고 최선을 다해 상담을 했더니 아예 친구가 되었다.

경제적으로 부유했던 그녀는 우리 교회 성도가 되자 초신자임에도 놀라운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내가 새옷을 사주면 거절하니까 일부러 세탁을 해서 가져왔고 온풍기 의자 승합차까지 우리 교회가 필요한 비품들을 기다렸다는 듯이 하나님께 드렸다. 하나님은 누룽지값에다 보너스까지 넘치게 주신 것이다. 이런 변화는 우리에게 ‘예수믿는 맛’을 느끼게 한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 6:38) 

 

 
 
록펠러의 건강법-베푸는 삶
 
존 록펠러의 인생은 거침이 없었다. 30세에 100만달러를 모았고 43세에 미국 최대의 정유회사를 세웠다. 53세에는 세계에서 가장 재산이 많은 대부호가 됐다.
그때 그는 음식을 전혀 소화해내지 못하고 눈썹과 머리카락 등이 빠지면서 죽음만을 기다려야 하는 불치병에 걸렸다.
이제 남은 삶은 고작 1년. 그는 온종일 우울한 표정으로 창밖을 응시하며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창가에서 성경을 읽던 록펠러의 시선이 한 곳에 멈추었다.

디모데전서 6장 10절. “돈을 사랑함이 일만악의 뿌리가 되나니….” 그는 이 말씀에 깨달음을 얻어 자신이 가진 많은 재물을 교회와 구호단체에 내놓았다.
그때부터 놀랍게 건강이 회복돼 98세까지 살았다.

욕심의 자물쇠로 마음의 문을 닫으면 기쁨과 건강을 잃어버린다.
그러나 이웃을 위해 사랑을 베풀면 건강과 행복을 선물로 얻는다. 
 
 
록펠러의 베푸는 삶
 
세계 최대의 부호로 꼽히는 록펠러는 중년의 나이에 사업에 쏟는 스트레스로 인해 심한 노이로제와 소화불량, 무력감과 악몽 등에 시달리며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담당 의사로부터 죽음을 준비하라는 말을 듣게 되자 그는 자신이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았습니다.
그때까지 그의 인생철학은 오로지 나를 위하여 돈을 벌기 위해서 산다.
그것이 그의 인생철학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자기중심이었습니다.

욕심중심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돈을 위해서 살았고 그 많은 물질로 오직 자신만을 위해 사용했다는 것을 깨닫고 그는 하나님 앞에 통회자복하고 회개한 후 자신의 인생철학을 완전히 바꾸었습니다.“이제부터는 하나님을 위하여 이웃을 위해서 내 자신을 비워버리겠다.

그래서 대학과 교회를 세우고 교육과 선교사업을 후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위하여 이웃을 위하여 자기를 비우고 물질을 사용하자 사형선고를 받도록 악화되었던 건강이 회복되어 청춘이 되살아나고 무려 98세까지 장수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는 생전에 4,928개의 교회와 24개의 대학을 세웠습니다.

한 사람이 한재벌이 약 5,000여개의 교회를 세웠다는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24개의 대학을 세웠다고 하니 어마어마합니다.
수많은 복지센타를 설립했고 자선사업에도 7억 5천만불 약 9천억원을 기부해 지금까지 사회사업에 투자한 금액으로는 최고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루도 빠짐없이 123만원을 2천년동안 매일 지급한 것과 같은 금액입니다.
록펠러 재단에서는 지금도 매년 1만명의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있으며 그의 장학금을 받은 사람 중에 무려 60여명에 달하는 사람이 노벨상 수상자가 된 것입니다.
그가 물질에 잡히고 욕심에 잡히고 탐욕에 잡혔을 때는 그의 생명을 잃게 되었습니다.
취하고 취하고 취하려고 했지만 다 잃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비워 버리고 하나님을 위해서 남을 위해서 살게 될 때 하나님은 생명도 건강도 축복도 행복도 돌려 주셨던 것입니다. 
 
 
재난속에서 만난 사마리아인
 
어떤 사람이 자기 힘으로 열심히 일해서 자기 가족들을 돌보고 있었다. 그런데 하루는 까
마귀가 눈먼 올빼미를 먹여 살리는 것을 보았다. 그는 자신을 생각해 보았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일할 필요가 무엇인가? 사람들은 맘씨가 좋아서 가난한 사람을 잘 도와 주는데?"

그래서 그는 일하는 것을 그만 뒀는데 , 오래지 않아서 그는 거지처럼 가난해졌다. 이 사람
의 형편을 본 지혜로운 이웃 친구가 물었다. "당신은 왜 일을 그만 두었소?" 그는 까마귀가
눈먼 올빼미를 먹여 살리는 것을 봤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그 이웃 친구는 말했다. "여보시오, 당신은 왜 하필 눈먼 올빼미 신세가 되려는 거요? 왜
까마귀 노릇을 하지 못하는거요? 당신은 눈먼 사람이 아니지 않소? 당신은 까마귀처럼 다
른 사람을 도울 수 있어야 하오. 당신 아내와 자녀들을 도와 주어야 할 것 아니오?"

"당신 말이 옳소. 나는 어리석었소. 이제 마음을 고쳐 먹어야겠소. 하나님께서 내게 남을
도울 수 있는 힘을 주셨는데, 눈먼 올빼미처럼 남에게서 얻어 먹고만 있어서야 되겠소?" 

 
 
 
우리를 눈물나게 하는 것들
 
1. 주인 아주머니의 갑자기 방세 올려 달라는 소리
2. 지갑에 아무 것도 없이 주민등록증만 있을 때
3. 쌀도 없고 라면도 없어 냉수 한 사발 먹고 잘 때
4. 전세돈 없어 월세방 구하러 다닐 때
5. 도둑이 들어와도 빈 손으로 보낼 때
6. 사랑하는 사람과 약속해 놓고 돈 없어 못 나갈 때
7. 예수님을 그토록 사랑한다고 고백했는데 전도 한 명 못한 것을 깨달았을 때
8. 내 마음을 아무도 알아 주지 않을 때 

 

 
 
마음대로 드십시요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라는 빌립보서 4장 5절의 말씀이 있습니다.
관용을 보여주기 위해서, 관대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특별한 지위에 있다거나, 유별나게
많은 재산이 있어야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랜 여행길에 목 마르고 지친 한 사람이 가파른 언덕 꼭대기에 있는 작고 낡은 집을 한
채 발견하였습니다. 그 집 가까이 이르렀을 때 길 한쪽에 "이리로 와서 시원한 물을 마십시
오"라고 쓰여진 표지판이 있었습니다. 그 표지판을 쫓아 조금 올라와 보니 얼음같이 찬 샘 물이 퐁퐁 솟아나고 있었고 그 옆에는 표주박도 하나 놓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옆 에 놓여 있는 의자 위에는 "마음대로 드십시오"라는 메시지가 있는 사과가 한바구니 있었습 니다.

호기심을 느낀 이 여행객은 그 낡고 작은 집에 살고 있는 늙은 부부를 찾아가 그 사연을 알아본즉, 그들은 너무나 가난해서 헌금도 못하고 있는 처지이지만 값없이 솟아오르는 맑은
샘물과 그 노부부가 일구고 있는 조그마한 농장에서 수확하는 사과를 그 길을 지나다니는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진실로 우리는 세상적인 부가 없 어도, 세상적인 지위가 없어도 얼마든지 관용하는 사람, 관대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베풀면 반드시 돌아온다
 
미국 사우스다코타주의 로비타 에센바움이란 사람이 격은 실화.
어느날 그는 시골길을 차로 달리다 고장난 차때문에 애를 먹고 있는 사람을 도와 주었다.
도움을 받은 사람이 돈으로 사례를 하려하자 그는 [다음에 다른차가 공장난 것을 보면 도와주라]고 말하며 떠났다.
두주일 후 그의 아버지가 길을 가던중 타이어가 펑크나 곤경에 처하게 됐다.

그때 어떤 운전자가 수리해주며 한 말이 [2주일전 어느 사람의 말대로 하는 것입니다]였다. 
 
 
유산 이야기
 
세계 인류의 존경을 받는 마하트마 간디의 유산은 과연 무엇이었을까?그것은 생전에 즐겨부르던 노래책 슬리퍼 샌들 찻잔 숟가락 회중시계 안경, 이 일곱가지 뿐이었다.
그가 남긴 가장 큰 유산은 위대한 사상이었고 그로 인해 오늘날도 존경을 받는다. 유산의 많고 적음이 그리 중요한게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실례의 하나이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1천만달러의 유산을 받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이 큰 돈을 모두 써버려 70세가 됐을때는 거의 무일푼의 상태였다. 말년에는 방 두개짜리 집에서 딸이 보내주는 돈으로 근근이 생활을 유지했다.
그러면 그 많은 돈을 어디에다 썼을까?


 보통사람 같으면 자신을 위해 기업을 도모하거나 흥청망청 썼을테지만 그는 달랐다.
 우리 돈으로 80억원이라는 큰돈을 유산으로 받자 그는 이것을 하나님이 자신에게 위탁하신 것으로 이해했다.
그래서 30여년의 긴세월동안 곤궁한 사람이나 불행한 사람 불구자나 병자,그리고 고아와 과부에게 베풀었다.경찰과도 긴밀하게 연락해 가엾은 사람들을 찾아가 도와주었다. 그런 그에게 도움을 받은 사람은 무려 3만명에 이르렀다. 

 
 
 
자선
 
자선행위에 의하여 돈을 어디엔가 바치면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기의 돈을 잃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예사인데 사실은 이와 다르다. 실제로는 다른 사람에게 돈을 주면 그만큼 들어오게 된다. 자선하는데 돈을 쓰면 쓸수록 돈은 다시 그 사람에게로돌아온다는 이야기를 할 때 다음과 같은 탈무드의 이야기를 인용할 수 있다.
어떤 곳에 큰 농가가 있었다. 그 집주인은 예루살렘 근처에서 가장 자선심이 후한농부라고 일컬어져 왔다. 해마다 랍비들이 그의 집을 방문하면 그는 아낌없이 자선을 베풀었다.
그는 큰 농원을 경영하고 있었으나 어느 해 폭풍우 때문에 과수원이 전멸할 데다가 악성 유행병마저 퍼져 그가 기르던 양과 소와 말들이 모두 죽었다. 이것을 본 채권자들이 그에게 몰려와 재산을 모두 압류해 버려 그에게는 작은 토지밖에는 남지아니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주시고 하나님께서 또 거두어 가시므로 하는 수 없지"하며 끄덕도 하지 않았다.


그해에도 여느 때처럼 랍비가 찾아왔다. 랍비들은 그렇게도 많은 소유가 있었는데 이처럼 몰락해 버리다니 하고 동정을 금치 못하였다. 농장 주인의 아내는 남편에게,
"우리들은 언제나 랍비들에게 학교를 세우고 예배당을 유지하고 또는 가난한 이나늙은 이들을 위할 만큼의 헌금을 해 드렸는데 올해엔 아무것도 드리지 못하면 어떻게 하지요?"
했다. 부부는 랍비들을 빈손으로 돌려 보내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작은 토지의 절반을 팔아서 그것으로 랍비들에게 헌금을 하고 그대신 절반의 토지로 더 열심히 일해서 메꾸어 보리라 생각했다.


랍비들은 생각지도 않았던 헌금을 받고 크게 놀랐다.
남아있던 절반의 토지를 갈고 있는데 밭갈이 하던 소가 쓰러져 버렸다. 흙투성이가 된 소를 들어내고 있는데 소의 발밑에서 보물이 나왔다. 그들은 그 보물을 팔아서 또 옛날 그대로의 농장을 꾸릴 수가 있었다.
이듬해 랍비들이 다시 왔다. 랍비들은 그 농부가 여전히 가난한 생활을 하고 있으리라 생각하고 이전의 그 작은 토지로 찾아갔다. 그런데 근처의 사람들이 "아니오,
그는 이제 여기서 살지 않아요. 저쪽의 훨씬 큰 집에 살고 있답니다."했다. 랍비는그 집으로 찾아갔다. 농장 주인은 지난 한해동안 그들에게 일어난 일들을 설명하고아낌없이 자선을 베풀면 그것은 반드시 되돌아 온다고 말했다. 
 
 
가난한 자와 다를 바 없는 수전노
 
어떤 부자가 가난한 사람에게 "나는 백만냥의 저축이 있다."고 우쭐했다.
그러자 가난한 사람이 말했다.
"당신은 모르지만 실상 나도 백만냥의 저축이 있다오."
부자가 깜짝 놀라
"정말인가? 대체 어디다 그 돈을 감춰 놓았는가?"하고 물었더니 가난한 사람은 말했다.
"당신은 돈을 모을 줄만 알지 한 푼도 쓰지를 않는다. 나도 역시 돈을 쓰지 않는다. 이렇게 서로 쓰지 않으니 있건 없건 마찬가지가 아니오?" 
 
 
잠롱 스리무엉
 
태국 왕립 군사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소장까지 진급했던 사람이 예편을 했다. 그는 군대 생활을 할 때는 물론이요 사회생활을 시작하고서도 누구못지 않게 돈과 명예르 추구한 사람이다.
어느 날이다, 집에 도둑이 들었다. 다행ㅎ 인명의 손상도 없었고 경제적인 손실도 없었으나 그날 이후 그는 밤잠을 못자는 병에 걸렸다. 혹시 떠 도둑이 들면 어떻게 할까라는 불안 때문이었다.
불면증의 고통은 직접 경험해 본 사람이라야 그 괼움의 정도를 바로 이해할 수 있다지 않은가? 그만큼 고통스러운 것이 불면증이다. 이렇게 지옥같은 날이 얼마간 계속되는 동안 그는 새로운 교훈 하나를 깨달았다.
ㅂ;록 많은 재물과 이에 걸맞는 존경심이 따른다할지라도 그것만으로는 사람이 지정으로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런 것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고통이 더욱 증대 된다는 사실도 깨달았다.그리고 보다 행복한 삶을 살려면 적게 먹고 적게 쓰고 열심히 일하여 남은 것을 사회에 나누어 주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런 깨달음을 실천에 옮기면서 그는 그때까지 무거운 짐을 진 듯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던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지극히 저연스러운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청백리로써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태국의 방콕시장 잠롱 스리무엉의 이야기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 한다.
"남에게 많이 주면 줄수록 많은 것을 얻게 됩니다. 돈을 주면 돈을 얻게되고 금을 주면 금을 얻게 마련입니다. 저의 경우 언젠가 170불짜리 자가용을 기증하자 250만불짜리 롤즈로이즈를 얻게된 경험도 있습니다. 그리고 선물을 줄 때 무엇을 바라고 주어서는 안됩니다."
올해(95년) 61세가 되는 그는 방콕의 시장으로서, 팔라드하르마 정당의 당수로서 태국은 믈론이고 세계인의 양심에 신선한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그는 또 이렇게 말했다.
저는 결코 부와 명예와 칭송을 탐한바 없으며 그런 것들은 자연히 따랐을 뿐이지요.저는 이런 행운을 사회에 환원할 것입니다. 저에게 주어진 직위는 보다 많은 분들에게 헌신하도록 도움을 줍니다." 
장갑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저희 눈을 만지시니..." (마태복음 20 : 34)

한 여인이 지하철 안으로 발을 끌며 들어왔을 때 나는 눈을 돌리고 싶어졌습니다.
그녀는 늙었고 시카고의 매서운 겨울 바람을 막아 주는 것은 단지 누더기밖에 없었 습니다. 그녀는 가까이 있는 자리에 앉아 추위에 어깨를 움츠리고 시선을 내려뜨리 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희고 거친, 뼈가 앙상한 손은 몸에 두른 낡아빠진 목도리를 꼭 쥐고 있었습니다. 나는 의아하고 불쌍한 마음으로 바라보았습니다.

다음 정거장에서 건장하고 뺨이 불그레한 활기찬 젊은이가 자신 있는 걸음으로 열
차에 들어왔습니다. 그의 옷차림은 빈틈이 없었고 머리카락은 깨끗했으며 걸음걸이
는 우아했습니다. 그 또한 그 여인의 무언의 불쌍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세 정거장 을 지나고 열차가 속력을 늦추었을 때 이 젊은이는 그 여인을 곁을 스쳐지나 다른 문으로 나가 지하도로 사라졌습니다.


그 여인의 무릎에는 그의 갈색 가족 장갑이 놓여 있었습니다.
나는 그 젊은이가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내가 그곳에 그
냥 앉아 있는 동안 그는 여인의 궁핍함을 보고 동정심을 가지고 반응한 것을 압니
다. 나는 그 여인에게 나의 장갑을 주어야 겠다는 생각은 전혀 떠오르지 않았습니
다. 그 젊은이가 동정심을 보여준 그 방법을 나는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이 사
건은 여리고에서 두 소경을 고쳐 주시고(마태복음 20:34) 궁극에는 십자가 위에서
그분 자신의 생명까지도 주시도록 예수님을 움직인 그런 종류의 연민을 연상케 했습 니다.
우리들도 주님의 본을 받아 손을 내밀어 궁핍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도록 합시 다.

생각해 볼 점
왜 우리는 동정심을 발휘하는데 자주 주저할까요?
모든 사람을 다 도울 수는 없지만 누구를 도울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더 큰 동정심을 발휘할 수 있을까요? 
 
 
나눔
 
음식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살려고 먹는 음식이 있고, 일하려고 먹 는 음식이 있습니다. 그리고 놀이하며 먹는 음식이 있습니다. 이 놀이 하며 먹는 음식은 잔칫집에서 먹습니다. 잔치는 먹는 축제입니다.
먹 는 것이 없으면 잔칫집이 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천국을 잔치하는 세계로 소개하셨습니다. 먹는 양식마다 그 의미가 다릅니다. 살기 위 해 먹는 양식은 혼자 먹어도 됩니다.
일하기 위해 먹는 음식도 혼자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놀이하기 위한 음식은 혼자 먹으면 안됩니 다. 잔치 음식은 나누어 먹을수록 축제 분위기가 고조됩니다. 음식 중에 최고의 음식은 잔치 음식입니다. 음식은 나누어 먹어야 맛이 납니 다. 나누어 먹을 때 밥맛이 생깁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밥맛이 없는 이유는 바로 독점하기 때문입니다.
혼자 걸게 먹으면 밥맛이 나 지 않습니다. 삶의 맛은 공동으로 나누어 먹을 때 생깁니다. 초대교회 는 나눔의 공동체였습니다. 그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자신들의 소유 를 공동의 소유로 내어놓고 재산과 물건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 한 만큼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한마음이 되어 날마다 열심히 성
전에 모였으며, 집집마다 돌아가면서 같이 나누고 순수한 마음으로 기 쁘게 음식을 먹으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초대교회는 모이면 축제 였습니다. 이러한 초대교회의 신앙 정신을 잃어버리고 은혜를 사유화 하면 교회는 타락하게 되고, 신앙은 병들게 됩니다. 
 
 
 
베품이라는 것
 
9살인 마이클과 나는 브롱스에서 집으로 가는 중이었다. 우리가 맨하탄으 로 향하는 다리 앞에서 신호대기 하고 있을 때 똑같은 일이 또 벌어졌다.
자동차 유리에 물보라를 뿌리고 주인의 뜻과는 상관없이 유리창을 닦고는 돈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아니!”하면서 나는 닫힌 창문을 통해 소리를 쳤다. 신호가 바뀌자 마이클이 “엄마, 왜 '아니'라고 유리 닦는 사람에게 소리를 치셨어요?
창을 닦게 하고 돈을 좀 주시지 않구요”하고 말했다.
“이 사람들은 어거지로 돈을 받아내려고 하는 거야. 그 돈으로 그들은 술을 마시거나 마약을 맞을 거야. 단지 그들의 나쁜 습관을 지속시키는 결과가 되겠지”하고 나는 설명했다. 그러나 마이클은 “그것은 알 수 없 는 일이잖아요.

불쌍한 생각이 들어요. 누가 엄마에게 소리를 지른다면 엄마의 기분이 어떻겠어요. 배고프고 돈이 없다면 엄마의 기분은 어떻겠 어요?”라고 말했다.


마이클의 날카로운 질문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가족
회의를 하게 되었다. 남편 빌은 평소 유리 닦는 사람들에게 큰 소리를 지 르는 사람인데, 마이클의 주장을 귀담아들었다. 그는 당장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느냐를 알게 되었고,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는 앞으로 유리 닦는 사람들을 기꺼이 맞이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마이클이 또하나의 제안을 했다. “그들에게 성경을 나누어주면 어때요?” 이제 우리는 포켓용 성경 과 집에서 만든 머핀과 50센트를 준비해서 다닌다. 우리 아들의 아이디어 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쳤는지 아무도 모른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도레안 엘라베테 도레안 도 테]
이 말은 신학원을 졸업하고 전도사가 된 후에 사명처럼 내 마음을 때린 말씀이. 목사가 된 후의 삶을 놓고 기도할때 주님께서는 이 말씀을 주셨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 10:8)
참 좋은 말씀이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하고 많은 말씀가운데 이 말씀이었을까? 어떻게 한 공부인데, 아무 댓가도 없이 거저 주라는 것인가? 한동안 갈등이었다. 주님은 자신의 죽음까지도 아무 댓가 없이 나에게 주셨던 것이 아니었는가? 내가 받은, 은혜는 탔 받은것이 아니었는가?
"주님 순간적이었지만 용서하시옵소서. 내가 목사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만양 것인데 주님 뜻대로 값없이 사용하시옵소서."
[도레안 엘라베테, 도레안 도 테] 그런데 과연 나는 평생을 이렇게 살 수 있을까? 또 이렇게 사는 삶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는 것일까?

천국에 큰 것을 가지고 가려 하는 사람들
큰 교회를 가지고 가려 한다.
큰 기도원을 가지고 가려 한다.
큰 선교센터를 가지고 가려 한다.
큰 명성을 가지고 가려 한다.
큰 권세를 가지고 가려 한다.
큰 재물을 가지고 가려 한다.
큰 업적을 가지고 가려 한다.
예) 나의 아들 신후가 유치원에서 다른 친구들 것을 많이 빼앗아 가지고 와서"아빠, 나는 아빠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서 아이들 것을 많이 빼앗아 가지고 왔어요 " 차 할 때 이것이 과연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인가?

빈털털이로 천국에 온 사람들
물질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고 온 사람.
시간을 하나님의 일에 바치고 온 사람.
건강을 환자들을 위해 주고 온 사람.
명예를 무명자들을 위해 양보하고 온 사람.
권세를 눌린자들을 위해 주고 온 사람.
비전과 욕망을 세상 사람들에게 주고 온 사람.
예) 나의 아들 신후가 빈털털이로 집에 돌아왔다.
"너 왜 빈털털이가 됐니?" "집에 오는데 불쌍한 사람들이 있어서 다 나뉘주고왔어요. 아빠 죄송해요. 아빠한테는 아무것도 못가져 왔어요.""괜찮다. 아빠는 부자란다. 아빠 것을 다 가져라." 
 
 
아멘을 멈춘 부자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레 선생이 설교를 하고 있었는데, 그 곳에 욕심 많은 한 부자가 앉아 있었
다. 그때 웨슬레 선생은 설교 중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러분! 여러분은 할 수 있는 대로 돈을 많이
벌으시요! 라고 하자
그는 아멘, 아멘 이라고 하였다. 그 다음에는 할 수 있는 대로 전부를 저축하라고 역설하였다.

그때 그 부자는 얼굴에 미소를 띄고 좋아라고 아멘을 연발하였다. 마지막으로 웨슬레 목사님이 할 수
있는 대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말씀하자 그 부자의 입에서는 아멘 소리가 나오지 않고
갑자기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이었다. 그 내용은 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웨슬레 목사님의 유명한 말씀 중에 하나는 우리 믿는 사람들은 남보다 더 많은 물질의 축복을 받고, 더 많이 저축을 했다가 할 수 있는 대로 나누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웨슬레의 정신이 현대 기독교의 정신으로 발전되었던 것이다.
성경은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온다 고 말씀하신
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나누어 주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해야 할 의무이다. 
 
 
베푸는 삶의 행복
 
기다리던 아들이 태어났다. 그날 밤 신비한 노인이 나타나 산모에게『이 아이를 위해 한가지 소 원을 말해 보라』고 했다.산모는 『누구에게나 사랑 받는 아이가 되게 해달라』고 빌었다. 아이는 자라면서 모든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기만 했으며 정작 어른이 되자 주위의 지나친 사랑으로 자 신만을 지키는 「정신적인 미숙아」로 머물렀다.

그때 다시 노인이 나타나 「성장한 아들」에게 만족하느냐고 물었다. 비로소 그는 『사랑을 받
기보다 남에게 베풀줄 아는 사람이 되도록해달라』고 말했다.
헤르만 헤세의 「어거스터스」라는 단편. 베푸는 삶이 더 행복하다. 
 
 
김밥 할머니
 
순조(純祖) 무렵 경상도 순흥(順興)골에 만석(萬石)에서 1천 석이 모자라는 9천 석을 하는 황부자가 살고
있었다. 황부자의 친구로 이웃 고을 풍기(豊基)에 사는 한 선비의 사위 최생(崔生)이 대과(大科)를 치르고
자 상경하려는데 노자를 구할 길이 없었다. 최생이 장인을 찾아가 황부자에게 빚 좀 얻어줄 것을 간청하자
`제 아비 어미 제사에 보리 세 됫박과 밴댕이 세 마리 놓고 지내는 노랭이인데 어림없는 일'이라고 거절당
했다. 그래도 노자 빌릴 길은 그 길 밖에 없다고 판단, 최생은 황부잣집을 찾아갔다. 예상밖의 융숭한 대접
을 받은 최생은 황부자로부터 그가 살아온 일생 이야기를 듣는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친지들에 얹혀 눈칫밥을 먹고 살다가 안동으로 장가들었는데, 안사람이 워낙 부지런
하여 한길가의 돌무더기 묵정밭을 개간, 구덩이를 파고 옥수수를 심어 밤이면 주막집 소매를 퍼다 걸우어가
며 수족이 닳도록 치산을 했다. 치산하는 동안 장인이 말했듯 보리밥과 밴댕이를 놓고 제사를 지낸 것도 사
실이라 했다. 그렇게 9천 석을 일구어 놓자 인생살이에 회의를 하게 되었다. 잘 먹고 잘 입고,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산다는 것이 묵정밭 개간하여 소매 퍼다 걸게 하던 시절보다 재미도 없고 희망도 없으며 살맛
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석을 채우지 않고 살맛나게 쓰는 재미를 찾기로 했다면서 하인을 불러
이렇게 분부하는 것이었다. `이분에게 노자로서 곳간에서 50냥을 꺼내드리고 말 한 필을 내어 행차하시도록
하여라. 그리고 집안 걱정으로 과거를 설칠 수가 있으니 벼 30섬을 최생댁에 보내드려라.'
이렇게 황부자는 9천 석 재산을 과거 치르는 빈한한 수백 명 서생들에게 나누어주고 혈육인 두 아들에게
는 땅 한 뙈기 남김이 없이 죽었다. 최생이 대성해서 경상감사가 되어 찾아갔더니 무덤의 소재까지도 없애
고 죽었던 것이다.


십수 년 전 베티 그린이라는 미국 할머니가 적지않이 9천 5백만 달러의 재산을 남기고 죽었다. 할머니 평 생 찬 물과 찬 오트밀을 먹고 살았다던데, 데우면 연료비가 들기 때문이라 했다.

하나 있는 아들이 사고로 다리를 다쳤는데 밤을 세워가며 무료병원을 찾아다녔다던 할머니다. 8백억 원이나 되는 그 유산 목록과 유언이 담겨진 그릇도 녹슨 통조림 깡통이었다.


이 노랭이 유산은 베티 그린 문화기금으로 꽃을 피우고 있다.
김밥 말아 번 돈 50억 원을 학교재단에 희사한 70대 할머니가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다. 김밥 50억 원어 치면 그 길이를 한반도에 깔면 3천 리에 이르고, 우리 국민이 한끼 배불리 먹을 수 있는 막대한 분량이다.

김밥 마는 손수건만한 대발 하나만 가지고도 그토록 큰 일을 해낼 수 있는데 수백만 평의 땅에 수억여 원의 돈을 깔아 놓고도 김밥 한 덩이 사회에 되돌리지 않는 가진 자의 누더기 윤리가 그 더욱 너덜거려 보인다. 
 
 
샘 이야기
 
옛날 샘(泉)이 하나 밖에 없는 나라가 있었다. 그 나라 사람들은 광천(狂泉)이라 불리는 그 샘물을 마시고 미치지 않은 자가 없었다.
부자유친(父子有親)이며 장유유서(長幼有序)며 남녀유별(男女有別)따위는 없어지고 탐나면 빼앗고 기가 동하면 능욕하고 화나면 불지르고멋대로 안되면 살상을 자행하였다.

오로지 임금만이 샘을 파 마셨기로 혼자만이 미치지 않고 무사할 수 있었다. 나라안 모두가 미쳐 날뛰고 있기에 오히려 미치지 않은 임금을 미친 사람으로 보고 임금님을 잡아 그 미친병을 고친다 하여 뜸질 찜질을 하고 귀신 쫓는다 하여 거꾸로 매달아 패고 살점을 저미었다. 임금은 고통을 참지못해 광천물을 먹고 미쳐버린다.

송나라 학자 원찬(袁澯)의 [묘덕선생전(妙德先生佺)] 에 나오는이야기로 최소한도의 도덕적 거리를 유지시키는 고리 빠진 난세를 빗대고 있다.

[자살론(自殺論)]으로 유명한 듀르켕은 욕망투성이의 인간행위를규제하고 억제시키는 공통의 가치 및 도덕기준을 상실한 혼란상태를 아노미현상이라 했다. 광천(狂泉)현상은 바로 아노미현상인 것이다.

소녀를 납치해다 매음을 시키고 소년을 납치해다 병신을 만들어 구걸시켜 잇속을 챙기는것은 약과인지 모른다. 댓살먹은 것을 곡예를 시키고자 가두어 사육을 하고 고아소녀를 양녀로 집에 살게하고는 수욕(獸欲)을 충족시키기도 한다.

광천물을 먹지않고 그러할수는 없는 노릇이다. 허술한 농촌일꾼이라하여 소외당한데 대한 역심리(逆心理)는 이해가 가지만 살다보면허다한 그만한 소외감을 삭이지 못하고 카바레에 화염병을 던져 불특정 대량 살인으로 보복한 것이며 아무것도 갖지않고 혼자태어나 아무것도 갖지않고 혼자죽는것이 인생인데, 혼자죽는 것이 무엇이 그렇게 억울하다 하여 눈감고 1백20km속도로 아이들 놀고 있는 광장을 달려 불특정 대량 살인으로 앙갚음을 했다.

듀르켕은 이 아노미 사회현상을 이렇게 설명한다. 상부상조 하고 서로의 기쁨과 근심을 서로 나누는 지역공동 사회의 해체, 자신의 행동이 연대연계되는 대가족제도의 해체, 고독하거나 소외되었을 때 의지하게 마련인 종교적 기둥의 상실, 그리고 도시화-기계화-핵가족화등 근대화과정이 빚어낸 자기 중심적인 욕망으로 머리통만 크고 이 욕망을 자제하는 도덕적 가슴은 새가슴만큼 작은데 본능추구와 생식기만크게 달려있는 기형의 인간들이 광천물먹고 난무하는 요즈음은 말세다말세... 
 
 
주는 사람
 
미국의 성공한 식품회사인 프리토에 관해 놀랄만한 것은 견고하게 짜여진
훌륭한 경영조직이 아니며 잘 행해지고 있는 광고 프로그램도 아닙니다. 놀라운 것은 거의 만명에 이르는 세일즈의 힘이며 그것의 99.5%가 봉사의 정신이라는 점입니다. 프리토는 우리의 짧은 안목으로 볼 때 분명히 비경제적인 일들을 행하였습니다. 30불 짜리 포테토칩 상자 두 개를 상회에 배달하기 위해 프리토 회사는 몇백 달러를 소비하며 트럭을 보냅니다.

그것은 돈을 벌지 못할 조치인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회사는 포테토칩 한 상자를 배달하기 위해, 또는 허리케인이나 어떤 사고로 인해 어지러진 상점을 깨끗이 청소해주기 위해 모진 날씨도 무릅쓰고 달려가는 세일즈맨들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러한 행위에 대한 감사의 편지가 본사에 쇄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봉사를 심은 결과 프리토 레이 회사는 많은 판매량을 내고 있으며 매년 포테토칩과 프레츨 판매가 20억불 이상에 이르렀으며 미국시장의 60-70%를 장악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주는 정신과 다른 사람을 돕기 원하는 정신을 갖는 것이 중요함을 깨달으십시오.
이것은 봉사를 실행하는 것이 하나의 자연스러운 습관이 되게 합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주는 자와 받는 자입니다. 주는 사람은 투자의 원리를 실행합니다.
 받는 사람은 주는 것을 투자로 보지 않고 그들이 가진 것은 무엇이든지 쌓아 두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궁극적으로 주는 사람은 승리하며 받는 사람은 실패합니다. 
 
 
주는 복
 
만족감은 받는데서 오지 않고 사실은 주는데서 온다. 받는 기쁨만을 아는 경우를 속어로 거지근성이라고 한다. 거기에는 참 기쁨은 없다. 주는 데에 기쁨을 아는 사람은 자기도 행복하고 남도 행복하게 한다. 뉴욕 역대 시장 중 가장 명시장으로 알려진 사람은 라과디아(Laguardia) 씨였다. 그가 뉴욕시의 즉결재판부 판사로 있을 때 하루는 가게에서 빵을 도둑질하다가 붙잡혀온 노인이 기소되었다. 노인은 "배가 고파 빵에 손을 댔다"는 고백이었다. 라과디아 판사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의 행위는 10불의 벌금형에 해당됩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자기 지갑에서 10불을 꺼냈다. "그 10불은 내가 내겠습니다. 이토록 배고픈 사람이 뉴욕 거리를 헤매고 있었는데 내가 그동안 너무 좋은 음식을 배불리 먹은 벌금으로 내는 것입니다." 라과디아 판사는 그 유명한 넓은 중절모자를 재판부 서기인 베일리프씨에게 주며 말했다. "이 재판정에 계신 분들도 나처럼 너무 잘 먹은 데 대한 벌금을 내고 싶으면 이 모자에 넣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해서 가난한 노인은 오히려 47불을 손에 들고 눈물을 흘리며 재판정을 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보라! 내니 두려워 말라(지극히 작은 자)
 
시인 로우엘의 작품 중 '론팔의 꿈'이라는 것이 있다. 그 내용은 중.고 시대의 한 성주로 열렬한 크리스챤이었던 론팔 공은 하나님과 교회를 위하여 큰 공을 세워 보려는 생각으로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만찬을 나누실 때 사용하던 떡그릇과 잔을 찾기 위하여 갑옷을 걸치고 말을 타고는 성문을 나왔다. 그때에 문둥병 환자 한 사람이 공의 앞길을 막으며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구걸을 하는 것이었다. 론팔 공은 거친 목소리로, "나는 천명을 받들어 구주의 금잔을 찾고자 길을 가거늘 어찌 나를 번거롭게 하는고? 나는 너를 돌볼 시간이 없너라!"하고는 문둥병 환자를 뿌리치고 금화 하나를 던져주고는 말을 몰았다.


그로부터 수십 년 동안 론팔 공은 구아제국을 순회하면서 정성을 다해보았지만 금잔을 찾지 못한 채 성주의 몸에는 가난이 찾아왔고 머리에는 서리를 이게 되었다. 청년시대의 희망은 결국 달할 수가 없음을 깨달은 론팔 공은 눈보라가 치는 추운 겨울, 성문 가가이에 돌아왔을 때에 예전에 보았던 거지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깊은 고난을 다 겪고난 론팔 공은 마음이 부드러워질 대로 부드러워져서 거지를 보는 순간 불쌍한 생각에 눈물이 쏟아졌다.

그러나 그에게는 금과 은은 다 떨어졌고 가진 것이라고는 마른 빵 한 조각이었다. 공은 손수 냇가로 내려가 얼음을 깨고는 허리에 찼던 쪽박에 물을 담아다가 마른 빵 한 조각을 반을 쪼개어 문둥병 환자인 거지에게 주었을 때에 정중한 론팔 공의 친절을 받던 거지 환자는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하며 감격해 하는 론팔 공에게 축복하여 이르기를, "보라! 내니 두려워 말라! 네가 성배를 얻으려 했으나 머리가 희어지도록 얻은 것이 무엇이냐? 네 손에 든 그 빵과 냇물을 길어온 그 쪽박이 바로 성배로다.



네가 떼어준 빵조각은 찢기운 내 몸이요, 길어온 냉수는 십자가에서 흘린 내 피로다. 가난한 자들과 함께 나누는 그 음식이 진실로 성찬이로다."하고는 사라졌다. 놀라서 잠이 깬 론팔 공은 그 후 성문을 개방하고 창고를 열러 가난한 백성들을 돌보는 성주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하늘 나라를 위하여 큰 일을 행하는 것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라."(마25:31-46)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잠19:17) 
 
 
해장국보다 더 진한 이웃의 정
 
" 또 주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
(사도행전 20 : 35)
부산 사상구 엄궁동의 '외갓집 사골 해장국' 주인 박기인(40)씨는 요즘 손님을 맞을 때마다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 박씨에게는 '손님'이라는 의미가 남다르기 때문이다. 개업한 지 1년밖에 되지 않는 박씨는 지난 6일 남들처럼 불우 이웃을 돕기 위한 성금을 위해 하룻동안 해장국을 서비스 했다. 그리고 출입구 옆에 성금함도 갖다 놓았다. 마음껏 먹고 마음껏 돈을 내라는 뜻이었다. 물론 그냥 나가도 되는 '자율 모금'이었다. 행사 당일 주방에서 나간 해장국은 모두 200여 그릇. 한 그릇에 4천원이니 어림잡아 80여만원어치다.
손님에세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모금함을 제대로 살펴보지는 않았지만 그냥 나가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그러나 그날 영업이 끝난 뒤 함을 열어보니 무려 103만 5천원이나 들어있는게 아닌가. 박씨는 이날 자선 행사를 위해 아르바이트생을 쓰려고 했지만 그마저 동네 새마을 부녀회원들이 몰려와 설거지, 홀서빙 들 무료 봉사를 해준 덕분에 한 푼이라도 더 많은 돈을 모을 수 있었다고 한다.


 7일 아침, 동사무소에 "의탁할 곳 없는 어르신네들을 위해 써 달라"는 부탁을 하고 돌아 온 박씨는 요즘 30여평 가게에서 사골 해장국보다 더 구수한 인정과 사랑의 내음을 맛보며 살고 있다고 한다.
"그래도 세상은 살 만하다."는 어느 작가의 말이 생각난다. 이 말은 사람에게서 따뜻한 마음을 찾을 수 있기 때문에 한 말이다. IMF체제가 우리에게 준 예기치 않은 선물은 어려운 이웃을 한 번쯤 더 돌아보며, 그들을 돕는 일에 작은 힘이나마 보태려고 하는 마음이다. 삶의 기쁨은 지극히 평범하고 상투적인 모습을 빌려 우리에게 찾아 오곤 한다. 또한 우리가 삶의 기쁨을 찾아가는 모습도 그러하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 

 

 

 
 
사랑을 담는 김치통
 
"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
(마태복음 6 : 3,4)
천주교 성당에서 아무도 모르게 쌀통에 쌀을 채우고, 또 아무도 안 볼 때 누구나 가져가도록 '사랑의 쌀통'운동을 펼쳐 큰 호응을 얻었던 경험을 살려 이번엔 '사랑의 김치통'을 만들었다.
천주교 서울 도봉1동 본당에 '사랑의 김치통'이 등장한 것은 지난달 30일. 주임 신부가 "IMf로 김장을 할 수 없는 교우들이 많을 것"이라며 김치통 설치를 제안 했던 것. 신자들은 200여 포기의 김치를 담가 대형 냉장고 안에 넣었다. 그리고는 냉장고 문에 "사람들의 왕래가 없는 시간에 아무도 모르게 가져다 드세요."라고 써 붙여 놓았다. '사랑의 쌀통'처럼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이나 도움받는 사람 모두가 주위 시선을 의식하면 좋은 뜻이 변질될 수도 있다는 우려에서였다.


이에 앞서 성당은 신자들에게 "여유없는 이들을 위해 김장할 때 한 두 포기씩 더 담가서 나눠줄 것"을 부탁했다. 김치통은 며칠만에 절반 넘게 비워졌으나 곧 다시 채워졌다고 한다. 배추김치는 물론 깍두기와 열무김치등 종류도 다양해 어려운 이웃들도 입맛대로 골고루 선택할 수 있다. 서울 가양동 본당, 불광동 본당, 청주 산남종합사회복지관에서도 '김장김치 나누기 운동'을 펴고 있다.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이며 자신을 드러내고자한다. 그러기에 내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인정할 때에 아무도 모르게 선을 행할 수가 있다. 진정한 베품은 받는 사람의 인격까지를 고려하는 베품이다. 
 
 
주는 사람
 
미국의 성공한 식품회사인 프리토에 관해 놀랄만한 것은 견고하게 짜여진 훌륭한 경영조직이 아니며 잘 행해지고 있는 광고 프로그램도 아닙니다. 놀라운 것은 거의 만명에 이르는 세일즈의 힘이며 그것의 99.5%가 봉사의 정신이라는 점입니다. 프리토는 우리의 짧은 안목으로 볼 때 분명히 비경제적인 일들을 행하였습니다. 30불 짜리 포테토칩 상자 두 개를 상회에 배달하기 위해 프리토 회사는 몇백 달러를 소비하며 트럭을 보냅니다. 그것은 돈을 벌지 못할 조치인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회사는 포테토칩 한 상자를 배달하기 위해, 또는 허리케인이나 어떤 사고로 인해 어지러진 상점을 깨끗이 청소해주기 위해 모진 날씨도 무릅쓰고 달려가는 세일즈맨들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러한 행위에 대한 감사의 편지가 본사에 쇄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봉사를 심은 결과 프리토 레이 회사는 많은 판매량을 내고 있으며 매년 포테토칩과 프레츨 판매가 20억불 이상에 이르렀으며 미국시장의 60-70%를 장악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주는 정신과 다른 사람을 돕기 원하는 정신을 갖는 것이 중요함을 깨달으십시오. 이것은 봉사를 실행하는 것이 하나의 자연스러운 습관이 되게 합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주는 자와 받는 자입니다. 주는 사람은 투자의 원리를 실행합니다. 받는 사람은 주는 것을 투자로 보지 않고 그들이 가진 것은 무엇이든지 쌓아 두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궁극적으로 주는 사람은 승리하며 받는 사람은 실패합니다. 

 

 
 
이젠 우리가 溫情 수출
 
성 구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엡 5:1-2)


6.25 전쟁으로 아버지를 여의고 끼니조차 잇기 힘들었던 이장훈(52) 씨는 1954년부터 약 5∼6년간 서울 삼청동 총리공관 근처의 '양친회' 사무실에서 외국의 양부모가 보내준 옷과 장난감을 받아오곤 했다. 지금은 매출액 100억 원대의 중견기업체(대한 파카라이징) 대표가 됐다. 그는 요즘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외국의 양부모'들로부터 받았던 도움을 되돌려주느라 분주하다.그는 9일 '국경 없는 어린이 사랑 모임을 결성했다. 네띠앙 홍윤선 대표, 파고다학원 고인경 원장 등 기업체 임원과 고아원 원장 등 10여 명이 참가한 이 모임은 앞으로 본격적인 해외 어린이 돕기에 나설 예정이다 이날 행사에는 국제 양친회의 본부격인 '플랜인터내셔널'의 사무국장인 영국인 존 그린스미스(52) 씨가 참석했다.


그린스미스 씨는 "전세계 95 만여 명의 후원자가 있지만 도움을 받던 사람이 이제는 도움을 주는 기적 같은 일이 생기기는 이번이 처음"이라며, 건강하게 성장한 한국의 구호품 세대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한국은 53년부터 79년까지 약 25만여 명의 어린이가 양친회 구호품을 받아왔다.
이씨는 97년부터 베트남의 한 어린이에게 월 2만 원씩을 보내주고 있다. 얼마 전 이 소년이 편지와 사진을 보내왔다. 

 
 
 
나누는 부유함
 
성 구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 주기를 좋아하대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딤전 6:18)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2009년까지 단계적으로 상속세를 폐지 할 것을 제안했는데 수혜자가 될 부자들이 이를 거부하였다. 이런 상쾌한 주장을 한 이들은 석유 왕 록펠러의 후손인 데이비드 록펠러, 월가의 대표적 투자가인 워런 버핏, 마이크로소프트 회장 빌게이츠의 부친 월리엄 H. 게이츠, 권텀펀드의 조지 소로스 등 미국 억만장자의 대표들이다. 이들이 세금을 폐지해 주겠다는 데 반대하고 나선 것 자체도 눈길을 끌었지만 반대 이유는 차라리 감동적이다.

 상속세 폐지 반대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빌 게이츠의 부친은 "상속세를 폐지하면 억만장자들의 자녀만 살찌게 하고 땀 흘리며 살아가려는 가정에 상처를 입히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죽을 때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할 것이라고 한 워런 버핏은 "상속세 유지야말로 능력에 의해 성공이 결정되는 사회를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냉정하게 따져보면 부에 대한 이런 사고방식은 자본주의 국가인 미국에서 자신들의 이익과 명예를 장기적으로 지켜가기 위 한 전략으로도 보인다. 

 
 
 
나눔을 실천한 진정한 부자
 
성 구 ...옷 두 벌 있는 자는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눅 3:11)


우리가 잘 아는 미국의 강철왕 앤드루 카네기는 훌륭한 사업가이면서 동시에 자선사업가였다. 그는 "재산을 가지고 죽는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부끄러운 일이다. "라는 명언을 남겼다. 스코틀랜드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카네기는 경제 불황으로 인해 13세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그는 초등학교 4학년밖에 다니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는 성공했다.

그는 최선을 다해 돈을 벌었고, 가장 가치 있는 일에 돈을 썼다. 사회에서 번 돈을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고 생각한 카네기는 문화, 교육, 예술, 구제, 평화를 위해 여러 연구소를 설립하고 자선사업에 헌신했다. 그는 1892년 뉴욕에 카네기 홀을 만들어 예술 진흥에 주력하고, 1902년 카네기 연구소를 창설했다.


1904년에는 카네기 기금을 설립했으며, 1905년에는 카네기 교육 진흥재단을 세웠다. 뿐만 아니라 1910년에는 카네기 국제 평화재단을 창립했으며, 각 지방의 교회에 약 7,000대의 파이프 오르간을 기증하고 2,800곳 이상의 도서관에 자금을 제공했다. 그가 일생동안 사회에 기증한 돈은 지금의 화폐가치로 몇 조 원이 넘는다. 엄청난 물질을 이웃을 위해 사용한 것이다. 

 
 
 
간이역 철도원 '사랑의 신장 이식'
 
성 구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롬 5:19)


"제 작은 정성이 환자 3명을 잇달아 돕게 돼 너무 기쁩니다." 철도원 이상만(55) 씨가 만성신부전을 앓고 있는 환자에게 신장을 기증키로 결심하게 된 것은 작년 4월 자신이 다니는 교회에서 들은 "장기 기증은 내가 가진 것으로 남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이라는 설교에 큰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자리에서 신장 기증 의사를 담은 엽서를 썼고, 그 뜻이 '사랑의 장기 기증 운동본부'에 전해졌다. 강원도 춘천시 남산면의 간이역 백양리 역에서 운전 정리원으로 30년째 근무 중인 이씨는 지난 7년 동안 120여 회나 헌혈했을 만큼 다른 사람을 돕는 데 앞장서 왔다. 이씨의 결심은 29일 같은 시각 3명의 환자가 '릴레이 신장 이식 수술'을 받는 것으로 이어졌다.

인공 신장실에서 3년째 투석기에 의지해 힘들게 혈액 투석을 받던 윤경숙(여. 39) 씨가 이씨로부터 신장을 받게 되자, 남편 김종주(42) 씨가 "아내가 받은 고마움을 사회에 돌려 주고 싶다. "며 신장 기증 의사를 밝히면서 도시철도공사 직원 김운수(32) 씨가 신장 이식 수술을 받게 된 것이다. 그러자 이번엔 김운수 씨의 아내 이노순(29) 씨가 신장을 기증하겠다고 나서 3년째 만성신부전을 앓고 있는 이종삼(39) 씨가 '새 신장'을 얻게 됐다. 릴레이 신장 이식 수술의 출발자가 된 이상만 씨는 "신장이 두개 밖에 없어 하나밖에 주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며 겸손해 했다. 
 
 
아름다운 도움 손길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 (잠 19:17)


서을 은평구 역촌 5거리에 가면 성창식당이라는 곳이 있다. 이곳에서 김춘식(46) ·이용희(43) 씨 부부는 무의탁노인 30명을 돕고 있다. 한 달에 2번 김밥을 말아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의 한 끼 식사를 해결한다. "김밥 몇 줄 더 말면 되는 일이라 힘들지도 않아요. 하잘 것 없는 음식이지만 그게 노인들 마음을 기쁘게 하고 맛나게 한다면 저희가 고맙지요. 대단한 일도 아닌데 세상에 알려진다니 부끄럽네요." 김씨 부부는 사장님 소리를 들으며 제법 탄탄한 회사를 경영하면서 고아들과 교도소 재소자들을 도왔다. 특히 출소를 했어도 오갈 데 없는 전과자들을 받아들여 숙소와 일을 제공하면서 새 삶을 시작할 수 있게 뒷바라지했다.



 8년 전 부도로 엄청난 빛을 지고 거리에 나앉게 되면서 도움의 손길을 거둬야 했지만 김씨 부부는 "다시 돈을 벌게 되면 어려운 이웃을 도우며 살아가자."고 약속했다 남편의 사업이 쓰러지자 역촌 5거리의 후미진 골목에 분식집을 차렸다. "큰돈을 번 건 아니에요. 아직 빛이 남아있지만 네 식구 굶지 않고 살만큼은 벌어요. 남들은 빛도 다 못 갚은 처지에 웬 봉사냐고 하지만, 악착같이 모은다고 해서 다 내 돈되는 것도 아니잖아요. 육신 건강하게 살아 있을 때 어려운 분들 조금씩 거들고 살면 그게 행복이지요." 

 
 
 
아름다운 소식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롬 10:15)


군부대 중대장이 인터넷에 띄운 편지 한 통이 병마와 싸우던 부하병사의 어머니를 살렸다. 강원 춘천 모 공병부대 중대장 양경 대위(38)는 지난달 30일 서을 영등포구청 인터넷 홈페이지에 부하인 유정훈 이병(22) 어머니 최양순 씨(47)의 딱한 사정을 전하는 글을 띄웠다. 외아들을 입대시킨 뒤 월세 단칸방에서 홀로 살던 최씨가 위궤양과 자궁암을 앓으면서도 수술비가 없다는 내용이다.



군측은 이 글을 검색한 후 곧바로 최씨를 기초생활보장 수혜자로 선정, 앞으로 매달 생계비 14만 6,000원과 수술비 부담을 80%나 줄일 수 있는 국민기초 의료보장 1종대상자 혜택을 줬다.
 12일 수술을 받은 최씨는 "부하를 이렇게 생각해 주는 중대장님에게 뭐라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다." 며 눈물을 흘렸다. 양대위는 "중대장으로서 부대원의 고충을 살피는 것은 당연하다."고 겸손해 했다. 

 
 
 
다시 찾은 왼손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막 10:45).)


박씨는 어릴 때 앓았던 소아마비로 흉하게 비틀린 자신의 왼손을 볼 때마다 떠오르는 은인들이 있습니다. 그는 주위의 천시와 홀대로 성격도 점차 폐쇄적이 되어갔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든 먹고살아야 하는 박씨는 왼손은 감춘 채 오른손 한쪽으로만 구두를 만드는 기술을 익혔습니다. 그러다 그녀의 기술이 손에 익을 즈음해서 서울 성동구청장이던 조씨를 만났습니다. 박씨는 본능적으로 왼손을 주머니에 감췄지만 조 구청장은 어색한 몸짓으로 감추는 그의 아픔을 놓치지 않고 보았습니다.



 며칠 후에 구청장에게서 ‘아는 의사가 있는데 수술을 받아보지 않겠냐’는 연락이 왔습니다. 간곡하게 권유하는 그의 말에 못이겨 결국 경희 의료원을 찾아갔고, 미리 연락을 받고 기다리고 있던 정형외과 유 박사님은 열과 성의를 다해 수술을 맡아 주었습니다.


 수술비는 한 푼도 받지 않고 그녀를 도와 주었습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습니다. 난생 처음 두 손으로 구두를 만들게 된 날, 박씨는 한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좋은 구두를 만드는 게 보답하는 길’이라고 여긴 박씨는 구청 로비에 구두매장을 열어 시중가격보다 30%싸고 질 좋은 수제화를 구청을 출입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급했습니다.
곳곳에 자리잡고 숨쉬고 있는 작은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그저 주는 사랑과 복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눔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살 만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당신은 어떤 모습의 작은 예수입니까? 
 
 
주는 자
 
이상재 선생님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날 이상재 선생
께서 늦도록 책을 읽는데 도둑이 들었습니다. 이 방, 저 방 다니며 한보따
리 싸 들고 드디어 선생님이 계신 방문을 열었습니다. 이때에 깜짝 놀란 도
둑에게 선생님은 여유있게 "안녕하십니까?"하고 인사를 했답니다. 그리고는
안절부절한 도둑에게 필요한 것 있으면 염려말고 가져 가라고 하셨답니다.

도둑은 얼떨결에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나가다가 그만 순경에게 붙들렸습 니다. 순경은 도둑을 끌고 다시 선생님 댁으로 와서 도둑을 잡았으니물건 을 받으시라고 했습니다. 이때 선새님은 "내가 가지고 가라고 주었는데 어 찌 도둑이냐, 우리 집에 온 손님이오"라고 태연히 말씀하셨다는 일화입니 다. 빼앗기는 것과 주는 것을 확실히 다릅니다.

언제나 주는 자는 멋이 있습니다. 안 주겠다고 움켜 쥐는 자에게는 빼앗 겠다고 안간힘을 쓰는 자가 곁에 있기에 항상 문제가 있습니다. 

 

 
 
신앙의 산울림
 
미국에서 백만장자가 된 강철왕 카네기의 성공담은 유명합니다. 국민 학교도 제대로 못나오고 또한 스코틀랜드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그는 고아와 같은 신세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수많은 고생을 겪으면서 강철 회사를 설립하기까지 먼저 남을 위해 베풀었습니다. 그는 많은 사람에게 직업을 주고 사원들마다 예금통장을 갖게 하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그는 부(부)의 목적을 [주는데] 두었는데 이것이 산울림이 되어 결과적으로 그를 세기의 재벌 [강철왕 카네기]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자동차 왕 헨리 포드도 그의 사업의 목적은 [어떻게 하면 저렴한 가격으로 자동차를 생산하여 모든 사람에게 편의를 제공해 줄까]하는 데 있었습니다. 모든 미국 시민의 발에 값싼 바퀴를 달아주려는 것이 그의 꿈이었습니다. 그것이 산울림을 가져와 그로 하여금 백만장자가 되게 하였던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은총을 받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내 중심의 생활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내 물질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하고 다른 사람을 복되게 하면, 그 복이 30배, 60배, 1 백배의 산울림이 되어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자기의 것은 하 나도 없으되 내게 있는 것으로 남을 이롭게 하면 그것이 되돌아와 나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60대 벤처 거부가 일하는 이유
 
엄길청 박사가 쓴 ‘봉사의 목표’라는 글이 있습니다.
그 글 속에는 60대의 봉사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미국 실리콘밸리에 가면 60대의 한국인으로 재벌에 속하는 벤처기업인이 있습니다.그는 이미 나스닥에 상장,거대한 기업을 이루었으며 지금도 현역으로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기자가 그에게 찾아가서 “이제는 쉴 만한데 왜 이렇게 젊은이들 틈에서 밤낮없이 일하느냐”고 물었더니 “나는 지금 나 혼자 쓰기에 충분한 돈을 가지고 있지만 남에게 나누어주기에는 부족하기 때문에 아직도 더 벌어야 한다”고 했답니다.

실제로 그는 1년에 약 600만달러를 사회를 위해 기부하고 있으며 얼마 전에는 미국내에서 가장 기부를 많이 하는 사람 가운데 한명으로 선정되었습니다
 
 
내게 있는것을 나누는 계절
 
99년 11월,미국에서는 ‘한 손으론 바지춤을 붙잡고 다른 손으론 벽에 의지한 채’ 25센트 동전을 구걸하던 노숙자 레이먼드 로렌스를 도운 선한 사마리아 사람 빈센트 존스씨의 이야기가 단연 화제였다.

존스씨는 뉴욕 맨해튼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종종 배설물을 몸에 묻힌 채 술에 찌들어 고함지르며 돌아다니던 거지 로렌스를 3년간 계속 만나면서 관심을 기울였고 그가 가족을 만날 수 있도록 도왔다는 것.

그 기사를 읽으면서 더 인상 깊었던 것은 존스씨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도록 한 어머니의 유언이었다.

“일으켜 세울 생각이 없으면 내려다보지 말아라”

나눠가질 줄 아는 사람은 자신이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내어놓는다.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하나님께 받은 것을 남과 함께 나누어가지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핑계가 있으면 나누지 못한다.예수님이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만이 나눌 수 있다.

이 성탄시기에 이웃들에게 내가 가진 복음과 물질과 시간을 나눔으로써 보다 더 큰 기쁨과 행복으로 풍성해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감동주는 편지
 
존 웨슬리가 톰이라는 성도가 먹을 것도 없는 상태에서 병이 들자 위로의 편지를 써서 보냈다.

“사랑하는 톰 형제에게,형제의 건강이 속히 회복되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주님을 의지하고 선을 행하라.그리하면 땅에 사는 동안 그가 참으로 먹여주시리라’(시편 37:3)”

웨슬리 목사는 이 편지에다 5파운드의 돈을 동봉했다.당시로서는 상당히 큰 돈이었다.얼마 안 있어 웨슬리 목사는 선물이 동봉된 감사편지를 받았다.

편지 한 부분에 이런 말이 쓰여 있었다.“사랑하는 웨슬리 목사님,저는 목사님께서 저에게 인용하신 성경말씀의 아름다움에 가끔 은혜를 받곤 했습니다.그런데 목사님께서 보내주신 돈을 함께 받으니까 그 구절의 뜻이 더욱 심오하고 감동적으로 다가왔습니다.이런 경험은 일생에 처음입니다”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하여 이르노니,너는 반드시 네 경내 네 형제 곧 가난하고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넓게 펼지니라” (신명기 15:11). 
 
 
암소의 자부
 
돼지가 하루는 암소에게 평소 자신의 불만을 토로했다.

“암소야,너도 보다시피 내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잘해주니? 사람들은 내 고기로 햄과 베이컨을 만들어 먹잖아? 또 내 창자를 빼내 순대를 만들어 먹고 심지어는 발도 족발로 만들어 얼마나 맛있게 먹니? 그런데도 사람들은 왜 나를 싫어하고 너만 좋아할까?”

암소는 당연하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너는 죽어서만 좋은 일을 하고 살아있을 때는 너만 먹잖아? 그러나 나는 살아있을 때도 사람들을 위해서 열심히 일해주고 또 맛있는 우유도 주잖아? 그래서 사람들은 나를 좋아하고 너는 싫어한단다.”

우리가 가진 물질은 어차피 죽으면 남에게 다 주고 가야 한다.그러니 살아있을 동안에 남에게 많이 베풀도록 하자.그러면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서도 칭찬을 받고 하나님도 우리에게 상급을 주실 것이다.그러나 우리가 살아있을 동안에 베풀지 못하면 다른 사람에게서도 비난을 받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도 책망을 받게 될 것이다.
 
 
버려야 얻는 비밀
 
젊은 사업가인 워너 메이커가 하루는 장미화원을 잘 가꾼 한 가정을 방문하게 되었다.이 집의 주인은 그를 자신의 정원으로 데리고 나가 백장미와 흑장미 등 온갖 장미들을 구경시켜 주었다.그런 다음 장미꽃들을 꺾어버리기 시작했다.몇 개의 덩굴은 꽃 한 송이만을 남겨두고 모두 가지를 쳐버리기도 하였다.

워너 메이커는 “아니,왜 가지를 모조리 칩니까?”라고 물었다.그러자 주인은 웃으면서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좋은 장미 덩굴을 만들려면 가지를 쳐내야 합니다.내가 가지를 쳐서 잃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가지를 잘라내 잃는 것이 없다’는 말에 충격을 받은 워너 메이커는 그날부터 나누어주는 사업을 시작했고 결국 점점 더 큰 사업체를 갖게 돼 나중에는 미국의 대재벌이 되었다.

성경은 오늘도 “밀알은 썩어야 열매를 맺고 식물은 버려야 돌아온다”고 가르친다.이것은 유명한 비밀이다.“너는 네 식물을 물 위에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전도서 11:1). 
 
 
 
굶는 사람들을 생각하자
 
"저희가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 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요 6:12,13.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8.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사 1:17.

당신의 식습관은 어떻습니까 ? 당신이 하루에 남기는 음식물의 양은 어느
정도나 되는지요 ? 우리는 양심에 아무런 가책도 느끼지 않고 엄청난 양
의 음식물을 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도 굶주린 배를 움
켜쥐고 2초에 한 명씩 죽어가고 있습니다. 대중매체를 통해 뼈만 앙상하
게 남은 아프리카 사람들을 보면서 당신은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 혹, " 하나님, 하나님이 계신다면 어떻게 저들을 저토록 비참하게 내버려 두실 수 있습니까 ?"하고 원망 섞인 말을 내뱉고 계시지는 않는지요 ?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세계 모든 사람들이 충분히 먹고도 남을 만한 식량을 주셨 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한 사람이 하루에 필요한 칼로리는 평균 2,500~2,600칼로리 정도입니다. 그러나 현재 세계에서는 한 사람당 약 3 ,000칼로리 정도 섭취할 수 있을 만큼의 식량이 생산되고 있습니다. 그러 므로 문제는 우리의 이기심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젠가 우리의 이기심 에 대한 책임을 반드시 물으실 것입니다.

 
 
 
혼자서 다 하려고 하지 말라
 
"그대와 그대와 함께한 이 백성이 필연 기력이 쇠하리니 이 일이 그대 에게 너무 중함이라 그대가 혼자 할 수 없으리라"-출 18:18.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듣는 사람 일곱 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專務)하리라 하니"-행 6:3,4.

"이스라엘 무리 중에서 재덕이 겸전(兼全)한 자를 빼서 그들로 백성의 두목 곧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을 삼으매 그들이 때를 따 라 백성을 재판하되 어려운 일은 모세에게 베풀고 쉬운 일은 자단(自斷) 하더라"-출 18:25,26.

어느 마을에서 가장 무거운 썰매를 끌 수 있는 건강 마(馬)를 뽑는 대회
가 열렸습니다. 그 대회에서 1등을 한 말은 2,000kg이나 되는 썰매를 끌
었습니다. 그리고 2등을 한 말은 1,800kg이나 되는 썰매를 끌었습니다.
이 두 말의 주인들은 만약 두 말이 힘을 합하면 얼마만큼의 무게를 끌 수
있을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두 말이 함께 썰매를 끌 수 있도록 했습니 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5,500kg이나 되는 썰매를 끌 수가 있었습니다. 때
때로 우리는 자신만이 그 일을 할 수 있다는 교만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
과 나누어 함께 하기를 거부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는 혼자서 끙끙거리 면서 일을 합니다. 그러나 그 방법은 참으로 비능률적인 방법입니다. 하 나님께서는 우리가 더불어서 일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 비로소 우리의 짐은 가벼워지며, 우리는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주님, 저희는 흔히 공명심(公明心)에 사로잡혀 혼자서 모든 일을 처리하 려고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저희에게 지혜와 겸손한 마음을 주사 적 절히 분담하게 하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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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풍요를 원한다면 주라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 에 영원히 거하리로다(시23:6)
풍요란 무엇일까? 그것은 냉담하고 이기적인 물질주의가 아니다.
하나님의 축복없는 가운데서도 부자인 사람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종종 기쁨이 없는 부자들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진정한 풍요는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사업가인 나의 친구 W.클레멘트 스톤은 이런 말을 했다.
"나는 富가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도구라는 것을 믿지 않는 부자들은 비극 속에 살고 있으며, 어떤 부자는 자살까지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나는 그 말로 인해 사해를 생각나게 해주었다.

갈릴리 바다는 물을 받고 주기 때문에 그 속에는 많은 고기들이 살고 있다. 갈릴리 바다는 여러 시내의 물을 받아서 요단강으로 흐르게 하는 것이다. 요단강은 또 사막지대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만든다. 그리고 사해로 물을 흘려보낸다.

사해가 죽은 바다인 것은 거기로부터 물을 딴 곳으로 흘려보내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주의 원리이다. 생존하기를 원한다면 당신은 주어야 한다. 이것이 풍요의 열쇠이다. 또한 즐거운 인생의 열쇠인 것이다. 

 

 
 
하나님의 도시락 배달부
 
수원역 무료급식 6개월 박 마리아씨 "아저씨 약 다 떨어 졌죠. 왜 말을 안했어요."
" 미안해서 아파도 참았는데...."

저녁 9시 수원역 광장 한 모퉁이, 길게 늘어선 사람들에게 일일이 국을 퍼주며 박 마리아(43, 북수동 본당)씨는 한마디씩 건넨다. 웬 사람들이 모였나 싶어 기웃거리던 행인들이 승합차에 붙은 ' 천주교 무료급식' 이라는 현수막을 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지나간다.

밥과 국, 김치를담은 플라스틱 용기를 땅바닥에 놓고 쪼그리고 앉아 주위를 의식하지 않고 주린 배를 채운 이들이 빈 그릇을 들고 또 다시 줄을 선다.

" 아직 식사 못한 사람 있어요."

박마리아씨는 두 번 먹는 사람들 틈에 치여 행여 한끼조차 못 먹는 이가 없는지 챙긴다. 승합차 뒷문에서 밥과 국, 김치 배식을 끝낸 박씨가 옆문 쪽으로 가자 그 앞에서 기다리던 이들이 다시 주문한다. ' 가방하나 얻을 수있는냐, 밤에 쌀쌀한데 긴 남방 있느냐, 비누하나 달라, 양말이나 속옷있느냐..."

승합차 안에 칫솔, 치약, 비상약까지 갖고 다니는 박씨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을 차안에서 꺼내주지만 부족한 것이 많다. 그녀는 이들을 위해 각 본당에서 바자회때 남은 물건들을 얻어야 한다. 늦게까지 남았던 몇 명이 박씨에게 상담을 한다. 그녀는 수첩에 다 메모를 하며 아픈 사람의 경우 무료 치료를 받을수 있는 병원에 데려다 주기위해 약속 시간을 정한다. 그리고 약도 타다 준다. 박씨가 이곳에서 봉사자의 도움을 받아 무료급식을 한지도 벌써 6개월째 음식을 실은 승합차를 역광장에 못들어가게해 실랑이질을 벌여 30분씩 늦은 적이 있지만 지난 여름 폭우때나 휴일에도 하루도 빠지지 않았다.

"지난 4월 초 한 음식점에서 밥이 많이 남는다고 아이들이 우리집에 가져 왔어요. 식구가 다 먹고도 남았는데 다음날 또 가져와 궁리 끝에 김밥 20인분을 싸서 도시락에 담아 저녁 9시에 역전으로 갖고 나갔어요."

박씨의 무료급식은 이렇게 시작됐다. 지금은 70-80 명분의 밥을 24인용과 15인용 전기 밥솥으로 두 번씩 한다. 하루 15Kg 정도 사용하는 쌀은 본당의 성미운동으로 모이고 쌀이 떨어졌다 싶으면 용케 채워진다. 지난 여름에는 벌레먹은 쌀이 들어와 깨끗이 씻어 떡을 해서 수재민에게 전했다. 부엌이 좁아 국은 복도에서 끓인다. 시어머니도 거들고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음식을 담은 용기를 차가 있는 곳까지 나른다. 김치는 몇몇 본당에서 교대로 담가다 준다.

" 저는 계산을 안하고 살아요. 가계부도 없어요. 계산을 하면 욕심이 생길 것 같아서요. 그 대신 꼭 필요한 것만 사기 때문에 부족한 것에 익숙해 있어요." 그녀는 저녁 8시가 조금 넘어 자신이 사는 아파트를 출발, 우선 성당에 들러 성체 조배를 한 뒤 역전으로 향한다.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느끼고 그 사랑을 전하기 위해서다.

"70명이 넘는 사람에게 내가 직접 밥을 해 먹일수 있는 일이 얼마나 기쁜대요"

영구임대아파트 통장인 그녀를 동네 사람들은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쯤으로 알고 있다. 성이 다른 7명의 아이들과 두팔이 없는 장애인 남편, 시어머니와 오순도순 한가족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고 있는 그녀의 모든 일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로 가고 있다. 
 
 
백번째 손님
 
국밥집 주인 강씨 아저씨는 손님을 기다리며 신문을 뒤적이고 있었습니다.
점심 시간이 정해져 있는 직장의 손님들이 한 차례 지나간 뒤였습니다. 그러나, 아직 때늦은 점심을 찾는 손님이 몇은 더 있음직한 무렵이었습니다. 그때 문이 벌름히 열렸습니다.

강씨 아저씨가 신문을 밀치며 벌떡 일어섰습니다. 천천히 문이 열리면서, 머리카락이 허연 할머니가 들어섰습니다. 그 뒤에 열 살도 채 안 돼 보이는 소년이 마치 꼬리를 잡고 있듯 할머니의 한 손을 꼭 잡고 따라 들어왔습니다. 옷차림이 남루하고, 얼굴에는 궁기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이쪽으로 앉으세요.”

강씨 아저씨는 가운데 식탁의 의자를 빼내놓으며 턱으로 가리켰습니다.

그러나 할머니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머뭇거렸습니다.

“ 저, 저어……. 쇠머리국밥 한 그릇에 얼마나 하는지……?.” “4천 원입니다”

강씨 아저씨는 사람 좋은 웃음을 온 얼굴에 가득 담아 보이며 대답했습니다. 할머니는 조금 몸을 돌려 허리춤에서 주머니를 꺼냈습니다. 그 주머니 안에 든 동전까지 조몰락거리며 헤아려보았습니다.

그러고 나서야, 그 자리에 소년을 앉히고, 할머니는 맞은쪽으로 가서 앉았습니다. “한 그릇만 주세요.” “예?” “난 점심을 이미 먹었다오.” “아,예. 맛있게 말아드리겠습니다.”

강씨 아저씨는 그들 앞에 물잔 둘을 놓고, 쪼르르 물을 따르며 말했습니다. 조금 뒤, 강씨 아저씨는 깍두기 접시를 가지고 왔습니다. 이어서 국밥 한그릇을 할머니와 소년의 가운데에 놓았습니다.

김이 모락모락 오르고 구수한 냄새가 풍겼습니다. “아가야,어서 많이 먹어라.” 소년은 한 숟가락 푹 떠서 입에 막 넣으려다가는 할머니를 바라보았습니다. “할머니,정말 점심 먹었어?” “그럼, 배불리 먹었다.너나 어서.어서 먹어라?”

그제서야 소년은 국밥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소년이 게걸스러이 먹는 동안 할머니는 깍두기 하나를 손으로 집어 입에 넣고 오물오물하고 있었습니다. 소년은 국밥 한그룻을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먹어치웠습니다.

뚝배기를 얼굴에 뒤집어쓰듯 하고서 마지막 국물 한 모금까지 후룩 마셨습니다. 어느새 뚝배기를 식탁 위에 내려놓고서 혀로 입술을 핥았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강씨 아저씨가 그들 앞으로 다가갔습니다.

“오늘 참 운이 좋으십니다. 할머니는 오늘 우리 집의 백 번째 손님입니다.” “뭐라고요?” 할머니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강씨 아저씨를 쳐다보았습니다. 무슨 소린지 몰라 불안해 하는 눈치였습니다. “우리 집에서는 그날의 백 번째 손님께는 돈을 받지 않습니다. 작은 복권을 하나 타신 셈이지요.”

할머니는 긴가민가 하면서도 ‘웬 횡재냐?’ 는 기색을 굳이 숨기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게 정말인가요?” “아,그럼요. 오늘은 그냥 가시고, 다음에 또 오십시오.” 한 손으로 돈주머니를 꼭 쥔 할머니는 쪼글쪼글한 주름살 속에 숨겨두었던 반색을 죄다 드러내며 환히 웃었습니다.

문을 열어주며 할머니와 소년을 배웅하는 강씨 아저씨는 그보다 더 밝은 웃음을 지었습니다. 2개월쯤 뒤.할머니와 손자가 또 강씨 아저씨네 국밥집에 들렀습니다.

그들을 알아본 강씨 아저씨는 대뜸 “할머니는 참 복이 많으시군요”라며 반겼습니다. 이번에도 백 번째 손님의 행운을 그들에게 안겨주었습니다.

그로부터 한 달 남짓 지난 어느 날이었습니다. 강씨 아저씨가 무심코 창 밖을 내다보다가 길 건너쪽에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낯익은 소년을 발견했습니다. 할머니와 함께 왔던 소년이었습니다. 한참 유심히 살핀 뒤에야 소년이 무엇을 하고 있는 지를 알아냈습니다. 강씨 아저씨네 국밥집에 손님이 한 사람 들어올 적마다 돌맹이 하나씩을 땅에 그린 동그라미 안에 넣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점심 손님이 거의 끊어진 뒤에 그 돌맹이를 헤아려보고는 고개를 가웃거렸습니다.

기껏해야 돌맹이는 50개도 안되었던 것입니다. 사흘째 내리 그 아이를 본 강씨 아저씨는 아내를 보내 무슨 까닭인지 넌지시 알아보게 했습니다. 한참 만에 돌아온 아내의 얼굴빛은 그리 밝지 못했습니다.

“내일모레가 채 할머니의 생신이래요. 할머니께 국밥을 대접해드리려고 언제쯤 오면 백 번째 손님이 될 수 있는지를 셈치고 있나 봐요.” 이미 백 번째 손님에 대한 사연을 알고 있던 그의 아내가 일러주었습니다. “이거 야단 아니야!” 강씨 아저씨의 고민은 그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한나절 내내 이거 야단 아니야!”를 연발하던 강씨 아저씨가 무릎을 탁쳤습니다. 그러더니 전화기 앞에 붙어 앉아 여기저지 전화를 걸어댔습니다. “과장님이세요? 모레 점심 시간에 저희 집에 오십시오. 별일은 아니고요. 평소에 도와주셔서 점심 한 끼 대접하고 싶어서요. 친구분들하고 같이 오시면 더 좋습니다.” “여보게, 날세. 모레 점심 시간에 우리 집에 오게. 무슨 날은 아니고. 그냥 점심 한끼 같이 먹고 싶어서.그래, 직원틀도 함께 와.”

강씨 아저씨는 전화번호를 적어놓은 수첩을 뒤적이며 한참 동안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래서 똑같은 말을 되풀이했습니다. 드디어 그날이 되었습니다. 강씨 아저씨네 국밥집 건너편 길에 소년이 나타났습니다. 혼자가 아니고 할머니랑 같이였습니다. 강씨 아저씨네 국밥집에 손님이 한 사람 들어갈 적마다 동그라미 속에 돌맹이를 하나씩 넣었습니다.

강씨 아저씨는 부인과 함께 가끔 창 밖으로 그 모습을 엿보았습니다. 여느 날과 달리 손님들이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뒤였습니다. "할머니 어서 일어서! 벌써 아흔아홉번째 손님이 들어갔어. 다음이 백 번째란 말이야.”

소년이 서툴러 할머니 손을 잡고 끌었습니다. “할머니, 오늘은 내가 할머니께 사드리는 거야.” 소년은 할머니의 귀에 대고 나직이 속삭였습니다.

“그래.고맙다.” 할머니는 더없이 행복한 얼굴로 소년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들이 일어선 자리 옆에는 아스팔트를 뚫고 올라온 민들레가 철 늦게 피운 꽃 한 송이가 노랗게 웃고 있었습니다.

그날, 진짜 백 번째 손님이 된 할머니는 또 따뜻한 쇠머리국밥 한 그릇을 대접받었습니다. 식당 안을 그들먹하게 메운 손님들은 아무 영문도 몰랐습니다. 아내가 강씨 아저씨의 귀에다 대고 속삭였습니다. “여보, 저 아이에게도 한 그릇 줍시다.” 강씨 아저씨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쉿, 그런 말 말아요. 쟤는 오늘 안 먹어도 배가 부르는 법을 배우는 거라오.”그러면서 턱끝으로 할머니와 아이 쪽을 가리켰습니다. 할머니는 천연덕스럽게 혼자서 국밥을 후룩후룩 맛있게 먹고 있었습니다. 아이의 눈길은 할머니의 숟가락을 따라 계속 국밥 그룻에서 입으로 오락가락했습니다.

그러다가 몰래 침을 꼴짝 삼켰습니다. “너 정말 배 안 고파? 좀 남겨줄까?” “난 안 먹어. 정말 배불러. 이 봐.” 아이는 짐짓 배에 바람을 가득 넣어 앞으로 쑥 내밀었습니다. 그러고는 깍두기 하나를 손가락으로 집어 입에 날름 넣고 우직 씹었습니다. 전에 할머니가 하던 것과 똑같은 모습이었습니다.

그것을 바라보는 강씨 아저씨와 그 아내의 입 안에도 군침이 가득 고였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뒤로 참 신기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강씨 아저씨네 국밥집에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정말로 백 번째 손님이 되어 국밥을 공짜로 먹는 사람이 날마다 생겼습니다. 2백 번째 손님이 되어 같이 온 사람들까지 공짜 국밥을 먹는 일도 자주 있었습니다. 
 
 
 
땀에 전 오징어 한 마리
 
내가 소대장이던 그때는 먹어도 먹어도 허기지던 모두가 어렵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외출이나 휴가를 나갔다 귀대하는 병사들은 팔이 빠져라 시루떡, 가래떡 혹은 엿을 해 가지고 들어왔고 소대원들은 손꼽아 그들을 기다렸다.
어느 날이었다. 휴가를 떠난 부하가 귀대 시각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었다. 소대원 모두가 그가 가지고 올 음식을 기다리고 있다가 마침내 음식은 그만두고라도 제발 돌아오기만을 애타게 바라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나는 이제는 그만 탈영 보고를 해야 할지, 아니면 더 기다려 봐야 할지 고심했다.

드디어 24시 5초 전, 초조와 긴장이 극에 달해 있었다. 바로 그 때 그가 얼굴을 내밀었다. 나는 화가 나기보다 너무 반가워서 그를 확 끌어안았다. 그는 매우 죄송해하면서 늦게 오게 된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강원도 해변가가 집인 그는 집에서 오징어 한 축을 들고 오게 됐다. 그런데 검문소와 초소를 거칠 때마다 오징어를 한두 마리씩 빼앗기다시피 주게 되었고 결국에는 한 마리밖에 남지 않았더란다. 하지만 그를 기다리는 소대원들을 생각하니 차마 빈 손으로 올 수가 없었다. 그는 마지막 남은 오징어라도 빼앗기지 말아야겠다 싶어 서 그것을 웃옷 속의 뱃살에 붙이고 초소가 없는 다른 길로 돌아오다 보니 늦은 것이었다.

"남은 게 이것밖에 없어서 죄송합니다."

그는 몸통만 남은 오징어를 내밀었다. 그 오징어는 그가 먼길을 걸어오느라 온통 땀으로 뒤범벅이 되어있었다. 하지만 누구 하나 더러워서 먹지 않겠다고 하는 병사는 없었다. 그 날 밤 우리는 땀에 푹 전 그 오징어를 잘게 잘라 골고루 나누어 먹었다. 

 

 
 
아픔도 나누면
 
오 헨리의 단편 중에 [강도와 신경통]이란 소설이 있습니다.
강도가 한밤중에 어느 집에 권총을 들고 들어갔습니다.
잠자는 주인을 깨우며 “손 들어!” 하였습니다.
잠결에 깨어난 주인은 벌벌 떨면서 왼손을 겨우 들었습니다.
그러자 강도는 또 고함을 칩니다.
“오른손 마저 들어!”
그래도 집주인은 왼손만 조금 더 높이 들 뿐입니다.
그러자 강도는 또 다시“오른손 마저 들어!”하며 고함을 지릅니다.
그 때 그 집주인은 벌벌 떨면서 “미안하지만 오른손은 신경통 때문에 들 수가 없습니다” 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강도는 “신경통? 젠장. 나도 신경통 때문이 이 짓을 하고 있는데!” 하는 것입니다.
그 강도 역시 오른손이 신경통으로 마비가 되어 제대로 일을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남의 집에 들어가 사람을 위협하고는 물건을 훔쳐내는 짓을 하였던 것입니다.

신경통이라는 말에 귀가 번쩍뜨인 강도는 당장 사람을 죽이거나 물건을 빼앗으려는 생각은 잊고 신경통 이야기를 꺼냅니다.
주인도 신경통 이야기에 공포나 두려움을 잊고는
어떻게 신경통을 치료하느냐, 무슨 약을 쓰느냐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밤새도록 있다가
새벽녘에는 서로 멋적게 헤어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서로의 아픔을 같이 나누는 현장에 사랑과 이해가 있습니다.
아픔을 나누지 아니한 곳에는 사랑을 나눌 수가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 인생과 같은 고통의 생을 사시면서 인간을 이해하고 사랑하고 도와 주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주님의 모습
 
로마에 크리스챤 군인이 하나 있었습니다. 뚜르 지방에서 온“마틴”이라고 하는 이 군인은 참으로 충성스러웠고 열심히 군복무했던 선량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추운 겨울. 그는 거리를 지나다가 황량한 거리에서 추위에 떨고 있는 거지를 보았습니다. 거지가 손을 내밀면서
“군인 아저씨. 나 돈 한푼만 주세요”라고 구걸했습니다.
마틴은 주머니를 뒤지다가 돈이 한푼도 없음을 알았지만 벌벌 떨고 있는 거지가 안타까왔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낡고 해진 군인외투를 벗어 그것을 반 쪽으로 찢었습니다. 그리고는 그것을 둘둘 말아 떨고 있는 거지에게 감아주었습니다.
“미안하오. 내가 돈이 없어 이렇게 옷을 찢어 줄 수밖에 없겠소.”
그날밤 마틴은 꿈을 꾸었습니다. 하늘문이 열리고 천사 중에 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 로마군복 반 쪽을 입고 서 계셨습니다. 천사 하나가 주님께 물었습니다.
“주님. 왜 그 거지같은 로마 군복을 입고 계십니까.”
그러자 주님이
“이것은 나의 종 마틴이 나에게 준 가장 값진 선물이다”
라고 대답하셨답니다. 하나님은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그 거지가 곧 하나님이십니다. 임금되신 주님은 심판에 합격한 오른쪽 사람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골수기증자 대만의 1/4도 안 돼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갈 5:14)

우리 나라에서 매년 발생하는 악성 혈액암 환자는 1만 명 정도, 투병 중인 사람은 치료 후 재발 가능성이 있는 소아암 환자를 포함, 10만 명에 이른다는 게 전문가들의 추산이다. 하지만 국내 골수은행에 등록한 골수기증 희망자는 4만 명에 불과하다. 이는 대만의 17만 명, 일본 14만 명에 비해 현격하게 적은 수치이다. 따라서 국내에서 조직이 맞는 골수기증 희망자를 찾을 확률은 크게 떨어진다. 가톨릭대 의대 성모병원 조혈모 이식센터 김동욱 교수는 "골수기증자가 적어 환자의 60% 정도만 기증자와 연결되고 있는 실정"이라며 "그나마 실제 상황이 되면 희망자의 절반 이상이 골수 제공을 기피해 환자들을 절망감에 빠뜨린다."고 설명했다.



골수는 골반 및 척추뼈 속에 있는 스펀지 같은 조직. 이 안에 조혈모세포가 있어 백혈구나 적혈구, 혈소판과 같은 혈액세포를 만들어낸다. 백혈병과 같은 혈액암은 골수의 조혈모세포가 병들어 비정상적인 혈액세포를 만들어내는 것을 말한다. 조혈모세포는 혈관을 타고 돌다가 48시간 내에 뼛 속에 정착해 혈액세포를 생성하기 시작한다. 백혈병의 경우 60~70%, 재생불량성 빈혈은 100% 완치율을 보인다. 우리는 단일민족이기 때문에 25만명 정도의 골수기증자만 확보하면 90~95%는 국내에서 해결할 수 있다.

적 용 : 인구가 한국의 1/2도 채 안 되며 더욱이 기독교인은 3.9%에 불과한 대만의 골수기증자가 인구의 20%에 달하는 기독교인을 보유한 한국보다 4배나 많다는 것을 볼 때 조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껍데기의 신앙을 갖고 있는지를 알 수 있으며 새삼 부끄럽다. 오늘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고. 
 
 
나눔을 가르치는 생생한 방법
 
<나눔을 가르치는 생생하고 효과적인 교육방법>

누군가는 고기 한근이 필요하면 반드시 두 근을 사고, 야채도 항상 필요한 양의 두배를 샀다고 한다. 가난한 사람들과 똑같이 나누기 위해서.그 교훈을 마음에 두고 우리 가족은 수퍼마켓에 갈때마다 보관을 할 수 있는 식품을 하나씩더 샀다. 참치 캔 하나, 치즈 마카로니 한 봉지, 땅콩 버터 한 병...뭐 그런 것들이었다.우리는 그것들을 커다란 식료품 봉지에 넣
어서 자동차 트렁크 안에다 보관했다.

봉지가 가득차면, 그것을 배고픈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누어주는 빈민 무료 급식소나 자선단체 같은곳에 가져다 주었다. 정말로 부담없고 간단한 나눔의 방식이었다. 특별히 시간이나 노력을기울이지 않고도 일 주일에 고작 몇푼의 비용으로 가능했기 때문이다. 자동차 트렁크안에식료품 봉지가 가득차고 그 물건을 무료 급식소에 가져다 줄때면 나의 두 어린 아들은 얼마나 행복하고 자랑스러워했는지 모른다.그것은 우리 아이들에게 나눔의 중요성을 가르치는 생생하고 효과적인 교육방법이었으며,동시에 두 아들로부터 내가 배우는 학습의 장이기도 했다.

그날도 나는 수퍼마켓에서 장을 보다가 진열대에서 우유에 타먹는 시리얼 한상자를 집어들며 말했다."오늘 우리의 선물은 이걸로 할까?"그러자 다섯 살짜리 아들이 얼른 내 손에서 시리얼 상자를 빼앗으며 말했다."안 돼요!"시리얼 상자를 진열대에 다시 가져다 놓는 아들을 지켜보며 나는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왜 안돼? 오늘 선물로 그걸 사면 안 될 이유가 뭐지?"아들은 단단히 결심한 표정으로 상품 진열대에서 다른 종류의 시리얼을 집어들고는 나를 쳐다보았다."참, 아빤, 이건 아빠가 드실 게 아니잖아요. 아이들은 이것보다 설탕묻은 콘프레이크를 더좋아한다구요."부끄러운 일이었다.그순간 내 아들은 우리가 식품을 구입할 때 그것을 먹을 사람들의 실제 얼굴을 떠올리도록내게 가르쳐 주었던 것이다. 그저
신문에 나오는 먼곳에 떨어져 있는 이들이 아닌, 우리 가까이 ,가족과 같은 이들이란 말이다. 
 
 
 
도마뱀의 도움
 
일본에서 실제 있었던 이야기라고 한다.
어떤 사람이 집수리를하기 위해 벽을 뜯었다.
일본집 벽은 "오가베"라 하여 흙을 바르긴하지만 그 안에 얼기 설기 나무를 대어 공간을 두게마련이다.
그런데 뜯다 보니 벽틈에 도마뱀 한 마리가 대못에 꼬리 윗부분이 찍힌채 살아 있더라는 것이다.
주인이 깜짝 놀라 살펴보니 대못은 10년전에 그가 집을 지을때 박았던 것이었다.


옴짝달싹 못하는 공간 속에서 10년동안이나 어떻게 살아 왔나 싶어 서 있는데 때마침 도마뱀 한 마리가 먹이를 물고 기어들어 오더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벽속에 갇혀버린 도마뱀을 위하여 또 한 마리의 도마뱀이 10년이란 긴세월동안 먹이를 물어다 나른 것이었다. 
남에게 준다는 것
 
예수님께서 활동하셨던 팔레스타인에는 헤르몬 산에서 발원한 요단 강상류의 물을 받아 큰 호수를 이루고 있는 갈릴리가 있다. 이 호수는 자기가 받은 만큼의 물을 다시 아래로 흘려 보내 요단강의 본류를 이루게 한다.
한편 요단 강의 종착점에 위치하고 있는 사해는, 자기에게 흘러든 물은 단한방울도 남에게 주는 법 없이 모조리 자기가 끌어 안고 있다.
그런데 자기가 받은 만큼 남에게 주는 갈릴리 호수는 생명력이 넘쳐서그 속에 온갖 물고기들이 뛰노는데, 받기만 할 뿐 남에게 전혀 줄줄 모르는 사해는 이름 그대로 죽음의 바다가 되어 그 속에서는 단 하나의 생명체도 살 수 없다고 한다......... 
 
 
게으른 아들
 
작은 마을에 게으른 아들을 둔 아버지가 살고 있었습니다. 늙고 병들어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된 아버지는 종일 빈둥빈둥 놀기만 하는 아들이 걱정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의 아내가 이제 그만 아들에게 재산을 물려주자고 말했습니다.
"아, 언제 줘도 줄 건데 한밑천 떼주면 저도 살길을 찾지 않겠수?"
하지만 제 손으로 단돈 십 원이라도 돈을 벌어 보기 전에는 땡전 한 푼 물려주지 않겠다는 아버지의 결심은 꺾이지 않았습니다.
다음날 아내는 그 완고한 남편 몰래 아들에게 돈다발을 건넸습니다.
"아무 소리말고 니가 번 돈이라고 해라."
아들은 내키지 않았지만 어머니의 간곡한 당부를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 이거...제가 일해서 번 겁니다."
당연히 기뻐할 줄 알았던 아버지는 말없이 돈을 화룻불에 던져 버렸습니다.
"아니, 이럴 수가!"
아들은 돈이 타는 것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아들은 그 길로 집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이를 악물고 공사장을 전전하며 막노동을 했습니다.
그렇게 땀흘려 일한 지 한 달이 되었습니다.
난생 처음 귀중한 노동의 대가를 손에 쥔 그는 아버지를 떠올리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어머니!"
오랜만에 아들을 본 어머니는 달려와 아들의 손을 덥석 잡았습니다.
"아이고 내 아들, 어디 얼굴 좀 보자, 응?"
아들은 화병으로 쓰러진 아버지 앞에 자랑스럽게 돈을 내놓았고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습니다.
"공사판에서 벽돌을 나르고 번 돈입니다."
"아이고, 내 아들 장하다!"
기뻐하는 어머니와 달리 아버지는 이번에도 돈을 화로에 던져 버렸습니다. 아들은 깜짝 놀라 화로 속의 돈을 황급히 꺼냈습니다.
"아버지! 너무하십니다. 이 돈을 버느라고 제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십니까?"
아버지는 그제서야 아들 손을 꼭 잡으며 말했습니다.
"이제야 내가 진짜 내 아들을 찾은 것 같구나. 돌아와 줘서 고맙다."
아버지는 아들이 제자리로 돌아올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던 것입니다. 
 
 
나눔과 섬김의 사명
 
본문 : 왕하 4:8∼37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엘리사가 수넴이라는 곳에 이르렀는데 그곳에 한 부유한 가정의 부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이 부인은 엘리사로 하여금 식사하고 갈 것을 간곡하게 권하여 그곳을 지날 때마다 들러 식사를 하곤 하였는데 식사를 대접하면서 엘리사가 참 하나님의 사람임을 알게 되었습니다.그리고 남편과 상의하여 다락에 덧붙인 작은 방 하나에 침상과 책상을 준비,엘리사가 휴식 뿐 아니라 연구도 할 수 있게 배려 했습니다.
하루는 수넴 여인의 헌신적인 봉사에 감동받은 엘리사가 무언가로 보답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여인을 오게 해 극진한 대접을 크게 칭찬한 후 왕에게나 군대 장관에게 구할 것이 있으면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수넴 여인은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순수한 수넴 여인의 아무런 대가나 보답을 바라지 않는 섬김의 자세는 오늘날 우리 모두의 큰 본이 됩니다. 사심없는 이 여인의 나눔과 섬김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엘리사에게는 큰 위로와 감동을 주었을 것입니다.


남편이 늙고 아들이 없다는 사실을 안 엘리사는 수넴 여인을 다시 불러 오게 한 후 내년 이 맘때면 아들을 안게 될 것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엘리사의 예언대로 그 때가 되자 수넴 여인은 아들을 낳게 되었습니다. 아이가 무럭무럭 자란 어느날 추수하는 들에 나갔다가 갑자기 “머리야 머리야!” 하다가 수넴 여인의 무릎에 앉았다가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수넴 여인은 침착하게 행동했습니다. 죽은 아이를 엘리사의 침상에 놓고 갈멜산에 있는 엘리사에게로 달려가 자초지종을 고했습니다.



 엘리사는 서둘러 아이에게로 달려 갔습니다.아이에게 도착한 엘리사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죽은 아이 위에 엎드려 얼굴에 얼굴을,손에 손을 대니 기적같이 아이의 몸이 따뜻하게 되었고 엘리사가 집안을 한번 둘러보고 다시 아이에게 들어가 그렇게 하니 아이가 일곱 번 재채기를 한 뒤 살아났습니다. 언뜻보면 큰 불행처럼 보여도 끝까지 포기않고 믿음으로 나가면 커다란 간증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성도는 어떤 상황에서도 쉽게 포기하고 절망해서는 안됩니다.

성경은 “손님 대접하기를 힘쓰라”고 하면서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하는 이들이 있었느니라”면서 격려하고 있습니다.진실되고 극진한 섬김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경제적으로 넉넉한 것은 그렇지 못한 이들을 돕고 섬기라고 주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건강은 건강하지 못한 이들을 돕고 섬기라고 주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부귀영화는 한 순간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세상에서의 성공이 자기 자랑으로 끝나지 않고 타인을 돕고 섬기는데 사용하라고 주신 하나님의 선물로 쓰여진다면 큰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본문: 마 10:5-8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주는 것은 하나님의 법칙이며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그 아들을 주시고 그 아들은 오셔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또 성령은 우리에게 오셔서 온갖 은혜와 은사를 주시고 날마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도와주시고 선한 목자같이 인도해 주십니다.
우리는 은혜를 값없이 받았습니다. 오늘날 이 민족이 누리는 은혜와 우리 교회가 누리는 축복은 값없이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저 받았으니 우리도 거저 주어야 합니다. 주는 것은 하나의 성숙이고 열매입니다. 이는 최고의 경지에 이르는 삶이며, 가장 가치 있고 귀한 삶입니다.
한 심리학자는 인간을 세 단계로 보아 첫째는 받는 단계요, 두 번째는 소유하는 단계요, 세 번째는 주는 단계가 있다고 했습니다. 물질이나 지식이나 권력 등을 받았으면 나누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사람을 과일이나 곡식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땅에다 씨를 심는 단계, 자라나는 단계, 열매 맺어서 주인을 기쁘게 해주는 단계가 있습니다. 믿음 생활도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는 단계, 은혜 받는 단계, 은혜 받은 다음에는 주는 단계로 발전해야 합니다. 그래서 교인들이 항상 은혜를 받으려고만 하면 안됩니다. 10년 정도 믿었으면 교회 봉사를 하고, 이웃 사랑을 하고, 가진 것을 주기도 하면서 이제는 듣는 것보다 봉사하면서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교회도 개척하는 과정이 있고, 개척교회가 성장하는 과정이 있고, 성장한 다음에는 자기 성을 짓거나 자기 바벨탑을 쌓지 말고 나누어 주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가난한 교회, 어려운 교회를 도와주면서 선교의 사명을 감당할 때 열매 맺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신.구약 성경 66권을 단 한 마디로 요약하면 그것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 말씀을 지키는 것이고, 성경을 다 이루는 것이고, 가장 큰 은사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가장 큰 은사를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나누어주는 것이고,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성령이 충만한 자이고 사랑하는 자의 마음에는 기쁨과 평화가 있습니다. 교회가 할 일은 사랑입니다. 동.서독이 나누어져 원수가 되었을 때 동.서독을 화해무드로 이끈 것이 교회입니다. 몇 십년 동안 서로 대치하고 있을 때 서독 교회에서 동독을 향하여 계속 양식을 공급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함으로써 통일의 역사가 이루어졌습니다. 총 한방 쏘지 않고 동독과 서독이 통일이 되었습니다.


북한을 도와주는 일을 정부가 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이해 관계가 있고 정치적 이념이 다르기 때문에 어렵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어디든지 갈 수 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곳이고 평화의 사도의 임무를 수행하는 곳입니다. 정부와 정부간에는 극렬하게 대치를 해도 교회는 평화의 사도가 되어서 서로 화해시켜 주어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쓰시는 개인이나 민족은 언제나 주는 사람입니다. 마음이 넓어서 주는 사람을 하나님은 크게 들어 쓰십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이 얼마나 넓습니까? 조카에게 양보하고, 사랑해 주고 기도해 줄 때 아브라함은 큰 복을 받았습니다. 요셉의 마음이 얼마나 넓습니까? 자기를 해치던 형들을 다 용서한 요셉은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되었습니다. 넓은 마음을 가진 유다 지파에서 예수님이 태어나셨습니다. 남을 돕는 자가 자자손손 복을 받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교회는 개척하면서부터 지금까지 선교와 구제와 이웃을 위한 봉사에 많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큰 일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하시며, 주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모든 지역에서 모든 분야별로 어려운 분들과 함께 나눔으로써 하늘의 복을 받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인생은 만남과 나눔입니다
 
인생은 만남과 나눔입니다. 행복도 기쁨도 보람도 모두 만남과 나눔에서 옵니다. 강변교회는 부족한 것이 많이 있지만 만남과 나눔의 장소가 되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하나님과의 생생한 만남이 있는 장소로 그리고 성도들은 물론 이웃들과의 친밀한 만남과 나눔이 있는 장소로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예배에 있어서 찬양과 기도가 뜨겁고 말씀이 생동하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고, 교제에 있어서 새 가족들과의 만남을 우선적으로 도모하고 있으며, 봉사에 있어서 지역 주민들과의 만남과 나눔의 장을 넓혀 가도록 힘쓰고 있습니다. 일년에 두 번씩 자선음악회를 열어 구청이 추천하는 40여명의 불우한 지역 주민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일과 고난 당하는 북한 동포들을 돕는 일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만남과 나눔을 통해서 우리는 가슴 뿌듯한 기쁨과 행복을 맛보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강변교회 성도들의 얼굴에는 환한 웃음이 많다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강변교회는 1992년 3월부터 일년에 두 번씩 헌혈하는 일에 참여해 오고 있으며 장기 기증운동에도 참여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15번 헌혈에, 매 번 평균 50여명 연인원 704명이 참여했습니다. 본인도 지난 6월 헌혈을 제외하고는 14번 헌혈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헌혈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내가 이웃에게 나의 피의 일부를 나누어 줄 수 있을 정도로 건강하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내가 나의 몸의 일부를 이웃에게 나눌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있음에 기쁨을 발견합니다. 물론 평생토록 내 몸의 일부를 절대로 이웃에게 줄 수 없다는 닫혀져 있는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도 있기는 합니다.


만남과 나눔은 내가 받는 감동에서 시작하고 내가 수행하는 훈련에 의해서 확장되어 갑니다. 본인은 미국 유학 생활의 전반부에는 만남과 나눔이 별로 많지 않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후반부부터는 만남과 나눔을 힘쓰는 삶을 살기 시작했고 그래서 삶의 보람과 즐거움을 차츰 누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25년 동안 만남과 나눔의 삶을 실천하도록 노력하면서 살아오고 있습니다. 내가 발견한 귀한 삶의 진리는 모든 종류의 만남이 귀하고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모든 종류의 나눔이 아름답고 감동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생애가 바로 만남과 나눔의 생애였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은 우리들을 만나시기를 원하시고 우리들과 나누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당신처럼 만남과 나눔의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만남과 나눔의 삶을 넓혀 가십시다. 교회 안의 성도들과 가까운 이웃은 물론 "가장 가깝고도 먼" 북녘 동포들과 그리고 일본 사람들과의 만남과 나눔의 삶까지 넓혀 가십시다. 
 
 
냉수 한 그릇의 의미
 
본 문 : 마태복음 10:40~42

요 근자에 뉴욕타임스에 베스트셀러에 올라있는 아주 작은 또 그리고 많은 감동을 주고있는 책이 있습니다. A 6th Bowl of Chicken Soup for the Soul 이라고 하는 그런 책인데요, 거기에 나오는 짤막한 이야기 한 토막, 아주 감동을 주는 이야기가 있어서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아주 임종이 가까운 한 노인이 있었습니다.그가 지금 병원에 입원되어 있으면서 아주 순간순간 점점 어려운 시간을 맡고 있습니다. 바로 몇 시간 전에 있었던 심장마비와 또 이에 따르는 강한 진통제로 인해서 정신이 몽롱해진 가운데 있었습니다. 들리는 것도 보이는 것도 다 희미하게, 감각이 희미해진 그런 상태입니다. 이제 간호원이 큰 소리로 이분에게 외쳤습니다. "할아버지, 아드님이 오셨습니다" 이렇게 이야기 했지만은 간신히 눈을 돌릴 정도입니다. 간호원은 또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렇게 기다리던 아드님이 왔습니다." 그때 건강하게 생긴 해병대 복장을 한 청년 하나가 문에 들어섰습니다. 윤곽을 알아볼 정도밖에는 분명하게 사람을 볼 수가 없는 상태고 말을 하고 싶지만은 말이 안 되는 그런 시간입니다. 아주 쇠약해진 손을 내밀었습니다. 이 청년은 그 손을 두손으로 꽉 붙들었습니다. 그리고 서로 주고받는 말은 없습니다. 이렇게 한밤을 꼬박 지내게 됩니다. 의사와 간호원이 간간이 들어와서 지금 상태를 체크했습니다.


간호원은 정성스럽게 앉아있는 그 청년을 보고 이렇게 너무 피곤하게 지내지 말고 잠깐 눈이라도 좀 붙여야되겠다고 그렇게 말했습니다 만은 이 청년은 머리를 저으면서 아니라고 여전히 그 노인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고 손을 꼭 쥐고 있습니다. 한밤을 아주 고대로 세웠습니다. 새벽녘이 되었을 때 이 노인은 세상을 떴습니다. 그리고 꽂아놓았던 산소 호흡기라던가 모든 주사바늘을 다 뽑고 제하고 간호원이 이런 일을 다 한 다음에 이제 물러서게 될 때 이 청년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 노인은 누굽니까?" 간호원은 깜짝 놀랐습니다. "이 노인의 아들이 아니세요? 이 노인의 당신의 아버지가 아니세요?" 할 때에 청년은 말했습니다. 아니라고요. "전혀 아닙니다." "근데 어떻게 해서 그 노인과 함께 밤을 세운 겁니까?" "제가 이 병실 문을 여는 순간 '아차' 무슨 착오가 생겼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무언가 사무착오가 되어서 동명이인이 되어서 내가 여기에 왔구나,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노인의 눈빛을 보는 순간 나는 거기에 사로잡혔고 도저히 내가 당신의 아들이 아닙니다, 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대로 이 자리를 지켜야했고 임종을 보아야 했습니다. 나는 도저한 이 자리를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 목이 타는 듯한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냉수 한 그릇입니다. 오직 냉수 그 외에 아무 것도 소원이 없습니다. 사랑에 목말라 하는 임종이 가까운 이 노인에게는 누군가가 옆에서 손을 잡아줄 바로 그 사람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 간절한 소원을 뿌리치지 아니한 이 청년이야말로 가장 인간적인, 가장 행복한 그런 생을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유명한, 여러분 잘 아시는 테레사 수녀는 말합니다. 가장 큰 병은 결핵이나 문둥병이 아니라 아무도 돌아보지 않고, 아무도 사랑하지도 않고, 아무도 필요로 하지 않는 바로 그것이다. 육체의 병은 약으로 고친다고 하지만 고독과 절망은 아무 것으로도 고칠 수 없고 오직 따뜻한 사랑뿐이라고요.



배가 고픈 사람에게는 한 개의 빵 외에 그 어떠한 것으로도 사랑을 설명할 수는 없다. 여러분, 빵 하나가 사람을 살리는 게 아닙니다. 빵 하나에 담긴 사랑이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사랑이 메말랐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이기적입니다. 어느 때 이렇게 돼버린 일이 없어요. 인간성이 이 모양이 되고야 전들 어떻게 행복하겠습니까? 어찌 이 땅에 복이 임하겠습니까? 누구를 탓하지 마세요. 인간 심성이 이렇게 되고는 절대로 복을 받을 수가 없는 것이에요. 사랑이 없어서 죽어 가는 불쌍한 심령들이 불쌍한 인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냉수 한 그릇, 그건 작은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것입니다. 큰 집, 좋은 시설, 굉장한 대접, 그거 바라지 않아요. 냉수 한 그릇 말입니다, 냉수 한 그릇. 여기 목숨이 걸렸다는 말입니다.

바로 몇 주일 전에 제가 북한 평양을 며칠 다녀왔습니다. 놀란 것은 고려호텔, 제가 여러 번 가봤지만 그런 일 없었어요. 고려호텔, 그 큰 호텔에 난방시설이 없습니다. 영하 18도 추위에 난방 없이 잠을 자야했습니다. 그러나 춥다고 말하지도 않았고 그 누구도 춥다고 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외국 사람들까지도 춥다는 말을 안 합니다. 아니 춥다고 느끼지도 않았습니다. 우리는 배불리 먹고 추위를 견디지만은 저 거리, 저 농촌에는요 수많은 사람이 움막에서 굶으며 이 추운 겨울을 지내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 생각을 하면 어떻게 춥다는 말을 감히 할 수 있습니까, 죄 받을 마음이지. 어찌 춥다고 생각이라도 하겠습니까? 여러분 이걸 알아야 합니다. 절박한 현실이라는 게 뭡니까? 우리는 그까짓 거 하죠? 냉수 한 그릇에 목숨을 걸었다니까요.


보세요. 지금 우리가 나진에 고아원을 세우고 열었습니다. 수백 명의 아이들이 거기서 자라고 있는데 여기서 일하는 분들, 한 달에 월급이 18불입니다, 18000원. 이게 얼마냐?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10불이면은 다섯 식구가 한달 살 수 있는 생활비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산다는 걸 알 수 있지요. 어떻게 연명한다는 것을. 여러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이유를 묻지 마세요. 이렇게 굶주린 자가 바로 지척에 있어요. 그리고 우리가 더 잘살기를, 더 복 받기를, 무슨 뭐…… 뭘 더 바란다는 얘입니까? 그리고 원망, 불평입니다. 이러고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복을 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우스운 얘기하나 할까요? 어느 날 신앙심이 아주 두터운 교인 하나가 길거리에 나섰다가 아주 끔찍한 보았어요. 한끼의 식사가 없어서 헤매는 사람, 노숙자들도 보고요 젖이 나오지 않는 빈 젖을 빨면서 우는 어린아이를 보았어요. 너무 비참한 모습을 보다가 그가 하나님 앞에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이렇게 비참한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뭘 하고 계시는 겁니까? 대책을 세울 겁니까, 안 세울 겁니까?" 하고 하나님 앞에 협박기도를 했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대책이라고? 이 답답한 녀석아, 내가 심심풀이로 너를 만든 줄 아느냐?" 네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목적이 뭐냐 이거예요. 나는 넉넉히 주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이 지구상에 넉넉한 양식을 주었습니다. 온 사람이 이제부터 50년까지도 충분히 먹고 남습니다. 사람들이 못돼서 너무 많이 먹어. 그래가지고는 뭐 찜질방에 가서 땀을 흘리고 앉아있어요. 그거 죄요. 적게 먹으면 되지. 이 짓을 하고 있으니 이 땅에 하나님이 복을 주시겠어요? 하나님의 시각에서 한번 내려다보세요. 지척에는 이 모양이고 바로 여기서는 또 이 모양이니,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여러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문제는 그 냉수 한 그릇, 그와 같은 것이 없어서 절망하고 죽어 가는 그런 심령들이 우리 주위에는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요. 그걸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만은 요한복음 1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실 때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입장이고 제자들은 씻김을 받는 입장인데 베드로 같은 사람은 어쩌다가 예수님의 발을 씻겨드리지 못했다는 이유로 해서 "내 발은 영원히 씻지 못할 겁니다" 하고 거절을 합니다. 다시 말하면 주는 자가 있고 받는 자가 있고 어떤 사람은 주지도 않고 받지도 않고. 바로 그 세번째 사람이 문제입니다. 나는 주지도 않고 받지도 않는다. 마틴 부버는 "I and Thou"라는 책에서 현대의 문제는 관계의 문제라고 말합니다. 어찌 이젠 누가 나는 받지 않았다고 할수 있겠습니까?



여기 은혜를 받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은혜 입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받지 않고 내가 있습니까? 다 받은 것뿐인데 어찌 나는 받은바 없으니 주지도 않겠다, 안 받고 안주겠다. 그것이 세상이 비참해지는 이유입니다.
초대교회로 돌아가 보십시다, 성령 충만한 교회. 성령 충만의 윤리가 어떻게 나오나 보세요. 그들이 전에는 못 보았습니다. 전에는 가난한 자가 옆에 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성령 충만하고 보니까 내 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더라구요. 나는 너무 많고 저기는 너무 없구나. 그래서 유무상통한 것 아닙니까? 전에는 이게 보이질 않았어요. 성령 충만하고 보니까 즐비하게 가난한 사람이 있고 그리고 내가 도와줘야 될 사람이 있는 것을 알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내 것을 내 것이라고 하는 자가 없더라" 이게 성령 충만의 윤리요.


오늘 성경말씀을 자세히 읽어보면요 '냉수 한 그릇이라도'라고 말씀하셨어요. 영어로는 Even, 냉수 한 그릇이라도, 이렇게 말했습니다만은 자, 원문대로 보면은 '모논'이라고 하는 말이요, 영어로 번역하면 Only, 오직, 오직 냉수 한 그릇만, 한 그릇만 주어도, 그 말이에요. 강하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정말입니다. 냉수 한 그릇, 정말로 소중한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제자의 이름으로. 우리가 선한 일을 하기는 해요. 할 마음도 있어요. 하는 사람도 많아요. 그런데 딱 여기서 걸리거든요. 내 이름으로. 꼭 내 이름을 내려고 해요. 어느 북한의 고관이 한번 제게 그런 얘기하더라구요. "참 남조선 사람들 이름 좋아합니다" 그래요. "글쎄 말입니다, 그거 쌀 몇 톤을 가져왔는데, 단동에다 갖다놓고 봉지, 봉지 만들어 가지고, 거기다가 아무 교회라고 쓰고, 주 예수를 믿어라 쓰고, 심지어는 교인의 이름까지 쓰고." 이렇게 해서 봉지 봉지 만드는데 사흘 걸렸대요. 그걸 신의주로 옮겨놓고, 신의주에서 다시 또 그걸 뜯는데 사흘 걸렸대요. 그래요. 쌀 봉지 하나 주면서 "예수 믿으세요" 이래야 되겠습니까? 이래야만 되겠냐구요?



 꼭 내 이름으로. 거 어느 교회에서는요, 약품을 십오만불어치나 보냈어요. 거기다가 교회 이름을 써서 보냈어요. 그 약 되돌아 왔어요. 날보고 묻더라구요. "왜 돌아왔을까요?" 제가 그랬습니다. "성서적으로 하지 않아서 돌아왔지." 오른손이 하는 거 왼손이 모르게, 사람 앞에 하지 마라. 예수 님이 누누이 말씀하셨는데, 그까짓 몇 푼 주면서 말이요, 자기 이름을. 우리 가만히 보면 선한 일 많이 해요. 그런데 딱 문제가 이름이 걸려요. 내 이름으로. 꼭 내 이름으로 하고 싶은 거야. 심지어는 제가 이런 걸 호소해 보면요 내가 북한에 가서 사람들을 만나서 악수하면서 '주 예수를 믿어라' 그러면서 주면 내 하겠다고 그래요. 그래서 "그만두세요" 그랬어요. 내 이름으로 하고 악수하면서 해야되겠다는 거예요. 탈무드에서 말합니다. 구제란, 받는 자가 있고 주는 자가 있는데, 받는 자가 주는 자의 얼굴을 못 보아야만 구제라 그랬어요.
여러분, 찬송가 가사에도 보면 이름 없이 빛 없이, 뭐 그런 말씀 있죠. 어떤 사람은 그 찬송가 안 부른데요. 이름 없이 빛 없이, 아니 난 그거 싫다 이거예요. 여러분 성서적으로 합시다. 그 이름 그거 뭐 별것도 아닌 거, 뭐 별로 좋은 이름도 아닌 거 잊어버려. 이름이 뭐 대단한 겁니까, 그게? 그 부끄러운 이름을 뭘 그렇게 자랑하고 싶어요. 아주 순수한 마음으로. 여기 보니까 제자의 이름으로, 예수의 이름으로. 이유는 묻지 마세요. 어떻게 들었냐도 묻지마세요. 왜 그러해야 되느냐도 묻지 마세요. 이것이 없이는 내가 살지를 못하기 때문이에요. 우리가 살지를 못합니다. 깊이깊이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오늘 성경말씀에는 특별히 보상문제를 말씀하고 있어요. 보상. 냉수 한 그릇이라도 내 이름으로 주었을 경우 절대로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이 다 기억하시겠다는 것이죠. 세상에는 빼앗으며 살다가 빼앗기는 사람 많고요, 더불어 살면서 풍성한 사람이 있고요. 계속 베풀며 살면서 하나님께로부터 상을 받으며 사는 사람이 있답니다. 여러분이 선택하세요. 인종차별이 아주 심할 때 미국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어느 백인이 정원에 앉아서 시원한 바람을 쏘이면서 맥주를 마시고 있는데 지나가던 아메리칸 인디안 한 사람이 마침 배가 고프고 목이 말라서 가까이 와서 "제게 물 한 그릇 줄 수 있겠습니까?"하고 했더니 "없어!" 그러더랍니다. "그러면 당신이 마시던 맥주라도 좀 주시지요" 하니까 "인디안 놈한테 못 줘!" 그랬답니다. 그래서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인디언은 갔습니다.



바로 몇일 후에 그 백인이 사냥개를 데리고 사냥을 하러 나갔다가, 사냥개를 잃어버렸어요. 길을 잃어버려가지고 그만 조난당해가지고 헤매다가 배가 고프고 목이 말라가지고 쓰러졌어요. 산에 쓰러져 있는 거를 이 아메리칸 인디언이 보고 그걸 간호하다가 자기 집에다 갖다 뉘어서 물을 주고 그리고 죽을 써주어서 정신을 차리게 됐어요.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떠보니까 자기가 물을 거절했던 그 아메리칸 인디언이에요. 기가 막혀서 깜짝 놀라니까 그때 그 추장이 빙그레 웃으면서 하는 말이 당신이 나에게 한 것처럼 내가 당신에게 했더라면 당신은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 우린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무슨 대가를 요구하십니까? 깊이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지금 잘살기를 바랍니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정치를 잘못해서요? 그 누구 때문이요? 아닙니다. 우리의 심성이 지금 복받을 만한 그릇이 되지를 못합니다. 그걸 알아야 됩니다.


이런 유명한 얘기가 있죠. 마틴 이라고 하는 로마 장교였는데 로마군 장교인데, 어느 날 군 일선에 나가서 싸우다가 부상을 당했어요. 피투성이가 되고 옷은 다 찢어지고 그러면서 간신히 간신히 헤어나서 그가 지금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데, 그렇게 휘청거리면서 돌아가는데 문 앞에 문둥병 환자 하나가 쭈그리고 앉아서 물 좀 달라고. 그래서 자기가 가지고 있던 물을 주었어요. 배가 고프다고, 아이고 밥 나 줄게 없는데. 춥다고, 문둥병 환자가 춥다고 해서 자기의 그 찢어진 군복 외투를 벗어서 그에게 입혀 주었어요. 또 춥다고 해서 문둥병 환자를 꼭 끌어안아 주었어요. 이러고 나서 그가 다시 일어나서 자기 길을 가다가 조금 더 가다가 너무 출혈이 심해가지고 그만 세상을 떠났어요. 그리고 하늘나라에 갔는데 예수님이 나와서 영접을 하는데 너무 반가워서 예수님을 만나보았더니 예수님이 자기가 그 문둥병자에게 준 찢어진 옷을 입고 계시더랍니다. 깜짝 놀랐대요. 오늘 성경은 그걸 말씀하고 있어요. 내 제자의 이름으로 대접하면 절대로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여러분 냉수 한 그릇이 절대로 필요한 바로 그 사람이 눈에 보입니까? 여기 감격이 있습니까? 여기 절절한 마음이 있습니까? 저들을 돕지 아니하고는 나는 절대로 살 수 없다. 여러분, 저들이 굶고 있는 동안 우리는 절대로 번영할 수 없습니다. 이걸 알아야 합니다. 이유야 어쨌든 우리는 더불어 살아야 되고, 베풀며 살도록 연구하십니다. 당신의 행복의 근거는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베푸는 마음, 베푸는 생활, 그리고 더불어 사는 생활, 그 속에 하나님의 축복이 있습니다. 따뜻한 마음,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이 되기까지는 우리는 절대 자유할 수도 없고 평안할 수도 없는 것이올시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때때로 원망과 불평도 해봅니다만은 우리는 너무 많이 받았고 너무 잘살고 너무 편안합니다. 너무 안일한 가운데 있어서 주님의 뜻까지 거역할 때가 많은 저희들입니다. 저희들의 부끄러움과 저희들의 잘못한 일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돌아가서 거룩한 성도의 심성으로 돌아가 이웃을 돌보고 형제를 돌보고 냉수 한 그릇에 목숨을 건 불쌍한 심령들을 돌볼 줄 아는 그런 사람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런 아름다운 마음을 가져서 하나님께서 이 땅에 큰 복을 내리시는 그러한 우리가 되고 우리 민족이 되고 성도들이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나눔의 삶(당신은 평생 먹기만 했소)
 
어떤 사람이 꿈을 꾸다가 천사의 인도를 받아 큰 광을 두 군데나 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천사가 첫번째로 인도한 광에는 그가 평생에 먹은 것들이 다 들어 있었는데, 소 몇 마리와 돼지가 있고, 닭이 있고, 쌀이 가마니로 수북히 쌓여 있고, 감자, 고구마, 각종 야채와 온갖 것들이 가득찼습니다.
천사가 두번째 광을 여니 그곳은 텅텅 비어 있었습니다.
"왜냐" 물었더니 "당신은 평생 먹기만 했지 한 일이 없어서 이 광이 비어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천국에 가고 싶으면 주님 뜻 안에서 사랑의 나눔을 가지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하여
 
더위와 갈증에 시달린 나그네에게 시원한 물 한 그릇과목적지를 알려주는 친절보다 더 값진 것은 없다고 생각됩니다.
한 장사꾼이 낙타를 타고 사막을 건너다 심한 모래 바람을 만나 그만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오랜 경험을 통해 얻은 지형 지물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모래 위를 걷고 또 걸었습니다. 작렬하는 태양 아래 달아오른 모래밭은 몸 속에 남아 있는 수분마저 핥아 갔습니다. 준비해 간 물은 동이 나고 최후의 수단으로 동고동락을 한 낙타를 죽여 물을 얻었습니다.


그것도 잠시뿐 근본 문제는 아무 것도 해결된 것이 없습니다. 길은 나타나지 않았고 지나가는 사람은 아무리 찾아봐도 볼 수 없습니다. 더위와 갈증과 허기로 한 발짝도 움직이기 힘든 지경에 그만 살을 익히는 모래판에 쓰러져 필름이 끊어졌습니다.
잠시 후 희미하게나마 정신이 들어 주위를 다시 둘러봤습니다. 물체 하나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사력을 다해 기어갔습니다. 그 곳에는 물 펌프가 있었고 손잡이에 이런 글이 씌어진 쪽지가 있었습니다. "이 펌프애 물을 붓고 펌프질을 하면 달고 시원한 을이 끝없이 나옵니다. "갈증나는 사람에게 이런 잔인한 말이 어디에 또 있겠습니까?


혀끝에 찍어 바를 한 방울의 물도 없는 사막에서 어떻게 펌프에 부을 물을 구해 부으란 말인가? 하늘을 향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절규하며 펌프 아래 모래 둑을 발로 차니 모래가 공중에 뿌려지면서 종이 쪽지 한 장이 펄럭이며 땅에 떨어졌습니다.
"옆 바위 밑에 있는 물병의 물을 가져다가 펌프에 붓고 물을 얻으시오,"
이 글을 읽는 순간 살았다는 용기가 나고 힘이 솟구쳤습니다. 바위 밑에는 누군가 나를 위해 준비해 둔 물병에 물이 담겨져 있었으며 또 한 장의 쪽지가 씌어져 있었습니다.
"다음 사람을 위해서 떠날 때 병에 물을 채워 쪽지와 함께 묻어 두세요 

 

 
 
저 아래 저 사람을 보라
 
본문: 눅 10:30-37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영생, 천국이며, 이를 위하여 믿음을 지키고 주일을 지키고 기도생활에 힘쓰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만큼 중요한 것이 바로 이웃과의 관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만큼 이웃을 만나야 하고 하나님을 사랑한 것만큼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본문에 보면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돈을 다 빼앗기고, 맞아서 거의 다 죽게 되었습니다. 마침 이 곳을 지나가는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이 사람을 못본 체하고 그냥 지나갔습니다. 제사장은 성전의 지도자요, 금식기도도 많이 하고 성경도 많이 알고 있는 하나님의 종이고, 레위인은 찬양도 잘하고 기도도 잘하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마지막으로 지나가는 사마리아 사람은 지위나 계급도 없고, 거룩하지도 않은 사람이지만 강도 만난 사람의 상처를 싸매어 주고, 자기의 나귀에 태우고 데려가 치료해주고


치료비를 다 대주었습니다. 또 주인에게 부족한 돈은 다시 올 때 모두 지불할테니 계속 돌보아 달라는 부탁까지 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은 제사장이나 레위인과 같은 삶이 아니라 하나님을 잘 믿되, 이웃을 향하여서는 사마리아 사람같이 사는 삶입니다. 우리에게는 위에 하나님도 계시지만 아래로 우리 이웃도 있습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서 성공하고 잘 사는 것은 감사한 일이고 은혜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잘 살고 지위가 높다고 해서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고, 사람이 존경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만이 아니라 이웃과도 사랑하고 나눌 줄 아는 성도들을 주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십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서로 사랑하며 기회가 주어졌을 때 좋은 일을 많이 하여 좋은 소리를 듣고 많은 사람에게 사랑과 위로를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만왕의 왕이신 주님은 사마리아 사람같이 이웃을 돕는 삶을 살았습니다. 주님은 약한 자와 사귀시고,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배고픈 자, 슬픈 자,
외로운 자, 가난한 자, 버림받은 자들에게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셔서 위로하시고, 용서해주시고, 긍휼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주님과 같이 낮은 사람, 헐벗고 천한 사람을 귀히 여기고 아름답게 볼 줄 아는 봉사의 눈, 사랑의 눈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러한 주님의 삶을 본받아 사마리아 사람같이 선한 행실을 행하며 살기를 기뻐하십니다. 오늘의 교회는 거룩한 사람, 깨끗한 사람, 훌륭한 사람
만 나오는 곳이 아니라, 강도 만난 자가 나와서 위로 받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의 애통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가난한 자, 병든 자, 배고픈 자, 불쌍한 자들의 슬픈 소리를 들으십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갇힌 자, 헐벗은 자, 병든 자, 가난한 자에게 한 것이 바로 주님께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고, 디모데전서 6장 18절에 보면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모든 계명을 다 이루는 가장 큰 계명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사랑만 있으면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가 선한 사마리아 사람같이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아끼며 사랑하며 살아갈 때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더 은혜와 축복을 내려주실 줄로 믿습니다. 
 
 
자신을 버리고 이웃 돌보면 소중한 ‘참자유’
 
저는 거창한 이상보다는 작은 아픔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저희 동네에서는 폐지를 줍느라 새벽 2,3시까지 언덕길을 오르내리는 어르신들을 자주 보게 됩니다. 개중엔 자녀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심지어 동사무소에서 주는 일거리조차 받지 못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 분들을 뵐 때면 미국의 라 과디어 판사의 일화가 생각납니다. 도둑질로 재판을 받으면서 “수중에 돈은 없고 배는 고파서 하는 수없이…”라며 천장을 보고 눈물짓는 노인에게 라 과디어 판사는 이런 판결을 내립니다. “할아버지,법은 법입니다. 빵을 훔친 대가로 10달러의 벌금형을 내리겠습니다.” 그런 후 자기 지갑에서 10달러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 보이며 배심원들에게 말합니다. “이 할아버지로 하여금 빵을 훔치게 만든 시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도 벌금을 물리겠습니다. 저는 10달러, 여러분은 5센트씩 벌금을 내시기 바랍니다.” 그는 직접 모자에 돈을 거둬 노인에게 주었습니다. 그는 판사이기 이전에 타인의 아픔을 함께 아파할 줄 아는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였습니다.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다른 사람들의 아픔을 함께 느껴야 할텐데…”라는 외침을 우리는 듣게 됩니다. 그러나 이 양심의 소리는 적자생존이라는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들려오는 굉음에 파묻히고 양심의 문은 닫혀버리고 맙니다. 고난당한 이웃의 아픔을 함께 하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아니라 자기를 붙잡고 하소연이라도 할까봐 얼른 지나가는 제사장과 서기관이 되고 맙니다. 이런 마음 속을 조용히 들여다보면 먼저 ‘나의 것,나의 필요,나의 꿈’을 추구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나 자신이 모든 것의 중심에 서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자기가 아닌 또 다른 자기를 내보이려고 발버둥칩니다.


진정한 나 자신을 찾는 노력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될까요?그것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붙잡는 데서 시작됩니다. 이것은 ‘나의 것, 나의 필요, 나의 꿈’에 매달리던 모습을 내려놓는 것입니다.그리고 먼저 이웃을 돌아보고 지역사회를 돌아보고 국가와 민족을 돌아보는 모습으로 바꾸어가는 결단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확신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하다간 내가 망하지 않나”“그렇게 될 때 누가 나를 책임지겠는가”하는 인간적인 소리를 이겨낼 수 있는 확신이 중요합니다.나의 모든 것을 아시고 내 삶과 죽음에까지 함께 하며 책임지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에 대한 굽힐 줄 모르는 확신이 중요합니다. 이 확신이 있을 때 우리는 자신에게만 집착하는 소아병적인 모습을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을 버린 자에게는 자유로움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지닌 모든 것은 보물처럼 가치있게 사용될 수 있습니다. 그의 마음 깊은 곳에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마음에 흘러 넘쳤던 평강이 깃들 것입니다.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저는 눈물 흘리며 천장을 바라보던 그 할아버지의 모습, 언덕길을 오르내리며 폐지를 주으시는 어르신들의 모습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주님께 제 마음을 드립니다. “주님,저의 행할 바를 알게 하시고 저의 길을 지도하소서” 

 

 

 
 
축복의 키스를 전달하자
 
우리는 항상 우리가 받은 재능, 물질의 축복, 영적인 은혜, 우리가 받았던 구원의 선물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 기독인이 살고 있는 이유이며 존재가치이다. 즉 삶의 나눔이다.
헝가리에 유명한 피아니스트 애도르 폴데스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어린 시절 당시 권위있는 피아니스트 에밀 폰 사워를 사사하고자 찾아갔다. 사워 선생은 베토벤의 곡을 주면서 연주해보라고 했다. 폴데스는 열심히 연주했고 선생님은 이를 경청했다. 연주가 끝나자 선생님은 폴데스에게 다가와 그의 이마에 키스하면서 “내 아들아, 내가 오늘 한 이 키스의 의미를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또 “내가 어릴 때 당대의 유명한 피아니스트인 프란츠 리스트를 사사하러 찾아갔었지. 내 연주를 듣고 난 후 그는 키스를 해 주면서 ‘이 축복의 키스를 잊지 말아라.그리고 이 축복의 키스를 재능이 있는 다른 사람에게 전하도록 해라’하고 말했지. 너도 훗날 이 축복의 키스를 꼭 전달하도록 해라”하고 당부했다고 한다.
우리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여러가지 축복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삶을 살도록 하자

 
 
 
신발 한 짝
 
막 출발하려는 기차에 간디가 올라탔다. 그 순간 그의 신발 한 짝이 벗겨져 플랫홈 바닥에 떨어졌다.
기차가 이미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간디는 신발을 주울 수가 없었다. 그러자 간디는 얼른 나머지 신발 한 짝을 벗어 그 옆에 떨어뜨렸다. 함께 동행하던 사람들은 간디의 그런 행동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유를 묻는 한 승객의 질문에 간디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떤 가난한 사람이 바닥에 떨어진 신발 한 짝을 주웠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에게는 그것이 아무런 쓸모가 없을 겁니다. 하지만 이제는 나머지 한 짝마저 갖게 되지 않았습니까?" 
 
 
3실링 6펜스라면
 
허드슨 테일러 선교사가 어느 날 가난한 집을 심방하게 됐다. 그때 그에게는 2실링6펜스뿐이었다. 그가 찾아간 집에는 갓난아이를 안은 어머니가 몸져 누워 있었다.
그는 속으로 ‘내가 가진 돈이 3실링 6펜스라면 이 가난한 여인에게 1실링을 기쁘게 줄텐데!’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기 엄마에게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늘에는 자비롭고 사랑 많으신 아버지가 계십니다”라고 위로했다.
그때 그의 마음 속에서는 ‘이 위선자, 이 사람들에게 사랑 많으신 하나님 운운하면서 주머니에 돈을 움켜쥐고 있다니!”하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양심의 가책을 받은 그는 아기 엄마에게 자기가 갖고 있던 돈 전부를 꺼내 주었다. 단칸방으로 걸어오는 그의 발걸음은 빈 주머니만큼이나 가벼웠다.
다음날 아침 굶을 수밖에 없는 그에게 10실링 짜리 금화 하나가 우편으로 우송돼왔다. 그는 그 날 아침 성경의 진수를 맛봤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주시리라”(잠 19:17) 
 
 
베풀며 사는 것
 
스탠포드 켈리가 수년간 사역했던 아이티는 세계에서 극빈한 나라 중 하나이다. 그 나라의 어느 교회에서 추수감사절을 축하하며 각 교인이 사랑의 헌금을 드렸다. 한 십대 소년이 드린 봉투에는 꽤 많은 돈이 들어 있었다. 석달치 임금에 해당하는 돈이었다. 켈리는 소년을 찾아보았지만 없었다. 나중에 켈리가 마을에서 그를 만나 헌금의 경위를 설명해달라고 강권한 결과, 소년이 헌금을 위해 말을 팔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왜 교회 축하연에는 오지 않았을까? 그는 주저하다가 마지못해 털어놓았다. "입고 갈 옷이 없었어요." 그는 그리스도를 사랑한 사람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있었고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했다.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마 6:20). 켈리는 여러 교회에서 이 소년의 이야기를 전했다. 어느 날 집회가 끝나고 나서, 부유한 차림의 여인이 지갑에서 돈을 꺼내주며 소년에게 옷을 사주라고 했다. 켈리는 실망했다. 그리고 여인을 똑바로 쳐다보고 말했다. "제가 그 소년의 이야기를 한 것은 이런 옷값을 받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소년의 헌금이 하나님께 귀했던 것처럼, 당신도 하나님을 위해 귀한 일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기꺼이 주시는 분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녀 된 당신이 베풀며 살기를 간절히 원하신다. 

 
 
 
이상한 라면
 
초등학교를 어렵게 졸업한 뒤 나는 농사꾼으로 남길 바라는 아버지께 혼자 일하면서 공부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러나 일주일이 지나도록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채 무일푼으로 이곳 저곳 골목을 헤매고 다녔다. 그때 작고 허름한 인쇄소 앞에서 만난 김씨 아저씨가 내 사정 이야기를 듣고는 "우리 인쇄소에서 일하거라. 나중에 돈이 모아지면 야간 학교에 다닐 수 있게 해주마" 라고 하셨다.
그 날부터 나는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고 찬 바닥에 스티로폼을 깔고 자면서 아저씨의 인쇄소에서 일했다. 한달이 지나 월급을 받았을 때 나는 라면 한 상자를 사다놓고 나머지는 몽땅 저금했다.


신이 나서 일하는 동안 또 한달이 지났다. 그러던 어느날 저녁, 라면상자에 손을 넣어보니 라면이 두 개밖에 없었다. 그 중에서 한 개를 꺼냈는데 다음날 신기하게도 라면 두 개가 그대로 있었다. " 분명히 어제 하나를 끓여 먹었는데...." 생각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또 하나를 꺼냈다. 그러나 다음날도 여전히 라면은 두 개였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라면 한 상자를 한달이 넘게 먹은 것이었다.
다음날 나는 일부러 하루 종일 라면 상자가 있는 쪽에서 일했다.



퇴근 무렵 김씨 아저씨가 나를 불러 가게에 갔다오라고 심부름을 시키시기에 인쇄소밖에 나와 유리창 너머로 슬쩍 라면 상자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슬금슬금 눈치를 보던 아저씨가 라면상자 쪽으로 걸어가더니 품속에서 라면 한 개를 꺼내 상자 속에 집어넣고는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며 걸어나오셨다.
어린 사남매와 병든 아내와 함께 월세 단칸방에 살고 계시다는 김씨 아저씨........나는 그 날 아저씨의 심부름도 잊은 채 인쇄소 옆 골목에 쭈구리고 앉아, 한참을 울었다. 

 
 
 
주는 것이 있어야 받는 것이 있다.
 
어제는 일요일, 모처럼 24시간을 가족과 함께 보냈다.
낮잠도 실컷자고...잠실 한강변에 가서 바람도 쐬고...서울종합전시장으로 가서 건축박람회 구경도 했다.

둘째놈은 일주일 단위로 세밀히 쳐다볼 기회를 가지는데(주중에는 거의 잠자는 모습만 봄),
아직 말은 못하지만 말귀는 거의 알아 듣는 듯하다.
딴에 기저귀가져오라, 밥먹자 는 등 일상적인 지시사항은 거의 알아듣고 움직인다.

어제 하루종일 놀아주어서 그런지, 오늘 아침에 종전과 다르게 생긋웃으면서 "빠이 빠이" 손을 흔든다.
주로 "아빠 가지마"하면서 떼를 쓰고 울기 일쑤인데...

역시! 인간은 감정의 동물인가보다.
두살배기 어린아이도 자기가 받은 사랑만큼 남에게 베풀줄 안다.

일곱살 큰놈은 어제부터 정식으로 자기방에서 자기로 했다. 몇년전에 혼자 제우니 잘 따르다가 언제부터인가 큰방으로 합류했었다.

일곱살이니 이제 확실히 분리하여 생활력을 강화하고, 부모에게 예를 갖추도록 해야겠다.

내가 어제밤에 잘자라고 기도해주면서 "이 다음에 좋은 책상도 사고해서 이쁜방으로 꾸며주겠다"고 약속하니, "공주방으로 만들어 주세요"라고 답한다.

나의 영원한 공주야! 알았다.
튼튼하게만 자라다오... 
 
 
오병이어의 기적
 
본문: 마가복음 6:34∼44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쭈오되 우리가 가서 이백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마가복음6:37)

충북 음성의 꽃동네가 시작된 사연이 있습니다. 걸인 1명이 신부님 숙소를 찾아왔습니다. 신부는 걸인에게 한끼분의 음식을 주었습니다. 그 이후에 그 걸인은 정기적으로 찾아왔습니다. 어느 날 신부님은 그 걸인이 도대체 어디서 무얼 하며 사는지 궁금해서 뒤를 밟아보았습니다.걸인은 이집 저집을 돌며 더 많은 돈과 양식을 얻어서는 움막으로 돌아갑니다. 이상하게 생각하며 움막까지 따라가보니 거기에는 수족을 쓰지 못하는 9명의 행려병자들이 누워있습니다. 이 걸인은 그 병자들에게 일일이 밥을 떠먹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느 날 걸인이 다시 신부님을 찾아왔을 때 신부님은 “당신의 몸도 성치 않는데 어떻게 9명이나 되는 병자들을 돌보고 있는가?”고 물었습니다. 이 질문에 그 걸인은 아주 충격적인 대답을 했습니다. “신부님,저는 그래도 걸어다닐 수 있는데 걸어다닐 수 있는 제가 누워있는 이 사람들을 책임지지 못한다면 이 사람들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한마디가 신부님의 양심을 찔렀습니다. “나는 얼마나 이웃사람들에 대해 책임을 지고 있는가?” 이 걸인과 한 신부의 만남이 오늘의 음성 꽃동네를 만든 출발이었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은 예수님의 오병이어 기적을 담고 있습니다. 목자 없는 양같이 방황하는 큰 무리를 보시고 예수님은 불쌍히 여기시고, 굶주린 무리들을 위하여 보리떡 5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그 기적으로 인하여 5000명의 무리를 배불리 먹이고 12광주리를 남길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이 필요했을까요?
첫째로, 주님의 긍휼히 여기시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5000명의 굶주린 무리를 예수님은 차마 그냥 돌려보내실 수 없으셨습니다. 더구나 그곳은 빈 들이요, 때도 저물어 가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냥 돌려보낸다면 저들은 지쳐서 길에 쓰러져버릴 수도 있습니다.
둘째로, 한 아이의 헌신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순종해 떡 가진 이들을 찾고 있을 때 한 아이가 자기의 식사인 도시락을 주님 앞에 내놓았습니다. 이렇게 자기를 드리는 헌신의 결단이 기적의 출발이 되었습니다. 모두가 자기 것만을 고집하고 내놓지 않았다면 주님도 어찌하실 수 없으셨을 것입니다. 가장 작은 것이라도 주님께 드려질 때 귀하게 쓰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주님의 감사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감사하시고 떡을 나누어주도록 할 때 모두가 배불리 먹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삶속에서도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때 놀라운 기적을 보게 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저희들에게도 주님처럼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아주머니는 하나님이세요?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밖은 어두웠고 몹시 추웠습니다. 예닐곱 살쯤 된 조그만 사내아이가 상점 정문 밖에서 서 있었습니다. 신발도 신지 않았고 옷은 걸레나 마찬가지인 상태였습니다. 아무도 그 아이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지만 그 길을 지나가던 한 여자가 아이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아이의 손을 잡고 상점 안으로 들어가 새 신발과 따뜻한 옷을 사 주었습니다.
"자, 이제 집으로 가서 즐거운 명절을 보내렴."
그러자 아이는 여자의 얼굴을 가만히 보며 말했습니다.
"아주머니는 하나님이세요?"
여자는 미소를 짓고 대답했습니다.
"아니, 그냥 하나님의 가족중 한 명이란다."
아이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눈빛으로 말했습니다.
"아주머니가 하나님의 가족인 줄 저는 벌써 알았어요." 
 
 
내게 있는것을 나누는 계절
 
99년 11월, 미국에서는 ‘한 손으론 바지춤을 붙잡고 다른 손으론 벽에 의지한 채’ 25센트 동전을 구걸하던 노숙자 레이먼드 로렌스를 도운 선한 사마리아 사람 빈센트 존스씨의 이야기가 단연 화제였다.
존스씨는 뉴욕 맨해튼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종종 배설물을 몸에 묻힌 채 술에 찌들어 고함지르며 돌아다니던 거지 로렌스를 3년간 계속 만나면서 관심을 기울였고 그가 가족을 만날 수 있도록 도왔다는 것.
그 기사를 읽으면서 더 인상 깊었던 것은 존스씨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도록 한 어머니의 유언이었다.
“일으켜 세울 생각이 없으면 내려다보지 말아라”
나눠 가질 줄 아는 사람은 자신이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내어놓는다.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받은 것을 남과 함께 나누어가지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핑계가 있으면 나누지 못한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만이 나눌 수 있다.
이 성탄시기에 이웃들에게 내가 가진 복음과 물질과 시간을 나눔으로써 보다 더 큰 기쁨과 행복으로 풍성해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과부를 도우시는 예수님
 
본문 :누가복음 7:11∼17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13절)

현재도 그렇지만 그 당시 가장 불쌍한 사람중엔 과부를 꼽을 수 있습니다. 이들은 성경속에서 불쌍한 사람들을 말할 때마다 고아와 함께 등장하는 무리입니다.
오늘의 본문속에는 그러한 사람 하나가 등장합니다. 유일한 희망이던 독자를 잃어버린 가장 비참한 순간을 경험하고 있는 여인이었습니다. 그 희망의 상실로 좌절과 절망속에 눈물을 흘리고 있는 그녀를 보시고 예수님은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십니다. 여기서 다시 예수님은 고통받는 자들을 향해 동정심을 가지고 계신 분임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주검을 담고 있는 관을 만지시며 그녀의 아들에게 “일어나라” 명하심으로써 살려내십니다. 사랑과 능력을 보여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다시 한번 확인시키는 장면입니다.
이 말씀을 보며 두 종류의 사람들을 향한 서로 다른 적용이 가능합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가운데 절망을 경험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오늘 말씀을 통해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단테의 신곡을 보면 ‘지옥이란 더 이상 희망이 없는 곳’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희망이 없는 곳이 지옥’이란 말입니다. 그러나 ‘희망을 갖고 살자’는 식의 단순한 긍정적 사고방식만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말씀에서 발견할 수 있듯 우리에겐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고자 애정을 가지고 관심을 기울이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실제로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절망의 상황속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살아가는 모습이 우리 가운데 필요합니다. 만약 우리 중에 좌절 절망 고통을 경험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분에게 아뢰어야 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그러한 모습을 결코 간과하시는 분이 아닙니다.그분은 죽었던 아들의 살아돌아옴을 통해 경험한 과부의 기쁨을 우리 모두에게도 주시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또 다른 한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그러한 절망과 필요에 빠진 이들에게 도움을 나눠줄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신명기 10장 18절에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신원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사 그에게 식물과 의복을 주시나니”라고 돼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야고보서 1장 27절에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고 말씀하심으로써 ‘경건’이라는 개념을 불쌍한 자를 돌아보는 것과 연결시키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위를 보면 독거노인 소년소녀가장 등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우리는 우리의 필요를 관심을 가지고 채워주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주님으로 모시고 살고 있습니다. 부전자전 모전여전이라는 의미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도 그러한 사랑의 사역에 동참해 우리가 그분을 닮았다는 것을 증거하기를 원합니다.
기도: 우리의 필요에 애정어린 관심을 가지고 계실 뿐 아니라 그것을 채워주심으로써 우리 가운데 기쁨을 주시는 주님 감사합니다. 우리도 그러한 주님의 마음을 본받아 사랑을 나누며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박성민 목사 

 
 
 
헌혈 통한 사랑 나눔
 
며칠 전 수요일 밤 11시쯤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목사님, 목사님 !”
방금 교회에서 돌아와 쉬려고 하는데 누가 찾아와 “내 딸 좀 살려 주세요. 내 딸 좀 살려 주세요”하는 것이었다.
사정인즉 올해 5살 난 딸아이가 한 달 전부터 손발이 차고 입술이 파랗게 되어 대학병원에 입원했는데 수혈해야 할 형편이어서 피를 구하려고 하루 종일 뛰어 다녔지만 구하지 못하고 답답한 마음에 ‘교회 가면 목사님이 구해 주시겠지!’ 하는 마음이 들어 밤늦게 체면을 무릅쓰고 문
을 두드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급할 때 목사에게 찾아와서 도움을 요청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고맙고, 감사하였지만 참으로 난감하였다. 그때 지역 내에 있는 군부대가 생각나 연락하였더니 내일 아침까지 사람을 보내주겠다는 중대장님의 응답을 듣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사랑한다는 것, 사실은 피곤한 것이 아니라 새 힘을 얻는 생수이다. 이처럼 우리 주위에 사랑할 수 있는 모습이 얼마든지 있으니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주께서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심을 확신하며 감사드린다. 
 
 
단지 빌려 준 것
 
어떤 가난한 사람이 기독교인 부자를 찾아가 자신의 어려운 처지를 말하고 도움을 청하였다. 그의 딱한 사정을 다 들은 부자는 꽤 많은 액수의수표를 끊어 건네주면서 말했다.
"이 돈은 갚지 않아도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내게 주신것보다 더 많은 것입니다."
이를 기이하게 여긴 가난한 사람이 부자에게 물었다.
"선생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놀랍군요. 선생님은 큰 부자시고 그 재산은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아닙니까?"
그러자 부자는 빙그레 웃으며 대답하였다.
"나는 거짓말을 할 줄 모릅니다. 내게 있는 많은 재산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이 아니라 단지 빌려 주신 것입니다. 어려운 사람들을 만나면그것을 그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게 말이지요." 
 
 
성도의 교제
 
본문: 행2:37-47

성도의 교제의 이야기들
; 다윗과 요나단
; 나오미와 룻
; 바울과 에베소교회의 장로들

1.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37)
- 교제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서부터 시
작이 되는 것입니다.
- 회개는 나의 부족함을 발견하게하고 상대방의 장점을 발견하게 하는 눈으
로 바뀌는 일입니다.
2.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하는 일입니다.
- 성경 말씀을 통한 교제-사도의 가르침을 받아(42)
- 기도를 통한 교제-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42)
- 찬송을 통한 교제-하나님을 찬미하며(47)
- 성전에서 만나는 교제-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46)
3. 나누어 쓰는 것입니다.
-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44)
- 지속적이어야 합니다.
- 조금 힘이 들 정도여야 합니다.(동정이 아님)
*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은 성도의 교제를 끊어지게 한 사건이었습니다.
도덕적 윤리적으로는 크게 문제될 것이 없지만 교회를 대적한 일이었습니
다.

* 성도의 교제는 이 땅에서 천국의 기쁨을 맛보는 일이요 천국에서 사는 연
습을 하는 일입니다.
- 성도의 교제는 공동의 기억을 필요로 합니다.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되게
한 것은 출애굽이라고하는 기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거기가 있어야
오늘 여기가 있는 것입니다. 그때 거기에 함께 있었다고 하는 기억이 오늘
여기의 의미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 성도의 교제는 마치 금광을 파는 것과 같고 농사짓는 것과 같습니다. 수
고한 만큼 보상이 주어지고 아무것도 아니하거나 게으르거나 하면 좋은 것
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박영철 목사

동역자를 찾습니다.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본인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를 개척하고자 합니다. 예수님과 복음을 땅끝까지, 세상 끝날까지 함께 전하며 당신을 믿음의 형제, 자매로 모시고 의(義)와 평강(平康)과 희락(喜樂)과 사랑이 넘치는 아름다운 교회를 이루고자 합니다. 연락바랍니다. 

 
 
 
하나님께 꾸어드림
 
허드슨 테일러 선교사가 어느 날 가난한 집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에게는 2실링 6펜스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찾아간 집에는 갓난아이를 안은 어머니가 몸져 누워 있었는데, 그들의 상태는 하룻밤을 넘기기 가 매우 힘들어 보였습니다. 그는 속으로 ‘내가 가진 돈이 3실링 6펜스라면 이 가난한 여인에게 1실링을 기쁘게 줄텐데!’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아기 엄마에게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늘에는 자비롭고 사랑 많으신 아버지가 계십니다”라고 권면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서는 ‘이 위선자, 이 사람들에게 사랑 많으신 하나님 운운하면서 주머니에 돈을 움켜쥐고 있다니!’ 하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습니다.


양심에 가책을 받은 그는 아기 엄마에게 자기가 갖고 있던 돈 전부를 꺼내 주었습니다. 가진 것이 없게 된 그였지만 단칸방으로 걸어오는 발걸음은 그의 빈 주머니만큼이나 가벼웠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사랑하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에게 주는 자는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번에 빌려 드린 것이 오래 가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렇지 않으면 저는 내일 점심부터 굶어야 합니다.”
다음 날 아침, 그에게는 10실링짜리 금화 하나가 우편으로 우송되어 왔습니다. 
 
 
나에게는 두 개나 있단다
 
지난 7월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 내과 32병동. 찾아오는 이 거의 없는 40대의 아저씨는 고통중에도 미소가 가득하다. 4년 전 가족들의 반대로 신장기증을 포기해야만 했던 그는 얼마 전 외국출장을 간다며 병원에 입원, 신장을 떼어 준 것이다.
바로 위층에는 수혜자가 5년 만에 나오는 소변이 신기해 물을 자꾸자꾸 들이킨다고 했다. 항상 성경을 읽으며 누구인지를 밝히지 않던 그는 퇴원일이 되자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병원문을 나섰다. 병실의 사람들은 꿈꿨다. 아직은 자신의 방법만을 고집했던 부인이 그의 수술자국을 사랑으
로 감싸안기를…
남에게 신체 일부를 떼어 준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부모나 자식, 또는 형제 부부 사이는 ‘대신 아플 수 있다면…’하는 가족애 때문인지 그래도 나은 편이다. 그런데 세상에는 가족은 아니
지만, 피부색도 다르고 종교도 다른데 선뜻 자신의 것을 나누는 이들이 있다.
미 노스캐롤라이나 페이트빌의 백인교사 제인 스미스(42세)는 자기 반 흑인학생인 마이클 카터(14세)가 늘 헐렁한 힙합 바지만 입는 것이 못마땅했다. 그녀는 카터가 신장병 때문에 복부 통증으로 허리띠를 엉덩이까지 내려 입어야 하는 걸 몰라서 옷을 단정히 입으라고 몇 번이나 충고한 것
이다.
참다 못한 카터가 자신의 병을 털어 놓자 “나는 신장이 두 개 있단다. 이 중 하나는 너에게 더 필요하겠구나.”했고, 이 한 마디는 사제간의 벽을 단숨에 허물어 버렸다. 나날이 악화되는 아들의 병세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카터의 부모는 담임선생님의 제안이 참으로 고마웠다.
조직검사 결과 놀랍게도 일치했고, 뒤이어 수십 명의 학생이 장기기증 서약서에 서명하였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뉴욕타임스. ABC방송 등 미 언론들은 ‘흑백간의 화합과 사랑을 가르치는 진정한 교사’라며 앞다퉈 이들의 이야기를 소개했다. - 중앙일보, 1999. 12. 21

한 스님이 투병중인 기독교 신자에게 신장을 기증, 생명의 불씨를 되살리는 등 릴레이 장기기증이 이루어져 훈훈한 감동을 주고 있다. 용봉 스님(29세)이 신부전증으로 투병해온 기독교 신자 전정임 씨에게 신장을 기증했고, 이에 전씨의 남편 지주현 씨(47세)가 또다른 신부전증 환자인 김덕
자 씨에게 신장을 기증하는 릴레이 장기이식이 이어진 것이다. 이번 릴레이 장기이식은 종교간의 두꺼운 벽을 허물고 이뤄진 종교간 장기이식이어서 감동을 더하고 있다. - 대한매일, 1999. 11. 25

중앙적십자혈액원 골수기증과 강미순 간호사(41세)는 1월 15일 만성신부전증을 앓는 박 모(19·순천대1) 양에게 자신의 신장을 기증했다. 18 년간 다른 사람의 피와 장기를 전달해 온 강 간호사가 장기기증의 뜻을 정한 것은 91년 뇌성마비와 심장질환을 앓던 아들(당시 6세)을 가슴에 묻으면서
였다. 장례식 후 강씨는 아들 대신 자신의 몸을 기증키로 결심, 장기기증서약을 했고 지난해 골수와 장기기증자 등록을 마쳤다. 강씨는 한창 나이에 고통을 겪는 사람과 생명의 기쁨을 나눌 수 있어 흐뭇하다며 새로운 자식을 얻는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 한국일보, 1999. 1. 14 
 
 
따뜻한 마음을 전하자
 
1950년 6·25가 일어났을 때 남한의 상황은 어떠했는가? 전혀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북한에 밀려 남쪽으로 허둥대면서 피란을 갔다. 얼마 후 사태는 더 악화되어 대부분의 지역을 빼앗기고 부산만 남았다. 얼마나 힘든 나날이었을까.
필자는 강의할 때 종종 물어본다. “혹시 6·25 때 부산에 피란가서 굶어죽은 가족,혹은 친척이 있습니까. 혹시 그런 이야기를 들어보셨습니까” 현재까지 굶어서 죽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전쟁의 극한 상황에서도 굶어서 죽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고 한다. 어떻게 이러한 일이 가능했을까. 그것은 우리 민족의 따뜻한 마음 때문이다. 식량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식량이 없는 사람들과 나누어 먹었다는 것이다. 식량이 없는 사람들이 동냥을 오면 반드시 나누어주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밥을 해서 미리 대문 밖에 놓아두었다고 한다. 어려워도 나누면서 같이 지냈다는 것이다.
21세기 이제는 창의성의 시대다. 억지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신나게 일을 해야 한다. 신나게 일할 때 우리의 창의성이 발휘되기 때문이다. 신나게 일을 한다는 것은 기를 살려주는 것이다. 나부터 따뜻한 마음을 좀더 활짝 열자. 그리고 주위 사람들에게 다가가자. 그들에게 내 따뜻한 마음,기를 전하자. 하나님 말씀대로 이웃을 사랑하자. 그러면 우리의 손과 발,머리는 저절로 움직인다. 세상을 천국으로 만들 수가 있다.
/최염순(카네기연구소장)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하시니”(루가 9:13)

사람이 가장 비참하고 고통스러울 때가 언제일까요? 마더 테레사 수녀는 가난과 굶주림이라고 했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길거리에 쓰러지고 벌레들이 왔다 갔다 해도 기운이 없이 체념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희망조차 없습니다. 인간의 존엄성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더욱더 그들을 비참하고 슬프게 만드는 것은 자신이 세상에서 불필요한 존재라고 절망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우리 곁에서 흐느끼고 있다면 우리 모두 하나님의 사랑과 뜻과 가르침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웃과의 나눔은 단지 불쌍한 사람에게 시혜를 베푸는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내가 좀더 잘나서,내가 조금 더 가졌으니까,나는 남을 도와줄 수 있는 착한 사람이니까 도와주는 것만은 아닙니다. 내 안에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열어주는 것입니다. 

 
 
 
주라
 
본문: 눅 6:37-38

구약성경을 한마디로 줄여서 요약하면 '주라'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주는 것'이 율법이고 선지자라고 말씀합니다. 구약의 백성들은 율법을 지키고 순종하면서 살았고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과 같은 선지자들을 통해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오늘날 구약성경의 내용들입니다. 이렇게 구성된 율법서과 선지서들의 내용이 모두 다른 이들에게 '주는 삶'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나누어 주는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가장 성공한 사람이고 복받은 사람이라 말씀합니다.
첫째, 성도는 주는 삶을 인생의 목표로 정하고 살아야 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중에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삶은 반드시 '주는 목표'를 정한 사람입니다. 사람은 대접받기 원하고 사랑받기 원하고 칭찬받기 원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남에게 원하는 마음은 많지만 남에게 행하는 사람은 드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으니 세상에는 행복한 사람이 생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렇게 원하는 마음이 있으면 오히려 남에게 실천하도록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질이든 마음이든 주는 사람이 성공하고 복된 자리로 나아가게 되며 기적을 경험하게 됩니다.
둘째, 기독교는 주는 종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천지만물을 창조하여 주시고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시고, 날마다 우리에게 좋은 것으로 먹이시고 입히시고 길러주시는 우리들의 목자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하여 생명까지 주시고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고 구원하여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시기 위하여 피 한방울도 남김없이 모두 주셨습니다. 성령님도 우리에게 끊임없이 권고하시고 인도하시고 사랑해 주시며 위로하시고 용기를 주시는 분입니다. 이렇게 삼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 나라도 우리에게 주시기 때문에 영원히 변함 없으며 하나님의 사랑이 영원합니다. 주는 사랑은 영원하지만 받는 사랑, 빼앗는 사랑은 영원할 수 없습니다.
셋째, 성도의 주는 삶은 번영하고 천국이 이루어집니다. 주님을 본받아 주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주는 곳에 은혜가 넘치고 축복의 기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모든 생명의 세계는 주는 곳에 번영과 발전이 있도록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 중에 대표적인 것이 소와 양입니다. 번제,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로 바쳐지는 소와 양의 공통점은 나누어주는 동물이라는 것입니다. 사는 동안 주인을 위해 일해주고 젖을 짜서 먹을 것을 주고 죽은 다음에는 고기와 가죽까지 모든 것을 바치는 동물들입니다. 이렇게 모든 것이 유익한 동물인 소나 양이 세상에서 가장 번성하여 그 숫자가 다른 어떤 동물보다 많습니다. 남을 해치는 사자, 이리, 늑대, 표범과 같은 동물은 번성하지 못하고 날이 갈수록 그 수가 줄어드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세계를 바라보아도 남을 공격하고 해치는 공산주의 국가였던 소련 같은 나라도 결국 패망의 역사를 걸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향하여 예배 드리면서 감사한 마음으로 가족과 이웃을 향하여 나누어 줄 때에 그 심령과 가정이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현대인의 불행은 이기심에서 출발합니다. 남을 이용하고 괴롭히고 울리고 슬프게 하는 사람의 가정은 행복할 수 없습니다. 우리교회의 경우도 개척하여 조금 지난 뒤부터 어려운 교회들을 돕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 교회 형편도 당시에 어려웠지만 이기적인 욕심을 버리고 어려운 가운데서 다른 교회들을 도울 때에 교회는 평안해지고 수많은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성도는 자신이 감사한 마음으로 봉사하고 땀흘리고 수고할 때에 만족함과 평안이 찾아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 이웃을 향하여 헌신하고 사모하는 성도들의 그릇을 당신의 사랑과 축복으로 채우시고 날마다 충만하게 역사하실 줄 믿습니다. 
 
 
나눔의 역설
 
나눔이라는 것은 참 역설적인 것이다.
남에게 많이 나눠줄수록
자신도 많이 가질 수 있다.

"사실 뭐든 풍요롭다 보면
남한테 많이 줄 수는 있지.
하지만 많이 나눠주다 보면 생기는게
또 풍요로움이다. 이것은 단순히 돈 얘기가 아니다.
네가 살아가는 동안 무슨 일에서나 느낄 수 있는 일이야."
- 짐 스토벌의《최고의 유산 상속받기》중에서 -

* 나누면 줄지 않고 더 많아집니다. 바닥이 나지 않고 더
채워집니다. 그것이 나눔의 역설이며 나눔의 신비입니다.
게다가 보너스까지 얻게 됩니다. 넘치는 감사와 기쁨,
마음의 행복과 평화, 풍요로움과 따뜻함, 주변과의
관계 회복 등등등, 이루 다 헤아리 수가 없습니다. 
 
 
받은 복을 나누자
 
본문: 신16:13-17

* 망 각
우리가 무엇을 잊을 수 있다는 망각은 잘 사용하면 놀라운 복이 되는 동시에 잘못 사용하면 너무나 많은 손해를 끼치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어떤 사건, 경험을 잊기에 오늘 행복할 수 있음을 봅니다. 동시에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음으로 오늘 불행해 지는 것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들의 문제는 잊지 말아야 할 하나님께서 허락한 복들을 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 점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절기들을 허락함으로 그들의 기억을 새롭게 하였다는 점입니다. 일년에 한번씩 드리는 추수감사예배는 그동안 무심하게 여겼던, 망각했던 하나님의 은총들을 세어보는 시간 입니다. 그리하여 다시 한번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더 돈독하게 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 감사하는 마음과 불평하는 마음의 차이는 무엇인가?
결정적인 차이는 감사하는 마음은 사탄이 역사할 수 없고 하나님이 역사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반대로 불평하는 마음은 하나님이 역사할 수 없고, 사탄이 역사한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좋아하는 마음은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반면에 사탄이 가장 좋아하는 마음은 불평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감사하는 사람을 사용하고, 사탄은 불평하는 사람을 사용한다는 점입니다.


* 감사의 능력
많은 사람들이 미처 생각을 못하는 점은 감사가 가지고 있는 능력입니다. 만일 감사가 가지고 있는 능력을 정확히 알고 그 점을 우리가 기억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감사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점을 알고 계시기에 우리에게 감사를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점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모든 요구는 하나님을 위한 것인 동시에 나 자신을 위한 요구임을 알아야 합니다.

(1) 감사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불평만 하고 원망만 하던 사람이 어느날 감사하는 사람이 되었다면, 그 주위의 사람들은 그가 변화된 모습에 놀랄 것입니다. 부모에게 불평만 하면서 불효자였던 어떤 사람이 어느날 그 부모님을 감사하기 시작하면 그는 효자가 됩니다. 아내에 대하여 감사하는 남편은 좋은 남편입니다. 그리고 남편에 대하여 감사하는 아내는 좋은 아내입니다. 교회에 대하여 불평하는 성도가 좋은 성도가 될리 없듯이, 교회에 대하여 감사하는 성도 역시 나쁜 성도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결정적인 차이는 불평과 감사의 차이입니다. 사람이 좋고 나쁘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누구든 불평하면 좋은 사람이 되기는 틀린 것입니다. 반면에 누구든 감사하면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2) 감사는 영적, 정신적 마음의 질병을 고쳐주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겉으로는 멀쩡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 보면 영적인 질병, 정신적인 질병에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과 댓가를 지불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질병들을 고치는 약이 있다면 바로 감사입니다. 우리가 감사를 상실한다는 것은 단순히 감사를 하지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질병, 정신적인 질병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 감사는 마음의 한, 쓴뿌리, 상처를 치료하는 능력을 가지 있습니다.
(3) 감사는 모든 것을 복으로 바꾸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허락한 모든 것은 내가 그것을 감사할때 복이 됩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이 공식은 다 적용이 됩니다. 반대로 불평하면 아무리 좋은 것도 불행의 원인이 됩니다. 어쩌면 이것이 감사가 가지고 있는 가장 놀라운 능력입니다.
* 내가 질병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내가 그것을 감사할 수 있다면 그것은 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평을 한다면 그것은 화로 다가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년에 3번의 절기를 반드시 지킬 것을 명령합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그 절기를 지킬 것인지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제시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거기에서 발견할 수 있는 영적인 원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복을 자기 혼자만 누리지 말고, 그것을 함께 다른 사람과 나누라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복을 다른 사람과 나눌때 복이 더한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아무리 좋은 것을 받았다 할지라도 그것을 나눌 줄을 모른다면 불행한 일입니다.
*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공동체 생활을 성공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공동체 생활, 사회생활을 할 수 없다는 것은 그가 이기적인 사람임 을 증명합니다.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건강한 공동체, 사회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 하나님이 세운 제도가 있는데 그것은 가정과 교회입니다 그런데 두 제도가 다 공동체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이러한 공동체를 인간에게 허락하였을까요? 그것은 우리가 이기적인 사람이 되지 않도록, 더 나아가서는 우리의 행복을 위하여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당신은 어떠합니까? 가정과 교회에서의 당신의 삶은 어떠합니까? 가정과 교회라는 공동체는 사랑과 희생, 나누려고 하는 사람이 있음으로 인하여 존재, 유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받은 복을 나누라고 합니다. 주 안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복은 나눌때 진정으로 복이 됩니다. 나누지 못하는 복, 나눌 수 없는 복은 이미 복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원리를 빨리 알면 알수록,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더욱 복을 받게 될것입니다 

 
 
 
늪지 같은 사람
 
설교자 무디가 처음 영국을 방문했을 때의 일입니다. 무디는 얼굴에 빛이 나는 한 여인을 주목하게 되었는데, 그 여인은 항상 강당의 앞자리에 앉아 주의 깊게 그의 설교를 듣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무디 는 그녀가 누구인지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운영위원 한 사람이 말했습니다. "알고 싶으세요? 우리는 그 여자를 '늪지'라고 부릅니다.


그녀는 참석 가능한 종교적인 행사에는 모두 참석합니다.
 그렇지만 그녀가 다른 영혼을 위해서 허드레 일을 했다든지 간증을 했다든지 하는 얘기는 한 번도 들어 논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녀를 '늪지 같은 사람'이라고 하지요. 목사님도 아시다시피 늪은 썩은 물을 흘려 버리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친구여 ! 당신은 늪지가 되시겠습니까? 아니면 분수형 우물이나 생수의 강이 되시겠습니까? 
 
 
다른 사람을 돌아보아라
 
성경: 빌2:4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

방울뱀은 치명적인 송곳니를 가졌지만 다른 방울뱀과 싸울 때는 독이 나오는 송곳니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사자나 늑대도 영토 내의 주도권쟁탈을 위해서 싸우지만 상대를 죽이지 않습니다.
'평화'라는 단어의 '평'은 심장 두 개가 나란히 공존하는 '평화의 이념'을 나타냅니다. '화'는 입(구) 속에 밥(화)이 있다는 '경제적 평화'를 의미합니다. 공동체정신이 곧 평화의 출발점입니다.
오늘도 나의 일들도 중요하지만은 다른 사람들의 일도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평화 가운데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누는 삶
 
본문 : 고린도후서 9:6∼12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8절)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모든 것을 넘치게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잘 먹고 잘 입고 잘 지내도록 하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에게 좋은 일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시편 112편 9절을 인용한 고린도후서 9장 9절을 보면 “그분은 가난한 이들에게 후히 뿌려주시고 그분의 자비는 영원히 계속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최근 우리 사회는 빈익빈 부익부 구조의 심화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 주거의 목적만을 가져야 할 주택이 투기의 대상으로 바뀐지 오래고 자신들의 집값을 유지하기 위해 입주민들이 담합하기도 합니다. 계층간 반목 현상은 이미 사회병리 현상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이 때문에 사회는 점점 분열되고 있습니다.
진정 아름답고 평화로운,모두가 잘 사는 사회가 되려면 서로 절제하며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혹시 고린도후서 9장 6절 “적게 뿌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뿌리는 자는 많이 거둔다”는 구절을 보고 열심히 일하면 많이 벌고 게으르면 적게 번다는 뜻으로 해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예루살렘의 교우들을 돕는 데 열성인 점을 칭찬하는 부분입니다. 많이 나눠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억지로 구제금을 내는 것이 아니라 자진해서 희사하길 원하고 있습니다.
갈릴리 호수와 사해는 모두 요단강물을 받습니다. 갈릴리 호수는 받은 것을 끊임없이 흘려보내기 때문에 땅을 풍요롭게 합니다. 그러나 사해는 받기만 할 뿐 흘러나갈 곳이 없기 때문에 죽음의 바다가 됐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눠줄 것을 마련해 주시고 그것을 몇 갑절로 늘려 풍성하게 하십니다. 가진 것을 나누면 언제나 부요하게 되어 아낌없이 남을 또 도울 수 있고 이를 받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감사할 것(11절)입니다. 성도는 착한 일을 하기 위해 하나님께 복을 주십사고 간구해야 합니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남을 해치며 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자신을 위해 복을 구하거나 자신에게 유리하게 강변한다면 하나님께선 전혀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늘 나눌 것을 생각하고 이로 인해 기쁨과 행복의 열매를 맺길 간구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나누는 삶을 원하십니다.

* 기도: 늘 이웃을 생각하며 다른 사람을 위해 살아가는 생활을 하게 하소서. 우리의 삶은 하나님께서 돌보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생활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마음의 고통나누기
 
나는 따뜻한 햇살에 이끌려 아파트 앞 공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그때 승용차 한 대가 빠른 속도로 공원 안으로 들어왔다. 그 차의 운전자는 차에서 뛰쳐나와 근처 벤치에 앉아서 마구 욕설을 쏟아부었다. 자신의 머리를 주먹으로 쥐어박고 스스로를 저주하며 온갖 욕설을 퍼부어댔다.
그 사람의 곁에 서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문득 얼굴을 들고 나를 바라보고 곧바로 욕하기 시작했다. “왜 쳐다보는 거야? 저리로 꺼져 버려” 그런 그의 욕설을 들으면서도 나는 그 자리를 떠날 수가 없었다. 그는 아직도 벤치 가장자리에 앉아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전보다도 더 심한 욕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도저히 그냥 갈 수 없어서 말을 건넸다. “나는 당신의 마음을 이해합니다. 당신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또 어떻게 느끼는지 알 수 있어요” 그는 “뭐라고? 당신이 나를 알아? 어떻게 나의 마음을 이해한단 말이야? 바보같은 소리 집어치우고 빨리 사라져”라며 눈을 부릅뜨고 소리를 질렀다. “내 말을 들어봐요. 나는 당신의 마음을 이해합니다. 왜냐 하면 바로 지난주에 나도 당신과 똑같은 마음을 가지고 내 자신을 저주하며 스스로를 바보라고 여기면서 그곳에 앉아 있었으니까요”


아무런 말도 없이 묵묵히 듣고 있던 그 사람은 갑자기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안고 어깨를 들먹이며 울기 시작했다. 순간 나는 몹시 당황하였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일단 그의 곁에 가까이 다가가서 앉았다. 너무나 서럽게 우는 그 사람이 측은해서 손으로 어깨를 토닥거려주었다. 그러자 갑자기 그 큰 덩치로 나를 숨이 막히도록 힘껏 껴안더니 큰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이것이 존과의 첫 만남이었다. 그는 그 날 자기 부인의 부정을 목격하고 총으로 부인과 그 남자를 쏘아 죽이고 자기도 죽을 결심을 하고 그 공원에 왔던 것이었다. 존에게는 2명의 아이가 있었지만 그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가족이 전부였던 그에게 있어서 부인의 부정은 바로 인생의 목표가 없어져 버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나와의 만남이 계속되면서 아내에 대한 존의 분노는 차츰 사그러들었고 그와 동시에 두 아이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그 해 성탄절 카드에 존은 “이제 정말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나는 지금 두 아들과 행복하다”라고 썼다. 그리고 나와의 만남에 대해 “성탄절에 생각나는 가장 아름다운 일은 그 벤치에서의 당신와의 만남이었고 당신은 내 기억속에 떠오르는 가장 소중하고 고마운 사람”이라고 적었다.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에게는 마음을 나눌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위기에 처한 사람들은 더욱 그렇다. 그들에게는 그 고통을 같이 나누고 그런 마음을 이해해주는 것만으로도 그를 지지해주는 아주 중요한 힘을 줄 수 있는 것이다

 
 
 
참된 부자는 남을 부요케 하는 자
 
예수님의 생애는 나눔의 생애였습니다. 주님은 진리도 지혜도 사랑도 나누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나눔에 대한 묵상을 하면서 이해인 시인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 주님 당신의 생애는 그렇게도 철저한 나눔의 생애로 부서졌건만 우리의 날들은 어찌 이리 소유를 위해서만 숨이 차게 바쁜지 시시로 당신 앞에 성찰하게 하소서.진정 당신 안에서가 아니면 나눔의 참뜻을 알지 못하는 우리에게 당신이 세상에서 모범을 보이신 대로 아낌없이 모든 것 내어 주고도 한 끝의 후회가 없는 너그럽고 순수한 마음을 주소서.
/ 나눔은 소유의 많음에 있기보다 존재의 넉넉함에 있습니다. 마음의 여유, 내면의 충만을 누리는 자만이 나눔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나눔은 물질의 과다의 문제가 아니라 성품의 문제입니다. 나
눔은 사랑할 때 가능합니다. 사랑하는 대상에게는 항상 나눌 것이 있습니다.


주고 또 주고도 줄 것이 남는 연인들의 마음처럼, 더 주지 못해 안달하는 마음이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나눔은 생명의 원리입니다. 나눔은 희생으로 시작되지만 풍성함으로 열매를 맺습니다.
기쁨은 나눌 때 그 기쁨이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눌 때 그 슬픔이 절감이 됩니다. 깊은 샘물을 퍼내면 퍼낼수록 맑은 물이 올라오듯이, 우리의 삶은 나눔으로 더 풍성해집니다. 

 
 
 
어느 간호사의 짧은 이야기
 
대학교 4학년 때 암병동으로 간호사 실습을 나간 적이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제가 있었던 곳은 그 중에도 소아 병동이었지요.
 무서운 암과 싸우는 환자 중에 유난히 눈이 동그랗고 창백한 피부를 가진 여섯 살 된 꼬마 아이가 있었습니다.
“지혜야, 언니가 동화책 읽어줄까?”
“… ….”
“그럼 지혜가 언니한테 노래 하나 불러줄래?”
“… ….”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해도 별 반응이 없는 아이었습니다. 주사를 놓을 때도 아픔을 애써 참고 있는 듯 했습니다.
부모가 이혼을 해서 할머니만 가끔 병문안을 와 줄 뿐인 지혜. 엄마는 새로 시집을 갔고, 아빠는 중동으로 떠나는 바람에 꼬마의 병실에 찾아오는 사람들은 오직 나이드신 할머니 한 분뿐이었습니다.

 더욱 가슴 아픈 것은 할머니가 시장에서 장사를 하면서 대주던 병원비는 할머니가 쓰러지는 바람에 끊기게 되었고, 병원장이 지원하던 보조금조차 원장이 바뀌는 바람에 더이상 지급이 안되어 어쩔 수 없이 퇴원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몇 몇 간호사들과 의사들이 퇴원을 앞둔 지혜를 위해 병실에서 조그만 송별파티를 하기로 했습니다. 저는 그 애가 너무 안쓰러웠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선물다운 선물도 준비하지 못하고 있다가 한 가지 꾀를 내었습니다.

“지혜야, 여기 백 원짜리, 천 원짜리, 만 원짜리 중에 네가 가장 가지고 싶어하는 걸 하나 줄테니 뽑아봐….”
그 방에 있던 우리 모두는 지혜가 만 원짜리 지폐를 집을 줄 알았는데, 주저하지 않고 백 원짜리 동전을 집는 게 아니겠습니까?
“지혜야, 아직 어떤 게 큰 지 모르는가보구나. 이중에는 만 원짜리가 제일 좋은거야, 동전 대신에 이걸로 가지려무나.”
라고 제안하자 아이는, “저는 이 동그란 백 원짜리가 제일 좋아요, 백 원짜리는 멀리 있는 우리 엄마와 얘기를 할 수 있게 해주거든요….”
그 이야기를 듣자 병실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자기 호주머니에 있던 동전을 있는대로 털어서 아이에게 주고 말았답니다. 

 
 
 
장갑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저희 눈을 만지시니..." (마태복음 20 : 34)

한 여인이 지하철 안으로 발을 끌며 들어왔을 때 나는 눈을 돌리고 싶어졌습니다.
그녀는 늙었고 시카고의 매서운 겨울 바람을 막아 주는 것은 단지 누더기밖에 없었습니다.
그녀는 가까이 있는 자리에 앉아 추위에 어깨를 움츠리고 시선을 내려뜨리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희고 거친, 뼈가 앙상한 손은 몸에 두른 낡아빠진 목도리를 꼭 쥐고 있었습니다.


나는 의아하고 불쌍한 마음으로 바라보았습니다.
다음 정거장에서 건장하고 뺨이 불그레한 활기찬 젊은이가 자신 있는 걸음으로 열차에 들어왔습니다.
그의 옷차림은 빈틈이 없었고 머리카락은 깨끗했으며 걸음걸이는 우아했습니다.
그 또한 그 여인의 무언의 불쌍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세 정거장을 지나고 열차가 속력을 늦추었을 때 이 젊은이는 그 여인을 곁을 스쳐지나 다른 문으로 나가 지하도로 사라졌습니다.

그 여인의 무릎에는 그의 갈색 가족 장갑이 놓여 있었습니다.
나는 그 젊은이가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내가 그곳에 그냥 앉아 있는 동안 그는 여인의 궁핍함을 보고 동정심을 가지고 반응한 것을 압니

다. 나는 그 여인에게 나의 장갑을 주어야 겠다는 생각은 전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 젊은이가 동정심을 보여준 그 방법을 나는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이 사건은 여리고에서 두 소경을 고쳐 주시고(마태복음 20:34) 궁극에는 십자가 위에서
그분 자신의 생명까지도 주시도록 예수님을 움직인 그런 종류의 연민을 연상케 했습 니다.

우리들도 주님의 본을 받아 손을 내밀어 궁핍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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