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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 예화모음 33편

by 【고동엽】 2023. 4. 8.
처음 목차 돌아가기
 
 
세나무
 
"팔레스틴 어느 산 위에 쭉 뻗은 세 그루의 나무가 서 있었습니다. 하늘을 향하여 가지를 흔들면서 자기의 아름다운 모습을 과시하고 있었습니다. 그 세 그루의 나무 중에 하나가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언젠가 이 세상에 쓰여지는 날이 온다면 나는 예루살렘 성전의 대들보가 되어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아름다운 존재가 되고 싶어.' 어느 날 사람들이 웅성웅성하면서 올라오더니 도끼로 자기를 찍어 끌고 내려가서 톱으로 켜고 대패질을 한 후에 보기만 해도 소름 끼치는 십자가 형틀을 만들어버렸습니다.

또 한 나무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언젠가 세상에서 쓰임을 받는 날이 온다면 나는 예루살렘 왕궁에 있는 큰 기둥이 되어 왕의 영화를 자랑하는 몸이 되고 싶다.' 어느 날 사람들이 오더니 역시 도끼로 자기를 찍었습니다. 그리고는 끌고 내려갔습니다. 그러더니 마구간 옆에서 톱으로 켜고 대패질을 한 후에 짐승에게 여물을 담아주는, 볼품 없는 조그마한 구유를 만들었습니다.
남아있는 한 나무는 생각했습니다. '나는 언젠가 쓰임을 받을 수 있는 날이 온다면 오대양을 누비고 다니는 크고 화려한 배가 되고 싶다.' 어느 날 사람들이 오더니 도끼로 찍어서 갈릴리 바다로 끌고 갔습니다. 그리고는 톱으로 자르고 대패질을 해 가지고는 비린내 나는 고깃배를 만들었습니다.

세 그루의 나무 모두 신세가 너무 처량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얼마를 지났을까요. 마구간의 구유에 와보니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셔서 어린 아기가 되어 태어나는 것입니다. 자기 신세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어린 아기를 받아 누이는 침대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또 갈릴리에 있는 비린내 나는 고깃배를 어느 날 보니 하나님의 아들이 바닷가에 나오셔서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 위로 올라오시더니 바닷가에 서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향해서 천국복음, 영광스런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자기 신세가 하루아침에 그 복음을 전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의 강단이 된 것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십자가의 형틀이 된 그 나무가 어떤 청년이 와서 자기 위에 눕힘을 당하고 못질을 당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가만히 보니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전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고 부르짖으면서 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쏟으시는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 위에 있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아들이 어린양으로서 하나님께 드리는 거룩한 제사를 올려드리는 제단이 바로 자기가 된 것을 알았습니다. 자기는 그 제단으로 쓰임을 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참 아름다운 우화이다. 이 우화는 미 상원의 원목이었던 비숍 감독이 만든 아름다운 우화이다. 여기서 배울 것이 있다. 우리 모두는 세상을 잘 모를 때 젊은 기분에 한참 자신 만만할 때 '나는 예루살렘의 대들보가 되리라. 나는 예루살렘 왕궁의 기둥처럼 살 것이다. 나는 오대양을 누비는 화려한 배가 되리라.' 하며 아름다운 꿈들을 나름대로 다 가지고 인생을 출발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꿈을 이루는 사람은 백에 하나도 찾기가 어렵다.

우리는 자기의 뜻 즉, 꿈을 성취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대부분 자기 꿈보다는 좀 못하게 인생을 살다가 간다. 이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10년, 20년 살다가 보면은 갈릴리에 있는 비린내 나는 고깃배처럼 살 수도 있고, 아무도 알아주지 아니하는 마구간의 구유처럼 평범하게 살다가 가는 사람도 있고, 원치않는 십자가 형틀의 도구로 쓰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믿는 신앙은 하나님께서 그저 버려두시지 않는다.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하게 만드신다. 말구유와 같은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을 눕히는 침대로, 비린내 나는 고깃배와 같은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전하는 천국 복음을 전하는 강단으로, 십자가 형틀과 같은 끔찍한 존재도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거룩한 제단으로 쓰임을 받게 됩니다. 어떤 뜻으로 사용되듯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고 섬기면서 그에게 기도하면서 인생을 최선을 다해 살아갈 때 하나님은 천하지만 귀하게 부족하지만 놀랍게 연약하지만 강하게 들어서 사용하신다. 이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를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이다. 이것을 믿는 것이 절대주권신앙이다. 
 

 

 
 
「깨달음」이후의 삶
 
독일의 재무장관을 지냈던 마르틴 바덴의 일화. 장관이 되기 전 그는정치적인 위기와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곤경에 처한 때가 있었다. 그럴 즈음 지방여행을 갔다가 허름한 여관에서 구두까지 도둑맞는 일을 당했다.

그가 하나님과 도둑을 원망할때 여관주인이 다른 구두를 내어주며 교회에 가서 예배드리자고 했다. 그는 교회에서 두 다리가 없어도 환한 얼굴로찬양하는 사람을 보고 「구두」가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고, 이때부터 늘 감사하며 살았다. 그 후 바덴은 재무장관에 올랐고 국민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내 자아가 깨어질 때
 
눈부시게 찬란한 왕궁이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 있습니다. 둥근 천장과 벽,기둥이 마치 다이아몬드를 박아놓은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잘게 부서진 유리조각들로 뒤덮혀 아름다운 빛을 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왕궁이 설계되었을 때 건축가들은 문에 입힐 거울을 외국에서 수입하기로 했습니다. 기다리던 거울이 도착하여 포장을 푼 사람들은 낙담하고 말았습니다. 운반 도중 거울이 산산조각나버렸기 때문입니다. 안타까워하며 깨진 유리조각들을 쓸어버리려 할 때 한 관계자가 “어쩌면 깨져 있기 때문에 더 아름다울지도 모른다”고 말했고 그의 의견에 따라 깨진 유리조각으로 추상적인 무늬를 만들어 벽에 붙였습니다. 빛이 여러 방향으로 반사돼 뜻밖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아름다운 왕궁이 만들어졌습니다.

살아가노라면 산산조각난 유리처럼 우리의 마음이 깨지고 상처입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상처가 부정적으로 내 마음에 자리잡기 전에 ‘깨짐으로써 아름다울 수 있다는 긍정적인 생각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내 자아가 깨어질 때 나는 더 아름답게 빛납니다. 
 
 
잘못을 깨닫게 해 준 선생님
 
고등학교 시절을 회상할 때면 부끄러운 기억 한편이 스르르 떠오르곤 한다. 갖가지 기억에
남는 일도 많지만, 유독 그 일만은 나를 부끄럽게 한다.

아마 고2 여름방학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을 것이다. 과목별로 과제물을 제출하
고 선생님들이 내리는 상벌에 학생들이 연연하고 있을 때였으니까. 그런 와중에 나는 그런
대로 고비를 잘넘기고 있었다. 다만 기술 과제물이 불씨로 남아있어서 걱정이었다. 왜냐하
면, 나는 아주 교묘한 방법으로 작성한 과제물을 제출했기 때문이었다. 얼른 보아서는 충실
히 한 것같지만 사실 속을 들여다보면 단원마다 그 중간을 빼놓은 걸 알 수가 있었다. 그러
니까 처음과 끝만 적성해서 내놓았던 것이다. 한마디로 그 많은 과제물을 어떻게 다 일일이
검사하겠느냐는 음흉한 속셈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다행히도 시간이 지나 거의 한달이 다
되도록 아무 일도 없었고, 자연히 나는 기술 과제물에 대해선 까마득히 잊어버렸다. 하지만
그런 요행이 진정코 오래 갈리가 만무했다.

어느날 기술시간 수업중에 선생님이 조용히 내게 다가오셨다. 그리고 오히려 당신이 곤혹
스럽다는 얼굴로 딱 한 말씀하셨다. '네 스스로 알거다! 네가 어떤 녀석인지!" 차마 나는 고
개를 들 수가 없었다. 해놓은 짓이 있으니 의아해하는 짝을 마주 쳐다보기도 민망스러울 정
도였다. 게다가 선생님이 공개적으로 그 사실을 공표하지 않았다는 것에 위안을 삼을 지경
이었으니, 정말이지 숨을 구석이 있다면 그 어디라도 찾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차라
리 매라도 맞는다면 후련하겠다는 생각까지 했으니까.

그일 뒤로 선생님을 뵐 면목이 없었다. 그리고 스스로를 속인 행동에 미치도록 화가 났던
탓에 오래도록 나 자신을 괴롭히기도 했다. 그러나 그 일로 해서 내가 한가지 분명히 얻은
것이 있다면 배움은 잘못을 깨닫는 자의 것이라는 사실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10여 년. 그 일이 내게는 참으로 쓰디 쓴 약이 되었다. 어쩌면 실수를
통하여 올바름을 찾아나가는 것이 청소년기라고 생각해 볼 때, 그런 부끄러운 기억을 굳이
새겨둘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약 그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갔다면, 또 내 자
신 그일에서 아무것도 깨닫지 못했다면, 아마도 나는 지금까지 가장 나쁜 습성에 젖어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건 생각만 해도 아찔한 일이다. 미록 뒤늦은 감은 있지만, 그 많은
과제물을 꼼꼼히 검사해 주셨던 선생님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올린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딸의 죽음이 가르쳐 준 깨달음
 
제 딸이 죽을 때 저와 제 아내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쳤던 생각
을 하고 '주여!우리의 입에서 어느 순간, 어느 경우라도 주님께 영
광 돌리고 감사하고 찬송하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하고 기도했습
니다.

제 딸은 우리 심장 속에다 글씨를 또박또박 새겨 놓듯 확실
한 언어로 '사랑하는 주님이여! 내 눈물과 내 고통과 죽음이 감사
가 되고 기도가 되고 찬송이 되게 해 주옵소서. 어떤 경우에도 주
님을 찬송하게 해주옵소서.' 하고 선명하게 기도했습니다. 그는 도
저히 그 말을 할 입장이 못 되었습니다. 저는 딸의 죽음 앞에서 아
픔과 슬픔을 느꼈으며 말할 수 없이 외로웠고 하늘은 텅 비고 땅이
꺼지는 것 같았습니다. 자신이 열번 죽는 것보다 더 어렵게 느껴
졌습니다. 저만 경험하는 것 같았습니다. 인간의 제로점이 되었습니
다. 아무 것도없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기도가 있었습니다. '주
여! 이런 중에도 내 마음에 감사와 찬송을 주옵소서,' 마치 내 영
혼, 내 심장 속에 하나님이 구멍을 뚫어 버린 것같았습니다.
시체 옆에서 손목을 붙잡고 한 시간 동안 제가 앉아 있을 적에 깊
이 뚫린 그 영혼의 구멍 속에서 맑은 샘물이 졸졸 솟아나기 시작했
습니다. 그전에 부르던 찬송가와는 의미가 달랐습니다. 깊이가, 질
이 달랐습니다. 주님의 상처에서 흐르는 피와 같았습니다. 찬송을
진실하게 불렀습니다. 감사하다는 말을 몇 번이나 했습니다.



 주님
이 저에게 새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렸습니다.
새 막이 열렸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새롭게 만날 수가 있었습니
다. 지금도 저는 '주님, 제가 어쩌다가 갑자기 죽을 경우가 생겼어
도 저에게 5분간 의식이 다시 돌아오게 해서 찬송을 부르고 감사하
고 다른 사람에게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영광 돌린 후에 다시 데
려가길 바라나이다.' 하는 것을 기도 합니다.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가
로되 내가 모태 에서 적신이 나왔아온 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
아 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 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
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 든 일에 욥이 범
죄치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욥
1:20-22)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니라 (살전5:18 ) 

 

 
 
로마의 위대성
 
우리는 왜 로마를 위대하다고 하는가? 그들은 도로가 국토의 동맥이라는 핵심을 알고 있었
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상식적인 이야기이지만, 도로가 국토의 동맥임을 2천년 전에 알고 있
었던 민족은 로마밖에는 없었다. 그래서 로마는 천여 년의 영광을 누린 것이다.
영국이 왜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을 흠모하는가? 그는 영국이 나아가야 할 핵심을 제시한 왕
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바다를 다스리는 것이 세계를 다스리는 것이다."라는 깨달음이 있
었다. 그 한가지 깨달음이 해가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을 만든 것이다.

 나는 한국교회에서 제일 빈곤한 것이 바로 이런 핵심을 잡아낼 줄 아는 지도자가 적다는 점에 있다고 본다. 방 향을 잡아주는 지도자가 없으면, 백성은 방황하게 되어 있다. 예루살렘교회가 위기에 처했을 때, 사도들이 한 일이 무엇인가? 방향 잡는 일이었다.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행 6:4). 이것이 그 이후의 교회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핵심이 되었다. 

 

 
 
고아의 아버지
 
오늘날도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어떤 성도들은 교회에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때 마음이 뜨거워지면서 '저 말씀은 나를 보고하는 말씀이다.'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을 것입니다. 그럴때 역사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섶을 태우는 불같고
바위를 치는 쇠방망이 같습니다.

그런가 하면 또 성도는 말씀을 읽을때 깨달음을 얻어 길을 찾게 됩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평소에 무심코 지나던 말씀이 어느날 갑자기 뜨거워지며 깨달아져 인생의 다른 길이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인도의 손길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조지 뮬러 목사는 독일 사람으로, 아프리카 선교사가 되기 위해 영국에
공부하러 갔던 사람이었습니다. 뮬러 목사는 평소 많은 고아들이 거리에서 방황하는 것을
보며 공부했는데 하루는 성경을 읽다가 '그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시편68:5)는 말씀을 발견했습니다.

그때 그 말씀이 뮬러 목사의 영혼을 뒤흔들었습니다. 그 말씀을 바로 뮬러 목사에게
주어진 말씀이었습니다. 여기에서 뮬러목사는 '하나님께서 고아의 아버지시라면 나는
고아들을 돌보는 총무가 되어야지.'라고 생각하면서 "하나님,고아를 돌보는 사명을
주셨으니 길도 열어 주옵소서."라고 기도하게 되었고 결국 고아원을 세우는 길을 얻어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고아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면 우리의 인생은 달라집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늘 읽고 묵상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를 받기 원한다면 항상
말씀을 읽고 묵상해야 합니다. 말씀을 깨닫는 순간 우리의 인생은 달라집니다. 


 
 
 
잘못을 깨닫게 해 준 선생님
 
고등학교 시절을 회상할 때면 부끄러운 기억 한편이 스르르 떠오르곤 한다. 갖가지 기억에 남는 일도 많지만, 유독 그 일만은 나를 부끄럽게 한다.

아마 고2 여름방학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을 것이다. 과목별로 과제물을 제출하
고 선생님들이 내리는 상벌에 학생들이 연연하고 있을 때였으니까. 그런 와중에 나는 그런
대로 고비를 잘넘기고 있었다. 다만 기술 과제물이 불씨로 남아있어서 걱정이었다. 왜냐하
면, 나는 아주 교묘한 방법으로 작성한 과제물을 제출했기 때문이었다. 얼른 보아서는 충실
히 한 것같지만 사실 속을 들여다보면 단원마다 그 중간을 빼놓은 걸 알 수가 있었다. 그러
니까 처음과 끝만 적성해서 내놓았던 것이다. 한마디로 그 많은 과제물을 어떻게 다 일일이
검사하겠느냐는 음흉한 속셈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다행히도 시간이 지나 거의 한달이 다
되도록 아무 일도 없었고, 자연히 나는 기술 과제물에 대해선 까마득히 잊어버렸다. 하지만
그런 요행이 진정코 오래 갈리가 만무했다.

어느날 기술시간 수업중에 선생님이 조용히 내게 다가오셨다. 그리고 오히려 당신이 곤혹
스럽다는 얼굴로 딱 한 말씀하셨다. '네 스스로 알거다! 네가 어떤 녀석인지!" 차마 나는 고
개를 들 수가 없었다. 해놓은 짓이 있으니 의아해하는 짝을 마주 쳐다보기도 민망스러울 정
도였다. 게다가 선생님이 공개적으로 그 사실을 공표하지 않았다는 것에 위안을 삼을 지경
이었으니, 정말이지 숨을 구석이 있다면 그 어디라도 찾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차라
리 매라도 맞는다면 후련하겠다는 생각까지 했으니까.

그일 뒤로 선생님을 뵐 면목이 없었다. 그리고 스스로를 속인 행동에 미치도록 화가 났던
탓에 오래도록 나 자신을 괴롭히기도 했다. 그러나 그 일로 해서 내가 한가지 분명히 얻은
것이 있다면 배움은 잘못을 깨닫는 자의 것이라는 사실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10여 년. 그 일이 내게는 참으로 쓰디 쓴 약이 되었다. 어쩌면 실수를
통하여 올바름을 찾아나가는 것이 청소년기라고 생각해 볼 때, 그런 부끄러운 기억을 굳이
새겨둘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약 그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갔다면, 또 내 자
신 그일에서 아무것도 깨닫지 못했다면, 아마도 나는 지금까지 가장 나쁜 습성에 젖어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건 생각만 해도 아찔한 일이다. 미록 뒤늦은 감은 있지만, 그 많은
과제물을 꼼꼼히 검사해 주셨던 선생님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올린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박찬호 선수의 깨달음
 
성 구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엡 5:25)


"가정이 소중하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가정의 화목을 위해 그만큼 투자하는 사람은 드물지요." 강학중 가정경영연구소장(44)은 "가정의 행복은 가족을 배려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과정을 통해 힘들게 얻어지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가정이 소중하다고 느낀다면 그에 걸맞은 시간과 정성을 쏟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 직장 때문에, 일 때문에 가정에 소출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런 사람들에게는 행복한 가정은 영원히 '희망사항'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는 것. 강소장은 "현실적으로 일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가정을 소홀히 하는 데 대한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며 "일과 가정 사이에 균형을 유지하려는 지혜와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강소장은 특히 남편의 역할을 무엇보다도 강조하면서 '좋은 남편 십계명'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1. 아내의 얘기를 귀담아 들어라
 2. 아내에게 사랑과 고마움을 말과 행동으로 표현하라
3. 아내와 둘만의 시간을 자주 가져라
4. 아내와의 약속을 지켜라
5. 매사를 아내와 상의하여 결정하라
6. 일과 가정 사이의 균형을 맞추어라
 7. 자녀 양육과 집안일을 아내와 분담하라
 8. 아내가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라
 9. 아내의 가족과 친구들을 존중하라
 10. 성의 즐거움을 부부 사이에서 찾아라 

 

 
 
떡은 가장자리부터
 
성 구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빌 3:14)


첫째 약속과 희망의 땅, 둘째 실지의 회복, 셋째 하나님의 감독, 넷째 젖과 꿀이 흐르는 복지라는 깊은 뜻을 지표로 해서 한반도를 변화시켜 가나안으로 만들고 나아가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땅으로 만들고자 한 가나안 농군학교의 김용기 장로님을 아십니까? 그는 한 손에는 성경을, 한 손에는 괭이를 들고 나라와 민족의 미래를 위해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나라와 민족을 생각하게 된 데는 계기가 있습니다.
그는 어릴 적부터 큰 꿈을 품고 세계지도를 자주 펼쳐 보곤 했는데, 지도에 그려진 우리 나라 땅이 너무 좁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왕 태어날 거면 중국에서 태어났어야 하는 건데 … ’ 하는 생각에 그는 중국 심양의 조선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동네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그 곳에 도착한 지 며칠 안 되어 교회에 주일예배를 드리러 온 그에게 목사님이 물었습니다. “자네는 어찌하여 이곳까지 왔는가?” 그는 “조선 땅이 너무 좁아 넓은 곳에서 포부를 펼치려고 왔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은 전병 가게로 들어가더니 그에게 전병 한 개를 사주며 “그걸 가운데부터 먹어 보게”라고 했습니다. 그는 “이걸 어떻게 가운데부터 먹을 수 있습니까?” 하고 되물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은 “떡 하나도 한복판에서 먹을 수 없으면서 어떻게 세계를 한 가운데에서 먹으려 하는가? 떡은 가장자리부터 먹는 법이니 지금 당장 조선으로 돌아가게”라고 말했습니다. 깊이 깨달은 그는 조선으로 돌아와 땀 흘리는 농부가 되었고, 그는 이제 세계를 향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지금 당신의 자리가 가장자리라고 불평하진 않으십니까? 


 
 
 
엄마와 신호등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너희들아 다 와서 들으라 하나님이 내 영혼을 위하여 행하신 일을 내가 선포하리로다 (시 66 :16)


엄마와 딸이 시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횡단보도 앞에서 파란 신호등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옆쪽에서 술취한 아저씨가 다가오더니 엄마의 이마를 ‘꽝’ 하고 받았습니다. 그리고는 엄마를 보며 히죽히죽 웃고는 빨간 신호등인데도 길을 건너갔습니다. 돌아오면서 엄마는 생각했습니다.‘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왜 하필 나랑 부딪쳤을까?’ 그날 밤 생각에 잠겨 기도하다가 엄마는 울기 시작했습니다. 깨달음이 온 것입니다.
“주님! 주님께서 제게 이런 가르침을 주시려고 이런 일을 경험케 하셨군요. 맞습니다. 저는 영적으로 술취한 자였습니다.
세상의 허세와 교만과 높아짐과 부를 추구하는 저의 모습, 포장된 저의 모습은 술취한 자의 모습이었습니다. 교사의 직분을 주셨지만 아이들에게 파란 신호등에 건너라 가르치면서 빨간 신호등에 건너는 술취한 교사였습니다. 저를 용서하옵소서.”


 당신의 영적인 모습은 어떠합니까? 혹시 술취한 모습은 아닌지요? 세상에서 방황하다 주일예배를 드리고 6일의 삶이 온전해졌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십니까? 하루하루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가르침을 깨닫는 것은 중요합니다. 하루의 일들을 생각해보고 반성할 줄 아는 습관을 가진 사람, 자신을 낮추어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며, 하나님께 사랑받는 자녀임을 알아야 합니다. 

 

 

 
 
돌아가야 할 곳
 
어떤 사람이 집에 온 손님을 위해 택시를 잡으러 나갔습니다. 그리고는 택시를 잡아서 자기가 타고 갔답니다. 한참 가다보니 어딜 가는지 몰라 생각해보니 손님을 위해 잡은 것이었습니다.
다시 집으로 되돌아와서는 또 뭐 때문에 택시를 잡았는지 몰라서 그냥 요금만 주고 택시를 보냈다고 합니다. 죄에 대해서도 인간의 모습이 이것과 별로 다를 것이 없습니다.
금방 잊어버리고 또 다른 길로 가고,뭐 때문에 그 일을 하는지도 모르고 하다가 돈만 없애고 후회합니다.

사사기에 나타난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복되는 잘못이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무서운 회초리를 금방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다시 옛 생활로 돌아갑니다. 무엇 때문인지도 모르고 돌아갑니다. 인간이 돌아가야 할 곳은 옛 생활이 아니라 죄 짓지 않은 본래의 모습입니다. 

 
 
 
매를 맞는 이유
 
어떤 사람은 누워먹는 팔자가 좋다고 해서 밤낮 누워먹다가 무량병이 들었다는 것이다. 유명한 의사가 내가 고쳐준다고 가족과 의논하고 박달 망치를 차고 들어가서 사정없이 욕을 한다. 겁야 이놈아, 너 돈푼이나 있다고 밤낮 누워먹어? 너는 이 사회에 하루 살아야 하루 해독이요 이틀 살아야 그만큼 이 나라 이 사회에 해독인 기생충 같은 놈이야. 너같은 놈은 때려 죽여야 한다겂고 사정없이 두들긴다. 무량병자는 마누라를 부르고 자식을 부르나 종무소식(終無消息)이다.

이러다가는 정말 죽겠구나 하고 있는 힘을 다하여 발동하며 일어난다.겁야, 이놈이 일어나누나겂 하고 다시 후려갈기니 둥싯둥싯 달아나면서 한 번만 살려 주시면 일 잘하겠다고 백배 사죄를 한다. 그래서 무량병 든 놈을 때려서 살렸다는 것이다. 우스운 이야기 같지만 참말 한국민족이 이렇게 매를 맞고 한국교회가 많은 매를 맞는 것은 일어나서 일하라는 것이다. 남을 위해 일하는 것은 곧 나를 위함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주목하여 훈계함을 들음
 
내가 너의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시32:8)
하나님은 아이디어가 옳지 않으면 이렇게 말씀하신다."안된다."
하나님은 시간이 되지 않았다면 이렇게 말씀하신다."천천히"
하나님은 당신이 올바르지 못하면 이렇게 말씀하신다."고쳐라."
하나님은 모든 것이 다 올바를 때 이렇게 말씀하신다."해라." 

 

 
 
천자문과 만자문
 
두 친구가 금강산에 있는 유명한 스승을 찾아가 글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스승은 두 젊은이에게 천자문을 주면서 일 년 동안 공부하라고 했습니다.
한 친구는 꼼짝없이 자리에 앉아 천자문을 외우고 또 외웠습니다. 책이 다 닳아 헤어지도록 반복해서 읽다보니 어느새 천자문에 환해졌습니다.

무슨 글자가 앞에서 몇 번째. 뒤에서 몇 번째 나오는지 알 정도였으니까요. 다른 친구 역시 열심히 천자문을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 읽고 나니 더 이상 얻을 것이 없다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 친구는 책을 덮고 금강산 유람길에 나섰습니다.
길을 가다보니 두 아이가 떡 한 조각을 놓고 반으로 공평하게 나누기 위해 떡 한가운데를 막대기로 대고 "됐지?, 됐지?"하며 애를 쓰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젊은이는 "아하, 가운데 '중'(中)자는 저런 의미구나, 누구에게도 공평한 것이구나" 하는 것을 깨우치게 되었습니다. 또 하루는 논을 지나다보니 사람들이 새참을 먹고 있었습니다.
"무더운 날씨가 고생이 많으시네요"하고 젊은이가 인사를 하자 "우리 같은 남정네들은 그저 머리에 논밭을 이고 사는 사람들이지요"하고 대답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젊은이는 "아하, 사내 '남'(男)자의 뜻은 그런거구나"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지요. 이런식으로 그는 천자문의 글자 뜻을 하나 하나 익혀갔습니다.


일년이 되자 스승은 두 젊은이를 불렀고 그 동안 어떤 공부를 했는지 물었습니다. 한 젊은이는 천자문을 자신있게 외웠고, 다른 한 젊은이는 천자문의 이치를 깨친 사실을 말했습니다. 그러자 스승은 껄걸 웃으며 두 젊은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천자문을 배웠지만, 너는 만자문을 배웠구나" 
 
 
청년의 반성
 
어떤 청년이 웬일인지 알 수 없으나 자기의 무죄한 아내와 이혼을 하고 다른 여자와 결혼한 후에 어떤 용무로 여행을 갔다가 용무를 마치고 밤늦게 돌아와 방문을 열고 보니 자기의 신혼 아내가 다른 남자와 동숙함을 보았다.

 이것을 발견한 남자는 크게 분개해서 옆에 있는 의자를 들어 두 남녀를 함께 쳐 죽이려 하는데 문득 자기의 죄를 깨닫고 의자를 맥없이 던지고 밖으로 나아가 묵상하며 깊이 반성했다고 한다.
"나의 깨달은 것이 이것이니라 곧 하나님이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은 많은 꾀를 낸 것이니라"(전7:29) 

 

 
 
울타리와 포도밭
 
현명한 아버지의 재산을 불려받은 어리석은 아들이 그 포도밭 주위의 울타리를, 포도 열매를 열게 하지 않는다고 모조리 걷어 치우게 했다. 울타리를 쓰러뜨려버렸기 때문에 그 밭은 사람도 짐승도 자유로이 들어갈 수 있게 되어 이윽고 포도나무는 남김없이 모조리 엉망이 되고 말았다.그래서 이 어리석은 사나이는 이미 때를 놓치고 나서 포도 열매 따기를 기대할 것이 아니라, 포도밭을 보호한다는 것은 그것을 소유로 하는 일 못지 않게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처음부터 자기 일의 대가인 사람은 없다. 

 

 
 
나무들과 도끼
 
나무꾼이 숲에 와서 나무들에게 자기 도끼에 맞는 자루를 얻고 싶다고 부탁했다. 이것은 지극히 조심스런 주문으로 받아들여서, 몇몇 중요한 나무들이 모여 의논한 끝에 곧 거기에 동의하여, 초라한 물푸레나무를 제공하기로 그들 사이에서 결정되었다. 그런데 나무꾼이 물푸레나무 토막을 그 목적에 어울리게 수공을 다 마치자마자, 사방 팔방으로 주위를 마구 후려쳐, 숲에서 가장 훌륭한 나무들을 잘라 쓰러뜨리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때가 늦었다고 깨달은 떡갈나무가 히말라야 삼나무에게 속삭였다.
"최초의 양보로 일체가 헛일이 되고 만 것이다. 만약 우리들의 저 천한 이웃을 희생시키지 않았다면, 우리들 자신도 아직 많은 세월을 살 수 있었을 텐데." 

 

 
 
사냥하러 간 사자와 나귀와 여우
 
The Lion, the Ass, and the Fox Hunting

The Lion, the Ass, and the Fox formed a party to go out hunting. They took a large booty, and when the sport was end-ed bethought themselves of having a hearty meal. The Lion bade the Ass allot the spoil. So dividing ot into three equal part, the Ass begged his friends to make their choice; at which the Lion, in great indignation, fell upon the Ass, and tore him to pieces. He then bade the Fox make a division; who, gathering the whole into one great heap, reserved but the smallest mite for himself. "Ah! friend," says the Lion, "Who taught you to make so equitable a division?" "I wanted no other lesson." replied the Fox, "Than the Ass's fate."

사냥하러 간 사자와 나귀와 여우

사자와 나귀와 여우가 친구가 되어 사냥하러 나섰다. 그들은 포획물을 가득 손에 넣었다. 그리고 사냥도 다 끝나자 진탕 음식을 먹으려고 생각했다. 사자는 나귀에게 포획물을 분배하라고 명령했다. 그래서 나귀는 3등분하여 친구들에게 좋을대로 택하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사자는 몹시 화가 나서 나귀에게 덤벼들어 나귀를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말았다.
그러고나서 사자는 여우에게 분배하라고 말했다. 그러자 여우는 전부를 긁어모아 하나의 큰 더미를 만들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극히 작은 것 밖에 남겨 놓지 않았다. 그것을 보던 사자가 말했다.
"어렵쇼, 너에게 누가 이런 공평한 분배법을 가르쳤지?"
그러자 여우가 대답했다.
"저 나귀의 운명 이외에 별로 아무런 교훈도 필요치 않았지요."

* Better be wise by the misfortunes of other than by your own.
자기 자신의 불행보다도 타인의 불행으로 현명해지는 것이 좋은 것이다. 

 
 
 
맥아더와 금접시
 
맥아더 장군이 육군사관학교 교장이었을 때 이야기다. 어느 날 상원 국방위원들이 시찰을 왔다.맥아더 장군은 보고를 마친 후 국방위원들을 자기 방으로 안내했다. 그 방에는 가구도 없고 쇠침대만 덜렁 놓여 있었다. 맥아더는 “이 곳이 제가 생활하는 방입니다. 이 곳에서 일주일 지내고 주일에만 집에 갑니다”라고 말하며 자기가 고생하고 있음을 은근히 강조했다.
시찰이 끝나자 만찬이 베풀어졌고 금접시에 요리들이 담겨 나왔다.

 그들이 돌아간 뒤 맥아더는 금접시 하나가 없어졌음을 알게 되었고 범인을 꼭 잡으리라 마음을 다졌다.

국방위원들을 의심하던 맥아더는 그들에게 편지를 보내 금접시의 행방을 물었다.
며칠 후 그는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만일 장군께서 그날 밤 야전용 침대에서 주무셨더라면 벌써 금접시를 찾으셨을 것입니다. 제가 침대 모포 밑에 접시를 넣어두었거든요”
나의 일이 뒤틀리게 만든 원인 제공자는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이다. 
 
 
나는 미천하오니
 
욥기 40장 1 절- 14 절

오늘 우리가 생각하게 될 욥기 40장의 말씀도 욥을 향해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본문 1 ∼2절에 여호와께서 또 욥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변박하는 자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하나님과 변론하는 자는 대답할지니라 했습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일은 하나님의 통치의 공평함과 그 섭리의 합리성을 반박하는 일입니다. 욥은 그 동안 자기가 원하지도 않고 생각지도 않았던 시련 을 견디기가 너무 어려워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의심도 가져 보았고 하나님께 불평도 해 보았 고, 하나님의 종들의 말을 반박도 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것이 욥이 범한 죄입니다. 사람은 타락한 이래로 본성이 악해졌기 때문에 이런 죄를 범하기가 쉬운 것입니다. 전에 모세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 얼마나 사양했습니까?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출애굽기 3장 11절에 보면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라며 자기의 역량이 부족하다고 사양했습니다.


 출 애굽기 3장 13절에 보면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 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라고 하며 자기의 메시지가 부족하다고 사양했습니다. 4장 1절에 보면 모세가 대답하여 가로되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말을 듣지 아니하 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 했습니다. 자기의 권위가 부족하다 고 말했습니다.


 4장 10절에 보면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주여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라며 말재 주가 부족하다고 사양했습니다. 4장 13절에 보면 모세가 가로되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라고 하면서 자기는 적합하지 못하다고 했습니다. 출애굽기 5장 23절에 보면 내가 바로에게 와서 주의 이름으로 말함으로부터 그가 이 백성을 더 학대하며 주께서도 주의 백성을 구원치 아니하시 나이다 했습니다. 모세가 과거에 실패한 것을 말합니다. 6장 12절에 보니 모세가 여호와 앞에 고하여 가로되 이스라엘 자손도 나를 듣지 아니하였거든 바로가 어찌 들으리이까 나는 입이 둔한 자니이다 라고 했습니다. 해 봤어도 소용없다는 말입니 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무리 말씀하신다 해도 저는 할 수 없습니다 하는 거부입니다.그때 하나님 은 노하셨습니다. 출애굽기 4장 14절에 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를 발하시고 가라사대 하였 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지시와 섭리에 대하여 자기의 이론을 펴면서 발뺌하는 것을 하나 님은 싫어하십니다. 그런데 우리 사람은 약하기 때문에 이런 죄에 빠지기 쉽습니다. 시편 73편을 보세요. 아삽 자신도 이런 죄에 빠져드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참으 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실족할 뻔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 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 저희는 죽는 때 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 그러므 로 교만이 저희 목걸이요 강포가 저희의 입는 옷이며 살찜으로 저희 눈이 솟아나며 저희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지나며 저희는 능욕하며 악하게 압제하여 말하며 거만히 말하며 저희 입은 하늘 에 두고 저희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그러므로 그 백성이 이리로 돌아와서 잔에 가득한 물을 다 마시며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극히 높은 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도다 볼찌어다 이 들은 악인이라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하도다 내가 내 마음을 정히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 하나님이 공의의 하나님이시라면 어떻게 이렇게 하실 수가 있습니까? 내가 의를 위해서 산다고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이렇게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반론을 전개한 적도 있었습니 다. 그러나 그 결론은 훌륭합니다. 16∼17절에 보면 내가 어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내게 심히 곤란하더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했습니다. 그렇 습니다. 우주의 창조자시요 통치자이신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주권을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 의문과 불평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욥에게 말씀하신 것이고 우리 모두에게 말씀하신 진리입니다. 아무리 똑똑하고 많이 알고 힘이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하시 는 일에 반론을 펼 수 있는 능력과 자격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완전하고 지혜롭습니다.


그 섭리가 깊고 오묘하고 크고 넓기 때문에 제 한된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 님 됨을 알찌어다 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 중에는 지나 놓고 보아야만 알 수 있는 일 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실 욥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미처 몰라서 괴로워하고 답답해하 고 안타까워하면서 하나님께 대드는 것 같은 인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말 씀을 듣게 될 때 그의 태도가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3∼5절을 보세요.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미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이리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내가 한두 번 말하였사온즉 다시는 더하지도 아니하겠고 대답지도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미천하오니. 그렇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뵈올 때 자기 자신이 얼마나 미천한지를 깨닫 게 됩니다. 그저 다른 사람보다 의롭게 살아 보려고 힘쓴 것 하나 가지고 욥은 은근히 자기 자신 이 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을 대하고 나니 자기 자신이 얼 마나 부족한지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미천하오니. 옛날 아브라함도 자기 자신이 티끌과 같음을 인정했습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습니다. 인간은 벌레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간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와 같습니다.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입니다. 그 생명이 호흡에 있는데 수 에 칠 가치조차 없는 것입니다


. 솔로몬의 말대로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헛된 것뿐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십니까? 고 말했습니다. 인간은 본래 태어날 때부터가 악합니다. 그 성품에 있어서는 더욱 악합니다. 요한 칼빈이 말한 대로 우리 인간은 완전히 타락했습니다(Total Depravity). 그래서 깨어지고 부스러진 거울(broke n mirror)처럼 되어서 본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을 찾아 볼 수 없게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있을 곳은 먼지 속이며 인간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아무 말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대해서 이러구저러구 중얼거리고 불평하는 것은 어떤 피조물에게 있어서나 터무니없는 행동이지만 인간에게 있어서는 더욱 그러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그의 형상대로 지으셨습니다. 그런데 죄가 인간을 악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 님의 형상을 깨뜨려 버렸습니다. 죄의 성격은 깎아 내리는 것이고, 의의 성격은 추켜세우는 것입 니다. 다른 사람을 추켜 세워 주고 북돋아 주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에 보 면 내 백성을 위로하라 했습니다. 약한 사람에게 힘을 더해 주고, 방황하는 사람에게 길잡이가 되어 주고, 낙심된 사람에게 소망을 안겨 주고, 가슴 아파하는 사람에게 기쁨을 안겨 줍니다. 그러나 마귀는 사람을 깎아 내립니다. 공연히 사람을 헐뜯습니다. 세우지 아니하고 무너뜨립니 다.


칭찬하지 아니하고 비난합니다. 우리가 욥기를 처음 생각할 때 보셨지요.욥은 우스 땅에서 살면서 순전하고 정직해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였습니다. 10남매의 자녀가 출중해 서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고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어서 동방에서 큰 자라고 존경을 받고 살았습 니다. 더구나 그가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며 죄를 범하지 않고 살아 보려고 애쓰며 심지어 그의 자녀들이 혹시 하나님을 떠나는 일을 하지 않을까 하여서 아침에 일어나서 하나님께 기도하곤 했 습니다. 욥의 행사가 늘 그랬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욥을 보실 때 마음에 들었고 대견스러웠고 자랑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사단에게도 욥을 자랑했습니다.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그때 사단이 하나님께 뭐랬어요? 욥이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아십니까? 주께서 그와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넉넉히 주어서 산울로 두루셨기 때문에 그런 거지요.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이 이 온 땅에 널리게 해서 그런 거예요.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 모든 소유물을 쳐보세요. 그렇게 되면 아마 주를 향해 찬송하던 그 입으로 주님을 대면해서 욕을 할 것입니다. 이게 바로 사단의 하는 말입니다. 남이 잘 되면 배가 아파서 어떻게 해서든지 망하게 해서 모든 것을 빼앗아 버리려고 합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의 허락하에 하루 아침에 욥이 10남매 자녀를 잃게 되고 그 많은 재물을 다 원수에게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이 봉변을 당한 욥은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 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찌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 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첫 번째 시험을 무사히 잘 통과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했어요? 우리가 시험 당할 때 그 시험을 잘 이기면 하나님이 그렇게 기뻐하실 수가 없어요


. 욥기 2장에 보면 하나님 앞에 나타난 사단에게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네가 나를 격동하여 까 닭 없이 그를 치게 하셨어도 그가 오히려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켰느니라 고 하셨습니다. 이 말 씀을 읽으면서 하나님이 자신에 넘치는 마음으로 흐뭇해하시는 모습을 눈으로 훤히 보는 것 같습 니다. 그런데 사단이 얼마나 악랄한가를 보세요. 하나님께 또 상고했습니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 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면 틀림없이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라. 자식 잃고, 재산 빼앗긴 것으 로도 안되고 자기가 죽게 되면 입장이 달라질 것입니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이처럼 악독합니다. 그래서 그 동안 당한 고난이 얼마나 컸습니까? 필설로 다 표현하기 어려운 고난을 당했습니다. 마귀의 본업은 이렇게 사람을 못 살게 굴고, 헐뜯고, 깎아 내리고, 무너뜨리고, 낙심시키고 절망하게 하고, 원망하게 하고, 비난하게 하고, 불평하게 하고, 욕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마음이 우리에게 일어나려 할 때 이것이 사단의 역사구나 생각하고 마음속으로 사단아 물러가라 해야 합니다. 그래서 죽는 한이 있어도 우리 입에서 원망, 불평, 비난, 시비, 한숨이 나와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여러분, 분명히 들으세요. 우리 입에서 이런 것이 나오면 마 귀가 기뻐합니다. 마귀를 기쁘게 해서는 안됩니다. 약해지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자리에 빠지게 됩니다. 나는 미천하오니. 이것은 욥의 회개입니다. 회개는 인간으로 하나님께 대해서 뿐만 아니라 자 기 자신에 대해서도 보는 관점을 바꾸어 놓습니다. 욥은 그 동안 자기는 악하지 않다고 생각했었 습니다. 자기는 하나님 앞에서 황태자와 같다고 말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욥은 그의 말이 바뀌 었습니다. 보세요. 나는 미천합니다. 완전히 그의 자세가 달라졌습니다. 바리새인 시절의 사울은 이렇게 말했었습니다.


하나님, 제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음을 감사 합니다. 이런 사울이 회개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달라졌습니까? 회개하기 전에는 자기 자신을 의인으로 봅니다. 그러나 회개하면 자기 자신을 죄 인으로 봅니다. 이 자기 자신에 대한 발견은 큰 축복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밝은 빛 앞에 자기 자신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청년 이사야는 하나님의 편에서 예배하면서 하나님을 보게 되었습 니다. 그는 보통 사람들처럼 제단만 본 것이 아닙니다. 촛대만 본 것도 아닙니다. 떡상만 본 것 이 아닙니다. 제사장들의 옷만 본 것이 아닙니다. 그의 신령한 눈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대 면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도 예배당에 와서 예배는 드리지만 강대상만 보는 이들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천장만 봅 니다. 어떤 이는 성가대의 노래만 듣습니다.


이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가 예배당에 나왔으면 지극히 높으신 여호와 하나님을 신령한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사야는 성전에서 하나님 을 대면하게 될 때 부르짖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그는 갑자기 두려움에 싸이게 되었습니다. 그는 떨 수밖에 없었습니다. 잠언에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 고 말씀했습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복지 를 점령한 후 이스라엘 백성에게 마지막으로 권면하신 말씀이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 며 진정으로 그를 섬길 것이니라 라는 것입니다. 전도서 기자는 마지막에 이런 말씀으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이사야는 이런 두려움에 싸이게 될 때 곧 자기의 죄를 고백했습니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입니다.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가운데 살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습니다. 더러운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 제일 먼저 하게 되는 일은 죄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리가 성전에 올라가 기도하면서 제일 먼저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 이다 라고 죄를 고백할 때 그 기도를 들으셨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욥도 그렇게 신앙이 좋았지만 큰 환난을 당할 때 여러 가지 변론을 많이 하다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말씀을 들을 때 내가 미천하오니 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 장에 나옵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 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 서 회개하나이다 했습니다.


 하나님께 대해서 듣기만 하고 하나님을 아직까지도 그 심령에서 친히 대면하지 못한 까닭으로 죄를 회개하지 않은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참으로 대면하게 될 때에는 누구나 죄를 회개하고 고백합니다. 베드로도 갈릴리 바다에서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질 때에 물고기가 너무 많 이 잡혀서 그물이 찢어질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때 비로소 예수는 보통 사람이 아니고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죄를 고백한 것입니다. 예배당에는 나오지만 자고새가 남의 알을 품고 있는 것처럼 죄를 그냥 품고 있는 것은 아직도 하나님을 대면하지 못해서 그러는 것입 니다.


 이사야가 그의 신령한 눈으로 하나님을 대면하고 두려워서 자기의 죄를 자백할 때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죄를 자백하자마자 스랍 가운데 하나가 제단에 있던 펄펄 타는 숯을 갖다가 그의 입 술에 대면서 네 악에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고 말했습니다. 죄를 고백하자마자 죄 사함을 받았고 악이 제거함을 입었습니다. 여러분, 인간에게는 악이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죄가 있습니다. 이 악이 제거함을 받고 이 죄가 사함을 받을 때 하나님 앞에 나와서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죄를 자백하면 자백하는 그 즉시로 죄를 사하여 주십니다. 요한일서 1장 9절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 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했습니다.


 다윗도 무서운 죄, 더러운 죄를 짓고 그냥 품고 있었지만 하나님의 선지자 나단이 나타나서 죄를 가리켜 줄 때에 깨닫고 내가 하나님 앞에 죄를 범했습니다 하고 자백하고 나자 나단이 하나님께서도 네 죄를 사하셨느니라 고 했습니 다. 죄사함을 받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져 주시는 선물입니다. 우리의 무슨 공로를 보고 죄를 사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를 보고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 할 때 하나님께서는 곧 그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오직 회개만이 죄사함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인 것입니다. 사도행전 3장 19절에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 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했습니다.


회개는 개인적으로 생각할 때 문자 그대로 천국의 문입니다. 회개의 좁은 문을 통과하지 아니 하고는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회개는 무엇입니까? 후회입니다. 그리고 두려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온전히 죄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어지러운 세상에서 빛과 소금 의 사명을 다하지 못한 것을 회개해야 하겠습니다. 남의 죄를 보려 하지 말고 먼저 내 죄를 보아 야 합니다. 남의 눈의 티를 뽑으려 애쓰지 말고 내 눈의 들보를 빼기 위해서 먼저 애써야겠습니 다. 우리가 과거에 어떤 길을 걸었던지 어떤 잘못을 했던지 과거를 청산하고 바른 길을 가면 죄사 함을 받고 우리 마음속에는 성령께서 임하십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속에는 새로운 평화와 축복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욥은 나는 미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오리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내가 한두 번 말하였사온즉 다시는 더하지도 아니하겠고 대답하지도 아니하겠나이 다 라고 했습니다. 욥이 회개했습니다.


 같은 죄를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내가 과거에는 죄를 지었지만 앞으로는 절대로 죄를 짓지 않겠습니다 라고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습니다(잠 28:13).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 미쳐 이해하지 못하고 불평하고, 원망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했습 니다. 우리의 잘못을 보지 못했습니다. 이 시간 하나님을 신령한 눈으로 나자신을 보게 하시고 내 죄를 깨닫게 하시고 죄 용서함을 받게 하시고 기쁨과 평화를 주시옵소서. 내가 미천함을 알게 하소서. 

 
 
 
자기발견을 위한 비결 열가지
 
1. 남과 경쟁하지 말고 자기자신과 경쟁하라.
2. 자기자신을 깔보지 말고 격려하라.
3. 당신에게는 장점과 단점이 있음을 알라.
(단점은 인정하고 고쳐나가라)
4. 과거의 잘못은 관대히 용서하라.
5. 자신의 외모, 가정, 성격등을 포용하도록 노력하라.
(그것을 탓하거나 구실로 삼지마라.)
6. 자신을 끊임없이 개선시키라.
7. 당신은 지금 매우 중대한 어떤 계획에 참여하고 있다고 생각하라.
(그 책임의식은 당신을 변화시킨다.)
8. 당신은 꼭 성공한다고 믿으라.
9. 끊임없이 정직하라.
10. 주위에 내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돕도록 하라.
(자신의 중요성을 다시 느끼게 될것이다.) 

 

 
 
자신의 부족함을 압시다.
 
어떤 회사에서 사원 모집광고를 내자 70명이 넘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다.시험장에는 한 사람씩만 들어가게 되어 있었다.그런데 그 안에는 그저 사방에 큰 거울이 하나씩 걸려있을 뿐이었다.지원자들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각 거울 위에 적힌 질문에 맞으면 ‘예’,아니면 ‘아니오’라고 답안지에 적는 것이 시험이었다.
질문은 이러했다.첫번째는 “이 사람은 정직합니까?” 두번째는 “이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거짓말을 하지 않는 사람입니까?” 셋째는 “이 사람은 과연 신뢰할 수 있는 사람입니까?” 네번째는 “만일 당신이라면 이 사람을 채용하겠습니까?”였다.이것이 그 시험문제의 전부였다.시험을 치른 사람들은 모두 이상하게 여겼지만 그러면서도 그들은 자신있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
얼마 후 드디어 합격자 발표가 있는 날이었다.하지만 놀랍게도 70명 가운데 한사람만이 합격의 기쁨을 맛보았다.그는 모든 질문에 “아니오”라고 대답한 사람이었다.그 회사는 정직한 사람,즉 자기의 부족함을 솔직하고 담담하게 고백할 수 있는 용기있는 사람을 원했던 것이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약 4:10)

어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미워하거나 자신을 지나치게 비하시키지만 그 반대로 자신을 지나치게 과신하고 우쭐대는 교만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자아 증오와 자기 비하도 바람직하지 못하지만 자기 과신과 과장은 더욱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전자보다 후자가 남에게 주는 피해가 더 크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예수님 앞에 섰을 때 자기의 참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사람이 거울 앞에 서야 자신을 볼 수 있는 것처럼 예수님 앞에 섰을 때 비로소 내면에 있는 진정한 자신을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자신의 발견
 
카네기 성공론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해럴드 애보트는 사업에 실패해 전재산을 날렸다. 여기에다 빚까지 지게 되었다. 그는 낙심해서 거리를 걷고 있는데 맞은편에서 다리가 없는 장애인이 걸어오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 사람은 롤러스케이트용 바퀴를 단 작은 나무판자 위에 앉아서 양 손에 쥔 나무토막으로 연방 땅을 찍어가며 오고 있는 것이었다. 애보트가 그의 모습을 똑바로 보게 되었을 때 그는 마침 거리를 횡단하여 보도 위로 올라오고자 자기 몸을 약간 들어 올리더니 판자를 비스듬히 잡아 드는 것이었다. 그 순간 애보트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싱긋이 웃으면서 쾌활한 목소리로 애보트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참 좋은 날입니다”
애보트는 그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동안 그 자신이 얼마나 부자인가를 깨달았다. 내게는 두 발이 있다. 걸을 수도 있지 않은가.애보트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이 사람은 몸이 불편하면서도 행복하고 명랑하며 자신을 잃지 않고 사는데 하물며 건강한 내가 그럴 수 있느냐는 생각을 하니 절로 용기가 생겼다. 그는 이 일로 인하여 인생을 새롭게 살기로 결심했다. 애보트는 다음과 같은 말을 욕실 거울에 붙여두고 매일 아침 면도할 때마다 그것을 큰소리로 읽었다.
“나는 신발이 없음을 한탄했는데 나는 거리에서 발이 없는 사람을 만났다”

 

 
 
이사야의 대 발견
 
사 6:1-8

구약의 이사야서는 구약의 복음서라고 불리워집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이사야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가장 많이 그리고 정확하게 예언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의 저자이며 대 선지자인 이사야는 웃시야 왕이 죽자 나라를 근심하며 성전에 들어가 기도하다가 중대한 사실 몇 가지를 발견했습니다. 이것은 중대한 일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발견해야 될 것들입니다. 이것이 무엇인가 하면

1. 살아계신 하나님을 발견했습니다
본문 말씀에 보면(6:1-3)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창화하며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하는 이러한 엄숙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여기에 보면 이사야는 지금까지 이념(理念)과 사상(思想)으로 하나님을 알아 왔는데 성전에 들어가 기도하다가 어느 순간에 살아 계신 지극히 거룩하시고 엄위하신 하나님을 발견했습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여 주며 세 번 말한 것은 성부, 성자, 성신 삼위(三位)의 하나님을 가리키심 입니다.
본문 8절에 보면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우리를 위하여" 라고 단수를 쓰지 않고 복수를 쓴 것은 성부, 성자, 성신, 이 세 삼위(三位)를 의미하는 복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어떤 모습인가 하면 스랍들이 날개가 여섯이 있는데 둘로는 얼굴을 가리우고 둘로는 발을 가리우고 둘로는 날면서 외쳤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하면 두 날개로 얼굴을 가렸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드릴 때 겸손한 마음으로 예배드려야 합니다. 아무리 학식이 많고 재산이 많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무참한 보잘 것 없는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예배드려야 합니다.


두 날개로 발을 가렸다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과 조심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진실되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조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성도들은 교회에 나와서 조심해야 하지만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특별히 조심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어떤 학생은 성전에 들어와서도 극장에 들어온 것처럼 행동을 하고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뛰어다닌다거나 축도도 다 끝나지 않았는데 몰래 빠져 나가고 소곤소근 얘기하고 이런 모든 것은 예배드리는 올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또 복장도 엄숙 단정해야 합니다. 짧은 치마나 소매 없는 옷을 입는다 거나 하는 것은 조심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두렵고 조심스런 마음을 항상 가져야 할 것입니다.


또 둘로는 날았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순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치 않는다면 예배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특별히 스랍들이 얼굴을 가리고 발을 가리고 날았던 것처럼 우리는 예배하는 태도에서 겸손하고 조심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말씀에 순종해 야 합니다.
참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겸손할 수밖에 없고 두려움으로 조심할 수밖에 없고 그의 말씀 에 순종하는 외에는 다른 것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몇 해 전에 우리 교회에 오셨던 인도의 후랭크(Frank) 목사님께서 최근에 또 오셔서 제가 부흥회 인도하는 곳에서 함께 은혜 받고 밤을 지새며 말씀을 나누는 중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이 기억납니다. 보통 영어로 목사님은 "미니스터"(minister) 또는 "패스터"(pastor)란 말도 있고 "레버랜드" (reverend)란 말도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분을 "레버랜 후랭크"(reverend Frank)라고 불렀더니 그분께서 그렇게 부르지 말고 "패스터 후랭크"(pastor Frank)라고 부르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왜 그러느냐 하였더니 "레버랜드"란 말에는 겅외한다는 뜻이 있는데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께나 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은 이런 칭호를 받을 자격이 없다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일찍이 하나님께서 귀히 쓰셨던 하나님의 종들이나 성도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계기가 있었고 그리고 자기가 추악한 죄인임을 발견하고 자기의 사명을 발견했던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사야도 예레미야도 모세도 베드로도 바울도 모두 하나님을 만나고 자기를 다시 발견하고 사명을 받았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 나오시는 이마다 성신의 역사하심 가운데서 어떠한 모양으로든지 살아계신 하나님을 영적으로 만나시는 체험을 하시길 바랍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건성으로 교회에 왔다 갔다 한다면 아무 의미도 없고 이런 생활은 필요 없습니다.

2. 진정한 자기를 발견했습니다
5절에 보면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사야는 지금까지 자기가 과연 죄인인지를 몰랐습니다. 그만하면 자기는 의인이요 거룩한 자요 애국자인줄만 알았는데 하나님을 실상 만나 뵈니까 자기는 추한 죄인이요 특별히 입술이 부정한 죄인임 을 깨달았습니다.
그 때에 스랍 하나가 제단에서 핀 숯불을 가져다가 입에 대주면서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 졌느니라"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 핀 숯불은 성령의 불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자기의

 죄를 발견하되 특히 입술이 부정한 죄인임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불로 소멸함을 받고 악이 제하여 짐을 받았습니다.
일찍이 위대한 종들은 다 깊이 자기가 죄인임을 발견했고 죄사함을 받고 성령의 불체험을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철저하게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밝은 빛을 대하게 될 때 죄인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그가 의인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빛에 가까이 가지 못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레미야 17장 9절에 보면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6장 8절에 보면 "성령이 오시면 죄에 대하여 책망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시편 26편 2절에 보면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마음을 단련하소서" 하였습니다. 시편 139편 23절 이하에 보면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밝은 빛 아래 자신을 비춰서 우리가 얼마나 추악한 죄인임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의인중에 의인이라 불리우던 욥도 자기 스스로 의인인 줄 알았으나 폭풍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 뵙고는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하고 욥기 42장 5절 이하에 고백하였습니다. 성경 중에 죄가 기록되지 않은 사람중 다니엘이 있습니다. 그렇게 흠이 없는 사람도 하나님을 뵈고 나서는 "그러므로 나만 홀로 있어서 이 큰 이상을 볼 때에 내 몸에 힘이 빠졌고 나의 아름다운 빛이 변하여 썩은듯 하였고 나의 힘이 다 없어졌으나 내가 그 말소리를 들었는데 그 말소리를 들을 때에 내가 얼굴을 땅에 대고 깊이 잠들었었으니라"고 다니엘서 10장 8절 이하에 말하였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도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내 몸은 처소에서 떨리는도다"라고 하박국 3장 16절에 말하였습니다. 베드로도 예수님 말씀대로 순종하여 고기가 많이 잡힌 것을 보고 누가복음 5장 8절에 보면 "예수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바울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의인이요 흠이 없는 사람인 줄로 알았으나 다메섹 도상에서 빛 가운데서 주님을 만난 뒤에는 "죄인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하고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사도 요한도 예수님께서 영광을 가리우시고 육신을 입고 계실 패는 예수님 품에 마음대로 기대면서 지내던 사람이었으나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계시록을 받은 때에는 계시록 l장 16절 이하에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같더라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매…"라고 하였습니다.

 
누구나 한번은 자기가 죄인임을 깊이 깨닫고 눈물 흘리며 회개하는 때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사람일수록 자기가 죄인임과 약한 자임을 더욱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으므로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는 자는 예수님도 구원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교회에 들어오시는 분마다 말씀을 듣다가 기도하다가 찬송하다가 어느 순간에든지 하나님의 빛에 접하여 자기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3. 자기의 사명을 발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실 때 이사야는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하고 자원해서 말씀을 선포하는 선지자가 된 것입니다. 특별히 여기서 알아야 할 바는 자원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기 때문에 압력을 가하지 아니하셨고 이사야도 자원(volunteer)해서 하였습니다.
우리들은 누구나 하나님을 위하여 일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전도의 사명, 기도의 사명, 성가대, 교사 사명 물질을 많이 벌어 바쳐야 할 사명 속회를 돌보는 사명 무슨 일로나 어떤 방면으로든지 해야 할 사명이 각각 다 있습니다. 이 사명은 생명보다 귀중한 것입니다.

4. 이사야가 이 중대한 삼대(三大) 발견을 언제 어디서 했습니까?
① 성전에서 했습니다.
교회에서 은혜 받는 것이 가장 정상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하고 말씀하셨습니다.
② 기도하다가 했습니다.
간절히 부르짖고 찾으면 만나주신다고 했습니다. 예레미야 29장 12절 이하에 보면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만나리라"하였습니다. 옛날에 "썬 다싱"이 힌두교도의 집안에서 태어나서 핍박을 받으며 신앙 생활하다가 좀더 확실한 체험을 하기 위해 결심을 하고 골방에 들어가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살아계신다면 나를 만나주십시" 하니 기도하던 3일째 주님을 만났다고 합니다.


어떤 젊은이가 노인과 낚시질 갔다가 그 노인께 하나님을 어떻게 하면 만날 수 있을까요 여쭈었습니 다. 이 때 그 노인은 아무말 없이 그 젊은이 머리를 물속에 집어 넣어 한참동안 숨을 못쉬게 하고 바둥댈 때 꺼내 놓더라는 것입니다. 젊은이는 "왜 이러십니까?"하니까 그 노인 말씀이 "네가 숨을 안쉬니까 견딜 수 없었지. 바로 숨쉬고 싶은 안타까운 심정으로 하나님을 찾고 기도하면 만날 수 있다"하고 말씀하시더랍니다. 여러분 얼마나 매달리고 부르짖으셨습니까? 분명히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다는 체험을 하여야 됩니다.


③ 절망중에 하였습니다.
웃시야 왕은 유대 중흥의 명군인데 교만하여 문둥병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별궁에 거하다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웃시야왕이 살아있을 때는 이웃 나라가 유대를 넘보지 못했으나 이제 유대 나라는 위기에 처하게 됐습니다. 이렇게 되자 이사야는 근심하여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절망 중에 하나님께 기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절망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야곱이 천사가 사닥다리를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본 것도 부모를 떠나서 아무도 없는 광야에서 깊은 고독에 쌓였을 때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야곱이 환도뼈를 꺾고 하나님을 만난 것도 형이 400명 군사를 몰고 죽이려 달려오는 위기에 처했을 때 일인 것입니다. 평안할 때 하나님을 만나거나 하나님의 은혜 받기는 어렵습니다.

인간의 절망은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절망 가운데 낙심하지 마십시요. 절망은 하나님의 기회요 하나님을 만나는 기회요 하늘문이 열리는 기회요 하나님의 축복과 손실이 나타나는 기회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사야 같이 3대 발견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아멘- 

 
 
 
망원경과 현미경
 
망원경으로 우주의 ’나’를 추적해 볼까요?
우주에는 천억 개 가량의 은하기 있고 그 각각의 은하에는 또 천억 개 정도의 별이 있다고 합니다. 거기에다 같은 양의 혹성도 있구요! 그러니 우주의 바다에 떠 있는 별의 총수는 자그마치 100억의 1조 배나 된다고 합니다.
이 지구도 우주에서는 이처럼 한 티끌에 불과하지요. 그런데 ’나’는 이 지구 속의 50억 사람 중의 하나이니 얼마나 작은 티끌 중의 티끌인가요? 이번에는 현미경으로 몸의 ’나’를 추적해 보지요.

사람 중의 하나인 ’나’의 몸은 33조라고 하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많고 많은 세포들에 의해 조직되고 조화되어 생명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정밀한 조직은 ’나’의 머리 속에 있는 대뇌의 표면으로서 여기에 있는 140억 개의 신경세포가 생각하는 기능을 한다고 합니다.
-뭔가 좀 있다고 교만하지 마시오. 망원경으로 본 당신은 티끌 중의 티끌도 되지 못하오.
-뭐가 좀 없다고 풀죽지 마시오. 현미경으로 본 당신은 엄청난 은하의 공동체이오
 
 
바로 당신
 
어느 여인이 기차역에 도착해서 잡지책과 과자 한 봉지를 샀습니다. 대합실에 앉아 있는데, 한 남자가 옆에 앉았습니다.
그러고는 옆에 놓아둔 과자봉지를 뜯는 것이 아닙니까!
놀랐지만 모른 척하고 과자를 하나 집어 입에 넣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남자가 눈치채고 물러나리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아무 말 없이 과자를 또 집어먹었습니다.
여인은 괘씸해하면서도 아무 말 하지 않고 계속해서 과자를 하나씩 집어먹었습니다. 남자도 말없이 과자를 하나씩 집어먹었습니다. 어느 새 과자는 하나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남자는 마지막 과자를 절반으로 쪼개어 한 쪽을 여자에게 주고, 나머지는 자기가 먹었습니다. 그런 다음 손을 털고 일어났습니다.
‘세상에 저런 강심장도 다 있다니!’
기차를 타고도 그 남자의 뻔뻔스런 모습이 떠올라 기분이 언짢았습니다. 드디어 기차가 출발했습니다. 휴지를 꺼내려고 가방을 여는 순간, 아! 여인의 가방 속에 과자봉지가 그대로 들어 있는 게 아닙니까! 뻔뻔스러운 사람은 바로 자신이었던 것입니다. 나의 뻔뻔함에 내가 속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의 정체성
 
심리학자 칼 융(Carl Jung)의 핵심질문은 '당신은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가' 라는 것이었다: 인생의 중반(35세 이상)을 넘긴 모든 환자들 중에는, 자기 인생의 최후 수단으로 종교적 인생관을 발견하는 문제로 씨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모든 시대의 생명력을 가진 종교가 그 추종자들에게 주었던 무언가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질병에 빠진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 중에 종교적인 인생관을 다시 얻지 못한 사람은 어느 누구도 치유될 수 없었다.(Modern Man in Search of a Soul, New York: Harcourt, Brace, 1993)

이유를 발견할 때까지는 의미 없이 방황하게 되며, 인생이 상실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심리학자 융이 '종교적 인생관'이라고 말한 것은 우리 예수님께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은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 분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자를 초청하시며, 그로 하여금 이 땅에서 '새로운 피조물'을 경험하도록 하신다. 예수님은 당신에게 그 분을 앎으로 당신이 누구인지 발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계신 것이다.
(John K. Bergland, editor, Abingdon Preacher's Annual 1992, p.203.) 

 

 
 
'나만 별다른 사람이라고 느낄 때'
 
요7:53-8:11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는 어떠한가?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느끼는가? 예수님은 어떤 바탕에서 나를 받아주시는가?
오늘 주어진 본문들을 읽다 보면 나를 용납해 주는 것은 나 자신도 아니고 다른 사람들도 아닌 것을 깨닫게 된다. 순간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느낄 수는 있어도' 나를 포함하여 사람들을 통해서는 '내 자신이 온전히 받아들여졌다고' 기뻐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과연 예수님은 나를 어떻게 받아주시는 걸까. 어떤 모습으로 나를 용납하시는 것일까. 그 안에서조차 안식을 누리지 못한다면 어찌할 것인가. 하나님 마저 나를 용납지 않으신다면 어떻게 하나.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이러한 염려를 씻어주신다. 아마도 하나님을 바라보면서도 이러한 염려를 하게 되는 것은 그 동안에 사람들로부터 받은 냉대와 쓸쓸함이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이제 말씀을 보면서 우리의 상처들을 드러내어 놓고 하나님의 치료를 받자.

1. 요한복음 8장의 말씀은 버려진 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에 대해서 무엇을 가르쳐 주는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태도는 예수님과 달랐다. 대조되는 면들은 무엇인가?
유대의 율법 전문가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여러 모양으로 예수님을 시험했다. 그럴 때마다 그들이 들먹였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사회에서 소외된 자들이었다: 세리, 죄인, 과부, 병인, 이방인, 어린아이들, 여인들...(참조, 마 11:19; 눅 7:34). 그들은 백성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는 것을(눅 21:37-38) 견뎌할 수 없었다. 자기들의 율법의 테두리에서 백성들이 벗어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고 말하는 편이 더 낫겠다. 실로 예수님은 잃어버린 양 한 마리도 찾아 나서는 목자였건만(눅 15:4-6) 율법을 꽤나 안다고 하는 유대 지도자들은 '죄인 한 사람을 찾아내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드디어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백성들 가운데로,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붙들어 세웠다. 의분(義憤)으로 씩씩대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수치로 인해 어찌할 바 몰라하는 그 여인, 가르침을 듣다 말고 뭔 일인가 의아해 하는 백성들 그리고 사람들의 모든 시선이 집중되어 있는 예수님... 과연 예수님은 이 갑작스런 상황을 어찌 해결하실 것인가.

모세의 율법을 따르면 그런 여인은 돌로 쳐야했지만(레 20:15), 유대인들의 손으로 사형을 집행하는 것은 로마법을 어기는 것이었으니, 그 여인을 놓으라 하면 율법을 어기는 것이 되고 돌로 치라고 하면 로마법을 어기게 되는 딜레마에 예수님은 놓이게 되었다.
율법을 정치란 덫에 걸어 예수님 앞에 내세웠을 때 예수님은 그 문제를 인간의 본질(nature)의 문제로 바꾸어 그 때부터의 상황을 인도해 가셨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7절).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은 답변 앞에서 누가 감히 돌을 집어 들 수 있었겠는가. 조금 전까지는 화통(火筒)을 집어삼킨 듯 부릅뜬 눈알로 의의 연기를 뿜어내던 인간들이 그 질문 앞에 꼬리를 내리는 꼴이란...


그렇게 자기 의를 주장하는 선봉에 '믿음 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서있다면 이것이야말로 하나님 보시기에 가관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하나님은 분명한 목소리로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라고 우리 귀에 들려주셨다(벧전 4:17). 심판은 딴 동네부터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여겨왔던' 사람들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그들이 다른 사람도 아닌 '하나님'을 대신하여 그토록 판단해 왔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을 먼저 손대시는 것은 당연하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마 7:1)고 말씀하신 것은 사람들로부터의 비판을 받는(be judged) 문제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비판 곧 '심판'을 당하는 것을 경고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갑작스런 질문을 받으시고는 모든 시선이 모아진 앞에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를 쓰셨고,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말씀하신 후에도 다시 몸을 굽혀 쓰던 일을 계속하셨다. 그리고는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나가버렸다. 예수님의 말 때문만 아니라 또한 땅위에 써진 그 내용들로 인해서도 사람들은 뒷걸음질 쳤다고 본다. 무엇이 쓰여져 있었을까. 아마도 십계명이 아닐까싶다. 특히 5계명부터 사람들 간의 관계를 규정짓는 율법의 말씀을 하나씩 쓰면서 사람들로 더 생각하게 하셨다고 본다. 죄 없는 자라고 생각했던 자들로 하여금 율법의 말씀 앞에서 자신들을 돌아보게 하신 것이다.

인간의 의(義)라는 것이 어쩌면 그렇게 야비하고 비굴하고 추악하고 '상대적'일 수 있는지... 사람 앞에서야 다 자기가 옳지 누가 자기 틀리다 할 사람이 있겠는가마는 '하나님 앞에서'야 어떤 사람이 자기 본질과 상태를 내세우며 여전히 깨끗함을 주장할 수 있겠는가. 그 야비한 상대적 의(義)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보다 못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궁지에 몰아넣고 상처를 주고 외롭게 하고 있는가.
'버려진' 사람들의 쓸쓸함과 고독은 '인간의 의'가 상대의 마음에 저질은 살인이다. '버려졌다'고 할 때 '경제적으로 불쌍한' 처지만을 떠올릴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인간 관계로 인해 버려진 모든 모습이 다 포함된다.


예수님은 이 간음한 여인을 어떻게 대하셨는가. 예수님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시고 여인을 보내셨다(11절). 그렇다면 예수님은 모든 죄에 대해서 이렇게 응대하시는가. 결코 아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에게서 죄를 간접적으로 지적 받고 사함 받지도 못한 채 뒷걸음쳐 달아났지 않은가. 또한 예수님은 열매 없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하시지 않았는가(마 12:34). 우리 예수님은 결코 죄 앞에서 유하신 분이 아니었다. 그렇담 이 여인은 왜 죄를 지적치 않으시고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하시며 보내셨는가.


이것은 예수님이 1:17의 말씀을 이루려하신 것이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그것도 다름 아닌 그 여인의 마음 안에서 이 말씀을 이루셨다. 예수님은 그저 그 여인을 '보내신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에게 은혜와 진리가 있다는 사실을 그 여인의 마음에 새겨 보내셨고, 그 때부터 그 여인은 죄사함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인격의 만남'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버려진 자들의 '사정'을 알려하기보다 버려진 상태에 질겁하고 도망치거나 손가락질하기가 일쑤이다. 예수님은 그러지 않으신다. 물론 버려진 자들이라고 죄가 없고 다 옳은 건 아니다. 그들도 정죄하자면 얼마든지 정죄 당할 수 있는 자들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정죄'에 있지 않고 '은혜와 진리'로 초대하시는 데에 있기 때문에 그들의 죄를 지적하시되 율법의 기준으로서가 아니라 당신의 '인격 안으로 불러들이시면서' 하신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는 말씀은 이제까지 지은 죄에 대한 방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의 회개와 새 출발의 선물이다.
진리는 '긍휼'과 만나고 의는 '화평'과 입맞춘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셨다(시 85:10).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가르침이 진리였고 의였다면 그것이 긍휼과 화평의 결과를 낳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 외식하는 믿음의 모습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태도를 따른다고 한다면 그들이 아는 진리만큼, 그들이 품은 의(義)만큼 삶에는 긍휼과 화평이 나타나야 할 것이다. 우리로 인해 세움 받은 자보다 버림받은 자가 더 많다면, 아니 버림받은 자가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나를 긍휼히 여겨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나와 화평의 관계를 가져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은 외식이다. 그 외식을 버리고 다시 설 때까지는 결코 하나님은 우리의 요구들을 들어주자고 당신의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으실 것이다.

2. 빌립보서 4:6-7과 요일 1:9는 예수님의 용납과 위안을 확증해 주는 약속을 담고 있다. 약속들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약속에 따르는 조건들을 행해 보았는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는 말씀과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요일 1:9a)이란 말씀은 하나님의 응답이 오기 이전에 우리편에서 요구되는 행동이다. 과연 어떤 응답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는 것'(빌 4:7) 과 '미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이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시는 것'(요일 1:9b)이다.
이 둘은 서로 떼어질 수 없는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지키시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은 불의하고 죄를 품은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마음과 생각이다. 기도와 간구로 구할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풀어내면 거기에는 우리의 바라는 바의 내용만 마음을 헤치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이제껏 깨닫지 못했던, 아니 깨닫고 있었지만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미처 진상으로 드러나지 않았던 모든 숨겨진 더러움이 드러나고 그제야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지키실 만한 참 내 마음과 생각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이로 보건대 하나님의 용납과 위로는 우리의 '중심의 향방'에 있다고 하겠다. '누가' 과연 나를 위로하실 자인가, 누가 과연 내 염려를 받아주실 자인가, 그것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그래야 모든 것을 맡겨 버릴 수 있지 않겠는가(벧전 5:7). 지금껏 고민을 끌어안고 있다면 또 혼자만의 문제를 안고 끙끙 앓고 있다면 그것은 문제의 해결책을 찾지 못해서가 아니라 문제를 맡겨버릴 대상을 '향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사야 26장 3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주께서 심지(心志)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우리 중심에는 항상 주(主)가 의뢰자로 계셔야 한다.

평강이 임하지 못하는 것은 주님이 아니 계셔서가 아니라 우리의 '심지'가 이러 저리 흔들려서 주님께로 초점을 맞추지 못하기 때문이다. 혹은 '마음의 뜻'만 견고하고 주님을 의뢰함은 없기 때문이다. 후자는 특별히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모습이다. 전자의 예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요한복음 5:1-9가 그것을 얘기해 준다.


병을 안고 삼십 팔 년을 살아왔다는 것은 실로 만고의 세월을 보낸 것이다. 그 사람의 문제는 그 오랜 세월동안 병을 고쳐줄 대상을 잘못 여기고 바라왔다는 데에 있다. 그가 바랐던 것은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었다. 이것마저도 문제 해결책을 찾은 것이지 인격을 찾은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대뜸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하셨다. 이제까지 죽는소리하며 누워 하소연하던 그 병인은 그 소리에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갔다. 이것도 간음하다 잡혀왔던 여인의 경우처럼 예수님께서 병인의 죄를 다루기보다는 사람의 형편을 먼저 낫게 해 준 예라고 하겠다. 이 사람이 죄가 없어서였는가. 아니다. 14절에 보면 후에 예수님이 그 사람을 만나서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는 말씀을 듣게 된다. 그러면 이 사람의 경우를 통해서 예수님이 가르쳐 주고자 하신 것은 무엇인가. 특별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는 말 다음에는 '이 날은 안식일이니'라는 말이 붙어 나오는데 여기에 우리가 찾는 답이 있다.


마가복음 2:28에서 예수님은 "이러므로 인자(人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고 하셨다. 무엇이 '이러므로'인가. 그것은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님으로'(27절)이다. 무슨 얘기인가. 지금까지 사람들은 많은 규율로 사람들을 얽맸다. 안식일이라고 하면 쉬어야만 하는 것을 생각했고, 쉬기 위해서 무한히 많은 규정들을 만들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안식일'의 노예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었지 사람을 묶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사람을 위해 있는 그 안식일마저도 정작 주인은 사람이 아니라 '인자' 곧 예수 그리스도임을 주님은 말씀해 주셨다. 이는 우리의 안식의 근원이 어디인지를 분명히 말씀해 주신 것이다.


우리의 안식의 근원은 어떤 규율도 아니고 우리 자신도 아니고 주님이시다. 삼십 팔 년 된 병인은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 이 땅이 줄 수 없는 생명을 맛보았다. 예수님이 아니었으면 그의 이 땅에서의 삶은 병자로 마치는 것이었는데, 그에게 있어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낫게 된 것은 이 땅의 삶이 아니라 새 창조의 삶이나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에 사망에서 생명으로 변하는 역사를 체험하고 또 예수님이 다시 만나 주셔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는 말씀으로 이전의 죄를 사해주신 사실을 깨닫게 된 그 병인이었던 사람은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15절)는 분명한 고백을 하기에 이르렀다. 자기가 바라볼 대상을 드디어 찾은 것이다.

 그 이후의 이야기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생각건대 그가 예수님과 인격을 나누는 자가 되지 않았겠는가. 여느 병인들과는 달리 그토록 목말라 자기를 도와줄 대상을 삼십 팔 년 동안이나 찾던 그가 자기의 삶을 근본으로 변화시켜주신 예수님을 쉽게 버렸겠는가. 예수님께서 먼저 찾아와 주신 은혜가 있는 그가 그 은혜를 저버렸겠는가.

우리는 우리 몸을 던져 맡길 대상이 있는 자들이다. 주님은 우리의 위로이며 신뢰할 자이시다. 그 분과의 대화 단절을 가지지 말 것이다. 그 분 앞에서의 고백에 회칠을 하지 말 것이다. '나아서 자리만 들고 걸어갈 것'을 바라지말고 그렇게 해 주실 수 있고 또 지금까지 그 은혜를 베풀어 주셨던 분이 '예수'라는 고백을 하며 살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 된 자들의 마땅히 지녀야 할 모습이지 않겠는가. 

 

 

 
 
35세에 깨달은 것
 
인생에서 제가 깨달은 한 가지 사실은,
삶이란 무엇인가를 깨닫기 전에
우리는 35세를 넘어버린다는 겁니다.
처음에 나는 빠른 차가 있으면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포르셰를 샀죠.
그 다음엔 집이 있었으면 했습니다. 그래서 집을 샀죠.
그런데 그 다음에 비행기가 한 대 있으면
행복할 수 있겠다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비행기를 한 대 샀지요.
그러고 난 다음에 나는 깨달은 것입니다.
행복은 결코 돈을 주고 살 수 없다는 것을..."

괴테의 말대로 "가진 것이 많다는 것은
그 뜻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무거운 짐일 뿐"이었던 것이다.
- 공지영의《수도원 기행》 중에서 -

* 미국의 골프 영웅, 할 서튼이 25세에 세계 골프를 석권하고 10년간 세 차례의 이혼을 하며 슬럼프에 빠졌다가 35세에 재기하면서 했다는 말입니다. "행복은 돈으로 살 수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기까지 그에게 35년의 세월과 인생 경험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나마 더 늦지 않은 게 다행입니다. 
 
 
잡초도 필요하군
 
어느 날 한 농부가 자기 마당에서 잡초를 뽑고 있었다. 얼굴에서는 굵은 땀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그는 잡초를 뽑으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이 몹쓸 잡초만 없으면 이런 고생을 안 해도 되고 밭도 깨끗할 텐데, 하나님은 왜 이런 쓸모 없는 잡초를 많이 나게 하셨을까? 그때 마당 한쪽 구석에 뽑혀진 잡초가 농부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농부 아저씨는 우리가 얼마나 고마운 존재인지 모르고 있군요.


우리가 진흙 땅 속으로 뿌리를 뻗침으로 흙을 갈아주고 있는데, 우리를 다 뽑아 버리면 누가 흙을 갈아줍니까? 또 비가 내릴 때는 우리 잡초들이 바람이나 모래, 먼지가 일어나지 않도록 방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당신을 잘 지켜 왔습니다. 만일 우리 잡초가 없었다면 당신이 꽃을 키우려고 해도 비가 흙을 씻겨 내리게 하고, 바람이 흙을 날려서 당신을 더 곤란하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꽃이 아름답게 피었을 때 우리의 공로도 좀 생각해 주었으면 합니다. 농부는 잡초의 말을 들은 후부터 마당에 있는 잡초를 소홀히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 만물 중에 필요가 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 이스라엘 역사에는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블레셋, 애굽, 앗수르, 바벨론 등 이방 나라들이 항상 있었다. 이방 나라들이 이스라엘을 침공하여 괴롭힐 때마다 하나님께서 지켜보고 계셨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방 나라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선민 이스라엘 민족을 올바로 세우시기 위해서였다. 즉 사랑의 채찍으로, 경고의 몽둥이의 도구로 이방 나라를 사용하신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그림자를 주신 이유
 
어느 날 우리 반 학생들을 데리고 운동장에 나가서 그림자에 대해 수업을 하던 중이었다. 학생들과 함께 여러 가지 그림자 모양을 만들던 중에 갑자기 나에게 이런 의문이 생겼다.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에게 그림자를 주셨을까?” 그림자에 대한 수업을 다 마치고 학생들을 보낸 뒤에도 그 질문은 계속 내 마음을 맴돌고 있었다.잠시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이런 대답을 주셨다. “그림자는 바로 너희들의 죄다. 내가 그림자를 너희 몸에 붙여둔 이유는 그 그림자를 보면서 너희들이 죄인임을 기억하라는 뜻이다.” 그 시커먼 그림자, 그것은 바로 나의 검디 검은 죄였던 것이다. 영원한 빛 되신 그리스도 앞에 설 때 우리가 죄인임을 깨달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세상이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사람들이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는 이유도 날이 흐리고 어두우면 우리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는 것과 같은 이유일 것이다.
해가 가장 높이 떴을 때 그림자가 가장 짧은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가장 높이 영광 받으실 때 우리 죄에 대한 부담감도 가장 적어질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높이 영광 받으시게 하는 것, 그것은 바로 우리를 위한 일이다. 그림자 같은 죄를 없애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가 빛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나는 오늘도 나의 그림자를 보면서 내가 죄인임을 깨닫는다. 

 
 
 
죄수의 뉘우침
 
옛날 어느 교도소에 교화를 가는 성직자가 계셨습니다.
그분은 많은 죄수들을 선교하는 데 일생을 바치셨죠.
근데 이 분은 죄수들을 매일 찾아가면서도 매일 처음본 사람처럼 반갑게 따뜻하게 인사를 건네고 늘 그 사람에 대해 알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어느날 사형수 한명이 물었습니다.
" 아니 맨날 와서 얼굴보면서 왜 인사는 또하고 또하는 거요? 짜증나게"
그러자 그 성직자가 말했습니다.
" 어제본 당신은 어제의 당신이고
오늘 내가 본 당신은 완전히 새로운 오늘의 당신입니다.
매일매일 변화하는 당신이 반가워서 매일 새로운 마음으로 인사를 하는 겁니다"
이 말에 감명를 받은 죄수는 크게 깨닳음을 얻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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